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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동래정씨 돌림자 문의드립니다~내공 100 드림
26hy**** 조회수 2,970 작성일2014.03.02
 안녕하세요~ 갑오년을 맞아 아들을 출산하였습니다. 작명을 하던 중 돌림자를 알면 더 좋을 듯하여 질문드립니다. 동래정씨 32세손(확실하지 않음)입니다. 아버지 항렬에는 중간돌림 태자를 쓰셨고, 저희는 끝자돌림으로 호자를 썼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다음 돌림자를 찾을 수 있는지요? 집에있는 족보책에는 정절공파라고 되어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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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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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1:1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먼저 득남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갑오년을 맞아 아들을 출산하였습니다. 작명을 하던 중 돌림자를 알면 더 좋을 듯하여 질문드립니다. 동래정씨 32세손(확실하지 않음)입니다. 아버지 항렬에는 중간돌림 태자를 쓰셨고, 저희는 끝자돌림으로 호자를 썼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다음 돌림자를 찾을 수 있는지요? 집에있는 족보책에는 정절공파라고 되어있네요..

 

답변 : 님은 동래 정씨 정절공파이시나 번창한 가문이라 많은 파로 인해 복잡합니다.

문제는 항렬표에 의해 돌림자를 지은 것이 아닌듯 합니다. 왜냐면 부친 태자에서 님의 호자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파에서 다 찾아 보았으나 태자 → 호자로 이어 지는 돌림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절공파는 6세 교서랑공보파(校書郞公輔派)에서 분파(分派)한 12세 전서공 규파(典書公 規派)로 여기에서 다시 분파(分派)한 지파(支派)로 이어집니다.

 

님의 항렬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호자는 전서공파 항렬표를 본다면,

 

님은 : 현감공 길명 후 32세손에 ○호(浩)자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 그 다음 돌림자가 아직까지 정화지 않았구요. 그리고 돌림자는 끝자 돌림자로 나와 있습니다.

또하나는 생원공파 37세손에 ○호(鎬)자가 나와 있습니다. 이자는 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세대수가 차이가 많이 납니다. 하여 언제 시간나시면 대종회로 한번 문의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확도를 기하기 위하여 웃대 증조부님 고조부님의 존함도 같이 한번 대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존함을 잘 모르실 경우에는 관할 동, 읍, 면 사무소에 가셔서 제적등본을 발부 받아 보시면 됩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용합니다. 이유는 한문에는 그 만큼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해당 항렬표에는 녹색 글씨로 표기합니다.

 

아래는 동래 정씨에 대한 정보입니다.

 

 

동래 정씨(東萊 鄭氏)에 대()하여

 

1. 동래 정씨(東萊 鄭氏) 시조(始祖) : 정회문(鄭繪文)

2. 동래 정씨(東萊 鄭氏) 유래(由來) :

 

동래 정씨(東萊 鄭氏) 시조(始祖) 유래(由來)는 신라(新羅)의 전신인 사로의 6부 촌장(村長)으로 정씨(鄭氏)의 성()을 하사(下賜) 받았던 취산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의 원손(元孫) 정회문(鄭繪文)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고려(高麗) ()에 보윤을 지낸 정지원(鄭之遠) 1세조(世祖)로 하며, 누대(累代)에 걸쳐 정착(定着) 세거(世居) 해온 동래(東萊)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3. 동래 정씨(東萊 鄭氏) 창성(創成) 유래(由來)

 

본관(本貫)은 옛 문헌에 210본 또는 247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날 전()해오는 것은 동래(東萊) · 연일(延日) ·해주(海州) · 진주(晉州) · 하동(河東) · 초계(草溪) · 온양(溫陽) · 경주(慶州) · 청주(淸州) · 봉화(奉化) · 광주(光州) · 나주(羅州) · 서산(瑞山) · 김포(金浦) · 야성(野城) · 함평(咸平) · 청산(靑山) · 장기( ) · 영덕(盈德) · 곤양(昆陽) · 서경(西京) 30여 본이다.

 

역사적(歷史的)으로 명벌(名閥)로서의 지위(地位)를 누려왔으며 특히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동래 정씨(東萊 鄭氏)를 으뜸으로 연일일 ·청주 ·온양 ·진주 ·하동정씨 등이 상당한 세력(勢力)을 폈다.

 

정씨의 원조(元祖) 삼국유사에 전()해 내려오는 유래(由來)는 신라(新羅) 6(六村) 중 자산( )진지촌(珍支村:本彼部)의 촌장(村長)인 지백호(智伯虎:佐命功臣)이다.

본피부락은 현재(現在)의 경주시(慶州市) 중심부(中心部)에 있었으므로 정씨(鄭氏)는 일찍부터 한반도(韓半島) 남단(南端)에 자리 잡고 살던 선주민(先住民)의 후예(後裔)임이 분명하다.

 

오늘날 정씨(鄭氏)의 각 본관별(本貫別) 시조(始祖)들은 모두 지백호(智白虎)의 원손(遠孫)들이라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인 통념(通念)이지만 그 혈연적(血緣的) 계보(系譜)를 가려낼 방도는 없다.

 

일반적(一般的)으로 정씨(鄭氏)는 한 혈손(血孫)이며 그 중 경주정씨(慶州鄭氏)가 큰 집이 된다는 데에는 별로 이론이 없는 것 같다.

다만 동성이족(同姓異族)으로서 서산정씨가 있는데 그 시조(始祖) 신보(臣保)는 원래(元來) 중국(中國)의 저장[浙江] 사람으로 송()나라의 원외부(員外部) 벼슬에 있다가 나라가 망()하자 고려(高麗)에 망명(亡命)해 온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름을 남긴 인물(人物)들로는 의종 때 명신 습명(襲明), 그의 6대 손()인 정몽주(夢周), '의종'때 무신정변을 주동한 중부(仲夫), '예종'때 학자 ·문인이었던 항()과 그의 아들인 정과정곡(鄭瓜亭曲)의 저자 서(), 고려 당대의 시객(詩客) 지상(知常) 등이 두드러졌으며, 그 위세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와서 비로소 활짝 피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31명의 상신(相臣) 751명의 문과(文科) 급제자(及第者)를 배출(輩出)하였다.

 

중국(中國)에서 귀화(歸化)한 서산정씨와 낭야 정씨가 있다.

 

 

4. 동래 정씨(東萊 鄭氏) 지명(地名)

 

지금의 부산(釜山)과 양산(梁山)의 일부(一部)지역(地域)을 차지했던 행정구역(行政區域)으로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동단(南東端)에 위치(位置)하며, 삼국시대(三國時代) 이전부터 소국을 이루어 장산국 또는 내산국이라 하다가 신라가 점령하여 거칠산(居漆山)으로 개칭하고, 삼국통일 후에 동래(東萊)로 불렀다. 조선 때는 대일 외교 사무를 총괄하던 중요 관문이었으며, 군사상으로도 요충지였다.

 

 

5. 동래 정씨(東萊 鄭氏) 가문(家門) 소개(紹介)

 

온화하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하여 남과 적을 삼지 않는다는 가통을 지켜오면서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혀온 동래정씨(東萊鄭氏)는 부산 양정동 화지산에 자리 잡은 2세 안일공 정문도(鄭文道)의 묘소에 대한 명당의 전설이 아래와 같이 전해오고 있다.

 

그가 죽었을 때 맏아들 목()이 장지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가 동래부사를 지내던 고익호가 일러준 화지산에 장례를 치루었다. 그러나 장례를 치룬 다음날 이곳에 와 보니 누군가가 무덤을 파헤쳐 놓았다. 기이하게 생각하고 다시 복원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분통을 참을 수 없었던 목()은 밤을 새워가며 숨어 지켜보기로 하였다.

밤이 어지간히 깊었을 때 도깨비들이 나타나 또다시 무덤을 파헤치며 하는 말이 "여기가 어딘데 함부로 건드려, 적어도 금관을 묻어야 할 곳에, " 하며 중얼 거리는 것이었다.

 

가난하게 살았던 목()은 이 사실을 알고 걱정이 되어 한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 "염려마오. 황금 빛 나는 보리짚으로 관을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을 것이오."하고는 사라졌다.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과연 그 후부터는 무사하였다.

 

()은 고려 문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상서좌복야를 역임하고 슬하에 아들 제(). (). (). (). 4형제를 두었으며, 목의 아우 선조(先祚)는 호장을 지냈고, 그의 후손들이 동래와 양산 등지에 산거하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져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좌복야 목()의 세째 아들 택()이 고려 때 찬성사를 지내고 문장과 재능으로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항()은 숙종때 등과하여 우사간을 거쳐 양광도와 충청도의 안찰사를 역임한 후 인종때 지추밀원사. 예부상서. 한림학사 등을 지냈다.

 

인종비 공예대후 동생의 남편으로 문명을 떨쳤던 []는 의종때 폐신들의 참소로 동래에 유배 되었는데, 그 곳에서 정자를 짓고 오이를 심어 과정(瓜亭)이라 당호(堂號)를 삼고 연군(戀君)의 정을 가요로 읊은 <정과정곡 (鄭瓜亭曲)>을 지어,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13세 때 진사가 되었던 흠지(欽之)는 양도공 양생(良生)의 손자로 풍채가 좋고 성품이 강직했으며, 특히 사학(史學)과 천문학(天文學)에 정통하여 세종의 명을 받아 역법(曆法)을 연구했고, 그의 아들 갑손(甲孫)과 창손(昌孫)이 크게 현달했다.

갑손(甲孫)은 대사헌이 되어 대강(臺綱)을 바로잡아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판한성부사와 예조판서 . .우참찬을 지내고 중종때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갑손의 아우 창손(昌孫)은 세종때 부제학으로 춘추관의 수찬관을 겸하여 [고려사] [세종실록]. [치평요람]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세조때 영의정에 올라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고, 세조가 신임하여, "내가 경을 공경하기를 숙부와 다름 없오" 하면서 창손이 술을 권하면 반드시 어좌에서 내려앉았으며 술을 못마시는 창손을 위하여 좌석에 반드시 단술을 준비케 하였다고 한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발의 연골 뼈가 붙어 일어설 수 없다고 칭병하여 벼슬을 마다했던 구() 18년 동안이나 거짓으로 앉은뱅이 노릇을 한 집념의 선비였다.

그의 아들이 난세에서 간신들과 집념으로 항거하면서 기구하게 일생을 마친 희등(希登)이다. 그가 상처(喪妻)하자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 김안로가 사위로 맞으려 했으나 "평생을 홀 애비로 살지 그 추문(醜聞)에 들진 않겠다"고 면박을 하여 김안로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구수담이 간신 진복창을 추천하자 "이놈은 간사한 자의 괴수다"고 막말을 하고 진복창이 앉았던 자리를 거두어 불태우기 까지 하였다.

그는 용기 있는 저항으로 뜻있는 선비들의 존망을 받았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용천으로 귀양 가기 전야에 별세했다.

 

직제학 사()의 아들이 성종조의 명신 난종(蘭宗)이다.

[명신록]에 의하면 그는 풍채가 아름답고 도량이 활달하여 세조의 아낌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날 세조가 주역(周易)과 원각경(圓覺經)의 우열을 물으니, 세조가 독신하는 임금인 줄 알면서도, "불교(佛敎)의 요사스런 글을 어찌 [삼성경(三聖經)]과 비교(比較)하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세조(世祖)가 크게 노하여 역사(歷史)를 시켜 매질하게 하였으나 난종은 얼굴빛이 평상시와 같이 태연하므로 기가 질려 그만 두었다고 한다.

 

난종의 아들이 중종조의 명상(名相) 광필(光弼)이다. 안당. 김정. 조광조. 김식등과 더불어 <팔현(八賢)>으로 일컬어졌던 광필은 이조참의가 되어 연산군의 사냥이 너무 심하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아산으로 귀양가기 시작하여 관력의 절반을 유배지에서 보냈으며, 중종반정으로 재기용되었다.

 

서울 중구 회현동 1 14번지는 동래정씨의 옛 기지였다고 한다. 이곳은 문익공 광필이 살던 터로 약 400여 년간 자자손손 대를 이어 지켜 왔던 유서 깊은 곳이다.

어느날 광필의 꿈에 선인이 나타나 집앞 은행나무에 열두개의 서각대(犀角帶)를 걸어 놓고 가더라는 것이다, 그후 광필의 손자 유길(惟吉), 증손 창연(昌衍), 현손 태화(太和)등 열두 명의 상신(相臣)이 배출되어 동래정씨의 화려한 명맥을 이루었다

 

광필의 손자 유길(維吉)은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대사헌과 이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선조때 좌의정에 이르렀고, 문장과 시에 능했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창연의 아들로 <삼세호당(三世湖堂)>이라 우러름을 받았던 광성(廣城)과 광경(廣敬)은 형조 판서와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광서의 아들 태화(太和)는 효종과 현종조 에서 영의정을 지내며 현상(賢相)으로 명망이 높았다. 조선조에서 17명의 상신(相臣)을 비롯한 수많은 명신 현관을 배출해 낸 동래정씨는 전주이씨, 안동김씨와 더불어 [삼대상신가문]으로 유명을 떨쳤으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충의열사가 배출되어 도덕과 학문이 뛰어났던 석학(碩學)들과 함께 명문 동래 정씨의 가통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호군공(護軍公) () 예운(禮耘)할아버님은 조선중엽에 창신교위를 지내셨다.

 

위로는 양평공 (襄平公) 휘 종() 할아버님의 여덟 아드님 중에 셋째 아드님이시다.

 

아래로는 네분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첯째분이 세온(世溫)공 이시고 둘째분이 세양(世良)공 이시고 셋째분이 세공(世恭)공 이시고 넷째분이 세검(世儉)공 이시다.

 

장자이신 세온공은 어모(禦侮)공 이시며 외동 아들을 두셨는데 휘가 사주(師周) 이시고 아래로는 두 아드님이 계신데 맏이가 여해(汝諧)(칠산공)이시고 둘째가 여강(汝康)(행정공)이시다. 칠산공의 아드님은 호가 동헌(桐軒)이고 휘가 약() 이시고 숙부(행정공)을 도와 하빈4개면에 유사를 하셨다 동래정씨 여덟분 중 한분으로 망우당공원 임란창의충혼탑에 배향되셨다.

 

여강공은 슬하에 다섯 아드님을 두셨는데 첫째분이 자가 진보이시고 휘가 용() 이시고 판사공 이시며 임진왜란때에 아버님 행정공을 좆아 하빈동 면장을 역임 하셨다. 둘째 분은 호가 양졸재 이시고 휘가 추() 이시고 정한강의 문인이시다. 셋째 분은 호가 이헌이시고 휘가 횡() 이시다. 넷째 분은 호가 이계 휘가 선()자공이시고 다섯째 분이 현()자 공이시다.

 

 

6. 시조에서 정절공이 있기까지,

 

시조 : 정회문(鄭繪文) 안일호장,

-------- <계대 미상> -------

1 : 정지원(鄭之遠) 보윤호장,

2 : 정문도(鄭文道) 안일호장,

3 : 정목(鄭穆) 상서좌복야태부경, 아들 (), (), (), (),

4 : 정택(鄭澤) 태자찬성대부,

5 : 정자가(鄭子家) 전옥서령, 아들 (), (),

6 : 정보(鄭輔) 교서랑, 아들 승종(承宗), 승충(承沖), 승조(承祖), 승유(承儒), (),

7 : 정승종(鄭承宗) 태자첨사

8 : 정균(鄭筠) 태부소경

9 : 정유의(鄭惟義) 판도시사,

10 : 정호(鄭瑚) 감찰대부, 봉산군, 아들 양생(良生), 안생(安生), 이생(易生),

11 : 정양생(鄭良生) 감찰대부, 봉원부원군, 청백리, 양도공, (), (), (), ()

12 : 정구(鄭矩) 의정부찬성 정절공(靖節公)

13 : 정흠지(鄭欽之) 증추원사 문경공, 아들 갑손(甲孫), 창손(昌孫),

14 : 정갑손(鄭甲孫) 좌참찬, 정절공(貞節公)

15 : 정오(鄭烏)

 

시조(始祖) 정회문은 신라(新羅) 탈해왕(脫解王) 때 성()을 하사(下賜)받고 12세손 정규(鄭規) 전서공(典書公)은 천안으로 이거(移居)하고, 정구(鄭矩) () 정절공(靖節公) () 설학재(雪壑齋)는 서울 망우동으로 이거(移居)하고, 정부(鄭符) 한성부윤(漢城府尹)은 충주(忠州)로 이거(移居)하니 정절(鄭節)은 동래에 그 후손(後孫)이 거주(居住)하고 있다.

 

정구(鄭矩) 정절공(靖節公)

정구(鄭矩) 정절공(靖節公)의 아들 정선경(鄭善卿), 동평군(東平君)의 둘째아들 정종(鄭種)이 이시애(李施愛)의 난과 이징옥(李澄玉)의 난을 토평하고 동생 참판공(參判公)(1450)과 하령남(下嶺南) 고령군 덕곡면(德谷面) 오노곡(吾老谷)에 내가 늙는 고을이라 하여 그 후손(後孫)이 거주하고 있다.

정규의 6세손 정숙(鄭淑)(1740)이 벽진면(碧珍面) 자산리(紫山里)(1816), 정종(鄭種) 동평군(東平君) 11세손 정수열(鄭修烈.-三悔齋)가 수륜면(修倫面) 계정리(溪亭里)(1720), 정종의 10세손 정성교(鄭星僑)가 선남면(船南面) 소학리(巢鶴里)(1761), 정종의 8세손 정하(鄭河)가 용암면(龍巖面) 운산리(雲山里)(1687), 정종(定宗) 7세손 정원규(鄭元圭) () 정수암(鄭修庵)이 선남면(船南面) 소학리 및 선원리(仙源里) 등으로(1740), 정종(定宗) 9세손 정영복(鄭榮馥) 한성부서윤이 선남면(船南面) 유서리(柳西里) 및 명포리(明浦里) 등으로(1763), 정종(定宗) 10세손 정유강(鄭惟崗)이 선남면(船南面) 도흥리(道興里.침곡=砧谷)(1770), 참판공(參判公) 12세손 정담(鄭淡)이 용암면(龍巖面) 문명리(文明里)(1800), 8세손 정활(鄭活)이 수륜면(修倫面) 수성리(水成里)로 이거하여 현존하고 있다.

 

정갑손(鄭甲孫) 정절공(貞節公)

세종 때 독격골(獨擊 )로 조정이 두려워하였던 정갑손은 대사헌이 되어 대강(臺綱)을 바로잡아 왕의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와 예조판서. .우참찬(左右參贊)을 지내고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정갑손의 일화 :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의하면 그는 성격이 청직하고 엄준하여 자제들도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청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찌기 함길도 감사가 되었을 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길도 향시(鄕試)의 방()이 발표되었음을 보니 그의 아들 정오(鄭烏)가 방에 들었으므로 시관(試官)을 불러 꾸짖기를 "늙은 것이 감히 나에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오가 학업에 정진하지 못하거늘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 하느냐." 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시관을 파면시켰다고 한다.

[용재총화( 齋叢話)]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청렴강개한 성품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이조(吏曹)에서 사람을 벼슬에 잘못 임명한 일이 있었다.

 

세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서 상참(常參: 조정에서 매일 정례적으로 행하는 조회)을 받을 때 정승 겸 판서 하연(河連)과 이조판서 최부(崔府)가 함께 입시(入侍)하였더니 갑손이 왕에게 아뢰기를 "최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 연은 조금 사리를 알면서도 알맞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였으니 국문하기를 청하옵니다"하였다.

 

임금이 화한 얼굴로 양편을 화해시켰으나 조회가 끝난 뒤에 밖에 나와서 둘 다 땀이 물흐르듯 할 때 갑손이 웃으면서 "각기 제 직분을 다했을 뿐이니 서로 해침은 아닙니다." 하며 녹사를 불러서 "두 분이 심히 더우신 모양이니 네가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쳐 드려라" 하고는 조용한 태도로 조금도 후회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고 한다. 갑손(甲孫)의 아우 창손(昌孫)은 세종 때 부제학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여 [고려사] [세종실록]. [치평요람]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세조(世祖) 때 영의정에 올라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고, 세조가 신임하여, "내가 경을 공경하기를 숙부와 다름없소" 하면서 창손이 술을 권하면 반드시 어좌(御座)에서 내려앉았으며 술을 못마시는 창손을 위하여 좌석에 반드시 단술을 준비케 하였다고 한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발의 연골뼈가 붙어 일어설 수 없다고 칭병하여 벼슬을 마다했던 구( : 무안 현감 유의의아들) 18년 동안이나 거짓으로 앉은뱅이 노릇을 한 집념의 선비였다. 그이 아들은 난세에 살면서 간신(奸臣) 들과 집념으로 항거하면서 기구하게 일생을 마친 희등(希登)이다. 그가 상처(喪妻)하자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 김안로가 사위로 맞으려 했으나 "평생을 홀애비로살지 그 추문(醜聞)에 들진 않겠다"고 면박하여 김안로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구수담(具壽聃)이 간신 진복창을 추천하자 "이놈은 간사한 자의 괴수다"고 막말을 하고 진복창이 앉았던 자리를 거두어 불태우기까지 하였다.

 

또한 간신 이기( )의 탄핵소를 올리고 이 기일당에게 정정당당(正正堂堂)하게 그 사실을 고하여 적을 삼았으며, 파당의 거장 윤원형(尹元衡)이 그와 더불어 일을 하고자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도 뜯어보지 않고, 죽을지언정 언평(彦平: 윤원형의 호)과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전갈을 보내어 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용기있는 저항으로 뜻있는 선비들의 존망을 받았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용천(龍川)으로 귀양가기 전야에 별세했다.

 

가족들이 염습할 재력이 없어 시체 옆에서 울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알지 못하는 선비들이 무명 3백여 자를 가지고 와서 염습을 하고는 "우리가 누구냐고 묻지 말아 달라"면서 돌아갔고, 영남에서도 그의 부음을 듣고 백여 명의 선비가 올라와 부조만을 하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의 휘()는 갑손(甲孫)이요 자()는 인중(仁仲)이며 시호(諡號)는 정절(貞節)인데 1396(태조 5년 병자)에 문경공(文景公) () 흠지(欽之)의 여섯 아들 중 장남(長男)으로 태어나 1417(태종 17년 정유)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던 중 강직(剛直)한 성품이 세종(世宗)의 신임을 받아 좌승지로 발탁된 뒤 1441(세종 23년 신유) 대사헌이 되어 대강(臺綱)을 바로 잡아 조야(朝野)가 숙연(肅然)해 지고 경기도와 함길도 도관찰(都觀察) 중추원사(中樞院使)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예조판서(禮曹判書)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1450(문종 즉위 경오) 좌참찬 겸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1451(문종 1년 신미) 6 26일에 졸()하니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중종시(中宗時) 청백리(淸白吏)에 록선(錄選)되었다. ()이 함길도관찰사 당시 아들 우()가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한 사실을 알고 시관(試官)을 불러 꾸짖기를 늙은 놈이 여우같이 아첨하는가 우리 아이 우()는 학업이 정밀(精密)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僥倖)으로 임금을 속이려 하는가 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결국 시관(試官)을 내 쫓았다. 이같은 사실을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내무부지방행정 연수원 교재(敎材)로 활용하고 있다.

  

정절공 갑손 과 충정공 창손 형제의 일화

 

정절공(貞節公) 휘 갑손(諱 甲孫)과 충정공(忠貞公) 휘 창손(諱 昌孫) 형제(兄第) 가 어렸을 적에 산방(山房)에서 독서(讀書)를 하기 위하여 미명(未明)에 동문(東問)을 나섰다,

그런데 창손(昌孫)이 부리던 노비(奴婢)가 노상(路上)에서 피복(皮袱)을 습득(拾得)하여 그 주인(主人)인 창손에게 아뢰기를 "금일 제가 귀중(貴重)한 물건(物件)을 주었습니다,' 하니,창손이 대답하기를 '좋겠다.'하였다.

그 말을 들은 갑손은 심()히 불쾌(不快)하게 여겨 승사(僧舍)에 이른지 3(三日) 이 지나도록 아우 창손과 말을 하지 않았다.

 

창손은 형의 그러한 뜻을 알지 못하여 마음이 우황(憂惶)한 지경에 이르러 같이 공부(工夫)하던 벗으로 하여금 넌지시 이유(理由)를 알아보게 하였다.

 

이에 갑손이 말하기를 '아우가 그 노비로 하여금 노상(路上)에서 물건을 줍지 못하게 하였다면 그것은 진실(眞實)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나, 좋겠다고 말하는 데에 까지 이르렀으니,나는 이러한 이유로 그와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창손이 땅에 엎드려 사죄(赦罪)를 받은 다음에야,갑손은 마음을 풀었다고 한다. (그들이 살던 곳은 지금(只今)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권희(權 憘)의 집이다

 

 

6. 동래 정씨(東萊 鄭氏) 계파(系派)

 

교서랑공보파(校書郞公輔派)

- 전서공규파(典書公規派)

- 설학재공구파(雪壑齋公矩派)

- 문경공흠지파(文景公欽之派)

- 참의공절파(參議公節派)

- 평리공리파(評理公釐派)

- 첨판공개보파(參判公介保派)

 

첨사공필파(詹事公弼派)

- 윤창파(允昌派)

- 호군공회종파(護軍公會宗派)

- 수찬공옹파(修撰公雍派)

- 직제학공사파(直提學公賜派)

- 참봉공급파(參奉公伋派)

- 대호군공인파(大護軍公絪派)

 

경신보(庚申譜) 세록(世錄)에 따르면 을미보(乙未譜)에서는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하여 기세(起世)하였으나 그뒤 알려진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의 묘지(墓誌)에는 보윤공(甫尹公) 정지원(鄭之遠)까지의 3세만 적혀 있었다.

 

따라서 경신보(庚申譜)에서는 보윤공(甫尹公) 1세조(世祖)로 하고 정회문(鄭繪文)은 권두(卷頭)에 따로 기록(記錄)한다고 하였다. (), 문안공(文安公)의 묘지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정회문(鄭繪文)을 시조(始祖)로 기세(起世)해 왔으나 묘지(墓地) 내용(內容)에 따라 계대(繼代)가 확실(確實)한 보윤공(甫尹公) 정지원(鄭之遠)을 기세조(起世祖)로 하고 시조는 정회문(鄭繪文)으로 하되, 그 사이의 소목(昭穆)이 분명(分明)치 않아 책머리에 실린 것이다. 따라서 기세조(起世祖)는 정지원(鄭之遠)이다.

 

동래정씨(東萊鄭氏)의 분파(分派) 을미보(乙未譜) 편찬(編纂) 때는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 첨사공파(詹事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3개 파()로 나누었다. 그런데 병신보(丙申譜)를 편찬(編纂)할 때는 6세조(世祖) 정보(鄭輔)의 후손(後孫)을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 정필(鄭弼)의 후손(後孫)을 첨사공파(詹事公派) 2개 파()로 나누었는데, 204년 이후(以後) 편찬(編纂) 경신보(庚申譜) 편찬(編纂) 때에도 분파(分派)는 여기에 의거했다. 그런데 이 2개 파() 3세조 정목(鄭穆)의 후손(後孫)에서 정택(鄭澤)의 후손(後孫)만으로 된 것으로 정항(鄭沆)의 후손(後孫)이나, 정문도(鄭文道)의 둘째 아들로 동래(東萊)에 남아 호장직(戶長職)을 계속해간 정선조(鄭先祚)의 후손(後孫)은 빠져 있다.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크게는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와 첨사공파(詹事公派)로 나뉘어지고, 작게는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에 전서공파(典書公派), 설학재공파(雪壑齋公派), 문경공파(文景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평리공파(評理公派), 참판공파(公派), 첨사공파에 윤창파(允昌派), 호군공파(護軍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로 나누어졌다.

 

교서랑공파

 

정갑손(鄭甲孫) : 세종 때 청백리, 좌참찬 겸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정창손(鄭昌孫) : 세조 때 좌익공신, 예종때 익대공신에 녹훈되었다.

정대년(鄭大年)

 

 

7. 동래 정씨(東萊 鄭氏) 전서공 규파(典書公 ) 항렬표(行列表)

소파별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정랑공

길흥후

생원공

길상후

현감공

길명후

.

※ 위에 항렬표를 보시다 싶히 자식 항렬에는 아직 이어지지 않고 있으니 가르쳐 드리지 못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대종회에 문의 바랍니다.


 

8. 동래 정씨 인물(人物)

 

고려조

정목(鄭穆) (좌복사(左僕射))

정택(鄭澤) (문하급사중(門下給事中)) 정균(鄭筠) (소경(少卿))

정길흥(鄭吉興) (정랑(正郞))

정항(鄭沆) ((): 자림(子臨) · 시호(諡號): 문안(文安)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정서(鄭敍) ((): 과정(瓜亭) · 문인(文人))

 

조선조

정인후(鄭仁厚) (돈녕부정(敦寧副正))

정갑손(鄭甲孫) (좌찬성(左贊成)) 정숙 (목사(牧使))

정개(鄭价) (좌승지(左承旨))

정창손(鄭昌孫) ((): 동산(東山시호(諡號): 충정(忠貞) ·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 영의정(領議政))

정절(鄭節) (예조참의(禮曹參議)) 정결(鄭潔) (목사(牧使))

정구(鄭球) ((): 괴은(乖隱) · 대사간(大司諫))

정개보(鄭介保) ((): 봉곡(蓬谷) · 참판(參判))

정사(鄭賜) (직제학(直提學))정란손(鄭蘭孫) (집의(執義))

정광세(鄭光世) (시호(諡號): 소평(昭平) · 이판(吏判))

정충량(鄭忠樑) ((): 마재(磨齋) · 도승지(都承旨))

정광국(鄭光國) (참의(參議)) 정충준(鄭忠俊) (부사(府使))

정관정(鄭光廷) (돈녕부정(敦寧副正))

정란종(鄭蘭宗) ((): 허백당(虛白堂) · 동래군(東萊君) · 이판(吏判)) 정광보(鄭光輔) (부사(府使))

정광필(鄭光弼) ((): 수부(守夫) · 시호(諡號): 문익(文翼) · 영상(領相)) 정복겸(鄭福謙) (부사(府使))

정세겸(鄭世謙) (목사(牧使)) 정란무(鄭蘭茂) (부사(府使))

정수홍(鄭守弘) (판서(判書)) 정계소(鄭繼韶) (부사(府使))

정숙하(鄭淑夏) ((): 월호(月湖) · 감사(監司))

정택승(鄭宅升) (부사(府使)) 정지(鄭智) (부사(府使))

정선(鄭選) (부사(府使)) 정사(鄭思) (좌통례(左通禮))

정서(鄭恕) (첨사(僉使)) 정만압 (좌윤(左尹))

정희남(鄭喜男) (대호군(大護軍))

정하남(鄭賀男) (대호군(大護軍))

정길남(鄭吉男) (대호군(大護軍))

정종무(鄭宗懋) (예빈사부정(禮賓寺副正))

정덕일(鄭德逸) (참판(參判)) 정하생(鄭下生) (참의(參議))

정언충 (부사(府使))

정대년(鄭大年) ((): 사암(思庵) · 시호(諡號): 충정(忠貞) · 좌찬성(左贊成))

정량필(鄭良弼) ((): 추천(秋川) · 참판(參判))

정화제(鄭華齊) ((): 취전(醉全) · 부사(府使))

정익선(鄭翊善) (돈녕부정(敦寧副正))

정동후(鄭東後) ((): 송애(松崖) · 승지(承旨))

정복경(鄭復慶) (대호군(大護軍))

정필동(鄭必東) ((): 수와(睡窩) · 승지(承旨))

정언섭((): 정지재(定止齋) · 참판(參判))

정정동(鄭貞東) (부사(府使)) 정희홍(鄭希弘) (목사(牧使))

정지경(鄭之經) ((): 기은(機隱) · 목사(牧使)

정지함(鄭之咸) (부정(副正))

정홍재(鄭弘在) ((): 청림(靑林) · 목사(牧使))

정홍익(鄭弘翼) ((): 휴옹(休翁) · 부제학(副提學))

정언충((): 귀옹(龜翁) · 참판(參判))

정복시(鄭復始) ((): 계담(桂潭) · 참의(參議))

정순우(鄭純祐) (목사(牧使))

정지우(鄭之羽) ((): 창해(滄海) · 참판(參判))

정래주(鄭來周) ((): 동계(東溪) · 병참(兵參))

정행백(鄭行百) (부사(府使)) 정경욱(鄭景旭) (부사(府使))

정지연(鄭芝衍) ((): 남봉(南峯) · 우의정(右議政))

정유신(鄭惟愼) ((): 매계(梅溪) · 판윤(判尹))

정응화(鄭應和) (부사(府使)) 정욱선 (도정(都正))

정각선(鄭覺先) ((): 두릉(杜陵) · 도정(都正))

정혁선(鄭赫先) (목사(牧使)) 정석삼(鄭錫三) (참판(參判))

정홍순(鄭弘淳) ((): 표천(瓢泉) · 시호(諡號): 충헌(忠憲) · 우상(右相)) 정만순(鄭晩淳) (참판(參判))

정달선(鄭達先) (부사(府使)) 정재항(鄭載恒) (목사(牧使))

정시선(鄭是先) (감사(監司)) 정석규(鄭錫圭) (부사(府使))

정석주(鄭錫疇) (목사(牧使)) 정익검(鄭益儉) (부정(副正))

정재희(鄭載禧) ((): 양촌(陽村) · 예참(禮參))

정언지((): 동곡(東谷) · 이참(吏參))

정언신((): 라암(懶庵) · 우의정(右議政))

정유(鄭攸) ((): 수은(睡隱) · 승지(承旨))

정래상(鄭來祥) (승지(承旨))

정세구(鄭世矩) ((): 지가(之家) · 관찰사(觀察使))

정규응(鄭圭應) ((): 라대(羅帶) · 통제사(統制使))

정두해(鄭斗海) (오위장(五衛將))

정필석(鄭必錫) (첨중추(僉中樞))

정효식(鄭孝植) (동중추(同中樞))

정기폭(鄭紀輻) (동중추(同中樞))

정치현(鄭致鉉) (오위장(五衛將))

정수영(鄭壽永) (대호군(大護軍)) 정수경(鄭秀敬) (도정(都正))

정세환(鄭世煥) (동중추(同中樞)) 정국환(鄭國煥) (도정(都正))

정호석(鄭昊錫) (첨중추(僉中樞))

정해조(鄭海朝) (동중추(同中樞))

정린조(鄭麟朝) (동중추(同中樞))

정두용(鄭斗容) (오위장(五衛將))

정래대(鄭萊大) (동중추(同中樞))

정인갑(鄭仁甲) (동중추(同中樞)) 정기혜(鄭基惠) (도정(都正))

정상조(鄭相朝) (동중추(同中樞))

정인조(鄭仁朝) (동중추(同中樞))

정학묵((): 금초(錦樵) · 승지(承旨))

정택동(鄭宅東) (부사(府使)) 정청 (부사(府使))

정위 (부사(府使)) 정철동(鄭喆東) (부사(府使))

정완묵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정운달(鄭雲達) (오위장(五衛將)) 정준묵 (도정(都正))

정한동(鄭漢東) (좌윤(左尹)) 정봉조(鄭鳳朝) (도정(都正))

정재조(鄭在朝) (동중추(同中樞))

정인양(鄭寅洋) (오위장(五衛將))

정인문(鄭寅文) (동중추(同中樞)) 정의조(鄭義朝) (도정(都正))

정기일(鄭基一) ((): 죽하(竹下) · 이참(吏參))

정구용(鄭久容) (부사(府使)) 정인성(鄭寅性) (승지(承旨))

정우용(鄭友容) (목사(牧使)) 정동관(鄭東觀) (이참(吏參))

정동준(鄭東浚) ((): 동재(同齋) · 참판(參判))

정기만(鄭基晩) (도정(都正)) 정동교(鄭東敎) (목사(牧使))

정기락(鄭基洛) (참의(參議)) 정동간(鄭東幹) (참판(參判))

정동만(鄭東萬) (부사(府使)) 정선용(鄭善容) (부사(府使))

정주용(鄭周容) ((): 우석(友石) · 동돈녕(同敦寧))

정기회(鄭基會) (이판(吏判)) 정동원(鄭東元) (부사(府使))

정인표(鄭寅杓) (승지(承旨)) 정우용(鄭遇容) (부사(府使))

정원용(鄭元容) ((): 경산(經山) · 시호(諡號): 문충(文忠) · 영상(領相))

정기세(鄭基世) ((): 주계(周溪) · 찬성(贊成))

정범조(鄭範朝) ((): 채당(蔡堂) · 시호(諡號): 문헌(文獻) · 우상(右相)) 정기명(鄭基命) (부사(府使))

정시용(鄭始容) (목사(牧使)) 정동귀(鄭東龜) (부사(府使))

정기대(鄭基大) (참판(參判)) 정기익(鄭基翊) (승지(承旨))

정윤용(鄭允容) ((): 수암(睡庵) · 참의(參議))

정노용(鄭老容) (부사(府使)) 정기직(鄭基稷) (승지(承旨))

정동협(鄭東協) (목사(牧使)) 정인학(鄭寅學) (대사헌(大司憲))

정대용(鄭大容) ((): 기호(耆湖) · 이판(吏判))

정최조(판서(判書)) 정경조(鄭慶朝) (부사(府使))

정기식(鄭基植) (도정(都正)) 정서조(鄭舒朝) (도정(都正))

정동각(鄭東閣) (목사(牧使)) 정영조(鄭永朝) (부사(府使))

정기중(鄭基重) (부사(府使)) 정용조(鄭龍朝) (도정(都正))

정면조(鄭冕朝) ((): 석천(石川) · 승지(承旨))

정예용(鄭禮容) (참판(參判)) 정지용(鄭持容) (목사(牧使))

정기선(鄭基善) ((): 수석(脩石) · 예판(禮判))

정익조(鄭翌朝) (이참(吏參)) 정헌조(鄭憲朝) (승지(承旨))

정재용(鄭在容) (목사(牧使)) 정기태(鄭基泰) (도정(都正))

정기묵 (도정(都正)) 정기찬(鄭基贊) (부사(府使))

정준용(鄭駿容) (대사헌(大司憲)) 정기용 (승지(承旨))

정기면(鄭基勉) (이의(吏議)) 정존중(鄭存中) (판서(判書))

정숙조 (공참(工參)) 정인성(鄭寅星) (승지(承旨))

정인석(鄭寅奭) (승지(承旨)) 정석조(鄭錫朝) (승지(承旨))

정인섭(鄭寅燮) (승지(承旨)) 정세창(鄭世昌) (부사(府使))

정관수(鄭觀綏) (이의(吏議))

정존겸(鄭存謙) ((): 양재(陽齋) · 시호(諡號): 문안(文安) · 영상(領相)) 정직조(鄭稷朝) (이참(吏參))

정동신(鄭東愼) (좌윤(左尹)) 정기천(鄭基天) (오위장(五衛將))

정운조(鄭雲朝) (도정(都正)) 정원조(鄭願朝) (도정(都正))

정세수(鄭世綏) (동중추(同中樞)) 정태수(鄭泰綏) (도정(都正))

정원조(鄭元朝) (도정(都正))

정응복(鄭應福) ((): 죽오(竹塢) · 절제사(節制使))

정량권(鄭良權) (첨중추(僉中樞)) 정신택(鄭新宅) (도정(都正))

정태진(鄭泰鎭) (좌승지(左承旨))

정순배(鄭順培) (첨중추(僉中樞))

정의복(鄭義復) (우승지(右承旨)) 정익동(鄭翊東) (참판(參判))

정환진(鄭煥軫) (동중추(同中樞)) 정상고(鄭尙古) (부사(府使))

정예검(鄭禮儉) (첨중추(僉中樞))

정희용(鄭希容) (부승지(副承旨))

정창래(鄭昌萊) (동중추(同中樞))

정탁용(鄭鐸容) (첨중추(僉中樞))

정정조(鄭貞朝) (동중추(同中樞))

 

 

[등과(登科) · 음사인명(蔭仕人名)]

 

8. 집성촌(集成村)

 

- 강원도 이천군 판교면 군지리

- 경북 의성군 금성면 제오동

- 전북 김제군 월촌면 장화리

- 경북 청도군 화양면 삼신동

-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 경북 군위군 효령면 금매동

- 경남 산청군 생초면 월곡리

- 경북 안동군 임하면 임하동

- 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9. 인구수(人口數)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44 2363, 가구수 13 7524가구로, 정씨의 22%를 차지한다.

 

http://www.dongraejung.co.kr/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1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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