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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내공만땅)중1 소개
cwpa**** 조회수 9,607 작성일2010.03.14

저 맨유에 대해 소개할거거든요

 

유래는 서론에 들어가게 해주시고..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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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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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편집]

초창기(1878년 ~ 1945년) [편집]

1905–06 시즌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 이때 1부 리그로 승격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역사는 1878년 랭커셔 요크셔 철도의 뉴턴 히스 지부 실업팀인 뉴턴 히스 LYR F.C.(Newton Heath LYR F.C.)의 설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9] 유니폼은 지금과는 달리 녹색과 노란색을 좌우 대칭으로 넣은 유니폼이었다. 철도 지부와의 관련을 끊고 “Newton Heath F.C.”로 명칭을 변경, 독립적인 클럽으로 변모하였고, 풋볼 리그(The Football League)에도 참가하였다. 1902년 2500파운드의 부채로 인해 클럽이 위기에 빠졌는데, J. H. 데이비스의 투자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클럽의 주장인 해리 스태포드가 그의 애견 세인트버나드를 기금 모금 행사에서 자랑했고 데이비스는 개를 사기 위해 스태포드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클럽의 주장은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 데이비스가 클럽에 투자하기를 설득했다고 한다. 한편, 클럽의 명칭과 관련하여 “Manchester Central”과 “Manchester Celtic”이 제안되기도 했는데, 이탈리아 이민자 Louis Rocca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제안했고 그것으로 결정되었다. 1902년 4월 26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의 개명이 확정되었다.[10] 데이비스는 기존 유니폼의 색인 녹색과 금색 대신에 붉은색과 흰색으로 바꾸었다.

1902년 9월 28일 제임스 웨스트가 감독직을 사임한 이후 어니스트 만그날이 사무장으로 임명되었고 1부 리그로 팀을 승격시킬 임무를 맡게 되었다. 첫 시도는 디비전 2의 5위로 그쳤다. 만그날은 클럽에 새 얼굴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해리 모거와 딕 덕워스 존 피켄 등을 영입했고 400파운드를 들여 찰리 로버츠를 데리고 왔다. 결국 2부 리그 1905-06 시즌에서 2위를 차지하여 1부 리그로 마침내 승격하였다. 1908년에는 클럽 역사상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FA컵을 최초로 우승하였다. 1910-11 시즌을 우승하였고 그 와중에 올드 트래포드로 홈구장을 이전하였다. 1910년 2월 19일 리버풀 FC를 상대로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첫 경기를 치렀다. 1922년에는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일을 겪기도 하였는데 1925년에 1부 리그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다시 1931년에는 강등하는 등 요요 클럽(승격과 강등을 반복하는 팀)으로 불리기도 했다. 1938-39 시즌에서 14위를 차지한 이래로 1부 리그에 안정적으로 머물기 시작했다.

버즈비 시대(1945년 ~ 1969년) [편집]

1945년 매트 버즈비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등장하면서부터 자신의 선수 선발권 및 선수 이적, 훈련 방법 등에서의 권한을 요구하였다(그가 바로 직전에 머물렀던 리버풀에서는 이런 요구가 묵살되고 해임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고 그에게 권한을 맡기었다. 버즈비가 성사시킨 첫 계약은 선수가 아니라 수석 코치 지미 머피였다. 1947, 48, 49년 2위를 차지하고 1948년에는 FA컵을 우승하는 등 상당한 성적을 거두었다. 버즈비는 클럽이 육성하고 있는 유스 팀 선수들에 주목했고 1956년에 팀 평균 나이가 불과 22세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시즌 103골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어린 선수를 중용하는 정책은 클럽 역사의 전환점을 가져다주었고 이 선수들을 ‘버즈비의 아이들’(Busby Babes)이라고 불렀다.[11] 버즈비는 버즈비의 아이들과 함께 공격 축구로 맨체스터의 팬층을 확고하게 구축했다.[12]

뮌헨 비행기 사고를 추모하기 위해 올드 트래포드에 걸린 시계.[13]

1958년 2월 6일 뮌헨 비행기 참사가 터졌다.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유러피언 컵 준결승행을 확정하고 귀국하던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중간지 뮌헨에서 연료 공급을 받고 이륙을 하는 도중 이륙 실패로 공항의 경계벽과 충돌하였다. 이 사고로 선수 8명과 코칭스태프를 포함해 총 15명이 사망하였다. 2번의 이륙 시도가 이미 있었고, 3번째 시도에서 이륙에 필요한 충분한 속력을 내지 못해 이륙에 실패했다. 버즈비 감독도 비행기에 탑승하여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나 구조되었다. 7명의 선수는 사고 당시 사망했고, 중상을 입은 선수 한 명은 2주일 후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고 이후 유러피언 컵을 포기할 것이라는 루머가 나돌았지만, 부상 중인 버즈비를 대신해 지미 머피가 임시 감독직을 맡고 대회에 계속 참가하였다. 참사에도 불구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FA컵 결승전까지 올랐다. 196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버즈비가 다시 팀을 정비하였고 데니스 로 등을 영입하고 젊은 선수 육성에 주력했다. 그 결과로 조지 베스트라는 맨체스터의 영웅을 탄생시켰다.[14] 1963년 FA컵을 들어 올렸으며, 1964년 시즌에는 2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1965년과 1967년에는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으며, 1968년에는 벤피카를 4:1로 꺾고 드디어 유러피언 컵을 들어 올렸다.[15] 이는 뮌헨 비행기 사고 10년째가 되는 해였고 잉글랜드 클럽 사상 최초로 해당 대회를 우승하였다. 1960년대의 버즈비 시대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유럽 올해의 선수(발롱도르)를 3명이나 배출하는 기록을 올렸다. 1964년에는 데니스 로, 1966년에는 바비 찰턴, 1968년에는 조지 베스트[16]가 수상자였다. 1969년 버즈비는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리저브팀 감독이자 전 맨유 선수였던 윌프 맥기네스(Wilf McGuinness)가 감독직에 올랐다.

1969년 ~ 1986년 [편집]

버즈비의 시대는 뒤로하고, 새로운 감독 윌프 맥기네스(Wilf McGuinness) 체제에서 1969-70 시즌에 실망스럽게 8위에 머물렀고 1970-71 시즌에는 실망스러운 시즌 초반 성적으로 결국 윌프 맥기네스는 리저브팀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사임했던 버즈비가 6개월간 팀을 잠깐 맡았는데 결국 1971년 여름에 그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셀틱을 유러피언 컵 정상에 올려놓은 존 스테인(Jock Stein)이 새로운 감독으로 취임할 뻔했으나 계약 성사 직전에 그의 포기 의사로 결국 프랭크 오파렐(Frank O'Farrell)이 감독직에 올랐다. 하지만 18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1972년토미 도허티(Tommy Docherty)가 그의 뒤를 이었다. 도허티는 팀을 강등 위기에서 구했으나, 1974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결국 강등되었다. 이 무렵에 골든 트리오라고 불렸던 조지 베스트데니스 로, 바비 찰턴이 팀을 떠났다.

강등 직후 다음 시즌에 곧장 1부 리그로 복귀하였으며, 스티브 코펠(Steve Coppell, 현 레딩 감독)이 이 시즌 막바지에 데뷔하였고 FA컵 준우승을 차지했다. 1977년에는 리버풀을 2:1로 꺾고 FA컵을 들어 올렸다. 도허티의 이와 같은 성공과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불륜 사건에 휘말려 해임되었다. 데이브 섹튼(Dave Sexton)이 1977년 여름에 그의 자리를 이었고 수비적인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버즈비와 도허티의 공격 전술을 선호했던 서포터들로부터 인기를 잃었고 우승에는 못 미치는 성적으로, 해임 직전의 7연승에도 불구하고 1981년에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론 앳킨슨(Ron Atkinson)이 감독 자리에 올랐고 웨스트 브롬에서 브라이언 롭슨(Bryan Robson)을 당시 잉글랜드 이적료 기록을 깨면서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데리고 왔다. 이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83년, 1985년 FA컵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1985-86 시즌 리그 초반 10연승에도 불구하고 우승을 리버풀에 내주고 말았고 다음 시즌에는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강등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결국 앳킨스는 성적 부진의 책임으로 해임되었다.

퍼거슨 시대의 개막(1986년 ~ 1998년) [편집]

알렉스 퍼거슨 감독

알렉스 퍼거슨애버딘에서 맨체스터의 감독으로 왔고, 앳킨슨의 뒤를 이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직에 올랐다. 그의 첫 시즌 성적은 11위였다. 다음 시즌인 1987-88에는 2위라는 성적을 거두었고 브라이언 맥클레어(Brian McClair)가 조지 베스트 이후로 오랜만에 시즌 20골을 달성했다. 그러나 다음 두 시즌 유나이티드의 성적은 좋지 않았고 팬들의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1990년에는 해임 위기에까지 몰렸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크리스털 팰리스를 FA컵에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90-91에는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에서 스페인 챔피언 FC 바르셀로나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는 실망스러운 결과로 리즈 유나이티드에 리그를 내줬다. 한편, 1991년에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4700만 파운드의 주식 평가를 받아 대중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17]

1992년 11월 에릭 칸토나의 합류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는 활기가 돌았다. 라이언 긱스를 비롯한 폴 인스, 데니스 어윈, 개리 팰리스터와 함께 1992-93 시즌 우승을 이끌어 1967년 이후로 20여 년 만에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노팅엄 포레스트(Nottingham Forest)로부터 이적해 온 로이 킨의 활약으로 1993-94 시즌에 최초로 리그컵과 FA컵을 동시에 들어 올리는 더블을 달성하였고, 로이 킨은 주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994년 1월 20일 과거 맨유에 영광을 안겼던 버즈비가 사망,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슬픔을 맛보기도 했다.

1994-95 시즌에 에릭 칸토나인종 차별적 모욕을 한 크리스털 팰리스의 서포터 매슈 심슨을 이른바 쿵푸 킥으로 가격해 8개월의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시즌에서 마지막 시즌 경기를 비기고 FA컵 결승전에서 에버턴에 패배함으로써 리그와 FA컵에서 모두 2위에 머물렀다. 팬들은 퍼거슨 감독이 주요 선수들을 팔고 데이비드 베컴폴 스콜스, 게리 네빌, 필립 네빌과 같은 유스팀 선수들을 중용하는 방침에 격분하였다. 하지만 이 선수들은 곧장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발탁되었고 놀라운 플레이를 선보이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1995-96년에 더블을 안겼다. 잉글랜드 클럽으로서는 더블을 두 번 했던 팀은 없었기에 그 기록을 ‘더블 더블’(Double Doubl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96-97년에는 시즌 우승을 차지했고 에릭 칸토나는 30세의 나이로 축구 선수로서 은퇴를 선언했다.

트레블(1998-99) [편집]

트레블 트로피 - 리그, 챔피언스리그, FA 우승컵 (좌측부터)

1998-99 시즌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프리미어리그, FA컵,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함으로써 잉글랜드 프로축구팀 역사상 한 시즌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이 되었다. 12월 19일 미들즈브러 FC에 2:3으로 패한 이후 33경기 동안 무패행진을 달렸으며, 토트넘 홋스퍼프리미어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2:1로 꺾고 79점의 승점을 기록, 애스턴 빌라를 1:0으로 꺾고 78점의 승점을 기록한 아스널을 1점 차이로 따돌리고 우승하였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프리미어리그 우승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18]

FA컵에서는 준결승 2차전에서 로이 킨오베르마스에게 거친 태클을 가하며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한 어려운 상황에서, 골키퍼 슈마이헬데니스 베르흐캄프페널티킥을 막아냈고 연장전에 돌입하여 라이언 긱스가 하프라인에서부터 수비수 4명을 제친 후 환상적인 골을 넣으며 결승에 극적으로 진출하였다. FA컵 결승전에서는 폴 스콜스테디 쉐링엄의 골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2: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별 리그에서 FC 바르셀로나와 두 차례의 3:3 무승부를 기록하며 명승부를 펼쳤고 맨체스터가 토너먼트에 진출할 수 있었다. 8강에서는 인터 밀란을 맞아 승리를 거두었고 4강에서 유벤투스와 만났다. 1차전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경기에서 긱스의 골로 1:1로 비긴 맨유는 2차전에서 전반 필리포 인자기에게 연속 2골을 허용하여 탈락의 위기에 몰렸다. 베컴의 코너킥을 로이 킨이 헤딩골로 연결해 한 골을 만회한 맨유는 후반이 시작되기 전 드와이트 요크가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이후 다시 한번 요크가 수비수 두 명을 제친 후 골키퍼까지 따돌렸고 이것을 앤디 콜이 마무리지으면서 3:2로 승리, 결승에 진출했다. 캄프 누에서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접전 끝에 이른바 누 캄프의 기적을 일구어 내며 2:1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마리오 바슬러에게 한 골을 허용해 0:1의 상황에서 정규 시간이 종료되고 주어진 추가 시간 3분 동안, 교체 선수로 투입된 테디 쉐링엄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2골을 몰아서 넣으며 트레블(삼관왕)을 달성하였다. 당시 UEFA 회장이었던 레나르트 요한손은 경기 종료 2분 전에 VIP 박스에서 나와 바이에른 뮌헨의 리본으로 장식된 유럽컵 트로피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러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역전승을 거두었고 리본을 급히 교체하는 일이 있었다.[19] 트레블의 달성으로 알렉스 퍼거슨에게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가 수여되었으며, 이후 열린 인터콘티넨탈 컵에서 팔메이라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트레블을 달성하는 데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육성한 유소년팀 출신 선수들의 활약이 빛났다. 베컴을 비롯한 폴 스콜스,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 게리 네빌, 필립 네빌 등이 큰 활약을 펼쳤다. 또한 야프 스탐 및 드와이트 요크, 앤디 콜, 올레 군나 솔샤르 등 이적생들을 적절히 조화되어 활약을 펼쳐주었으며, 테디 셰링엄이나 데니스 어윈 등 베테랑의 활약도 빛났다.[20]

트레블 그 후 (1999년 ~ 2007년) [편집]

2000년, 2001년 시즌에는 프리미어리그에서 각각 91점, 80점의 승점으로 아스널을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챔피언스리그 우승에는 실패하였다. 2000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G-14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한편 퍼거슨은 챔피언스리그에서의 좋은 성적을 위해 예전보다 수비적인 전술을 채택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2001-02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자서전 파동으로 팀에 분란을 일으켰던 트레블 멤버 야프 스탐SS 라치오로 이적시키는 우여곡절 끝에 아스널리버풀에 이어 3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시즌은 83점의 승점으로 아스널을 또다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2003-04 시즌을 앞두고 유소년팀에서부터 계속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였고 프리킥과 세트 피스 상황에서 큰 활약을 해왔던 데이비드 베컴알렉스 퍼거슨 감독과의 불화로 팀을 떠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2003년 2월 15일 홈에서 열린 FA컵 5라운드 아스널전에서 0:2로 패한 후 라커룸 내에서 퍼거슨 감독이 축구화를 걷어찼는데 공교롭게도 베컴의 얼굴에 맞아 상처를 입혔고 두 사람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었다. 리오 퍼디낸드는 2003년 12월 도핑 테스트에 불참해 잉글랜드 축구협회로부터 8개월의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아 큰 논란을 촉발시켰다. 퍼디낸드의 공백 속에 리그 우승을 아스널에게 내주었지만 FA컵에서는 밀월을 3:0으로 따돌리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2004-05 시즌에는 뤼트 판 니스텔로이의 부상으로 인해 총체적인 득점력 부재를 겪었는데 결국 어떤 트로피도 얻지 못했고 3위에 머물렀으며 FA결승전에서는 승부차기 끝에 폴 스콜스의 실축으로 아스널에게 트로피를 내줬다. 시즌 말에는 말콤 글레이저가 구단을 인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2005년 5월 12일 그는 구단 경영권을 획득했고, 런던 증권 거래소에서 구단을 제외시킬 것을 공언했다. 인수 사실이 확정되자 일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은 거대 자본이 순수한 축구 구단을 잠식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말콤의 구단 인수가 격렬히 반대하고 경기가 있는 올드 트래포드에서 반대 퍼포먼스를 행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일부 서포터들은 FC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라는 그들만의 클럽을 만들어 현재 8부 리그에 참여 중이다.

2005-06 시즌에는 PSV 에인트호번박지성이 영입되었다. 직전 시즌의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AC밀란을 상대로 골을 넣는 등 맹활약을 한 박지성을 퍼거슨 감독이 점찍어 두었고, 마침내 박지성은 대한민국 1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가 되었다. 박지성은 에버턴과의 시즌 첫 경기이자 데뷔전에서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특유의 지치지 않는 플레이로 퍼거슨 감독을 비롯한 팀 관계자들을 만족시켰다.[21] 한편, 시즌 중간 주요 선수의 부상과 기존 442에서 433으로의 전술 변동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예전 같지 않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자, 로이 킨이 팀의 젊은 선수들을 언론을 통해 맹렬히 비난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의 충돌로 인해 로이킨이 구단을 떠나 셀틱으로 이적하는 내홍을 겪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가브리엘 에인세앨런 스미스, 라이언 긱스폴 스콜스 등의 줄부상으로 시즌 내내 어려움을 겪었으나, 루이 사아의 활약으로 2006년 리그 컵(칼링 컵) 결승에서 위건 애슬레틱을 4:0으로 누르고 차지했다. 그러나 뤼트 판 니스텔로이는 자신을 중용하지 않은 퍼거슨 감독의 전술 변경으로 팀을 떠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2006-07 시즌에는 공격 축구가 살아나 시즌 동안 83골을 작렬시켰으며, 골 득실차 +56의 우수한 기록으로 준우승했다.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가 17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쳤고 PFA 올해의 선수상 등 각종 시상식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편 이 시즌 중간에 헨릭 라르손이 두 달간 임대되어 와서 훌륭한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챔피언스리그에서는 4강에서 카카의 활약을 앞세운 AC 밀란에게 패배했다. FA컵 결승전에서는 디디에 드로그바의 멋진 마무리에 힘입은 첼시에게 연장전까지 가는 경기에서 0:1로 패배했다. 2007년 3월 13일, 유럽대항전 첫 진출 및 EEC를 출범시킨 로마 조약 50주년 기념 경기를 마르첼로 리피 감독의 유럽 올스타(유럽 XI팀)와 치렀다. 루니가 2골을 넣은 가운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4:3의 승리를 거두었다.

유럽 정상 재등극(2008) [편집]

2006-07, 07-08 시즌 맹활약으로 PFA 올해의 선수상을 2년 연속 받은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

2007-08 시즌에는 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오랜 부상을 이겨내지 못해 결국 은퇴하였지만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를 강등에서 구해냈던 아르헨티나카를로스 테베스의 이적을 성사시켰으며 발기술과 스피드가 훌륭한 안데르송, 나니 등의 젊은 선수들과 바이에른 뮌헨으로부터 1년 동안 영입에 공을 들인 수비형 미드필더 오언 하그리브스를 영입하여 기존의 전력에 힘을 더해주어 프리미어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순항을 거듭하였다. FA컵에서는 8강에서 포츠머스 FC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해 탈락했다. 한편 2008년은 뮌헨 비행기 참사 50주년이기도 하다. 2월에 당시의 생존자와 전현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 및 팬이 모여 추모 행사를 가졌다. 2월 10일, 영국 총리 고든 브라운 등 유명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추모 경기 및 경기 전 추모 행사를 가졌다. 이날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사고가 있었던 50년대 후반 당시 유니폼을 입고 선발 선수는 1~11번, 교체선수는 12번 이후 번호의 유니폼을 입고, 맨체스터 시티는 유니폼에 후원사 로고를 없앴다. 경기 결과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홈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맞아 1:2로 패배하였다.

2008년 4월, 07-08 시즌과 챔피언스리그에서 많은 골을 넣으며 맹활약을 펼친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는 PFA 올해의 선수상을 작년에 이어 수상하였다. 4월 30일에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강적 FC 바르셀로나를 만나 종합 성적 1:0으로 승리하였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4강 2차전에서 박지성은 뛰어난 활약으로 타임즈맨체스터 이브닝 뉴스로부터 최고 수훈 선수로 선정되었다.[22] 5월 11일 위건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함으로써 막판까지 경합을 벌였던 첼시 FC를 따돌리고 2007-08 시즌 우승을 차지하였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31골로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23]

5월 22일 모스크바 루즈니키 경기장에서 펼쳐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첼시승부차기까지 가는 명승부를 펼치면서 1999년 트레블 이후 9년 만에 유럽챔피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선제 헤딩골에 힘입어 앞서가던 맨유는 첼시 FC프랭크 램퍼드에게 기습적인 동점골을 허용하였고 승부는 연장으로 치달았다. 램퍼드의 슈팅이 골대를 맞고 디디에 드로그바가 퇴장을 당하는 등 혈전을 펼친 양 팀은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세 번째 키커로 나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페트르 체흐의 선방에 막히면서 우승은 첼시에게로 가는 듯했다. 그러나 마지막 키커로 나선 존 테리가 슈팅 과정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통한의 실축을 했고 승부는 원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결국 반데사르아넬카의 킥을 막으면서 승부차기 결과 6:5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극적으로 유럽 챔피언에 올라섰다. 한편 이 경기에서 라이언 긱스는 교체 출전하여 759번째 경기를 치러 바비 찰턴의 기존 최다 출전 기록을 갱신하였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리그 득점왕에 이어, 8골로 UEFA 챔피언스리그 득점왕까지 차지해 개인 득점왕 더블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2008 발롱도르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축구선수로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였다.

2009년 이후 [편집]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2009년 칼링컵 우승에 이어 프리미어리그 2008-09 에서 우승을 차지해 통산 18번째 우승 (프리미어리그 개편 후 11회 우승)을 기록했으며, 2회 연속으로 3연패를 달성한 클럽이 되었다. 이들이 프리미어리그 2009-10에서도 우승을 차지할 경우 리버풀의 리그 우승 기록을 추월하게 된다. 그러나 2년 연속으로 진출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FC 바르셀로나의 사뮈엘 에토리오넬 메시에게 연속골을 허용해 0:2로 패하여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2009년 6월 11일에는 여섯 시즌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No.7로 활약했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8,000만 파운드(약 1,644억 원)라는 축구 역사상 최고액 이적료 기록을 세우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뿐만 아니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두 시즌간 임대되어 좋은 활약을 펼친 아르헨티나의 공격수인 카를로스 테베즈는 자유계약으로 지역 라이벌인 맨체스터 시티로 팀을 이적하게 된다. 이적료는 2,500만 파운드(약 514억 원)이다. 한편 라이언 긱스는 선수 생활을 시작한 지 20년 만에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선수상을 처음으로 수상하였으며, 호날두의 뒤를 이을 새로운 No.7로는 마이클 오웬이 선택되었다.[24] 2010년 2월 28일에는 웸블리 경기장에서 애스턴 빌라를 2-1로 꺾고 칼링컵 2연패를 달성하였다.

역대 성적 [편집]

선수 [편집]

현재 선수 명단 [편집]

2009년 9월 1일 기준

등번호이름국적입단 연도이전 구단

골키퍼

1에드윈 판 데르 사르2005풀럼 FC
12벤 포스터2005스토크 시티 FC
29토마시 쿠쉬착2007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 FC
38론 로버트 칠러2008청소년팀 출신

수비수

2게리 네빌 (주장)1992청소년팀 출신
3파트리스 에브라2006AS 모나코 FC
5리오 퍼디낸드 (삼주장)2002리즈 유나이티드 AFC
6웨스 브라운1996청소년팀 출신
15네마냐 비디치2006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20파비우2008플루미넨시 FC 청소년팀
21하파에우2008플루미넨시 FC 청소년팀
22존 오셔1998청소년팀 출신
23조니 에반스2006청소년팀 출신
30리치 드 라에2009스토크 시티 FC

미드필더

4오언 하그리브스2007FC 바이에른 뮌헨
8안데르송2007FC 포르투
11라이언 긱스 (부주장)1991청소년팀 출신
13박지성2005PSV 에인트호번
16마이클 캐릭2006토트넘 홋스퍼 FC
17나니2007스포르팅 CP
18폴 스콜스1994청소년팀 출신
24대런 플레처2001청소년팀 출신
25안토니오 발렌시아2009위건 애슬레틱 FC
28대런 깁슨2005청소년팀 출신
31코리 에반스2009청소년팀 출신

공격수

7마이클 오언2009뉴캐슬 유나이티드 FC
9디미터르 베르바토프2008토트넘 홋스퍼 FC
10웨인 루니2004에버턴 FC
19대니 웰벡2008청소년팀 출신
26가브리엘 오베르탕2009FC 지롱댕 드 보르도
27페데리코 마케다2008라치오 청소년팀
41조슈아 킹2009청소년팀 출신

임대 선수 명단 [편집]

2009년 9월 1일 기준

유명 선수 [편집]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아일랜드
덴마크
노르웨이
러시아
 
세르비아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한민국
트리니다드 토바고

기록 [편집]

아래의 기록은 2009년 11월 8일 기준의 기록이므로, 현역 선수(굵은 글씨)의 경우 시간의 진행에 따라 기록의 변동이 있을 수 있다.

최다 출장 기록 [편집]

순위이름기간출장 횟수
1라이언 긱스1991 – 현재823151
2바비 찰턴1956 – 1973758249
3빌 포크스1952 – 19706889
4폴 스콜스1994 – 현재622145
5게리 네빌1992 – 현재5837
6알렉스 스테프니1966 – 19785392
7토니 던1960 – 19735352
8데니스 어윈1990 – 200252933
9조 스펜스1919 – 1933510168
10아서 알비스톤1974 – 19884857

최다 득점 기록 [편집]

순위이름기간출장 횟수득점경기당 득점
1바비 찰턴1956 – 19737582490.328
2데니스 로1962 – 19734042370.587
3잭 로울리1937 – 19554242110.498
4데니스 바이올렛1953 – 19622931790.611
4조지 베스트1963 – 19744701790.381
6조 스펜스1919 – 19335101680.329
7마크 휴스1983 – 1986
1988 – 1995
4671630.349
8라이언 긱스1991 – 현재8231510.183
9뤼트 판 니스텔로이2001 – 20062191500.685
10스탄 피어슨1937 – 19543431480.431

역대 주장 [편집]

기간이름비고
1878–1896 ?
1896–1903해리 스탠퍼드뉴턴 히스의 주장,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첫 주장
1903–1904 ?
1904–1907잭 패디
1907–1913찰리 로버츠
1913–1919조지 스테이시
1919–1922조지 헌터
1922–1928프랭크 바슨
1928–1932잭 윌슨
1932–1936휴 맥레나한
1936–1939지미 브라운
1939–1946없음제2차 세계 대전 기간임
1946–1953조니 캐리비(非)영국 출신 주장
1953–1954알렌비 칠튼조니 캐리 은퇴 후 1년간 주장직
1954–1958로저 번뮌헨 비행기 참사로 사망
1958–1962빌 포크스
1962-1967노엘 캔트웰
1967–1973바비 찰턴
1973–1979마틴 뷰캔
1979–1982새미 맥일로이
1982–1994브라이언 롭슨역대 최장 기간 동안 주장직
1994–1996스티브 브루스브라이언 롭슨과 함께 1991년 ~ 1994년 공동 주장
1996–1997에릭 칸토나영국 및 아일랜드 출신이 아닌 첫 주장
1997–2005로이 킨주장직을 맡는 동안 역대 최대의 트로피를 획득
2005–현재게리 네빌로저 번 이후 그레이터 맨체스터 출신 주장

유니폼 [편집]

뉴턴 히스 시절의 홈경기 유니폼은 노란색과 녹색이었다(차후 1990년대 초반에 원정 경기 유니폼으로 사용되었던 조합이기도 하다.). 1902년 맨체스터 유니이티드로의 개명과 더불어 유니폼을 붉은색 상의와 흰 바지, 검은색 양말의 조합으로 바꾸었다. 이 조합은 오늘날 가장 표준적인 맨체스터의 홈경기 유니폼이 되었다. 한편 1909년 브리스톨 시티와의 FA컵 결승전에서 입은 흰색 상의에 붉은색 브이넥의 유니폼도 유명하다. 이 디자인은 1920년대에 부활되기도 했다.

원정 경기 유니폼은 보통 흰색 상의에 검은색 하의, 흰색 양말로 구성되었다. 청색과 흰색의 줄무늬 유니폼이 1903년에서 1916년에 사용되기도 했고, 1994년과 2003년에는 검은색 상하의, 2000년에는 남색 상의에 은색 핀 스트라이프의 조합을 사용하기도 했다. 1995-96시즌부터 잠깐 사용했던 회색 상하의도 유명한데, 이 옷을 입고는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둔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우샘프턴과의 경기에서 전반 종료 후 스코어가 0:3으로 뒤지고 있었는데, 휴식 시간 때 청색과 흰색의 유니폼으로 바꾸어 입은 적이 있다. 경기는 1:3으로 결국 졌는데, 선수들은 회색 유니폼은 식별이 잘 안 돼서 불만이라는 평을 내놓았다. 엄브로 후원에서 나이키 후원으로 바뀌기 전, 마지막 엄브로 후원의 유니폼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의 개명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흰색 바탕에 검은 소매에 금색 테두리가 들어간 유니폼이었다[25].

3번째 유니폼은 전통적으로 청색 상하의인데, 이는 1968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입었던 바로 그 옷이며 그때의 우승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1970년대 초반에 밝은 노란색의 유니폼으로 입었고, 1996년부터는 파란색과 흰색 줄무늬의 상의를 입었는데 팬들로부터 호응이 좋았다. 한편 2004년에는 흰색 상의에 검은색과 적색을 평행하게 세로줄무늬를 넣은 유니폼을 입었었다. 과거에는 또한 원래 훈련복으로 입었던 옷을 3번째 유니폼으로 입기도 했었다. 1998-99 시즌에는 짙은 남색 셔츠에 고동색이 들어간 유니폼을 입었다. 2008년 2월 10일,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뮌헨 참사 50주년을 맞아 후원사 로고를 떼고 뮌헨 비행기 참사 사고가 있었던 50년대 후반 당시의 유니폼을 입고 출전하였다.

경기장 [편집]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 꿈의 극장(Theatre of Dreams)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이 부분의 본문은 올드 트래포드입니다.

클럽 초창기 뉴턴 히스 시절에는 노스 로드 부근에 지금과는 다른 작고 초라한 경기장을 가지고 있었다. 경기장 컨디션이 좋지 않아 다른 팀으로부터 수렁이나 채석장 같은 경기장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었다. 뉴턴 히스는 1878년에서 1893년까지 노스 로드에서 15년을 보냈으며, 리그 진입 후 클레이턴(Clayton) 근처의 뱅크 스트리트 부근으로 경기장을 옮겼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경기장 상태는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고, 억센 잔디 상태와 모래, 주변 공장으로부터 나오는 연기는 선수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실제로 “Walsall Town Swifts”라는 팀은 경기장 상태의 문제를 제기하며 한때 경기를 거부한 사례도 있었다. 1902년에는 구단의 파산 위기로 경기장이 있는 토지가 강제 집행될 뻔했지만 해리 스탠퍼드의 지원으로 그러한 사태는 막았다.

뉴턴 히스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개명하고 새로운 경기장 건설을 위해 6만 파운드 상당의 토지를 구입하였다. 이 무렵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들의 홈구장을 올드 트래포드(Old Trafford)라고 이름을 붙였다. 영국 축구장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건축가 아치볼드 레이치는 3만 달러의 예산을 받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새로운 홈구장을 만드는 임무를 맡았다.[26] 초기 계획은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을 구상하였지만 77,000명의 구조로 약간 축소됐다. 개막 경기는 리버풀 FC과 1910년 2월 19일 경기에서 열렸다. 1911년과 1915년에 FA컵 결승전이 열렸고, 1920년에는 애스턴 빌라와의 리그 경기에서 당시 70,504명의 최대 관중을 수용했다. 이후 1939년 FA컵에서 포츠머스와 그림스비 팀과의 준결승에서는 76,962명이 들어와 최고 기록을 다시 한번 갱신했다. 1941년 3월 11일 2차 세계대전의 풍파 속에 올드 트래포드는 나치 독일의 폭격을 맞아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만다. 1949년 재건설에 들어갔으며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장을 1년당 5천 파운드와 관객 입장료 중 일부 금원을 지불하며 사용하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전쟁 피해 위원회(War Damage Commission)에 진정하여 22,278파운드의 재건설 비용을 얻어내기도 했다.

재건설 과정에서 지붕이 없던 나머지 세 면에도 지붕이 생겼는데, 당시에 유행이었던 지붕 디자인은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는 시야를 가렸다. 1950년대 중반에는 투광 조명등이 최초로 설치되었고 180피트의 철탑이 4개, 투광 조명등이 54개 설치되었다. 설치 과정에서 4만 파운드를 소요했으며 1957년 3월 25일에 새로운 조명에서 첫 경기를 치렀다(그런데 1987년의 이런 조명 시스템은 해체되고 새로운 조명 시스템이 도입된다). 1960년대 중반 월드컵을 대비해 현대적인 캔틸레버 스타일의 지붕이 북쪽과 동쪽 스탠드부터 개축되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1966년의 월드컵이 열렸고, 1970년의 FA컵 결승전도 치렀다. 1970년대에는 올드 트래포드는 최초로 관중석과 그라운드에 경계망을 설치한 경기장으로 기록되었다.

1960년대에서 80년대 올드 트래포드는 58,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1989년 리버풀 FC노팅엄 포레스트와의 경기 중 95명이 사망한 힐즈브러 참사를 계기로 경기장에 좌석이 모두 설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테일러 리포트에서 제기되었다. 결국, 올드 트래포드는 44,000명이 입장할 수 있는 규모로 축소되었다.

1995년에서 1996년 북쪽 스탠드의 확장 공사를 했고, 다시 56,000 명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확장된 공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물관이 생겼고 이 무렵에 트로피 전시실과 레드 카페 레스토랑, 스카이박스 등이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간헐적인 확장 공사가 있었고 최근에 있었던 2006년 확장 공사 이후 2008년 2월 기준으로 76,212명의 수용 규모를 갖추고 있다.

후원 [편집]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지금까지 3번의 유니폼 후원(스폰서십)을 받았다. 가장 긴 기간 동안의 후원사(스폰서)는 샤프전자였는데 1982년에서 2000년까지의 기간이었다. 이후에는 보다폰이 그 뒤를 이었다. 2005년 11월 23일부로 보다폰 사의 3600만 파운드 상당의 유니폼 후원이 2005-06 시즌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2006년 4월 6일, 데이비드 길 단장은 AIG 사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새로운 유니폼 후원사가 되었음을 발표하였다. 계약 규모는 4년간 5650만 파운드였다. 연간 약 1410만 파운드의 규모로 2008년 현재 가장 큰 규모이다. 최근 경제 위기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AIG와의 계약은 2009-10 시즌까지이며 맨유는 AIG에 뒤를 이을 새로운 유니폼 후원사를 모색한 가운데 새 후원사로 미국의 보험중개업 전문회사인 에이온(Aon)과 계약을 맺었다. 계약기간은 다음 2010-11 시즌부터 4년간 8000만 파운드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기타 [편집]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팬들은 그들의 팀을 ‘유나이티드’(United)로 부르기도 한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맨유’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며, 중국에서는 曼聯(màn lián)으로 부른다.
  • 맨체스터의 별명은 붉은 악마(Red Devils)인데 이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명과도 같다.

2010.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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