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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서울의 주요 문화재의 특징은???
비공개 조회수 5,134 작성일2005.09.15

어,...

저는 초등 4학년 조예랑인데요...

서울에 대해서 좀... 그리고 문화재도 같이요..

 찾기가 힘드네요... 내공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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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대해서

 

한반도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한강 하류에 위치한 수도 서울은 선사시대이래 우리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백제 건국초기의 수도였고 이후 전략요충지로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역사 문화발전의 중심지로 자리잡아 왔습니다.

 

지금의 서울은 1394년 조선왕조가 도읍지로 정하면서 탄생한 것으로 서울의 600년이라는 긴 역사는 세계에 자랑할 만하지요.

서울은 19세기 말부터 서구의 문물은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이와 함께 여러 분야에서 근대화를 향한 활발한 노력을 기울였어요. 1899년부터 철도와 전차가 개통되고 전화, 서양식 학교 등의 근대적 생활시설들도 갖추게 되었어요.

그 이후 현대에 들어서면서 서울은 아주 빠르게 발전하여 세계속의 도시로 성장하게되었어요.

서울이 특별시가 된 것은 1949년 8월 15일이랍니다. 그 후 1960년대 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으로 우리 경제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와 더불어 서울시도 여러 분야에서 급속한 성장을 하게 되었어요.

서울은 86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뤄냄으로써 세계 속의 국제도시로 알려지게 되었고, 또 1995년에는 시민들이 직접 뽑은 민선 시장이 취임하면서 새로운 자치시대를 맞게 되었어요.

600년 역사의 도시,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도시 서울은 쾌적한 환경을 갖춘 수준높은 세계적 도시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서울의 문화재에는

 

남대문(숭례문) 지정번호 : 국보 제 1호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 29

서울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태조 7년(1398) 창건 된 후 세종 30년(1448) 크게 개축되었다. 도성의 남쪽에 있다하여속칭 남대문이라 불리운다. 이 문은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석축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세웠으며,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기둥위에 짜여진 공포는 다포식으로 힘이 있고 간결한 살미첨자가 조선 초기의 수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문은 외관이 장중하고 내부구조가 튼튼하여 수도의 성문으로 당당한 면모를 지닌조선 초기의 대표적 건축이라 할 수 있다.지금은 숭례문 양 옆으로 난 도로가 남쪽에서 드나드는 큰길이 관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서울성곽이 남산에서 내려와 힐튼 호텔 앞을 지나 숭례문에 연결되었고, 서소문으로부터 상공회의소 앞을 지난 성벽이 숭례문에연결되어 인마의 통행은 숭례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었다.

 

동대문(흥인지문) 지정번호 : 보물 제 1호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가 69

서울 성곽의 동쪽 문으로 원래 이름은 흥인지문으로 인은 오행의 목에 속하고 목은 동에 해당하므로 흥인은 곧 동방을 의미 한다고 하며, 태조 5년(1396) 창건되었으나 단종원년인 1453년에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의 문루는 고종 6년(1869)에 중건한 것이다.문 밖에는 옹성을 돌렸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석축 중앙에는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으며, 지붕은 우진각이다.기둥위의 공포는 다포식이며 세부기법이 연약하고 장식위주로 되어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양식을잘 나타내고 있다

 

창덕궁 지정번호 : 사적 제 122호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은 조선 제3대 태종이 1405년 이궁(離宮)으로 지은 궁궐로서, 그뒤 여러 임금들에 의해 보완동사가 계속되어 1412년에는 돈화문이 건립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2,000평이던 후원을 넓혀 총 150,000여평에 달하는 규모가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2년(1610)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政)때 인정전(仁政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인조 25년(1647)에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는 내전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해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 강녕전(康寧殿), 동서행각(東西行閣)등의 많은 건물이 이건되었다. 창덕궁은 광해군 때 정궁(正宮)으로 쓰게 된 뒤 약300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폈다. 현재 인정전과 그 주위의 무랑을 비롯하여 대조전과 낙선재(樂善齋)등 궁내의 주요 전각들이 남아 있는데, 창덕궁 내에 13동, 비원 내에 28동, 모두 41동이 현존하며, 다만 인정문 (仁政門) 앞의 회랑과 인정전, 그리고 대조전 사이의 부속건물 및 낙선재 앞 건물들이 없어졌을뿐, 왕국의 장중함과 그 규모가 잘 보존되어 있다. 현재의 규모는 131,781평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궁궐 후원인 비원과 함께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덕수궁 지정번호 : 사적 제 124호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23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1454 ~ 1488)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부르고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繼妃) 인목대비(仁穆大妃)만을 거처케 하였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西宮)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페위하고 인조가 이곳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옮긴 이후 270년 동안은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서울 원효로의 백송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 6호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4가 87-2

백송은 중국의 북부가 원산지이며 잎이 세 개씩 뭉쳐나오고, 어린 백송인 경우 나무껍질이 파란색을 띠다가 나이가 점점 많아지면 나무껍질이 벗겨져서 점차 회백색으로 변해가는 특징이 있다. 이 백송은 수령이 500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높이 10m, 가슴높이의 둘레가 2m이다. 원래는 두줄기였으나 한줄기는 죽었고 현재는 한줄기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는 서울, 경기도의 고양과 이천, 경남의 밀양, 충북의 보은, 충남의 예산 등지와 기타 지역에 몇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이중 큰 나무를 골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석조여래좌상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 24호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이 불상은 원래 경주 남산의 옛 절터에 있었던 것을 1927년 일제초기에 총독부 관저가 신축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져 안치된 것이다.전하는 말에는 이 불상은 유덕사 석가여래좌상이라고도 불리어 왔는데 유덕사는 신라시대의 태대각간 최유덕이 자기의 집을 희사하여 지었다는 절로 그의 원손인 삼한공신 최언위(三韓功臣 崔彦僞)가 최유덕(崔有德)의 진영을 안치하고 기념비를 세웠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절터는 경북 월성군에 있다고도 한다.

 

얼굴은 풍만하며 나발(螺髮)과 육계가 있고 눈꼬리는 약간 치켜졌으나 아래를 보고 있다. 길게 늘어진 귀와 코는 원만하고 두툼한 입은 굳게 다물었으며 이마에는 백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박혔던 자리만 남아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법의(法衣)는 우측어깨를 노출시킨 우견편단에 주름은 소매끝과 발목까지 표현되었다.결과부좌에 항마촉지인을 지닌 당당한 체구로 보아 통일신라시대(8~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여래좌상은 경주 석굴암 본존상과 같은 양식의 불상이다.

 

세종대왕 신도비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 42호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 1-157

이 비는 조선 제4대 임금 세종(1397-1450)의 신도비이다. 원래는 문종2년(1452)에 구 영릉 터에 세워졌던 것으로서 앞면의 비명은 정인지가 뒷면의 비음기는 김조가 지었고 글씨는 안평대군 용이 썼다. 비는 정분과 민신의 지도 아래 150여 명의 석공이 동원되어 2년만에 완성하였다.예종 원년(1469)에 영릉을 경기도 여주로 옮겼을 당시 이 비는 구 영릉터(광주) 대무산에 묻었던 것인데 1974년 3월에 발굴하여 5월에 본 세종대왕 기념관에 옮겨온 것이다.이 신도비가 위치한 세종대왕 기념관 뜰에는 보물 제838호 수표가 있는데 이는 청계천에서 장충동으로 옮겨놓은 수표교 아래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2005.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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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문화재

 

1.경복궁:조선시대 초기부터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등을 거행하던 곳으로, 때로는 사신을 맞아 들이기도 하고 양로연이나 위로연을 베풀기도 했다. 고종때 새로 지었으며,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건물이다.<국보 제223호>

위치: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2.자격루: 세종때 처음 만든 물시계로서 조선시대의 과학기술이 뛰어 났을을 보여준다.

지금은 중종때 만든 자격루가 국립 고궁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국보 제229호>

 

3.부산진순절도:1592년 4월13일에 부산진에서 벌인 임진왜란 최초의 격전 장면을 묘사한그림이다 부산진첨사 정발이 성을 지켰으나 결국 패했다.<보물 제391호>

 

4.숭례문(남대문)

위치: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29

국보 제1호. 조선시대에 세워졌음.

사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문으로 남쪽에있다 웅장한 만큼 가장아름다우며 우리민족이 예의를 중하게 여기는 민족이라는 뜻을 가졌다.

 

5.창덕궁

위치:서울 종로구 와룡동

1963년 1월18일 사적 제 122호로 지정되었다.

1405년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4877㎡이다.

태종이 즉위한 후 1404년 한성의 향교동에 이 궁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전정전,소덕진,빈경당,여일전,정월전,옥화탕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1. 문화사적
○ 서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국보 제1호)
중구 남대문로 4가 29번지에 있다.
서울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정문으로 남대문은 그의 속칭이다. 태조5년(1396)에 창건되었던 것이지만 현존 건물은 세종30년(1448)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건평 53.79평, 정면 5간(間), 측면 2간의 남대문은 현존하는 한국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우리나라 건축사상 가장 중요한 건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 서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보물 제1호)
종로구 종로 6가 69번지에 있다.
한양 도서의 정동(正東)에 위치하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속칭 동대문으로 불리운다. 이 문루는 태조 5년(1396)에 중수(重修)되었으나, 현존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개축된 것이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중앙부에 홍예문(虹 門)을 만들고 그 위에 중층(重層)의 문루를 세운 점 등은 서울 숭례문과 같은 수법이며 문밖으로 반월형의 옹성(甕城)을 돌린 것은 고종 6년에 개축한 것이다. 그리고 옹성 상부에는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 다포계(多包系) 건물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다.

○ 서울성곽 (사적 제10호)
서울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지 3년(1394)만에 조선의 수도가 되었다. 태조는 그 이듬해 궁궐과 종묘·사직을 먼저 조성한 뒤에 도성축조도감을 열어 성 쌓기에 착수하였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다시피 했던 태조로서는 성곽이 수도방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성이라는 것은 국가의 울타리요, 강포한 것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없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태조는 강조한 바 있다.
성안과 성밖을 구별하여 쌓은 한성의 성벽은 돌이나 흙으로 북악산등을 타고 낙산·동대문·남산을 거쳐서 인왕산 산등성이를 둘리는 총연장 18,1km로 쌓아졌다. 당시 서울의 총 인구가 5만명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성을 쌓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동원한 장정들의 수효는 4년간에 걸쳐 19만 7천여명에 이르렀다.
이 성에는 4대문을 두었는데, 동쪽에 흥인지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북쪽에 숙청문을 두었다. 그리고 4소문으로는 동북에 동소문, 동남에 광희문, 서북에 창의문, 서남에 소의문을 두었다. 조선왕조 건설의 주역이었던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기본설계가 마련된 서울의 성벽은 둘레가 40리 남짓 되고, 그 후 세종 4년(1422)과 성종 10년(1479) 등 여러번에 걸쳐 중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관여하게 되면서 성문과 성벽을 하나 하나 허물어 버렸다.
현재 대문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남대문과 동대문, 숙청문(1976년 복원)이며, 소문으로는 창의문과 광희문(1975년 복원), 동소문(1994년 복원)이며, 성벽으로는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남산·인왕산 일대이다.

○ 광주 풍납리토성(廣州 風納里土城, 사적 제11호)
송파구 풍납동 72-1번지에 있다. 풍납리토성은 백제초기의 유적으로서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성이다. 천호대교의 남쪽 기점에 인접해서 위치한 이 토성은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순수한 토성이다.
1925년 대홍수 때 토성의 서쪽 벽이 유실되었으나 1973∼1978년까지 토성 일부가 복원되었다. 1966년에 토성 내 포함층의 일부가 발굴되어 선사시대 말기에서 삼국시대에 걸친 토기의 분포상태를 알게 되었다.

○ 독립문(獨立門, 사적 제32호)
서대문구 현저동 941번지에 있다.
1894∼1895년에 갑오개혁으로 조선의 내정과 제도를 개혁하였으나 당시 청나라와 일본 및 러시아 등의 간섭으로 나라의 자주독립을 유지해 나가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민중들은 국왕과 대신들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외세의 간섭도 허락치 않겠다는 결의를 다짐하려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왕에 서 있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건립의 발의는 독립협회의 서재필(徐載弼)이 하였고 설계는 러시아인 [시바진]이 담당하였다. 독립문의 기공식은 1896년 11월 21일에 있었다.

○ 삼전도비(三田渡碑, 사적 제101호)
송파구 송파동 187번지에 있다.
인조 14년(1636) 청태종(淸太宗)이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였을 때 인조는 광주(廣州)의 남한산성에서 청군과 싸웠다. 그러나 우리의 병력으로서는 청군의 위협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인조는 마침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태종의 군영이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에서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에서 이 사실을 비석에 새겨 삼전도에 남길 것을 요구하였으므로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이 비석을 만들어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 비석의 특색은 전면에는 한자로 새기고, 뒷면에는 만주문자와 몽고문자의 이중문자로 번역해서 전면을 둘로 나누어 조각한 것으로, 한 비에 3개국의 문자가 새겨진 것으로 유일한 비석이 되었다.

○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있다.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서울로 천도하면서 종묘(宗廟)를 짓게 한 다음 그 해 겨울에 북악산 아래에 왕궁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태조 4년(1395)에 완공하고 그 해 10월 28일 정식으로 경복궁에 들었다.
그러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은 모두 불타서 재가 된 채 270여년간이나 폐허로 되어 오직 경회루의 돌기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후 고종 2년(1865)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재건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 완공시킨 바 있다.
처음 태조의 명에 따라서 정도전(鄭道傳)이 시경(詩經)의 구절을 따서 궁 전체의 이름을 경복궁이라 지었다. 조선 최후의 왕인 순종 융희 4년(1910)에 일제에 의해 경복궁의 여러 당(堂), 각(閣), 누(樓),정(亭), 행각(行閣), 회랑(廻廊)과 기관(機關)은 모두 헐리었고, 지금은 근정전(勤政殿), 경회루(慶會樓) 외의 몇몇 전당(殿堂)과 건춘문(建春文) 및 광화문(光化門)이 남아 있다.
근정전은 경복궁 안의 정전(正殿)으로 국왕의 즉위식 또는 공식적인 대례(大禮)가 거행되던 곳이며, 경회루는 왕의 사연장(賜宴場)으로 쓰이던 곳이다.
집옥재(集玉齋)는 각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고,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正門)으로 이 문 좌우쪽 높은 대좌 위에는 돌로 된 해태가 놓여 있는데 이는 근세의 미술대가로 알려진 이세욱(李世旭)의 작품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경복궁을 지은 후 궁전에 자주 화재가 일어났다. 이것은 조산(朝山)인 관악산이 화산(火山)인 까닭이라 해서 관악산에 우물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집어넣는 한편 광화문 좌우편에 해태 한쌍을 앉혀 관악산의 화기를 막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해태의 시선은 관악산을 향하고 있다.
건춘문(建春文)은 경복궁의 동문으로써 이 문 안에는 이전에 왕세자가 있던 전당 춘궁(春宮)이 있었다. 이 문은 오직 종신(宗臣) 즉 왕족과 궁에 봉사하는 상궁들만 드나들었다. 이와는 달리 경복궁 서편에 있던 영추문(迎秋門:지금은 없다) 안에는 승정원(承政院), 홍문관(弘文館), 규장각(奎章閣) 등 여러 관아가 있었고 따라서 이 문은 일반관리들이 사용하였다.

○ 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호)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에 있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하여 경복궁을 왕궁으로 삼고 있었으나, 정종은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고, 태종이 즉위하자 왕 4년(1404)에 한성의 향교동에 이궁(離宮)을 짓게 하여 이듬해 5년에 완공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창덕궁이다.
이 궁에는 돈화문(敦化門)과 인정문(仁政門), 인정전(仁政殿), 선정전(宣政殿), 희정당(熙政堂), 낙선재(樂善齋), 대조전(大造殿) 등이 있고, 후원(後苑)과 같은 심오하고 아름다운 대원지(大苑池)를 가졌다. 일명 비원(秘苑)이라고도 불리어지는 창덕궁 후원에는 영화당(暎花堂), 부용정(芙蓉亭), 어수문(魚水門), 주합루(宙合樓) 등의 누각과 정자가 았다. 궁궐의 규모는 크고 화려하며 각 시대의 신구 건물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궁궐의 제도가 오늘날까지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창덕궁을 무대로 빚어진 잊을 수 없는 정변도 적지 않다. 사육신의 참형을 비롯해서 광해군이 반정군에게 쫓겨난 것도 이 궁이었다. 그리고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넣어 질식시킨 참변도 있엇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이 궁에서 일어났다.

○ 창경궁(昌慶宮, 사적 제123호)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에 있다.
조선시대 이궁(離宮)이었던 이 궁은 세종이 상왕(上王)인 태종을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 즉위년(1418)에 고려시대의 수강궁(壽康宮) 옛 터에 세운 것이다. 처음 이름은 수강궁이었으나, 성종 15년(1484)에 명정전(明政殿) 등 여러 궁궐을 크게 짓고 창경궁으로 고쳤다.
정조와 순조·현종 등 많은 왕들이 이 궁에서 태어났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으로 불타서 광해군 8년(1616)에 복구하였지만 인조 즉위년(1623) 이괄의 난 때 불이 나서 수많은 전각들이 타 다시 중수되기도 하였다.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이고 명정전(明政殿)은 법전(法殿)이었다. 통명전은 창경궁 안의 정전(正殿)이면서 대조전(大造殿)과 함께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궁은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크게 변형되고 훼손되었으나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진행된 복원사업으로 동물원과 식물원이 과천으로 옮겨지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
중구 정동 1-23번지에 있다.
이 궁은 서울에 남아 잇는 궁궐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작다. 광해군이 이 행궁(行宮)에서 즉위하였고, 중화전(中和殿)과 내전(內殿)인 함녕전(咸寧殿) 등은 모두 1905년에 재건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1909년에 준공되었다. 이 궁의 터전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였다.

○ 경희궁(慶熙宮, 사적 제271호)
종로구 신문로 2가 1-126번지 일대이다.
경희궁의 원이름은 경덕궁(慶德宮)으로 광해군 8년(1616)에 지었다. 숙종이 이 궁에서 나서 승하하였고, 경종과 정조, 헌종이 모두 이 궁에서 즉위하였으니 원래 이궁(離宮)이었던 이 곳이 한동안은 본궁과 다름없이 쓰여졌다.
광해군이 이 궁을 짓게 된 동기는 음양지리설과 깊은 관계가 다. 즉 새문동(塞門洞:돈의문 부근)에 왕기(王氣)가 있다 해서 그 왕기를 누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새문동에는 광해군의 동생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元君)의 사삿집이 있었는데, 광해군은 바로 그곳을 빼앗아 궁궐을 지었지만 8년이 채 못되어 광해군 15년(1623)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 종묘(宗廟, 사적 제125호)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있다.
일명 태묘(太廟)라고도 하는데, 본전(本殿)과 영녕전(永寧殿) 두 궁으로 되어 있다. 본전에는 역대 왕 중에서 공이 많은 왕의 위패를 모셨고 영녕전 즉 별묘(別廟)에는 본전에 모시지 않은 이들과 태조의 고조 4조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 전관교(전관교:살곶이다리, 사적 제160호)
성동구 행당동 58번지에 있다.
살곶이는 영남에서 새재(鳥嶺)를 넘어 충주·이천·광주를 지나 서울에 도달하는 길목이었다. 일찌기 세종 2년(1420) 5월에 상왕이었던 태종이 이곳에 다리를 놓도록 명하여 착공하였으며 성종 16년(1483)에 완성되었다.
이 다리는 처음 성종의 명명에 의하여 제반교(濟盤橋)라 하였고, 고종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이 다리를 헐어서 석재(石材)로 사용했으므로 지금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어쨌든 이 다리는 장안의 금천교(禁川校), 수표교(水標橋)와 함께 유명한 다리 중의 하나였다.

○ 서울 사직단(社稷壇, 사적 제121호)
종로구 사직동 1-28번지에 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한 태조는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배설하였다. 사직(社稷)은 국토의 신인 사(社)와 오곡(五穀)의 신인 직(稷)의 두 신위(神位)에게 제사드리는 곳으로 단을 쌓고 제사드리므로 사직단이라 하였다. 사직은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의 다른 명칭으로 종사(宗社)라고 표현되었다.

○ 우정총국(郵征總局, 사적 제213호)
종로구 견지동 397번지에 있다.
이곳은 옛날 북부(北部) 전동(典洞)이었고 전의감(典醫監)이 있었던 자리이다. 고종 21년(1884) 4월, 일본과 미국 시찰에서 돌아온 홍영식(洪英植)은 고종에게 기왕부터 내려오던 역전법(驛傳法)을 고쳐 우편제도를 새로 채택할 것을 진언하였다. 이에 우정총국을 세우고 홍영식 자신은 총판(總辦)이 되었다. 우정총국은 1884년 10월 17일 밤에 있었던 갑신정변(甲申政變)의 거사장소로써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나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만다.

○ 구 대한의원(大韓醫院) 본관(사적 제278호)
종로구 연건동 28-2번지에 있다.
지금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편입되어 쓰여지고 있다. 이 건물은 대한제국 칙령 제9호에 따른 의정부(議政府) 직속의 대한의원 본관으로써 일찌기 창경궁의 외원(外苑)이었던 함춘원(含春苑)의 마두봉(馬頭峰) 언덕에 세워졌다.

○ 약현성당(藥峴聖堂, 사적 제252호)
중구 중림동 149-2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고종 24년(1887) 5월 30일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세워진 성당이다. 이 성당은 중국인 기술자들에 의하여 시공되어 고종 29년(1892) 9월에 준공되었다. 이 곳에 성당을 세운 것은 천주교도 수난 때 44명의 순교자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서소문 밖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구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
중구 정동 15-1번지에 있다.
고종 27년(1890)에 건축된 것으로 아관(俄館)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특히 고종이 1896년 2월 1일 세자(純宗)와 함께 이곳으로 옮겨 와서 이듬해 2월 20일 경운궁(慶運宮:德壽宮)으로 환궁할때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이를 일러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하였다. 고종이 이 공관에 머물동안 친일 김홍집내각이 무너지고 친러파인 박정양내각이 조직되기도 하였다.

○ 구 벨기에영사관(사적 제254호)
관악구 남현동 1095-13번지에 있다. 원래 중구 회현동 2-78번지에 위치해 있었으나 1982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905년 일보인 기술자들에 의해 시공 준공되었다. 광복 후에 해군헌병대가 사용하더니 지금은 한국상업은행의 사료관으로 쓰여지고 있다.

○ 정동교회(貞洞敎會, 사적 제256호)
중구 정동 32-2번지에 있다.
개신교의 교회당으로는 국내 처음으로 지어진 것으로서 고종 23년(1896) 12월에 준공되었다.

○ 운현궁(雲峴宮, 사적 제257호)
종로구 운니동 98-50번지에 있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사삿집으로써 고종이 출생해서 12살까지 살던 곳이다. 고종이 즉위한 이후 이 집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고,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 자신이 이 궁에서 납치당하기도 하였다 이 운현궁에는 창덕궁과 가깝게 내왕할 수 있는 임금 전용의 경근문(敬勤門)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勤門)이 있었다.

○ 명동성당(明洞聖堂, 사적 제258호)
중구 명동 2가 1-8번지에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主敎座)성당으로 종현(鐘峴)의 이름을 따서 종현성당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고종 29년(1892) 8월 5일 착공되어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공사가 한때 중단되기도 했지만 1898년 5월 29일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설계는 프랑스 코스트(Coste)신부가 담당하였다.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조 교회당이며, 국내 유일의 순수한 고딕식 구조를 갖춘 건물이다.

○ 환구단( 丘壇, 사적 제157호)
중구 소공동 87-1번지에 있다.
환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말하는 것으로 원단(圓壇)이라고도 하는데 고종 34년(1898)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조선호텔의 남북쪽 정원에 황궁우(皇穹宇)란 팔각정으로 남아있지만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에게 하사된 저택자리였고, 선조 때는 왕자인 의안군(義安君)의 저택자리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남별궁(南別宮)이라 불러 중국사신의 영빈시설로 사용되기도 했다.

○ 한국은행 본관(사적 제280호)
중구 남대문로 3가 110번지에 있다.
본래 이 건물은 조선에 진출했던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으로 1908년 11월 착공되었던 것으로 1910년 일제강점이 이루어짐으로써 1911년 조선은행으로 바뀌게 되고 그 다음 해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6·25전쟁 때 내부가 불탔으나 1956년 복구되어 한국은행 본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 서울역사(驛舍, 사적 제284호)
중구 봉래동 2가 122번지에 있다.
한국에 처음 철도가 놓여진 것은 광무 3년(1899) 4월로, 일본인 회사인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착공했던 인천과 노량진간에 놓여진 철로였다. 지금의 서울역사는 1922년 6월에 착공되어 1925년 9월에 준공된 것이다.

○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石村洞 百濟初期積石塚, 사적 제243호)
송파구 석촌동 61-6번지에 있다.
석촌동(일명 돌마리) 일대는 백제시대의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널무덤(土壙墓)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 이 가운데 사적 제243호로 지정된 것은 3호·4호 돌무지무덤이다.
백제초기의 가장 왕성했던 시기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는 피라밋 형태의 이 돌무지무덤은 바닥을 진흙으로 다지고 자갈돌을 깐 다음 그 위에 큰 널돌(板石)이나 절석(切石)을 한겹 깐 뒤 작은 돌들을 겹겹이 쌓아 네모꼴 기단을 만들어 층을 이루어 가면서 제작하는 기단식(基壇式) 돌무지무덤이다.

○ 암사동 선사주거지(岩寺洞 先史住居址, 사적 제267호)
강동구 암사동 155번지에 있다.
암사동 한강가 모래밭 언덕바지에 위치한 이 주거지는 빗살무늬토기시대인 신석기시대의 최대 집단 취락터이다. 이곳에 신석기시대의 움집들이 복원되어 있고 신석기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선사유적전시관 등이 있다.

○ 방이동 백제고분군(방이동 백제고분군, 사적 제270호)
송파구 방이동 산 47-4번지에 있다.
학계에 의하여 5세기경부터 백제말기까지의 묘제(墓制)로 밝혀진 이 고분들은 모두 구릉에 위치하였고 고구려 묘제에서 보이는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 몽촌토성(夢村土城, 사적 제297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
백제시대 토성인 몽촌토성은 1983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서울·한양·단국·숭실대 등 4개 대학교의 발굴에 의해 그 대체적인 윤곽이 밝혀져 올림픽공원에 새로이 단장되었다.
이 성은 타원형의 야산 뒤에 진흙은 쌓아서 이룩한 성벽으로서 외곽 둘레가 약 2.5km이며 성의 둘레에는 방어용 해자(垓字)시설이 되어 있다. 이 성은 이웃해 있는 풍납리토성, 아차산성과 함께 적으로부터의 보호와 방어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던 토성이다.

○ 장충단비(奬忠壇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호)
중구 장충동 2가 197번지(장충단공원 안)에 있다.
광무 4년(1900) 남소영(南小營) 자리에다 을미사변 때 순사(殉死)한 충신, 열사(烈士)를 위해 단을 모으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사당(祠堂) 자리는 6·25전쟁 때까지 서남쪽에 있었다.
이 비 표면의 [奬忠壇]이란 3자는 순종이 황태자 때 쓴 글씨이며, 비 뒷면의 143자는 민영환(閔泳煥)이 썼다.

○ 봉황각(鳳凰閣,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호)
강북구 우이동 254번지에 있다.
독립운동가인 손병희(孫秉熙)가 1912년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지도자를 훈련시키려 세운 건물로, 이때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4명이며 3·1운동의 주체가 되어 구국운동의 최선봉에 섰다.

○ 낙성대(落星垈,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호)
관악구 봉천동 산 48번지에 있다.
낙성대는 고려시대 귀주대첩의 명장 강감찬(姜邯贊)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강감찬장군이 태어날 때 별이 떨어졌다 하여 낙성대라 하였다. 서울시에서 1973∼1974년까지 이곳을 정화하면서 담장을 쌓고 사당 안국사(安國祠)를 지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삼층석탑이 있으며, 탑에는 강감찬낙성대(姜邯贊落星垈)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5호)
종로구 숭인동 산 3번지에 있다.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동망봉(東望峰) 아래에는 정업원구기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 동망봉은 단종이 강원도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후 그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아침 저녁으로 올라가 동쪽(영월쪽)을 바라보며 죽은 왕을 추모하였다는 곳이며, 정업원은 송씨가 단종의 명복을 빌면서 일생을 거처한 곳이라 한다.

○ 용양봉저정(龍讓鳳 亭,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6호)
동작구 본동 10-30번지에 있다.
정조 13년(1789)에 착공하여 2년 후에 완공된 건물로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묻힌 화산(華山, 현 水原) 현릉원(顯陵園)에 참배하러 다닐 때 노들강에 배다리(舟橋)를 세우고 건너가 잠시 어가(御駕)를 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 성제묘(聖帝廟,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7호)
중구 방산동 4-96번지에 있다.
성제묘는 관우(關羽)를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관왕묘(關王廟) 중의 하나이다. 이 건물은 일찍이 임진왜란 이후 서울에 세워진 남묘(南廟), 동묘(東廟)가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던 제도였던 것과는 달리 민간인에 의해 세워진 묘당(廟堂)이다.

○ 사육신묘(死六臣墓,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8호)
동작구 노량진동 185-2번지에 있다.
원래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6명 중 성삼문(成三門),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응보(兪應孚)의 묘소가 있었으며, 1977·1978년의 묘역 정화공사 때 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의 가묘를 추봉하였다. 이때 단종복위운동 때 순절한 김문기(金文起)의 가묘도 마련되었다.
이들은 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14세 된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세조가 되자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충성심을 변치 않다가 세조 2년(1456)에 사형을 당하였다.

○ 종친부(宗親府,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9호)
종로구 화동 1번지에 있다.
조선의 역대 왕의 어보(御譜), 어진영(御眞影)을 받들어 모시는 의촉(衣 )을 만들고 종실(宗室) 제군(諸君)의 봉작(封爵), 승습(承襲), 관혼상제(冠婚喪祭) 등의 사무를 보던 곳이다.

○ 천정(天井:한우물,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0호)
금천구 시흥동 산 93번지에 있다.
시흥 동남쪽에 있는 호암산(虎巖山) 한 봉우리 위에 작은 연못 크기의 우물이 있는데 큰 우물이란 뜻으로 '한우물' 또는 '용보(龍洑)'라고 한다.

○ 지덕사 부 묘소(至德祠 附 墓所,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1호)
동작구 상도동 산 65-42번지에 있다.
태종의 장자(長子)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당과 묘이다.

○ 청권사 부 묘소(淸權祠 附 墓所,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2호)
서초구 방배동 191번지에 있다.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녕대군(孝寧大君)의 사당과 묘이다.

○ 동십자각(東十字閣,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3호)
이 건물은 광화문에 연결되어 오는 경복궁 외궁성(外宮城)이 건춘문(建春門)을 향하여 꺾이는 부분에 세운 망루이다. 이와 같은 건축물은 서쪽에도 있어 서십자각(西十字閣)이라 불렀으나 일제 때 철거되었다.

○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4호)
은평구 역촌동 8-12번지에 있다.
이 비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綾陽君)으로 있을 때 소유했던 별장터임을 기리는 기념비로서 숙종 21년(1695) 7월에 세운 것이다.

○ 선농단(先農壇,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5호)
동대문구 용두동 1158-1번지에 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일컬어온 우리 나라는 원래 농본국(農本國)이어서 농사와 인연이 깊은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主神)으로 하여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농사의 모범을 보이고자 왕이 직접 적전(籍田)에서 밭을 가는 친경(親耕) 행사를 하였다.
친경(親耕)은 조선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 3년(1909)에도 행하였으나 일제 때 폐지되었다. 이 단은 사방 4m 4m의 석축단(石築壇)으로 되어 있다.

○ 삼군부 청헌당(三軍府 淸憲堂,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6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안에 있다.
이 건물은 조선말기의 건축양식으로서 삼군부 내의 일부분인 청헌당이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2년(1865)에 훈련도감(訓練都監)의 신영(新營)·남영(南營)·병마소(兵馬所)를 합하여 삼군(三軍)이라 하고 옛터(현 정부종합청사)에 삼군부의 청사를 세우고 초기의 제도대로 삼군부를 다시 부활시켜 정치는 의정부에서, 군사는 이곳 삼군부에서 맡아보게 하였다.

○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7호)
서대문구 홍은동 8번지에 있다.
이 불상은 높이 약 10m 이상 되는 자연암에 새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좌상(坐像)이다. 불암(佛岩)이라고도 일컫는 이 불상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신라시대 장의사(藏義寺)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장의사 경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석불은 조선 태조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에도 여기서 기원하였으며 고종의 어머니 민씨(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의 복을 비는 치성을 드렸는데 이때부터 불상에 분을 바르기 시작하여 백불(白佛)이라 하였다.

○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8호)
중구 장충동 2가 197-1번지에 있다.
이 다리는 태종 6년(1406)에 600명을 동원, 인공으로 수로를 뚫은 개천(開川, 청계천)에 세웠던 다리 중의 하나로서 도성 안의 개천에 흐르는 수량(水量)을 측정하는 시설이다. 다리 돌기둥에 경(庚)·진(辰)·지(地)·평(平)이라는 수준(水準)을 새기고 물의 깊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수중주석표(水中主石標)'라 하고 있어 여기서 다리의 이름을 딴 것임을 알 수 있다.

○ 흥화문(興化門,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9호)
종로구 신문로 2가 경희궁에 있다.
이 문은 광해군 8년(1616)에 세운 경희궁 정문이다. 본래 이곳은 인조의 생부(生父)인 원종(元宗)의 잠저(潛邸)가 있던 곳으로 광해군이 왕기(王氣)를 없애기 위하여 이 궁을 건설하였다 한다.
1910년 경희궁을 헐고 경성중학교(서울중고등학교)를 건립할 때 이 문은 남아 있다가 1932년 박문사(博文祠)에 이전되어 정문으로 삼았는데 그 후 이전된 영빈관(迎賓館)이 이 자리에 들어서게 되어 영빈관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현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 무계정사(武溪精舍,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2호)
종로구 부암동 329-4번지에 있다.
암벽에 가로로 '무계동(武溪洞)'이라 새겨 놓은 글자가 있어 이곳이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정자였던 무계정사의 유지(遺址)임을 알 수 있다. 이 곳은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園)에서 노닐고 나서 그곳과 같은 자리라 생각하여 산정(山亭)을 세우고 글을 읊으며 활을 쏘았던 장소였다.

○ 대원군 별장(大院君 別莊,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3호)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에 있다.
창의문(彰義門) 밖 자하문고개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의 사랑채이다. 조선 상류사회의 대표적인 사랑채로서 1958년 손재형(孫在馨)이 이곳에 가옥을 지을 때 석파정 경내에 있었던 이 집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4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있다.
이 여래좌상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상(本尊像)과 같은 양식의 불상이다. 경주의 남산 옛 절터에 있었던 것을 1927년 총독부관저가 신축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안치한 것이다.

○ 황학정(黃鶴亭,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5호)
종로구 사직동 산 1-1번지에 있다.
황학정이 있는 이 곳은 서촌(西村) 오사정(五射亭) 중의 하나인 필운동(弼雲洞) 등과정(登科亭)의 터이다. 윈래 이 황학정은 광무 2년(1898) 고종의 명에 의하여 경희궁 안에 왕비가 거처하던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지었던 것을 1922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으로 지금까지 궁술행사가 열리고 있다.

○ 석파정(石坡亭,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6호)
종로구 부암동 산 16-1번지에 있다.
철종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이었으나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에 빼앗았다 하며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별장이다. 이 집을 석파정이라 한 것은 앞산이 모두 바위였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며 흥선대원군의 아호(雅號)를 석파(石坡)라 한 것도 이로 인하여 지어진 것이다.

○ 한글고비(古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7호)
노원구 하계동 산 12-2번지에 있다.
이 비는 중종 31년(1536)에 세워졌으며, 한글로 쓰여진 금석문이란 점에서 매우 희귀하며 글씨체가 훈민정음 당시의 것과 거의 같다. 쓰여진 내용으로 보아 효심이 지극했던 사람이 그 부모를 위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 선희궁지(宣禧宮址,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회재 제32호)
종로구 신교동 산 1-1번지에 있다.
이 궁터는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왕실의 사묘(祠廟)로서 지금도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다. 현재는 신교동 맹아학교터가 되었다.

○ 도선사 석불(道詵寺 石佛,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4호)
강북구 우이동 산 69번지에 있다.
도선사의 마애불입상(磨崖佛立像)은 장대하고 우람한 불상형태와 어색한 구도, 사각형적이고 평판적인 모습에 비해 소박하고 친근미 나는 부처님의 경지를 느끼게 해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 불상이 조선중기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 당시의 소박한 불상미(佛像美)가 잘 나타나 있다.

○ 서울 성공회성당(聖公會聖堂,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5호)
중구 정동 3번지에 있다.
본 성당은 1890년 한국에 온 초대 코오프(C.G.corfe)주교가 1922년에 착공하여 1926년 5월 2일에 헌당식(獻堂式)을 가졌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天道敎 中央大敎堂,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6호)
종로구 경운동 88번지에 있다.
본 건물은 손병희(孫秉熙)가 건립을 계획하여 일본인 중촌흥자평(中村興資平)이 설계하고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시공하였다. 1918년 착공하여 1921년에 완공하였다. 전체적으로 어떤 일정한 양식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으나, 비교적 독특한 의장수법(意匠手法)을 지닌 건축물로서 한국 천도교의 중앙대교당이다.

○ 삼군부 총무당(三軍府 總武堂,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7호)
성북구 돈암동 512-160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고종 5년(1868)에 건립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주당(主堂)이었던 총무당으로서 당초 광화문 앞 서쪽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 때에 이곳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서울시에서 1979년 공사를 착수하여 복원하였다.

○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38호)
은평구 진관내동 428번지에 있다.
이 비는 조선 정조가 그 25년(1781)에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면서 할아버지인 영조의 옛일을 생각하면서 친히 글을 짓고 세운 것이다.
비문은 영조가 세제(世弟)시절인 경종 원년(1720)에 부왕인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금암(黔巖)의 덕수천변(德水川邊)에 머물면서 이곳의 참장(站長)이 소도둑을 잡았다가 그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타일러 보낸 일을 목격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를 거울삼아 훌륭한 정치를 행하였다는 내용이다.

○ 화산군신도비(花山君神道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1호)
서대문구 북가좌동 73-3번지에 있다.
속칭 거북비로 통하는 이 신도비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총관(都摠管)을 지낸 화산군의 행적과 그 세계(世系)를 기록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낙창군(洛昌君)이 영조 23년(1747)에 건립한 것이다.
화산군의 이름은 곤(滾)인데, 선조의 일곱째 왕자인 인성군(仁城君) 공(拱)의 손자이다.

○ 세종대왕신도비(世宗大王神道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2호)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 1-157번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내에 있다.
이 신도비의 원 위치는 세종의 초장지(初藏地)인 강남구 내곡동 산 13번지였으나 1974년 4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문(碑文)은 정인지(鄭麟趾)가 짓고 비음기(碑陰記)는 김조(金 )가 지었으며 글씨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썼다.

○ 연령군신도비(延齡君神道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3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안에 있다.
이 신도비의 원래 소재지는 금천현(衿川縣) 초당리(楚塘里), 지금의 영등포구 대방초등학교 교정이었다. 그 후 1940년 당시 경성지구 구역정리로 인하여 묘역은 충남 예산군 덕산으로 옮겨지고 현지에 이 신도비만 남아 있었다. 따라서 이 비는 [안국동별궁비(安國洞別宮碑)]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1967년 8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 보존 중에 있다. 비문은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이이명(李 命)이 지었고 글씨는 조태구(趙泰耉)가 썼다.
연령군은 숙종의 아들로서 숙종 25년(1699)에 나서 21세에 요절하였다.

○ 상봉동 오층석탑(上鳳洞 五層石塔,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4호)
중랑구 상봉동 344-1번지 한독약품주식회사 뜰에 옮겨져 있다. 이 탑은 전체의 높이가 820㎝나 되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오층탑으로서 본래는 전라북도 익산(益山)에 있던 것이다.
그 양식에 있어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定林寺址 五層石塔)과 같아서 백제말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 상봉동 석제태실신석(上鳳洞 石製胎室身石,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5호)
중랑구 상봉동 344-1번지 한독약품주식회사 뜰에 놓여져 있다.
높이가 114㎝로서 둥근 대석(臺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 구성은 신석(身石)과 개석(蓋石)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확한 출처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왕실의 태(胎)를 묻었던 유품(遺品)으로 추정되고 있다.

○ 광평대군묘역 일원(廣平大君墓域 一圓,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8호)
강남구 수서동 산 10-1번지에 있다.
옛날에는 궁말 혹은 궁촌(宮村)이라 불리어졌던 수서동의 광수산(光秀山)에 자리하고 있는 이 묘역 일원은 서울 근교에 현존하는 왕손(王孫)의 묘역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유지되어 있다.
이 곳은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내외의 묘소를 비롯하여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내외의 묘소와 광평대군의 아들인 영순군(永順君)의 묘 등 약 700여기에 달하는 묘들이 있다.
광평대군의 묘소는 본래는 광주 학당리(지금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가 초장지(初葬地)였으나 이곳에 성종의 선릉(宣陵)이 들어서게 되자 연산군 원년(1495)에 현재의 이곳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 중명전(重明殿,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53호)
중구 정동 1-11번지에 있다.
이 건물은 1900년대에 건축되었으나 1925년 화재로 외벽체만 남고 완전히 불타자 곧 복원, 준공한 2층 벽돌집이다.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은 외국사신들이 고종을 알현하는 알현장으로,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

○ 어정(御井,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53호)
중구 훈정동 66-5번지에 있다. 이 우물의 축조연대는 조선초기로 추정되며, 임금이 종묘에 전배(殿拜)하러 나올 때 이 우물물을 마셨다 하여 '어수우물·어정(御井)'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 충헌김공신도비(忠憲金公神道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59호)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안에 있다.
이 비는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충헌공(忠憲公) 김구(金構)의 신도비로서 영조 19년(1743)에 세워졌다.
이 비의 특징은 암·수막새기와를 드리운 기와지붕 모양의 개석(蓋石)과 다른 신도비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용·봉황·불로초·구름 등의 문양들이 다채롭게 새겨져 있는 점이다.

○ 봉은사 선불당(奉恩寺 選佛堂,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64호)
강남구 삼성동 73번지에 있다.
선불당은 신라 원성왕 10년(794)에 창건된 봉은사 대웅전의 한단아래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일종의 대중 선방(禪房)으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9세기에 세워진 이 건물은 비록 연대가 오래지 않지만 이만한 크기의 거창한 선불당은 서울시내에 유례가 없으며 당시의 귀중한 목조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 화계사 대웅전(華溪寺 大雄殿,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65호)
강북구 수유동 487번지에 있다.
삼각산에 위치한 이 절은 중종 17년(1523) 신월(信月)스님이 창건하였다. 화계사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보아 1800년대 후반의 불전(佛殿)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단엄한 건물로 당시에 유행하던 법당양식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 봉원사 대웅전(奉元寺 大雄殿,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68호)
서대문구 봉원동 1번지에 있다.
봉원사는 신라 진성여왕 3년(889)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현 위치의 봉원사는 영조 24년(1748)에 세워진 것이다.
봉원사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19세기 한성에 세워진 사찰 내 대웅전의 공통적 특징인 여러 층의 정면층단, 판벽, 천장양식 등을 나타내고 있는 대표적 건물로서 당시 한성 사찰의 주법당(主法堂)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사라진 명소
○ 국사당(國祠堂)
"남산 꼭대기에 국사당이 있었는 바, 이를 곧 목멱신사(木覓神祠)라 하였다."는 {한경지략(漢京識略)}의 기록이 있다. 이로써 서울 남산(또는 목멱산) 꼭대기에 국사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 때는 이 곳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나 그래도 건물만은 남아있던 것을 1925년 일본인들에 의해 헐리고 말았다.

○ 남산봉수대(南山烽燧臺)
남산에는 일찍이 5개소의 봉수대가 있었는데, 조선초기부터 고중 31년(1894) 갑오개혁 때 없어지기까지 근 5백년간 존속하였다.
남산의 봉수대는 일명 경봉수(京烽燧)라고도 하며, 전국 각지의 경보를 받아 병조(兵曹)에 종합 보고하는 중앙봉수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산봉수대는 1992년 [남산 제모습 찾기사업]의 일환으로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1993년 7월 완공되었다.

○ 녹천정(鹿川亭)
남산 기슭 예장동에는 조선초기에 녹천정이란 정자가 있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은 이곳을 소위 총독관사(總督官舍)로 정하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정자를 새로 꾸민 일도 있었지만 원래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터잡은 곳이라 한다..

○ 청학동(靑鶴洞)
남산의 청학동은 조선초기 이래 삼청동(三淸洞), 인왕동(仁旺洞), 쌍계동(雙溪洞), 백운동(白雲洞)과 함께 도성 내에서 경치좋은 곳으로 이름 높던 곳이다. 이곳에는 일찍이 연산군 때의 천재시인 박은(朴誾), 그리고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대제학 이행(李荇) 등이 별장을 가졌다. 이후 조선말까지 남산에는 숱한 시인 묵객들이 별장과 정자를 짓고 경관을 즐겼다.

○ 균역청터(均役廳址)
남학동(남학동)에 있는 일신초등학교 자리는 옛날 균역청이 있던 자리이다.
균역청은 영조 27년(1751)에 창설되었는데, 징병을 피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고 면제해 주는 사무를 집행하고 양반들이 노비를 팔고 사는데 세금을 부과하는 사무를 담당하였다. 그 외에도 소금과 어업에 대한 부가세 등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 영희전터(永禧殿址)
지금 중부경찰서 자리인 저동(苧洞) 2가 62번지 부근은 일찍이 영희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에는 원래 세조의 의숙공주(懿淑公主)의 저택이 있었다. 중종 때는 단경왕후(端敬王后)를 옮겨 살게 하였고, 광해군 2년에는 묘사(廟祠)로 꾸며 공빈김씨(恭嬪金氏)의 영위를 모시기도 하였다.

○ 장충단공원(奬忠壇公園)
이 곳은 영조 이래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南小營)이 있었고, 광무 4년(1900)에 장충단을 꾸민 이래로 장충단이라 불렀다. 고종은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식(李耕植)과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등 몸을 희생하여 절개를 지킨 장졸들의 영혼을 모시고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근린공원인 장충단공원은 1984년 9월 22일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에 흡수 합병되었다.

○ 남소영(南小營)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버티고개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는데, 남소문 옆에는 남소영이 건립되어 있었다. 남소영은 조선시대에 수도방위와 왕실호위를 맡은 분영(分營)이었다.

○ 태평관(太平館)
지금의 상공회의소 일대에는 조선초기에 건립된 태평관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남대문 안쪽의 서부 양생방(養生坊)으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중종 때의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선조 때의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이곳에서 성혼식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순조 이전에 이미 없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전환국(典 局)
지금의 상공회의소 근처에 전환국이 있었다. 고종 22년(1885)에 처음으로 전환국을 설치하고 독일의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백동전(白銅錢)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주조된 백동전의 시초이다.

○ 선혜청(宣惠廳)
지금 남대문시장가 접해 있는 남창동(南倉洞)에는 일찍이 대동미(大同米)와 포전(布錢)을 받아들이고 내주던 선혜청이 있었다.

○ 혜민서(惠民署)
현재 외환은행 본점 동쪽인 을지로 2가 192번지는 조선시대 혜민서가 있던 자리이다. 혜민서는 태조 원년(1392)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설치되어 고종 19년(1882) 폐지될 때까지 서민의 질병치료를 담당하였던 의료기관이었다.

○ 훈련원(訓練院)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 맞은 편에는 조선시대의 훈련원이 있었다. 훈련원은 태조 원년(1392)에 설치되어 고종 31년(1894)까지 5백년동안 유지되었던 기관이다. 무관들이 과거를 보기도 하였고 무예를 훈련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곳에서 과거를 보았다. 이 안에는 서울 장안에서 물맛 좋기로 이름났던 통우물(桶井)이 있었다.

○ 군기시(軍器寺)
지금의 서울특별시청사가 있는 자리에는 병기(兵器)와 기치(旗幟), 융장(戎仗) 등을 만들던 군기시가 있었다. 태조 때는 군기감(軍器監)이었는데, 태종 14년(1414)에 군기시로 고쳐 불렀다. 고종 31년(1894) 이 제도는 폐지되었다.

○ 덕안궁터(德安宮址)
중구 태평로 1가 조선일보사 자리는 고종 때의 덕안궁터이다. 본래 이 곳은 명례궁(明禮宮)이 있던 자리였는데, 광무 원년 (1897)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부터 덕수궁으로 돌아오자, 그 해 엄씨를 빈(嬪)으로 책봉하면서 명례궁 터전에 경선궁을 이룩하였다. 1912년 엄비가 돌아감에 따라 이 곳에 사묘(私廟)를 세우고 경선궁을 덕안궁으로 고쳐 불렀다.

○ 저경궁터(儲慶宮址)
남대문로 3가 111번지에는 저경궁이 있었다. 원래 이곳은 선조의 다섯째 왕자인 원종(元宗)이 살던 저택이었다. 그때는 송현궁(松峴宮)으로 불렀는데, 영조 31년(1755)에 인빈(仁嬪) 김씨의 사판(祠板)을 모시고부터 저경궁이라 불리었다.

○ 부녀시장(婦女市場)
동대문 동묘(東廟) 남서쪽에는 여인네들만 모이는 채소난전이 있었다. 부녀자들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시대에 채소난전이 서게 된 것은 단종의 왕비인 송비(宋妃)가 단종이 영월에서 세상을 떠난 후 정업원(淨業院)에서 궁핍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인네들이 그 근방에 채소난전이 서게 하여 채소를 송비에게 몰래 바치곤 하였기 때문이란 것이다.

○ 낙천정터(樂天亭址)
광진구 자양동에서 동남쪽으로 한강변을 끼고 거슬러 올라간 산 위에 낙천정이 있었다.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이궁(離宮)을 짓고 정자를 꾸몄는데 이를 낙천정이라 하였다. 이 산을 일명 발산(鉢山)이라고도 부르고 그 동북쪽 기슭을 대궐터로 부른 이유가 그 까닭이다.

○ 전관원터(箭串院址)
살곶이다리에서 서북쪽 지금의 성동교 서북쪽에 전관원이 있었다. 서울 근교에는 전관원과 함께 동쪽에 보제원(普濟院), 북쪽에 홍제원(弘濟院), 남쪽에 이태원(梨泰院)의 4개의 원(院)이 있었다.
원은 역로(驛路)에 부수되는 역(驛)과 같은 것으로, 공문서의 전달과 관청에서 쓰는 물품의 운송이라든지 공무를 띠고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던 곳이다.

○ 독서당터(讀書堂址)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 일대는 옛날에 두뭇개(豆毛浦)로 불리었다. 이곳 응봉(鷹峯) 아래에는 중종 12년(1512)에 지은 독서당이 있었다. 독서당이란 본래 세종이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 옛정 장의사(藏義寺)에서 독서에 전념케 한 것이 그 시초였다. 그러나 독서당이라 불리우기는 성종이 용산에 독서당을 마련하고 부터였다.

○ 동빙고(東氷庫)
지금의 옥수동에는 동빙고가 있었다. 이곳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궁중의 제사용으로 썼다. 서빙고동에는 서빙고가 있었다.

○ 동·서활인서터(東·西活人署址)
동·서활인서는 태조 원년(1392) 설치되어 고종 19년(1882)에 폐지된 의료기관이었다. 활인서는 서민들의 질병치료를 담당하였는데, 특히 전염병 치료를 전담하였다. 이와 함께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백성들을 위한 구제사업도 행하였다.
동활인서의 위치는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번지(전의 돈암장 자리)이며, 서활인서는 처음 마포구 아현동 267번지 아현중학교 자리에 있다가 조선말에 중구 신당동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 경기감영터(京畿監營址)
지금의 서대문적십자병원과 서대문우체국이 있는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서대문 밖으로써 경기감영이 있었다. 태조 2년(1393)에 설치되었는데 속칭 포정사(布政司)로 부르기도 하였다.
경기감영의 선화당(宣化堂)은 건양 원년(1896)에 수원으로 옮겨가면서 군영(軍營)이나 한성부의 일부로 쓰이기도 했다.

○ 연희궁터(衍禧宮址)
서대문구 연희동 연희입체교차로 부근에는 연희궁이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종이 왕위를 물러난 뒤 일시 머물렀으며 세종은 그 8년(1426)에 이 궁에 옮겨 살다가 이듬해 3월 창덕궁으로 되돌아간 일도 있었다. 또 연산군은 그 11년(1505)에 창의문 밖에 탕춘대(蕩春臺)를 꾸미고 연희궁을 연회장소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

○ 망원정터(望遠亭址)
마포구 망원동 137, 207-1 번지 일대 양화나루 서쪽 언덕에 있었다. 태종의 아들이며 세종의 형인 효녕대군이 세운 정자로 세종 6년(1424)에 건립되었다.
경치가 매우 좋아 중국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되었으나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 군자감터(軍資監址)
원효로 3가 1번지에 있었다. 군자감은 조선시대에 전국의 군전(軍田)으로부터 곡식을 받아들여서 군용으로 쓰기 위해 곡식을 비축하는 사무를 맡아보던 기관이었다. 군자감은 태조때 창건되었는데, 분감(分監은) 남대문 안에 두었고 용산강 북쪽에 강감(江監)을 두었다.

○ 새남터(沙南基)
용산역을 지나서 한강철교에 이르기 직전에 천주교도들이 세운 기념탑이 있다. 이 기념탑이 서 있는 부근 서부이촌동 일대는 조선시대 사형장이던 새남터였다. 고종 3년(1866)에 대원군에 의해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 한강진(漢江鎭)
한남동에는 조선시대의 한강진이 있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강상류에 송파진(松坡鎭)이 있었고, 하류에 양화진(楊花鎭), 그리고 중간에 한강진이 있었다. 이 진영들은 한강의 대안인 노량진(鷺梁鎭)과 개성의 남쪽인 임진도(臨津渡)와 함께 서울을 경비하는 5대 요지였다.

○ 제천정터(濟天亭址)
한남당과 보광동 사이 아래 기슭에는 조선시대의 제천정이 있었다. 제천정 터전의 정자는 모두 나라의 소유였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반드시 이 곳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 마포(麻浦, 삼개)
한강은 조선시대 중부지방의 수상교통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 부근의 한강은 5강(五江)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하는데, 뚝섬·노량·용산·마포·양화진이 이에 해당된다.
이 중 마포, 즉 삼개는 오늘날 마포구 마포동 일대의 한강수역을 의미하며 용산과 양화진 사이에 있었다. 이 곳 마포에는 삼남지방의 곡식을 비롯하여 서해안에서 들어오는 소금과 어물 등이 집적되었다. 또한 토정비결을 지은 이지함(李之 )이 이 지역에서 움막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주변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유명하였다.
3. 유명인물이 살던 곳
○ 세종이 탄생한 곳
현 종로구 통인동 137번지 일대이다. 1956년 12월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와 한글학회가 공동으로 이곳을 답사하여 고증하였다.

○ 효녕대군(孝寧大君)의 주택지
효녕대군의 저택은 현 종로구 부암동 329번지의 4호이다. 옛 인왕산 아래 무계동(武溪洞)에 있었다. 이곳은 비해당(匪懈堂)이 있었다.

○ 인원왕후(仁元王后)가 탄생한 곳
종로구 궁정동 1번지 대은암(大隱岩)이 있는 부근은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가 태어난 곳이다.

○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태어난 곳
인현왕후 민씨(閔氏)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중앙일보사 사옥 맞은편 순화빌딩의 주차장 터이다. 인현왕후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 15세 때 숙종의 계비가 되었는데 20세까지 왕자를 낳지 못해 숙종에게 장희빈(張禧嬪)을 후궁으로 천거하였으나 장희빈의 모함으로 6년동안 안국동 감고당(感古堂)에서 칩거하였다.

○ 조대비(趙大妃)가 태어난 곳
성동구 옥수동 295번지 옥정초등학교 뒤쪽에는 헌종의 모후(母后)인 조대비의 생가가 있었다.

○ 강감찬(姜邯贊)장군이 태어난 곳
관악구 봉천동 218번지로 지금 낙성대공원 북쪽으로 약 100m되는 지점이다. 강감찬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40만 대군을 대파시켜 국위를 떨친 장군이다.

○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살던 곳
중구 인현동 1가 40번지 마른내 일대이다. 이곳에는 서애 유성룡도 같이 살았다 한다.

○ 권율(權慄)장군이 살던 곳
서대문구 행림동 1번지 부근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도원수(都元帥)였고 행주(幸州)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에겐 아들이 없었으므로 사위였던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에게 이 집터를 물려주었다.

○ 정도전(鄭道傳)의 집터
조선 개국 공신이었던 정도전의 옛집은 종로구 수송동 146번지(종로구청자리)였다. 태종에게 몰려 죽음을 당한 후에는 집을 헐고, 비단·포목·인삼·의복을 대궐에 납품하는 기관인 제용감(濟用監)과 말을 관리하고 사육하는 관청인 사복시(司僕寺)가 들어섰다.

○ 유관(柳寬)의 집터
종로구 창신동사거리 창신초등학교 골목 안의 우산각골(雨傘閣里)은 청백리(淸白吏)로서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이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 하루는 비가 와서 지붕이 새고 있었으므로 방안에서 우산을 받치고 있던 유관이 부인에게 "우리는 우산이 있어서 비를 피하고 있지만 우산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낭패는 어찌 하겠소"라고 백성들을 걱정하였다 한다. 이 곳을 우산각골로 부르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 성삼문(成三問)의 집터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었던 성삼문의 집은 종로구 화동 1번지(정독도서관 뒤)에 있었다. 집터에 비석이 있었으나 광복 이전에 없어졌다.

○ 권람(權擥)의 집터
세조 때의 문신 권람의 집은 지금 남산 1호터널 입구 서쪽에 위치하였다.

○ 김정희(金正喜)의 집터
종로구 통의동 7번지 창의궁(彰義宮) 자리였다. 김정희는 조선말기의 금석학자(金石學者)이며 우리나라 서예사(書藝史)에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다.

○ 김종서(金宗瑞)의 집터
서대문구 충정로 1가와 의주로 1가 사이에 있었다.

○ 남이(南怡)장군의 집터
종로구 연건동 126번지에 있었다.

○ 맹사성(孟思誠)의 집터
종로구 정독도서관에서 가회동으로 넘어가는 삼청동 35-119 일대 맹현(孟峴)에 있었다. 조선초기에 청렴과 덕행으로 이름났던 맹사성은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공무가 끝나면 이 곳의 초라한 집으로 돌아갔다.

○ 정철(鄭澈)의 집터
종로구 청운동 123번지 청운초등학교 근처이다. 그는 조선조 시가사상(詩歌史上)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쌍벽을 이룬 시가문학의 거장이었다.

○ 조광조(趙光祖)의 집터
종로구 운니동 18번지 교동초등학교 부근이다.
중종 때의 유학자이며 정치가로서 사림파(士林派)의 영수이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고, 상소(上疏)하는 사람을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 이안눌(李安訥)의 집터
중구 필동 3가 동국대학교 내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에 수행하였고 청백리였다. 시문학(詩文學)의 대가였다.

○ 손순효(孫舜孝)의 집터
성종 때 우찬성(右贊成)을 지낸 청백리로 중구 명동 2가 1번지에 살았다. 그는 손님이 찾아오면 막걸리를 대접하였는데 항상 안주가 없었으므로 성종이 가끔 내시를 시켜 음식을 보내주곤 하였다.

○ 유성룡(柳成龍)의 집터
중구 인현동 1가 40번지 부근이다. 이 부근을 옛날에는 마른내(乾川洞)라 하였다. 생민동(生民洞)에 흘러내리는 개천이 비가 내리지 않는 동안 항상 메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곳 앞길이 마른내길이다. 이곳에는 단종 때 김종서, 정인지, 선조 때의 원균, 이순신 등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 이덕형(李德馨)의 집터
용산구 도동(桃洞)과 동자동(東子洞) 경계의 송경재가 그곳이다. 현재 중구 남대문로5가 대우재단빌딩 자리이다. 그는 선조,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명망이 높았다.

○ 이율곡(李栗谷)의 집터
종로구 관훈동 197번지에 살았다. 태어나기는 강릉 외가였다. 이곳에는 그 후에 조선말기에 사동대신(寺洞大臣)으로 알려진 김병학(金炳學)의 대저택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이율곡은 이곳에서 49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 이지함(李之 )의 집터
지금의 마포대교 북쪽 입체교차로 유수지 옆이다. 고서(古書)인 {토정비결(土亭秘訣)}로 널리 알려진 이지함은 재산을 탐하지 않고 고결한 언행으로 일생을 마쳤다.

○ 이퇴계(李退溪)의 집터
중구 서소문동 57번지 일대 구 중앙일보사옥 건너편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일대를 학다리골이라 하였는데, 당시에는 이곳이 서울의 명승지였다.

○ 정광필(鄭光弼)의 집터
중구 회현동 1가 14번지이다. 그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이 옛터를 중심으로 그의 동래 정씨 후손들이 계속 살아왔으므로 회현동(會賢洞)이란 이름이 붙기도 하였다. 그는 연산군이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자 이를 간언하다가 귀양갔으나 중종반정으로 복귀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 송시열(宋時烈)의 집터
종로구 명륜동 1가 2번지이다. 그는 현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 양성지(梁誠之)의 집터
중구 인현동 1가 40번지이다. 그는 성종 때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다.

○ 이완(李浣)의 집터
종로구 인사동 222번지이다. 효종 때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추진했던 이완대장의 집을 그가 죽은지 20년후에 민종도(閔宗道)가 빼앗아 들어간 후에 심은 오얏나무의 열매가 맺지 않았다고 한다.

○ 김좌근(金左根)의 집터
종로구 경운동 66번지이다. 김좌근이 아들 병기(炳冀)와 함께 이 곳에서 세도정치를 하였는데, 이곳이 교동(校洞)의 일부였으므로 그를 교동대감으로 불렀다.

○ 김홍근(金興根)의 집터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태화관(泰和館)터이다. 그 뒤에는 이완용이 살기도 하였다. 김홍근은 철종실록을 편찬했고, 안동김씨의 배경으로 방자한 행동을 하다가 귀양가기도 하였다.

○ 윤선도(尹善道)의 집터
중구 명동 명동성당 부근이다. 이곳은 옛부터 명당터로 이름난 곳이었다. 윤선도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인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는데 그가 지은 시가(詩歌)는 뛰어나다.

○ 민영익(閔泳翊)의 집터
종로구 관훈동 198번지 18호이다. 그는 민승호(閔升鎬)의 아들로 미국전권대사,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원래 이 집터는 죽동궁(竹洞宮)으로 순조의 첫째 사위 김현근(金賢根)의 집이었다.

○ 민영환(閔泳煥)의 집터
종로구 견지동 27번지 2호이다. 그는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 외부(外部)·학부(學部)·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을 역임하다가 광무 9년(1905) 을사조약이 맺어져 나라의 주권이 빼앗기자 자결하였다.

○ 박승종(朴承宗)의 집터
중구 예장동 2번지이다. 그는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냈다. 당시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키자 극력 반대한 의리있는 정치가였다.

○ 박영효(朴泳孝)의 집터
종로구 관훈동 30번지 1호 경인미술관 자리이다. 철종의 사위이다.

○ 김상옥(金相玉)의 집터
종로 5가 동대문 부근이다. 그는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후암동과 효제동에서 혈전을 전개하였다. 그의 묘는 국립묘지에 있다.

○ 김옥균(金玉均)의 집터
종로구 화동 106번지(전 경기고등학교 교정)이다. 그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했던 개화파였다

 

1국보  제1호서울숭례문
(서울崇禮門)

서울 중구중구
2국보  제2호원각사지십층석탑
(圓覺寺址十層石塔)
서울 종로구종로구
3국보  제70호훈민정음
(訓民正音)

서울 성북구전성우
4국보  제71호동국정운<권1,6>
(東國正韻<卷一,六>)
서울 성북구전성우
5국보  제93호백자철화포도문호
(白磁鐵畵葡萄文壺)
서울 용산구국립중앙박물관
6국보  제107호백자철화포도문호
(白磁鐵畵葡萄文壺)
서울 서대문구이화여자대학교
7국보  제135호혜원풍속도
(蕙園風俗圖)
서울 성북구전성우
8국보  제139호군선도병
(群仙圖屛)
서울 용산구리움미술관
9국보  제142호동국정운1질
(東國正韻一帙)
서울 광진구건국대학교
10국보  제148호십칠사찬고금통요
(十七史纂古今通要)
서울 관악구국유
11국보 
제148-1호
권지16
(卷誌十六)
서울 관악구서울대학교
12국보 
제148-2호
권지17
(卷之十七)
서울 서초구국립중앙도서관
13국보  제149호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
서울 성북구사유
14국보 
제149-1호
권지4,5
(卷之四,五)
서울 성북구전성우
15국보 
제149-2호
권지6
(卷之六)
서울 중구조병순
16국보  제150호송조표전총류
(宋朝表전總類)
서울 관악구서울대학교
17국보  제151호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서울 관악구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국가기록원 부산지원
18국보 
제151-1호
정족산본
(鼎足山本)
서울 관악구서울대학교
19국보 
제151-3호
오대산본
(五臺山本)
서울 관악구서울대학교
20국보 
제151-4호
기타산엽본
(基他散葉本)
서울 관악구서울대학교

 

21국보  제152호비변사등록부의정부등록
(備邊司謄錄附議政府謄錄)
서울 관악구서울대학교
22국보  제153호일성록
(日省綠)
서울 관악구서울대학교
23국보  제166호백자철화매죽문대호
(白磁鐵畵梅竹文大壺)
서울 용산구국립중앙박물관
24국보  제168호백자진사매국문병
(白磁辰砂梅菊文甁)
서울 용산구국립중앙박물관
25국보  제170호청화백자매조죽문호
(靑華白磁梅鳥竹文壺)
서울 용산구국립중앙박물관
26국보  제172호진양군영인정씨묘출토유물
(晋陽郡令人鄭氏墓出土遺物)
서울 용산구리움미술관
27국보 
제172-1호
백자상감초화문편병
(白磁象嵌草花文扁甁)
서울 용산구리움미술관
28국보 
제172-2호
묘지
(墓誌)
서울 용산구리움미술관
29국보 
제172-3호

(盞)
서울 용산구리움미술관
30국보  제175호백자상감연당초문대접
(白磁象嵌蓮唐草文大楪)
서울 용산구국립중앙박물관

1.서울숭례문

 

 

종 목 국보 제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2.원각사지십층석탑

 

 

종 목 국보 제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3.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종 목 국보 제3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신라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4.서울흥인지문

 

 

종 목 보물 제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시 대 조선시대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5.서울보신각종

 

 

종 목 보물 제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서 보관 중이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구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6.대원각사비

 

 

종 목 보물 제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탑골공원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7.서울동묘

 

 

종 목 보물 제14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숭인동 238-1

시 대 조선시대

 

 서울 흥인지문(보물 제1호) 밖에 있는 동묘는 중국 촉한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에게 제사지내는 묘로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이다. 동묘를 짓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인데, 명나라의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다.

 

동묘는 선조 32년(1599)에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601년에 완성되었다. 현재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의 친족인 관평, 주창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6칸이고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지붕 무게를 받치는 장식은 새의 부리처럼 뻗어 나오는 익공계 양식이다.

 

평면상의 특징은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는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데, 이와 같은 특징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다른 건축들과 비교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8.경복궁

 

 

종 목 사적 제11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9.서울성곽

 

 

종 목 사적 제1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시 대 조선시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이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10.광주풍납리토성

 

 

종 목 사적 제1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풍납동 72-1외

시 대 삼국시대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은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방식으로 고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았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 곳이 많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풍납리식 민무늬토기·신라식 토기들과 그물추·물레·가락바퀴(방추차)·기와 등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방어성으로 보는 두가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더욱 연구·조사 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기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서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과 관련되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있는 곳이다.

 

11.창덕궁(비원포함)

 

 

종 목 사적 제122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12.종묘

 

 

종 목 사적 제125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훈정동 1-2

시 대 조선시대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 다시 지었다.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 중 연건평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중국의 종묘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정면과 수평성이 강조된 건물 모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동양 고대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담긴 유산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정전 및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종묘제례와 음악·춤의 원형이 잘 계승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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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유묵<!-- 이미지영역 끝-->
<!-- 시도지정문화재 v_kdcd=21,23,24 인경우 연락처 -->
종    목보물  제569호
명     칭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
분     류기록유산 / 서간류/ 서예/ 서예
수량/면적25점
지 정 일1972.08.16
소 재 지서울 강남구  청담동 90-13 현대빌라 301호외
시     대대한제국시대
소 유 자국유,사유
관 리 자국유,사유
일반설명 | 전문설명
이것은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여순감옥에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 옥중에서 휘호(揮毫: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이르는 말)한 유묵(遺墨:살아있을 때에 써 둔 글씨나 그린 그림)들을 일괄해서 지정한 것이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의 요청으로 산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려고 나서자 이에 참가하였다. 1906년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기도 했다.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한 후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했으며,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여 그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권총을 쏴 3발을 명중시켰다. 여순감옥에 수감된 후 1910년 3월 26일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문화재들은 각각의 소재와 소유자가 서로 다르고, 형식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물 제569호의 1호인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 보물 제569호의 2호인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보물 제569호의 14호인 ‘제일강산(第一江山)’ 등이 있고, 보물 제 569호의 25호에 이르기까지 총 25편이며, 끝에는 모두 안중근이 썼다는 글과 장인(掌印: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찍혀 있다.

이 문화재는 독립운동사 연구 및 안중근 개인사(個人史)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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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이미지영역 끝-->
<!-- 시도지정문화재 v_kdcd=21,23,24 인경우 연락처 -->
종    목사적  제32호
명     칭독립문(獨立門)
분     류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수량/면적2715.8㎡
지 정 일1963.01.21
소 재 지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
시     대대한제국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서대문구
일반설명 | 전문설명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앞에는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남아있다.

원래 남동쪽으로 70m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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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이미지영역 끝-->
<!-- 시도지정문화재 v_kdcd=21,23,24 인경우 연락처 -->
종    목사적  제157호
명     칭환구단(圜丘壇)
분     류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제사유적/ 제사터
수량/면적8,661.16㎡
지 정 일1967.07.15
소 재 지서울 중구  소공동 87-1
시     대대한제국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중구
일반설명 | 전문설명
환구단(圜丘壇)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된 것으로 믿어진다.,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시행되어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조선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되었다.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되었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이다.

현재 환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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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이미지영역 끝-->
<!-- 시도지정문화재 v_kdcd=21,23,24 인경우 연락처 -->
종    목사적  제171호
명     칭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高宗卽位40年稱慶紀念碑)
분     류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수량/면적628.09㎡
지 정 일1969.07.18
소 재 지서울 종로구  세종로 142-3
시     대대한제국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종로구
일반설명 | 전문설명
고종(재위 1863∼1907)이 왕이 된지 40주년과 그의 나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안에 있다. 또한 이 비석에는 고종이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기로소(耆老所)는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우대하는 제도로, 고려 때의 기영회를 계승한 관제이다. 조선 태조가 60세 되던 해에 친히 기영회에 들어갔는데, 이후 왕들이 오래살지 못해 기로소에 들어가는 이가 없자, 숙종과 영조 등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하여 미리 앞당겨 들어간 것을 본받아 고종은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비석은 귀부, 비몸, 이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몸 앞면에는 황태자인 순종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정자(停子)형 건물로 건물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건물의 남쪽에 설치한 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 문은 일제시대 일본인이 떼어 가서 대문으로 사용하던 것을 광복 이후 찾아와 복원한 것이다.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전은 20세기초 전통적인 건축양식의 틀이 해체되기 직전에 세워진 건물로 당시 이러한 유형의 건물 중 대단히 아름다운 건물이며, 이 시기에 세워진 덕수궁의 다른 여러 건물과 함께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다.

200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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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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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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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하고 있어요

 

2008.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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