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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동래정씨의 몇대손인지...<내공100>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8,333 작성일2009.10.06

제가 동래정씨인데 제가 몇대손인지알고 싶어서요

빨리가르쳐주세요 내공100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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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
사회, 도덕 11위, 사회문화, 문화재 15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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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정씨(東萊鄭氏)

 


□ 본관지
  정씨(鄭氏)의 본관은 옛 문헌에 210본 또는 247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동래, 연일, 해주, 진주, 하동, 초계(草溪), 온양, 경주, 청주, 봉화, 광주(光州), 나주, 서산, 김포, 야성(野城), 함평, 청산(靑山), 장기(長寅), 영덕, 곤양(昆陽), 서경(西京) 등 30여 본이다.
  역사적으로 명벌로서의 지위를 누려 왔으며, 특히 조선시대에 동래정씨를 으뜸으로 연일, 청주, 온양, 진주, 하동정씨 등이 상당한 세력을 폈다.
  정씨의 원조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의 6촌 중 취산(嘴山) 본피부(本彼部) 진지촌(珍支村)의 촌장이며 좌명공신(佐命功臣)인 지백호(智伯虎)이다. 본피부락은 현재의 경주시 중심부에 있어서 정씨는 일찍부터 한반도 남단에 자리잡고 살던 선주민(先住民)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정씨의 각 본관별 시조들은 모두 지백호의 원손(遠孫)들이라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지만 그 혈연적 계보를 가려 낼 방도는 없다. 다만, 정씨에서는 경주정씨가 큰집이라는 데에는 별로 이론이 없는 것 같다.
  동성이족(同姓異族)으로서의 서산정씨는 그 시조 정신보(鄭臣保)는 원래 중국의 저장[浙江] 사람으로 송나라의 원외부(員外部) 벼슬에 있다가 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망명해 온 것으로 보인다.


□ 동래정씨의 시조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의 6부 촌장으로 정씨의 성을 하사받았던 지백호의 원손이며 안일 호장인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받든다. 그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다.
  그런데 ‘경신보(庚申譜)’ 세록(世祿)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을미보(乙未譜)’에서는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하여 기세(起世)하였으나 그뒤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의 묘지(墓誌)가 알려졌는데, 묘지(墓誌)에는 보윤공(甫尹公) 정지원(鄭之遠)까지의 3세만 적혀 있다. 따라서 ‘경신보(庚申譜)’에서는 보윤공(甫尹公)을 1세조로 하고 정회문(鄭繪文)은 권수(卷首)에 따로 기록한다.-
  다시 말하면, 문안공(文安公)의 묘지(墓誌)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정회문을 시조로 기세(起世)해 왔으나 묘지 내용에 따라 계대가 확실한 보윤공(甫尹公) 정지원을 기세조(起世祖)로 하고 시조는 정회문으로 하되, 그 사이의 소목(昭穆)이 분명치 않아 책머리에 실린 것이다.
  따라서 기세조(起世祖)는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정지원이다.
  정지원과 정회문 사이의 세계(世系)는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정지원의 아들 정문도(鄭文道)는 안일호장(安逸戶長), 손자 정목(鄭穆)은 상서좌복사태부경(尙書左僕射太府卿) 등 자손들이 현달하게 되어 그의 세거지인 동래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 본관지 동래
  동래(東萊)는 부산직할시와 경남 양산시의 일부 지역을 차지했던 지명으로, 본래 장산국( 山國) 또는 내산국(萊山國)인데 신라 때 점령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으로 고치고,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 현종 때 울주(울산)에 편입시켰다가 1547년(명종 2) 부(府)로 승격시키고 1895년(고종 32) 관찰부(觀察府)를 설치, 1896년 부윤(府尹)으로 삼았으며, 1903년 군으로 고쳤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부산부에 딸리고, 부산부에 속하지 않는 구역과 기장군 일원을 병합하여 동래군을 이루었다. 그 후 대부분이 부산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양산군(지그므이 양산시)에 편입됨으로써 동래군의 행정구역 명칭은 소멸되었는데, 부산직할시에 편입된 대부분은 동래구에 속해 있다.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는 동래정씨 외에 동래김씨, 동래판(判)씨, 동래송씨 동래조(曹)씨 등이 있다. 
  한자가 다른 정(丁)씨 중에도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것이 있어 혼선을 안겨 준다.  


□ 이거와 분파
  시조 정회문은 신라 탈해왕 때 성을 하사받고 12세손 정규(鄭規) 전서공(典書公)은 천안으로 이거하고, 정구(鄭矩) 시(諡) 정절공(靖節公) 호(號) 설학재(雪壑齋)는 서울 망우동으로 이거하고, 정부(鄭符) 한성부윤(漢城府尹)은 충주로 이거하니 정절(鄭節)은 동래에 그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정구 정절공의 아들 정선경(鄭善卿), 동평군(東平君)의 둘째아들 정종(鄭種)이 이시애의 난과 이징옥의 난을 토평하고 동생 참판공(參判公)(1450)과 하령남(下嶺南) 고령군 덕곡면(德谷面) 오노곡(吾老谷)에 내가 늙는 고을이라 하여 그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정규의 6세손 정숙(鄭淑)(1740)이 벽진면(碧珍面) 자산리(紫山里)로(1816), 정종(鄭種) 동평군(東平君)의 11세손 정수열(鄭修烈.호-三悔齋)가 수륜면(修倫面) 계정리(溪亭里)로(1720), 정종의 10세손 정성교(鄭星僑)가 선남면(船南面) 소학리(巢鶴里)로(1761), 정종의 8세손 정하(鄭河)가 용암면(龍巖面) 운산리(雲山里)로(1687), 정종의 7세손 정원규(鄭元圭) 호(號) 정수암(鄭修庵)이 선남면(船南面) 소학리 및 선원리(仙源里) 등으로(1740), 정종의 9세손 정영복(鄭榮馥) 한성부서윤이 선남면(船南面) 유서리(柳西里) 및 명포리(明浦里) 등으로(1763), 정종의 10세손 정유강(鄭惟崗)이 선남면(船南面) 도흥리(道興里.침곡=砧谷)로(1770), 참판공(參判公) 12세손 정담(鄭淡)이 용암면(龍巖面) 문명리(文明里)로(1800), 8세손 정활(鄭活)이 수륜면(修倫面) 수성리(水成里)로 이거하여 현존하고 있다.
 

□ 인물과 파
  조선시대에 정승 17명,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198명을 배출했는데 상신(相臣) 17명은 왕손인 전주이씨의 22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동래정씨는 정지원의 6세에서 교서랑(校書郞:輔)파와 첨사공(詹事公:弼)파의 2파로 대별된다. 이들 두 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여러 파로 분화하는데 첨사공파 중에서도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와 대호군파(大護軍派)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가문의 전설 ; 온화하고 불편부당하여 남과 적을 삼지 않는다는 가통을 지켜오면서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혀온 동래정씨는 부산 양정동 화지산(華池山)에 자리잡은 2세 안일공(安逸公) 정문도(鄭文道) 묘소에 대한 명당(明堂)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정문도가 죽었을 때 맏아들 정목이 장지 문제로 고심하던 중 동래부사를 지내던 고익호(高益鎬)가 일러 준 화지산에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장례를 치른 다음날 이 곳에 와 보니 누군가가 무덤을 파헤쳐 놓았다. 기이하게 생각하고 다시 복원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분통을 참을 수 없었던 정목(鄭穆)은 밤을 세워 가면 숨어 지켜보기로 하였다. 밤이 어지간히 깊었을 때 도깨비들이 나타나 또다시 무덤을 파헤치며 하는 말이 "여기가 어딘데 함부로 건드려, 적어도 금관을 묻어야 할 곳에---" 하며 중얼거렸다. 가난하게 살았던 정목은 이 사실을 알고 걱정이 되어 한숨을 쉬고 있는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황금빛 나는 보릿짚으로 관을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을 것이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노인이 시키는 대로 하고 몰래 숨어서 봤더니 도깨비들이 그 날 밤 다시 나타나서 "과연 주인이 들어왔구나" 라고 하며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그 후 동래정씨는 10대에 걸쳐 4백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가문은 번영을 누려 명문거족의 긍지를 살렸다.


■ 정목(鄭穆)
  동래정씨의 1세조인 정지원의 아들 정목은 좌복야를 지냈는데, 그 후손들이 모두 현달했다.
그의 아들 정항(鄭沆)은 문종, 인종 때 우사간, 충청도 안찰사 등을 지냈고, 항의 아들은 <정과정곡>으로 유명한 정서이다.


■ 정항(鄭沆)
  [1080~1136] 자 자림(子臨). 시호 문안(文安).
  정지원의 맏아들 정목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상서좌복야를 지냈다. 슬하에 아들 정제(鄭濟). 정점(鄭漸). 정택(鄭澤). 정항(鄭沆). 4형제를 두었는데, 아들 4형제중 셋째 택이 찬성사를 역임했고, 문장(文章)과 재능으로 명망을 떨쳤다. 정목의 아우 정선조(鄭先祚)는 호장을 지냈고, 그의 후손들이 동래와 양산 등지에 흩어져 살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져왔다.
  고려의 문신 정항은 정목의 막내아들로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도와 충청도의 안찰사를 역임한 후 인종 때 지추밀원사. 예부상서. 한림학사 등을 지냈다.
  조부와 증조부는 모두 동래의 호장이었으나 아버지 정목이 관직에 나아가 섭대부경(攝大府卿)이 되었다. 23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숙종이 행차한 복시(覆試)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곧 내시에 속하였다가 상주사록(尙州司錄)에 임명되었다. 나이는 어려도 매사를 잘 처리하여 정극영(鄭克永), 한충(韓沖)과 더불어 사록으로는 이정일한(二鄭一韓)이 있다는 칭송을 들었다. 1116년(예종 11) 집주관(執奏官)이 되어 공평 정직하게 출납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예종 말에서 인종 초에는 당시 집권하고 있었던 이자겸에게 아부하지 않아 여러 차례 좌천되었다가 이자겸이 제거된 후에는 새로 제도를 정비하는 데 공헌함이 많았다. 경서(經書)에 밝아 임금 앞에서 여러 차례 <서경(書經)> <송조충의집(宋朝忠義集)> <예기(禮記)> 등을 강의하였다.
  1132년(인종 10)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묘청(妙淸), 정지상(鄭知常) 등이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어 왕이 서경에 행차하자 왕을 서경에 오래 머물게 하고자 하여 개경의 궁궐 수리를 중지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정항은 두 차례의 상소를 올려 이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궁궐 수리와 개경으로의 환어(還御)를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죽었을 때에는 30년간 근시직(近侍職)에 있으면서도 저축한 것이 없다 하여 왕의 칭송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1132년 지공거(知貢擧) 최자성(崔滋盛) 등이 시제(試題)를 잘못 내어 간관들은 과거를 무효화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정항은 사위 김이영(金貽永)이 합격하였으므로 환관(宦官)에게 간청하여 취소하지 못하게 하는 일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직제학공파의 파조 정사(鄭賜)는 세종 때 예문관 직제학을 지낸 사람인데, 아들 5명, 손자 10명을 두었다. 셋째아들 정난종(鄭蘭宗)은 동래정씨 중흥의 조(祖)라 할 수 있다. 정난종은 세조~성종 때 훈구파의 중진으로 이조판서,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문익공파(文翼公派)로 불리는 정광필(鄭光弼)은 그의 둘째아들이다.
그 밖에 중종 때 대제학을 지낸 정사룡(鄭士龍), 선조 때 우의정 정지연(鄭芝衍), 숙종 때 우의정 정재숭(鄭載嵩), 헌종 때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정조 때 우의정 정홍순(鄭弘淳) 등이 있고, 대호군파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몰락하였다.
  <고려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로는 의종 때 명신 정습명(鄭襲明), 그의 6대 손인 정몽주(鄭夢周), 의종 때 무신정변을 주동한 정중부(鄭仲夫), 예종 때 학자, 문인이었던 정항(鄭沆) 등이 있다.


■ 정서(鄭敍)
  정항의 아들인 정서(鄭敍)는 인종비 공예대후 동생의 남편이다.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어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는 의종 때 폐신(嬖臣)들의 참소로 동래에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정자를 짓고 오이를 심어 '과정(瓜亭)'이라 당호(堂號)를 삼고 연군(戀君)의 정을 가요로 읊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어, 우리 나라 국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정서는 인종의 동서로서 벼슬이 내시낭중이었고, 문장과 묵죽화에 능하여 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의종 때 폐신들의 참소로 고향인 동래로 장류되었다. 
  그가 그림을 벽에 붙여 놓고 쓴 시가 있다. 이 시는 넉으로 대나무를 그린 후에 시를 쓴 것이다.

'한가한 틈에 먹을 찍어서

대나무를 그렸다

때때로 벽 위를 바라보니

그윽한 향기 풍기네'

  고려 당대의 시객 정지상(鄭知常)도 동래정씨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 정대년(鄭大年)
  동래정씨 가문의 위세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활짝 피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31명의 상신과 751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정대년은 1532년(중종 27)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좌우승지를 지내고 명종 때 황해도관찰사, 참판, 한성부좌윤, 대사헌을 거쳐 선조 때 호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검소한 생활로 일생을 보낸 사람이다. 

  정대년신도비(鄭大年神道碑) /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원부리 산 2-2. 조선시대의 돌비석. 1993년 6월 3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8호로 지정되었다. 동래정씨 사암공파 종중에서 소유, 관리한다. 높이 270㎝의 신도비는 연꽃무늬와 영지무늬를 평면적으로 조각한 대석 위에 비신과 이수를 얹었다. 정대년의 손자 정정호는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비문을 신도비에 새기려 하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실행하지 못하고 뒤에 증손 정양우, 정양필 형제가 오준(吳竣)의 글씨와 김광현(金光炫)의 두전을 받아 세웠다. 신도비 뒷면에는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자손 170명의 명단을 적은 추기가 있는데 충청도 관찰사 정양필이 적고 예조정랑 유시영이 썼다. 비문에는 정대년의 성장 과정과 관직 생활, 검소한 생활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부인의 집안과 성격 및 자손들에 대해 간략하게 적혀 있다.


■ 정흠지(鄭欽之)
  13세 때 진사(進士)가 되었던 정흠지는 양도공(良度公) 정양생(鄭良生)의 손자로 풍채가 좋고 성품이 강직했으며, 특히 사학(史學)과 천문학에 정통하여 세종의 명을 받아 역법(曆法)을 연구했고, 그의 아들 정갑손(鄭甲孫)과 창손(鄭昌孫)이 크게 현달했다.


■ 정갑손(鄭甲孫)
  세종 때 독격골(獨擊 )로 조정이 두려워하였던 정갑손은 대사헌이 되어 대강(臺綱)을 바로잡아 왕의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와 예조판서. 좌.우참찬(左右參贊)을 지내고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정갑손의 일화 ;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의하면 그는 성격이 청직하고 엄준하여 자제들도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청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찌기 함길도 감사가 되었을 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길도 향시(鄕試)의 방(榜)이 발표되었음을 보니 그의 아들 정오(鄭烏)가 방에 들었으므로 시관(試官)을 불러 꾸짖기를 "늙은 것이 감히 나에게 아첨을 하느냐. 내 아들 오가 학업에 정진하지 못하거늘 어찌 요행으로 합격시켜 임금을 속이려 하느냐." 하고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시관을 파면시켰다고 한다.
  [용재총화( 齋叢話)]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청렴강개한 성품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이조(吏曹)에서 사람을 벼슬에 잘못 임명한 일이 있었다.
  세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서 상참(常參: 조정에서 매일 정례적으로 행하는 조회)을 받을 때 정승 겸 판서 하연(河連)과 이조판서 최부(崔府)가 함께 입시(入侍)하였더니 갑손이 왕에게 아뢰기를 "최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 연은 조금 사리를 알면서도 알맞지 못한 사람을 등용하였으니 국문하기를 청하옵니다"하였다.
  임금이 화한 얼굴로 양편을 화해시켰으나 조회가 끝난 뒤에 밖에 나와서 둘 다 땀이 물흐르듯 할 때 갑손이 웃으면서 "각기 제 직분을 다했을 뿐이니 서로 해침은 아닙니다." 하며 녹사를 불러서 "두 분이 심히 더우신 모양이니 네가 부채를 가지고 와서 부쳐 드려라" 하고는 조용한 태도로 조금도 후회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고 한다. 갑손(甲孫)의 아우 창손(昌孫)은 세종 때 부제학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여 [고려사]와 [세종실록]. [치평요람]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세조(世祖) 때 영의정에 올라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고, 세조가 신임하여, "내가 경을 공경하기를 숙부와 다름없소" 하면서 창손이 술을 권하면 반드시 어좌(御座)에서 내려앉았으며 술을 못마시는 창손을 위하여 좌석에 반드시 단술을 준비케 하였다고 한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발의 연골뼈가 붙어 일어설 수 없다고 칭병하여 벼슬을 마다했던 구(球 : 무안 현감 유의의아들)는 18년 동안이나 거짓으로 앉은뱅이 노릇을 한 집념의 선비였다. 그이 아들은 난세에 살면서 간신(奸臣) 들과 집념으로 항거하면서 기구하게 일생을 마친 희등(希登)이다. 그가 상처(喪妻)하자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 김안로가 사위로 맞으려 했으나 "평생을 홀애비로살지 그 추문(醜聞)에 들진 않겠다"고 면박하여 김안로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구수담(具壽聃)이 간신 진복창을 추천하자 "이놈은 간사한 자의 괴수다"고 막말을 하고 진복창이 앉았던 자리를 거두어 불태우기까지 하였다.
  또한 간신 이기(李 )의 탄핵소를 올리고 이 기일당에게 정정당당하게 그 사실을 고하여 적을 삼았으며, 파당의 거장 윤원형(尹元衡)이 그와 더불어 일을 하고자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도 뜯어보지 않고, 죽을지언정 언평(彦平: 윤원형의 호)과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전갈을 보내어 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용기있는 저항으로 뜻있는 선비들의 존망을 받았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용천(龍川)으로 귀양가기 전야에 별세했다.
  가족들이 염습할 재력이 없어 시체 옆에서 울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알지 못하는 선비들이 무명 3백여 자를 가지고 와서 염습을 하고는 "우리가 누구냐고 묻지 말아 달라"면서 돌아갔고, 영남에서도 그의 부음을 듣고 백여 명의 선비가 올라와 부조만을 하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 정난종(鄭蘭宗)
  직제학(直提學) 정사(鄭賜)의 아들이 성종조의 명신 난종(蘭宗)이다.
  [명신록(名臣錄)]에 의하면 그는 풍채가 아름답고 도량이 활달하여 일찍부터 세조의 아낌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날 세조가 주역(周易)과 원각경(圓覺經)의 우열을 물으니, 세조가 독신하는 임금인 줄 알면서도, "불교의 요사스런 글을 어찌 [삼성경(三聖經)]과 비교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세조가 크게 노하여 역사(力士)를 시켜 잡아 매어 매질하게 하였으나 난종은 얼굴 빛이 평상시와 같이 태연하므로 기가 질려 그만두었다고 한다.


■ 정광필(鄭光弼)
  정난종의 아들이 중종조의 명상 정광필이다. 안당(安 ). 김정(金淨).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 등과 더불어 '팔현(八賢)'으로 일컬어졌던 그는 이조참의가 되어 연산군의 사냥이 너무 심하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아산으로 귀양가기 시작하여 삼흉(三兇)에 거슬려 관력의 절반을 유배지에서 보냈으며, 중종반정으로 재기용되었을 때 육식을 금하고, "전 임금의 생사를 모르는 처지에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여 사람들을 탄복시켰다.
삼흉(三兇) : 조선 중종 때 전권횡자하다가 사사된 김안로. 허항. 채무택의 세 사람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어 회덕현(懷德縣. 지금의 대전 일부)에 내려가 있었는데, 불의에 금오랑(金吾郞)이 달려들자 사사되는 줄 알고 온 집안이 모두 놀래고 두려워 우는데도 그는 변색도 없이 장기를 두면서 치우지 않았다.
  금오랑이 전하기를 감형(減刑)되어 김해로 귀양보낸다 하니 그는 "임금의 은혜가 지극합니다" 하며 머리를 조아렸고, 김해로 귀양가는 길에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당적보(黨籍譜)]에 전한다.

    훼방이 산같이 쌓였으나 마침내 용서받았네
    이세에 임금 은혜에 보답할 길 없구나
    열 번 높은 고개를 넘는데 두 줄기
    눈물이요 세 번 장강(長江)을 건너면서 홀로 혼이 끊어지네
    --아득히 높은 산엔 구름이 먹을 뿜고
    망망한 들판에는 비가 항아리를 쏟는 듯하네
    저물게 바닷가 동쪽 성밖에 다다르니 초가집이 쓸쓸한데
    대나무로 문을 삼았고녀

 

  서울 중구 회현동1가 14번지는 동래정씨의 옛 터였다고 한다. 이 곳은 문익공 정광필이 살던 터로, 약 400여 년간 자자손손 대를 이어 지켜 왔던 유서 깊은 곳이다.
  어느 날 광필의 꿈에 선인(仙人)이 나타나 집앞 은행나무에 열두 개의 서각대(犀角帶)를 걸어 놓고 가더라는 것이다.


■ 정광필의 후손
  그 후 광필의 손자 정유길(鄭惟吉), 증손 정창연(鄭昌衍), 현손 정태화(鄭太和) 등은 중종 때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대사헌과 이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선조 때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고, 문장(文章)과 시(詩)에 능했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유길의 아들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정창연은 광해군의 비(妃)인 유씨(柳氏)가 그의 생질녀였기에 왕의 자문에 응했으며, 공정한 마음으로 억울하게 옥사(獄事)에 관련되었던 많은 선비를 구해 주면서도 본인에게는 물론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창연의 아들로 <삼세호당(三世湖堂)>이라 우러름을 받았던 정광성(鄭廣城)과 정광경(鄭廣敬)은 형조판서와 대사헌을 역임했고, 광성의 아들 정태화는 효종과 현종조에서 영의정을 지내며 현상(賢相)으로 명망이 높았다.


□ 성세
  2000년 조사에서는 442,363명. 정씨 전체는 약 180만 명. 정씨 전체의 25%.
  동래 44만, 경주 30만. 진주 24만, 연일 22만, 하동 16만, 초계, 나주 10만, 해주 4만, 온양, 봉화, 강릉 서산, 각 2만


□ 집성촌
  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경북 군위군 효령면 금매동
  경남 거창군 남하면 일원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면 고성리

 

□ 유적지
■ 삼우당 三友堂
  경남 거창군 남하면 대야리 1370번지에 있는 한말의 사묘재실. 경남문화재자료 제155호
  1985년 11월 14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동래정씨 삼형제인 금천 정시수(鄭時修)와 정시웅, 충의위 정시승의 학덕을 기려서 1913년에 건립한 건물로 동래정씨문중에서 소유, 관리한다. 정시수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강화가 성립되자 시국을 개탄하고 여생을 초야에 묻혀 시를 읊으며 보냈다.
  본체인 삼우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집이며 누각 건물인 화수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합천댐 건설로 그 지역이 수몰됨에 따라 1987년 지금 자리로 이건한 것


■ 군포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군포시 속달동 24-4 조선시대 전면 5칸(사랑채)의 고가 00년 3월 24일 경기도문화재자료 95호
  사랑채는 1877년(고종 14)에 지어졌고, 안채는 사랑채보다 100여 년 전에 지어졌다. 안채의 대청에 기록된 상량문에 의하면 안채는 1783년(정조 7)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초당과 외양간은 6, 25전쟁 때 소실되고, 사당은 1960년대에 훼손되었으며, 방앗간이 있던 바깥 행랑채는 1970년대에 무너졌다.
  안채는 최근 안방과 건넌방 등을 확장하고 입식 부엌을 들이는 등 개조했으나 기본 가구(架構)는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사랑채와 문간채도 원래의 형태를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작은 사랑채는 다소 기울고 있으며, 행랑채는 상태가 좋지 않다.
  사랑채는 전면 5칸으로 구성된 전후 툇집으로 독특한 평면구성을 이루고 있다. 왼쪽 첫째칸은 반 칸을 앞으로 더 내밀어 1칸 크기로 난간을 두른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문간 쪽에 아궁이가 있고, 그 위에는 사랑방에서 연결되는 다락이 있다.
  사랑방은 두번째와 세번째 칸에 걸쳐 방이 있고, 뒷면에 툇마루가 있어 누마루 뒤의 다락과 연결된다. 네번째 칸은 마루방인데 마루복도가 있어 안채로 드나들 수 있다. 다섯번째 칸은 '행사청'이라 부르는 방으로, 앞쪽에는 창문만 있고 뒤쪽에는 툇마루가 있어 안마당 쪽을 향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
  전체적으로 매우 기능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평면 분할이 독특하다. 특히 예전에 공부방으로 사용했다는 작은사랑채는 3칸으로 구성된 전툇집으로, 위치와 규모 등이 독특하다. 문간채는 원래 3칸 집이었다. 사랑채와 연결되는 부분에 대문을 두고 나머지 칸은 창고로 사용했으나 5칸을 덧달아 지었다. 따라서 안채는 더욱 폐쇄적인 공간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관리 상태가 좋지 못한 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살림집으로서의 전형적인 특징을 유지하고 있으며 사랑채의 평면 분할 방식, 행사청의 구성, 작은사랑채의 위치 설정 등이 독창적이고 기능성을 중시한 집이어서 보존가치가 있는 가옥이다. 현재 정운석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출처.글.....배우리

2009.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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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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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것은 이런곳 말고, 종친회에 문의 해야 함.

 

질의자가, 질문한것은 보학이라 하는데

보학은 이런곳에 문지 마시고, 종친회에 문의.

 

일단> 질의자 포함, 질의자 윗대의 이름지중, 항려자를 알아야 함. (항렬자는 많이 알수록 유리)

http://www.dongraejung.co.kr/ <= 이곳이 대종중 홈피라고 써잇는데

 

http://www.dongraejung.co.kr/ => 동래세보 => 항렬보기. 순으로 클릭

근데, 락을 걸어 놓으심. 회원만(오그인, 가임) 볼수잇슴.

 

질의자집안 의 항렬자를 쭉 써본후 위 항렬보기에서,

질의자의 집안 항렬자가, 항렬에 잇는지 봄( 대종중 홈피에, 가입 해야 할듯)

 

항렬보기에서 집안의 항렬자가 없으면

http://www.dongraejung.co.kr/ => 사랑방 => 게시판. 에 질문하여 여쭈어 봄.

 

 - 위쪽은 계파를 떠나, 대종중 홈피인듯 하고,

 

-/-****

http://www.drjeong.net/ <= 이쪽은 동래정씨인중, 충정공파 라는, 파의 종중홈피.

http://www.drjeong.net/ => 뿌리탐구 => 항렬표. 순으로 클릭. 항렬자가 잇슴.

 

질의자의 집안,

고조부_님의 함자, 증조부_님의 함자, 조부(할아버지)_님의 함자, 부친 함자, 질의자 이름자.를 쭉 쓴후.

http://www.drjeong.net/ => 뿌리탐구 => 항렬표 에서, 이름자가 잇나 봄.

 

예) 이것은 예로, 집안과 대조해 봄.  

<봉해군파(蓬海君派)

세(世)

29

30

31

32

33

34

항렬자(行列字)

○煥환

圭규○

○鉉현

淵연○

○植식

熙희○

세(世)

35

36

37

38

 

 

항렬자(行列字)

○載재

鎔용○

○淳순

 

 

- 예) 고조부이름자= 정일환 - 증조부이름자 정일규 -조부=정일현 - 부친=정연일 -질의자=정일식

        이러면 질의자= 33세 항렬 =32대손 -이렇다는 것임.

 

* 질의자의 윗대분중, 이림자를 알수잇는 분의 이름자를 봄

정00_라고 한다면, => 성씨를 제외,

컴자판"CTRL+F"를 누르고,이름자 중간자를 넣어 검색해봄. (또는 이름자의 마지막자)

잇다한다면, 예)봉해군파 29世 항렬자에 이름자의 중간자가 잇다 한다면,

그다음분(조부_이름자로 검색시, 부친의 이름자) 이름자가 다음항렬자30世 에 잇나봄.

항렬자가 다를시,"CTRL+F"_상의 다음을 눌러, 계속찾아봄.

- 이런씩으로 다검색하여, 집안의 항렬자(돌림자)와, 맞는 계파의 항렬자가 잇나 봄.

- 다행이 잇다 한다면, 잇다는 파가 질의자가 속한 파고, 질의자가 속한 세에서 -1 하면, 대손이 됨.

 

질의자 집안의 항렬자가 없다 한다면, 몇분이 항렬자 미사용일수도 잇고,

표시안한 파벌의 항렬자 일수도 잇으니,

대종중홈피http://www.dongraejung.co.kr/에, 질의자집안 항렬자가 잇나 문의.

 

*-*

제말이 이해가 안가면, 질의자_나이가 어릴것이니,

부친과 함께보면, 부친이 알려줄것임.

 

대종중홈피http://www.dongraejung.co.kr/ => 동래세보 => 세보보기.

세보보기 = 족보를 볼수잇다는 것인데.

역시 회원만 볼수잇슴.

 

현재, 남한에 동래정씨는 약1만몇천명이 잇는듯 한데.(남한-대한민국에 잇는, 동래정씨 인구수가 적음)

집안에 족보가 없다 하여도, "대종중에 문의하면, 선대확인은 쉬울듯(-인구수가 적은 관계로)".

저 족보는(세보보기), 아마 계파를 떠나, 동래정씨는 다 입보(기록)된 족보인 대동보 일듯함.

대종중 홈피에 가입하고, 문의할것이 잇으면 여쭈어 보고,

저"세보보기"에서, 족보를 한번 보는 것도 좋을듯 합니다.

-집안에 족보가 잇다한다면, 굳이 볼필요는 없을것이지만,

  족보책작가 없으면, 한번 보는것도 좋을수 잇지요.

200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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