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명예의 전당
유네스코가인정한 우리 나라의 세계 문화 유산
jin1**** 조회수 339,629 작성일2008.09.24

유네스코가인정한 우리 나라의 세계 문화 유산에 대해 알려주세요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178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비공개 답변
우주신

 1) 석굴암

석굴암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서기 774년인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으며,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로 칭하였다. 이 석굴은 신라시대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경주 토함산 정상에 못 미친 깊숙한 곳에 동해를 향해 앉아 있는 석굴암은 완벽하고 빼어난 조각과 독창적 건축으로 전세계에 이름이 높다.

 

 2) 불국사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때 완공하였다

석굴암은 신라시대 전성기의 최고 걸작으로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유산이며, 불국사는 불교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불국사는 사적·명승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불국사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불국사는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3) 해인사장경판전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7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제734호)이 있다. 이 중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 종묘

종묘는 제왕을 기리는 유교사당의 표본으로서 16세기 이래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 의례공간이다. 종묘에서는 의례와 음악과 무용이 잘 조화된 전통의식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가 있으며,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 창덕궁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6) 수원화성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7) 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는 한반도를 천년이상 지배한 신라왕조의 수도로 남산을 포함한 경주 주변에 한국의 건축물과 불교 발달에 있어 중요한 많은 유적과 기념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8) 고인돌유적

고창, 화순, 강화의 선사유적들은 거대한 석조로 만들어진 2,000∼3,000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선사시대 문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당시의 기술과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고인돌 유적은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3.06.07.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4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rjrj****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유네스코에 등록이 된 세계문화유산

 

 .창덕궁(昌德宮) :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사적 제122호

 

 창덕궁(昌德宮)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 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 정궁으로 사용한 후 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수원화성(水原華城) :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사적 제3호


 둘레 5,743m, 길이 5,520m, 높이 4.9m~6.2m이며, 면적은 18만 8048㎡이다. 수원성은 단순히 토축된 읍성이었으나, 조선 정조 때 성곽을 새로이 축조함으로써 이후로는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성내에 어목헌지(禦牧軒池)·관청전지(官廳前池)·문루전지(門樓前池)·객사후지(客舍後池) 등의 못이 있었다.

 

 

.

 

.석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 : 1995년 12월 석굴암과 불국사는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

 

 석굴암(石窟庵)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서기 774년인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으며,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로 칭하였다.석굴암의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 공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금강역사상, 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불국사(佛國寺)는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경사진 곳에 자리한 불국사는 심오한 불교사상과 천재 예술가의 혼이 독특한 형태로 표현되어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 기념비적인 예술품이다.



 

 

 

'해인사(海印寺) 장경판전(藏經板殿) :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 장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사간판전이 있다.


 

 

.종묘(宗廟) : 1995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국보 제227호.


종묘(宗廟)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경주역사유적지구(慶州歷史遺蹟地區) :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록.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천년(B.C 57~A.D 935)의 고도(古都)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불교유적, 왕경(王京)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고창(高敞).강화(江華).화순(和順)의 고인돌유적(遺蹟) :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고인돌은 선사시대 돌무덤의 일종으로 영어로는 돌멘(Dolmen)이라고 한다. 고인돌은 거석기념물의 하나이며 피라미드(Pyramid), 오벨리스크(Obelisk)등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과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등이 모두 거석문화의 산물이다.


 

.세계무형유산

 

.종묘제례(宗廟祭禮) 및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 

 

종묘제례(宗廟祭禮)란 종묘에서 행하는 제향의식으로, 조선시대의 나라제사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나라에 공적이 있는 공신들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으로, 사직과 더불어 국가의 근본을 상징하는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이다.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종묘에서 제사를 드릴 때 의식을 장엄하게 치르기 위하여 연주하는 기악(樂)과 노래(歌)·춤(舞)을 말한다. 이는 조선 세종 때 궁중희례연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세조10년(1464) 제례에 필요한 악곡이 첨가되면서 종묘제례악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판소리 :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제2차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소리(창), 아니리(말), 너름새(몸짓)을 섞어가며 구연(口演)하는 일종의 솔로 오페라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합성어로 ‘소리’는 ‘음악’을 말하고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 또는 ‘상황과 장면’을 뜻하는 것으로 ‘많은 청중들이 모인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세계기록유산


.훈민정음(訓民正音) :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국보 제70호.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란 뜻이다.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은 그때까지 사용되던 한자가 우리말과 구조가 다른 중국어의 표기를 위한 문자체계이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배워 사용할 수 없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여 세종 25년(1443)에 우리말의 표기에 적합한 문자체계를 완성하고 "훈민정음"이라 명명하였다.

 

 




.승정원(承政院)일기 :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국보 제303호


승정원(承政院)은 조선 정종대에 창설된 기관으로서 국가의 모든 기밀을 취급하던 국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1623년(인조1) 3월부터 1894년(고종31) 6월까지 272년간 승정원에서 처리한 국정 기록과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규장각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1910년(융희 4)까지 총 3,243책의 기록이 남아 있다.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鈔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하 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 함)은 백운화상이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들에게 선도와 선관의 안목을 자각케 하고자 함은 물론, 선풍을 전등하여 법맥을 계승케 하고자 저술한 것으로서, 그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국보 제151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 있는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2008.09.26.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530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탈퇴한 사용자 답변

<유네스코 지정 우리나라 문화유산>

문화유산 : 석굴암·불국사, 해인사장경판전,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인돌유적
기록유산 :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무형유산 : 종묘제례·종묘제례악, 판소리, 강릉단오제
자연유산 : 한라산,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성산일출봉

 

.창덕궁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Ⅳ)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석굴암 불국사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석굴암은 신라시대 전성기의 최고 걸작으로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유산이며, 불국사는 불교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Ⅰ), (Ⅳ)
(Ⅰ) 독특한 예술적 혹은 미적인 업적, 즉 창조적인 재능의 걸작품을 대표하는 유산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토함산 서쪽 중턱의 경사진 곳에 자리한 불국사는 심오한 불교사상과 천재 예술가의 혼이 독특한 형태로 표현되어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 기념비적인 예술품이다.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Ⅳ), (Ⅵ)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Ⅵ) 역사적 중요성이나 함축성이 현저한 사상이나 신념, 사진이나 인물과 가장 중요한 연관이 있는 유산

 

.종묘

종묘는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종묘는 제왕을 기리는 유교사당의 표본으로서 16세기 이래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 의례공간이다. 종묘에서는 의례와 음악과 무용이 잘 조화된 전통의식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등록기준: 세계문화유산기준 (Ⅳ)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경주역사유적지구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이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한반도를 천년이상 지배한 신라왕조의 수도로 남산을 포함한 경주 주변에 한국의 건축물과 불교 발달에 있어 중요한 많은 유적과 기념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등록기준: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고창, 화순, 강화의 선고인돌 유적

 

고창, 화순, 강화의 선사유적들은 거대한 석조로 만들어진 2,000∼3,000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선사시대 문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당시의 기술과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등록기준: 세계문화유산기준 (Ⅲ)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

2007.6.27(수)일, 뉴질랜드 크아이스트처치에서 열린 제31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 (Jeju Volcanic Island and Lava Tubes)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제주도는 수많은 측화산과 세계적인 규모의 용암동굴, 다양한 희귀생물 및 멸종위기종의 서식지가 분포하고 있어 지구의 화산 생성과정 연구와 생태계 연구의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으며,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의 아름다운 경관과 생물· 지질 등은 세계적인 자연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등록기준: 세계자연유산기준 (vii), (viii)
(vii) 최상의 자연현상이나 뛰어난 자연미와 미학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을 포함하여야 한다.
(viii) 생명의 기록, 지형의 발달에 있어 중요한 지질학적 진행 과정, 또는 지형학이나 자연지리학적 측면의 중요 특징을 포함하여 지구 역사상의 주요 단계를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이어야 한다.

2008.11.02.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16****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1) 창덕궁

창덕궁 []
요약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지정번호사적 제122호
지정연도1963년 1월 18일
소재지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시대조선
크기면적 43만 4877㎡
종류궁궐
창덕궁 관람정 /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반도지에 바싹 붙여 세워진 부채꼴형 정자이다.
본문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1405년(태종 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이다. 태종()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의 향교동()에 이궁()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殿선정전(殿)·소덕전(殿)·빈경당()·여일전(殿)·정월전(殿)·옥화당()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 해인사 대장경판

 

해인사 대장경판 []
요약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경내의 2동()의 장경판고()에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판.
지정번호국보 제32호
지정연도1962년 12월 20일
소장해인사
소재지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시대고려
크기8만 1258판
종류대장경판
해인사 대장경판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내 소장. 국보 제32호. 고려 시대. 해인사 경내의 2동(棟)의 경판고(經板庫)에 보관되어 있다.
본문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8만 1258판이다. 8만여 판에 8만 4000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 있으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237년(고종 24)부터 16년간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몽고군의 격퇴를 발원()하여 대장도감()과 분사도감()을 두어 만든 것이다. 경판고 안에 5층의 판가()를 설치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판가는 천지현황() 등의 천자문()의 순서로 함()의 호수를 정하여 분류·배치하고, 권차()와 정수()의 순으로 가장()하였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24cm 내외, 가로 69.6cm 내외, 두께 2.6∼3.9cm로 양끝에 나무를 끼어 판목의 균제()를 지니게 하였고, 네 모서리에는 구리판을 붙이고, 전면에는 얇게 칠을 하였다. 판목은 남해지방에서 나는 후박나무를 썼고, 무게는 3∼4kg 가량으로 현재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천지()의 계선만 있고, 각 행의 계선은 없이 한쪽 길이 1.8mm의 글자가 23행, 각 행에 14자씩 새겨 있는데, 그 글씨가 늠름하고 정교하여 고려시대 판각의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강화 서문(西) 밖 대장경판고에 두었고, 그 후 강화의 선원사()로 옮겼다가, 1398년(태조 7)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2007년 6월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



(3) 고인돌

제원 황석리 유적 []
요약
충북 제천시 청풍면() 황석리() 남한강변의 평평한 충적토 위에 펼쳐져 있는 고인돌 유적.
소재지충북 제천시 청풍면 황석리
시대청동기시대
규모고인돌유적
본문

1962년 국립중앙박물관은 18기의 고인돌을 발굴, 그 대체적인 문화성격과 함께 당시의 주인공을 찾아, 그 연대가 BC 2450년임을 밝혔다. 1980년 충북대학 박물관이 충주댐 수몰지역 지표조사로 고인돌 11기와 선돌 2기를 더 찾아냄으로써 이곳이 거석문화()의 집중지임을 확인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82∼1983년 고인돌 8기와 선돌 2기를 발굴하였고, 고인돌 발굴과정에서 새로이 삼국시대의 무덤도 찾아냈다. 이로써 빗살무늬토기층[]에서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문화성격이 밝혀졌다.

이 유적에서는 확인된 고인돌 29기를 포함하여 모두 46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유구()의 배치와 묻힌 사람의 머리 방향이 강의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2줄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묻힌 사람이 동일신분이거나 유구가 가족공동묘지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 물과의 관계에서 당시의 문화배경을 찾을 수 있고, 죽은 사람의 영생을 기원하는 신앙의식도 엿볼 수 있다.

② 고인돌이 한곳에 집중분포하고 있지만, 그 구조가 다양한 것은 문화의 지역적 특성과 매장방법의 차이에서 연유한다.

③ 모두 5기의 고인돌에서 당시의 묻힌 사람의 뼈를 찾았는데, 이것은 체질인류학적으로 한민족()의 기원을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여기에 묻힌 사람은 지배자의 무덤이 아니며, 당시에는 남녀노소 구별 없이 마을사람의 자발적 참여로 고인돌을 축조하여 영생을 기원하던 매장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껴묻거리[]를 통하여 묻힌 사람의 성()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남녀의 무덤에서 공통적으로 많이 출토되는 붉은간토기[]는 이 유물에 대한 문화전파 경로상의 공백지대로 남아 있던 중부지방이 그 교량() 역할올 담당하였음을 확인해준다.

⑤ 고인돌의 축조과정에서 제의()와 관계되었던 짐승뼈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장례의식의 복원적 자료로 제시되었다. 이들은 고인돌을 영원한 집으로 여기고 묻힌 사람의 영혼의 영생을 바라는 의식에 제물로 쓰인 것이며, 여기에서 나온 붉은간토기는 의식용 제기()로 사용되었다.



 

(4) 승정원 일기

 

승정원일기 []
요약
조선시대에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
지정번호국보 303호
지정연도1999년 4월 9일
소장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재지서울 관악구 신림동
시대조선시대
크기3,243책
분류원고본
본문

1999년 4월 9일 국보 303호로 지정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승정원에서 편찬한 일기로 필사본이며, 3,243책이다. 이 일기의 작성은 승정원의 주서()와 가주서()의 소임으로, 한 달에 한 권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건이 많을 경우에는 2권 이상으로도 작성하였으며, 반드시 그 다음달 안으로 완성하여 보존하였다.

원래 조선 개국 초부터 일기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어 1623년(인조 1)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270여 년간의 일기만이 현존한다. 또, 1744년(영조 20)의 승정원 화재로 인하여 《승정원일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746년(영조 22)에 일기청()을 설치하고 홍계희()·임정()·이철보() 등 45명에게 개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선조와 광해군 시대의 사료()는 거의 소실되었으므로, 1623년부터 1721년(경종 1)까지의 일기만 개수하기로 결정하여 1747년(영조 23)에 548책의 개수를 완료하였다. 이 책의 개수시에는 기사마다 그 출처를 명시하고, 책 끝에 서역낭청()과 교정낭청()의 성명을 기입하여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한 것이 하나의 특색이 되었다.

1888년(고종 25)에 또다시 승정원에 화재가 발생하여 1851년(철종 2)부터 1888년까지의 일기 361책이 소실되었으므로, 1889년에 박용대(김종한(김병수(민영달() 등 15명에게 재차 개수토록 하여 1890년에 이를 완료하였다. 이 《승정원일기》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관제()의 변경에 따라 《승선원일기()》 《궁내부일기()》 《비서감일기()》 《비서원일기()》 《규장각일기()》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국권침탈 때까지 계속 작성되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최고 기밀기록이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과 더불어 국사연구에 귀중한 사료이다. 1961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원본의 초서()를 해서()로 고치고 구두점을 달아 축쇄()한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2001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5) 불국사

불국사 []
요약
경북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있는 절.
지정번호명승 및 사적 제1호
지정연도1963년 3월 28일
소재지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시대신라
크기면적 38만 8879㎡
종류사찰
불국사 다보탑 / 경북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 국보 제20호. 통일신라시대.
본문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본사()의 하나로 그 경내()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경내면적은 11만 7541평이다.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 중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로, 여기에 보면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의 발원()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을 강설()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불국사 사적()》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刱)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 권5 <대성효 2세부모()>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극락전 12칸, 무설전(殿) 32칸, 비로전(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있는 이 기록을 보면, 글씨도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달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여기에 나열된 건물들이 당시 한꺼번에 창건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며 오히려 임진왜란 때까지 조금씩 건립된 것으로 추정함이 옳을 것 같다.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국운()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유지()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 ·자하문()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6) 경주

보문관광단지 []
요약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국제적인 관광단지.
본문
경주 보문단지 /

아시아 3대 유적으로 지정된 경주(1979, 유네스코)의 보문호()를 중심으로 약 1,033 ha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세계은행의 2500만 달러 차관을 포함한 총 600억 원을 투입하여 1974년부터 개발에 착수, 1979년 4월에 1단계 공사를 마치고 개장되었다. 충분한 숙박과 다양한 위락시설을 제공함으로써 경주를 명실공히 종합적인 관광휴양지로 개발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주요시설로는 각종 국내외 회의와 대규모 행사를 유치할 수 있는 국제회의장인 관광센터(연면적 5,950㎡. 지하 1층 지상 3층, 5개 국어 동시통역실 완비), 골프장(18홀, 198ha), 각종토산품 및 관광기념품을 판매하는 종합상가, 특급호텔, 콘도미니엄, 놀이공원 등이 있다.

 

(7)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
요약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기록한 편년체 사서().
지정번호국보 제151호
지정연도1973년 12월 31일
소재지서울대학교 규장각 외
시대1413년(태종 13) ~ 1865년(고종 2)
크기수량 2,077책
종류편년체 사서
본문

1973년 12월 31일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활자본(필사본 일부 포함)으로 2,077책이다. 1413년(태종 13)에 《태조실록》이 처음 편찬되고, 25대 《철종실록》은 1865년(고종 2)에 완성되었다. 《실록》의 편찬은 대개 전왕이 죽은 후 다음 왕의 즉위 초기에 이루어지는데, 춘추관 내에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또는 ·일기청)에서 담당하였다.

실록청의 총재관()은 재상이 맡았으며, 대제학 등 문필이 뛰어난 인물이 도청() 및 각방 당상()으로 임명되었다. 시정기()와 사관()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사초(), 각사 등록(), 《승정원일기()》가 실록편찬의 기본자료였고, 문집·일기·야사류 등도 이용되었으며, 후기에는 《비변사등록()》과 《일성록》도 사용되었다.

실록편찬 과정은 초초()·중초()·정초()의 3단계로 나누어졌다. 초초는 각방의 당상과 낭청()이 자료를 분류하고 중요자료를 뽑아 작성한 초안이다. 중초는 도청에서 그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이고, 정초는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초를 교열하고 최종적으로 수정·첨삭을 하여 완성한 것이다.

정초본을 인쇄하여 사고()에 봉안하고 편찬에 이용된 시정기·사초 및 초·중·정초는 모두 세초(:없애는 것)하였는데, 이는 앞으로 필화를 막자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실록청의 기사관이 편찬 작업 중 알게 된 사실을 누설하여 처벌받은 일도 있었고,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명기하도록 하여 문제가 되었던 적도 있었으나, 대체로 편찬과정의 공정성과 익명성은 보장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사고에 수장시킨 《실록》은 충해와 습기에 의한 오손을 막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포쇄(曬  )하도록 하였고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하여 형지안()을 작성하였다. 실록은 선왕 및 신하들의 행적과 정책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제례나 사신 접대 등 주요 행사가 있을 때 전례()를 참고하기 위해 사관이 내용 일부를 확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의 열람도 허용되지 않았다.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과 충주·전주·성주 등 4곳에 사고()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 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불에 타버렸으며, 1603년(선조 36)에서 1606년까지 전주 사고본 실록을 근거로 태조에서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을 다시 4부씩 인쇄하였다.

춘추관·묘향산·태백산·오대산·강화도 마리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실록》을 보관하였는데, 춘추관실록은 이괄()의 난(1624)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마리산 사고의 실록은 1636년 병자호란의 피해를 입어 현종 때 보수하여 1678년(숙종 4)에 가까운 정족산() 사고로 옮겨졌으며, 묘향산 사고본은 1633년에 전라도 적상산() 사고로 옮겨졌다.

이후 각 사고의 모든 《실록》은 조선 말까지 완전히 보관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들어 다시 큰 변화를 겪었다. 일제는 정족산·태백산 사고의 실록을 조선총독부로 이관하였다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으로 이장하였고, 적상산 사고본은 장서각으로 옮겼으며, 오대산 사고본은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하였는데 1923년의 간토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장서각 소장의 적상산본은 1950년 6·25전쟁 때 북한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태백산본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다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었고, 정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1929~1932년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1/4축쇄판() 888책 한장본()으로 30절()을 영인() 출간하였으며, 1958년에는 역시 태백산본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8축쇄판(A4판) 48책 양장본으로 간행, 보급하였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에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완료하였으며, 남한에서도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2년부터 분담하여 국역작업을 시작하여 1994년 4월에 마무리지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실 중심의 서술방식과 명분론적 시각, 당론()에 의한 곡필()의 문제 등이 한계로 지적될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여 수록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임은 물론,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사료이다.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8) 불조직지심체요절

불조직지심체요절 []
요약
1372년(공민왕 21) 경한(:1299~1375)이 부처와 조사()의 게송()·법어() 등에서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
구분불서
저자경한
시대1372(고려 공민왕 21)
본문

수고본(稿)에 직접 초록한 것으로 상·하 2권으로 이루어졌다. 정식 서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나, 흔히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경()》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경'은 '부처의 말씀'이나 '불법의 진리'를 담은 책이지만 이 책은 조사들의 법어 등을 모아놓은 책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경'이라 부를 수는 없다.

내용은 《경덕전등록()》 《오등회원()》 등의 사전() 관계 문헌을 섭렵하여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긴요한 것을 초록하여 편찬하였다. 권상()에서는 과거칠불()과 석가모니불로부터 불법을 계승한 천축국의 제1조() 마하가섭() 이하 보리달마()까지의 28존자, 그리고 중국의 5조사 및 그 법통을 이은 후세의 국사 중 안국대사()에 이르기까지의 것이 수록되었다.

권하()에는 아호대의화상()부터 대법안선사()까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대령선사()의 것도 초록되어 있다. 중심 주제인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오도()의 명구를 줄여 나타낸 것이다.

판본은 경한이 입적한 3년 뒤인 1377년(우왕 3) 7월 청주목의 교외에 있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인 주자로 찍어낸 것이 초간본()이 된다. 상하 2권 중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하권 1책(첫장은 결락)뿐이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주자본은 활자의 주조술과 조판술이 미숙했던 고려시대에 관서()가 아닌 지방의 사찰이 주성하여 찍은 것이기 때문에 활자의 크기와 글자의 모양이 고르지 않고, 부족활자를 목활자로 섞어 사용했기 때문에 인쇄상태가 조잡하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만 전해지던 고려 주자본 중 유일하게 전래된 활자본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이 되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최초로 금속활자를 창안하고 발전시킨 문화민족임을 실증하여 그 긍지를 세계에 과시한 점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2001년 9월 승정원일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답을 마칩니다.

2008.09.24.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197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탈퇴한 사용자 답변

유네스코가 인정한 우리 나라의 세계문화유산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여

 

숭례문,석굴암,창덕궁,불국사,종묘 수원화성

등의 여러가지 문화재가 있습니다

먼저

 

숭례문은http://photo.naver.com/view/2008101422052572037?page=1&view=theme&sort=recent&param=animal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의 우진각지붕인데, 원래는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처음 지은 시기도 정확히 알 수 있으며 견고한 수법과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조선 전기 건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이다.

또 석굴암은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넙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그리고 창덕궁은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

이던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고 하겠습니다. 임금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으므로 창덕궁은 주로 임금이 휴식처로 이용되었기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

되지 않았습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 후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렸으나,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후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의 역할을 하게 되었어요. 그밖에 화재가 난 경우

도 많았는데요.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어 왔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 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 창덕궁은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

어 자연 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납니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

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충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160여종의 나무들이 울창하

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고 합니다..

 

1917년에 대조전을 비롯,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모두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서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

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짓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물중 궁궐안

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에 지어졋습니다.

 

조선시대 정궁이던 경복궁이 질서 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서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 주는 특징이 있습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

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서 1997년 12월에 드디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자랑스럽게 등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또 불국사는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음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774년 혜공왕 때 완공됨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는 구역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등이 있는 구역으로 나뉜다.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음

○불국사라는 이름의 뜻은 ‘불국’ 즉 ‘부처님의 나라’라는 뜻이다

○국보 7점을 가지고 있는 대사찰임

○임진왜란 때 불에 타기도 했으나 현재는 복원이 됨

○통일신라의 문화재임

  ◎다보탑                           

  지정번호 : 국보 제20호                    

  지정년도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

  시대 : 통일신라

  크기 : 높이 10.4m, 기단 폭 4.4m

  종류 : 석탑

  

  ◎석가탑

  지정번호 : 국보 제21호

  지정년도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

  시대 : 통일신라

  크기: 높이 8.2m, 기단 폭 4.4m

  종류: 석탑


○청운교와 백운교

석가여래의 피안세계를 상징하는 대웅전 영역으로 이르는 계단이 국보 23호인 청운교와 백운교이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33계단이 있다.


○칠보교와 연화교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전 영역으로 이르는 계단이 국보 22호인 칠보교와 연화교이다. 칠보교와 연화교는 18계단이 있다.


○그 밖의 불국사의 문화재들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 - 국보 26호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 국보 27호

<불국사삼층석탑내발견유물〉 - 국보 126호

 그리고 종묘는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총면적 5만 6503평.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있다. 원래는 정전(殿)을 가리키며, 태묘()라고도 한다. 중국의 우()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종묘제도는 은()·주() 시대에는 7대조까지 묘()에 봉안하는 7묘제가 시행되다가 명()나라 때에는 9묘제로 바뀌었다.

종묘의 정전에는 19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신주를 모셨으며,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및 의민황태자()의 신주를 모셨다. 신주의 봉안 순서는 정전의 경우 서쪽을 상()으로 하고 제1실에 태조가 봉안되어 있고, 영녕전에는 추존조()인 4왕(목조·익조·탁조·환조)을 정중()에 모시고 정전과 마찬가지로 서쪽을 상으로 하여 차례대로 모셨다. 이를 소목제도()라고 한다.

종묘의 조영()은 1394년(태조 3) 12월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할 때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동쪽에 영건()을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1차 완공하였다. 그 뒤 1546년(명종 1)까지 계속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정전의 남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문의 동쪽으로 공신당(), 서쪽으로 칠사당()이 있고, 곧바로 정전에 이른다. 정전의 서문을 나서면 영녕전의 동문과 이어지고, 영녕전에도 정전과 같이 서문·남문·동문이 있으며, 영녕전의 북동쪽에 제기고()가 있다. 정전의 북동쪽에는 전사청()이 있고, 그 주위에 제정()·판위대(수복방()이 있으며, 정전 남동쪽에 재실()이 있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팔만대장경,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수원화성


이것이 수원화성의 팔달기 라네여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 (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2008.10.14.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