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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조선에 대하여
비공개 조회수 13,268 작성일2012.06.12

 

조선에 대하여 5~10정도 7시20분까지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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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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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성립과 발전

 

1 조선의 건국과 국가 기틀의 마련

 조선의 건국

 중심 세력:신진 사대부(정도전, 조준 등)+신흥 무인 세력(이성계 일파)

 건국 의의:양반 중심의 관료제 사회 성립, 유교적 이상 정치 실현

 국가 기틀의 마련

태종

사병 폐지, 호패법 실시

세종

집현전 설치, 훈민정음 창제, 국토 확장(4군 6진 개척)

세조

직전법 실시, 사육신 제거, 함경도 반란 진압 → 왕권 강화

성종

경국대전 완성 → 유교적 법치 국가의 기틀 마련


2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사대 교린 정책

사대 정책

태종 이후 경제·문화적 실리 추구

여진

교린 정책

(강경책과 회유책 병행)

∙강경책 : 4군(최윤덕), 6진(김종서) 개척

∙회유책 : 귀순 권유(벼슬과 안정된 생활 보장)

일본

∙강경책 : 쓰시마 섬 토벌(이종무)

∙회유책 : 3포 개항 - 부산포, 염포, 제포


3 조선의 통치 제도 정비

① 중앙 정치 제도

의정부

최고의 통치 기관(3정승의 합의에 의해 중요 정책 결정)

6조

이·호·예·병·형·공조 → 행정 실무 처리

삼사

사헌부(관리 감찰, 풍기 단속), 사간원(국왕에게 간쟁), 홍문관(국왕의 자문 기관)

기타

승정원(국왕의 비서 기관), 의금부(국왕 직속의 사법 기관), 춘추관(역사 기록 담당), 성균관(최고 교육 기관), 한성부(한양의 행정 담당)

 지방 행정 제도:전국 8도(관찰사 파견) → 모든 군·현(수령 파견)

 교육 제도:서당 → 4부 학당(서울)·향교(지방) → 성균관

 과거 제도:문과, 무과, 잡과, 무시험 선발(문음, 천거)

 군사 제도:5위(중앙군),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 파견(지방), 잡색군(일종의 예비군)

 교통·통신 제도:조운 제도, 역원 제도, 봉수 제도


 15세기 민족 문화의 발달

 훈민정음 창제:과학적·독창적 문자 → 민족 문화의 기반 마련, 국문학의 획기적 발달(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학문과 과학 기술의 발달:역사서(조선왕조실록, 동국통감, 고려사절요), 지리서(팔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예속서(국조오례의, 삼강행실도), 농업(농사직설), 과학 기술(측우기,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인지의), 한문학(동문선)

 

1 사림 세력의 성장

 사림의 등장

 시기:15세기 말, 성종이 훈구파 견제를 위해 김종직과 그의 제자를 등용

 정계 진출:주로 삼사에 진출함 → 훈구 세력 비판, 공론 정치 유도

 사화의 발생

 의미:훈구 세력이 사림 세력을 정치적으로 공격함

 과정:무오·갑자사화(연산군), 기묘사화(중종), 을사사화(명종)

 결과:사림의 피해 → 향촌의 서원과 향약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함

 붕당의 출현

 형성: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됨

 역할:공론 형성에 기여, 사림 상호 간의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짐

 사림 성장의 기반

 농업 생산력의 증대:지방의 중소 지주인 사림의 경제력 확대

 향약의 보급:상부상조의 전통과 유교 윤리가 결합된 향촌 자치 규약

구성

초기에는 중국의 ‘여씨 향약’을 보급 → 점차 우리 실정에 맞는 향약을 시행

결과

농민의 생활 안정에 기여, 유향소와 함께 사림의 향촌 지배를 강화시켜줌

 서원의 설립

기원

백운동 서원(안향 추모, 주세붕 건립, 후에 이황의 건의로 소수 서원이 됨)

기능

선현 제사 + 학문 연구 + 양반 자제 교육

영향

학문과 교육의 발전에 기여, 붕당의 토대가 됨


2 왜란과 호란

<선조>

왜란 발생

∙원인 : 일본의 전국 시대 통일 → 대륙 침략으로 내부 불만을 무마

∙승리를 위한 노력
- 수군과 이순신의 활약 : 남해안의 제해권 장악, 곡창 지대 사수
-
 의병의 활약 : 향토 지리를 이용함(곽재우, 조현, 고경명 등)

∙결과 : 조선 - 인구 감소, 국토 황폐화, 신분제 동요, 문화재 소실, 일본 - 정권 교체, 중국 - 명의 쇠퇴, 여진족의 성장

∙통신사 파견 : 국교 재개 후 조선 정부가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선진 학문과 기술을 일본에 전해줌)

 

<광해군 + 북인>

중립 외교 정책

∙특징 : 명=조선=후금

∙결과 : 서인 주도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당함

 

<인조 + 서인>

친명 배금 정책

∙특징 : 명=조선≠후금

∙결과 : 호란 발생, 청 태종의 침입 → 삼전도의 굴욕

∙북벌론 대두 : 청을 쳐서 원수를 갚자(효종, 송시열, 이완) → 실패

∙나선 정벌 : 청의 요청으로 러시아에 조총 부대를 두 차례 파견해 승리를 거둠

 

<18세기 후반>

북학 운동 : 청의 선진 문물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주장

 

 

 

조선사회의 변동

1 붕당 정치의 전개

초기의 붕당 정치

∙붕당 간의 상호 비판과 견제 및 공존 → 건전한 정치 풍토 형성

∙주도 세력의 변화 : 광해군 때 북인 집권,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 참여

∙정치 구조의 변화 : 비변사 기능 확대 → 의정부 기능의 약화, 왕권의 위축

 

붕당 정치의 변질

∙상대 당의 존재 부정 → 붕당 간의 권력 다툼으로 변질

현종 때의 예송과 숙종 때의 환국 이후 서인 정권의 전제화

∙17세기 말 이후 노론의 특정 가문이 정치를 주도 → 왕권 약화, 정치 기강 문란


2 탕평책 실시

 배경:붕당의 정치적 대립 심화 → 정치 기강 문란, 왕권 약화

 목적:붕당 간의 심한 대립을 막고 균형을 유지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치

 영조:탕평책 실시(소론과 노론의 온건파를 고루 등용, 탕평비 건립), 균역법 실시, 형벌 제도 완화, 신문고 부활, 속대전·속오례의·동국문헌비고 편찬

 정조:탕평책 계승, 규장각 설치, 장용영 설치, 수원에 화성 축조, 자유로운 상업 활동,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 완화, 대전통편·동문휘고·탁지지·규장전운 편찬


3 실학의 발달

 실학 등장의 배경:성리학의 형식화에 대한 반성 → 현실 문제를 해결할 실용적 학문 요구, 청의 고증학 전래

 중농 학파와 중상 학파

구분

중농 학파

중상 학파

특징 및 대표적 실학자

∙토지 제도의 개혁 주장

∙유형원 : 반계수록 저술, 균전론 주장

∙이익 : 성호사설 저술, 한전론 주장

∙정약용 : 목민심서 저술, 여전론 주장

∙상공업 발달과 기술 개발을 중시

∙청의 선진 문물 수용 주장(북학파)

양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

∙수레와 선박 이용 강조

∙유수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국학 연구:역사(안정복, 유득공), 지리(이중환, 정상기, 김정호), 국어(신경준, 유희), 의학(허준, 이제마)

 실학의 의의

 의의:실증적, 실용적, 민족적, 근대 지향적(개화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줌) 성격

 한계:실학자들의 주장이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 못함

 

1 세도 정치의 전개

 의미: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일부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정치 형태

 전개:순조(안동 김씨), 헌종(풍양 조씨), 철종(안동 김씨)의 3대 60여 년간

 결과

 정치 기강의 문란:왕권 약화, 매관매직 성행, 관리의 부정부패

 삼정의 문란

전세

각종 부과세 징수, 정해진 양의 몇 배 이상을 징수함

군포

군포를 과다 징수함(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 인징 등)

환곡

봄에 곡식을 빌려 주고 가을에 고리대 성격으로 징수 → 피해가 가장 심각함


2 농민 봉기의 발발

 원인:삼정의 문란, 탐관오리의 착취, 흉년과 전염병

 농민들의 저항

 소극적 저항:탐관오리 비방, 벽보 부착

 적극적 저항:세금 납부 거부, 항의 시위, 관아 습격, 관리 폭행

 정부의 대책:암행어사를 파견함 → 큰 효과가 없었음


 대표적인 농민 봉기

구분

홍경래의 난(1811)

진주 농민 봉기(1862)

원인

탐관오리의 수탈, 평안도에 대한 차별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

중심층

몰락 양반(홍경래) + 빈농, 품팔이꾼, 광부

몰락 양반(유계춘) + 농민

결과

뒤이은 농민 봉기에 영향

전국적인 농민 봉기 촉진

성격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횡포에 항거하여 사회적 불만을 드러낸 농민의 자각 운동


3 새로운 종교의 대두

 예언 사상의 유행:정감록, 미륵 신앙, 후천 개벽 사상 등

 천주교의 전파

 전파 과정:중국에 간 사신들이 들여옴 → 학문적 연구에서 시작됨

 중심 사상:만민 평등 사상, 내세 사상

 중심 세력:(초기) 남인 출신 양반, 중인 → (후기) 여성과 서민층

 박해:제사 의식 거부, 인간 평등 사상, 내세적 신앙관 → 정부의 박해

 동학의 성립

 성립 배경:세도 정치로 인한 사회 혼란, 서양 세력(천주교)에 대한 반감

 창시:최제우가 창시, 민간 신앙 + 유교 + 불교 + 도교를 융합함

 중심 사상:인내천(인간 평등 사상)

 성격:정치 개혁과 민생 안정을 위한 사회 운동, 반외세 운동

201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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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신
■조선의 명칭

▶ 태조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세운 뒤, 중국 명나라 천자(天子)로부터 책봉을 받으려 하였다. 이때 나라 이름으로 조선(朝鮮)과 화녕(和寧) 중 어떤 것이 좋은지를 선택해 달라고 하였는데, 명나라 천자가 '조선이라는 이름은 유래가 깊다'라는 이유로 조선을 지정하여 주었다고 한다.

▶ 이는 1897년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치고 광무(光武)를 연호로 사용할 때까지 505년간 사용되었다. '조선'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사기(史記)』에는 조(潮)와 선(汕)이라는 두 물의 이름을 합하여 지은 지명이라고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동쪽에서 해가 뜨는 광경을 형용한 것이라 하였다. 『성호사설』(왼쪽그림참조)에서는 조(朝)는 동방을 뜻하며, 선(鮮)은 선비산(鮮卑山)의 약칭으로 조선은 곧 선비산 동쪽의 나라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조선의 성립

▶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려왕조는 권문세족이 발호하는 가운데, 정치체제 약화·왕권 쇠퇴, 밖으로는 이민족의 침입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이러한 때에 이성계는 여진족·홍건적·왜구 등을 물리쳐 명성을 드높이며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조준·정도전 등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였다. 또 구세력인 최영 일파를 숙청하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마침내 1392년 7월 16일 개성의 수창궁에서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나라를 건국함으로써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성공하였다.

▶ 태조는 민심의 혁신을 위하여 국호의 개정과 천도를 단행하였다. 먼저 국호는 고조선의 계승자임을 밝히고자 하는 자부심과 사명감에서 ‘조선’으로 정하고, 이를 1393년(태조 2년) 2월 15일부터 사용하였다. 또 1394년 1월 농업생산력이 높고 교통과 군사의 요지인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하였다.

▶ 그리고 한양에 궁궐, 관아, 성곽, 4대문 등을 건설하고 한성부라 칭하였다. 조선왕조가 건국 이념으로 표방한 것은 외교 정책으로서 사대교린(事大交隣), 문화정책으로서 숭유배불(崇儒排佛), 경제정책으로서 농본민생(農本民生)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명(明)에 대해서는 종주국의 명분을 살려주고, 일본과 여진에 대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또 유교를 정치·문화·사상계의 지도적 근본이념이 되게 하여, 교육·과거·의례를 유교적인 체제로 바꾸어 갔으며, 건국 초기부터 농업을 적극 장려하여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의 발전과 전개

▶ 조선왕조는 왕권의 강화, 제도의 정비, 사회 구조, 대외 관계의 변화에 따라 단계적으로 발전하였다. 태조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는 왕권이 확립되고 국가체제의 근간이 마련된 시기이다. 이 때에는 건국에 협조한 개국공신 등 이른바 훈구 세력이 실권을 장악하고 제도 정비를 주도하였다. 그러면서도 태종과 세조의 왕권 강화책에 힘입어 체제 정비작업이 일단락 되었다. 15세기말부터 지방의 사림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몇 차례 사화(士禍)를 겪은 16세기에는 왕권이 약화되고 사회 체제가 변질되어 갔다. 이 시기 사림들이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 국방 강화와 대외 관계에 있어 효과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여, 왜란과 호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때문에 광해군에서 숙종에 이르는 동안 전쟁으로 동요되었던 사회 구조를 정비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예송 논쟁, 세자 책봉 문제 등에서 시작된 당쟁이 격화되어 정계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 18세기에는 현실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정치·경제·군사 등 여러 면에서 개혁이 추진되어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이와 더불어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유통경제가 활기를 띠었으며, 새로운 사회 건설을 이상으로 하는 실학이 일어나고 서민들의 자각이 커져 서민 문화가 성장하였다. 이는 영조·정조의 치적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외척에 의한 세도 정치로 말미암아 정치 질서가 붕괴되었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에 의한 세도 정치는 왕권을 약화시켰고, 부정과 부패가 전국에 퍼지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가 재정은 파탄에 이르고, 농촌 사회가 동요하여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 때 밖으로부터는 천주교와 함께 밀어닥친 서양 세력이 조선을 위협하였다.

■조선의 대외관계

▶ 조선 초기의 대외 정책은 때에 따라 힘을 앞세우기도 하고 선린(善隣)에 역점을 두기도 하는 등 신축성 있게 전개되었다. 요동 수복 계획과 관련하여 명(明)과 층돌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명을 힘이 강하고 문화 수준이 높은 대국으로 인정하여 조공을 하였고, 이에 명 역시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였다. 명과 조선 사이의 사대-조공 관계는 사절의 교환을 통한 활발한 문물 교류로 이어져 양국의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 그러나 16세기말 사림에 의한 정치는 지나친 도덕성의 추구와 붕당간의 대립, 현실을 외면한 이상론으로 대외 정세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여 왜란과 호란을 자초하였다. 왜란은 조선의 봉건적 통치 질서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고, 국제적으로는 조선과 명이 지친 틈을 타 북방의 여진족이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왜란 후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펴 명·청 교체기의 시련을 극복하려 했으나, 서인 정권이 친명 배금 정책을 내세우면서 호란이 야기되었다.

▶ 청에 대한 적개심과 여진족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은 17세기초 북벌론을 추진하는 원동력이었으나 끝내 북벌을 실천하지 못했다. 오히려 조선 후기에는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과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의 교섭을 허용하고 통신사를 파견하여 조선의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였다. 그런데 19세기 들어 미국과 수교 후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 정한론(征韓論)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고, 서구 열강에 이권을 침탈당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정부 주도의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며 발생한 국내 문제를 조선에 전가시키는 침략 정책을 편 일본에 의해 조선은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조선 시대의 과학은 세종대왕 때에 과학기구가 많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시계로는 해시계라 불리는 앙부일구와 물시계라고 불리는 자격루 그리고 장영실로 하여금 측우기를 발명해서 농사를 하고 백성들의 안정을 찾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1) 민족 의식 각성
→조선 초기에는 민족 의식이 고양되어 민족의 기원과
문화의 전통에 관심을 가졌다

⑴ 민족 의식 각성의 배경 : 고려 말 외적 축출 과정에서
애국심과 민족 의식 고양 →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

⑵ 역사책 서술 : 민족 기원과 문화 전통에 관심 고조,
단군의 건국 설화 수록(세종 실록 지리지, 동국통감)

⑶ 단군 신앙 고조 : 평양의 단군 사당, 황해도 구월산의
삼성사(환인, 환웅, 단군)설치

⑷ 한양의 원구단 : 국가 주도로 천제에 제사, 애국 명장에
대한 제사

2) 훈민 정음의 창제
→훈민 정음의 창제는 민족 문화의 창달에 공헌하였다

⑴ 창제 배경
① 고유 문자 부재 : 지배층과 평민 사이에 문자를 통한
의사 소통이 어려움
② 세종의 우리 글 창제 의지

⑵ 창제 과정 :
세종과 집현전 학자(정인지, 신숙주 등)들의 노력
→28자의 표음 문자 완성→실용화 실험→반포(1446)

⑶ 특징 : 독창적 과학적인 문자

⑷ 의의 : 서민들의 문자 생활 시작, 시조.가사 문학 등
국문학 발전

3) 편찬 사업
→조선 초기의 학문 발달로 활발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⑴ 전통 문화의 정리 (세종 - 성종) →민족 문화의 융성기

⑵ 역사 : 정치의 거울이라 하여 국가의 가장 큰 관심
실록 (4곳의 사고에 보관), 국조보감(정치적 교훈서),
고려사, 동국통감 편찬

⑶ 지리 ; 국가 통치에 필요한 지리 지식 제공
팔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 간행
* 동국여지승람 : 성종 때 편찬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지리서,
각지방의 연혁, 풍속, 산물, 산천 등이 기록되어 수령의 지침서

⑷ 법전 편찬
① 조선 초 : 조선경국전 (정도전), 경제육전 (조준)
② 경국대전 :
- 의의; 조선 왕조의 통치 규범 확립
- 구성; 이,호,예,병,형,공의 6전
- 성격; 관료조직, 사회구조, 경제활동에 관한 기본 법전

⑸ 예절과 풍속 : 국조오례의, 삼강행실도 편찬
→ 유교적 질서 마련


4) 과학 기술
→민생 안정과 부국 강병을 위해 과학 기술을 장려하였다

⑴ 배경 :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과학 지식위에
중국, 아라비아 과학 지식 흡수

⑵ 농업 기술의 발달
① 농사 직설 : 우리 풍토에 맞는 농사 기술의 개발과 보급 목적,
농부들의 경험을 토대로 편찬
② 측우기 발명( 강우량의 측정), 인지의 제작(토지 측량)

⑶ 천문학과 역법 :
① 간의(천문 관측), 혼천의(천체 운행 측정),
② 시간 측정; 해시계, 물시계
③ 역법의 발전; 칠정산 편찬 (중국과 아라비아의 역법 참조)

⑷ 인쇄술 : 금속 활자 계승→구리 활자(계미자, 갑인자 등)

⑸ 의학 : 향약집성방(국산 약재 연구), 의방 유취(의학 백과 사전)

⑹ 병서 간행, 무기 제조 : 국방 강화 정책과 관련
① 병장도설 : 군사 훈련의 지침서, 화포의 제작 및
사용법 제시
② 화차, 전함(거북선) 제조
* 거북선 ; 태종때 판옥선위에 두꺼운 껍데기를 씌우고 여러문의
대포를 설치하여 돌격용으로 만들었다. 이후 평화가
계속되어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때 이순신에 의해
개량되어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5) 문학
→다양한 분야의 문학 활동이 활발했다

⑴ 한문학 : 양반들의 필수 교양(금오신화, 동문선)
⑵ 시조
① 김종서, 남이 : 패기와 자신감이 넘치는 호방한 시조
② 황진이 : 순수한 인간의 감정
⑶ 여류 문인 : 신사임당, 허난설헌
⑷ 국문학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가사 문학(송강 가사)

6) 건축과 공예
→조선시대 건축과 공예는 실용적이며 서민적이다

⑴ 조선 시대 예술의 특징 : 실용적, 소박함
⑵ 건축 : - 궁궐, 성곽, 성문, 관아(관청), 학교 건축물 중심
- 숭례문, 창덕궁의 홍화문, 개성의 남대문,
해인사 장경판전




⑷ 공예
① 자기 공예 발달, 소박하고 서민적
② 분청사기(조선 초기 대표적 자기) →백자
* 분청사기 : 고려 말기∼조선 초기에 만들어졌던 회청색의 자기로서,
청자에서 백자로 이어지던 과도기 단계에 만들어진 것이다.
③ 나전칠기, 화각 공예 발달
* 나전칠기 : 목가구 위에 전복조개 등의 껍질을 여러가지 문양으로 박아넣는 기법.
'자개'라고도 하며 '자개박이' '자개를 박는다'라고 일컬어 왔다.
* 화각 : 쇠뿔을 얇게 펴서 채색 그림을 그린 후 이를 목기물 위에 붙여 장식하는
한국 특유의 각질(角質)공예기법 및 그 제품.


7) 음악과 서화
→조선 전기에는 궁중 음악과 민간 음악이 발달하였다

⑴ 음악
- 아악(궁중음악) 발달 : 박연(아악 정리), 성현(악학궤범 간행)
⑵ 민간 사회 : 민속 무용(농악무, 승무, 무당춤), 산대놀이 (탈춤),
꼭두각시 놀이(인형극)

⑶ 그림 : 산수화, 인물화 유행
① 도화서 설치 : 전문 화원 양성 →안견 (몽유도원도)
② 일반 선비, 양반 관료 : 교양으로 그림, 글씨 존중
→ 강희안, 강희맹
⑷ 글씨 : 서예(안평 대군, 한호)
조선시대의 문화재
1. 문화사적

○ 서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국보 제1호)
중구 남대문로 4가 29번지에 있다.
서울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정문으로 남대문은 그의 속칭이다. 태조5년(1396)에 창건되었던 것이지만 현존 건물은 세종30년(1448)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건평 53.79평, 정면 5간(間), 측면 2간의 남대문은 현존하는 한국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우리나라 건축사상 가장 중요한 건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 서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보물 제1호)
종로구 종로 6가 69번지에 있다.
한양 도서의 정동(正東)에 위치하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속칭 동대문으로 불리운다. 이 문루는 태조 5년(1396)에 중수(重修)되었으나, 현존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개축된 것이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중앙부에 홍예문(虹 門)을 만들고 그 위에 중층(重層)의 문루를 세운 점 등은 서울 숭례문과 같은 수법이며 문밖으로 반월형의 옹성(甕城)을 돌린 것은 고종 6년에 개축한 것이다. 그리고 옹성 상부에는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 다포계(多包系) 건물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다.

○ 서울성곽 (사적 제10호)
서울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지 3년(1394)만에 조선의 수도가 되었다. 태조는 그 이듬해 궁궐과 종묘·사직을 먼저 조성한 뒤에 도성축조도감을 열어 성 쌓기에 착수하였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다시피 했던 태조로서는 성곽이 수도방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성이라는 것은 국가의 울타리요, 강포한 것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없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태조는 강조한 바 있다.
성안과 성밖을 구별하여 쌓은 한성의 성벽은 돌이나 흙으로 북악산등을 타고 낙산·동대문·남산을 거쳐서 인왕산 산등성이를 둘리는 총연장 18,1km로 쌓아졌다. 당시 서울의 총 인구가 5만명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성을 쌓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동원한 장정들의 수효는 4년간에 걸쳐 19만 7천여명에 이르렀다.
이 성에는 4대문을 두었는데, 동쪽에 흥인지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북쪽에 숙청문을 두었다. 그리고 4소문으로는 동북에 동소문, 동남에 광희문, 서북에 창의문, 서남에 소의문을 두었다. 조선왕조 건설의 주역이었던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기본설계가 마련된 서울의 성벽은 둘레가 40리 남짓 되고, 그 후 세종 4년(1422)과 성종 10년(1479) 등 여러번에 걸쳐 중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관여하게 되면서 성문과 성벽을 하나 하나 허물어 버렸다.
현재 대문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남대문과 동대문, 숙청문(1976년 복원)이며, 소문으로는 창의문과 광희문(1975년 복원), 동소문(1994년 복원)이며, 성벽으로는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남산·인왕산 일대이다.

○ 독립문(獨立門, 사적 제32호)
서대문구 현저동 941번지에 있다.
1894∼1895년에 갑오개혁으로 조선의 내정과 제도를 개혁하였으나 당시 청나라와 일본 및 러시아 등의 간섭으로 나라의 자주독립을 유지해 나가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민중들은 국왕과 대신들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외세의 간섭도 허락치 않겠다는 결의를 다짐하려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왕에 서 있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건립의 발의는 독립협회의 서재필(徐載弼)이 하였고 설계는 러시아인 [시바진]이 담당하였다. 독립문의 기공식은 1896년 11월 21일에 있었다.

○ 삼전도비(三田渡碑, 사적 제101호)
송파구 송파동 187번지에 있다.
인조 14년(1636) 청태종(淸太宗)이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였을 때 인조는 광주(廣州)의 남한산성에서 청군과 싸웠다. 그러나 우리의 병력으로서는 청군의 위협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인조는 마침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태종의 군영이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에서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에서 이 사실을 비석에 새겨 삼전도에 남길 것을 요구하였으므로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이 비석을 만들어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 비석의 특색은 전면에는 한자로 새기고, 뒷면에는 만주문자와 몽고문자의 이중문자로 번역해서 전면을 둘로 나누어 조각한 것으로, 한 비에 3개국의 문자가 새겨진 것으로 유일한 비석이 되었다.

○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있다.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서울로 천도하면서 종묘(宗廟)를 짓게 한 다음 그 해 겨울에 북악산 아래에 왕궁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태조 4년(1395)에 완공하고 그 해 10월 28일 정식으로 경복궁에 들었다.
그러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은 모두 불타서 재가 된 채 270여년간이나 폐허로 되어 오직 경회루의 돌기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후 고종 2년(1865)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재건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 완공시킨 바 있다.
처음 태조의 명에 따라서 정도전(鄭道傳)이 시경(詩經)의 구절을 따서 궁 전체의 이름을 경복궁이라 지었다. 조선 최후의 왕인 순종 융희 4년(1910)에 일제에 의해 경복궁의 여러 당(堂), 각(閣), 누(樓),정(亭), 행각(行閣), 회랑(廻廊)과 기관(機關)은 모두 헐리었고, 지금은 근정전(勤政殿), 경회루(慶會樓) 외의 몇몇 전당(殿堂)과 건춘문(建春文) 및 광화문(光化門)이 남아 있다.
근정전은 경복궁 안의 정전(正殿)으로 국왕의 즉위식 또는 공식적인 대례(大禮)가 거행되던 곳이며, 경회루는 왕의 사연장(賜宴場)으로 쓰이던 곳이다.
집옥재(集玉齋)는 각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고,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正門)으로 이 문 좌우쪽 높은 대좌 위에는 돌로 된 해태가 놓여 있는데 이는 근세의 미술대가로 알려진 이세욱(李世旭)의 작품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경복궁을 지은 후 궁전에 자주 화재가 일어났다. 이것은 조산(朝山)인 관악산이 화산(火山)인 까닭이라 해서 관악산에 우물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집어넣는 한편 광화문 좌우편에 해태 한쌍을 앉혀 관악산의 화기를 막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해태의 시선은 관악산을 향하고 있다.
건춘문(建春文)은 경복궁의 동문으로써 이 문 안에는 이전에 왕세자가 있던 전당 춘궁(春宮)이 있었다. 이 문은 오직 종신(宗臣) 즉 왕족과 궁에 봉사하는 상궁들만 드나들었다. 이와는 달리 경복궁 서편에 있던 영추문(迎秋門:지금은 없다) 안에는 승정원(承政院), 홍문관(弘文館), 규장각(奎章閣) 등 여러 관아가 있었고 따라서 이 문은 일반관리들이 사용하였다.

○ 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호)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에 있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하여 경복궁을 왕궁으로 삼고 있었으나, 정종은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고, 태종이 즉위하자 왕 4년(1404)에 한성의 향교동에 이궁(離宮)을 짓게 하여 이듬해 5년에 완공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창덕궁이다.
이 궁에는 돈화문(敦化門)과 인정문(仁政門), 인정전(仁政殿), 선정전(宣政殿), 희정당(熙政堂), 낙선재(樂善齋), 대조전(大造殿) 등이 있고, 후원(後苑)과 같은 심오하고 아름다운 대원지(大苑池)를 가졌다. 일명 비원(秘苑)이라고도 불리어지는 창덕궁 후원에는 영화당(暎花堂), 부용정(芙蓉亭), 어수문(魚水門), 주합루(宙合樓) 등의 누각과 정자가 았다. 궁궐의 규모는 크고 화려하며 각 시대의 신구 건물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제도가 오늘날까지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창덕궁을 무대로 빚어진 잊을 수 없는 정변도 적지 않다. 사육신의 참형을 비롯해서 광해군이 반정군에게 쫓겨난 것도 이 궁이었다. 그리고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넣어 질식시킨 참변도 있엇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이 궁에서 일어났다.

○ 창경궁(昌慶宮, 사적 제123호)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에 있다.
조선시대 이궁(離宮)이었던 이 궁은 세종이 상왕(上王)인 태종을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 즉위년(1418)에 고려시대의 수강궁(壽康宮) 옛 터에 세운 것이다. 처음 이름은 수강궁이었으나, 성종 15년(1484)에 명정전(明政殿) 등 여러 궁궐을 크게 짓고 창경궁으로 고쳤다.
정조와 순조·현종 등 많은 왕들이 이 궁에서 태어났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으로 불타서 광해군 8년(1616)에 복구하였지만 인조 즉위년(1623) 이괄의 난 때 불이 나서 수많은 전각들이 타 다시 중수되기도 하였다.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이고 명정전(明政殿)은 법전(法殿)이었다. 통명전은 창경궁 안의 정전(正殿)이면서 대조전(大造殿)과 함께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궁은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크게 변형되고 훼손되었으나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진행된 복원사업으로 동물원과 식물원이 과천으로 옮겨지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
중구 정동 1-23번지에 있다.
이 궁은 서울에 남아 잇는 궁궐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작다. 광해군이 이 행궁(行宮)에서 즉위하였고, 중화전(中和殿)과 내전(內殿)인 함녕전(咸寧殿) 등은 모두 1905년에 재건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1909년에 준공되었다. 이 궁의 터전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였다.

○ 경희궁(慶熙宮, 사적 제271호)
종로구 신문로 2가 1-126번지 일대이다.
경희궁의 원이름은 경덕궁(慶德宮)으로 광해군 8년(1616)에 지었다. 숙종이 이 궁에서 나서 승하하였고, 경종과 정조, 헌종이 모두 이 궁에서 즉위하였으니 원래 이궁(離宮)이었던 이 곳이 한동안은 본궁과 다름없이 쓰여졌다.
광해군이 이 궁을 짓게 된 동기는 음양지리설과 깊은 관계가 다. 즉 새문동(塞門洞:돈의문 부근)에 왕기(王氣)가 있다 해서 그 왕기를 누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새문동에는 광해군의 동생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元君)의 사삿집이 있었는데, 광해군은 바로 그곳을 빼앗아 궁궐을 지었지만 8년이 채 못되어 광해군 15년(1623)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 종묘(宗廟, 사적 제125호)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있다.
일명 태묘(太廟)라고도 하는데, 본전(本殿)과 영녕전(永寧殿) 두 궁으로 되어 있다. 본전에는 역대 왕 중에서 공이 많은 왕의 위패를 모셨고 영녕전 즉 별묘(別廟)에는 본전에 모시지 않은 이들과 태조의 고조 4조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 전관교(전관교:살곶이다리, 사적 제160호)
성동구 행당동 58번지에 있다.
살곶이는 영남에서 새재(鳥嶺)를 넘어 충주·이천·광주를 지나 서울에 도달하는 길목이었다. 일찌기 세종 2년(1420) 5월에 상왕이었던 태종이 이곳에 다리를 놓도록 명하여 착공하였으며 성종 16년(1483)에 완성되었다.
이 다리는 처음 성종의 명명에 의하여 제반교(濟盤橋)라 하였고, 고종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이 다리를 헐어서 석재(石材)로 사용했으므로 지금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어쨌든 이 다리는 장안의 금천교(禁川校), 수표교(水標橋)와 함께 유명한 다리 중의 하나였다.

○ 서울 사직단(社稷壇, 사적 제121호)
종로구 사직동 1-28번지에 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한 태조는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배설하였다. 사직(社稷)은 국토의 신인 사(社)와 오곡(五穀)의 신인 직(稷)의 두 신위(神位)에게 제사드리는 곳으로 단을 쌓고 제사드리므로 사직단이라 하였다. 사직은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의 다른 명칭으로 종사(宗社)라고 표현되었다.

○ 우정총국(郵征總局, 사적 제213호)
종로구 견지동 397번지에 있다.
이곳은 옛날 북부(北部) 전동(典洞)이었고 전의감(典醫監)이 있었던 자리이다. 고종 21년(1884) 4월, 일본과 미국 시찰에서 돌아온 홍영식(洪英植)은 고종에게 기왕부터 내려오던 역전법(驛傳法)을 고쳐 우편제도를 새로 채택할 것을 진언하였다. 이에 우정총국을 세우고 홍영식 자신은 총판(總辦)이 되었다. 우정총국은 1884년 10월 17일 밤에 있었던 갑신정변(甲申政變)의 거사장소로써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나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만다.

○ 구 대한의원(大韓醫院) 본관(사적 제278호)
종로구 연건동 28-2번지에 있다.
지금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편입되어 쓰여지고 있다. 이 건물은 대한제국 칙령 제9호에 따른 의정부(議政府) 직속의 대한의원 본관으로써 일찌기 창경궁의 외원(外苑)이었던 함춘원(含春苑)의 마두봉(馬頭峰) 언덕에 세워졌다.

○ 약현성당(藥峴聖堂, 사적 제252호)
중구 중림동 149-2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고종 24년(1887) 5월 30일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세워진 성당이다. 이 성당은 중국인 기술자들에 의하여 시공되어 고종 29년(1892) 9월에 준공되었다. 이 곳에 성당을 세운 것은 천주교도 수난 때 44명의 순교자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서소문 밖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구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
중구 정동 15-1번지에 있다.
고종 27년(1890)에 건축된 것으로 아관(俄館)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특히 고종이 1896년 2월 1일 세자(純宗)와 함께 이곳으로 옮겨 와서 이듬해 2월 20일 경운궁(慶運宮:德壽宮)으로 환궁할때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이를 일러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하였다. 고종이 이 공관에 머물동안 친일 김홍집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인 박정양내각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 구 벨기에영사관(사적 제254호)
관악구 남현동 1095-13번지에 있다. 원래 중구 회현동 2-78번지에 위치해 있었으나 1982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905년 일보인 기술자들에 의해 시공 준공되었다. 광복 후에 해군헌병대가 사용하더니 지금은 한국상업은행의 사료관으로 쓰여지고 있다.

○ 정동교회(貞洞敎會, 사적 제256호)
중구 정동 32-2번지에 있다.
개신교의 교회당으로는 국내 처음으로 지어진 것으로서 고종 23년(1896) 12월에 준공되었다.

○ 운현궁(雲峴宮, 사적 제257호)
종로구 운니동 98-50번지에 있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사삿집으로써 고종이 출생해서 12살까지 살던 곳이다. 고종이 즉위한 이후 이 집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고,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 자신이 이 궁에서 납치당하기도 하였다 이 운현궁에는 창덕궁과 가깝게 내왕할 수 있는 임금 전용의 경근문(敬勤門)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勤門)이 있었다.

○ 명동성당(明洞聖堂, 사적 제258호)
중구 명동 2가 1-8번지에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主敎座)성당으로 종현(鐘峴)의 이름을 따서 종현성당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고종 29년(1892) 8월 5일 착공되어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공사가 한때 중단되기도 했지만 1898년 5월 29일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설계는 프랑스 코스트(Coste)신부가 담당하였다.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조 교회당이며, 국내 유일의 순수한 고딕식 구조를 갖춘 건물이다.

○ 환구단( 丘壇, 사적 제157호)
중구 소공동 87-1번지에 있다.
환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말하는 것으로 원단(圓壇)이라고도 하는데 고종 34년(1898)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조선호텔의 남북쪽 정원에 황궁우(皇穹宇)란 팔각정으로 남아있지만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에게 하사된 저택자리였고, 선조 때는 왕자인 의안군(義安君)의 저택자리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남별궁(南別宮)이라 불러 중국사신의 영빈시설로 사용되기도 했다.

○ 한국은행 본관(사적 제280호)
중구 남대문로 3가 110번지에 있다.
본래 이 건물은 조선에 진출했던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으로 1908년 11월 착공되었던 것으로 1910년 일제강점이 이루어짐으로써 1911년 조선은행으로 바뀌게 되고 그 다음 해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6·25전쟁 때 내부가 불탔으나 1956년 복구되어 한국은행 본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 서울역사(驛舍, 사적 제284호)
중구 봉래동 2가 122번지에 있다.
한국에 처음 철도가 놓여진 것은 광무 3년(1899) 4월로, 일본인 회사인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착공했던 인천과 노량진간에 놓여진 철로였다. 지금의 서울역사는 1922년 6월에 착공되어 1925년 9월에 준공된 것이다.


○ 장충단비(奬忠壇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호)
중구 장충동 2가 197번지(장충단공원 안)에 있다.
광무 4년(1900) 남소영(南小營) 자리에다 을미사변 때 순사(殉死)한 충신, 열사(烈士)를 위해 단을 모으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사당(祠堂) 자리는 6·25전쟁 때까지 서남쪽에 있었다.
이 비 표면의 [奬忠壇]이란 3자는 순종이 황태자 때 쓴 글씨이며, 비 뒷면의 143자는 민영환(閔泳煥)이 썼다.

○ 봉황각(鳳凰閣,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호)
강북구 우이동 254번지에 있다.
독립운동가인 손병희(孫秉熙)가 1912년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지도자를 훈련시키려 세운 건물로, 이때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4명이며 3·1운동의 주체가 되어 구국운동의 최선봉에 섰다.


○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5호)
종로구 숭인동 산 3번지에 있다.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동망봉(東望峰) 아래에는 정업원구기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 동망봉은 단종이 강원도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후 그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아침 저녁으로 올라가 동쪽(영월쪽)을 바라보며 죽은 왕을 추모하였다는 곳이며, 정업원은 송씨가 단종의 명복을 빌면서 일생을 거처한 곳이라 한다.

○ 용양봉저정(龍讓鳳 亭,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6호)
동작구 본동 10-30번지에 있다.
정조 13년(1789)에 착공하여 2년 후에 완공된 건물로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묻힌 화산(華山, 현 水原) 현릉원(顯陵園)에 참배하러 다닐 때 노들강에 배다리(舟橋)를 세우고 건너가 잠시 어가(御駕)를 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 성제묘(聖帝廟,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7호)
중구 방산동 4-96번지에 있다.
성제묘는 관우(關羽)를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관왕묘(關王廟) 중의 하나이다. 이 건물은 일찍이 임진왜란 이후 서울에 세워진 남묘(南廟), 동묘(東廟)가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던 제도였던 것과는 달리 민간인에 의해 세워진 묘당(廟堂)이다.

○ 사육신묘(死六臣墓,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8호)
동작구 노량진동 185-2번지에 있다.
원래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6명 중 성삼문(成三門),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응보(兪應孚)의 묘소가 있었으며, 1977·1978년의 묘역 정화공사 때 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의 가묘를 추봉하였다. 이때 단종복위운동 때 순절한 김문기(金文起)의 가묘도 마련되었다.
이들은 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14세 된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세조가 되자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충성심을 변치 않다가 세조 2년(1456)에 사형을 당하였다.

○ 종친부(宗親府,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9호)
종로구 화동 1번지에 있다.
조선의 역대 왕의 어보(御譜), 어진영(御眞影)을 받들어 모시는 의촉(衣 )을 만들고 종실(宗室) 제군(諸君)의 봉작(封爵), 승습(承襲), 관혼상제(冠婚喪祭) 등의 사무를 보던 곳이다.

○ 천정(天井:한우물,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0호)
금천구 시흥동 산 93번지에 있다.
시흥 동남쪽에 있는 호암산(虎巖山) 한 봉우리 위에 작은 연못 크기의 우물이 있는데 큰 우물이란 뜻으로 '한우물' 또는 '용보(龍洑)'라고 한다.

○ 지덕사 부 묘소(至德祠 附 墓所,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1호)
동작구 상도동 산 65-42번지에 있다.
태종의 장자(長子)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당과 묘이다.

○ 청권사 부 묘소(淸權祠 附 墓所,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2호)
서초구 방배동 191번지에 있다.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녕대군(孝寧大君)의 사당과 묘이다.

○ 동십자각(東十字閣,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3호)
이 건물은 광화문에 연결되어 오는 경복궁 외궁성(外宮城)이 건춘문(建春門)을 향하여 꺾이는 부분에 세운 망루이다. 이와 같은 건축물은 서쪽에도 있어 서십자각(西十字閣)이라 불렀으나 일제 때 철거되었다.

○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4호)
은평구 역촌동 8-12번지에 있다.
이 비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綾陽君)으로 있을 때 소유했던 별장터임을 기리는 기념비로서 숙종 21년(1695) 7월에 세운 것이다.

○ 선농단(先農壇,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5호)
동대문구 용두동 1158-1번지에 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일컬어온 우리 나라는 원래 농본국(農本國)이어서 농사와 인연이 깊은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主神)으로 하여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농사의 모범을 보이고자 왕이 직접 적전(籍田)에서 밭을 가는 친경(親耕) 행사를 하였다.
친경(親耕)은 조선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 3년(1909)에도 행하였으나 일제 때 폐지되었다. 이 단은 사방 4m 4m의 석축단(石築壇)으로 되어 있다.

○ 삼군부 청헌당(三軍府 淸憲堂,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6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안에 있다.
이 건물은 조선말기의 건축양식으로서 삼군부 내의 일부분인 청헌당이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2년(1865)에 훈련도감(訓練都監)의 신영(新營)·남영(南營)·병마소(兵馬所)를 합하여 삼군(三軍)이라 하고 옛터(현 정부종합청사)에 삼군부의 청사를 세우고 초기의 제도대로 삼군부를 다시 부활시켜 정치는 의정부에서, 군사는 이곳 삼군부에서 맡아보게 하였다.


○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8호)
중구 장충동 2가 197-1번지에 있다.
이 다리는 태종 6년(1406)에 600명을 동원, 인공으로 수로를 뚫은 개천(開川, 청계천)에 세웠던 다리 중의 하나로서 도성 안의 개천에 흐르는 수량(水量)을 측정하는 시설이다. 다리 돌기둥에 경(庚)·진(辰)·지(地)·평(平)이라는 수준(水準)을 새기고 물의 깊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수중주석표(水中主石標)'라 하고 있어 여기서 다리의 이름을 딴 것임을 알 수 있다.

○ 흥화문(興化門,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9호)
종로구 신문로 2가 경희궁에 있다.
이 문은 광해군 8년(1616)에 세운 경희궁 정문이다. 본래 이곳은 인조의 생부(生父)인 원종(元宗)의 잠저(潛邸)가 있던 곳으로 광해군이 왕기(王氣)를 없애기 위하여 이 궁을 건설하였다 한다.
1910년 경희궁을 헐고 경성중학교(서울중고등학교)를 건립할 때 이 문은 남아 있다가 1932년 박문사(博文祠)에 이전되어 정문으로 삼았는데 그 후 이전된 영빈관(迎賓館)이 이 자리에 들어서게 되어 영빈관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현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 무계정사(武溪精舍,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2호)
종로구 부암동 329-4번지에 있다.
암벽에 가로로 '무계동(武溪洞)'이라 새겨 놓은 글자가 있어 이곳이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정자였던 무계정사의 유지(遺址)임을 알 수 있다. 이 곳은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園)에서 노닐고 나서 그곳과 같은 자리라 생각하여 산정(山亭)을 세우고 글을 읊으며 활을 쏘았던 장소였다.

○ 대원군 별장(大院君 別莊,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3호)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에 있다.
창의문(彰義門) 밖 자하문고개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의 사랑채이다. 조선 상류사회의 대표적인 사랑채로서 1958년 손재형(孫在馨)이 이곳에 가옥을 지을 때 석파정 경내에 있었던 이 집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201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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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대하여

 

조선(朝鮮)은 1392년부터 1897년까지 한반도 지역을 통치하였던 왕국이다. 일반적으로 조선 왕조(朝鮮王朝)라고 하며, 조선 내부적으로 대조선국(大朝鮮國)이라는 명칭을 어보(御寶), 국서(國書) 등에 사용하였고, 극히 제한적으로 외부적으로도 대조선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이 되었다.

 

태조 이성계에 의해 고려를 이어받아 개국되었으며 이후 500여 년 동안 존속되어 왔다. 조선은 유교에 의한 통치 이념을 기본으로 임금과 신하에 의한 치를 중요시 여겼다. 조선 시대 동안 한반도에서는 한글의 창제와 과학 기술 및 농업 기술의 발달 등이 이루어졌으며, 임진왜란을 비롯한 여러 외침을 극복하고 현재의 한민족 한국 문화의 직접적 전통의 기반이 되는 문화를 형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1388년 고려의 무신으로서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우왕·창왕·공양왕 등을 왕위에 올렸다가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하였다. 이어 정몽주가 제거되고 1392년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1393년에는 국명을 "조선"으로 고치고 1394년에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1398년, 1400년)이 발생하였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다. 세종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세조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제도의 결함이 드러나게 되고, 특히 지배계급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제도의 문란에 따른 훈구 재상의 대토지 소유는 토지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림의 불만을 사게 되어, 여러 번에 걸쳐 사화라는 참극을 빚어냈다.

 

사림들은 여러차례 사화를 겪자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선조 때에는 이들을 재등용하기 마침내 사림들이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류들 사이에 다시 대립이 생겨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서로 싸우게 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 당쟁의 기반이기도 하여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 이어 16세기~17세기에 주변국가인 일본, 청과 치른 전쟁(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이후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고,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다.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마침내 서인은 17세기 중반의 예송논쟁에서 남인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 소론이 대립하였다. 영조 정조는 당파의 균형을 고려한 인재기용(탕평책)을 실천하였다. 19세기의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를 물리치고 쇄국 정책을 유지하였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외정책이 개방되었다. 이어 일본, 미국 등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1880년대에는 구식 군인의 차별대우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개화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인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890년대에는 농민 수탈에 대한 저항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기도 하였다. 1894년에는 친일적인 성격을 지닌 갑오개혁이 실행되었다. 한편 일본이 친러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였다.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 조선의 문화재 )

 

1.숭례문

 

종 목 국보 제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인하여 소실되어 현재 복원 중에 있다. 


2.원각사지 십층석탑

 

종 목 국보 제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3.흥인지문

 

종 목 보물 제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시 대 조선시대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4.서울성곽

 

종 목 사적 제1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시 대 조선시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이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5.경복궁

 

종 목 사적 제11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6.서울사직단

 

종 목 사적 제12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사직동 1-28

시 대 조선시대


 종묘와 함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에 수도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들을 이 곳에서 지냈다.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1940년 정식으로 공원이 된 사직공원이 옛 사직단의 자리이다.

 

201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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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의 의미

 

훈민정음은

 

訓(가르칠 훈) 民(백성 민) 正(바를 정) 音(소리 음)

 

으로써

 

백성에게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는 뜻이로 세종대왕께서 직접 지으신 이름입니다.


(1) '나라 글자(國字)로서의 명칭 :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 시대에 따른 명칭 변화
㉠ 정음(正音) : '훈민정음'의 약칭
㉡ 언문(諺文) : '한문'을 진서(眞書-참 글)라고 부른는데 비해 한글을 낮추어서 이르는 말.
( * 諺 : 상말, 속말 언 ) --- <언문금지령>(연산군)
㉢ 반절(半切) :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 "諺文字母 俗所謂 半切二十七字"(언문자모 속소위 반절이십칠자)라는 데서 유래
(*예를 들면, '東(동)이라는 글자는 德(덕)과 紅(홍)의 합친 글자, 즉, 德으로서 'ㄷ'을, 紅으로서'옹'을 표시, 이를 합하면 "ㄷ+옹=홍"이 되는데 이에 東을 德紅切(덕홍절)이라 했다. 다시 말하면, 한글이 자음과 모음으로 음절을 이루는 데서 반절과 같다고 본 것임.)
㉣ 국문(國文) : 갑오경장 이후 국어의 존엄성을 자각한 이후, 이봉운의 [국문정리], 지석영의 [신정국문] 등에서 사용
㉤ 한글 : 주시경(周時經)이 붙인 이름. "한(韓)나라 글"에서 유래.

 

1.훈민정음을 만든이유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우리말은 쓰고 있었으나, 우리 글자가 없었다. 그래서 중국의

한자를 사용하여 왔으나 우리말을 표현하기도 어렵고, 배우기도 힘들었다. 세종

대왕은 백성들이 어려운 한자를 쓰는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여 우리말에 알맞고,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2.역사적 가치

전계에서 체계화되고 과학화된 글자는 훈민정음 뿐이고요.

고유민족으 로 자국어를 가지고 있는 나라도 그렇게 생각보다 많지 많구요.

의의는 자구민의 민족성의 고취와 우월성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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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과학적이고 독창적입니다.

외국말보다 배우기도 훨씬 쉬우면서 더 많은 단어를 나타낼수있습니다.

외국의 여러사람들도 한글을 보고 감탄

또 훈민정음은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3.만들어진 시대

세종 대왕은 오랜 연구 끝에 집현전의 여러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446년에 한글을 창제 반포하였다. 이를 훈민정음이라 하며 그 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4.훈민정음 만든사람

박팽년, 이개, 최만리 등이 반대를 하였으나 성삼문, 정인지, 신숙주등 여러 집현전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5.훈민정음의 분류

한글은 소리글자로서 매우 과학적인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글자이다. 초성(자음)은 발음 기관을 본떠 ‘ㄱ, ㄴ, ㅁ, ㅅ, ㅇ’과 같은 기본 글자를 만들고, 이에 획을 더하여 모두 17자 를 만들었고, 중성(모음)은 하늘, 땅, 사람의 3재를 기본으로 하여 ‘·, ㅡ, ㅣ’를 만들고, 이를 위아래와 좌우로 어울러 모두 11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종성(받침)은 초성(자음)을 다시 쓴다고 하였다


5.훈민정음의 없어진 글자


모음에선ㆍ(아래아) 하나가 없어졌고, 자음에서는 ㆁ(옛이응), ㆆ(여린히읗), ㅿ(반치음) 3개가 없어졌습니다.

'ㆍ' 글자가 없어진 것은 그 소리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가끔 상표 같은 데서 'ㆍ' 글자를 살려쓰곤 하지만, 그 소리는 'ㅏ'로 내잖아요? 'ㆍ' 소리가 없어진 원인과 과정은 국어의 역사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많이 다루어질 만큼 논란거리가 많기 때문에, 아직도 명확한 해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ㆁ'은 글자만 없어졌고, 소리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현재 쓰이는 'ㅇ'이 훈민정음 창제시의 'ㆁ'과 'ㅇ' 역할을 겸하고 있죠. 원래 글자 모양이 비슷한데다가, 'ㆁ'은 종성 즉 받침에만 쓰이고 'ㅇ'은 초성에만 쓰였는데, 그냥 한 글자로 써도 혼동될 염려가 없습니다.

'ㆆ'은 이미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소리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유어 단어에는 전혀 쓰이지 않았고, 단지 한자음을 원래 중국음에 가깝게 교정할 때만 쓰였으니까요. 그래서 4글자 중에 가장 먼저 없어졌죠.

'ㅿ'도 그 소리가 없어졌습니다. 'ㅿ' 소리는 'ㅅ'으로 바뀌거나 'ㅇ'으로 바뀌어 남아있습니다. 현대국어에서 표준어의 '여우'와 방언의 '여수'는 그 좋은 예입니다. 또 표준어의 '(병이) 나아'를 방언에서는 '(병이) 나사'로 하기도 하죠.

2012.06.13.

  • 출처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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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22대왕 정조는 지난한 여정을 거쳐 왕위에 올라, 갖가지 개혁 정책 및 탕평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가 재위기간에 추진했던 각종 정책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왕위에 오르는 지난한 여정

조선의 제22대왕 정조,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될 때까지는 왕가의 일반적인 코스를 밟으며 순탄한 생을 살았다. 그러나 1762년 생부 사도세자(후일의 장헌세자,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됨)가 비극적으로 죽게 되면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지난한 여정을 거쳤다. 생부가 뒤주에 갇혀 죽던 1762년은 정조의 나이 11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영조에게 뒤주에 갇힌 생부를 살려 달라고 간청해야만 했던 어린 정조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장헌세자필첩의 일부. 장헌세자의 24∼5세의 필적.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영조는 장헌세자 사후 정조를 앞서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후일의 진종)를 후사로 삼아 왕통을 잇게 하였다. 사실 여부야 어찌 되었든 장헌세자가 죄인으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그의 아들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계통을 바꾼다고 해서 장헌세자와 정조의 부자 관계가 부정될 수는 없겠지만, 명분상으로는 죄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허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세손이지만 세자의 지위를 가지고 생활하던 정조는 영조 말년 경인 1775년 국왕을 대신해 대리청정하다가 다음 해 영조가 승하하면서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갖가지 방해공작이 이루어져, 정후겸 등이 정조를 해치려고 하였고, 그를 비방하는 내용으로 투서하거나 그가 거처하던 존현각에 괴한이 침입하여 염탐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그리고 대리청정이 결정될 당시에는 홍인한이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이른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제기하며 세손의 권위에 흠집을 내면서 대리청정을 반대한 적도 있었다. 정조가 비록 개인적인 불행을 딛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과정은 참으로 지난하였다.

학습과 훈련을 통해 향상된 정치리더십

리더십은 천부적으로 타고나기도 하지만, 생후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향상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제왕학(帝王學)은 정치리더십을 향상시키는 학문체계라 하겠다. 제왕학은 모든 군주가 갖춰야 할 학문을 말한다. 조선시대 군주들이 학습하는 제왕학은 정치의 득실과 인물의 능력, 민생의 고락을 파악하는 현실적인 학문으로, 학습을 통해 터득한 논리는 정치 현실에서 실천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를 실현할 수 있었다. 정조의 경우도 이 같은 제왕학의 학습체계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정조는 1752년 출생 이후 원손으로 책봉된 후 왕세손->동궁->국왕 등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지위가 바뀔 때마다 교육도 내용과 격을 달리하였는데, 보양청 교육->강학청 교육->시강원 교육->경연 교육 등의 네 개 과정이 이에 해당되었다. 성장 과정에 지속적인 교육 과정이 동반되었다. 정조는 이들 과정을 통해서 유교의 주요 경전을 비롯한 역사서와 조선시대 제왕학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성학집요]나 [정관정요] 등을 학습하였다.

정조는 이와는 별도로 할아버지 영조의 훈육도 받았다. 영조는 국왕이 신하에게 교육받는 수준에서 벗어나 국왕이 직접 학문을 연마하고 신하를 가르치려고 한 국왕이었다. 영조는 정계는 물론이고 학계까지 주도하는 군주가 되려고 하였으며, 그 이념은 유학에서 이상적인 사회라 말해지는 삼대(三代)의 군주상인 군사(君師; 군주가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기르고 가르치는 존재)였다. 영조는 보양청 단계에서부터 정조의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1757년 6살인 어린 원손을 불러 [동몽선습]을 외우게 하였고, 이듬해 경연자리에는 원손을 불러 [소학]을 외우게 함으로써 학습 진도를 점검하였다. 이후에도 영조는 수시로 정조를 데리고 경연에 참석하여 신하들과 토론하도록 하였고, 유교적 덕치와 군사로서의 국왕의 위상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후일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정조는 여러 방면에서 할아버지인 영조의 정치를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개혁과 대통합을 위하여


즉위 이후 정조는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를 홍국영을 통해 추진하였다. 동시에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 인재 육성과 학문 정치 구현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왕위에 오른 지 4년 정도 경과한 시점까지 자신의 정적들의 제거에 일단락 성공한 정조는 이후 각종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창덕궁 내 규장각. <출처 : 이근호>

우선 정치적으로는 선왕 영조를 계승, 탕평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와중에서 이른바 청류(淸流) 세력들을 끌어들였다. 영조 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노론의 우위를 주장하는 척신 세력과 이들을 타파하려는 노선인 청류를 자처하는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정조는 그동안 척신 세력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조정의 중심부로 끌어들여 이른바 탕평을 펼쳤다. 아울러 그동안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남인 세력을 등용하여 정치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공개된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을 통해서 보면 그의 정적이었다고 말해지는 벽파 세력까지도 협력 세력으로 포섭하여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런 탕평책의 추진과정에서 정권의 물리력 확보를 목적으로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였다.

정조는 또한 규장각을 통해서 학문정치를 구현하며 인재 육성을 추진, 이를 위해 연소한 문신들을 선발, 교육해 국가의 동량으로 키워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학문 정치의 명분 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이며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다. 또한, 규장각 내에 검서관 제도를 두어, 서얼 신분인 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을 등용하였다. 이들은 모두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박지원의 제자들인데,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정조는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소통을 기대하였다.

정조는 이 밖에도 지방인재 선발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정국이 주로 서울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조는 각 지역에 측근들을 파견해 과거를 시험보고, 그 결과로 여러 책자를 간행하였다. 교남(嶠南;영남)․호남․관서의 빈흥록(賓興錄)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영남이나 호남의 인재를 포섭하기 위해 영남인물고, 호남절의록 등을 편찬하였다. 이 밖에도 상업적으로는 통공정책을 추진하였다. 통공정책이란, 금난전권의 혁파와 자유상인 즉 난전 상인의 안정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단행된 상업정책을 말한다. 기존의 특권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도성 중심의 경제권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시장공간의 확대(경강, 누원, 송파 등) 등을 도모한 정책이었다.

개혁의 총아, 화성 건설과 좌절된 개혁군주의 꿈

정조가 추진한 개혁의 총결산은 아마도 화성의 건설로 모아지지 않을까 한다. 화성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이장을 계기로 조성된 성곽이었다. 정조는 화성을 단순한 군사적 기능을 수행한 성곽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곳을 무대로 자신이 개혁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를 시험하는 무대로 삼고자 하였다. 일단 축성 과정에 당시로써는 가장 선진적인 축성 기술을 도입하였고, 그가 즉위 이후 육성했던 정약용 등 측근세력을 대거 투입하여 주도하게 하였다. 또한, 화성을 포함한 수원 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국영 농장인 둔전을 설치하고, 경작을 위한 물의 확보를 위해 몇 개의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선진적인 농법 및 농업 경영 방식을 시험적으로 추진하였다. 통공정책을 통해서 자유로운 상행위가 가능해져 수원 일대 상인들 유치가 쉬워졌다. 화성은 개혁의 시험 무대이자 개혁의 결과물로 응축된 그야말로 정조대 개혁의 총아였다.

그러나 이런 개혁의 산물은 만개하기도 전에 역사 속으로 퇴장하였다. 현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다. 그의 사후 장용영이 혁파되고, 정조가 육성했던 세력들이 대거 축출되는 불운을 겪었다. 서울 중심의 벌열 세력에 의한 정치, 사회, 경제적 독점은 심화되었다.

그렇다면 정조가 꿈꾸었던 목표나 이상은 무엇일까? 정조는 스스로 군사(君師)로 자처하였다. 율곡 이이의 설명에 따르면, 태초에는 백성들이 새처럼 거처하고 생활이 도리가 구비되지 않았으며, 인문(人文)도 구비되지 못하였고, 임금도 없이 소박한 생활을 하다가 시간이 경과하면서 분란이 생겼는데, 이때 성인(聖人)이 출현하였다고 하였다.


화성 축성에 동원된 거중기. ([화성성역의궤]에서) <출처 : 이근호>

그러자 백성들이 이 성인을 임금으로 삼음으로써 군사(君師)의 직책을 갖게 되었고, 이로써 백성의 생업이 편안해지고 하늘의 질서가 밝아졌다고 하였다. 유교에서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제시하는 요․순이 이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결국, 정조 역시도 선왕인 영조가 그랬던 것처럼 군사가 되기를 원했고, 개혁과 대통합을 통해 백성들의 생업이 편안해지고 질서가 잡힌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

201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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