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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도덕숙제
비공개 조회수 7,231 작성일2009.03.25

1.노자

2.칸트

3.쾨니히스베르그

4.고자

5.로크

6.하늘에관련된시

7.윤동주

8.맹자

9.유진박

10.루소

11.홈스

다 조사해오라는데요... 

알려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급해요!!~~

내공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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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자

無爲而不爲를 아시나요?

함이 없는데도 되지 않는 것이 없다.

노자의 불위사상을 이것을 뜻하는 것이죠.

 

세상을 이렇다 저렇다.

곧 나는 예쁘다 못생겼다 뚱뚱하다 날씬하다/

등으로 자신을 매길 수 없는 거죠.

곧 정치자체도 현실정치 라기 보다는

좀 더 자유롭고 근심없는 세속과는 일탈된 사상을 전개한것이죠.

논어에서도 도가학파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도가에서는 유가를

'안될 줄 알면서도 굳이 하려고 하는자'  등.

'벼에 대한 것(살아남기위한 주거등등..)은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유세하는자'등

비관적인 입장이죠 아물론 보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다른 것 이니깐요

곧 유가쪽이 참여정치로서의 역활이고

도가는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것이 물 흘러가듯 유유자적될거라는.

그런 정치사상을 품고 있는 것이죠.일탈과 같은?

 

2.칸트

세상만사는 본질적으로 우연적인데 그 확률은 필연적이란 뜻이다. 실제로 교통사고의 경우 한 개인이 보기에는 우연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필연이다

칸트는 철학자 중에 그 누구보다 사람의 인격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윤리학에서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이죠.

수능에서 윤리를 배우시면 칸트가 가장 비중있게 다뤄짐을 알 수 있습니다.

 

3.쾨니 히스 베르크

쾨니 히스 베르크의 다리문제를 낸사람인데

수학자일듯... (ㅈㅅㅈㅅ)

 

4.고자

고자는 공자가 아닐까요???

공자는

본명은 구이고 별칭은 자 중니

국적은 중국 노

활동분야는 교육 철학이며

출생지는 중국 산둥성 취푸이다.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 :지금의 의 남동)에서 BC 551년에 출생하였다. 자는 중니(), 이름은 구()이다. 공자의 ‘자()’는 존칭이다. 춘추 말기 사람으로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인()이며,‘극기복례( :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이다)'를 그 핵심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인()을 단지 도덕규범이 아닌 사회질서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사상으로 생각했다. 

 

5.로크

국적 영국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영국링턴

주요저서 인간오성론(1690)

브리스틀 근교의 링턴 출생. 계몽철학 및 경험론철학의 원조로 일컬어진다. 아버지는 소지주 ·법률가로서 내란 때는 의회군에 참가하여 왕당군과 싸웠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배웠고, 한때 공사(使)의 비서관이 되어 독일 체류 중에 애슐리경(뒤의 샤프츠베리 백작)을 알게 되어 그의 시의() 및 아들의 교사 그리고 고문이 되었다. 백작이 실각되자 반역죄로 몰려,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1689년 사면되어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동안 각지를 전전하면서 여러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귀국 후 《종교 관용에 관한 서한》(1689) 《제2서한》(1690) 《제3서한》(1692) 《통치이론》(1690) 《인간오성론()》(1690) 등을 간행하여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관직에 있었으나 1700년 이후 은퇴하여 에식스의 오츠에서 사망하였다.

 

6.하늘에 관련된시

하늘에 관련된시는 뭐니뭐니해도

천상병의 귀천이죠

제가 좋아하는 시인데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7.윤동주

윤동주 시인 이외에도 일본의 얼토당토 하지않는 대륙통일 명분에는 많은 조선의 학자와 군인과 일반시민 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당시 일본의 입장으로 보자면 대륙통일의 걸림돌 이였겠지요 윤동주 시인이 일본 옥에서 광복을 앞두고 죽은 이유는 광복을 하고 윤동주시인을 풀어줬을 경우 윤동주 시인은 자기가 당했던 억울함을 토로 했겠지요 당시 윤동주 시인은 근대조선의 저명한 시인 이였으니까요 연합군의 합세로 일본은 광복 반년전부터 패배를 예상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만약에 전쟁 종결 후에 자신들이 한 말도안되는 인권 유린과 학살이 발각될걸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다들 종군위안부 라 알고계시는 대한민국의 할머니들 강제로 노동착취를 당한 대한민국의

할아버지들 해방을 부르짖다 옥살이를 하던 독립운동가가 형장의 눈물방울 되어 가장 많이 하늘로 불려가신때도

1945년 해방 직전 이였습니다. 이들을 풀어줄 경우 일본이 했던 모든 만행이 속속들이 들어날 것이며 그에따른

비난과 욕설을 감추고 싶었던 급급한 마음이였겠지요 그렇게 하나둘 생명을 빼앗다가 미국이 일본 5대 도시에

원폭을 투하하게 되지요 전혀 예상 못했던 일본은 추가적 폭격을 겁나 하며 본토에 억류되어있던 포로 들을 해방 시키고 아시아 각국에 나가있던 군인들을 귀환 시킵니다. 이때에 귀중한 생명을 지키신 분들이 바로 지금의

상처를 가지고 계시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들입니다.

 

8.맹자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 즉, 사람의 마음엔 도덕적 이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맹자는 그 예로 어린아이가 우물가에 빠지려고 하면 누구나 그 아이를 구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어떤 이로움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가엾이 여기는 마음[측은지심]이 발현한 결과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성선의 근거로 측은지심을 비롯한 네가지 실마리[사단]를 주장했습니다. 그릇된 걸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 좋은 것을 양보하고자 하는 마음[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시비지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실마리들은 각각 네가지 덕[사덕, 인의예지]으로 발전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선한 본성덕에 사람은 도덕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선한 본성에도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는 까닭은 불가피한 외부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먼 뒷날 송, 명대에 이르러 누구나 성스러운 이[聖人]가 될 수 있다는 성리학과 양명학이라는 형이상학적 철학으로 체계화 되어 더욱 크게 발전합니다.

 덧붙여 성선설과 같은 맥락으로 인간의 본성을 긍정한 다른 사상으로는 불교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은 본디 청정무구한 존재라고 합니다.

 

9.유진박

1975년 9월 14일 뉴욕출생

줄리어드 예비학교 입학 (8세)

웨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 (10세)

링컨센터 협연(13세)

96년 줄리어드 음대 졸업

뉴욕 라디오 시티 뮤직 공연, 수퍼볼 전야 축제 공연,
아스팬 째즈앙상블 협연 등

솔로 초대 artist로서 cafe 'wha'에서 전자 violin으로 공연

그외 많은 클럽에서 공연함. (rainbow room, vision,blue note)

KBS 일요 스페셜 '줄리어드' (1995. 11. 19 방영)
줄리어드 출신 천재 예비 음악가로 특별 방송

97.8.28 Sony Music에서 첫번째 앨범 "The Bridge" 발매

98. 11 두번째 앨범 "Peace" 발매

수상경력
- 줄리어드 스쿨 콩쿨 우승
- ISO 컴피티션 대상
- 아스팬 뮤직 스쿨 컴피티션 우승 등 6개 콩쿨 우승

 

10.루소

프랑스의 사상가·소설가.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사상가, 소설
출생지 : 스위스 제네바
주요저서 : 《신 엘로이즈》(1761) 《고백록》 《에밀》(1762)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가 루소를 낳다가 죽자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10세 때는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숙부에게 맡겨졌으며, 공장(工匠)의 심부름 따위를 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 제네바를 떠나 청년기를 방랑생활로 보냈는데, 이 기간에 바랑 남작부인을 만나 모자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사랑이 기묘하게 뒤섞인 것 같은 관계를 맺고, 집사로 일하면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1742년 파리로 나와 디드로 등과 친교를 맺고, 진행 중인 《백과전서》의 간행에도 협력하였다. 1749년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당선한 《학문과 예술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을 출판하여 사상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인간불평등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galit parmi les hommes》(1755), 《정치 경제론 De l’conomie politique》(1755), 《언어기원론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사후 간행) 등을 쓰면서 디드로를 비롯하여 진보를 기치로 내세우는 백과전서파 철학자나 볼테르 등과의 견해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 Lettre d’Alembert》(1758) 이후 디드로와의 사이는 절교상태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극한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11.홈스

셜록홈즈는 가공의 인물로 실존인물이 아닙니다.

아래는 셜록홈즈를 탄생하게된 사건을 소개합니다.
1861년 노바스코사의 스펜서 섬에서 건조되어 아마존 호로 명명되었다가 1867년 메리 셀레스테 호로 이름을 바꾼 선박의 승무원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

 지브롤터의 서쪽 950킬로미터 지점의 아조레스 제도 부근에서 셀레스테 호를 뒤따르던 데이 그라시 호의 선장 무어하우스는 메리 셀레스테 호가 돛은 펼쳐져 있었으나 항해하는 모습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해 선원들을 시켜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셀레스테 호를 조사하던 선원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배에는 아무도 없었고 갑자기 황급하게 그곳을 떠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메리 셀레스테 호의 수수께끼는 정밀하게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의문점이 늘어갔습니다. 나침반 상자가 망가져 있고 나침반도 고장 나 있었습니다. 선장실에 항해용 기계류나 측정기가 보이지 않았고 항해일지에 의하면 9일 동안 약 1230㎞를 표류했고. 가장 의심스런 일은 구명보트는 없어졌는데도 살아남는데 필요한 식량과 식수를 전혀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메리 셀레스테 호의 선원실종 사건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건이 일어난 지점이 버뮤다 삼각지대는 아니지만 유기된 채로 발견되기 직전 버뮤다 삼각지대 북쪽을 통과하였기 때문에 버뮤다 삼각지대의 실종 사건이 거론될 때마다 거론되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사고 원인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여 “선원들이 우주인에 의해 납치되었다, 회오리바람이나 거대한 바다뱀이 갑판 위의 선원들을 쓸어갔다, 해적의 소행이다, 선원들이 갑자기 미쳐서 모두 자살했다”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였으나 아직도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는 않은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어 수많은 미스터리 책자에서 단골로 다루고 있습니다.

1882년, 의사자격증을 딴 23살의 아서 도일은 포츠머스 교외의 사우스 시에서 병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환자가 별로 없어 심심풀이로 메리 셀레스테 호의 의문스런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884년 〈콘힐〉이라는 잡지에 「제이 하버쿠크 젭슨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도일의 추리소설은 예상외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어디까지나 흥미 본위로 쓴 소설이었기 때문에 메리 셀레스테 호의 미스터리를 정확하게 밝혀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 후 전문적인 작가로 길을 나섰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추리 소설의 으뜸으로 치는 불후의 대 성공을 거두는 코난 도일로 '셜록 홈즈'를 탄생시킨 주인공 이였습니다.

 

휴 네이버에서 조금 옮겼지만

몇몇은 제가 손제작 한것입니다

잘 사용해주시고 채택 좀..

200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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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자

명 이이(). 자 담(). 노담()이라고도 한다. 초()나라 고현(, 지금의 鹿) 출생. 춘추시대() 말기 주()에서 장서실()을 관리하던 수장실사()를 하였다.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뤄양[]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둔할 것을 결심해 서방(西)으로 떠나는 도중에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이라고도 하는데, 도가 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2 칸트

동()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그 이전의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그 이후의 발전에 새로운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 영향은 여러 가지 형태로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으며, 근세 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마구() 제조업자인 아버지와 경건하고 신앙심 두터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루터교 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학교에 입학하여 8년 6개월 동안 라틴어 교육을 받은 후 고향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모교의 교수로 일생을 마쳤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해 온 변경()의 소시민 가정에서 장성한 칸트프리드리히 대왕 시대의 계몽적인 시민육성책의 혜택도 받을 수 있어 지리적 ·역사적 조건이 그의 철학으로 하여금 독일적 특수성을 떠나 참다운 ‘세계시민적’인 철학이 되게 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는 당시의 신사상이었던 뉴턴역학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나 모교의 강사직을 얻은 1755년에 《천계()의 일반자연사와 이론 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 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 저작에서 그는 뉴턴역학의 모든 원리를 확대 적용하여 우주의 발생을 역학적()으로 해명하려고 하였는데, 후일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로 널리 알려지게 된 획기적인 업적을 수립하였다. I.뉴턴의 방법의 철저한 적용이라는 이 대담한 시도는 목적론적 세계관에의 귀의()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그것의 바탕 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일면을 지닌다.

여기의 내포되는 모순이 의식에 떠오른다면 그것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함을 뜻할 것이다. 이 위기에서 칸트를 구한 것은 J.J.루소이다. 그는 칸트로 하여금 문명에 침식되지 않은 소박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눈뜨게 하고, 여기에다 그 후의 모든 사상적 노력의 숨은 기초를 뿌리박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뉴턴, 루소를 두 개의 기둥으로 삼고 D.흄을 부정적 매개체로 하여 중세 이후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그 밑뿌리까지 파고들어 전면적 재편성을 시도함으로써 비판철학을 탄생시켰다.

그는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 에서 뉴턴의 수학적 자연과학에 의한 인식구조에의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종래의 신()중심적인 색채가 남아 있는 형이상학의 모든 개념이 모두 인간 중심적인, 즉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학적인 의미로 바뀌어야 되는 이유를 들고, 나아가 일반적 ·세계관적 귀결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인식이 성립되는 장면을 해명해야 할 인간학적 형이상학을 새로 수립하는 일을 통하여, 종래의 신적 형이상학()이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제2의 비판서인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에서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율적 인간의 도덕을 논하고, 실천의 장()에서의 인간의 구조에 ‘불가결한 요청()’이라는 형태로 신() ·영세() 등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내실을 재흥시켜 그것이 새롭게 인간학적 철학에서 점유할 위치를 지적하였다. 종교를 도덕의 바탕 위에 두는 이 구상()은 그 후의 《종교론》(1793)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이상 두 가지 비판서로 명백하게 된 인식과 실천이라는 두 개의 장면을 매개하고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장()의 구조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인간학적 철학을 종결짓고자 구상된 것이 제3의 비판서인 《판단력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1790)이다. 여기서 칸트는 미()와 유기체()의 인식이라는 장면의 분석을 통하여 목적론적 인식의 구조를 명백히 하고, 또한 목적론기계론의 관계라는, 일생의 과제이며 동시에 세기적 과제에 비판적 해결을 부여하여 스스로의 철학적 노력을 결말지은 것이다.

이상 3권의 비판서에 의하여 그 토대가 놓여진, 비판철학 사상과 밀접히 관련하여, 또는 그 위에 기초한 사고()를 전개한 기타의 주요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의 해설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롤레고메나 Prolegomena》(1783), 《실천이성비판》에 앞서 비판적 논리학의 기본구상을 기술한 《도덕형이상학원론()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1785), 이것에 기초한 법철학 ·도덕철학의 구체적 체계를 전개한 《도덕형이상학 Metaphysik der Sitten》(1797), 그 자매편으로 자연철학의 체계를 전개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원리 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1786)가 있다. 또 오랜 기간의 강의를 정리하여 출판한 《인간학》(1798) 《자연지리학》(1802)은 칸트의 폭넓은 실제적 지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칸트의 철학은 3권의 비판서 간행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예나를 비롯한 몇 곳을 거점으로 하여 순식간에 전독일의 대학 ·논단을 석권하였고, J.G.피히테에서 G.W.F.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 철학의 선두 주자로서, 또 그 모태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은 다시 영국 ·프랑스의 이상주의철학까지 미쳤으며, 특히 후일의 독일 신()칸트학파의 철학은 칸트의 비판주의의 직접계승을 지향한 것이었다. 또한 신칸트학파 퇴조 후에 나타난 수많은 철학 조류도 모두 직접 ·간접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3 쾨니히스베르그

[명사]<지명>러시아 연방 서부에 있는 도시. 주요 산업견직조를 비롯 직물 산업식품 가공기기제조업이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946 칼리닌그라드다가 다시 쾨니히스베르크다.

'쾨니히스베르그'는 철학자 칸트가 평생을 보낸 도시이자 수학과 관련해서도 기념비적인 곳이다.

쾨니히스베르그는 '프레골랴'강에 의해 네 지역으로 나뉘는데, 이 네 지역은 7개의 다리로 연결돼 있었다. 수학자들은 같은 다리를 두 번 건너지 않고, 모든 다리를 건널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려보면 알겠지만 불가능하다

4.고자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의 사상가. 성 고(), 이름 불해(). 맹자(:BC 372∼BC 289)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인성()에 관하여 맹자와 논쟁을 벌여,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다만 교육하기 나름으로 그 어느 것으로도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맹자와의 논의는 《맹자》 <고자() 상편()>에 수록되어 있다.

 

 

5.로크

 

브리스틀 근교의 링턴 출생. 계몽철학 및 경험론철학의 원조로 일컬어진다. 아버지는 소지주 ·법률가로서 내란 때는 의회군에 참가하여 왕당군과 싸웠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배웠고, 한때 공사(使)의 비서관이 되어 독일 체류 중에 애슐리경(뒤의 샤프츠베리 백작)을 알게 되어 그의 시의() 및 아들의 교사 그리고 고문이 되었다. 백작이 실각되자 반역죄로 몰려,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1689년 사면되어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동안 각지를 전전하면서 여러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귀국 후 《종교 관용에 관한 서한》(1689) 《제2서한》(1690) 《제3서한》(1692) 《통치이론》(1690) 《인간오성론()》(1690) 등을 간행하여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관직에 있었으나 1700년 이후 은퇴하여 에식스의 오츠에서 사망하였다.

데카르트 철학과 I.뉴턴에 의해 완성된 당시의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반()스콜라적이었다. 《인간오성론》은 그의 영향을 바탕으로 G.버클리, D.흄에게로 계승되었던 경험론과 내재적 현상론()의 입장에서, I.칸트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되는 인식을 근본 과제로 제기하여 논술한 저서이다.

제1권에서는, 먼저 R.데카르트나 케임브리지 플라톤파()의 본유관념()과 원리를 부정하고, 그 위에 제2권에서는, 인지()는 모두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단순관념에 유래하며, 그로부터의 복합관념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실체()’ 개념도 단순관념의 복합이며, 기체()는 그 배후에 상정되는 불가지()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단, 색() ·향() ·음()과 같이 감각에 대하여 상대적인 제2성질과, 연장() ·운동 ·고체성()과 같이 물() 자체에 구비된 제1성질과 구별하여, 전자()는 후자가 감각기관에 자극을 줌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하여, 당시의 과학적 실재론을 전제로 삼았다. 또, 불가지인 물적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정신에 대해서도 반성의 관념과 기능적 인격에 의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정신실체나 신의 존재를 인정한 점에서, 그 문제를 다음의 버클리와 흄에게 남겨 놓았다.

제3권의 언어론은, 스콜라적 실체형상()의 비판, 개념론 또는 유명론적()인 보편개념의 설명 ·정의에 대해서의 견해 등 현대 의미론()에 통하는 중요한 고찰을 포함시켰다. 제4권은 제3권까지 논술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지식의 확실성 ·가능성 ·종류 등을 논했다. 제4권에서 자아의 직각지()를 지식의 근원으로 하는 것 등 이성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나, 지식을 관념과 대상 간이 아니라 관념간의 일치 또는 불일치의 지각()이라는, 관념간의 관계라고 한 것은 후의 경험론의 방향을 보인 것이다.

그에게는 《인간오성론》에서 단편적으로 취급된 이외에는 정리된 윤리서()는 없다. 그러나 도덕의 심리적 해명 방법이나 쾌락주의 ·행복주의의 경향과, 도덕을 신()의 법, 자연법, 국법과의 일치에서 구하려고 한 방향 등은 영국 고유의 윤리와 공통된 성격을 보인다. 또, 계시()의 뜻을 인정하면서도 이성적 논증()의 한계를 넘는 것을 개연적()이라 생각하는 점에서 종교상 이신론()을 조장하는 입장에 섰다.

법 ·정치 사상에서는 계약설을 취하지만, 홉스의 전제주의()를 자연상태보다도 더 나쁘다고 생각하여 주권재민()과 국민의 반항권을 인정하여 대표제에 의한 민주주의, 입법권집행권의 분립, 이성적인 법에 따른 통치와 개인의 자유·인권과의 양립 등을 강조하여 종교적 관용을 역설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예혁명을 대변하고 프랑스혁명이나 아메리카 독립 등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서구(西) 민주주의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유럽 문명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원시적 사회를 비교하는 등 서구 중심주의로 치우친 면이 있다.

교육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의 교육법을 통렬히 비판하여 그리스 ·라틴어 집중주의, 암기식 주입주의를 반대하고 수학적 추리와 유용한 실제적 지식, 신체 ·덕성의 단련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그 사람의 소질을 본성에 따라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여 가정교사에 의한 교육을 주장했다. 저서로 《금리저하와 화폐가치와 화폐가치 앙등의 결과에 관한 고찰》(1691) 《교육론》(1693) 등이 있다.

 

6.하늘에관련된시

  


 

7.윤동주

 

만주 북간도명동촌()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이며, 아버지는 윤영석(), 어머니는 김룡()이다. 1931년(14세)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에 묻혔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윤동주는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처녀작은 <삶과 죽음> <초한대>이다. 발표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인 <쉽게 쓰여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1948).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작으로 그의 인간됨과 사상을 반영하는 해맑은 시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시로서, 어두운 시대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1968).

 

8.맹자

 

이름은 맹가()이다. 자는 자여(輿) 또는 자거()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산둥성[] 쪼우셴현[]에 있었던 추()에서 출생하였다.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어릴 때 현모()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맹모삼천지교()는 유명한 고사이다.

제후가 유능한 인재들을 찾는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의 한 사람으로서 맹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제후가 찾는 것은 부국강병()이나 외교적 책모()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였으며, 따라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만년에는 제자교육에 전념하였고, 저술도 하였다.

《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후세의 편찬물이지만, 내용은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주자학() 이후로 《맹자》는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사서()'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명문으로 여겨진다.

 

9.유진박

 

1975년 9월 14일 뉴욕출생

줄리어드 예비학교 입학 (8세)

웨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 (10세)

링컨센터 협연(13세)

96년 줄리어드 음대 졸업

뉴욕 라디오 시티 뮤직 공연, 수퍼볼 전야 축제 공연,
아스팬 째즈앙상블 협연 등

솔로 초대 artist로서 cafe 'wha'에서 전자 violin으로 공연

그외 많은 클럽에서 공연함. (rainbow room, vision,blue note)

KBS 일요 스페셜 '줄리어드' (1995. 11. 19 방영)
줄리어드 출신 천재 예비 음악가로 특별 방송

97.8.28 Sony Music에서 첫번째 앨범 "The Bridge" 발매

98. 11 두번째 앨범 "Peace" 발매

수상경력
- 줄리어드 스쿨 콩쿨 우승
- ISO 컴피티션 대상
- 아스팬 뮤직 스쿨 컴피티션 우승 등 6개 콩쿨 우승




▶ 주요 활동 ◀


- 1996년 12월 KBS 열린음악회에서 국내 활동 시작
- 97년 상반기 LG패션 재즈콘서트, 야누스, 버드랜드, 천년동안도 등 국내 라이브클럽 무대에서 활동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



- 1997년 6월 29일 TBC주최 대구 경북대학교 콘서트
"유진 박 록 페스티발"
- 7월 2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Summer Jazz Festival 참가.



- 8월 29일
'Sony Music Entertainment Japan Tokyo Meeting & Show Case' 참가.

- 97년 8월 앨범 "The Bridge" 발표.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음악을 표현하고 싶다는 유진박의 주장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들을 만한 첫 앨범인 'The Bridge'는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 테크노, 얼터너티브 록, 국악까지를 포괄한다.


- 9월2일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 2층에서 유진 박의 첫 솔로앨범 "The Bridge"의 발매를 기념해 쇼케이스 및 기자회견.


- 97년 10월 24일~25일 서울 프라자 호텔 공연.






- 97년 11월 호암 아트홀 공연.




- 97년 12월 30일 ~ 98년 1월 1일까지 대학로의 라이브 극장 2관에서 공연.

- 98년 1월 10일 국제 전자상가 이벤트홀에서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유니텔등 통신상의 팬클럽인 COOCOO의 모임및 작은 공연.



- 98년 1월 16일 문화애호가들이 모여 문화사업을 후원하는 "문화사랑회" 발족 기념 첫 음악회 출연. (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 )

- 98년 1월 24일 세종문화회관 공연.

- 98년 2월 28일~3월 1일 부산 동아대학교 석강홀 공연.


- 98년 3월 8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공연.



- 98년 3월 대구 경북대 외 안동, 포항, 울산, 인천 공연.
- 98년 4월 춘천 강원대, 대전 공연.


- 98년 2월부터 다시 버드랜드 공연 시작.
- 98년 5월 '98 자유 공연.

- 98년 6월 구미 금오공대 공연.

- 98년 6월 KBS 드라마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출연.





- 98년 11월 2집 앨범 "Peace" 발표.


- 98년 11월 MBC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 - 서울의 휴일 편" 출연.

- 98년 12월 18일 「유진 박장학회」설립.
6개월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고교생 20명을 선정해 50만원씩 장학금을 주며, 해당 학교에는 시가 150만원 상당의 전기바이올린을 1대씩 기증한다.

1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재즈라이브클럽 「버드랜드」에서 장학금 수혜학생과 학부모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학회설립 기념공연.




- 98년 12월 24일 부산공연
- 98년 12월 25일 서울 Hyatt 호텔 Grand Ballroom 공연.

- 99년 2월 20일(토)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

 

10.루소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가 루소를 낳다가 죽자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10세 때는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숙부에게 맡겨졌으며, 공장()의 심부름 따위를 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 제네바를 떠나 청년기를 방랑생활로 보냈는데, 이 기간에 바랑 남작부인을 만나 모자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사랑이 기묘하게 뒤섞인 것 같은 관계를 맺고, 집사로 일하면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1742년 파리로 나와 디드로 등과 친교를 맺고, 진행 중인 《백과전서》의 간행에도 협력하였다. 1750년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당선한 《과학과 예술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을 출판하여 사상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인간불평등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1755), 《정치 경제론 De l’économie politique》(1755), 《언어기원론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사후 간행) 등을 쓰면서 디드로를 비롯하여 진보를 기치로 내세우는 백과전서파 철학자나 볼테르 등과의 견해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 Lettre d’Alembert》(1758) 이후 디드로와의 사이는 절교상태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극한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독자적 입장에 선 루소는 다시 서간체 연애소설 《신() 엘로이즈 Nouvelle Héloïse》(1761),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논한 《민약론() Du Contrat social》(1762), 소설 형식의 교육론 《에밀 mile》(1762) 등의 대작을 차례로 출판하였는데, 특히 《신 엘로이즈》의 성공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에밀》이 출판되자 파리대학 신학부가 이를 고발, 파리 고등법원은 루소에 대하여 유죄를 논고함과 동시에 체포령을 내려 스위스 ·영국 등으로 도피하였다. 영국에서 흄과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후, 프랑스로 돌아와 각지를 전전하면서 자전적 작품인 《고백록 Les Confessions》을 집필하였다.

1768년 1745년 이래 함께 지내온 테레즈 르바쇠르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그 후 파리에 정착한 루소는 피해망상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자기변호의 작품 《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 Rousseau juge de Jean-Jacques》를 쓰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Les 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파리 북쪽 에르므농빌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11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1794년 유해를 팡테옹(위인들을 하는 파리의 성당)으로 옮겨 볼테르와 나란히 묻었다.

평생 동안 많은 저서를 통하여 지극히 광범위한 문제를 논하였으나, 그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연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자연)을 발견하여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손상시키고 있는 당대의 사회나 문화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그 문제의 제기 방법도 매우 현대적이었다. 한편,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자아의 고백이나 아름다운 자연묘사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1.홈스

 

1588년 4월 5일 맘즈베리에서 출생하였다. 무명의 목사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스콜라철학을 전공하였다. 스튜어트왕조를 지지하는 정치가로 지목되자, 청교도혁명 직전에 프랑스로 망명하여 유물론자 R.가생디와 철학자인 R.데카르트 등과 알게 되었다. 그 후 크롬웰의 정권하에서는 런던으로 돌아와 정쟁()에 개입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 힘썼다. 왕정복고() 후에도 찰스 2세 통치하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F.베이컨과는 달리 귀납법()만이 아닌 연역법()도 중시하여, 양자의 상즉적() 관계에 의하여 이성()의 올바른 추리인 철학이 성립된다고 생각하였다.

주요 저서인 《철학원리》는 제1부 〈물체론〉(1655), 제2부 〈인간론〉(1658), 제3부 〈시민론()〉(1642, 1647) 등 3부로 나누어졌는데 베이컨 학설보다 더 체계적으로 구축되었다. 제1부 〈물체론〉에서 그는 자연학()을 철학의 기초에 두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목적인()을 버리고 전실재()를 물체와 그 운동이라는 동력인()만으로 설명하려는 유물론, 즉 자연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자연적 물체에 대한 이와 같은 생각을 인위적 물체인 ‘인간’이나 ‘국가’에도 미치게 하여, 감각·감성() 등의 인식의 이론이나 정념론(), 윤리학, 법·사회의 이론에도 적용하였다.

정신은 미세한 물체이고, 인식은 외계의 운동이 감관()에 주는 인상에서 생기며 실재의 모사()가 아니고 주관적이라 하였다. 이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으며, 지적인 판단이나 추리는 그 표현수단으로서 언어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후자도 실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개개의 물체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추상적·보편적 개념은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중세()의 W.오컴 등에서 현저했고, 또 후일의 영국 경험론에서 보는 고유한 유명론()의 전형적인 예이다. 수학()은 앞에서 말한 기호로서의 보편자()에 관계되는 지식의 모범이라 하였다.

감정이나 정서에 대해서도 똑같은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외적 자극에 대한 이론적 반응이 감각인 데 반하여, 실천적 반응은 쾌()·불쾌()의 감정이다. 선()이란 쾌이므로 인간이 바라는 것이고, 악()이란 불쾌이므로 인간이 싫어하는 것이다. 의지()는 외적으로 결정되며 결정론()은 필연이다. 본질적으로 선한 것은 없고, 선악()·정사()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국가와 법이 성립되었을 때에 그 판정의 기준이 생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어서 ‘자연상태’에서는 아무것도 금할 수 없고, 개인의 힘이 권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끝까지 추구하는 자연상태에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고,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리[]’이기 때문에 자기 보존()의 보증마저 없다. 그러므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은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그것을 양도하여 복종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 Leviathan》(1651)에서 전제군주제()를 이상적인 국가형태라고 생각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 《자연법과 국가의 원리》(1640) 등이 있다.

2009.03.25.

  • 출처

    네이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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