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주제분류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정원규 173건

제공처 정보

정원규
  • Frankena (1983 pp.174-175)(번역 : 황경식) 무어와 더불어 이상과 같은 이론들[윤리적 자연주의]에 반대하는 자들은 그것들이 "자연주의적 오류(the naturalistic fallacy)"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왜냐하면 그 이론들은 윤리 판단을 사실 판단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흔히 그러하듯이 이렇게 동일시하는 것이 잘못임을 먼저 입증하지 않고서 그것을 오류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선결 문제요구의 오류를 범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비판자들은 또한 윤리와 무관한 용어에 의거해서 "좋은"과 "옳은"에 대해서 제시된 모든 정의는 때때로 "의문의 여지가 있다(open question)"는 논증으로 불리는 매우 간단한 논증에 의해 그릇되었음이 입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론자(definist)가 "좋은" 혹은 "옳은"이 예를 들어서 "욕구된" 혹은 "최대의 보편적 행복에 기여하는"과 같이 "성질 P를 갖는"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장한다고

  • Baumgardt (1952, pp.170-171) (번역 : 정원규) 반쾌락주의자는 물론 『도덕 및 입법의 원리 서설』(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의 시작부분에서부터 심유한 공격을 받는다. 이러한 벤담(Jeremy Bentham)의 첫 번째 구절들을 강조하는 비평들은 일반적으로 여기에서 과도하게 학식이 부족한 도덕설교자 벤담이 애초부터 행해져야 하는 것과 실제로 행해지는 것, 즉 '옳음'과 '좋음'을 혼동했다고 가정할만한 반쾌락주의적 근거를 제공한다고 해석한다. 물론 '존재'와 '당위' 또는 '옳음'과 '좋음'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어떤 윤리적 탐구를 할 때에도 반드시 필요한 구분이며, 그것의 정치한 복구가 현대 영국 윤리학의 특별한 장점으로 추종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벤담의 『도덕 및 입법의 원리 서설』의 최초 구절들에 오해가 포함되어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그

  • (해설 : 정원규) 벤담(Jeremy Bentham)은 1748년 중류층의 토리당 지지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법률가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지도로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게 되어, 네살이 되던 해부터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벤담은 성격이 상당히 조숙한 편이어서 이미 다섯 살이 될 무렵부터 '철학자'라는 애칭을 얻었지만, 일상적인 교우관계도 맺지 못하고 공부에만 매달려야 했던 어린 시절을 매우 끔직했던 시기로 회상하고 있다. 산책을 좋아하고 사냥을 싫어했던 벤담은 7세에 웨스트민스터 스쿨(Westminster School)에 입학하고 12세에 옥스포드(Oxford) 입학을 허가받지만, 너무 어렸기 때문에 여전히 정상적인 교우관계를 맺을 수 없었고, 특히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영국 국교회의 기본 신조인 39조를 맹세할 것을 강요받으면서 종교에 대한 강렬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언뜻 단순한 내용으로 구성되는

  • Baumgardt (1952 p.211) (번역 : 정원규) 벤담(Jeremy Bentham)은 의무나 도덕적 선을 사람들이 실제로 의무나 도덕적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결코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광범위하게 유포된 이러한 유형의 "자연주의적 오류"를 주의깊게 회피했다. 그는 결코 당위를 당위에 대한 실제 생각과 같은 자연적인 정신적 사건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또 다른 자연주의적 오류, 즉 좋음이 쾌락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오류도 범하지 않았다.

  • (해설 : 정원규)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하에 두었다. 오직 고통과 쾌락만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뿐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지적해 준다. 한편으로는 선악의 기준이, 다른 한편으로는 인과의 사슬이 그것들의 옥좌에 걸려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모든 행동과 우리의 모든 말, 그리고 우리의 모든 생각을 지배한다. 우리가 그 지배를 뿌리치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조력은 단지 우리가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증하거나 확증하는데 기여할 뿐이다(BI p.11)"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쾌락주의에 대한 벤담의 의지는 확고하다. 쾌락의 종류 또한 물리적,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원천에 따라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모두 물리적 원천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쾌락주의(공리주의)뿐 아니라 여타의 모든 도덕이론도 사실상 여기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벤담은 가령 쾌락주의의 정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금욕주의도 실제로는 쾌락주의를 전

  • (해설 : 정원규) 결과주의의 역설은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 테니스를 치는 사람보다 테니스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우승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처럼, 좋은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과정에 충실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결과주의는 결과주의를 실현하지 못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는 공리주의의 메타윤리적 측면이나, 반공리주의적 윤리이론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공리주의 자체의 논리와 경험적 사실을 결합한 반론이므로, 만약 이러한 반론이 적절한 것이라면 공리주의는 이론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Mac Intyre 1984 chap.12 참조). 그러나 이러한 역설적 경향은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반박할 수 있는 바, 우선은 결과주의가 반드시 과정을 무시한다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과정에 충실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과정을 고려하지 않을...

  • (Baumgardt, 1952 pp.177-179) (번역 : 정원규) 소어리(W. R. Sorley)를 비롯한 몇몇 벤담(Jeremy Bentham) 비평가들은 다음과 같은 반론이 불가결하다고 주장한다. "벤담은 인간을 항상 관념이나 신념에 따라 숙의된 지성적인 방식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로 간주한다. 그는 철학자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 즉 원인을 이유로 대신하려고 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가 간과한 것은 인간이란 이성적인 존재이기 이전에 활동적인 존재이며, 유전되고 획득된 충동의 피조물이어서, 충동이 이성에 의해 조절되고 방향지워지는 것은 오직 점진적으로만 가능하며 이러한 합리화 과정은 결코 종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벤담은 "인간은 지성적 고려사항에 의해서 항구적으로 통제된다고 가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종종 칸트(Kant)의 이성주의에 제기되었던 반론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이러한 반론들은 칸트에게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벤담에게

  • (해설 : 정원규) 벤담(Jeremy Bentham)과 밀(John Stuart Mill)에 있어서 공리주의와 쾌락주의는 동의어이다. 다만 공리주의, 또는 공리라는 개념이 도덕적 선악과 행복과의 관계 및 관계된 행복의 주체의 수에 대한 인상을 사장시킨다는 측면에서 벤담은 '공리주의'라는 표현 대신에 '최대 행복의 원리'라는 표현을 제안하기도 했다.

  • (BI p.12) (번역 : 정원규) 공동체는 그 성원들이라고 간주되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가상물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이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몇몇 성원들의 이익의 총합이다. 개인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지 않고 공동체의 이익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떤 일이 개인의 이익을 증진시키거나 그것을 위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그 개인의 쾌락의 합계를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해설 : 정원규) 벤담(Jeremy Bentham)이나 밀(John Stuart Mill)이 쾌락과 고통을 직접 정의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개념일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벤담은 쾌락과 고통의 네 가지 원천 – 물리적,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 중 물리적 원천을 가장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것으로 지목한다. 공리주의의 물리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쾌락의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에 있어서도 밀은 이러한 물리주의적 기조를 철저히 유지한다. 벤담이 제시하는 기준은 강력성, 지속성, 확실성 또는 불확실성, 원근성, 다산성, 순수성의 모두 일곱 가지인데, 이는 쾌락의 양과 관련된 것일 뿐 쾌락의 질은 전혀 문제삼지 않는 순수한 물리적 기준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에 밀은 쾌락의 질적 차이에 주목한다. 돼지의 쾌락과 인간의 쾌락은 질적인 차이가 있으므로 설령 만족한 돼지의 쾌락이라고 하더라도

  • (해설 : 정원규) 벤담(Jeremy Bentham)에 따르면 "행복은 쾌락의 향유와 고통으로부터의 안전으로 구성된다."(BI p.74) 이는 유덕한 행위를 함으로써 얻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적 행복이나 신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종교적 행복과는 철저히 구별되는 것으로, 특히 쾌락과 고통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모든 존재가 행복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동물해방론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 (해설 : 정원규) 목적론으로서의 공리주의가 좋음을 통해 옳음을 규정하고자 하는 이론이라면, 의무론 계열의 이론들은 옳음을 좋음과 독립적으로 규정하려고 하는 윤리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보편성을 통해서 도덕법칙을 이끌어내는 칸트의 정언명법(categorical imperative)과 같은 경우가 이러한 의무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밀(John Stuart Mill)의 비판을 원용해 보면 이러한 의무론적 윤리설들은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선 의무론은 의무간에 충돌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할 장치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경우라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기준에 따라, 행복을 더 많이 산출해내는 의무가 중요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의무론의 두 번째 문제점은 의무론 또한 어떤 식으로든 공리(utility)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언명법만 하더라도 그 보편성은 보편적으로 어떤 결과(공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 (해설 : 정원규) 목적론으로서의 공리주의가 좋음을 통해 옳음을 규정하고자 하는 이론이라면, 의무론 계열의 이론들은 옳음을 좋음과 독립적으로 규정하려고 하는 윤리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보편성을 통해서 도덕법칙을 이끌어내는 칸트의 정언명법(categorical imperative)과 같은 경우가 이러한 의무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밀(John Stuart Mill)의 비판을 원용해 보면 이러한 의무론적 윤리설들은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선 의무론은 의무간에 충돌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할 장치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경우라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기준에 따라, 행복을 더 많이 산출해내는 의무가 중요한 것으로 생각 될 수 있다. 의무론의 두 번째 문제점은 의무론 또한 어떤 식으로든 공리(utility)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언명법만 하더라도 그 보편성은 보편적으로 어떤 결과(공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 (MU p.207) (번역 : 이을상, 김수청) 지금 이런 선천적인 도덕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 나의 목표는 아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사례로서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상가의 한 사람인 칸트의 체계적 저작 『도덕형이상학』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의 사상체계는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로 철학적 사색의 역사에 오랫동안 길이 남을 것이지만, 이 탁월한 사상가는 방금 말한 저작에서 도덕적 의무의 기원과 근거로서 보편적 제1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네 행위의 격률이 모든 이성적 존재에 의해 법칙으로서 채택되도록 행동하라." 그러나 칸트가 이 교훈으로부터 실제적인 도덕성의 의무를 연역하고자 했다면, 그는 십중팔구 실패할 것이 틀림없고, 해괴하게도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가장 극악무도한 비도덕적 행위의 법칙을 채용한다는 어떤 배리(背理)현상을 나타내거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즉, 그가...

  • (해설 : 정원규) 공리주의는 결과주의의 한 유형이지만 우리의 일반적 윤리적 태도는 결과주의보다는 동기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특정한 행위가 나쁜 결과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좋은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결과를 불문에 부치거나, 설령 제재를 가한다고 하더라도 제재의 정도를 축소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윤리적 태도인 것이다. 그러나 벤담(Jeremy Bentham)과 밀(John Stuart Mill)에 따르면 이러한 동기주의적 태도는 일반적으로 좋은 동기가 좋은 결과를 낳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가 습관적으로 좋은 동기에 대해 호감을 갖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 동기 자체의 선악이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행위 동기는 모두 선하기 때문이다.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