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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나라 문화유산
alwl**** 조회수 55,576 작성일2008.03.26

우리나라  문화 유산 좀 갈켜주세요

 

말듣쓰 에 써야해서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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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세계문화 유산


1975년부터 유네스코(UNESCO)는 세계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문화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세계 문화 유산’을 정해 두고 있어요. 우리 나라의 세계 문화 유산은 현재 일곱 가지예요.
종묘,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 장경판전, 수원화성, 창덕궁,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지,
경주역사유적지구.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우리 문화 유적지를 둘러보고,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을 가져요.





▶ 불국사와 석굴암
불국사와 석굴암은 751년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짓기 시작해 774년 혜공왕 때 완성되었어요. 불국사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슬픈 전설과 함께 전해져요. 토함산 정상 조금 못 미친 깊숙한 곳에 동해를 향해 앉아 있는 석굴암은 3.5미터의 불상이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만들어요. 신라시대 찬란했던 불교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이에요.
 
 



종묘 ◀
서울 도심 한복판 종로 3가, 기와문을 지나면 연못과 단정한 조선시대 건축물을 만날 수 있어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 사당인 종묘는 394년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해 12월에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9월에 완성되었어요. 정전과 영녕전 건물은 정면이 매우 긴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어요.
 
 


▶ 해인사 장경판전
수백 년의 세월 동안, 81,258장의 대장경판을 보존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 13세기에 만들어진 해인사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의 대장경판을 보존하고 있는 해인사의 가장 오래된 건물이에요. 15칸이나 되는 큰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있고, 그 사이를 두 채의 작은 판전이 잇고 있어요. 환기와 온도, 습도 조절 등의 기능이 현대의 과학 기술로도 따라갈 수 없어요.
 
 


수원 화성 ◀
수원을 빙 둘러싸고 있는 화성은 조선시대 정조 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만들어진 거예요. 전체 둘레가 5,744미터인 화성은 6·25 전쟁 때 부서진 것을 만들어질 당시의 성곽 모습 그대로 다시 세웠어요.
 
 

▶ 경주 역사 유적 지구
신라의 수도로 천 년 세월의 흔적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경주는 남산 미애석불을 비롯한 수많은 불상과 계림, 분황사 석탑, 포석정, 첨성대 등이 있는 역사의 도시예요.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유적의 성격에 따라 남산지구, 월성지구, 대릉원지구, 황룡사지구, 산성지구로 나뉘어요.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더하는 우리 문화 유산들을 살펴봤어요. 하지만 몇몇 유적지는 보존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고 지금도 조금씩 훼손되고 있답니다. 소중하게 지켜야 할 문화 유산이 늘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창덕궁 ◀
조선시대 태종 5년인 1405년 지어진 창덕궁은 왕들이 정사를 보살펴 온 궁이에요.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사용되던 인정전, 왕이 나라의 정사를 돌보던 선정전 등과 산책을 할 수 있는 넓은 뒤뜰로 이루어져 있어요.

2008.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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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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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지정 한국의 세계유산.

강화 고인돌유적;-인천 강화군 부근,삼거,오상리=2000,12 지정.

고창 고인돌유적;-전북 고창군 죽림,도산리=2000,12 지정.

화순 고인돌유적;-전남 화순군 도곡면 춘양리,효산면 대신리=2000,12 지정.

불 국 사;-경북 경주시 진현동 = 1995,12 지정.

석 굴 암;-경북 경주시 진현동 = 1995,12 지정.

종     묘;-서울 종로구 훈정동 = 1995,12 지정.

경주역사유적지구;-경주 남산,월성,대능원,황룡사,산성지구.= 2000,12 지정.

창 덕 궁;-서울 종로구 와룡동 = 1997,12 지정.

수원 화성;-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 1997,12 지정.

해인사 장경판전;-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995,12 지정.

 

유네스코 지정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승정원 일기;-서울대학교 규장각 = 2001,9 지정.

조선왕조실록;-서울대학교 규장각 = 1997,10 지정.

직지심체요절;-프랑스 국립도서관 = 2001,9 지정.

훈민정음;-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 1997,10 지정.

 

유네스코 지정 한국의 세계무형유산.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서울 종로구 종묘 = 2001,5,18 지정.

판 소 리 = 2003,11,7 지정.

강릉 단오제;-강원도 강릉시 = 2005,11,25 지정.

 

유네스코 지정 한국의 세계자연유산.

제주화산섬 및 용암동굴;-제 주 도 = 2007,6,23 지정.

 

200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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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s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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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이 : 김대성

만들어진 시대 : 신라 경덕왕 10년 (751년) ~ 혜공왕 10년 (774년)

종목 : 국보 제 24호

있는 곳 : 경북 경주시 토함산

석굴암 본존 불상 : 화강석으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326cm, 세기는 8세기 통일신라 때

가치와 의의 : 가치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로 될 만큼 뛰어나다. 만들기 힘든 화강암으로 제작하였고,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이 것은 건축, 수리, 기하학, 예술이 종합적으로 어울린다.

보존 상태 : 일제 우체부에게 발견의 의해 헐은 뒤 시멘트 보수 공사 → 박정희 대통령의 2차 보수 공사(이것도 시멘트로 함) → 지금은 아직 3차 보수 공사를 하지 않았다.

석굴암 본존 불상의 비밀 : 옛날 일제 시대 때, 일본 놈들이 석굴암 본존 불상 이마에 있는 보석을 떼어 갔다. 옛날 김대성이 조각하였는데, 실제로 이것은 불상이 아니라고 한다. 조각해 놓은 석굴암 본존 불상은 불상 즉 부처님이 아니고 항마촉지인이라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즉 깨달음을 얻었지만 부처가 되지 못하고 대마왕에게 유혹당해 마로 들어간 항마촉지인이다.

역사적 사실 : 석굴암을 지어 부처님께 나라를 수호해 달라는 바램이다.

석굴암의 구조와 특징 : 석굴암의 구조적 특색은 무엇보다 화강암의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적으로 축소한 석굴사찰이라는 점이다. 즉, 인도․중국 등의 경우와 같이 천연의 암벽을 뚫고 조성한 천연석


국보 31호
명 칭 경주첨성대
소재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 대 신라시대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국보 118호
명칭:금동미륵반가상
소재지: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시대:삼국시대(고구려)

1944년 평양시 평천리에서 공사를 하던 중 출토된 작은 보살상으로 높이 17.5㎝이다. 전면에 녹이 많이 슬었고 오랫동안 흙속에서 침식된 흔적이 뚜렷하며, 불에 탄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 유행하던 반가상은 오직 백제와 신라에서만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 보살상으로 새롭게 고구려의 예를 확인할 수 있어 주목된다.

머리에는 산 모양의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으며 고개를 약간 숙여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네모난 형으로 눈을 반쯤 감고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난다. 상체에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 잘록한 허리가 그대로 드러나며, 하체에는 치마를 걸치고 있다. 치마에는 무릎 위쪽으로 선으로 새긴 주름의 형태만 간략히 묘사하다가 대좌(臺座)를 덮으면서 자연스럽게 늘어져 여러 겹의 수직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연꽃무늬 대좌 위에 왼발을 내려 놓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 위에 얹은 채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다. 오른쪽 팔꿈치를 오른쪽 무릎에 대고 있는데 팔과 손이 떨어져 나가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체적으로 얼굴이 큰 편이나 가냘픈 몸매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생각에 잠긴 보살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든 연대는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출토지가 확실한 고구려의 반가사유상으로 주목되는 작품이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 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장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사간판전이 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 3년(1457) 어명으로 판전 40여 칸을 중창하였고 성종 19년(1488)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중턱의 해인사에 위치한 관계로 서기 1488년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보존 가치가 탁월한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만자로 추정되는데 이들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으로서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4천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1009~1031, 재위) 때 새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이 대장경판은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조선 태조 때인 1398년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이 대장경판은 개태사의 승통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은 대장경이다.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의 침입때 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을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 된 것이다.

해인사 동·서사간판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교 경전은 국가에서 새긴 고려대장 경판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새긴 고려각판이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율·논 삼장을 집대성하였기에 세계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이 대장경은 일본이 신수대장경을 만들때 표준으로 삼았으며, 중국에도 역수입되고,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선진국에도 전해져 세계불교 연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7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제734호)이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있다.

2008.03.26.

  • 출처

    다른데찾아보면 똑같은게 있는데 다른아이디로이 내용이 나와있으면 저의 따른아뒤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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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입니다. 1963년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1607년(선조 40)에 복구가 시작되어 1647년(인조 25)에 복구가 완료되었습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1997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수원화성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벽입니다. 1963년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약용의 성설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을 중심으로 조심태 등의 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 구조물 입니다.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등의 기계를 활용한 공법 등 다른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97년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석굴암은 신라 때 오악의 하나인 토함산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입니다. 1962년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입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891번지에 있는 석굴암은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입니다

석굴암과 함께 토함산에 자리잡고 있는 불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의 하나로 그 경내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있습니다.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으며 경내면적은 11만 7541평 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 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경내에 있으며 1962년 국보 제5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고려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릅니다. 장경판전은 장경판고라고도 불리며 깊은 산속에 있어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가의 사당입니다.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종묘는 1963년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종묘는 원래 정전을 가리키며, 태묘라고도 불리우며 신라때에는 5묘제, 고려에는 7묘제로 하였으며 조선초기에는 7묘제도를 따르다가 중기 이후부터는 치적이 많은 왕은 7대가 지나도 정전에 그대로 모셨습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경상북도 경주시 일원에 흩어져있는 신라시대 유적을 지구단위로 분류한 역사유적지구입니다.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록되었으며 역사유적들은 유적의 성격에 따라 5개 지구로 나뉘는데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이들 5개 지구를 통틀어 일컫습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전체를 통틀어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 지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인돌유적은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며 영어로는 돌멘 (Dolmen)이라고도 합니다. 고인돌은 거석기념물의 하나이며 피라미드, 오벨리스크 등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과 영국의 스톤헨지 ,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 등이 모두 거석문화의 산물입니다.





훈민정음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있으며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에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한 [훈민정음예의본] 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
1997년 10월 유네스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 별로 기록한 편년체 사서로서 1973년 12월 31일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 습니다. 활자본(필사본 일부 포함)으로 2,077책이며 1413년(태종 13)에 《태조실록》이 처음 편찬되고, 25대 《철종실록》은 1865년(고종 2)에 완성되었습니다.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2008.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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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고려청자는 세계적인 명품으로, 고려 초기에는 비색이 가장 아름답고 조형감각이 특히 뛰어난 '순청자()'가, 중기에는 세계 초유의 '상감청자()'가, 그리고 후기에는 이밖에 철사() 등으로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회청자()가 유행하였다.

고려 미술의 대표는 공예이며, 그 중에서도 고려청자는 세계적인 명품이다.

고려청자는 주로 서남 해안에 분포되어 있는 가마에서 만들어졌는데 특히 전라도 지방에 많은 가마가 밀집되어 있었으며,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이 대표적이다.

초기에는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12세기부터는 고려만의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청자의 절정기에 나타난 형식이 상감청자로 상감기법은 처음에는 나전칠기금속공예에 사용되던 기법이었다. 상감청자의 출현으로 고려청자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해 유약은 얇고 투명해져서 파르스름한 유약을 통해 상감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고려청자는 1231년 몽고의 칩입이후부터 쇠퇴하여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로 계승되었다.


■ 순청자()

상감이나 다른 물질에 의한 장식무늬가 들어가지 않는 청자.
음각, 양각, 투각기법으로 장식된 청자들과 동,식물 등을 모방해 만든 상형청자 등도 여기에 속한다.
9∼10세기 무렵 청자의 초보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후에 상감청자로 발전하였다


■ 상감청자()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낸 청자. '상감'이란 무늬를 넣는 방법을 말하는데, 상감기법은 이미 중국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금속공예에 사용되던 방법이었으나, 도자기에 상감기법을 응용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기법이다.

먼저 초벌구이한 그릇 표면에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이나 글자 등을 파낸 뒤 그 패인 홈을 회색의 청자 바탕흙 또는 다른 백토(흰색의 흙)나 자토(붉은색의 흙)로 메우고 표면을 고른후 유약을 입혀 굽는다. 그러면 백토는 흰색으로, 자토는 검은색으로 나타나게 된다.


■ 회청자()

순청자에 산화철 안료로 문양을 나타낸 청자로 회고려()·철화청자()·철회청자()·화청자()라고도 한다.
회청자는 산화번조법으로 유약을 산화시켜 자기 전체가 담황갈색()을 띄며 대게 철화()로 당초문이나 국화문을 시문한 것이 특징이다. 철화 기법은 중국 남북조시대부터 비롯되어 오대·북송시대의 월주요자주요와 서촌요 등에서 사용하던 장식 기법 중 하나인데, 이 기법은 11세기에 우리나라에 전해져 청자에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 분청사기()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위에 백토()를 입히고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운 회청색의 사기().
14세기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의 기반이 닦이는 세종연간(1419~1450)을 전후하여 그릇의 질()이나 형태 및 무늬의 종류, 무늬를 넣는 기법 등이 크게 발전 ·세련되어 그 절정을 이루었다.
표면을 장식하는 기법에 따라 백토나 자토를 감입하는 상감, 꽃모양 도장을 찍는 인화(), 무늬를 그려넣은 뒤 무늬 외의 백토를 긁어내는 박지(), 선으로 무늬를 새기는 조화(), 철분 많은 안료로 무늬를 그리는 철화(), 풀비로 분장만 하는 귀얄, 백토물에 담가서 분장하는 덤벙 등 7가지 기법으로 나뉜다. 이 기법들은 지역별 시기별로 성행했으며, 이에 따라 경상도의 인화분청, 전라도의 조화박지분청, 충청도 계룡산의 철화분청사기등 지방별 특색까지 드러낸다.



 


 고구려 하면 고려청자~

2008.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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