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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공하고 싶습니다
yma1**** 조회수 11,989 작성일2008.11.24

저는 저의 인생을 성공 하고 싶습니다 몇가지 성공하는 비결이나. 방법 좀알려주십시오

 

간단하게 말입니다. 정말 전 부모님께 효도 하고 살아 야 해서요 공부하는게 효도다 등.. 거짓말 마십시오

 

부모님 좋은옷 등.. 입혀드릴겁니다 제가 많이 버는한 많이 사드릴겁니다..

 

공부 도좋지만 다른방법으로도 성공하는 방법좀 알려주십시오 구체적으로말입니다 ㅜ

 

여러분의 지식을좀 나눠주세요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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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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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처치(Mega Church)의 배태와 성장 ……………………… 신 광 은ㆍ박 삼 종 (2008.04.14)

 

 

 

. 메가 처치는 세속과 맞물려 탄생

 

메가 처치(Mega Church)는 문화적 교회다. 문화적 교회라고 해서 문화가 꽃피는 교회라는 뜻이 아니다. 세상 문화를 교회가 적극적으로 수용한 교회라는 뜻이다. 교회가 수용한 세상 문화란 무엇인가? 메가 처치는 우선적으로 근대 문화(modern culture)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교회다. 특히 메가 처치는 근대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적극적 수용을 통해서 탄생할 수 있었다. 아울러 포스트모더니티 역시 과감하게 수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메가 처치는 '카니발'이나 '바보제'와 같은 '축제로서의 예배 기능'(암 6:4-6, 사 5:12, 출 32:6, 고전 10:7)을 적극 개발하고 또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메가 처치 현상은 사회문화적 조류와 흐름을 교회가 적극 수용함으로써 생겨난 교회다.

 

메가 처치가 문화적 교회요, 메가 처치 현상이 세속적인 조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 그것은 메가 처치 현상에 대한 통속적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메가 처치를 가리켜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한 결과'요, '하나님께서 넘치는 축복을 부으신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메가 처치는 성령님의 역사나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이기에 앞서 교회가 세상의 흐름과 세속적 조류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생겨나게 된 결과다. 따라서 메가 처치는 태생적으로 세속적인 교회다.

 

1) 대중의 출현

 

그렇다면 교회가 받아들인 세속적 흐름이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 번째는 '대중'(mass)의 출현이다. 오르테가 가제트에 의하면 대략 19세기경에 갑작스럽게 대중이 출현했다고 한다. 1800년대까지 유럽 인구는 1억 8000만 명을 넘은 적이 없다. 그런데 1800년부터 1차대 전까지 유럽 인구는 갑작스럽게 4억 6000만 명으로 성장한다. 거의 3배나 증가한 셈이다. 전 세계 인구는 1800년까지 6억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100년 사이 세계 인구는 16억으로 성장하고, 다시 100년이 지나면서 60억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급속한 인구 증가가 만들어 낸 한 가지 중요한 현상은 '양'과 '수'로 승부하는 거대한 무리들, 곧 '대중'(mass)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대중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텅 빈 자리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곳곳마다 사람들로 그득하다. 시각적인 거대한 무리, 몹(mob)이 온 세상 구석구석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리에도 사람들이 가득하고, 기차역이나 오페라홀·식당·백화점·공원 등에 사람들이 넘쳐 나기 시작했다. 마치 대접에 물이 넘치듯 모든 곳은 갑자기 대중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대중의 위력, 곧 '숫자'가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대중은 자신들의 무기인 '숫자'로 자신들의 생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1820년대 파리에서 욕실 딸린 주택은 단 10채밖에 안 되었지만 대중은 주장하기를 "모두가 이런 주택을 소유할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했다. 모두가 소비하고 소유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를 막는 어떠한 제한이나 장벽도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이전까지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生)의 제한(limitation)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나 대중은 이를 거부했다. 생의 제한은 급속하게 제거되었으며, 무한대의 소비·소유·향유의 욕망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의 권리 주장으로 말미암아 근대 세계의 '거대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대중의 분출하는 욕망 덕분에 모든 것이 커졌다. 백화점·식당·극장·역·공원 등 이 모든 것은 '똑같이 누리는 권리'를 가진 대중들을 위해 커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대중을 위해서 백화점도 커지고, 극장도 커졌으며, 상품은 대량생산되었고, 도시는 폭발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감히 대중의 요구를 내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교회도 바로 이 대중을 받아들여 커졌다. 이것이 메가 처치다. 따라서 메가 처치는 대중 교회(mass church)다.

 

2) 도시화

 

두 번째로 지적할 것은 도시화(urbanization)다. 과거에도 도시는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전혀 새로운 도시가 나타났다. 이것을 근대 도시라고 한다. 근대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주로 산업화와 함께 일어난 현상이다. 그러자 도시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 팽창이 너무도 갑작스러워 이를 '도시 폭발'(urban sprawl)이라고 부른다. 과거의 도시와는 다르게 근대 도시는 성곽과 같이 도시의 크기를 제한하는 경계선이 없다. 도시는 무한히 확장가능한 공간이 되었다. 인구 1000만 명 이상이 사는 초거대도시, 메트로폴리스가 출현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메트로폴리스끼리 결합되는 메가로폴리스 시대가 왔다. 이처럼 도시는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계속해서 도시로 몰려오고 있다. 이것이 근대 도시의 특징이다.

 

근대 도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도시가 사람들이 사는 일반적인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18세기까지 도시란 극히 예외적인 공간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도시지역에 살았다. 1800년대 이전까지 전 세계의 도시 인구는 10%를 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19세기 말, 5만 명 이상의 도시는 서울과 부산, 단 2곳뿐이었으며, 대부분의 도시는 1만 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전 세계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으며, 선진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경우 도시 인구는 80%에 육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이와 같은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어서 종 내에 전 세계 모든 인구는 도시에만 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미 오늘날 농촌은 자급 능력을 상실했으며, 식량 공장으로 도시에 편입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미 사람이 사는 모든 곳은 도시로 뒤덮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가 처치는 바로 이 근대 도시에 세워진 교회다. 도시가 없다면 메가 처치도 없다. 메가 처치 현상은 근대 도시가 만들어 낸 현상이다. 메가 처치는 근대 도시의 여러 특성들을 적극 수용했다. 그래서 메가 처치는 완벽하게 도시에 적응된 교회다. 그리고 더 나아가 메가 처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도시다. 모든 메가 처치는 자기만의 작은 도시를 꿈꾼다. 메가 처치의 모든 조직·구조·활동은 도시의 축소판이다. 그래서 메가 처치는 도시성(cityness)으로 충만하다. 도회적인 흥분·자극·세련미·추상성 등이 메가 처치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아니다. 초대 교회도 도시에 있었으나 그들은 철저히 반도시적이었다. 어쨌든 메가 처치는 도시성을 적극 수용한 도시 교회(city church)다.

 

3) 테크놀로지

 

세 번째로 주목할 것은 테크놀로지의 발전이다. 테크놀로지가 없다면 메가 처치도 없다. 메가 처치는 성장의 한계(growth limitation)가 없는 교회인데, 이는 성장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도록 하는 가공할 만한 테크놀로지의 발달 덕분이다. 가령 교통의 발전이 이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고, 이동의 자유가 성장의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서울 모 교회 장로는 제주도에 사시는데 매 주 비행기로 예배에 출석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케이스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메가 처치 교인들도 교회버스, 승용차,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교회가 어느 곳에 있든지 자유롭게 이동하여 교회에 출석할 수 있다. 메가 처치는 마음껏 이동의 자유를 즐기는 점퍼(jumper)들의 교회다.

 

목사의 설교를 어느 곳으로나 전송할 수 있는 전자 테크놀로지의 발전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목사는 더 이상 멀리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설교를 듣게 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다. 마이크를 쓰면 되고, 소리가 작으면 볼륨만 조금 키우면 된다. 너무 멀어져서 목사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TV화면을 통해서 목사의 얼굴을 소리와 함께 전송하면 된다. 메가 처치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초대형 스크린은 목사의 얼굴을 얼마든 크게 키울 수 있다. 그래서 수만 명이 운집하는 돔형 실내 체육관에서도 천정에 매달린 4면 대형 스크린으로 얼마든지 목사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자 테크놀로지는 메가 처치를 본당 중심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메가 처치는 본당을 넘어선 교회다. 부속실로 전자 신호를 송출하여 본당 밖에서도 얼마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위성 송출을 통해서 전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집에서 편안히 클릭 한 번으로 인터넷 화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교회의 전자결제 계좌로 헌금을 송금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쯤 되면 메가 처치의 외곽 경계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메가 처치는 규모 때문에 불가피하게 테크놀로지를 필요로 한다. 규모가 작으면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존도가 낮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테크놀로지 의존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메가 처치는 테크놀로지 의존적인 교회다. 부속실에서 TV화면으로 예배를 보는데, 갑자기 음향시스템이 문제가 생겨서 소리는 안 들리고, 그림만 보이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이런 경우 예배는 엉망이 되고 제대로 드려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메가 처치가 얼마나 테크놀로지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이다. 그러니 메가 처치는 실상 테크노 처치(techno church)인 셈이다.

 

테크놀로지란 단순히 기계장치나 장비가 아니다. 테크놀로지란 자크 엘룰(Jacques Ellul)에 의하면 '목표하는 바를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하는 방법들의 총화'다. 이런 점에서 테크놀로지는 정신의 문제요, 태도의 문제며 나아가 그 자체가 하나의 영성(spirituality)이다. 메가 처치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전부 테크놀로지다. 행정기술, 조직기술, 경영기술 등 무진장한 테크놀로지가 교회를 유지·관리·성장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선전(propaganda) 테크놀로지다. 세속적인 광고 기법, 심리학적 발견, 통계조사 방법 등을 도입한 설교·교육·예배는 테크놀로지의 위대한 개가다. 테크놀로지를 소유한 메가 처치는 마음먹은 대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울거나 웃게 할 수 있다. 초단위, 분단위로 계획된 큐시트로 컨트롤되는 메가 처치의 예배는 원하는 시점에, 목표하는 만큼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도 있게 되었다. 아마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시점에 78%의 청중을 울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테크놀로지의 능력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착각한다. 메가 처치 안에는 테크놀로지의 영이 운행하고 있다. 참으로 메가 처치는 테크노 처치다.

 

4) 시장 경제의 출현

 

메가 처치의 출현이 가능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자본주의가 출현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18~19세기에 서양에서 출현한 매우 특이한 경제 시스템이다. 자본주의의 여러 특징이 있겠지만 본 논의와 연관해서는 자본주의가 시장 경제 시스템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시장 경제의 원리는 단순하다. 판매자가 상품을 시장에 내다팔면 소비자가 시장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 이것이 시장 경제의 원리다. 사실 이것은 그다지 새로운 원리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팔고, 사고하는 시장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 출현한 시장(market)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라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시장이다(최소투자로 최대이익 창출을 위해 오염ㆍ재해ㆍ복지 등의 사회적비용은 외부 사회와 국가와 개인에게 전가).

 

시장 경제란 바로 이 자본과 시장의 자율성을 신뢰하는 경제 시스템이다(신 자유주의 FTA : 대자본의 자유로운 무역에 관한 협정). 과거의 자본과 시장은 독립적일 수가 없었다. 과거 시장의 질서는 왕이나 국가와 같은 수없이 많은 외부 세력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간섭과 제재를 받아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자본과 시장은 전적으로 자율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시장의 질서는 왕이나 국가가 아니라 시장 자체가 스스로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어졌다. 시장에 맡겨 두면 시장이 알아서 질서를 세우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시장에는 여러 판매자가 물건을 내다 팔고, 또 여러 소비자가 물건을 사려고 할 것인데, 이들의 판매 경쟁과 소비 경쟁이 저절로 합리적인 가격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방임해 둔다면 시장은 판매와 소비, 공급과 수요가 맞물려서 알아서 잘 굴러갈 것이라는 믿음, 더 나아가 이것이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개입한 것이라는 믿음이 19세기에 출현한 시장의 특징이다(부작용 : 독점ㆍ과점 대자본의 횡포). 이 시장 경제의 원리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중요한 원리다.

 

놀랍게도 메가 처치는 이 시장의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메가 처치는 시장 상황(market situation)에서만 세워질 수 있다. 시장 상황이 도래했다. 오늘날 교회는 시장에 내몰리고 있다. 그리고 교회와 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판매하도록, 그리고 그 신앙을 구매하도록 설득당하고 있다. 그래서 마치 여러 판매자들이 상품을 시장에 내다 놓으면, 소비자들이 쇼윈도 안의 상품을 원하는 가격에 구매하듯이, 교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판매하고 또 구매하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찾아 이 채널 저 채널 재빨리 이동하는 채널 하퍼(channel hopper)처럼 손쉽게 기독교 시장에서 구매 상품인 교회를 옮기는 처치 하퍼(church hopper)족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과거에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에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교회가 신자를 선택했지, 신자가 교회를 선택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는 시장에 나와 있는 여러 교회들 중 자신이 원하는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메가 처치는 시장에서 판매 경쟁에 성공한 교회며, 소형 교회는 판매 실적이 부진한 교회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가 크든 작든 모든 교회는 종교 시장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자유경쟁 시장의 원리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결국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모든 교회는 마켓 처치(market church)다.

 

 

. 교회 크기에 목매게 된 역사 (1)

 

본 연재글의 중요한 전제 중 하나는 메가 처치 현상이 2000년 기독교 역사상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메가 처치는 20세기의 산물이며, 그 현상은 대단히 최근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메가 처치의 뿌리는 상당히 옛날까지 뻗어 올라가 있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교회는 ‘크기’에 눈을 뜨고,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메가 처치를 가능케 한 교회 내부의 동인이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교회가 크기에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추적해보고자 한다.

 

1. 규모에 대한 무관심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야만인들의 개종이 있은 후, 1000년이 넘도록 교회는 교회의 규모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기본적으로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것이었기에 교회의 규모가 역동적으로 증가하는 현상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별히 초대 교회 때부터 시행한 것으로 보이는 교구제 덕분에 개교회가 갑작스럽게 비범한 성장을 보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또 많은 목회자들은 숫자나 규모의 지나친 관심을 세속적 허영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대체로 규모는 진리에 비해서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2. 18세기 대부흥운동: 규모에 눈을 뜨다

 

그러다가 18세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대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18세기 영국과 미국을 강타한 1차 대부흥, 혹은 1차 대각성 때 교회는 점차 ‘규모’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여러 가지의 개혁과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숫자’와 ‘규모’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영국 국교회 내에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두게 했다.

 

메마른 설교와 교리 교육, 형식적인 예배에 지쳐 깊은 영적인 잠에 빠져 있던 대다수 교인들이 어스킨(Erskine) 형제로부터 시작하여, 휫필드(Whitefield), 웨슬리 형제(Westley)로 이어지는 위대한 부흥설교가들의 설교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이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교회당은 이들을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최초로 야외에서 집회를 열게 된다. 한번 상상해보라.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와서 야외에서 집회를 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하늘로부터 무한한 성령의 은혜의 소낙비가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아직까지 이런 역사는 한 번도 없었다. 놀라운 흥분과 감격이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교회는 처음으로 숫자와 규모에 눈을 뜨게 된다.

 

3. 조지 휫필드의 착각: 규모를 하나님의 역사로 혼돈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로 꼽히는 휫필드의 미국 사역은 그야말로 전설적이다. 회의주의자인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마저 그의 설교를 듣고는 고아원을 위해서 전액을 헌금하고 말았다니 말이다. 프랭클린이 참석했던 집회에 모였던 청중의 숫자는 자그마치 3만 명이나 되었다. 규모면에서 1차 대각성운동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을 꼽으라면 휫필드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휫필드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숫자와 규모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와 신념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 때문에 그는 ‘숫자’와 ‘규모’에 유별나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동원하고 또 자신의 집회에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한 기술적 방법을 적극 개발했다. 이안 머레이나 마이클 호튼 같은 이들은 참 부흥(revival)이 거짓된 부흥주의(revivalism)로 타락하게 된 것은 알미니우스의 신학 때문이라고 하지만 최초로 숫자를 통한 부흥을 추구했던 휫필드는 칼빈주의자였다. 신학적으로 휫필드는 인간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를 강조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복음전도의 ‘효과’(effect)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던 첫 번째 대표주자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주로 야외에서 이동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 교회로 사람들을 모이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람들 가운데로 찾아 들어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구도자 중심의 집회’를 한 것이다. 그는 집회를 열기 며칠 전에 스태프들을 미리 보내서 장소를 확보하고, 전단지를 돌리고, 분위기를 조성하며, 신문 광고, 설교문 배포, 풍문 조성 등을 통해 휫필드 집회에 기대심을 높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휫필드의 영웅적 면모는 각별히 부각되었다. 전형적인 스타 시스템이 작동되었던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휫필드는 집회와 예배에 광고와 선전을 활용했다.

 

집회의 방식도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동시대의 인물, 조나단 에드워즈가 설교했던 방식은 이미 쓰인 설교문을 설교단에서 읽는 원고설교였다.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반응은 에드워즈의 관심의 초점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선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휫필드는 달랐다. 그는 배우 출신으로서, 자신의 말과 억양·얼굴표정·몸짓을 적절하게 연출할 줄 알았다. 거대한 군중 앞에서 원고 없이 즉석으로 자유설교를 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ex tempore) 설교할 수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들고, 발을 구르고, 성서의 이야기를 몸으로 극화하고, 큰 소리로 우는 등 온 몸으로 설교했다. 또 그는 사람들의 양심을 향해 직접 공격했으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상스러운 말까지 내뱉었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연출력 때문에 그가 ‘메소포타미아’라는 말만해도 사람들은 울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휫필드가 ‘숫자’와 ‘규모’를 늘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휫필드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집회 참석 인원의 숫자를 뻥튀기하기도 했다. 휫필드가 이렇게 ‘규모’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선한 목적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고자 했던 그의 모습에서 오늘날의 모든 메가 처치의 목사들의 원형을 발견한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사역했던 대중 운동가다. 대중을 마음대로 요리할 줄 알았던 휫필드는 근대 거인주의의 시조로서, 카리스마적 종교 지도자의 모범이요, 미국 대통령 리더십의 원천이다.

 

4. 노천 캠프 집회와 시장 상황의 개막

 

휫필드와 웨슬리의 야외 집회는 무엇보다 교구제의 파괴를 가져왔다. 야외 집회를 소개받았을 때 웨슬리는 처음에 주저했으나 ‘영혼 구령’이라는 지상 과제 앞에서 결국 마지못해 수용하고 만다. 그리고 웨슬리는 말했다. “전 세계가 나의 교구다!” 이제 기성 교회가 임의로 잘라 놓은 교구는 새 시대에 새롭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너져야 하는 낡은 장벽이었다. 교회의 질서는 새로운 운동에 의해서 새롭게 재편되어야 했다. 이때부터 교구제는 급속히 무너져갔다.

 

미국의 부흥운동가들은 노골적으로 견고한 교구제를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19세기 이후 미국에서 노천 캠프 집회는 상당히 대중화되었는데, 캠프 집회가 교회당이 아니라 야외에서 열렸기 때문에 부흥운동은 기존의 지역교회 구도를 벗어나 있었다. 캠프 집회에는 불신자뿐만 아니라 기존 신자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부흥사들은 이들의 마음을 도둑질했다. 솔직히, 신자들이 볼 때에도 기존 교회 목사들은 교구제의 보호 아래 안일하고 나태하며 영적으로 무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에 반해 부흥운동가들은 뜨겁고 능력이 충만하며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만 들고 전진하는 하나님의 참 종처럼 보였던 것이다. 때문에 집회에 참석했던 신자들은 참 지도자를 찾아 교회를 옮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소위 ‘수평 이동 현상’이 이때 이미 발생한다.

 

대다수 부흥사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더욱 조장했다. 그들은 기존 교회 목사들을 비판하며, 회심조차 체험하지 못한 목사를 과감히 떠나라고 했다. 은혜가 없고 메마르고 능력이 없는 목사를 떠나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부흥설교가들에게로 가라고 신자들을 종용했다. 그리하여 부흥운동이 진행되면서 부흥운동에 소극적이었던 회중교회·성공회·장로교는 교세가 추락하고, 운동을 주도했던 감리교와 침례교는 급성장했다.

 

이로써 바야흐로 능력과 실력 위주의 목회 시장이 열린 것이다. 부흥운동은 새로운 교단을 출현케 했으며, 수많은 기존 교회와 교단을 갈가리 쪼개 놓았다. 교단이 많아지면서 신자들의 교회 선택의 폭은 점점 더 넓어졌다. 선택권은 점차 교회에서 신자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바야흐로 시장 상황이 열리고 있었다. 부흥사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시장 상황 속에서 신자들은 점차 고객이 되어가고, 교회는 기업이 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5. 챨스 피니의 새로운 방법

 

1) 새로운 방법(new measure)

 

19세기 2차 대각성운동을 주도했던 챨스 피니(Charles G. Finney)는 교회가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획기적이고도 정교한 방법론까지 교회에 제공했다. 그가 제시한 방법을 ‘새로운 방법’(new measure)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방법이란 부흥을 이루는 방법을 말한다. 부흥이란 크고 놀라운 역사로서 규모가 비범하게 크다는 것이 핵심이다. 죄인들의 회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회심이 ‘많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부흥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은 언제든지 적절한 수단과 방법만으로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피니의 부흥론의 핵심이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죄인을 회심시키기 위한 부흥의 방법이 새로운 방법인데, 새로운 방법은 무엇보다 대중 집회가 필수적이다. 큰 교회 건물이 없으면 시청이나 학교 강당을 찾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노천 캠프 집회를 열었다. 이곳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한 다음,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즉시’ 회개하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을 위해서 피니는 최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들을 동원하였는데, 환풍기를 조절하고, 음악을 신중하게 활용했으며, 그 외에도 예배의 순서를 갑자기 바꾸기, 예배를 연장하기, 거칠고 통속적인 말을 사용하기, 기도와 설교에서 개인의 이름을 거명하기, 예배 시 설교단에서 가까운 사람에게 질문하기 등이 그 예다.

 

무엇보다 피니는 집회의 효과를 구체적인 척도로 측정하고 싶어 했다. 그는 그 전부터 회심할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했던 ‘제단 초청’(altar call) 방식을 적절히 변형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구도 좌석’이다. 집회가 끝날 때쯤 피니는 회심할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맨 앞에 비워둔 의자, 곧 구도 좌석에 앉게 했는데, 이것으로 그는 회심자의 숫자를 계산할 수 있었고, 집회의 효과를 숫자로 측정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이제 집회의 목표는 구도 좌석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수의 사람들을 앉히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는 강렬하고 응시하는 듯하며 짜릿한 느낌을 주는, 미친 듯한 예언자의 눈으로 청중들을 노려보며, 그들의 이름까지 호명하며 회개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지금 즉시!” 회심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소리쳤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고 협박했다. 청중들 사이사이에 앉은 회개를 돕는 스태프들은 죄인들이 결단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그들이 결단하고자 일어설 때 즉시 그들을 구도 좌석으로 인도했다. 이러한 방식은 직업적 부흥사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어떤 목사는 시계를 꺼내들고 “15분 안에 회개하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2) 오직 부흥으로

 

피니에 와서 부흥은 이제 절대적인 것이 된다. 부흥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 피니의 주장이었다. 피니는 자주 신자들에게 이렇게 위협하곤 했다. “지금 당신이 그를 돕는다면 그가 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그를 돕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지옥불에 떨어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 영혼의 피 값을 누구에게 찾겠는가?”

 

수많은 영혼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구하는 것, 이로써 거두어지는 부흥, 이것이 모든 것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말하는 부흥이 ‘숫자’와 ‘규모’의 동의어나 마찬가지라는 데 있었다. 결국 그는 숫자와 규모가 전부라고 말한 셈이었다. 이로써 피니는 오늘날의 메가 처치를 향한 속도제한 없는 고속도로를 닦아 놓았다.

 

3) 부흥 테크놀로지

 

“부흥을 일으키고 싶어도 안 되는걸 어떡하냐?”라고 피니에게 묻는다면, 아마도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이 부흥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아니면 부흥을 원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피니는 최초로 방법만 올바르면 결과는 자동으로 얻을 수 있다는 테크놀로지의 원리를 복음 전도에 적용한 사람이다. 피니의 부흥론은 사실 테크놀로지다.

 

피니에 의하면 신앙이나 회심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일’이다. 그리고 부흥은 ‘기적’이 아니라 정확한 ‘과학’이다. 부흥이란 ‘자연의 힘을 옳게 사용’하면 언제나 나타나는 그 무엇이다.

 

그는 말한다. “부흥은 결코 기적도 아니며 또 기적에 의존한 것도 아니다. 부흥은 당면한 수단을 옳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 농사 수단을 제대로 활용하기만 하면 농부는 풍작을 거둘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방법이 옳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피니는 이렇게 말했다.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한다.” 부흥만 이루면 과정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오늘날 대다수 메가 처치 목사들의 전형적인 목회철학이다.

 

4) 표지로서의 부흥

 

부흥이 만일 과학이고 테크놀로지라고 하면 이제 누구라도 부흥을 이룰 수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그 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자나 교회가 문제라는 말이 된다. 마음만 먹으면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데도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회나 신자가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자나 교회가 병들었거나 죽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흥은 신자나 교회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표지가 된다. 부흥을 일으키는 신자나 교회는 건강하지만,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신자나 교회는 병들었거나 죽었다. 부흥은 신자나 교회, 특히 목사의 책임이다. 부흥을 일으킬 줄 모르는 목사는 무지하거나 나태한 목사다. 피니와 함께 부흥, 곧 규모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6. 무디와 이벤트의 시작

 

19세기 말, 또 한 명의 위대한 복음전도자가 나타났다. 드와이트 무디(Moody)다. 무디는 소박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층민 출신으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수십만 명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 쓰임을 받았다. 무디는 새로운 복음주의자의 모습을 창조했는데, 그것은 ‘오직 열정만으로’ 영혼 살리는 일에 올인(All-in)하는 전도자의 모습이다. 무디의 영향을 받은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영혼 살리는 그 한 가지 일에 자신의 전 인생을 기꺼이 헌신했다.

무디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신학이 약했고 지식이나 논리도 부족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열정’이 있었다. 그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소박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했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열정만 있으면 되고, 지식이나 학문은 필요 없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 신학과 현대 과학을 불신앙으로 비난했으며,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verbal inspiration, 문자지상주의)과 같은 근본주의 신앙에만 헌신하도록 촉구했다. 오직 열정만 강조하는 무디와 함께 사고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의 무리가 점차 만들어졌다(부작용 : 교회란 뭔지.. 이 땅의 하나님 나라가 뭔지.. 믿음이 뭔지.. 이런 기본개념의 부재로 예배당을 교회로 착각한 채, 봉사ㆍ헌신을 교회건물에게 드린 눈먼 믿음을 신실한 신앙으로 왜곡).

 

무디의 열정주의는 더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음 전도를 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그는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면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는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기도 했다. 이것은 정확히 피니의 정신과 일치한다. 그러나 무디는 피니보다 훨씬 덜 지성적이고, 대신에 더 감성적이라는 점이 달랐다. 피니처럼 무디에게도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용납되었다. 이렇게 해서 무디식 이벤트 전도 집회가 탄생한다.

 

무디는 논란이 많은 피니식 ‘구도 좌석’은 활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심한 영혼들을 초청하는 방식을 버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훨씬 더 정교하고 세련된 이벤트로 만들었다. 무디는 호통을 치거나 꾸짖는 대신 솔직하고 소박하게 자신을 내보이며,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메시지가 끝나면 모두 조용히 기도하게 했다. 그러면 파이프 오르간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기 시작한다. 음악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잠시 뒤 집회 전문 가수인 아이라 생키(Ira Sankey)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가사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라, 지치고 상한 자여, 집으로 오라.”

 

생키의 노래할 때 잘 준비된 백 코러스가 중간 중간 화음을 넣어준다. 속삭이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코러스는 “집으로 돌아로라, 오라, 오! 집으로 오라”를 반복한다. 집회장은 숙연해지고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회심자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면 스태프들은 그들을 준비된 장소로 인도한다. 이러한 무디의 전도 집회는 정확히 오늘날 메가 처치의 이벤트성 집회의 원형이다.

 

7. 빌리 그래함과 테크노 복음주의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부흥설교자 빌리 그래함은 LA의 천막 집회에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도 휫필드 이후의 복음주의자의 계보를 잇는다. 그는 선조들의 복음주의적 전통을 20세기의 테크놀로지와 잘 버무려 테크노 복음주의(Techno Evangelism)를 완성한 사람이다. 애초에 3주를 계획했다가 극적인 성공으로 9주까지 연장된 천막 집회에 빌리 그래함은 연예인, 스포츠 스타, 회심한 조직 폭력배 등을 게스트로 참석시켜 대중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이후 빌리 그래함의 전도 집회는 사상 유래가 없는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피니의 3만 명 집회도 1974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던 엑스폴로 74대회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주최 측은 이때 158만 명이 모였다고 발표했다. 물론 이러한 대형 집회가 가능한 것은 전자 테크놀로지 덕분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대중 매체의 위력을 잘 알고 그것을 적극 활용한 미디어 복음주의자다. 그는 <하나님과의 평화>, <불타는 세계> 등의 베스트셀러를 저술했으며, <크리스차니티 투데이>, <결단> 등의 잡지를 창간하여 영향력을 배가했다. 또 ‘결단의 시간’ 등과 같은 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인도해서 전 세계 2500만 명에게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또 영화를 제작하고, TV에 출연했으며, 다양한 영상물을 사역에 적극 활용했다. 그는 위성중계를 통해 전 세계 수억 명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빌리 그래함과 함께 모든 ‘규모의 장벽’이 무너지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어디서나 복음전도자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기독교 하이퍼 리얼리티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의 방법과 기술은 모든 메가 처치의 모범이 되었다.

 

 

. 교회 크기에 목매게 된 역사 (2)

 

메가처치 현상을 비판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최근에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로 세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옥성호 형제나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를 쓴 마이클 호튼, 또 <신학실종>, <윤리실종> 등의 ‘실종’ 시리즈를 쓴 데이빗 웰즈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교회의 크기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큰 교회의 일부 잘못된 면들만 비판함으로써 메가처치 현상을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 한 가지, 이들의 공통점은 메가처치의 그릇된 현상이 몇몇 사람들의 신학적 오류 때문에 생겼다고 보며 그들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지목당한 ‘희생양(?)’으로는 알미니우스, 찰스 피니, 빌리 선데이 등이며, 또 여기에 몇몇 교회성장학자나 세속적 심리학, 마케팅 기법 등도 이 목록에 단골로 올라가는 이름들이다. 이들 몇몇 사람들의 실수 때문에 오늘날 이 모든 끔찍한 문제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가처치 현상은 그들만의 잘못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대표자일 뿐이다. 메가처치 현상의 뿌리는 앞글에서 보았던 것처럼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의 노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순수한 동기, 뜨거운 열심,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름대로 선한 싸움을 싸웠지만, 이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엉뚱한 부산물(by-product)과 부작용(side-effect)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것들끼리 이리저리 결합해서 ‘괴물’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메가처치 현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가 규모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역사를 조금 더 추적해 보자.

 

1. 세계선교운동과 지상 명령 이데올로기

 

얼핏 보면 메가처치 현상과 세계선교운동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18세기 이후 개신교의 세계선교운동은 놀랍게도 메가처치 현상으로 나아가는 물꼬를 터 주었다. 세계선교운동은 심정적으로 선뜻 인정하기 싫지만 1, 2차 대부흥운동에서 메가처치 현상으로 나아가는 교량이며, 긴 우회로다. 그러니까 1, 2차 대부흥 운동 때 규모에 눈을 뜬 교회는 세계선교운동이라는 긴 우회로를 따라 메가처치 현상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가. ‘지상명령’ 이데올로기

 

첫째로, 세계선교운동은 ‘지상명령’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지상명령이란 ‘땅 위(地上)’의 명령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극히 높은 최고의(至上)’ 명령이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신자와 교회가 올인(all-in)해야 하는 최고 명령이라는 뜻이다. 1, 2차 대각성운동가들은 “영혼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뒤 세계선교운동가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게 된다. 미묘한 강조점의 변화가 생겼다. 이 주장에 따르면 선교 명령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명령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과제들은 전부 부차적인 것이며, 그것들이 선교 명령을 도울 경우에만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상명령 이데올로기다.

 

선교명령을 지상명령이라고 할 만한 근거가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취약하다. 성서는 최고의 명령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 사실 교회의 역사에서 선교 명령을 신자와 교회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으로 여겨졌던 적도 별로 없었다. 벌써 2-3세기 이후부터 교회는 선교명령이 벌써 성취되었다고 보기 시작했다. 루터와 칼빈만 하더라도 선교 명령은 1세기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으로서 이미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교회는 선교 명령을 미완의 과제요, 더 나아가 지상 최고의 과업이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도와 선교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 그리하여 점차 선교 및 전도 운동은 ‘대약진 운동’이나 ‘천리마 운동’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신자와 교회는 앵무새처럼 이렇게 읊조린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야 한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자, 나가서 복음을 전하자. 전도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오자. 강권하여 주의 집을 채우자.”

 

나. 목표의 구체화

 

둘째로, 세계선교운동은 교회와 신자가 올인(all-in)해야 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제공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나 ‘전도나 선교를 하는 것’ 등은 구체적인 목표라고 할 수 없다. 세계선교운동은 교회가 조금만 노력하면 금새 성취할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를 적절히 제공했다. 그것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땅 끝’이 바로 구체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사실 땅 끝이란 성경에도 나오는 용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시대마다 다르게 이해되었다. 한 때 땅 끝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 혹은 바다 끝 낭떠러지를 뜻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바울에게 땅 끝은 스페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증기선과 증기기차가 상용화된 19세기의 사람들에게 땅 끝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따라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매우 구체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그러자 엄청난 효과가 나타났다. 신자와 교회가 여기에 올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고로 목표는 구체적이어야 하는 법이다.

 

드와이트 무디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이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하자(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 무디의 이 구호에는 바로 자신의 세대에 복음화가 가능하다는 놀라운 자신감과 뚜렷한 목표의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자신감과 목표의식이 유럽과 미국의 청년들을 선교에 올인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학생자원 선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일어났다. 이후 선교명령은 점차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즉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면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고, 역사를 종결시키며, 천국을 끌어내리는 종말론적 과업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 교회가 앉아만 있겠는가? 이 위대한 과업의 이름은 ‘세계 복음화’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서기 2000년까지 세계 복음화를 달성하자는 ‘AD2000 운동(AD2000 &Beyond Movement),’ 복음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자는 ‘백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미완의 과업을 완수하자는 ‘과업완수운동(FTT: Finishing the Task)’ 등은 무디를 이은 ‘세계 복음화 운동’의 후예들이다. 전 세계 교회는 세계를 복음화하자는 구체적인 목표 아래 하나가 되었다. 1910년 에딘버러 세계 선교 대회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대회는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세계 복음화’라고 하는 단일 목표 아래 연합하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제 전 세계 교회는 오로지 전도와 선교에 올인하게 되었다.

 

다. 테크놀로지의 적극적 활용

 

세계선교운동이 제공한 또 하나의 유산은 바로 테크놀로지의 적극적 활용이다. 테크놀로지란 단순히 기계, 전기, 통신, 방송 등의 테크놀로지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테크놀로지란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세계관이며, 사물과 사람을 대하는 새로운 자세와 태도요, 그리고 새로운 사유방식을 말한다. 테크놀로지란 ‘설정된 목표를 성취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의 활용’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테크놀로지가 20세기 이후의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 냈다. 세계선교운동도 이 기술적 세계관에 물들게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세계선교운동이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자 이제 전 세계 교회는 목표 성취를 위한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는 데 전념하게 된다. 그리하여 20세기에 선교 전략의 폭발이 일어났다. 사실 수단과 방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현대 선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의무라고까지 했다. 이 내용이 ‘현대 선교 헌장’의 골자다. 웨슬리, 휫필드, 피니, 무디 등도 같은 관점이었다. 목표 성취를 위한 수단과 방법의 적극적 활용은 19세기를 감리교도(Methodist)의 세기로, 20세기를 방법론자(Methodologist)의 세기로 만들었다. 온갖 종류의 선교전략이 만들어졌다. 10/40창, 미전도 종족 입양 운동, 관문도시 선교 전략, 전문인 선교 전략 등 군사 용어를 방불케 하는 온갖 용어와 전략 등이 난무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테크놀로지가 선교 영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들이 메가처치 현상의 예비적 조건을 형성하게 된다.

 

테크놀로지는 기본적으로 목표 달성의 수단과 연관이 되어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첫째, 목표는 달성 가능한 것이라야 한다. 따라서 목표는 절대로 추상적이어서는 안 되며, 구체적이고 가시적이라야 한다. 따라서 전략의 기본 중의 기본은 ‘성취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은 제거하고 보이는 것만 골라내는 것이 목표 설정의 기술이다. 둘째로 목표는 집중되어야 한다. 단 하나의 목표만 세워야지 이것저것 여러 개의 목표를 세우면 안 된다. 셋째로 설정된 목표 이외의 나머지 목표는 배제하고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목표가 세워지면 이제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잠깐! 그에 앞서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목표가 달성되었는지 못했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측정도구가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수학과 통계학,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점차 전도와 선교는 과학이자 테크놀로지로 둔갑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메가처치 현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2.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과 교회성장학의 탄생

 

메가처치 현상이 일어난 경위는 대략 이렇다. 먼저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그에 영향을 받아 세계선교운동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 세계선교운동에서 교회성장학이 발생하고, 이것이 지역교회에 접목되면서 메가처치 현상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도날드 맥가브란이라는 사람이 중요한데, 그는 세계선교운동의 귀한(?) 성과를 교회에 연결(link)시켜준 사람이다.

 

맥가브란은 인도 다모(Damoh)에서 인도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인도에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 그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왜 어떤 지역의 교회는 성장하고, 어떤 지역의 교회는 성장하지 않는가? 혹시 여기에 어떤 원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고민 끝에 그는 교회 성장의 원리를 정리하여 1950년대 ‘교회성장학’이라는 기이한 학문을 창시하게 된다.

 

가. 새로운 목표, 교회성장

 

도널드 맥가브란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세계선교운동과 복음주의권 교회에 전혀 새로운 ‘목표’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 성장(church growth)’이다. 대각성 운동가들의 목표는 ‘영혼 구령’이었고, 초기 선교 운동가들의 목표는 ‘선교 명령의 순종’이었으며, 20세기 선교 운동가들의 목표는 ‘세계 복음화’였다. 그러던 것이 맥가브란에 와서는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은 맥가브란이 세계 복음화라는 목표 달성 여부를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측정 방법을 ‘교회 성장’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 복음화가 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전략, 전술, 인원, 재정을 쏟아 붓더라도 종국에는 교회가 성장하지 않으면 그 모든 수고는 헛것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그는 전도의 목적을 ‘회심’이 아니라 ‘제자화’라고 천명했다. 무슨 말이냐면, 전도와 영혼구원만으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결국 ‘불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꾸준히 출석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뜻이다. 선교 전략은 교회 성장에 맞추어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맥가브란과 함께 지상명령은 ‘교회 성장 명령’으로 바뀌게 된다.

 

나. 교회 크기에 대한 노골적 강조

 

지상 명령이 교회 성장이라면 이제 교회 성장은 거역할 수 없는 주님의 명령이 된다. 따라서 교회 성장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지상 명령을 순종하게 못하게 만드는 사탄의 훼방이다. 그가 쓴 <교회 성장의 이해>에는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저항하고 있는 신학자들과 일선 교회 목회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는 교회 성장을 복합적 요인들의 상호작용의 산물로 보려는 자를 ‘불가지론’자라고 부르며, 그들은 “확신이 있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또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주장을 ‘탐색의 신학(theology of search)’라고 부르며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단언한다. 또 종종 교회 성장을 방해하는 전문가들을 비판하며, 그들의 신학적 변명을 반박한다.

 

맥가브란은 교회 성장을 하나님의 역사나 섭리가 아니라 노골적인 추구 대상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는 자주 세계 복음화를 수량화하는 도표와 통계수치를 인용한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수치와 그래프를 끌어 올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 성장을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과업을 ‘교회 성장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신자와 교회, 선교사들이 교회 성장을 고려하지 않고 있어서 문제라는 것이다. 교회 성장을 고려하고, 의도하고, 목표로 삼고, 추구하라고 독려한다. 그리고 신자와 교회의 모든 노력은 ‘교인 숫자의 증가’로 맞추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맥가브란과 함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전 세계 교회가 교회의 크기를 키우는 데 혈안이 되게 된 것이다.

 

다. 추수 이론(theology of harvest)의 제시

 

맥가브란은 그저 전도하는 것, 그저 선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씨만 뿌려서는 안 된다. 추수를 해야 한다. 결국 관건은 추수다. 추수를 위해서 씨를 뿌려야 한다. 맥가브란과 함께 강조점이 옮겨졌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들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한다. 이제 관심사는 씨에서 밭으로 옮겨졌다.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중들이다. 전도와 선교는 말씀 중심에서 구도자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전도와 선교가 구도자 중심으로 바뀌면서 중요한 방법론이 등장했다. 동질 집단의 원리가 그 한 예이다. 똑같은 복음이라도 같은 민족, 같은 문화권 사람들끼리 더 잘 전달된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씨 중심’에서 ‘밭 중심’으로의 강조점의 이동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똑같은 복음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맥가브란은 관심 없는 사람들의 ‘비추수지역’보다는 기왕이면 관심자들이 있는 ‘추수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 무조건 뿌리지 말고 싹이 날 곳을 잘 살펴보고 뿌리라는 것이다. 맥가브란과 함께 역사상 최초로 교회는 목 좋은 자리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3. 피터 드러커의 경영의 지배와 새로운 교회성장학

 

1970년을 지나면서 경영 혁명이 일어났다. 이것은 경영(management)이라는 활동이 더 이상 영리적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영역으로 확산된 것을 말한다. 피터 드러커는 이를 ‘경영의 지배’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2차 대전 이후 점차 병원, 대학, 정부, NGO 단체 등 비영리 단체에서도 광범위하게 경영 기법을 활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야흐로 경영이 인간 활동 전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교회도 속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말대로 1970년을 전후로 교회도 세속적 경영 기법을 적극 활용한다. 이와 함께 교회성장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곧 경영 테크놀로지와 마케팅 기법을 적극 도입한 교회성장학이 탄생한 것이다.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은 선교 전략의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경영 기법을 받아들인 교회성장학은 개교회의 성장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결국 개교회, 곧 개별 단체가 경영 기법을 활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터 드러커의 비영리 단체의 경영의 원리에 의하면 교회는 먼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사명’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다음 사명을 성취 가능한 ‘목표’로 전환시켜야 한다. 성취 가능한 목표가 수립되면 이를 위한 마케팅, 경영 혁신, 자원의 효율적 안배와 활용 등의 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 전략 실행과 그에 따른 성과 측정, 평가가 뒤따른다. 그리고 그에 맞는 인사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수행할 수 있는 리더가 세워져야 한다. 이상의 모든 세속의 지혜가 교회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4.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와 교회성장학의 범람

 

맥가브란이 ‘교회 성장’을 처음 말했고, 70년대 경영 혁명이 일어난 다음, 피터 와그너와 함께 새로운 교회성장학이 출현하게 된다. 어찌 보면 진정한 교회성장학이 탄생했다고 할 수도 있다. 피터 와그너를 비롯한 여러 교회성장학자들은 70년대 이후 각종 세미나 개최, 대학교에서의 강의, 책 출판, 잡지 발간, 집회 개최 등을 통해서 전 세계에 자신들의 신념과 방법론을 널리 확산시켰다.

 

가. 지역교회의 성장에 대한 강조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은 선교 전략의 차원이 강했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사례들은 주로 어느 국가나 지역에서의 개신교회나 가톨릭 교회, 성공회의 인구수, 보다 세부적으로는 루터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등의 교파와 교단의 성장 사례들이 많았다. 그러나 피터 와그너가 관심을 가지는 교회 성장은 대부분 개별 교회의 성장 사례들이다. 가령 그는 코랄 릿지 장로교회, 레드우드 교회, 덴버에 있는 제일 나사렛 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의 가든 그로브 크리스탈 교회 등의 교회의 성장에 주목한다.

 

이러한 개교회 중심의 성장 이론이 등장하게 된 것은 50-60년대의 두 가지 전도 전략에 대한 비판 때문이기도 했다. 첫 번째는 빌리 그래함의 십자군 전도 운동이다. 1948년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전통적인 노천 캠프 부흥 집회를 극대화한 형태였다. 이 운동은 어느 한 지역이나 도시를 복음으로 초토화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또 하나는 남미의 케네스 스트라챤의 침투전도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빌리 그래함과 같은 어느 한 사람의 영웅적 전도자가 아니라 전 교인이 모두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전도 운동이었다. 그래서 전교인이 전도지를 들고 축호전도를 하거나 총동원 전도주일날 불신자를 대거 끌어와서 복음을 전하자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 두 운동은 모두 다음의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그래서 효과가 있었는가?” 물론 이 효과라는 것은 개교회의 세례/침례 신자 숫자의 증가였다. 긴 우회로를 거쳐 마침내 개교회의 수적 증가는 모든 전도 및 선교 운동의 최종 평가 기준이 된 것이다.

 

나. 자동적 성장의 강조

 

피터 와그너와 교회성장학파의 한결같은 주장 중 하나는 “성장은 자동적이다”는 것이다. 찰스 피니가 부흥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요, 과학이라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교회성장학자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종종 생명체의 비유를 든다. 모든 생명체는 저절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제 성장은 더 이상 추구해야 하는 목표도 아니게 되었다. 건강한 교회라면 저절로 성장이 이루어 질 테니 말이다. 반대로 교회가 성장하지 않거나 혹은 감소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병들었거나 죽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교회성장학파의 이러한 자동적 성장 이론은 성장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목회자와 교인을 죄인 취급하게 만든다. 교회성장학자들에 따르면 그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부정적이고, 고집 세고, 불충하며, 불성실한 자들이다. 또 그들은 지상 최고의 명령인 전도와 선교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자들이요,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목자들이라고 비판한다. 이들의 고집이 교회의 자동적 성장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 성장은 신자와 목회자의 당연한 의무요, 건강한 교회라면 저절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자동적 과정이 되었다.

 

다. 교회 성장 클리닉 테크놀로지

 

만일 몸에 병이 났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와 똑같은 논리가 교회에 적용되었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거나 침체한다. 이것은 교회가 병들었다는 말이다. 병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치료해야 한다. 그렇다면 병든 교회는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가? 성장 클리닉을 받아야 한다. 이제 교회성장학은 병든 교회를 치료하는 클리닉 과정이 된다. 그리고 교회성장학은 엉뚱한 약속을 한다. 클리닉을 받아라. 교회가 커질 것이다. 컨설팅을 받아라. 그러면 교회가 성장할 것이다.

 

교회성장학은 일관된 주장이나 고정된 형태가 없다. 다만 한 가지 공통된 주장을 한다. “교회는 성장해야 하고, 성장할 수 있다.” 수단이나 방법은 나중 문제다. 뭐든 교회가 성장하면 훌륭한 전략이다. 피터 드러커의 <비영리 단체의 경영>은 교회성장학자들에게는 제5의 복음서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효과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효과를 보장하는 모든 방법들이 동원 가능하다. 가령 구체적인 목표 인원의 설정, 불신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의 강조, 대집회와 소그룹의 두 날개 이론, 성령 운동, 치유 집회, 스타 시스템, 브랜드 마케팅, 프랜차이즈 등... 뭐든 효과만 있으면, 뭐든 교회만 커지면 무조건 오케이다!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 도리어 이러한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다. 윌리엄 캐리는 불신자의 회심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라고 하지 않았던가?

 

5.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와 통속적 교회 성장 상술

 

이제 드디어 로버트 슐러가 등장한다! 사실 그동안 교회성장학은 너무 이론적이고, 너무 어려웠다. 누군가 교회 성장에 대해서 쉽게 번역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데 로버트 슐러가 등장한 것이다. 수많은 교회성장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슐러의 강점은 그가 이론가가 아니라 실천가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은 교수지만 슐러는 직접 목회를 하는 목회자다. 여기에서 슐러의 권위가 있다.

 

가. 야망의 정당화

 

로버트 슐러는 노먼 빈센트 필을 따라 ‘적극적 사고’ 혹은 ‘긍정적 사고’를 강조했다. 쉽게 이야기하면 ‘야망을 품으라’는 뜻이다. 슐러는 윌리엄 캐리가 말했던 ‘위대한 하나님의 일(Great Thing)’을 ‘교회를 키우는 사람의 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교회를 키우는 것이 위대한 일이 되었다. 그의 교회성장학이란 한 마디로, ‘교회를 키워라, 그것도 엄청 크게 키워라’이다. 이것을 위해서 목사는 무조건 크게 생각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큰 일은 크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그래야 기적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모든 생각은 부정적인 생각이다. 부정적 생각은 물리쳐야 한다. 목사들이여, 웅장한 교회당, 화려한 시설, 엄청난 재정, 거대한 군중을 꿈꾸라! 그는 목사들을 독려한다. 결국 슐러는 노골적으로 목사의 야망과 탐욕을 정당화했다.

 

나. 판매 상술의 정당화

 

슐러는 교회를 기업으로, 전도와 선교를 판매로, 불신자를 고객으로 비유하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놀라울 지경이다. 그는 성공을 위한 7가지 원리에 대해서 조언하면서 교단과 신학교는 도매상인으로, 지역교회는 소매상인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다. “성공적인 종교적 소매의 비결을 더 잘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장사를 잘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장사를 잘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다음의 7가지를 조언을 한다.

 

먼저 목 좋은 곳을 선택하라. 맥가브란식으로 말하면 비추수지를 피하고 추수지를 선택하라는 말이다. 농어촌이나 산간 벽지, 오지는 피해야 한다. 신도시나 아파트 밀집지역이 목회의 최적지다. 둘째, 주차장을 확보하라. 셋째, 상품목록을 구비하라. 여기서 상품이란 목회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이다. 즐비한 목회 상품을 잘 갖추라는 말이다. 넷째, 서비스를 제공하라. 다섯째, 외형을 강조하라. 안내원들도 기왕이면 미스코리아를 세워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한국의 어느 교회 목사도 비슷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지만 인간은 외모를 본다.” 여섯째, 온 교인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사고하도록 만들라. 누군가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입 닥치게 하라. 그리고 일곱째, 경악할 만한 내용이다. 현금 유통을 잘 하라! 무슨 말이냐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은행빚을 끌어다 쓰라는 말이다. 현금이 돌아야 사업을 잘 할 것이 아닌가! 바야흐로 메가처치 현상이 도래했다.

 

메가처치 현상은 절대로 일부 대형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은 교회라고 예외는 없다. 메가처치 현상은 지금 온 세계를 지배하고 점령하고 있는 거대한 현상이다. 메가처치 현상은 바로 우리가 다니는 교회 안에서 버젓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참으로 뻔뻔스럽고 가증스러운 배교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마치 그 옛날 모세 시절에 이스라엘이 ‘야훼’라는 이름의 금송아지를 숭배했던 것처럼, 마치 에스겔 시대에 제사장과 백성들이 성전 마당에서 성전을 등지고 태양신을 숭배했던 것처럼, 그리고 마치 예수 시대에 장사치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바꾸었던 것처럼.. 서지 못할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고 말았다. 이 가증한 것은 바로 ‘숫자’요, ‘규모’요, ‘힘’이요, 그리고 ‘바알’이다.

 

메가처치 현상과 함께 참으로 기이한 크리스천들이 등장했다. 그것은 ‘사랑할 줄 모르는 크리스천’이다. 사랑할 줄 모르는 크리스천은 짖지 못하는 개요, 독 없는 독사요, 앙꼬 없는 찐빵이요, 물 없는 오아시스다(말씀을 모르는 맹신자). 그런데 교회의 변명을 들어보라. 신자와 교회는 불신자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전도와 선교를 하면서 “전도가 당신들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우긴다. 그래도 안 되면 일부 교회가 시행하는 사회사업을 예로 든다. 그래도 교회는 사랑을 많이 실천하고 있다고. 그러나 전도나 사회사업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랑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함께 함’의 사랑이요, ‘자신을 전부 내어줌’의 사랑이요, ‘대신 죽음’의 사랑이다. 도대체 지구상의 어디 교회에 이런 사랑이 있는가? 그런데도 교회는 오늘도 온 천지를 다니며 교인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영혼구원이 최고요, 선교명령이 지상명령이라고 주장하며, 억지 전도로 교회를 키우려는 교회를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 대형 교회 현상에 대한 비관적 고찰

 

오늘날 교회의 문제들을 지적하는 많은 선지자들(?)이 있다. 하지만 대형 교회를 문제 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들 이렇게 말한다. 대형 교회가 문제가 아니라 목사들의 인간적인 야망과 욕심이 문제라는 것이다.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문제라는 것이다. 교회가 바알주의·맘몬주의·성장주의·영웅주의·세속주의·엘리트주의 등등, 이런 것들에 물들어서 문제지 대형 교회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교회의 크고, 작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도리어 교회가 크면 복음 전파나 사회사업 등에서 힘 있고 효과적으로 사역을 할 수 있는 장점도 많다는 말도 덧붙인다. 물론 교회가 커지다보면 몇 가지 문제점들이 생기긴 한다. 하지만 그래도 교회의 규모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형 교회 현상은 그리 간단히 말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이 현상은 교회의 무능력·부패와 타락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대형 교회가 현대 기독교의 모든 잘못의 원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대형 교회 현상은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의 세속주의·부패·타락 등의 모든 문제 한 복판에 존재하고 있다. 교회의 무능력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대형 교회가 생겼으며, 다시 대형 교회는 그러한 교회의 무능력과 부패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분명히 대형 교회는 교회의 침체 과정에서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신랄하게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대형 교회에 대해서만큼은 조용하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러니 교회개혁이니 갱신이니 말들은 무성하지만 정작 가장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는 간과한 채 변죽만 울리고 있다.

 

대형 교회 현상은 현대 교회에 주어진 도전이요, 과제다. 각 시대마다 주어진 신학적, 신앙적 과제들이 있다. 가령 사도시대에는 유대주의의 도전이 있었고, 1~3세기에는 영지주의와 여러 이단들의 도전이 있었으며, 로마 제국의 핍박이라는 도전이 있었다. 4세기 이후의 교회는 콘스탄틴주의의 도전을 받았으며, 16세기에는 교회의 타락과 맞서 싸워야 했고, 19세기에는 현대주의라는 도전이 있었다. 또 20세기 중반부터는 탈현대주의라는 이름의 도전과 맞서 교회는 분투하고 있다. 이처럼 각 시대마다 도전과 과제가 다른데, 21세기 초두의 한국교회에게 주어진 과제는 다름 아닌 대형 교회 현상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교회의 크기, 곧 규모의 문제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

 

대형 교회라는 새로운 현상

 

대형 교회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먼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대형 교회가 2000년 교회의 역사 가운데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전에도 상당한 규모의 중대형 교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이런 종류의 대형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혹 일부 신학자나 목회자가 초대 교회나 기타 시대의 교회에서 대형 교회의 전범을 찾으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시도다. 이것은 오늘날의 상식이나 관점·생각을 옛날에다 뒤집어 씌워서 바라보는 행태다. 대형 교회 현상은 드물게나마 역사상 존재해 왔던 현상이 아니라 20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대형 교회는 전혀 새로운 교회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새롭다는 것인가?

 

과거의 교회와 20세기 이후의 대형 교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성장의 한계’(Growth Limitation)다. 과거의 교회는 아무리 성장해도 어쩔 수 없는 ‘성장의 한계’가 존재했다. 그리고 이 성장의 한계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함께 작동함으로 정해졌다. 가령 교구의 크기는 교회 성장의 절대적 한계 중 하나였다. 500명이 사는 마을에 세워진 교회는 절대로 500명을 넘지 못했으며, 대도시의 교구의 경우도 교회의 크기는 그 교구의 크기를 넘지 못했다는 말이다. 설령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또 교회의 성장의 한계를 정하는 더 근본적인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적 능력의 한계였다. 가령 예배당은 목사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 또 설교자의 음성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를 넘기가 어려웠다.

 

19세기의 기술혁명이 이러한 인간 신체 능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기까지 대형 교회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 외에도 기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상호작용함으로써 교회는 어쩔 수 없는 성장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성장의 한계는 사라졌다. 하나의 지역 교회(local church)가 성장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어떠한 한계나 장애물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론상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지역 교회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 우리가 대형 교회 현상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단순히 수만 명이 넘는 몇몇 초대형 교회만을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다. 대형 교회 현상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현상이다. 왜냐? 오늘날 모든 교회는 무한한 성장이 가능한 상황(situation) 가운데 있으며, 또 무한한 성장을 가능한 조건(condition)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수단(means)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큰 교회, 작은 교회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교회는 무한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무한 성장을 향한 모든 교회의 추구와 이 거대한 흐름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대형 교회 현상이다.

 

오늘날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는 ‘무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다 가지고 있다. 우리가 방문했던 우리나라의 수십, 수백여 개의 교회들 중에서 성장의 한계를 말하는 교회는 단 한 교회도 없었다. 정말이다! 성장이 잘 안 된다고 말하는 교회는 많았다.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교회는 더 많았다. 그러나 교회가 어디까지만 성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교회는 단 한 교회도 없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모든 교회는 ‘무한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교회성장학적 전제를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복음의 능력이라면, 성령의 역사라면, 구령의 충만한 열정이라면, 지역 교회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교회 성장학자들은 교회성장의 한계를 마귀의 역사라고까지 말한다. 이제 성장의 한계는 돌파하고, 극복해야 하는 표적이다. 물론 모든 교회가 노골적으로 무한 성장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대부분의 교회들은 성장만 말하고, 성장의 한계는 말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성장은 말하되, 성장의 한계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가 사실상 무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다.

 

성장의 한계를 말하지 않는다면 무한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전 세계 50대 교회 중 23개가 한국에 있다. 세계 10대 교회 중 5개가 한국에 있는 교회다. 세계 최대의 교회도 한국에 있고,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 세계 최대의 감리교회도 다 한국에 있는 교회다. 한 교회의 숫자가 대전시 전체 인구의 절반이 되는 교회도 있다. 참으로 이러한 현상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한 번도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대형 교회 현상을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한 과제로 보는 이유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과제다. 교회성장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교회가 교회의 규모 자체를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인 주된 논의 과제로 삼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이 일을 해야 한다. 교회의 규모 자체를 중요한 신학적 논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시급하고도 심각하게 논의하고 토론해야 하는 신학적 주제는 기독론이나 삼위일체론,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 이요(교회란, 사람이냐 건물이냐, 돌과 콘크리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냐), 교회론 중에서도 교회의 사이즈, 곧 규모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에서 바로 이 대형 교회 현상만큼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문제도 없기 때문이다.

 

논의의 장으로 초대하며

 

대형 교회 현상은 누군가가 의도해서 만들어진 현상이 아니다. 목회자들은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이 기이한 현상이 점점 우리 눈앞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 현상은 누군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비난할 성질의 것도 못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악한 의도로 만든 일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가 다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옳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대형 교회 현상이 누군가 악한 의도와 불순한 영으로 교회 안에 유포시킨 그런 현상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이 현상에 대해서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

 

과연 이 일이 옳은가, 그른가? 성서적으로 합당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부합되는가? 이것이 바울이 말했던 영적 전쟁의 실상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세상 주관자들과 어둠의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대형 교회 현상에 대해서 가져야 할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려운 점이 있다. 대형 교회 현상은 2000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현상을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회의 전통이나 신학적 이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 아직 배움이 없다.

 

66권 신구약 전체 성서도,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사도들도, 오리겐이나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도, 프란시스나 도미니크 같은 수사들도,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웨슬리나 에드워드 같은 부흥운동가들도 대형 교회 현상에 대해서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 현상을 도외시할 수 없다.

 

대형 교회 현상을 무조건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요, 성령의 역사하심의 결실이라고만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기만성·유혹 등의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보자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메가처치, 시장과 자본의 논리 ………………………………………………………… 신 광 은 (2008.04.25)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사로잡힌 교회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크리스천들만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기업'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린 아이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박사라도 보지 못 한다. 그것은 교회가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델센의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는 동화가 아니라 실화다. 오늘날 교회는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오늘날 교회는 신약시대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1층에 장로교, 2층에 감리교, 3층에 침례교, 그리고 지하는 나이트클럽. 백화점 바겐세일과 같은 총동원 전도, 교인 뺏기 경쟁, 집짓기 경쟁. 도대체 어디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할 것이며, 도대체 어디서 로마 제국을 굴복시킨 신약교회와 초대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교회는 벌거벗었다. 이 사실을 남들은 다 아는데 교회만 모른다.

 

교회가 벌거벗은 모습 중 하나는 오늘날 교회가 자본주의의 질서에 편입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앞글에서 논의한 대중의 출현, 도시화, 테크놀로지의 발전, 시장의 발생 등과 같은 세속적인 현상들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현상의 결과로 교회가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종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자본주의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메가 처치는 교회 안에 자본주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다. 메가 처치는 교회의 자본주의화가 낳은 열매다. 여기서 잠깐 교회 안에서 작동 중인 자본주의의 논리를 분석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자.

 

1) 고객의 탄생

 

고객이 탄생했다. 시장 상황에서 오늘날 구도자들은 고객으로 존재한다. 고객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구도자는 자신들의 삶을 전적으로 새롭게 바꿀 생명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은 다만 일용품으로서의 종교에 관심이 있다. 일용품 종교란 무엇인가? 파스칼이 말한 대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지옥의 불행을 피할 수 있는 ‘보험증서’를 말한다(천국보험). 또 일용품 종교란 한 주간의 긴장된 삶을 잠시 이완시켜 줄 ‘기분전환’을 말하며, 바라는 바를 ‘빌 대상’을 말하며, 자신감으로 충전시켜 줄 ‘격려자’를 말하며, 자신의 삶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자기 성찰’을 말한다(은혜의 수단). 그리고 마음이 동하면 몇 푼의 헌금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제 사업’을 말한다. 오늘날 구도자는 이곳저곳 교회를 전전하며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일용품 종교를 구매하고 다닌다. 고객이 탄생한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교회에 고객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 고객이 출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피터 버거식으로 말하자면, 과거에 신앙은 운명적인 것이었다. 초대 교회는 교회 입문에 참된 제자도의 열매를 요구했기에, 또 중세 교회는 기독교 제국의 지배력을 행사했기에 선택권은 교인이 아니라 교회에게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신앙이란 처음에는 지역별로, 더 나아가 도시, 개인별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물론 이 시발(始發)은 교회의 분열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신교냐, 구교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시 신교는 독일 루터냐, 프랑스 위그노냐, 영국 성공회냐, 화란 개혁주의냐, 스코틀랜드 장로교냐, 재침례교냐, 그냥 침례교냐, 퀘이커냐 등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 채 사람들은 보다 자유로운 선택권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신대륙으로의 이주를 촉발시켰다.

 

때문에 미국은 처음부터 자유의 나라였으며, 그리하여 선택의 나라였다. 수정헌법 1조는 미국이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임을 명시하고 있다. 미국에서 모든 교단이나 교파들은 철저한 자유 경쟁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은 교회나 교단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점점 더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유럽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신앙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 혹은 ‘사상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자유권은 하늘이 부여한 인권 중 가장 중요한 권리로 정당화되었다. 유럽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신생국가 미국은 새로운 하나님, 곧 ‘자유의 여신’을 숭배하기에 이른다.

 

자유권, 곧 자유로운 선택권은 19~20세기를 지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것은 대중의 지위 향상과 관계가 있다. 19~20세기에 시민권의 확대를 위한 지속적인 투쟁이 있었으며, 이와 함께 민주주의는 꾸준히 발전하였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은 동등한 참정권, 특히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래서 이제 대중은 ‘표밭’이 되었다. 대중에게 권력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은 또한 각 개인을 ‘소비주체’로 승격시켰다.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곧 돈이 모인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이제 숫자는 힘이 되었다. 강력한 힘을 소유하게 된 대중은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숫자의 힘’을 주장하게 되었다. 대중은 여론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대중 독재가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대중은 교회의 최고 고객이 되었다.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교회의 분열이 자유를 확대했고, 자유의 확대는 다시 교회의 분열을 더욱 촉진시켰다. 마음에 안 맞으면 그냥 갈라서 버렸다. 교회의 분열은 분파주의와 이단의 폭발을 초래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신종 이단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밀러라이트·몰몬교·안식교·크리스천사이언스·여호와증인 등 피터 버거의 말대로 바야흐로 ‘이단의 시대’다. 하지만 누가 이들을 막을쏘냐? 무슨 권리로 신앙의 자유권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같은 현상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 6·25를 전후하여 교회를 가르는 붐이 일어났다. 조금만 의견불일치가 생기면 그냥 찢어버렸다. 신사참배 문제로 장로교에서 고신파가 떨어져나갔다. WCC 가입 문제로 통합과 합동이 나뉘고, 합동은 다시 교단의 전횡에 반대하여 개혁교단이 떨어져나갔다.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로 기독교 장로회가 예수교 장로회로부터 또 떨어져나갔다. ‘예수’와 ‘그리스도’가 갈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행이 되었다. 감리교도 기감과 예감이, 성결교도 기성과 예성이 갈라졌고, 침례교는 이단 때문이기는 하지만 역시 기침에서 예침이 떨어져 나왔다. 순복음교회도 갈라졌다. 교회 분리는 이단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황국주·박태선·문선명·나운몽 등에 의해 수많은 이단들이 만들어졌으며, 이것은 지금도 구원파·안산홍·신천지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교회의 분리가 교회의 성장을 낳았다는 것이다. 교회가 갈라지면 맨 먼저 신학교를 세우고, 목회자들을 양산하여 내보내면, 목회자들은 목숨을 걸고 교회를 세우고 사역을 하니 교회가 성장할 밖에…. 1960~70년대 유래가 없는 엄청난 한국교회의 부흥은 그리스도의 몸을 갈가리 찢어 얻은 대가였다.

 

그러나 교회의 핵분열로 말미암는 신학교의 난립과 목회자의 대량양산은 점차 교단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교단이 개교회에 일일이 책임 있는 지원을 해주지 못하게 된 것과도 연관이 있고, 또 교단 하나를 갈라 세우는 것이 밥 먹는 것만큼이나 쉬우니 그만큼 교단의 치리 권능이 약화된 것과도 연관이 있으며, 교회들이 점점 더 치열한 생존 경쟁을 겪게 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완벽한 시장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교단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이제 교회는 순전히 시장 상황 한 복판에 ‘개교회’로 내동댕이쳐지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의 ‘개교회주의’의 모습이다. 바야흐로 교회의 무한분열의 종착점에 도달한 것이다.

 

교회의 이러한 무한분열은 고객에게 그만큼 넓은 선택의 폭을 제공하게 되었다. 교단이나 교파, 신학이나 전통은 아무래도 좋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의 자유인가? 이 얼마나 풍성한 선택의 기회인가? 사실 이러한 선택의 폭은 기독교 안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전 종교에게로 확장되고 있다. 모든 교회와 교파, 그리고 모든 사상과 종교는 종교 시장에 자신들의 특성화된 상품을 내밀며 고객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시장 상황은 신학이나 전통은 부차적인 것이 되게 만든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판매와 구매다! 신교나 구교 그리고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사상과 종교는 이러한 시장 상황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믿는다는 것은 마치 백화점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교회의 메시지도 심각하게 변화하게 되었다. 오르띠즈 목사의 말에 의하면, 현대 교회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예수님을 믿어보지 않으시겠어요?”라는 호객 행위로 뒤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변질된 메시지는 성서나 초대 교회의 메시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초대 교회는 믿고 싶다고 해도 절대로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격한 심사와 기나긴 예비자 교육을 통과하지 않고서 신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천박한 복음주의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며 면죄부를 남발하고 있다.

 

천박한 복음주의에서 구원은 자동으로 전제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구도자의 선택뿐이란다. 고객의 선택은 곧 구원 자체란다. 맙소사! 현대 교회에서 더 이상 그리스도는 왕이 아니다. 고객이 왕이다. 현대의 구도자는 물에 빠져 ‘살려달라’ 절규하는 자가 아니라, 거드름을 피우며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는 쇼핑객이며 구매자다.

 

2) 기업의 출현

 

고객의 탄생과 동시에 기업이 출현했다. 오늘날 교회는 고객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기업이다. 교회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스스로를 상품판매자로 변신시켜왔다. 메가 처치는 교회가 자신을 기업, 곧 상품판매자로 변신시킨 결과다. 사람들은 말한다. ‘교회의 변신은 무죄!’라고. 어찌하여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교회의 이 기묘한 변신을 ‘무죄’라고 판결하는가?

 

교회는 언제부터 기업이 되기 시작했을까? 교회가 기업이 되기 시작한 시점은 교회들이 경쟁하면서부터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은 역시 교회의 분리로부터 시작하였다. 정리하면, 교회가 갈라지자 경쟁하게 되고, 경쟁이 시장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시장의 관점에서 볼 때, 16세기 종교 개혁은 가톨릭의 시장 독점권을 박탈한 효과를 발생시켰다(이전의 1054년 정교회와 로마가톨릭의 분열은? 1153년 콘스탄츠 협약은?). 신교 진영와 구교 진영 간의 길고 지루한 전쟁 끝에 양측은 서로의 종교 시장을 넘보지 않기로 하는 베스트팔리아 조약을 맺는다.

 

이제 서ㆍ유럽은 신교 진영과 구교 진영으로 반토막 났다(정교회, 로마가톨릭, 프로테스탄트 유럽3등분). 그리고 신교 진영은 다시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를 전후로 가톨릭 진영이 해외 선교에 열을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가톨릭 내부의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끈 예수회의 공헌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가톨릭교회는 유럽에서 잃어버린 시장을 개신교가 미처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던 미개척지인 해외시장에서 되찾고자 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시장질서가 수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시장 상황은 북미의 신대륙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시작을 알려왔다. 메이플라워호가 뉴잉글랜드 플리머스항에 도착하기 전후로 유럽의 수많은 교회들이 신대륙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뉴암스테르담의 화란개혁교회, 델라웨어의 스웨덴 루터교, 롱 아일랜드와 뉴저지의 스코틀랜드 장로교, 버지니아지역의 성공회, 퀘벡지역의 가톨릭, 펜실베니아의 독일 경건주의 등등 초기에는 그런대로 각 교회, 교파 간의 지역주의(localism)가 잘 지켜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부흥운동, 독립전쟁의 혼란, 도시화, 서부 개척 등의 요인으로 지역주의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이는 국교가 없는 미국에서 모든 교회, 교파는 처음부터 자유 경쟁으로 자신들의 교세를 불려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계속되는 거대한 이민의 물결은 고객의 증가와 시장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발생한 복음주의는 한편으로는 영혼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촉발된 것이지만, 동시에 여러 교파들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자신들 교세의 확대를 도모하고자 하는 동기에 의해서도 불꽃이 지펴졌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교회는 ‘고객’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교회사에서 북미 신대륙의 독특한 점은 그 땅이 처음부터 선교적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1000년 가까이 국가교회를 통해서 유아세례를 시행해 왔던 유럽에서는 나면서부터 전부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선교나 복음 전도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기독교 국가다’는 식의 낭만화된 건국 신화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미국은 성인(成人)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세례·침례를 베풀어야 하는 선교적 상황의 국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적 상황은 여러 교회와 교파에게 큰 기회를 주었다. 그 기화란 곧 교세 확장과 발전의 기회였던 것이다. 다른 말로 미국은 선교 각축장이었다. 이러한 선교의 경쟁적 상황이 미국 특유의 실용주의와 결합되며 점차 교회는 ‘보다 효과적인 선교’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다.

 

효과적 선교에 대한 관심은 알미니안주의 신학의 산물이라는 통설과는 다르게, 칼빈주의나 알미니우스주의, 신교나 구교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모든 미국 교회와 종교의 공통된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효과적 선교에 대한 관심은 칼빈주의자인 죠지 휫필드의 노천 캠프 집회와 자유 설교의 전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알미니우스주의자인 찰스 피니의 ‘새로운 방법’으로 큰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피니의 이러한 방법론은 19세기 이후 교단과 교파, 신구교를 막론하고 모든 교회에서 표준적인 것으로 수용되어졌다. 찰스 피니 이후 19세기 말의 D. L. 무디, 20세기 초의 빌리 선데이, 그리고 20세기 중후반의 빌리 그래함, 21세기 릭 워렌, 빌 하이벨스 등은 이러한 효과적 선교와 전도의 새로운 방법에 대한 헌신자들의 계보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주의적 전통과 방법론은 오늘날 미국제 복음주의의 선교를 통해 전 세계 모든 교회로 퍼져나갔다.

 

효과적 선교에 대한 관심으로 고안되기 시작한 복음전도의 방법론은 교회를 급속도로 기업화시켰다. 복음주의자들의 효과에 대한 관심과 기업가들의 수익에 대한 관심은 점차 비슷한 것이 되어 갔다. 이미 1차 대각성운동 때부터 거인주의, 곧 스타 시스템이 교회에 도입이 되었으며, 이 방법은 지금도 메가 처치의 가장 효과적인 교회 성장의 방법이다. 또 이 스타 시스템은 메가 처치라는 대기업(?)에 취업을 원하는 수많은 목회지망생들에게 지속적으로 허황된 야망을 부추기는 본보기로 자리 잡고 있다. 시장 상황 속에서 교회는 자본주의의 소비자 중심주의, 고객만족의 원칙을 충실히 받아들여 갖가지 신앙 상품들을 개발하여 고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물론 이 상품들은 그 콘텐츠가 얼마나 성서적이고 복음적인지 모른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상품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매일 매일 만들어내고 있는 기발한 신앙 상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메가 처치는 그야말로 신앙 상품들로 즐비한 대형 할인마트다. 메가 처치의 성장 방법이나 경영 기법, 마케팅 기술, 선전 테크놀로지 등은 아무리 보아도 세속 기업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런 메가 처치가 소위 ‘건강한 교회’의 모델과 표준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메가 처치는 교회가 기업화된 최종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3) 자본과 시장의 논리

 

시장 상황 속에서 교회는 점점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종속하게 된다. 교회가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지배를 받고 있는 몇 가지 징후들만 살펴보자. 자본주의는 자본이 형성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는 경제시스템이다. 자본은 큰 돈(big money)이다. 쌓이지 않는 돈은 자본이 아니다. 돈이 계속 쌓여 일정량을 넘기면 자본이 된다. 바로 이 초기 자본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움직일 수 있게 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18세기까지 유럽에 거대한 자본이 축적하기 되었는데, 이렇게 잔뜩 축적된 자본이 산업혁명이라는 불꽃과 함께 웅장한 폭발음을 울리며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관차의 엔진을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기원이다.

 

축적된 초기 자본은 18세기 자본주의가 발생한 시점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 질서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모든 판매자와 기업에게도 초기 자본은 중요한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음식 솜씨만 좋다고 식당을 하는 시대는 지났다. 목 좋은 곳에 점포를 임대하고, 인테리어를 하고, 홍보를 할 정도의 최소한의 초기 자본이 없으면 장사를 할 수가 없다. 아이템만으로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반드시 초기 자본이 있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교회도 똑같은 원리에 지배를 받는다. 교회도 아이템과 자본,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한다.

 

흔히들 요즘은 교회 개척이 잘 안 되는 시기라고 한다. 왜 그럴까? 그 실상인즉 목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 말씀에 대한 열정, 영혼을 향한 사랑, 인품과 도덕적 자질이 아무리 훌륭해도 종교 시장 진입에 필요한 초기 투자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으면 아예 교회 시장에서 도태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 아닌가?(목회자의 상품화 : 계 13:16-18) 같은 맛이라면 인테리어가 잘 된 식당을 찾는 것이 고객의 취향이듯, 오늘날 교회 고객들은 겉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교회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 취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어느 개인이나 어느 교회를 탓할 일이 아니다. 그저 현실일 뿐이다. 그래서 최소한 100명 정도의 교인(특히 직업이 번듯한 어른 성도는 필수), 예배당을 세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재정, 십자가나 의자, 강대상 같은 가구 및 집기, 씬디싸이저나 피아노, 드럼 같은 악기, 주일학교·중고등부·청년부·성가대와 같은 기본적인 조직·전도 및 양육 프로그램, 거기에 더하여 설교가 괜찮은 목사 등의 기본 아이템이 갖추어져야만 그 교회는 시장 상황에서 생존할 수가 있게 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일단 이런 식으로 개척을 하게 되면 교회는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지속적인 성장’이다. 이상하게도 자본주의는 멈추어 서 있을 수 없다. 꼭 자전거 같다. 그래서 앞으로 전진하든 아니면 넘어지든 둘 중 하나다. 자본의 힘으로 시작한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다. 계속 페달을 밟아야만 굴러간다.

 

어느 교회 목사가 한 말이다. “자고로 성도를 굴려야 교회가 잘 되는 법이여.” 그렇다. 목사는 끊임없이 일을 벌여서, 성도들을 굴려야 한다(교회건물에 대한 맹신적 봉사). 그런데 사실 이것은 조직의 간단한 생리일 뿐이다. 끊임없는 행사와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적당히 동력화시켜 주어야 조직에 활력이 생긴다는 것은 경영 리더십의 기초 중 기초다(모이자 돈걷자 집짓자). 그냥 가만히 놔두면 교인들은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침체’해버린다. 이것이 시장질서 안에서의 교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피곤한 교회다. 교회력에 따른 절기뿐만 아니라 정기 심령 부흥회·사경회·총동원전도주일·바자회·선교여행·체육대회·야유회·특별새벽기도회 등이 끊임없이 계획되고 시행되어야 하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행사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착취와 수탈을 미화하고, 사실의 왜곡과 은폐를 정당화).

 

특히 ‘성전(?) 건축’이라는 기묘한 이름의 프로젝트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점점 커져가는 예배당은 교회 성장의 가시적인 징표요, 하나님나라 건설에 대한 훌륭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전건축 프로젝트는 개별 성도들의 여러 잡다한 요구와 불만들을 깡그리 청소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공통의 목표의식을 설정할 수 있다. 또 눈물겨운 헌신의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업에 현실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대단히 훌륭한 전략이다. 무엇보다 근사한 건물과 인테리어는 새신자 전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더불어 근사하고 쾌적한 공간과 감각적 인테리어, 최신식 장비까지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금상첨환가!

 

요즘 목회자들은 예수님보다 능력이 많은 모양이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하시면서 그토록 어렵게 허무신 성전을 단 돈 몇 푼으로 간단히 다시 세워버리니 말이다. 그것도 예루살렘에 한 채가 아니라, 수백, 수천 채의 성전이라니….

 

이른바 총동원 전도주일이라는 교회 성장 전략은 백화점 정기 바겐세일을 닮았다. 날짜가 정해지면, 그 다음은 교회 전체의 목표 인원수를 정하고, 교구별·구역별·개인별목표 인원이 할당된다. 각 개인은 나눠준 용지에 후보자인 VIP명단을 기입하고 전도주일 당일까지 새벽마다 기도하며, 온갖 선물 공세, 전화 공세, 식사 공세, 심지어 현금 공세까지 제공하며 예배당으로 끌어당기는 행사를 소위 총동원 전도주일이라고 한다.

 

물론 전도주일 당일이 되면 교회는 축제의 날이다(암 6:4-6, 사 5:12, 고전 10:7, 출 32:6). 화려한 장식에 적당히 들뜬 분위기, 초특급 강사, 연예인 초청, 각종 영상과 특별 프로그램, CCM 가수, 파워풀한 복음 설교, 거기에 경품까지! 이것은 보험 세일즈나 백화점 바겐세일, 신천지 등 이단의 전도수법이 훌륭하게 버무려져 있는 퓨전 스타일의 복음주의다. 교회는 이처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동원하는 수법을 가리켜 ‘영혼 구령’이니 ‘지상 명령에 대한 순종’이니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이런 저런 변명으로 합리화하려고 해도, 영락없이 기업의 판매촉진 수법과 닮았으니 이 일을 어쩌랴!

정리하면 이렇다. 교회의 분리가 경쟁 구도를 만들었고, 경쟁구도가 시장상황을 초래했다. 물론 이러한 교회의 시장상황은 대중의 출현, 도시화, 테크놀로지의 발전, 시장 자본주의의 탄생과 같이 때맞춰 조성된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들과 결합되어 더욱 큰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문제는 교회가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 대안적 공동체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교회는 마치 후천적으로 면역 결핍증에 걸린 AIDS 환자처럼 외부 환경의 독소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점차 본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장 상황에서 구도자들은 고객으로 변신했으며, 교회는 기업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러한 탈선의 종착역은 교회의 무한분열, 완전한 시장상황의 도래(신 자유주의), 자본주의 질서의 정착 등이다. 메가 처치는 교회의 이 탈선이 맺은 풍성한 열매다. (이후 대공황과 디플레이션 은?)..

 

 


 

술법이 발각된 거짓 선생들의 반응인 종교기업화.. ……………… (글 : e-GOT / 2008.11.19)

 

(말 3:13-14)

“…

너희는 나에게 무엄한 말을 하였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런데도 너희는

“저희가 당신께 무슨 무례한 말을 하였습니까?” 하고 말한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

…”

 

사람의 폐와 심장을 들여다 보시는 하나님께 들리는 그들의 마음 속 소리입니다. 하나님을 섬김이, 이 땅의 것으로 불로소득이(בּצע 베짜 ; 이익, 부당한 이득, 폭력으로 얻은 이득, (약탈하다, 획득하다, 탐욕, 벌이, 유익) 딤전 6:5) 있어야 되고.. 그렇게 장담하여 거짓 교훈했고.. 또 그렇게 되길 바랬었는데.. 그 이전의 앞 구절 말씀들에서 이미 거짓 선생들의 무지와(말 2:4-9, 말 2:10-16) 도적질과(말 3:7-9, 느 13:4-14) 말씀의 오용을(말 3:10-12, 말 3:1-6, 시 66:10-12) 통렬(痛烈)히 꾸짖으시고, 필히 개혁하실 것을 말씀하시니, 그들의 꼬인 마음 속 반응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도비야의 믿음이였던 것이지요. (처세술에 달인이요, 이교도요, 훼방꾼이요, 돈으로 예언을 사주하는 자요, 돈을 위해 교훈하는 자요, 돈을 위해 사는 자요, 지도층과 사돈되고 동맹한 자요, 제자장과 짜고 십일조을 착복하는 도둑이요...)

 

 

그리고, 그들이 서로에게 몰래 속삭여 말합니다. 하나님의 귀가 어두우신 줄 알고..

 

(말 3:15)

“…

이제 우리는 교만한 자가 옳다 하고,

또 악을 행하는 자가 번창한다 하며,

하나님을 증명(입증)할 것(의무)을 면한다 하자.<사 43:12>

…”

(사 5:18-19)

“…

불행하여라, 거짓의 끈으로 죄를 끌어당기고

수레의 줄을 당기듯 죄악을 끌어당기는 자들!

“우리가 볼 수 있게

그분께서 당신 일을 빨리 서둘러보시라지.

우리가 알 수 있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뜻이

드러나 이루어져 보라지.”라고 말하는 자들!

…”

 

기독교가 완전한 돈벌이 종교로 변질된 순간입니다.

 

(사 5:20-23)

“…

불행하여라, 좋은 것을 나쁘다 하고

나쁜 것을 좋다 하는 자들!

어둠을 빛으로 만들고

빛을 어둠으로 만드는 자들!

쓴것을 단것으로 만들고

단것을 쓴것으로 만드는 자들!

불행하여라,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들

자신을 슬기롭다 여기는 자들!

불행하여라, 술 마시는 데에는 용사들이요

독한 술을 맛내는 데에는 대장부인 자들!

뇌물 때문에 죄인을 죄없다 하고

죄없는 이들의 권리를 빼앗는 자들!

…”

 

허나, 하나님은 양과 염소를 알아 보십니다.

 

(말 3:16-18)

“…

주님이 주의를 기울여 들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을 위하여

주님 앞에서 비망록이 쓰여졌다.

그들은 나의 것이 되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나서는 날에

그들은 나의 소유가 되리라.

부모가 자기들을 섬기는 자식을 아끼듯

나도 그들을 아끼리라.

그러면 너희는 다시 의인과 악인을 가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와 섬기지 않는 자를 가릴 수 있으리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 땅 위에 개혁의 바람 휘몰아치게 하소서!

 

  교회와 예배당
    개념(槪念)부터 제대로 세우자 ……………………………………………………………………… (글 : ? 성문밖편지 中..)



교회와 예배당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 신앙의 공동체를 두고한 말이며, 예배당은 그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소를 특정 건물로 만들고, 그 장소를 신당이나 혹은 무슨 사원처럼 꾸며놓고, 그 건물 혹은 장소에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성직자를 구별해 따로 세우고, 하나님께 예물(헌금)을 바치게 함으로 그곳이(장소) 당당한 교회로 인식이 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라 하면, 일단은 건물을 교회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60년대만해도 예배장소에 예배당이라고 간판을 써붙인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때부터인가 건물에 교회란 간판을 부착한 교회들이 늘어났고, 지금은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교회라고 했을때, 건물을 교회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장소)에 나가는 사람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그 교회 교인 혹은 그 교회 성도, 그 교회 집사, 권사, 장로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성도, 즉 교회를 위해 예배당(장소)이 필요한 것이였지만, 지금은 예배당을 위해 성도(교회)가 필요한 결과가 된것입니다. 주께서 피흘려 사신 교회, 주께서 피흘려 부여하신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건물에 빼앗긴 채, 건물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오늘의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것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또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처소, 혹은 예배당과 교회를 혼동한체 열심만 갖고사는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만약, 예배당을 때려부수고, 사슬에 묶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반대하고 나설까요? 그것은 신앙심이 투철하다고 자랑삼는 소위 보수주의를 주장하는 분들이 앞장 설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됩니다. 과거 미국의 역사를 보면 그랬습니다. 흑인 노예 해방을 하자고 했을 때 가장 첨예하게 반대했던 사람들이 보수주의 미국남부교회 사람들 이였다는 사실이 증명해주고 있는것을 봐서입니다.

그래서 참 교회(사람)는 예배당을 섬기는 노예(?)가 되어,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돌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보다는 예배당(건물)을 섬기는것이 우선 되어야,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주객이 전도(主客顚倒)되었다, 고 말하는것 아닙니까? 왜 이런 현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교회당과 교회를 혼동하기 때문이랄수있고, 동시에 교회 공동체란 한계설정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현상일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일부 목사님들 중에는 그 장소를 "성전" 혹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성도들에게 인식을 시키고, 그 건물을 아름답게 건축하게 하고, 경건하게 하고, 소중하게 인식을 시켜, 교회당을 위해 아낌없이 봉사하게 만듭니다. 이와 같은 일은, 신당(神堂)에 신을 모시고 사는 이방 종교인들이 행하는 짓을, 성령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어둠의 자식들이 되게 했다는 것이 심각한 오늘의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것은 우리 자신들이 곧 교회라는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방 신은 신당에 모셔두고 신당을 찾아 섬기지만, 크리스천은 우리몸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몸을 성전이라 한것입니다.(고전 6: 19)

이 소중한 일을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고,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왜곡해서 예배당을 교회로 둔갑시키는 오류를 만들어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된것은 신당문화의 영향과 성직자(목사)들이 은연중에 자신들을 사제(司祭) 혹은 제사장이나 승려와 같은 중재자의 신분을 취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피흘려 사신바된 주의 백성(참 교회)들이 교회당이란 곳에 묶여, 목사 한 사람의 왕국을 위해서 혹은 목사기업 기능을 위해서 충성 봉사를 다해야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흑암권세의 포로들이 된것으로 봐야합니다. 교회당에 빼앗긴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들을 신자(교회)각 사람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고, 그 신분이 각 사람에게서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참 교회가 회복되는 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요, 주님의 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루터의 만인 제사장설의 주장을 한번쯤 되새겨 보면서, 오늘의 신자들의 처지를 가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중세교회를 두고, 사탄의회란 말을 했습니다. 사탄의 집단에 불과한 중세 교회를 떠나 개혁교회를 출발시켰지만, 지금의 교회상황은 중세 카톨릭보다도 더 사탄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면, 반드시 개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약시대의 성전에 관한 인식문제는 개혁의 중심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신앙이 성전이란 이름에 모아지고, 문제의 발생도 성전이란 이름에서 출발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전이라 말한것은 가시적 혹은 영적인것을 포함한 성전 전체 개념에 관한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 여기서 "성전된 자기 육체"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란것을 확인시킨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구약은 그리스도의 모형, 그림자, 비유, 등으로 설명 된것을 잘알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자기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긴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안식일, 둘째가 법궤, 셋째가 성전이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 실체는 사실 그리스도를 가르킨 모형에 불과한것들 이였습니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눅 6: 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요 1: 14 / 법궤는 말씀)
"성전된 자기 육체"(요 2: 21)

이와같이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폐기되고(성전 휘장이 갈라져 버리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으로 성전을 완성하신(다시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전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사실 교회 개혁을 말하게 된것은 땅에 다시 성전들이 등장하게 되고, 그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예수이름으로 포장된 신종 율법의 노예로 전락되어 땅의 건물(성전)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그런 교회가 없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 분들은 강단에 올라갈수 없다고, 교회법으로 정한 교단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교회들이 있을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배당은 하나님의 집(성전)이란 의식 때문이죠. 이같은 의식을 가진 분들의 생각은 그와 같은것이 가장 믿음이 좋은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혹 지금도 예배당을 신성시하거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처소나 집처럼 인식을 시키려 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 일은 하루속히 중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범죄 행위요, 하나님나라의 반역행위요, 주께서 피흘려 진리로 자유케한 백성들로 종교(성전)의 노예가 되게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행위는 그리스도의 값진 피흘리심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의 성막은 하나님의 임시 임재 처소 였다는것을 압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막을 대신해서 지어진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처소란 점에서 성전이란 말을 하게된 것입니다. 이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성취된 것이고,(요 2:21) 성전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분의 영(갈 4:6)이 오순절 성령으로 강림 하셨는데, 그 영(성령)이 임한 곳이 곧 성전이 된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어디로 임하셨는가?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요엘 선지의 말씀을 인용, "모든 육체에" 부어준 것이라 증거 함으로, 믿는자의 몸(마음)에 임한것을 말하고 있습니다.(갈 4:6)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 16) 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전은 성령이 임하신 믿는자의 각 사람의 몸이 성전이된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예배당을 지어놓고, 혹은 지으려 하면서 성전이란 말을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말하게 되면, 순진하기만한 신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게 됩니다. 이 일은,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목사 노릇을 한다 해도,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요, 주께로부터 부인(否認)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마 7:22-23) 일개 건축물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들먹이며 성전 운운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된 일이며, 수많은 영혼들을 어둠으로 이끄는데 그 사안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거짓을 가르쳐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고, 사람들을 수만명, 수십만명을 모은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는 아무런 유익이 없을뿐만 아니라, 범죄 행위가 될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대단히 거창하게 하기를 원하심이 아니요, 비록 사람들 보기엔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란 것을 분명히 인식했으면 합니다.(마 7:21, 마 25:34-40)

 

 

칼 바르트의 교회론

이신건 지음 <성광문화사. 1989, p.301>
[요약: 이 종 국]

서론

제1부: 초기의 교회이해(1913-1920년)

제2부: 변증법적 교회이해(1921-1931년)

제3부: 기독론적 교회이해(1932-1968년)

제4부: 칼 바르트와 카톨릭 교회(비교와 평가)

결론(요약과 평가)



서론

1. 바르트의 교회론의 의의

본서는 칼 바르트의 교회론을 그 결정적인 변천 속에서 기술하고 해석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의 신학은 조직적 체계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가 처한 시대적 정황 속에서 사색하는 예언자로서 분출해 놓은 외침이라고 해야 더 알맞다. 그의 교회론은 그의 신학의 기본적 통찰의 변화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또 그의 신학은 그가 처했던 시대적 정황과의 상관성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실로 바르트의 신학은 그가 자신과 세계 및 삶의 문제와 더불어 씨름한 투쟁의 소산임을 알아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단지 이론적 관시에서만이 아니라 그를 움직이고 감격시켰던 실제적인 물음에 참여하려는 관심에서 출발해야 한다.

2. 바르트의 신학의 교회성-교회의 신학성

"교의학은 자유로운 학문이 아니라 교회에 매여 있으므로써 의미있고 가능한 학문이다." 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교회야말로 신학의 실존근거이며 그 주체이다. 그는 개혁교회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며, 이러한 근본적 소여성은 가족, 학교 및 교회 속의 교육을 통하여 강화되었다. 개혁교회에서 형성된 젊은 시절의 경험이 바르트의 생애와 신학을 계속 규정지었다는 사실이다. 개혁교회의 첫 번 째 특징은 '말씀'에 대한 강조, 즉 경험적으로는 '설교의 교회'가 되고 신학적으로는'말씀의 교회'가 되려는 꾸준한 관심에 있다. 개혁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항상 개혁되어야 할 교회에 있다. 개혁이란 성서로부터 단순히 선험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교회의 상태와 성서본문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성찰의 결과로 얻어진다. "교회가 더 이상 개혁 중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곧 교회가 시련 속에 빠지고 비교회(非敎會) 속으로 추락하되 정말 구제 받을 가망 없이 빠져버린 것을 의미한다. " 바르트의 신학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꾸준한 특징은 그가 시종일관 교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신학적 실존은 '교회 안'의 신학적 실존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교회를 신랄히 비판하고 교회 파괴적인 발언을 토로한 경우에라도 항상 '교회를 위한' 신학적 실존이었다. 그의 교회론은 '위로부터' 획득되는 그러한 '신학성'에,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도론'에 종속되어 있다.

3. 본서의 개괄적 맥락(바르트의 신학과 교회론의 변천)

젊은 시절의 바르트의 신학에서는 다분히 인간중심적 사고가 지배했다. 그는 '교회'를 기독교적 경건을 도야하려는 관심에 의해 세워진, 본질적으로 교육적인 기관으로 이해했다.

제 I부에서 교회를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제 II부에서는 소위 '변증법적 신학' 시기에 나타난 바르트의 교회관이 다루어진다. 하나님의 불가시성, 피안성, 상이성. 소원성 및 은폐성, 인간과 교회에 대면해 있는 질문과 부정으로서의 하나님의 의미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불가시적·초월적인 실체로 이해되었고, 신개신교주의의 가시적 교회는 위기 속에 있다고 선언되었다. '성도들의 교제'마저도 가시적 친교가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 초월적·불가시적으로 통일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로마서 주석 제 2판이 출판된 지 얼마되지 않아 바르트에게 또 하나의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그의 신학의 척도와 동기였던 '하나님과 세계 간의 변증법적 원리' 대신에 이제 소위 '말씀의 신학'이 등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이제 그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두게 되고, 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는 교회'는 동시에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 '죄인들의 교회'로 정의된다. 바르트는 1926년부터 교회의 본질을 이전보다 더 긍정적으로 정의하여, 이를' 하나님이 설립하신 것'으로 정당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점차로 변증법적 교회관으로부터 결별하고 교회의 긍정적인 측면을 계약개념을 통하여 해명한다.

제 III부는 그리스도론적으로 규정되는 바르트의 교회관을 다룬다(1932-1968년). 제 1장은 교회관과 관련지어서 '기독교 교의학 개요'와 '교회 교의학'사이에 일어난 기본통찰을 고찰한다. 제 2장은 바르트가 독일의 제 3제국의 시절에 교회를 위해 투쟁하던 기간(1933년-1945년)에 나타난 교회관을 다룬다. 제3장에서는 '교회와 성서'의 관계에 관한 바르트의 견해가 다루어진다. 제 4장은 바르트의 '선택론' 내에서 다루어진 그의 교회관을 고찰한다. 제 5장에서 본인은 바르트의 화해론 속에서 다루어진 그의 교회관을 해명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서 그는 교회가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동 속에 정초되어 있음을 보았다.

제 IV부는 바르트의 교회론을 로마 카톨릭 교회론과 비교하고자 한다.


제I부 초기의 교회이해(1913년-1920년)

1. '거짓된 교회들'에 대한 항거

1)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

그의 지배적이고 특징적인 관심은 무엇보다도 매우 진지하게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사실에 있었다. 바르트는 베드로 수위권을 공박했다. 바르트는 교황계승에 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도 반박했다. 1913년 11월 2일데 행한 설교에서 바르트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문자의 기독교, 과거의 기독교라고 표현하고, 그것은 영의 기독교의 진정한 계승자인 종교개혁 신앙과 지금까지 대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은 다음과 같이 첨예화된다 : 그리스도가 카톨릭교인들에게 있어서는 기껏해야 제 2인자이지만,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제 1인자라고 하는 사실이다.

2) 신개신교주의에 대한 비판

세계 제 1차 대전의 발발은 바르트로 하여금 그를 심취시켰던 모든 종류의 자유주의의 경향으로부터 결별하게 만들었다. 그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존경했던 스승들이 모두 시대정신에 굴복하여 전쟁신학에 동조한 사실이었다. 로마서 주석 제1판에는 낭만주의, 이상주의, 경건주의 및 종교사회주의와도 투쟁한 그의 내면적 고심이 드러나 있고, 그 시대와 교회에로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번득거린다. 왜 교회가 궁지에 빠졌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한때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이 이젠 교회를 버리셨기 때문이다. 교회의 궁지는 그의 숙명이 아니라 잘못 때문이다. 그 잘못은 교회가 하나님께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만이 그의 사역 속에서 유일한 통치자가 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고, 그 결과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했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바르트는 괴테의 유명한 말 - "교회는 참 좋은 위(胃)를 가리고 있다." -을 인용하여 현실교회를 비판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뜻과 일을 인간의 목적에 유익하게 변형시키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안전한 길을 가려고 복음의 모든 거리끼는 요소를 제거하려는 당대의 교회,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지 않고 인간적 복리에 맞게 그의 일을 뜯어고치려는 당대의 교회,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려는 당대의 교회에 맞서서 맹렬히 항거했다.

3) 경건주의에 대한 비판

겔처에게 쓴 1917년 5월 26일의 편지에서 그는 경건주의자들을 '사탄의 교회'라고 혹평하고, 이 사탄은 이미 신약성서 안에서 결국 비틀거리고 있음을 본다고 말했다. 그의 비판은 대체로 두 가지 이유, 즉 개인주의와 기계주의에 근거를 둔 것이다.

⑴ 개인주의 : 바르트는 경건주의를 세상에 주어진 하나님의 대답으로부터 살지 않고 개인의 성취, 개인의 회심, 개인의 성화, 개인의 구원, 개인의 축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라고 보았다. 바르트는 교회를 철두철미 유기적인 관계, 살아있는 친교와 공존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경건주의의 개인주의는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⑵ 기계주의 : 여기서 '기계적'이란 말은 구원을 자신의 행동으로 스스로 이루려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유기적'인 것에 대한 반대의미로서 사용된 용어이다.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 제 1판에서 하나님과 인간 및 세계 사이의 유기적 일치관계를 특히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자력적인 구원의 노력을 기계주의라는 표현아래서 공격했다.

2.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바르트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교회를 '공동체'로 이해하고 방어하려는 데 있었다. 교권계급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 인본주의적인 신개신교주의 교회 그리고 개인주의적인 경건주의 교회에 대항하여 그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을 부각시켰고,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 사상과 '하나님의 나라'사상에 접맥시켰다.

1) 그리스도의 몸

바르트의 의하면 교회란 더 높은 뜻에 의해 형성되고 보존되는, 내적으로 필연적인 공동체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받아들여짐으로서 이 세상에서 개인의 불행한 처지로부터 건짐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실존 안으로 들어 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2)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바르트가 말하려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요 그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세상 및 인간 간의 상실된 유기적 일치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요, 지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재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출현 속에서 빛나고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교회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교회는 집, 제도 혹은 사업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의 유기체요 그 공동체이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세상의 밭에 뿌리는 사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우월성을 부숴버린다.


제II부 변증법적 교회이해(1921년-1931년)

1. 교회관과의 관련 속에서 본 1919년과 1921년 사이의 기본관점의 변화

1) 유기적-불가시적

로마서 주석 제 2판에서는 가장 분명한 차이점은 '유기적'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그대신 '불가시적'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점에 있다.

2) 역사의 종말-원역사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로서 종말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고, 새 세계는 이미 교회 안에서 시작하고 있다. 즉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서 이미 터전을 잡고 있다. 역사의 종말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사상, 차안적인 세계의 종국으로서의 종말론 이해 대신에 초시간적인 '원역사'의 개념이 바르트에게도 등장했다. 원역사는 생명 그 자체 안에 출발점을 가지고 있고, 그러기에 그것은 '생성사'이다. '계시'의 개념을 더 자세히 정의할 수 있기 위하여 원역사의 개념을 사용했다.

3) 보편주의-개인

바르트는 하나님-세계-인간의 관계를 실존적인 관계로 해석함으로써 이를 실존화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개인의 개체성은 개인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결과이다. 교회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한 몸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개체이다. 교회를 공동체로 구성하는 그리스도도 역시 한 개체이다. 그는 교회의 일치의 근거이다.

2. 로마서 주석(제 2판)교회관

1) 교회의 위기

바르트의 두 번째 '로마서 주석'은 "엄청난 폭발과 같이" 그 당시 우세하던 종교주의적·인간중심적·인본주의적 신학을 강타했다. 바르트는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위기를 선언한다. 교회는 불가피한 재앙 속에 빠져 있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대립은 무한하다. 복음과 교회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어디서나 무한하다. 복음과 교회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어디서나 무한하다. 교회가 복음의 폐기이듯이 복음도 교회의 폐기이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교회가 위기와 재앙 속에 처해 있는 이유를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입장에서 해명하였다.

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본질, 소유 및 행위의 순수한 한계이시자 순수한 시초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정 속에 계신 긍정이시며, 우리의 긍정속에 계신 부정이시고, 처음과 나중이시며, 그러한 분으로서 미지의 분이시고, 결코 우리가 아는 많은 실체들 중의 한 실체가 아니다.

⑵ 교회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

복음과 교회의 무한한 대립이 교회를 위기로 몰아 넣는다. 교회의 버림받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하려는 교회 안의 인간의 시도가 심판 받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⑶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의 의이고 결코 원하거나 달리는 인간의 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어떠한 인간의 신실에 의해 제약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의 신실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이다. 교회의 위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의, 신앙, 기적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하고 입증하며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데에 있다. 교회가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없애 버리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것이고, 경건한 인간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의롭게 하고 구원하려는 것이다. 교회의 위기와 재앙은 "교회가 진정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적대감이 드러나는 곳이고 인간의 무관심, 오해, 저항이 가장 고상하고도 가장 유치한 형태를 취하는 곳이라는 사실 속에서 밝혀진다."

2) 인간의 가능성으로서의 교회

그는 교회를 하나님의 불가능한 가능성 앞에서 최종적인 인간의 가능성을 형체화한 것으로 파악했다. 바르트는 교회와 문화를 , 교회와 종교를 혼합하여 교회를 문화와 실체로 파악하려던 신개신교주의의 교회관에 대해 불가피한 수정을 가했다.

3)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의 교회

그의 비판은 종교, 문화, 경건주의, 관념주의와 같은 인간의 가능성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잘못된 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위기와 심판을 선언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지, 교회 그 자체에 대한 부정과 파괴의 행위가 아니었다. 참된 교회는 무엇이고,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기적의 교회다.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회개한 교회,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다. 죄인들의 교회다. 은총과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 교회다. 그런데 여기서 바르트가 참된 교회라고 이해하는 야곱의 교회는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변증법적 실체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4) 성도들의 교제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은 바르트가 장소나 역사, 회원이나 모임도 없는 비역사적. 변증법적 실체인 교회, 오직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가 주어질 때에만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사건인 교회를 또 한편으로는 "성도들의 교제"라고 칭했다는 사실이다. 바르트는 인격적인 사귐을 나타내는 의미로 Communio Sanctorum을 표현한다. "교회는 사귐" 이다.

3. 로마서 주석(제 2판)과 "교회 교의학" 사이의 교회관.

1)1921년과 1923년 사이의 신학적 전환

"말씀의 신학"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성서에서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모든 인간적인 자기이해를 제한하고 규정하는, 탁월하고 새로운 것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하여 바르트의 신학의 척도와 동기였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놓는 원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2)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는 교회

"바르트가 1923년에 뤼벡에서 행한 강연 '교회와 계시'는 그가 교회의 문제를 새로이 다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근거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주관주의의 종말이며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예언의 전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르트의 강조는 그가 1925년에 행한 강연 '개혁교회의 성서원리'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교회가 계시로부터, 오직 하나님의 결단 안에서만 정초된 하나님의 자기인식에의 참여로부터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여 성서도 계시의 직접적 현재화가 될 수 없다. 계시가 다음 시대로 전달되는 것은 유출, 발전 혹은 조립의 경로 위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계시의 전달은 결코 연속이 아니라 새롭고 놀라운 기적이며, 계시 그 자체와 같이 동일하고 절대적인 의미로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바르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스스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며, 역사적 자료, 마음과 양심의 암흑 속에 있는 우리에게 오는 계시 속에서 무시간적·동시대적활동을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⑴ 교회의 권위는 시간적. 역사적. 간접적 권위이다.

⑵ 교회의 권위는 상대적 권위이다.

⑶ 교회의 권위는 형식적 권위이다.

교회에서 주어진 이러한 전권위임은 오순절의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교회의 개념'이라는 강연에서는 바르트는 교회의 권위가 하나님의 계시의 이해와 선포의 준거가 되는 사도들의 증언 위에 정초되어 있고 또 항상 거듭 정초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⑷ 죄인들의 교회

교회에 관한 본래적·본질적·내적인 진술의 하나는 '죄인'이라는 개념 속에 있다. 그는 이미 1926년에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불렀고, 1927년에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용서받은 죄인들의 중간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오직 용서 속에서만 존속할 수 있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 십자가 아래의 교회, 죄인들의 교회이다.

⑸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

"죄인들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심판 받게 됨과 더불어 계시의 은폐성 안으로 놓여진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계시와 화해의 연속, 현재화, 구체화 및 명시화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를 등장시킬 수 없고 묘사할 수 없으며 활동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구원을 나누거나 번식 혹은 확장할 수도 없다. "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는 구원케 하는 말씀, 계속적인 신적 권위, 절대적 지식, 분명한 지시, 직접적으로 확신시키는 영광이 없는 궁지와 실존의 궁지에 빠진다. '새로운 교회의 현실주의'로 나아가려 한다.

그런데 교회의 궁지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회라 하는 이상주의'로 도피한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보이는 인간적인 교회라고 하는 현실주의'로 도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간의 이러한 긴장은 교회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항상 상기시킨다.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완전히 궁극적으로 발언된 하나님의 확약으로부터 살아야한다.

⑹ 하나님이 제정하신 교회

1926년부터 바르트는 교회가 하나님의 화해의 결의안에서 제정되었음을 보게 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죄인의 공동체, 신앙하고 순종하는 인간들의 공동체라고 정의되었다. 1927년에는 바르트는 교회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체결된 계약에 근거하여 창조되고 성령을 통하여 각성된 신앙의 백성의 소집으로 정의했다.


제III부 기독론적 교회이해(1932년-1968년)

1. 교회관과의 관련 속에서 본 1927년과 1932년 사이의 기본통찰의 변화

1) 변증법에서 유비론(類比論)으로

바르트는 그가 1920년에 행한 강연 '성서적 질문, 통찰 및 전망'에서 성서적인 사고와 발언의 특성을 변증법적인 것이라고 기술했다. 로마서 주석 제 2판(1921년)에서는 바르트는 '바울의 로마서의 내용의 내적인 변증법'을 기술하는 것을 자신의 신학과제로 삼았다. 바르트는 그가 행한 강연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1922년)에서 형식적 변증법의 신학적 배경에 관해 숙고했다.

1925년에 행한 강연 '교회와 신학'에서 바르트는 신학의 변증법적인 특징을 단절, 역설, 철저한 보충의 필요성, 모든 신학문장의 원칙적 개방이라고 표현했다. 바르트는 변증법적 원리는 어디에서부터 유래하는가? 그 자신은 이것을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의 변증법'이라고 말했다. 바르트는 "우리가 어떻게 신학의 대상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적합하게 말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질문 앞에서 점점 더 고심하게 되었다. 이 질문은 그에게 점점 더 회피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왔다. 그 동기는 설교의 상황, 선포의 문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물음과 들려진 계시와 과제에 대한 신학적 사고와 발언의 책임성 문제였다. 이 물음을 놓고 씨름한 것을 보여주는 문서는 '신학에 있어서의 운명과 이념'(1929년)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바르트가 신학을 '그 대상에 일치하여 오직 교회 안에서만 가능한 학문' 이라고 파악한 것을 볼 수 있다. 신학은 단지 입문, 교정, 지시, 방주(傍註) 혹은 식탁의 양념일 수만은 없다. 변증법은 신학적 진술을 대체할 수 없다. 신학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또 계시할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그리하여 바르트에게서 변증법적 발언 속에 나타난 움추리는 몸짓은 점점 사라지고, 계시의 사건에 더욱 접근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즉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발언의 변증법적 구조에 관한 분명한 관심 대신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비(Analogia:類比)에 관한 관심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르트는 아날로기아를 정의하기를 "동일성 및 비동일성과 마찬가지로 동일성도 제한하는, 두 가지 혹은 더 이상의 다른 실체들 간의 부분적인 상응과 합치, 즉 유사성이라고 했다.

2) 그리스도론적 집중

변증법에서 유비론으로 신학적 인식원리를 전환시킨 바르트는 이제 그의 신학의 새로운 기초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새로운 과제는 "이전에 말했던 것을 다시 한번 완전히 다르게, 즉 이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학으로서 끝까지 숙고하고 표명하는 것이었다. 계시의 본질과 내용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변증법적 실체였던 교회 대신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등장한다. 이 새로운 교회관은 그리스도론적 집중에 의하여 강하게 각인 되었으며,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의 몸 이해를 통해 규정되었다.

3) 역사의 종국으로서의 종말론의 재발견

바르트에게서 세계사적, 목적론적 종말론은 그리스도론적인 방식으로 그 의를 재획득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모든 시간의 신비요 영원이라고 주장되던 변증법적 시대와는 달리 이제 종말론은 역사적 사건의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재평가 되었다.

2. '고백교회'의 투쟁기(1933년-1945년)에 나타난 바르트의 교회관

1) 정치와 교회의 상황

⑴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등장과 '고백교회'의 탄생 : 모든 신학적 성찰에서 벗어난 광신주의와 다름없는 '독일 그리스도인들'(DC) 조직의 가장 중요한 교회정치의 목표는 루터적 특징과 아리안 종족의 통일제국교회를 설립하려는 것이었다. '아리안 조항을 통하여 많은 자들이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운동에서 탈퇴했고. 이 운동은 여러 갈래로 찢겨졌다. 이 즈음에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⑵ 바르트는 무엇을 하였는가? : 바르트는 '오늘의 신학적 실존'(1933)에서 교회가 신학적 실존을 상실했으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소리를 들으려고 하다가 교회됨을 망각했다는 것, 그러나 성서가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신학적 실존이 있고 교회개혁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했다. 바르트는 1934년 5월 31일에 채택된 '바르멘 신학선언'을 기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 교회의 본질

⑴ 교회의 자리 :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셨으므로 인간이 그 말씀을 듣는 바로 그곳에 교회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위대한 행위의 언어로써 말씀하시고 인간이 이를 듣는 바로 그곳에 교회가 생기고 존재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성서의 원천, 핵심 및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⑵ 형제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 '바르멘 선언' 제 3항에서 바르트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로서 현존하시면서 행동하시는 형제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이 개념은 '그리스도의 몸'이해와 매우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⑶ 교회의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주로서 현존하시면서 행동하시고, 이 행동을 통하여 항상 새롭고 교회를 창조하시며 교회를 보존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교회의 첫째가는 본질적인 주체이시다. 바르멘 선언은 처음으로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론적으로 정립할 수 있었다.

3) 교회의 사명

⑴ 증언봉사의 주체로서의 교회 : 우리는 우리의 선포와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말씀에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증언봉사는 하나님의 능력 속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 속에 반복하는 데에 있다.

⑵ 시대사(時代事) 속에서의 교회의 증언책임 :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되고 선포할 때 시대를 떠난 어떤 추상적인 영역 속에 있지 않고 바로 시대 속에 있기 때문에, 교회는 시대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과 연루되어 있고 그것의 도전과 요구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시대에서 시대사에 참여해야 한다.

4) 교회의 형태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어떠한 형태를 취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 결정권을 가진 자, 즉 교회의 형성자가 누구인가?"하는 물음에 답변이 주어져야 한다. 모든 교회형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직분의 행위로서, 오직 그분만이 교회를 형성하는 자이다. 바르트는 지배가 아니라 오직 봉사만이 교회 위에 세워지는 표지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5)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 사이에서 투쟁하는 교회

교회는 자신이 참된 교회인지, 거짓 교회인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지 적그리스도의 교회인지 항상 필수적으로 자신을 검증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항상 거짓 교회가 될 가능성의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류를 진리로써 극복하려는 자세가 없는 교회는 그 자체상 거짓 교회일 것이다.

3. 교회와 성서(교회 교의학I/2, 1938년)

1) 교회에게, 교회를 위하여 주어진 성서

바르트는 성서를 교회의 선포와 대면해 있는 삶의 법정을 지시하는 표지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성서란 무엇인가?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그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의 형태를 가진다.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및 선포된 말씀.

2)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형성된 성서

성서는 카논의 형태로 교회에 의해 성서로 발견되고 인정된 문서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카논 형성은 하나님의 증인선택과 증인소명에 대한 교회의 고백이다.

3) 성서 아래에 있는 교회의 권위

성서를 떠나서는 교회가 아무런 독립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권위는 자신 속에 세워진 성서의 권위를 통해서 정초되고 제한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존재, 근거 및 본질을 이루는 성서에 대하여 순종의 관계에 있다.

4) 성서 아래에 있는 교회의 자유

교회의 권위가 순종의 객관적 규정이라면, 교회의 자유는 순종의 주관적 규정이다. 교회의 자유는 말씀의 자유로 말미암아 정초되고, 또 간접적ㆍ상대적ㆍ형식적 자유로서 제한된다. 교회 안의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에 상응하는 자유로서 다름아닌 성서주석과 그 적용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행위로 나타난다. 성서의 해석과정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는 교회의 자유로서 관찰, 숙고 및 적용이라는 삼중적인 성서주석의 행위로 이루어진다.

4. 공동체의 선택(교회 교의학 II/2, 1942년)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선택의 중개자로서의 공동체

⑴ 복음의 요약으로서의 하나님의 선택 : 바르트의 선택론은 그의 전체의 신학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선택론은 창조, 화해 및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계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열쇠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의 신학의 중심적 주제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인식근거와 존재근거는 무엇인가? 교회의 전통, 선택론의 교육적ㆍ목회적 가치와 유용성, 경험적 자료 혹은 전능자로서의 신개념에 있지 않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선택은 곧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을 의미한다.

⑵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은 공동체의 선택을 포함한다. 은총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하나님의 공동체의 영원한 선택이다. 이 공동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 증언 되고, 온 세상은 그에 대한 신앙으로 부름 받는다. 바르트는 이러한 공동체의 선택을 중보적ㆍ중개적 선택이라고 정의한다.

2) 이스라엘과 교회

⑴ 바르트의 신학에서의 이스라엘의 의미

로마서 주석 제1판에서 '이스라엘'을 신학적 주제로 받아들여 이스라엘과 교회 간의 연대적 관계를 강조했으며, 그리하여 자신의 사명에 부응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당대의 교회와 동일시함으로써 교회비판의 해석학적 모델을 찾았다. 교회로서 공동체는 이스라엘이고, 바로 이스라엘로서 공동체는 교회이다.

⑵ 이중적 형태와 기능을 갖는 하나의 공동체

바르트의 선택론에 드러난 그의 이스라엘 이해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그는 이스라엘을 낡은 인간의 사라지는 형태로서 부정적으로 파악했다. 그에 반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오고 있는 형태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5. 하나님의 화해의 역사로서의 교회(교회 교의학 IV/1-3, 1953년-1968년)

1) 하나님의 삼위적 행동 안에 있는 교회

⑴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화해의 선행적 묘사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객관적 화해가 개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일이 일어난다. 화해는 하나님의 전 존재요 그분의 전 삶이다. 화해는 모든 하나님의 행위의 목표요 하나님의 원래적 의지와 근본의지이며, 창조자로서의 그분의 의지와 의미와 근거이다. 화해는 또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맺어진 '계약'의 성취이기도 하다. 계약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처음부터 존재하다가 교란되고 위협받게 된 사귐인데 그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즉 화해의 역사 안에서 성취되었다.

⑵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해의 주관적 묘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름받은 자들의 공동체'(Communio vocatorum)로 일으켜 세워졌다.

⑶ 성령의 역사(役事)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를 창조하고 계속적으로 갱신시키는 능력은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이다. 교회가 설립되고 바로 그렇기에 항상 거듭 설립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성령이 활동함으로서 교회가 생겨났고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그런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다.

2) 교회의 삼중적 본질

⑴ 그리스도의 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ㆍ역사적 실존형태', 즉 그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과 부활하신 분으로서 천상적ㆍ역사적 실존형태로, 그리고 교회라는 지상적ㆍ역사적 형태라는 두 종류의 실존형태를 가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 교회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몸, 교회이시기도 하다.

⑵ 성도들의 교제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이다. 성도들의 교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회집되고 생동된 인간들의 활동 안에서 일어난다. 바르트는 성도들의 교제를 전통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이해했다. 하나는 '성도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된 인간들의 친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거룩한 것들', 거룩한 관계들, 거룩한 은사들, 거룩한 임무들, 거룩한 직분들, 거룩한 역할들 안의 교제이다.

⑶ 하나님의 백성

교회는 하나님의 '소명'의 역사와 '조명하는' 성령의 역사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교회는 다름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실존양식을 가리킨다. 즉 교회는 세상 뒤에 숨어 있거나 세상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지금 여기에, 다른 사람들 한 가운데에 있다.

3) 교회의 질서(교회법)

바르트는 교회의 법을 일차적 행동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와 이차적 행동의 주체인 성도들의 공동체 간의 관계의 척도에서 볼 때 올바른 것이라고 파악했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명령 및 지시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들의 공동체의 순종적ㆍ복종적 행위가 중시된다. 이 관계야말로 곧 교회의 질서원리, 기본법이다. 교회의 법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가 여기 머리와 주 그리고 일차적 행동의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에 있다.

교회법은 어떤 내용을 갖는가? ⑴ 봉사의 법의 특성과 의미를 갖는다. ⑵ 예배의 법이다. 교회의 모든 법은 예배의 사건에 그 본래적 자리와 고유한 목적을 갖는다. ⑶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인격으로서 그의 교회를 통치, 보존, 조직하심으로써, 교회 법은 필연적으로 역동적으로 움직여지는 살아있는 법의 특성을 갖게 된다. ⑷ 교회 법은 인간의 일반적인 법의 제정과 실행에 대해 모범적인 것이어야 한다.

4) 교회의 임무

교회의 임무는 그리스도 대신에 그리고 말씀과 성례 전을 통해 그의 말씀과 사역에 봉사하면서 값없는 은총의 복음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는 것에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교회의 모든 봉사의 총괄적 요약이다.

5) 교회와 세상

⑴ 세계사의 변혁요인으로서의 교회

세계사는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진행된다. 교회는 세계사 한복판 속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계사를 달리 보고 달리 그것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사의 한복판에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행하지 않고 또 행할 수도 없는 바로 그것을 항상 어디서나 구체적 순종과 고백 속에서 행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사의 한복판에서 그러한 결딴을 실천함으로써 세계사를 분명히 변혁시킬 것이다.

⑵ 세상을 위한 교회

교회는 자신에게 부여된 전권에 힘입어 세상으로 보냄 받음으로써 그 자체선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자신의 임무를 실행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보냄 받았다. 교회가 세상에 관해 앎으로써, 교회가 세상과 연대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으로써, 교회는 세상에 대해 함께 책임적이게 된다.


제IV부 칼 바르트와 카톨릭 교회(비교와 평가)

1. 바르트의 '그리스도의 몸'-피오(Pius) 12세의 '신비한 그리스도의 몸'(1943년)

⑶ⓛ바르트에게서는 교회의 설립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대리자로서 자신의 몸 안에서 죄의 몸을 지고 죽으심으로써 이를 제거하신 행위에 근거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 반면에, 피오 12세의 교서에서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그의 몸으로 설립되었거나 사들여졌다고 설명된다.

②피오12세의 교서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유일독특한 신분 때문에 교회의 머리라고 불린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장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대리권, 즉 교황의 수위권도 도출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에서 자신을 대리하는 자를 통하여 자신의 신비한 몸을 조직형태로 다스리신다. 즉 그는 사도의 우두머리에게 보이는 통치권을 넘겨주신다. 그와 달리 바르트에 의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교회의 머리와 통치자이시다. 그리고 교회는 오로지 그에 의해서만 통치되는 자매들과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머리, 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③ 바르트의 교회론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 간에 관계가 뒤바뀔 수 없는 한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바울적 어법을 똑같이 강조한 사실과 아울러 피오12세의 교서로부터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바르트는 말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렇지만 피오12세의 교서에서는 "그리스도가 교회이시다"는 문장이 뒤바뀔 수도 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이다"고 말할 수 있다.

2. 바르트의 '하나님의 백성'-제 2 바티칸 공의회의 '세상의 빛'(1966년)

⑴ 제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Lumen Gentium(세상의 빛)은 교회의 구원사적 차원에 역점을 두어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을 구원사의 관점과 결합시켰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라는 신약성서의 특별한 문장으로부터 특별한 역사, 구원사를 이해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계시로부터 역사를 향해 사고한다. 오직 이 길에서만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인식된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구원사'의 개념은 점차로 퇴색하고 '계약사'의 개념이 점차로 나온다. 계약사란 계약 안에서 진행되는 역사를 말한다. 바르트의 '하나님의 백성' 이해는 '계약사'와 어떤 관련을 갖는가?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역사는 계약사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바르트에게서는 구원사의 개념이 계약사의 개념에 의한 해명, 요약 혹은 전화되긴 했어도, 그의 교회이해는 근본적으로는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구원사적 교회이해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⑵ 바르트는 참된 보편적 교회에 대한 질문을 교회의 어떤 시간적 초기형태들과의 동일성에 대한 질문에만 국한시키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시도에 이의를 제기한다.

⑶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는가? 교회에 속하는 것은 구원에 필수적인가? 바르트는 교회의 중개를 통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건에 포함되는 은밀한 방식에 열린 태도를 보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카톨릭 교회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⑷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은 구원사의 연속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의의를 보여준다.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는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이해는 주요 강조점이 교회의 종말론적 역동성에 놓여 있다. 바르트에게서도 교회의 종말론적 역동성은 자신의 '교회 교의학' 안에서 점차로 큰 비중을 획득한다. 바르트는 "교회가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가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IV/3에서도 바르트는 도상에 있는 지나가는 교회의 실존을 강조한다. 교회는 이미 왔으나 아직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요 그 반사이다. 자신을 '완전한 사회'나 '지상의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실존 형태'로 보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자기 갱신과 종말론적 희망 및 고통 당하는 자들과의 연대성을 선포한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세상의 빛'은 바르트의 '세계사 한복판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아니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요약과 평가)

⑴ 교회란 무엇인가? : 바르트에게 압도적으로 빈번한 교회개념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로마서 주석 제 1판(1919년)에서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로 매우 유기적으로 이해했다. 로마서 주석 제 2판(1921년)에서 그는 교회의 일치를 구성하는 초월적 원리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제시했다.

⑵ 교회는 어떤 형태를 갖는가? : 바르트는 점차로 '직무'(Amt)'의 개념 대신에 '봉사'(Dienst)의 개념을 교회질서의 본질적 개념과 내용으로서 부각시키려고 했다. 화해론 IV/3에서는 교회의 질서가 명백하게 그리스도론적ㆍ교회론적 개념에 따라 '형제애적 그리스도통치'의 형태로, 즉 봉사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교회에서 적용될 법은 오직 봉사의 법으로서 명백하고 전체적이며 보편적이어야 한다.

⑶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교회의 중심적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에 귀착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증언의 원천이요 그 근거 및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세계의 제반 관계로부터 분리된 고백이 아니라 당대의 시대사를 위해 결정되는 명확한 고백이다.

⑷ 교회의 미래는 무엇인가? :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겨자씨 형태처럼 세워진 하나님 나라로부터 와서 나무형태처럼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기원이면서도 그 목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세워진 지배, 그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미래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의 교회론

………………………………………………………………………………………………………………………………………………………… 김 동 수(성산 효도대학원 대학교 교수)

 

 

I. 들어가는 말


본 소고는 신약 성서 요한 복음에 나타난 교회론에 관한 연구이다. 이 주제는 20세기 후반 요한 신학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이슈였다. 그 논쟁의 이슈는 크게 세 부분으로 대별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요한 복음에 교회론적 개념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 다음으로는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 특징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 마지막으로는 그러한 특징이 소위 요한 복음이 생성되고 읽힌 요한 공동체와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위의 세 이슈를 포괄적으로 다룬 전문 서적이 없었고, 또한 학자들이 요한 교회론을 다룰 때 교회론에 관한 본문을 다 고려하면서 다루기보다는 일부분만을 이용해서 요한 교회론의 특징을 제한적으로 기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 복음에 나타난 교회상에 관한 모든 본문을 다루면서 요한 복음의 교회론에 관한 가장 중요한, 그러나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려 하는 것은 의의가 있을 것이다. 본인은 본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위의 세 질문에 답하려 했다.



2. 요한 복음에 공동체적 사상이 존재하는가?


요한 복음 기자에게 교회론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 질문이 나오게 된 것은 요한 복음서에는 교회(εκκλησια 엑클레시아, 집에서 공공장소로 불려나온 시민들의 모임, 예배와 종교적인 만남을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교회)라는 단어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혹은 새 이스라엘 같은 초대 교회의 전통적인 교회론적 용어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의 학위 논문은 요한 복음 교회론의 유무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그 이유는 요한은 다른 신약 성서 기자들과 그 교회론적 용어를 공유해야 될 이유가 없으며, 요한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용어와 사상으로 그의 교회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구약 성서의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목자와 양'(10:1-18), '포도나무와 가지'(15:1-17) 등의 이미지를 신약의 교회의 표상으로 그리고 있으며, 제자들의 공동체(8:31; 13:35; 14:12; 15:5; 20:19-23), 제자들의 하나됨(17:20-23),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1:12; 11:52), 성령 공동체의 모임(14:6-7, 25-26; 15:26-27; 16:7-11, 12-15) 등으로 교회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신부로서의 교회(3:29), 교회의 씨로서의 밀알(12:14)등의 신약 동시대의 전통적인 교회 용어도 요한 기자에게 전혀 낯설지는 않다.


요한 복음서에서 교회론적 이미지와 사상의 유무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요한 복음에서 교회론이 존재한다면, 요한 복음 기자의 사상 안에서 교회론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1) 본인의 연구 결과는 요한 교회론은 요한 신학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요한 신학에 있어서 핵심 주제는 예수의 그리스도이심, 하나님 아들되심에 관한 것, 즉 기독론이다.


요한 복음서의 소위 '실현된'(현재적) 종말론도 요한 복음서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학자들은 요한 복음의 교회론이 요한 복음의 다른 신학적 주제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종합적으로 밝혀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본 연구는 요한 복음의 교회론은 먼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서 기독론과 교회론을 떼어 내기가 때로 불가능할 정도이며, 요한 복음의 교회론은 요한 복음의 현재적 종말론과 연관되어 있어 교회는 현재의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된 장소임이 강조되고, 요한의 교회는 성령론적이서 교회의 시작이 보혜사의 오심으로 시작되고 교회의 모든 교회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음을 밝혔다.



3. 요한 교회론의 특징은 무엇인가?


요한 교회론의 특징은 무엇인가? 요한 교회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교회론이 철저하고, 예외없이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데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다.2) 모든 교회론적 이미지가 일관성 있고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목자와 양'과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미지를 예로 들면, 이 두 이미지는 모두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던 것으로서 요한 복음에서는 목자와 포도나무가 각각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공관 복음서에도 이러한 이미지가 나오지만(마 18:12-14; 눅 15:3-7; 막 12:1-11 병행 구절) 요한 복음에서처럼 이 구절들이 예수의 메시야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구약과 공관 복음서에서 포도원이 이스라엘을 상징한다면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 자신이 참 이스라엘이고, 이런 의미로 보면 예수가 곧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회를 형성하는 주 구성원이 신자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이고 신자는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목자의 양으로서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신약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교회상이 요한에게만 독특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바울의 몸 교회론(고전 12:12-27)에서도 전형적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성의 정도에 있어서 바울은 요한 만큼 철저하지 못하다. 요한의 이미지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이 교회인데 반해, 바울은 그리스도가 머리로서 몸의 지체와 함께 교회를 형성한다.


이와 관계되어 요한 복음 교회론의 두 번째 특징은 요한 교회론은 그리스도와 신자 간의 개인적 관계를 교회 형성의 또 하나의 축으로 중시되고 있다는 데 있다. '목자와 양'에서는 상호 앎의 관계로, 목소리를 인식하는 관계로 그리스도와 신자 각자의 밀접한 관계를 묘사한다. 양으로서의 신자가 목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은 양이 목자의 음성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목자도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독특한 목소리를 인식하며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부른다. 이들의 관계는 '알다'(ειδω 에이도, 보다, 인지하다, 발견하다, 알다, 이해하다, 방법을 알다, 주의하다)라는 동사로 표현되는 아주 친밀한 관계이다.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아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까지 그 관계의 친밀성을 표현한다(10:14-15).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개인적 연합에 대한 강조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미지에서는 더욱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어떤 가지도 포도나무와의 생명적 접촉 없이 생명을 유지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도 그리스도와의 계속적, 개인적, 생명적 관계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성을 유지할 수 없다. 신자는 그리스도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관계를 표현한 동사는 '거하다'(μεινατε  εν  εμοι 메이나테 엔 에모이, 나의 안에 거하라)라는 동사인데 이것은 '알다'(ειδω)가 앞에서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상호적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신자 개인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요한의 교회론적 이미지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한다. 이것 또한 바울의 몸 교회상과 비교하면 그 특징이 분명해진다. 여기서 바울의 관심은 신자 상호 간의 관계, 즉 수평적 관계를 다룬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요한 교회론 이미지는 그 수직적 관계에 집중되어 있어 교회 안에서 신자들 간의 수평적, 공동체적 개념을 잃어버렸다고 한다.3) 부정하지 못할 것은 요한 복음서의 교회론적 이미지에는 수평적 관계보다 수직적 관계가 더욱 더 강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한다고 반드시 수평적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예컨데, 포도나무와 가지(15:1-8)의 이미지의 주위 문맥(15:1-7)에서 그리스도인 상호 간의 사랑의 관계, 친구의 관계가 또한 강조되어 나타난다. 특히 포도나무 비유의 핵심구인 '거하다'(μενω εν)는 이 넓은 문맥에 걸쳐 계속 나타나서 포도나무 비유가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이다. 즉 여기에서 수직적 관계는 수평적 관계와 서로 관계되어 있고 이런 의미에서 포도나무의 이미지는 그 수평적 관계, 그리스도인 상호 간의 공동체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요한 교회론의 세 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요한의 '민주적 교회 직제론'일 것이다. 물론 요한 복음서에는 요한 복음 원저자의 것인지 논란이 되는 21장을 제외하고는 어떤 교직제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공관 복음서 특히 누가에 있어서는 새 이스라엘을 형성하는 주요 직책으로서 나타나는 '사도'(αποστολος 아포스톨로스, 대리자, 사자, 명령을 가지고 보내진 자)라는 전문 용어도 요한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4)


요한 복음서에 '십이'(제자) 라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만(6:67, 70, 71; 20:24), 이들을 지칭 할 때도 '십이 제자'라는 말보다 '제자'라는 말이 선호된다. 요한 복음서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동등하게 제자로 묘사된다. 여자가 제자라고 명시적으로 기록된 경우는 없지만 요한 복음에 나타나는 사마리아 여인(4:7-42), 막달라 마리아(19:25; 20:1-2, 11-18), 마르다(11:1-44), 베다니의 마리아(12:1-8), 예수의 어머니(2:1-11; 19:25-27) 등의 여인들은 남자들과 대등한 신앙 고백을 하고 선교활동을 한다. 한 마디로 말해 요한 복음이 이해하는 직제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공동체 안에 그 어떤 지배 그룹이나 특권층이 없는 민주적 교직제라 하겠다. 이러한 직제 이해에 의하면 그 신분으로서 구별되는 어떠한 제 2급의 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교회 직제 이해는 요한 복음과 동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목회 서신서들이나 2세기 초 문서인 이그나시우스의 편지들에 나타난 교직 이해와 상당히 대조되는 것이다. 목회 서신서에 나타난 교직은 감독, 장로, 집사 등이 어느 정도 위계 질서의 관계로 나타나며(딤전 3:1-13 참조), 목회 서신서에 나타난 교회 안에서의 여자들의 위치는 그리 높은 것이 아니다(딤전 2:8-11 참조).


이러한 위계 질서적 교직 이해는 이그나시우스의 편지에 극단화되어 나타나는데, 요한 복음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면, 이그나시우스의 편지에서는 감독이 곧 교회와 동일시된다( "감독이 있는 곳에만 교회가 존재하고"<Ignatius, Letter to the Smyrnaeans 8:1>, 감독이 없으면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Ignatius, Letter to the Trallians 3:1>).



4. 요한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였나?


1) 요한 공동체는 섹트(종파적, 파당적)였는가?


위에서 고찰했듯이 요한 교회론의 특징은 신약에서 유일하지는 않을지라도 독특하다.5) 이러한 요한 교회론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전통적으로는 요한 신학의 독특성은 요한 복음 저자의 개인적, 문학적, 신학적 특이성에 기원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요한 신학의 특징을 요한 복음서 기자 개인의 신학적 특징을 넘어서 요한 공동체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연관된 것으로 널리 이해되면서6) 많은 요한 신학자들은 요한 복음의 독특한 교회론은 요한 공동체의 섹트적인(sectarian) 특징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먼저 섹트라는 말의 정의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요한 공동체가 섹트였는가? 아니였는가? 는 그 말의 정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섹트는 일반적으로 동일 종교 집단 내의 다른 교파에 대해서 혹은 일반 사회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의 대립 상태에 있는 집단을 말한다. 주로 사회에 대한 것이라면 요한 공동체뿐만 아니라 1세기 교회 모두가 어느 정도 섹트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7) 여기서 본인이 질문하려고 하는 것은 요한 공동체가 동시대의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 관계해서도 섹트였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한 공동체가 그 신학적 특성 때문에 동시대의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는 완전히 대립 혹은 소외되어 서로 대화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의 견해가 엇갈린다. 발터 레벨(Walter Rebell)은 요한 공동체가 동시대의 주류 교단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았다는 것은 허구라고 말한다.8) 반면 데이비드 렌스베르거(David Rensberger)는 요한 공동체가 동시대의 유대교와 관계해서는 섹트였을지라도 동시대의 주류 기독교 교단과 관계해서는 섹트가 아니었다고 한다.9)


우리가 초대 교회에서 한 기독교 공동체가 섹트였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공동체가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 구별되는 자인식이 있음이 확인되어야 한다.10) 둘째, 그 공동체의 신학과 이념이 다른 공동체의 그것들과는 상당한 정도로 다른 것이 확인되어야 한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러한 독특한 자인식으로 인해 그 공동체가 주류 교단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요한 복음 본문에서 위의 사실을 확인하고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 복음은 초대 교회 안에서의 여러 상이한 기독교 공동체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록하기 위한 문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을 통해서 독자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은 요한 복음 저자가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도 자신의 공동체 내부의 문제와 무관하게는 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한 공동체 문서인 요한 삼서에서 장로와 디오드레베 간의 기독교 공동체 내부의 논쟁이 있었음을 볼 때,11) 어떤 형태로든 요한 공동체의 내부 문제가 요한 복음서에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12) 특히 요한 복음에만 베드로와 그 사랑하는 제자가 같이 등장하여 상호 작용을 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한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상징성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베드로와 그 사랑하는 제자가 요한 복음에만 자주 같이 등장하는데 이 두 인물은 각각 자기 공동체의 대표로 나타난다. 그 사랑하는 제자가 요한 공동체를 대표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사랑하는 제자는 요한 공동체의 설립자이며, 요한 복음서의 저자이다(21:24). 그는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향유하는데(요 13:23-24), 이것은 요한 공동체와 예수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10:14; 15:5; 17:23 참조). 베드로는 공관복음(마 16:16-19; 막 8:27-29)과 요한 복음에서(1:42; 6:68; 13:6; 20:2; 21:2) 공히 12사도의 대표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사도적 공동체의 상징 혹은 대표로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요한 복음에만 이 두 제자가 예수의 중요한 사역 현장에 계속해서 나타나면서 상호 미묘한 경쟁 관계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13:21-30; 18:15-18; 20:1-10; 21:1-25).


혹자는 요한 복음에서 베드로와 그 사랑하는 제자의 관계를 악의적 혹은 적대 관계로 해석하고13) 혹자는 우정의 관계로 보는데14), 진실은 양극단의 중간 어디엔가 있는 것 같다. 요한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제자 무리의 대표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다. 베드로는 부정적인 묘사든지 긍정적인 묘사든지 제자의 대표이다. 그러나 그 사랑하는 제자는 그의 통찰력에 있어서 베드로보다도 앞서는 것으로 요한 복음서에는 묘사되어 있다(20:8; 21:7). 이러한 통찰력은 그 사랑하는 제자가 예수와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13:23-25; 19:26-27; 21:20). 즉 요한 공동체는 그 사랑하는 제자를 통하여 자기 공동체가 예수와의 친밀성에서 사도적 공동체보다 뛰어남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한 공동체의 자인식은 사도적 공동체를 부인한다거나 적대적인 관계로 귀결되지 않는다. 베드로를 대표로 한 사도적 공동체는 여전히 주류 교단이며 그 신학과 이상은 다를지라도 계속해서 교제(κοινωνια 코이노니아, 교제, 사귐, 공동체, 공유, 참여, 사귐)의 악수를 나누어야 할 형제로 인식된다.


이와 같은 고찰로 볼 때 요한 공동체가 신약 시대의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 연관하여 섹트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스카 쿨만(O. Cullmann)의 말을 빌리면 요한 공동체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독립성을 의식적으로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공동체와 상호 공동 이익을 위하여 같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또한 인식하고 있다.15) 요한 공동체를 섹트로 보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요한 신학이 신약에서 독특한 것이긴 하지만 신약의 다른 부분과 전혀 조화를 이룰 수 없을 정도의 독특성은 아니라는 데 있다.16) 요한 복음의 신학과 신학의 다른 부분과의 신학을 비교 연구한 최근의 논문들은 요한의 신학이 신약의 다양성 속에서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바레트(C. K. Barrett)는 최근에 사도 행전과 요한 복음을 종말론, 성령론, 교회론, 기독론의 주제로 비교한 결과 두 문서는 상당한 정도의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요한을 기독교 전통의 일반 흐름 내부에 포함시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고 중요하다. 아마도 요한 복음서 기자는 종종 주장되어왔던 것처럼 그렇게 외로운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요한 공동체가 비협조적이고 유리된 공동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비협조자 라고 해서 모두가 다 주류 교단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요한 공동체를 1, 2세기 기독교 역사와 흐름 속에 넣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17)


무디 스미스(D. Moody Smith)도 요한 복음서와 공관 복음서를 비교하면서 요한 복음서가 매우 독특해서 어떤 측면으로 외경 복음서(apocryphal gospels)와 연결점이 있지만, 그 신학의 일관성의 유지 등 외경 복음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오히려 정경의 복음서들과 접촉점이 더 많다고 주장한다.18)



2) 초대 교회 갱신의 신학으로서의 요한 교회론


(1) 신약 시대 기독교 공동체의 다양성


초대 교회에는 다양한 성격의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었다. 즉 신약 시대에는 하나의 정통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서로 다른 입장의 기독교 공동체가 다양성 속에 서로 공존, 협조, 때로는 긴장 관계에 있었다.


사도 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도 이미 헬라어를 말하는 신자들과 히브리어를 말하는 유대인의 분파가 발생한다(행 6:1). 처음에 기독교 공동체가 출발한 것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인 제자 무리에서였다.


지미 던(James D. G. Dunn)은 이 공동체의 특징은 종말론적이며, 따름의 원리가 강조되었고(막 1:17; 2:14; 10:21; 눅 9:57-62),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고, 예수 자신에게 그 중심이 있었다고 잘 요약한다.19) 제자들의 무리는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이룬다. 이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은 열정적인 특징으로 출발하여, 교회 안에 직제와 기구를 갖추게 된다.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 교인들이 흩어지면서 각 지역과 지도자에 따른 다양한 공동체가 출현한다. 요한 공동체도 그 다양한 공동체 중 하나였으며 1세기 말 교회 내외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 신학을 전개해 나갔다.



(2) 요한 교회론: 교회 갱신의 신학


앞에서 요한 공동체는 1 세기말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의 교류 속에 자기의 신학을 전개하였음을 논증하였다. 그러면 요한 공동체가 요한 복음서를 통해서 동시대의 다른 기독교 공동체들에게 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인가?


우선 베드로와 그 사랑하는 제자가 같이 등장시켜 상호 미묘한 관계로 계속해서 나타나게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다. 첫째, 베드로와 그 사랑하는 제자가 나란히 등장하는 모습을 통해서 요한 공동체도 사도적 공동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공동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 같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은 요한 공동체는 요한 복음서를 통해서 사도적 공동체에게 갱신의 목소리를 내려 한 것 같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무리라는 개념에서 멀어지는 것을, 또 그와의 개인적 친교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요한 공동체는 경계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요한 공동체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적, 주류 기독교 공동체와 동반자임을 주장하지만 예수와의 친밀한 관계, 그의 뜻을 깨닫는 것에는 항상 우위성을 주장하는 데서 이러한 입장을 암시받을 수 있다. 이것은 1세기 내의 기독교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교제를 통해서 그 생명성을 회복하자는 교회 갱신의 운동이었다.


이러한 교회 갱신의 신학은 요한 복음서가 기록된 1세기말의 교회적 상황을 관찰해 보면 분명해 진다. 1세기 말의 교회는 점점 더 기구화(institutionalization), 보수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미 고찰한대로 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무리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주교, 장로, 집사 등이 직제의 서열로 존재하는 양상을 띤다(딤전 3:1-13 참조). 이러한 경향성은 2세기 초 중반 이그나스우스에 의해 극단화되어 나타나는데,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독이 곧 교회와 동일시된다.20)


비록 암시적이기는 하나 요한 복음서는 위와 같은 교회적 상황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다. 첫째, 요한 복음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와의 생명적 관계 없이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 그것도 누구의 중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신자의 예수와의 직접적인 생명적 관계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양의 목자이신 예수는 양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양도 이에 호응하여 따라 간다(요 10:3-4). 요한 교회의 표상인 포도나무와 가지(요 15:1-8)의 관계도 바울의 교회상인 머리와 몸(고전 12:12-27)의 관계보다도 밀접하다. 바울의 교회상이 교회 안에서의 은사의 다양성에 있다면, 요한의 강조점은 교회 안에서 각 신자의 예수와의 생명적 관계에 있다. 요한에 의하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결국 말라 불에 살라져 버리게 된다. 요한은 더 나아가 이러한 신자와 예수와의 생명적 관계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의 관계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요 17:20-23 참조) 교회의 구성 요소 중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요한 공동체가 우려했던 바는 교회가 예수와의 생명적 결합에서 멀어져 점점 더 기구화, 직제화 된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것은 요한의 교회 직제 이해에서도 볼 수 있다. 요한에 의하면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명칭은 '제자'였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에만 사도라는 명칭이 나오지 않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사도 혹은 12제자가 많은 무리의 제자와 구별되어 나타나긴 하지만(요 6:66), 12 제자도 '사도' 혹은 '12제자'라는 말보다 제자라는 말이 더 선호되어 불린다. 여자가 제자로 명명된 적은 없지만 요한 복음서에서 여자는 남성 제자와 거의 동일한 신앙 고백과 선교의 역할을 담당한다(4:7-11; 11:1-44; 19:25; 20:1-2, 11-18). 또한 교회에서도 어떤 직책이나 교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신도 각자에게 임하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가장 중요하다(요일 2:20, 27). 즉 요한 공동체에게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교회 안에는 직제에 따른 신앙 등급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만약 구별이 있다면 신자 각자와 예수와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 또는 신자 각자가 얼마나 예수를 사랑하는 지에 의해서 구별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한 신학은 동시대 교회의 흐름에 도전하는 것으로 이것은 당시에 일종의 개혁 운동, 교회 갱신 운동의 하나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단 사상이나 쿰란 공동체와는 다르게 요한 공동체는 다른 기독교 공동체의 사도성을 인정하면서 자기의 개혁적 목소리를 낸, 일종의 내부의 개혁운동으로서 1세기 말 다양한 기독교 공동체 중의 하나였다.



5. 결론


본 소고에서는 요한 교회론의 유무와 그 특징, 그 생성된 공동체적 배경을 다루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나름대로의 용어와 방법으로 교회 공동체적 사상을 그의 다른 신학 사상과 함께 전개했다. 요한 교회론은 그의 사상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아니었을지라도 결코 부수적 주제는 아니었다. 요한 복음의 교회론은 신자 개인과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교제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고, 교회는 기구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관계를 갖고 있는 신도들의 모임으로 이해된다.


본 소고는 요한 복음 교회론이 생성된 배경을 요한 공동체의 상황에서 설명했다. 이와 연관하여 요한 공동체가 섹트였는가를 고찰했는데, 본 소고는 현대 사회학적 용어로서 요한 복음의 섹트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지만, 신학적으로 요한 신학이 일세기 말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 유리된 이단적 성격의 공동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박하였다. 요한 공동체는 1세기 말 다양한 성격의 기독교 공동체의 하나로서 기존의 다른 공동체에 대하여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요한 복음서에만 나타나는 베드로와 그 사랑하는 제자와의 미묘한 관계의 묘사에서 추론된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 공동체가 그 역사적 배경에 따라 적절한 신학화 작업을 하면서 존재했다. 그래서 신약 공동체는 그 신학과 이념에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가 존재했으며 일치된 특징으로서의 하나의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21) 다양한 신약 공동체의 모델을 정형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스타일에 따라 크게 바울의 은사적 모델, 목회 서신서의 초기 공교회주의(Early Catholicism)22) 모델, 그리고 요한의 갱신 모델 등으로 대별해 볼 수 있겠다. 바울의 은사적 모델은 그의 몸 교회론(고전 12:12-27; 롬 12:3-8; 엡 4:11-12)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는 성령을 체험한 모든 신자의 은사의 다양성이 강조되고 은사로서 서로 섬기는 삶이 요청된다. 그런데 목회 서신의 교회를 보면 은사의 다양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감독, 장로, 집사 등의 서열에 따른 교회 직제가 전면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그 교회 직제가 계층적인 상하 관계를 이룬다. 이에 반해 요한의 갱신 모델은 이미 우리가 고찰한 대로 초기의 제자 공동체에서처럼 공동체 개념의 초점이 예수에게 향해져 있고 그 교회의 직제에서도 남녀와 직책을 구별하지 않는 직제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모델이다.23)


이러한 신약 공동체의 다양성은 후대 기독교 역사상 교회의 신학의 다양성과 교회의 직제의 다양성에 그 신약 성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 하겠다.24) 중요한 것은 어떤 신약 교회론의 정당성과 유용성은 예수의 말씀을 기독교 공동체 내외의 역사적 상황에 적절히 응답한 것이었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요한의 교회론 신학은 본 소고에서 고찰한대로 1세기 말 교회론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친밀한 관계에서보다 교회 직제 안에서 혹은 교회 구성원의 다양성 안에서 이해되어지는 데 대해서 형제애적 입장에서 다른 기독교 공동체에게 충고의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서 초대 교회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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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ongsoo Kim, "The Church in the Gospel of John," unpublished Ph.D. thesis at the University of Cambridge, 1999.


1) 불트만(R. Bultmann)이 요한 복음의 무교회론을 주장한 대표자라면, 에두아르트 쉬바이쳐(E. Schweizer)는 최소주의자의 대표자이고, 래이몬드 브라운(Raymond E. Brown)과 쉬바켄부르크(R. Schnackenburg) 등 가톨릭 학자들은 아마도 최대주의자의 대표자들일 것이다. 이것에 관한 자세한 논의와 참고 문헌은 본인의 학위 논문 제 1장을 참조하라.


2) 카이자(R. Kysar)는 요한의 교회론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요한 기자의 확신을 논리적으로 교회론과 연관되게 확장시켜 놓은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The Fourth Evangelist and His Gospel: An Examination of Contemporary Scholarship(Minneapolis, MN: Augsburg Publishing House, 1975), 248. 3) 이러한 대표적인 견해로는 John F. O' Grady, "Johannine Ecclesiology: A Critical Evaluation," BTB 7(1977), 36-44; John Austin Baker, "The Myth of the Church: A Case Study in the Use of Scripture for Christian Doctrine," What About the New Testament: Essays in Honour of Christopher Evans M. Hooker and C. Hickling(eds.)(London: SCM, 1975), 173-75를 보라.


4) 요한 복음에는 αποστολο?라는 단어가 한번 나온다(13:16). 그러나 여기에서 αποστολο?는 전문적 용어로서의 '사도'가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쓰였다.


5) 신약 성서 각 책의 교회 이해 가운데 요한 복음에 나타난 교회 이해와 가장 유사한 것으로는 히브리서의 교회론을 들 수 있다. 두 문서 모두 기독론 중심적인 교회론을 발전시켰으며 교회론의 주제들이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다루어져있다. 히브리서의 교회론에 관해서는 Markus Bockmuehl, "The Church in Hebrews," A Vision for the Church: Studies in Early Christian Ecclesiology in Honour of J. P. M. Sweet M. Bockmuehl and M. B. Thompson(eds.)(Edinburgh: T & T Clark, 1997), 133-51.


6) 요한 교회론을 요한 공동체적 컨텍스트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D. Moody Smith 등에 의해 주창되어 Raymond E. Brown 등에 의해 요한 교회론을 이해하는 방법론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D. Moody Smith, "Johannine Christianity: Some Reflections on its Character and Delineation," NTS 21(1974-75), 222-48; Raymond E. Brown, The Community of the Beloved Disciple: The Life, Loves, and Hates of an Individual Church in New Testament Times(NY: Paulist Press, 1979).


7) Robin Scroggs, "The Earliest Christian Communities as Sectarian Movement," Christianity, Judaism and Other Greco-Roman Cults: Studies for Morton Smith at Sixty. Part Two. Early Christianity. J. Neusner(ed.)(4 vols.; Leiden: E. J. Brill, 1975), 1-23을 참조하라. Scroggs에 의하면 신약 시대 여러 기독교 공동체는 섹트의 전형적인 특징을 모두 다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세상과 관계되어 요한 공동체가 섹트였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요한 문헌의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요 14:17, 19, 27; 15:18, 19; 16:8, 11, 20, 33; 17:9, 14, 16, 25; 요일 2:15, 16; 3:1, 13; 4:5; 5:4, 5, 19)는 요한 공동체가 세상과 심한 대치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이러한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신약 성서에서 요한의 특징만은 아닐지라도(고전 1:20-21; 3:19 참조), 신약 성서 중 요한 문서에 이것이 가장 극명한 형태로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8) W. Rebell, Gemeinde als Gegenwelt: Zur sozialischen und didaktischen Funktion des Johannesevangeliums(Frankfurt am Main: Peter Lang, 1987), 113; J. H. Neyrey, An Ideology of Revolt: John's Christology in Social-Science Perspective(Philadelphia, PA: Fortress, 1988), 115; John Bogart, Orthodox and Heretical Perfectionism in the Johannine Community as Evident in the First Epistle of John(Missoula, MT: Scholars Press, 1977), 140을 참조하라.


9) 이러한 견해로는 D. Rensberger, Johannine Faith and Liberating Community(Philadelphia, PA: Westminster, 1988), 113; Johannes Beutler, "Kirche als Sekte?: Zum Kirchenbild der johanneischen Abschiedsreden," Studien zu den johanneischen Schriften(Stuttgart: Katholisches Biblelwerk, 1998), 21-32; John W. Pryor, "Covenant and Community in John's Gospel," The Reformed Theological Review 47(1988), 44-51을 참조하라.


10) 신약 성경에 나오는 요한 문헌(Johannine corpus) 배후에 이 문헌이 기록되고, 유포되고, 읽혔던 특정한 공동체가 존재했는데 이 공동체를 학자들은 요한 공동체라 부른다. 요한 공동체의 존재에 관해서는 요한 문헌 본문 내증과 상황적인 증거가 있다. 첫째, 요한 복음 21:24에 보면 본문의 저자와 구별되는 '우리'라는 일단의 무리가 나온다. 그들은 "그의 증거가 참이라"고 말함으로써 저자의 증언을 인증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편집적 '우리'가 아니라 일인칭 복수 '우리'이다(U. Schnelle, Antidocetic Christology in the Gospel of John: An Investigation of the Place of the Fourth Gospel in the Johannine School [Minneapolis, MN: Fortress, 1992], 42 참조). 둘째, 요한 서신서들은 요한 복음서와 문학적, 신학적, 언어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는 그 문서 배후에 특정한 신학과 용어를 가진 공동체의 존재를 암시해 준다. 셋째, 복음서와 서신서 사이의 동일한 윤리적 교훈(cf. 요 13:34-35; 요일 2:7-11)과 동일한 교회론적 표상(cf. 요 15:13-15; 요3 15) 등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문헌이 최소한 같은 공동체 안에서 태동되었음을 보여준다. 요한 공동체는 신약 시대의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는 구별된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 신약 학자들은 요한 공동체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요한 본문 내에서 추적할 수 있다고 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 공동체가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여러 발전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는 것에는 충분한 개연성은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요한 공동체는 신약 성서 시대의 다른 공동체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특징이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것은 요한 문헌과 다른 신약 문서를 비교함으로써 또한 요한 문서 내의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의 관계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밝혀 낼 수 있다.


11) 장로와 디오드리베간의 갈등을 기독교 내부의 대화와 논쟁으로 보는 견해로는 H.-J. Klauck, "Gemeinde ohne Amt?: Erfahrungen mit Kirche in den johanneischen Schriften," BZ 29(1985), 215-18을 보라.


12) 필자와 같은 견해로는 Terrence V. Smith, Petrine Controversies in Early Christianity: Attitudes towards Peter in Christian Writings of the First Two Centuries(Tubingen: J. C. B. Mohr, 1985), 143-44를 보라.


13) 이러한 해석으로는 Eric L. Titus, The Message of the Fourth Gospel(NY: Abingdon, 1957), 220; Graydon F. Snyder, "John 13:16 and Anti-Petrinism of the Johannine Tradition," BR 16(1971), 5-15; A. H. Maynard, "The Role of Peter in the Fourth Gospel," NTS 30(1984), 531-48을 보라.


14) 이러한 견해로는 Kevin Quast, Peter and the Beloved Disciple: Figures for a Community in Crisis(Sheffield: JSOT Press, 1989)를 보라.


15) O. Cullmann, The Johannine Circle(London: SCM, 1976), 55.


16) 케제만은 요한 복음의 가현적 기독론과 열광주의적 신학이 신약의 다른 책의 신학과는 독특성이 너무 지나쳐 요한 복음이 신약 성서에 포함된 것은 "인간의 실수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E. K semann, The Testament of Jesus: A Study of the Gospel of John in the Light of Chapter 17(London: SCM, 1968), 75. 이것은 요한 복음의 신학을 극단화시켜 잘못 이해한 것이다.


17) C. K. Barrett, "The Parallels between Acts and John," Exploring the Gospel of John: In Honor of D. Moody Smith(Louisville, KY: Westminster, 1996), 175-76.


18) D. Moody Smith, "The Problem of John and the Synoptics in Light of the Relation between Apocryphal and Canonical Gospels," John and the Synoptics A. Denaux(ed.)(BETL 101; Leuven: Leuven University Press, 1992), 147-62.


19) James D. G. Dunn, "Models of Christian Community in the New Testament," Strange Gifts: A Guide to Charismatic Renewal David Martin and Peter Mullen(eds.)(Oxford: Basil Blackwell, 1984), 2-3.


20) 1세기말에 발생한 교회의 기구화 그 자체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교회의 기구화는 이단 사상을 방어하고 교회가 효과적으로 관리되기 위해서 필연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부정적인 현상 또한 발생했다는 것이다.


21) "There is clearly no single model of Christian community which emerges which emerges from as the New Testament church. We see different churches in different situation(inevitably?) reflecting something of the dominant characteristics of their Circle(London: SCM, 1976), 39; K asemann, "Unity and Multiplicity in the New


Testament Doctrine of the Church," New Testament Question of Today, 252을 참조하라.


22) 초기 공교회주의에 대해서는 James D. G. Dunn,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ment: An Inquiry into the Character of Earliest Christianity(2nd ed.; London: SCM, 1990) 제 14장을 보라. 이것의 특징으로는 재림에 대한 희망의 쇠퇴, 교회의 기구화, 신앙의 신조화 등을 들 수 있다.


23) Kysar, The Fourth Evangelist and His Gospel: An Examination of Contemporary Scholarship, 247을 참조하라.


24) 기독교 역사상 위의 세 공동체 모델이 공존해왔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가톨릭 교회가 목회서신 모델인 공교회주의를 따랐다면, 개신교 주류 교단들은 바울의 은사적 모델을 교회의 이상형으로 보았다. 반면 요한의 교회 갱신 모델은 경건주의(Pietism), 19세기 미국의 부흥 운동, 20세기 오순절 운동 등 예수와의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강조함으로 교회 내에서 교회를 갱신해 보려는 운동 등에서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로 설정한 것이다. Dunn,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ment: An Inquiry into the Character of Earliest Christianity, 199을 참조하라. 던은 요한 공동체 교회론 모델의 역사적인 예를 비교권적 입장, 체험적 신앙, 완전주의 등의 특징을 가진 19세기 미국의 부흥 운동에서 찾는다.


25) 본인은 요한이 1세기 말 처해있던 기독교 공동체적 상황이 어느 면으로 한국 교회의 현재적 상황과 비슷한 면이 없지 않음을 발견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관계에서보다 어느 교단, 어느 교회, 어느 목사에게 속했나를 통해서 자신의 정통성을 찾으려 하는 것은 교회가 보수화, 화석화된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교회”란 건물이냐 성도냐?
콘크리트와 돌들에게 구속사를 펼쳐 나아가시는 하나님이시냐?…… (글 : jth5458 2006. 04. 18)


일반적으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교회’라고 하면 건물을 생각하고 말한다.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생각이 정답으로 믿어지고 말하여 진다. 한 마디로, 교회란 성도들이 모여져 있는 교회 건물을 말하기에 교회란 무엇이냐고 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부터 고학력의 소유자까지, 그리고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았다고 하는 목사들까지도 거의 80%정도가 ‘교회’라고 하면 건물을 말할 것이 틀림없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보다 더 귀하신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벽돌로 쌓아놓은 건물을 말하는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부동산인 교회를 귀하게 여기고, 그곳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聖殿)으로 알게 되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모여지는 것만을 최종의 목표로 생각했지 흩어져야 할 교회로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줄, 사라지는 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왜 흩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하늘에(천국) 두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인 우리는 모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혔다면 마땅히 제자된 자로서 천국의 복음을 세상에 나가 전해야 할 것이다.

■ 교회의 명칭에 대한 고찰(考察)

교회라는 명칭은 기독교에서만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 교회라는 명칭은, 어떤 사람들이 각기 자신이 섬기는 신을 향하여 예배 또는 제사의 의식을 위해 무리를 이루었다면 그들을 가리켜 ‘교회(敎會)“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명칭은 유교나 불교 신흥종교에서도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있으나, 모든 종교들이 앞에 교(敎)를 사용하면서도 뒤에 오는 회(會)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교회라고 하면 그것은 예수를 믿는 그 집단의 모임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평신도신앙총서④P.4, 대한기독교서회,1993년).

1). 구약성서에서의 교회명칭

구약성서는 교회를 말할 때 히브리어로 ‘카할’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에다’라고도 한다. ‘카할’이라는 말의 유래는 ‘모으다’ ‘의논하기 위하여 소집된 공동체’라는 의미를 갖고 있음으로 당연히 건물을 말함이 아니다. 어느 장소에 건물을 지정하고 혹은 지으셔서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에다’라는 말도 ‘지정된 장소에 모인다’라는 뜻을 갖고 있음으로, 부르셔서 모여든 것은 사람이지 지정된 장소의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 것이지 결코 지정된 건물, 부동산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교회란 살아있는 유기체(有機體)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에 쓰시고자 하는 피조물인 도구이며 생명력이 있는 ‘하나님의 종들’인 것이다.

성도(聖徒)란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로부터 구별 되이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죄로부터의 구원을 허락하셨으며 감사함으로 찬양과 예배 드리기를 즐거워하기에, 모이기에 좋은 지정된 장소를 필요로 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부름 받은 자들의 신앙의 공동체 그 자체가 바로 교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신약성서에서의 교회 명칭

신약성서에서 교회를 말할 때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란 단어로 말한다. 이것은 ‘퀴리콘 ; κυρικον ’과 같은 어원인 영어의 ‘Church'는 ‘주(主)의 것’또는 ‘주(主)에게 속하는’을 의미하는 헬라어의 ‘퀴리아콘; κυριακον ’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신약성경에서 같은 뜻으로 쓰이는 ‘에클레시아’는 원래 헬라인들이 공적인 일과 관련된 전령관(傳令官)에 의해 소환된, 또는 ‘불러냄을 받은’자유시민들의 모임 혹은 회중을 의미하기 위해 구사한 말이었다(행19 : 39). 때때로 어떤 모임이 합법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어떤 종류의 모임이든지 모임 자체에 적용되기도 했다(성서대백과 P. 397, 기독지혜사).

또한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불러내다’라는 의미 외에 ‘오다’ ‘모이다’라는 뜻의 ‘쉬나고게συναγωγη ’의 뜻으로 교회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 듯 보이나, 이 단어는 두 가지 모두 70인 역에서 유래되었고, 이중 ‘쉬나고게’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모임 또는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 장소를 의미하고 있다(마 4:23, 행 14:1). 이렇게 ‘쉬나고게’는 모이는 장소에 있어서 건물을 말하고 있지만, ‘에클레시아’는 소집된 회중의 모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쉬나고게’와는 확실하게 구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회중을 소집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신약성서에 있어서의 교회의 의미는 회당인 건물이나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 모임 자체를 교회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마 16:18에 보면, 예수께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이 말의 의미는 예수께 몰려온 그 회중을 교회라고 하셨던 것이다(평신도 신앙총서④, P. 15, 대한기독교서회).

주님 자신은 이 ‘에클레시아’란 말을 4복음서에서 두 번 사용하셨다. 첫 번의 경우는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께 그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던 때였고(마 16:16이하), 또 다른 예는 범죄한 형제에 대한 제자들이 해야할 의무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하신 교훈의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다(마18 :17).

사도들의 서신에서는 이 단어의 (에클레시아)사용이 매우 보편화되었다. 어느 때는 “갈라디아 교회들”의 경우와 같이(갈1:2)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의미하기 위해 쓰였으며, 또 그 외 다른 경우에는 ‘안디옥 교회’의 경우와 같이(행13:1) 그 부근의 같은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의미하기 위해서 쓰였다.

한편, 예배를 드리고 교화하기 위해 한 집에 함께 모이는 신자들의 작은 모임도 교회로 언급이 되어 있음을 본다(롬 16:5, 고전 16:19, 골 4:15, 몬 1:2).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대중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건물’을 가리키기 위해 이 단어가 쓰인 적은 결코 없다.

‘교회’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사람들에게 적용되며, 가장 넓은 의미로는 ‘온 세상에 흩어진 신앙의 무리’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다(성서대백과P.979,기독지혜사). 그렇다. 분명 교회란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구별 되이 부르신 자들을 말함인데, 어찌 교회란 말이 건물 성전이 될 수 있으며 건물 자체가 교회로 불릴 수 있는가 말이다.

그렇게 불려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건물 안에, 좀 더 좋은 건물로 신을 모시듯 하려하고, 건물을 신성시하고, 성도들을 건물에 종속되어지는 세속의 단체로 전락되었으니,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

칼빈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교회라고 하면 보이는 건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참 교회는 건물에 있지 않고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말한다”고(주제별 칼빈주의 P. 95, 한국문서선교회, 1988년)하였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 23장에 보게 되면‘“보편적 또는 우주적 교회는 무형적이다. 이 교회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아래 하나로 지금까지 모여들었고, 지금 모여들고 있고, 장차 모여들게 되는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의 충만 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교회는 부동산인 건물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여전히 교회를 ‘건물’로 가르치고 착각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도 사람이 아닌 생명 없는 물건일 것인데, 이러한 불경(不敬)스러움의 죄는 어떻게 씻음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건물과, 콘크리트 내지는 돌들과 더불어 구속사를 펼쳐 나아가시는 하나님, 그러한 하나님으로 알게 하려는 사단의 노리개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지금 내 교회에서 성도들을 예수제자 삼아 세상으로 보내져서 교회 문을 닫게 된다 손치더라도, ‘교회’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흩어져서 증거하고, 다시 모여져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권능을 받아 다시 보내지기를 감당하여 천국의 복음을, 십자가의 복음을 외쳐댈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입으로, 삶으로!

그러므로 지금과 같이 ‘교회 〓 건물’ 이라는 식의 잘못된 개념에서 하루속히 탈피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 드리고, 말씀으로 교육받고, 친교하고, 전도하며, 세례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예식을 행하는‘예배당(禮拜堂)’으로 바르게 불러져야만 한다. 그리하여 성경적인 바른 ‘예배당’의 기능을 회복하여,교회인 성도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이다.

교회(마 16:18, 롬 16:5, 고전 16:19, 엡 1:23),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별 되이 부르신 성도들을 말함이지 결코 건물이 아님을 잊지 말자!

 

 

 

  수탈체제로 이끈 헤롯 성전을 헐라!
   착취를 시스템화 시킨 성전(돌과 콘크리트)을 헐어버린 예수 ………………… (글 : 김강기명 2007. 11. 08)


 

1.
마흔 여섯해나 걸려서 지은 웅장한 성전. 이스라엘 본토, 지중해, 아프리카, 아라비아의 전 지역에서 몰려온 유대인 순례객으로 넘쳐나는 예루살렘, 그들이 그 순례기간 동안 풀어놓는 엄청난 돈과 헌금, 그들에게 제공되는 각종 종교적 서비스. 이런 것들이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유월절 풍경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서 있던 성전은 헤롯 대왕이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의 성전은 애초에 허름하게 지어진 성전이었고(스 6:3-4), 그나마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침략으로 훼파되고 불결하게 되어버린 성전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도 아니었던 헤롯 대왕은 이 성전을 무려 46년에 걸쳐 그리스식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다시 지음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통치를 위한 '국민통합'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성전에 의해 만들어진 성전체제는 수탈체제였습니다. 민중에게 초월적 하나님을 '서비스'해주는 대가로 이 체제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까지 탈취했습니다. 민중은 로마제국에 바치는 세금과 함께 성전세를 이중으로 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성전이 완성되면서 각 지방(사마리아, 갈릴리)의 토착적 유대종교는 모두 이단이 되어버리고, 성전종교에 흡수되든지, 아니면 배제되어야 했습니다. 예수의 고향인 갈릴래아 사람들도 '자신들의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강요받았을 것입니다.

예수가 무너뜨리려 한 건 단순히 성전 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이 성전체제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성전체제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공중의 새와 들의 풀도 먹이시는 하나님을 그 체제에 충성하는 사람들에게만 팔아왔습니다. 예수는 그 성전체제를 향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일갈하십니다(요 2:16).

2.
오늘도 많은 종교들이,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을 팔고 있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잔치로 만민을, 특히 고난 받는 이들을 초청하여 먹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일진대 교회는 거기에 충성하는 이들에게만 하나님을 팔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죄 용서받고, 복 받고, 부자 되고, 대학 가고, 죽어서 천국 간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들을 향해 여전히 소리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종교의 지도자들만이 예수의 비난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중들도 예수의 이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그 어떤 지배 체제도 대중의 공모 없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대중은 재미있는 존재입니다. 성전을 짓는다고 세금을 쥐어짜고, 노역에 동원할 때는 힘들어 저항하기도 하고, 대규모 공사에 대한 반감도 드러내지만, 막상 46년이 지어 거대한 건축물이 지어졌을 때 그들은 저항하기를 그치고 성전을 자랑스러워하며 금방 성전체제에 흡수되고 맙니다.

물론, 이건 저의 역사적 상상이지만, 단순히 상상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일이 역사에 반복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가까이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추진한 청계천 복구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일단 지어지고 나면,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피해와 고통을 입었고, 그 결과와 과정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는 더 이상 회자되지 않고, "어쨌든 그는 성공했다"는 신화만 남아 찬사를 합니다. 그리고 대중은 기꺼이 그것이 만든 새로운 풍경 속에 흡수되어 버리지요.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배제된 자들의 아픔은 은폐되고 맙니다.

예루살렘의 대중들도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고, 이 새로운 성전을 보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에게 환전과 제물을 제공하고, 여행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은 꽤나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이내 성전이 단순히 하나님 계신 곳만이 아니요, 자신들에게 부를 가져다주는 화수분임을 깨닫고 그 체제에 충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통에, 이전까지는 함께 고통 받던 사람들을 대중들 스스로가 배제하고 성문 밖으로 내어 쫓았을 것입니다(히 13:12). 성전체제의 봉사자인 이들 예루살렘의 대중 역시 예수의 비판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3.
더 나아가 예수는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성전을 허물면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그것을 "자신의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예수에게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성전과 거기에 기생하는 성전체제(왜곡을 통한 착취)는 허물어져야 했습니다. 예수는 몸소 성전이 되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 안에, 혹은 종교체제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몸 안에 계신 것입니다.

성전체제는 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지만, 예수는 민중의 몸(신앙의 공동체)으 로 부활하십니다. 갈릴리 촌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하고, 성령을 받고,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온 지중해로 퍼져나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체제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성전인 사람들입니다. 종교나 정치의 체제(시스템), 이데올로기 같은 초월적 체제로 도피하여 자신의 안식처를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에 직면하여 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헤롯 성전'으로 도피합니다. 영화 <밀양> 속의 신애라는 캐릭터는 어쩌면 이러한 우리들 모습의 대표격인 캐릭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바람 피다가 사고로 죽은 남편이 자신에게 준 고통을 그대로 직면하지 못하여, '남편을 잊지 못해 남편의 고향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미망인'이라는 허위의식 속으로 도피합니다. 아들이 유괴당하여 죽자, 그 고통을 직접 대면치 못하고 마약과 같은 즐거움을 주는 초월적 종교 안으로 도피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이웃과의 관계, 아들과의 관계, 그를 흠모하는 종찬(송강호)과의 관계 등 모든 관계에서 피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헤롯 성전으로 도피하는 이들은 이웃과의 관계 역시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전인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증언을 필요치 않습니다(요 2:25). 아름다운 미망인 척할 필요도 없고, 땅을 알아보러 다니는 알부자인 척 할 필요도 없고, 위대한 믿음의 일꾼인척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죽는 그날까지 헤롯 성전이 마련해준 자리에서 고통 받으며, 또 고통을 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우리를 몸-성전의 삶으로 초청합니다. 스스로 성전이 되어, 신처럼(요 10:34-35, 시 82:6) 세상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헤롯 성전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것을 무너뜨려야 우리는 성전으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성전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누구의 증언도 필요치 않는 참 자유인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율법의 십일조, 예수도 안했다.
율법 아래서도 목수는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 …………………………………………………… (글 : 신 완 식 ㆍ. ㆍ. ㆍ.?)

 

1. 목사는 레위 족속이 아니고 제사장도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십일조는 율법시대에 주어진 것인데 지금은 율법이 완성된 복음의 시대요 은혜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왜 십일조만 시행하고 할례는 시행하지 않나요? 여성들은 예배 시간에 왜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나요?

2. 교회는 성전이 아니고 예배는 제사가 아니며 헌금은 제물이 아닙니다. 요즘도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 등을 하고 있나요?

3. 아브라함이 드린 것은 자신이 거둔 땅의 소산인 농작물이나 소유한 가축에서 드린 것이 아니고 전리품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이 드린 것은 결코 전리품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반드시 개인의 소유에서 나온 소득에 근거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은 오직 유일회적인 일이요 정기적으로 행한 구약시대의 십일조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4. 야곱의 서원은 십일조를 드리기 전에 한 것이고 반드시 ‘If~’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지적하신 대로 그가 실지로 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는 성전도 제사장도 율법도 생기기 전이고요.

5. 구약시대에 드린 십일조 품목에 ‘돈’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지금은 돈만 받지요?

6. 구약시대에도 십일조 의무를 면제 받은 직업들이 있습니다. 수확을 위한 바구니를 만든 상인들,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신는 신발을 만든 사람들, 추수 수확을 위해 마차를 만든 목수들,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물을 길어 나르도록 물통을 만든 도자기공들, 들판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외투를 만든 여인들, 임금을 받고 들에서 일한 종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였기(마 13:55, 막 6:3) 때문에 십일조 뿐 아니라 성전세도 내지 않으셨습니다(마 17:24-27).

7. 헌금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합니다(마 10:8하, 마 5:42, 롬 15:26-27, 눅 6:38 등). 즉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8. 바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유다가 쓴 성경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전무 합니다. 즉 초대교회는 이미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지요.


그 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유럽 교회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가 다니는 영국 교회도 공식적으로 십일조는 언급조차 않고 있어요. 물론 아프리카나 스리랑카 인도 등에서 온 이들 중에 하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사실은 위의 내용들을 잘 모르고 있지요. 유럽 성도들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십일조를 중심으로 헌금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교 회 인건비, 유지비, 구제비 등 실질적인 재정관련 사항들은 ‘십일조’를 강조함으로 해결할 게 아니라 목회자들이 구체적인 재정 필요 사항들을 교인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게 해야 하는 데 한국 교회처럼 그렇게 강조하니, 심각한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지요. 저희 교회는 십일조 강조 하나도 안하고 저도 지금 십일조 안 해도 할 일은 다하는 교회랍니다. 구제와 선교를 위해 적극적으로 헌금을 하기 때문에 담임목사님은 제 기억으로 지난 5년 동안 꼭 한 차례 그것도 스쳐 지나가는 말로 헌금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 оо님께서 참조하신 성경주석을 쓴 이는 위의 기본적인 사실을 모른 채 의례적인 논리를 따라 쓴 것 같습니다.


한 국도 머지않아 십일조 문제를 극복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영국 교회도 100여 년 전까지는 했으나 지금은 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태의연하게 대처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한국 교우들은 유럽 교회는 죽었다고 하는 데 그런 측면도 있으나 영국은 ‘병든 한국 교회’와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살아있는 교회랍니다.


십일조는 무조건 소득의 십 분을 내는 것이 아니랍니다. 구약 시대에서는 반드시 소출과 가축에서 드렸고, 직업에 따라서 면제되는 것도 많았습니다. 어부와 목수가 그 대표적인 예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베드로도 십일조를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십 일조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성전 제사가 있을 때 유효했던 제도로서 초대교회 때는 시행하지 않다가 중세에 들어 교회가 제도화 되면서 다시 시행된 제도입니다. 영국과 서구 교회는 더 이상 십일조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습니다. 이는 믿음의 부족 문제가 아니라 성서적인 근거 문제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십일조의 근본 취지인 극빈자, 장애인, 노인, 어린이, 여성 그리고 사회보장 및 복지에 대해 깊은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제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도 맹목적으로 십일조를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그 근본 취지와 뜻을 밝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 한다고 복이 굴러 온다거나 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 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감언이설에 불과 합니다. 저는 기득권의 욕심과 이익을 대변하는 왜곡된 성경해석이나 잘못된 설교를 지적하고 성경이 적시하고 있는 정확한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참된 목회요, 진리말씀으로 영혼을 자유케하는 고귀한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기 독교가 사제중심의 브로커 종교체제나 사제만 행세하고 공공연히 착취하는 노예종교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거룩하게 개혁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만약 십일조를 강조한다면 초대교회(초대교회는 십일조가 없었음)의 연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불완전한 사람이나.. 혹은 사제나 교주에게 무조건 ‘아멘’하는 것이나, 덮어놓고 맹종하는 일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뱀같이 지혜로와야 합니다. 무엇이 자유케하는 성경적 참 진리인지 무엇이 율법과 제도와 사람에게 종노릇하게 하는 사람의 계명인지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 농경 목축 사회에서 토지 소산과 가축이 '모든' 소득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이미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고(참고 - 농경 목축 시대였던 아브라함 시대와 전통적인 십일조가 처음으로 시행되던 모세 여호수아 시대에도 화폐가 중요한 교환 수단으로 유통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돈이 아닌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만을 오직 원하셨음, 창23:12-16, 신14:24-26) 다른 일거리나 매매 행위 등을 통해 여러 형태의 소득들이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왕정시대로 넘어갈수록 다른 종류의 소득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성전세나 헌금, 다른 세금들은 돈으로 냈으나 십일조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돈으로 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양식의 형태로 성전 곳간에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가나안 땅에서 토지 분배가 있은 연후의 토지 소산과 가축의 개념은 소득이나 부의 축적 수단이라기보다 양식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레위인, 또는 가난한 자들과 양식을 나눠 먹는 구제의 정신 가운데서 행해졌다. 한 가족이 1년 동안 먹는 양식의 10분 1을 내어놓아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양식의 10분 1은 될지언정 '모든' 소득의 10분 1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말라기와 느헤미야 시대까지는 십일조가 토지 소산의 10분 1로 양식에 국한되었다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러다가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더 많은 성전 수입을 위해 제사장들과 함께 십일조의 대상을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토지 소산 이외에 박하, 회향 같은 특수(양념) 작물들도 십일조의 대상이 되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십일조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화폐 소득을 십일조에 포함시키고부터였다. 화폐 소득을 포함시키자 자연히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으로 확장되었다. 화폐와 박하와 및 향료의 십일조는 탈무드의 랍비들이 주문하는 내용이었으나 이는 성경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성서 대백과》 제4권, p.752, 기독지혜사)

중세 교회에서도 4세기 무렵 십일조를 채택하고 나서 근 1000년 가까이 지난 13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시켰다는 사실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거의 독점 체제에 가까웠던 중세 교회가 왜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장시키는 데 1000년이나 걸렸을까. 그것은 중세 교회에서도 전통적인 십일조의 대상은 '모든' 소득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화폐 소득을 중심한 '모든' 소득이 십일조의 대상이 됨으로써 십일조가 변질되고, 그것이 전통적인 십일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십일조가 나눔의 양식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의 치부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 (십일조를 넘어서 中..)

 

 

°(롬 3:30-31)“때문에 한분 그 하나님이 이 의롭다고 간주하심이 할례 받아도 믿음으로 부터요 할례 받지 않아도 그 믿음에 의해서라. 따라서 그 믿음 때문에 율법을 무익케 함이니, 율법을 세우지도 않고 |(율법의 고안품을)| 만들지도 아니하노라.”


‘(율법의 고안품을)’은 문맥의 의미에 맞게 첨가 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율법적 흉내내기 장치(裝置)들론 ‘주일성수’, ‘십일조’, ‘성전건축(?)’..등등이 있을 겁니다.


하 여, 주와 함께 걷는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또한 그런 믿음 안에서, 오늘날의 의식률(儀式律 : 주일성수, 십일조..등등)을 잘 지켜야만 신실한 크리스찬 이라고 평(評)하는 자들의 변은(딤전 6:5),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무지의 소치(所致)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성전되신 예수- 요 2:19-21, 행 6:14, 마 26:61, 막 14:58, 마 18:20) 안에서 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마 12:5】, 주의 백성은 공동체 안에서(교회를 이룬 각 지체- 엡 2:19-22, 고전 12:27, 롬 12:4-5, 엡 1:22-23) 그들의 자손에게 할례를 베풀었으며【요 7:23】, 주와 함께한(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의 몸- 고전 3:16, 고전 6:19, 고후 6:16, 히 3:6) 다윗은 그 종자들과 안식일에 성막(혹은 산당)의 진설병을 먹었습니다【삼상 21:1-6 / 레 24:8-9】.


따라서, 우리 유일하신 성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조항들은 이미 채워진(πληροω 플레로오 | 가득하게 하다, 채우다, 풍성하게 하다, 완성하다, 끝까지 채우다, 완벽하게 하다, 실재가 되게 하다, 수행하다 / 마 5:17) 하찮은 보조수단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참된 말씀을 따르고, 배워서 주께로 활발히 자라가는 것이지, 사람들의 손으로 지어낸 그런 고안품(εργον 엘곤 | 사업, 고용, 생산된 것, 손으로 만들어진 것, 예술, 제조업, 행동, 행위 / 딛 3:5)들로 자라나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적 사고로 믿음의 크기를 잰다거나, 칭송한다거나, 자랑해 대는 것은 그들의 무지만을 더더욱 크게 알리는 허망한 노래일 뿐입니다.



“ 그러나 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실상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모든 상징이 사라지며, 그가 본체이시므로, 그가 나타나실 때에 그림자는 버려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안식의 진정한 실현이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으며,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 목적은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는 것이다(롬 6 : 4-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다른 곳에서 안식일은(골 2 : 16)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한다(골 2 : 17).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실상의 바로 본체시며,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잘 설명했다. 이 일은 어느 하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때까지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있을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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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거짓 선지자들의 너절한 이야기는 사라진다. 그들은 수 백년 전에 유대교적 견해를 사람들에게 감염시켰다.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만이(그들의 소위 제 칠일의 "정"만이) 지폐지된 것이고 도덕적 부분은-즉, 이레 가운데서 하루를 정하는 것은-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의미로 날을 변경했을 뿐이고,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하는 생각은 여전하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 같이, 그날의 신비성에 중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런 사상을 가르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자기들의 교회 규정을 고집하는 자들의 미신은 유대인 이상이요 세 갑절이나 더 유치하고 육적인 안식일 미신이다. 따라서 이사야가 당시의 사람들을 책망한 말은 현대의 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사 1 : 13-15, 58 : 13). 그러나 우리가 특히 견지해야 하는 일반적 교훈은 이것이다. 즉, 우리들 사이에서 경건이 소멸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회에 부지런히 출석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도을 수 있는 외면적 보조수단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Ⅱ, 8장 28 - 34 中 에서..

 

 

이스라엘에 왕정이 시작된 후 십일조는 어딧다가 냈나?

구약에 보면, 십일조의 쓰임새가 다양했습니다. 그 첫 번째로 이스라엘 모든 처음 난 자를 대속해【민 8:14-19, 민 3:12-13 / 출 13:13, 출 22:29, 출 34:20, 레 27:26-27, 민 18:15-16】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분깃으로 주어졌으며【민 18:21-32】, 혹 얼마는 정성 드린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먹기도 했고【신 14:22-27】, 또 그 ⅓은 구제(救濟)에 쓰였습니다【신 14:28-29, 신 26:12-15 / 레 25:1-7】.

그로부터 한참 후 이스라엘 민족이 왕을 세울 때부터 십일조는 왕한테 내라
【삼상 8:15, 17】한 성구도 있고, 실제로 왕이 걷어들인 기사도【왕상 4:7-19】 있 습니다. 어떤 자들은 앞에서 말한 십일조를 ‘십삼조’{?}라 우기고는 소득에 십분의 삼을내라 하는데, 이는 자기 아는 것으로만 둘러대는 거짓말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이 왕한테 내는 십일조까지 합해서 십의 사를 내야한다는 말도 되기 때문입니다.

왕도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로써 이스라엘 각지파의 십일조를 걷어, 그 신하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인 성전의 문지기, 창고지기, 찬양대, 수종자, 유사들에게도
【대상 24:20-26:32, 대하 19:11】 나눠줬습니다【대상 25:6, 느 11:22-24】. 분명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도 왕의 신하라고 성경에는 씌여있습니다【왕상 2:35, 왕상 4:2-4】.

따라서,‘사회보장기금’과 ‘세금’에 성격이 강한 십일조두고 그 수납처(收納處)를 교회당으로만 한정시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또, 자기들 눈에 보이는 곳에다 십일조를 내지 않았다해서
【말 3:8-10】에 말씀을 들어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것 또한 결코 옳지 못한 행태(行態)입니다〈어찌 ‘하나님이 교회당 안에만 계시다’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 6:2-4, 마 25:34-40, 눅 14:12-14】 하셨으며, 걷둬드린 십일조 가운데 ⅓【신 14:28-29, 신 26:12-15 / 레 25:1-7】 은 구제(救濟)에 쓰여져야 한다는 율을 어기고 백분의 삼(3%)만으로 생색내는 자들이 더더욱 큰 도둑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9】 여기서 ‘온 나라’라 했으니, 어찌 레위인들이라고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느 13:4-14】 큰 도둑이 좀 도둑 정죄하는 짓(초등한 자가 범하는 우, 딤전 3:6)을 이젠 그만 그칩시다.

“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혼란하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의 제물과 피와 (피를 빼지 않고)목졸라 죽인 것과 음행에서 떠나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것들만 삼가면 스스로 잘 해내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행 15:23-29】

또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졸라 죽인 것과 음행에서 떠나 멀리하는 것”말고는 다른 짐【계 2:24】으로 성도를 괴롭히지 않으려했던 ‘사도와 장로의 규정(δογμα)’에 따르지 않고, 사도로 부터 보냄 받은 바(사도적 계승) 없이 지식의 열쇠【눅 11:52】만을 갖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성도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마 11:28) φορτιζω 프홀티조 G5412, 짐을 얹다, 짐을 싣다, (관습과 부당한 교훈의)짐을 지우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위에 군림하려는 자의 계략을 간파하여 속지맙시다. 주의 이름으로 구제(救濟)하기 보단,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사치하고 치장하길 더 좋아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을 탐하며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데에【마 23:1-7, 막 12:38-40, 눅 20:45-47】 여념 없는 자들이 지운 짐을 이제는 벗어 던져버립시다.

 

 

과부의 두 렙돈 기사는 헌금강조용인가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눅 21: 1- 4)………………………………………………………… (글 : 오세용 2007. 09. 26)



누 가복음 21장 1- 4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과연 이 본문이 헌금에 관한 것일까, 헌금을 강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래 들어온 설교들이 모두 그랬기에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이 과부처럼 정성껏 혹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을 보시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넣는 것 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크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칭찬하신 일이 이것이니 우리가 헌금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칭찬해도 되지 않는가?”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가진 소유의 비율을 볼 때 과부가 바친 헌금은 전부입니다. 다른 부자들은 많이 바쳤습니다. 과부가 바친 돈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의 거액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바친 많은 금액은 한마디도 칭찬하지 않고, 이 과부가 바친 적은 것은 왜 칭찬하셨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단순히 액수의 많고 적음만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비율적으로 헌금액수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이 명쾌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이 헌금 평가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의 헌금 생활을 반성하라는 뜻이 있지 않겠는가? 저 가난한 과부를 본받자. 하나님을 우리 영혼의 구주로 참으로 믿고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그에게, 그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저 가난한 과부처럼 정성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자.”


이 본문이 과연 그러한 말씀인가 생각해보려고, 몇가지를 관찰하여 보았습니다. 본문 3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 수님께서 성전에서 두렙돈 헌금하는 과부를 본 후에 그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본문이 마가복음(막 12: 41-44)에도 기록이 되어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막 12 :43)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 얘들아 내가 오늘은 너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마…. 내가 오늘 성전에 갔더니…’  하면서  제자들에게 헌금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들은 금과 은도 없거니와 두벌 옷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헌금을 할래야 헌금을 할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앞으로 너희들이 성도들을 관리할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하실리도 없습니다.

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듣는 사람이 제자들이건, 아니면 다른 사람이든 유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여자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그 런 말을 들었다면, 예수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먼저 했을까요? ‘아하, 저 여자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으니 나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니면 ‘아니, 그렇게 생활비 전부를 헌금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얼 먹고 산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마 유대사람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는 특별 보호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잘했다, 나도 그 여자를 본받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당시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열 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도대체, 그렇게 헌금을 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서기관들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여자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을 한단 말입니까? 서기관들과 부자들은 과부가 그렇게 헌금을 하는 것을 보고도 가만 있었습니까?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헌금을 중요시 여겨 사람들에게 헌금을 가르친 말씀이라고 가르친 것이라 한다면,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이 본문은 결코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그런 용도로 사용한다면, 한마디로 예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앞뒤 문맥을 한번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21장은 20장에 이어서 나오고 있으니 20장 마지막 구절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0장 45절-47절입니다. 47절, 그들(서기관)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원래 성경이 쓰여질 때에는 장, 절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장을 나누고 절로 구분하여, 성경을 찾고 읽는데 편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경우 본문의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는 과부의 두 렙돈 기사가 12:41-44에 나오고, 그 다음 장인 13장 1- 3절까지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5절부터 예수님은 다가올 심판, 예루살렘의 멸망, 말세의 징조 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맨 먼저 46절에서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바로 뒤(눅 21:5—6)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20장 45- 47 서기관 …과부
21장 1- 4절  과부 …두 렙돈 헌금
21장 5절  성전 ..미석과 헌물
21잘 6절 성전 ….무너짐

그러니 이렇게 말을 이어가며 뜻을 해석해야 합니다.
20장 47절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21장 4절 (가산을 뺏긴) 과부들은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헌금을 하고….. ..
21장 5절 (그러한 과부들은 돌보지 않고) 성전은 과부가 헌금한 헌물로 호사스럽게 꾸며지고 ….
21장 6절 그러한 성전이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이 렇게 연결이 되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율법학자들에게 경고하심으로 시작하여 성전이 무너질 것이다, 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중인데 중간에 본문을 뚝 떼어내어 헌금을 잘 하라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면 이 얼마나 엉뚱한 해석입니까?

그러니 오늘 본문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과부 즉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고, 또한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성전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등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골몰하여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경고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지 금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특별히 본문 말씀이 교회 개혁을 위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교훈을 찾기는커녕 이 본문을 거두절미하고 뚝 떼어 내어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오용하고 있으니, 정말로 한국교회가 얼마나 매(?)를 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사장들을 향한 말라기 선지자의 책망

말라기 3:8-10 은 술사(術士)의 주문이 될 수 있는가?…………………………………… (글 : ?  )


앞 에서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었던 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부산의 C목사님은 누구나 흔히 그러는 것처럼 말라기서를 가지고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셨는데 과연 말라기 선지자가 그런 뜻에서 말했을까요? 여기에서 그의 진정한 속 뜻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한국의 목회자들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7-12절을 우선 읽어 봅시다.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 리는 항상 성경을 읽을 때 읽고 있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과 문맥을 조심스럽게 먼저 살펴보고 읽는 습성을 길러야 합니다. 전체의 내용과 문맥을 무시하고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하여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위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라기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말라기서가 기록된 시기는 스룹바벨 성전과 제사장들의 부패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성전재건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전 539 년경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고대 근동지역을 지배했던 나라였습니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성전을 재건하기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재건하고 수 십년이 지나도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 영광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흉년과 기근이 들어 고통의 나날이 연속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의 형통을 부러워 하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의심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잘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들이 신실했는데도 불구하고 재앙이 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며, 형식적으로 제사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은 흠 없는 것이어야 했는데도 제사장들은 좋은 것은 자기들이 차지하고 흠있는 것을 골라서 희생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그렇게 해도 괜챦다고 가르쳤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했으며,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면 율법에 명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라기서는 주전 약 430 년경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던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1장 6절을 보세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2장1절에도 "너희 제사장들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2장10절에 가면 "우리는"이란 말이 나옴으로써 유대 백성들을 향한 책망이라고 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3장 8절로 가면 헌물을 도적질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헌물은 이미 백성들이 성전에 바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제사장들을 향한 책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물
(תּרמה ㆍ תּרוּמה 테루마 | 기부금, 조세, 제물, 거제)이 란 유대인들의 3대 절기에 바치던 것입니다. 헌물은 원래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헌물을 잘못 냈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백성들이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을 제사장들이 도적질했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그러한 도적질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가 1장에 나타나 있음이 그 증거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너를 가납하겠느냐”(말라기 1:7-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14)

위에 나오는 더러운 떡이나 눈먼 희생, 저는 것과 병든 것, 토색한 물건.. 등등은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가지고 온 것들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은 제사에 쓰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15:21). 그러나 제사장의 입에는 율법이 있어 그러한 행위를 막는 것이 당연했지만 제사장들은 부패하여 대강 제사를 드리고 자기에게 돌아올 양식이나 돈만을 챙겼던 것입니다. 말라기 본문에 나타나는 '희생을 드린다'는 말은 백성들과는 상관이 없는 제사장들과 관련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제사장들의 부패상입니다.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적질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백성들이 아니라 제사장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3장8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면 본문의 의미가 뚜럿하게 나타납니다. 말라기 3잘8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라는 반문을 할 수 있는 자들은 결코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1:10과 2:3을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우리말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것' 또는 '나의 것' 또는 '주의 것'이란 단어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을 해놓는 바람에 십일조에 대한 오해가 가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바
(קבע 카바 | 강탈하다, (덮어)속여 빼앗다)'라는 단어는 영어의 Cover와 같이 '덮다' 또는 '속이다' 또는 '속여 빼앗다'라는 의미로써 백성들이 가져온 희생제물을 제사장들이 속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에 대한 도적질은 굳이 말라기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라기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느헤미야도 여기에 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13:4-14까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를 보면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주라고 바친 십일조를 제사장들이 중간에서 빼돌리고 성전 창고를 다른 곳에 사용한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히 성전의 일을 돌보던 레위인들은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도적질하는 자들 때문에 받지 못해서 성전에 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으므로 성전은 피폐되었기 때문에 말라기 선지자가 이때 나타났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총독은 급기야 십일조를 조직적으로 거두기 위하여 전국적인 감독체제를 갖추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10:38과 12:44에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감독들을 시켜 타작마다에 직접 가서 십일조를 거두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느12:47).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없는 동안에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 도비야의 세간들을 모두 끄집어내서 밖에 내던지고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하여 성전을 회복했던 것입니다(느13;12).
느헤미야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빼돌리는 제사장들을 모두 갈아 치우고 사람을 세워 십일조를 관리하도록 했습니다(느13:13).

이렇게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빼돌린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책망의 말씀을 가지고 부요의 원칙이니 뭐니 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곡해하는 행위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그저 난감할 따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터 배우라
그분의 말씀을 알고 믿으라 ………………………………………………………………………………………… (글 : e-GOT 2007. 11. 11)



「작 성자: lovesbabo (2007. 11 .10) ::: 마5:19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문 : 1. 이를 = 율법이 아닌지요? 2.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 -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라는 뜻이 아닌지요?」


앞뒤 성구는 무시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성구만 쏙~뽑아다가 자신의 논리에 맞춰 끼우는 문자적 도구화는 결코 좋지 못합니다. 그 구절이 뭔가를 설명하기 위한 부분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는 곧 오류와 왜곡을 낳기 때문입니다.


유 대인들이 안식일 마다 읽었던(행 15:21, 행 13:27)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분(요 1:14),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분(눅 6:5, 막 3:28, 마 12:8), 참 성전 되신 그분(요 2:21)”인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가리키는 손과 같습니다(요 1:36, 마 3:13-17, 막 1:9-11). 즉 점 없고 흠 없는 자가되라는 율법의 결국도(눅 16:29.31) 주를 만나 죄사함 받고 두 번째 나타나실 때에 주께로 진정한 의인이라 인정받아 영생을 얻기 위한 것이기(신 4:29, 신 30:6) 때문입니다(요 11:25-26, 요 17:3). 오늘날의 신학의 역활도 결코 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딤전 4:5). “…… 그는(칼 바르트) 항상 복음을 새로이 가리키는 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세례요한의 손 이상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하나님과 이웃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나름대로 노력한 것을(신학) 나중의 사람들이 훨씬 더 잘해 주길 바랬다.……” ― 이신건


율 법과 선지자의 말한 것을 채워서(마 5:17) 다 이루실(마 5:18) 그분이야 말로,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는 바리사이 해석자와 서기들(마 23:4, 눅 11:46)과는 달리 진정한 선생님이요 진정한 지도자요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이기(마 23:8-10) 때문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그분을 증언하고 지향(志向)하며 그분의 모습을 묘사하고 표현하고 알리려했던 것일 뿐 실체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율법과 선지자가 사소하고 작게 언급한 것도 본체인 그분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버려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거기계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터 배우라는 것입니다(마 5:19). 이렇게 말씀하신 후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문자적 해석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해석을 내보이신 겁니다(마 5:21-48, 마 7:29, 막 1:22, 눅 4:22).


믿 음이 더욱더 자라서 장성하고 싶으십니까? 그럼 믿음을 자라나게 못할 겉만 번지르르한 거짓 해석과 율법적 흉내내기인 ‘십일조, 주일성수, 새벽기도, 일천번제, 성전건축?…’등등에 하찮은 보조수단들을 떠나 하나님 말씀을 읽고 거기서 말씀하시고 계신 그분을 발견하여 그분께로 부터 배워 나가십시오.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바로 그 하나님뿐입니다(고전 3:6-7).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번제물을 희생제물에 섞어 그 고기를 먹어치워라. 내가 너희 조상을 에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올 때 그들에게 번제물과 희생제물에 대하여 이야기하거나 명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명령을 그들에게 내렸다. “내 목소리에 순종하여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길만을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되리라.”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너희 조상들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목덜미를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요,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나님 목소리에 순종치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 (렘 7:21-26)


당신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시리이다.” (시 51:16)

내 백성아, 듣거라. 내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아, 나 너를 거슬러 증언하노라. 나는 하나님, 너의 하나님이로다. 너의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려는 것이 아니니 너의 번제야 늘 내 앞에 있도다. 나는 네 집에 있는 수소도, 네 우리에 있는 숫염소도 받지 않노라. 숲속의 모든 동물들이며 수천 산들의 짐승들이 내 것이기 때문이니라. 나는 산의 새들을 모두 알며 들에서 움직이는 생물들도 내게 속한 것들이로다. 내 비록 배고프다 하여도 네게 말하지 않으리니 누리와 그를 채운 것들이 나의 것이기 때문이니라. 내가 황소의 고기를 먹고 숫염소의 피를 마시기라도 한단 말이냐? 하나님께 찬미로 제사를 드리고 지존께 네 서원을 채워드려라. 그리고 불행의 날에 나를 불러라. 나 너를 구하여주고 너는 나를 공경하리라.” (시 50:7-15)

“ 저는 가련하고 고통 중에 있나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송가로 그분을 칭송하리라. 이것이 주님께는 더 좋도다, 수소들보다 뿔 달리고 굽 갈라진 황소들보다. 가난한 이들이 이를 보고 즐거워하리라.” (시 69:29-31)


‘주 저의 하나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기적과 계획 들을 많이도 행하셨으니 그 누구도 당신께 견줄 수 없나이다. 제가 알리고 말하려 해도 헤아리기에는 그것들이 너무나 많사옵니다. 당신께서는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주셨나이다. 번제와 속죄제를 당신께서는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두루마리에 저에 대하여 쓰여있나이다. 저의 하나님, 저는 당신의 뜻 행하기를 즐기며 제 가슴속에는 당신의 가르침이 새겨져있나이다.”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께서는 알고 계시나이다. 당신 정의를 제 마음속에 감추어두지 아니하고 당신 성실과 당신 구원을 이야기하며 당신 자애와 당신 진실을 큰 모임에서 숨기지 않나이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게 당신의 자비를 거절하지 않으시니 당신 자애와 당신 진실이 항상 저를 지켜주리이다.’ (시 40:6-10)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두루마리 책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히 10:5-10)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이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예지이다.’ (호 6:1-6)

이스라엘아! 주 너의 하나님께 돌아오너라. 너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나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 (호 14:1-3)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합니까? 번제물을 가지고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까? 수천 마리 숫양이면, 만 개의 기름 강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미 6:6-8)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찐 짐승의 기름기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을 저지르기를 그만두고 선을 행하기를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주어라.” (사 1:10-17)

“너희는 베델로 오너라. 그리고 죄를 지어라. 길갈로 오너라(거짓 산당 거짓 성당 거짓 교회당). 그리고 더욱더 죄를 지어라. 아침에 희생제물을 바치고 셋째 날에 십일조를 바쳐라. 누룩 든 빵을 감사 예물로 살라 바치고 큰 소리로 자원 예물을 공포하여라. 이스라엘의 자손들아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 주 하나님의 말씀이다.” (암 4:4-5)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제물 바치는 것을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삼상 15:22-23)


‘예수님께서 그 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 9:9-13)

註) ― 근동 특히 팔레스티나에서 식사는 사람들 사이의 일치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때라고 생각하였다. 율법 준수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세리와 죄인”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피하였다. 더구나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 곧 부정(不淨)한 자의 초청을 받아들이시어, 다른 많은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유다교 랍비들의 중요한 거짓 규정을 의도적으로 깨뜨리신다.

‘ 그 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들이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 12:1-7)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
한국교회가 설교 홍수 속에 있지만 말씀은 기근 ……………………………………………………… (글 : 정 병 선 2007. 11. 09)



본문: 마가복음 11장 12~25절


드 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성전에 들어가셨다.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성전에 들어가셔서 구석구석을 둘러보셨다. 어떤 제자는 성전의 외형을 보고 그 규모와 위용에 놀란 나머지 ‘얼마나 굉장한 돌이며 건물이냐’고 감탄을 하였는데(막 13:1), 예수님은 성전의 외형을 보지 않고 내부와 구석을 살폈다.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았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성전에 있을 수 없게 되자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내려가 밤을 보냈다. 


이 튿날 다시 예루살렘에 가려고 베다니를 떠나는 길에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던 예수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멀리 있는 것을 보시고, 혹시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갔다. 가보니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다. 아직은 열매 맺을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열매 없는 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막 11:14)며 저주를 퍼부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라는 거야 예수님도 아실 터. 그런데 어찌하자고 저주를 퍼붓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 ‘철’을 ‘계절’로 이해하면 혼란이 생긴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철’은 무화과 철을 가리키는 계절상의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때를 나타내는 종교적인 용어, 마가가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막 1:14~15)고 말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용어(kairos)라는 사실을 알면 더 이상 헷갈리지 않는다.


마 가는 본문을 구성할 때 치밀하게도 ‘하나님의 때’를 의미하는 종교적 용어를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도입함으로써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종교적 차원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곧바로 이어지는 성전 이야기와의 연결 고리를 맺어준다. 다시 말하면, 본문은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통해 성전 이야기를 읽어야 성전 이야기가 제대로 읽히고, 또 무화과나무 이야기도 성전 이야기를 통해 읽어야 제대로 읽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강도의 굴혈이 된 성전


이 튿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다시 성전에 들어가셨다. 성전에 들어가자 성전 안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성전 뜰에는 희생 제사로 드릴 소·양·비둘기 등을 판매하는 자들과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성전세로 사용되는 세겔을 교환해주는 환전상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종교적인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희생 제사에 쓰는 기구를 가지고 아무나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등 성전은 말할 수 없이 무질서했다. 예수님은 그런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었다. 성전이 상업적으로 운용되고, 종교적으로 기능화 되어버린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은 가차 없이 상업상의 거래를 중단시키고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성전을 가로질러 종교의식에 필요한 물건 운반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성전의 종교의식도 중지시켰다. 


그 리고는 여느 때와 똑같이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치는 가운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막 11:17)며 정곡을 찌르는 말씀도 서슴지 않았다. 아! 강도의 소굴이라!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하다. 요즘 네티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노골적이고 신성모독적인 언사가 아닐 수 없다. 이 행동이 예수님의 행동이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데 익숙해 있지만, 세속화되었다고 하는 현대 교회에서조차도 누군가가 교회를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교회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팔매질을 당할 언사를 내뱉었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은 여간해서 중심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왜 이처럼 중심을 잃은 듯한 언행을 하셨을까? 


그 당시 유대 종교의 실상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성전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환전상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자기들만의 상호 이익을 보장하는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고, 모든 이익은 그들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본래 성전은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곳으로 만민에게 개방되어야 한다.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통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성전의 비전이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성전의 비전을 저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물 론 유대 종교의 외피를 보면 결코 피폐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성전을 떠날 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성전을 보고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막 13:1)라며 감탄할 정도로 위용이 대단했다. 또 성전 마당이 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종교적인 활동도 활발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세를 바치고, 희생 제사를 드리며, 말씀과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결코 말라비틀어진 죽은 종교가 아니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성전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오래 전에 말한 것 그대로였다.


“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라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보았다.”(렘 7:10~11).


그 랬다. 예레미야가 지적한 대로 성전은 도둑들이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는 곳이 되어버렸다. 온갖 죄악을 범하고, 탐욕에 이끌려 과부의 가산을 강탈하고도 성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숨길 수 있었고 포장할 수 있었다. 성전은 온갖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는 방패막이였다. 당시의 유대 종교는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 바로 그것이었다.


이익에 눈먼 종교지도자들과 진리 들을 줄 아는 백성


예 수님이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가감 없이 말씀하고, 성전 중심의 종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말하며 비참하게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을 예고하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주변부를 건드릴 때는 적의를 표출하지 않았지만 저들의 체제와 이익의 중심부를 뒤흔들고 위협한다고 생각될 때는 여지없이 사나운 발톱을 드러내며 죽일 방도를 찾는 것이 저들이었다.


저 들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백성들을 진리로 자유케 하거나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저들의 관심사는 언제나 자기들의 이익이었다. 저들이 좇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익이었다. 그런데 진리는 언제나 현실적 이익에 반한다. 진리가 이익을 동반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때문에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가려야 했다. 진리를 가리지 않으면 이익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에 이익을 쫓는 자는 진리를 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진리를 가로막고 억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반 면에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 갈릴리와 이방에 살던 주변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던 것처럼 예루살렘의 군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다. 백성들은 우둔한 것 같지만 진리를 들으면 깨우친다. 백성들이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는 것은 듣지 못해서다. 이익에 집착한 종교지도자들이 포장된 진리, 왜곡된 진리, 자기들 이익에 부합되는 거짓 진리만을 말하기 때문에 진리를 듣지 못해서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지 진리를 정직하게 들려주면 백성의 귀는 열린다.


그 러기 때문에 이익에 눈먼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귀가 열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백성들의 귀가 열리면 자기들의 거짓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여, 저들은 할 수만 있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의 귀를 열어주는 자를 제거하려 한다. 참 진리를 듣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제도와 권력으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에게 그랬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에게 그랬으며, 오늘의 교회도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의 귀를 막으려 한다.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의 입을 막으려 한다. 그것도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또한 진리의 이름으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


바 로 이것이 교회의 역사요, 종교의 역사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귀를 틀어막고 입을 틀어막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요, 교회의 역사였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막으려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을 들려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듣는 자가 있게 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희망이 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시피 하나님나라는 만민에게 개방되어 있다. 듣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은혜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하나님께 나와 듣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하 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렇다면 기도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기도는 소통이다. 기도는 소통의 종교적 표현이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전부이며, 알파요, 오메가다. 더 이상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부활하신 것도,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을 만드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것도 피차 소통하기 위해서다. 하나님나라도 하나님과 만물이 소통하는 나라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니다. 때문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은, ‘만민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집’이라는 말로 읽을 수 있다.

하 지만 이 소통은 조직이나 제도로 되지 않는다. 훈련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 공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이 소통을 돕는 하나의 방편일 수는 있지만, 그런 것들로 소통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소통의 길은 오직 하늘로부터 시작된다. 소통은 은혜요, 선물로만 존재한다. 그러기 때문에 소통인 기도는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업적이 될 수도 없으며, 축복을 받는 도구로 동원될 수도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일 뿐이다. 기도-소통은 진실로 신앙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본질이다.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


예 수님의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비유이지만 단순히 비유만은 아니다. 비유이면서 동시에 사실이요, 사실이면서 동시에 예언이다. 실제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저주를 받은 무화과나무가 정말 뿌리 채 말라 죽어 있었다. 베드로는 전날 일이 생각나 예수님께 말했다.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막 11:21) 이 말을 할 때 베드로의 가슴이 어땠을까? 아마 놀라는 정도를 넘어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두려움 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이 어떠함을 보고 놀라기도 했겠지만,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가 뭔가를 암시하는 것 같다는 직감 때문에 더 놀라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 렇다.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은 이스라엘의 미래, 성전 신앙의 미래를 보여주는 예언이었다. 무화과나무가 죽은 것처럼 이스라엘의 미래, 성전 신앙의 미래 또한 그러할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호하며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 11:11)라고 외쳤지만, 실제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와 같은 운명이 될 것임을 예언적으로 보여주었다.   


기도하는 집의 위력


성 전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성전 신앙의 운명이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처럼 될 것임에 반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진정한 능력을 행사하는 참 자유의 집이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말라 죽어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라고 충격적인 말을 하자, 예수님이 곧바로 기도 이야기를 하신다. 나는 이게 조금은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묵상해보니 뜻이 통한다.  


예 수님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대뜸 하신 말씀이 “하나님을 믿어라”(막 11:22)였다. 그리고 곧바로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막 11:23)고 했다. 연이어 용서를 말씀하셨다(막 11:25).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는 믿음·기도·용서다. 그런데 믿음·기도·용서는 이미 도래한 새로운 공동체의 본질과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증하는 요소다. 예수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편이나 방어막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될 것이고, 기도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막힘없는 소통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피차 용서하고 용서받는 공동체로서 허물과 죄악과 비난이 더 이상 기를 쓰지 못하는 공동체, 그래서 지금의 성전 공동체와는 질적으로 다른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이 결코 헛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특 히 믿음의 기도는 산을 옮긴다고 말한다. 당신의 말씀이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한 것처럼 믿음의 기도는 산을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고, 믿음의 기도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바로 거기에 기도가 있다. 기도는 단지 내가 믿는 것도 아니고, 내가 확신하는 것도 아니며, 원하는 것을 얻는 방편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럴 때 기도는 산을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


나 는 여기서 산을 단지 눈에 보이는 산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산은 단지 산이 아니다. 산은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통칭한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세상의 우상들을 통칭한다. 모든 사람들이 오르기 원하는 욕망과 성공을 의미한다. 산처럼 견고하여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돈과 명예와 세상적 가치를 의미한다. 이 높고 견고한 산을 어느 누가 어떻게 바다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 정말 정복할 수 없는 요새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한다. 높은 산을 바다에 빠뜨려버릴 수 있다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는 산을 허물어버릴 수 있다고.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서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아는 자는 세상의 우상들을 발로 찰 수 있다고. 세상의 우상들로부터 넉넉히 자유할 수 있다고. 그렇다. 나는 바로 이것이 기도의 진정한 능력이라고 믿는다. 세상의 우상들 앞에 절절매지 않는 능력, 세상이 우러러 보는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길 수 있는 능력, 그런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기도의 저력이라고 믿는다.


기도의 홍수 속에 기도의 빈곤?


교 회와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돈이나 권세나 외적인 거룩함에 있지 않다. 오직 기도에 있다. 아니다. ‘기도’조차도 많이 왜곡되고 오염되어서 ‘기도’라고 하면 자칫 뜻이 와전되어버릴 수 있다. 하여, ‘기도’보다는 ‘하나님과의 소통’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과의 소통,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요, 교회의 근본이며, 능력의 근원이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은 채로 종교적인 활동만 무성하고, 종교를 빙자한 상거래의 장이 되어버린 성전은 더 이상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담아낼 수 없다. 그런 성전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뿌리째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처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막 13:2).


하 지만 기도하는 집이 되면, 하나님을 움직이는 종교적 수단으로써의 기도가 아니라 소통으로서의 기도하는 집이 되면 비록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 할지라도 높은 산을 바다에 던져버릴 수 있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 역사의 중심-하나님나라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주님은 교회를 향하여 한 가지 기대를 갖고 계신다.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그래서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허물어뜨리기를.


그 런데 한국교회의 기도소리는 크고 높으나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허물어뜨리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우러러보며,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다. 기도로 열심히 세상의 우상들을 손에 넣게 해달라고 조른다.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라고 소문은 자자한데 산을 바다에 빠뜨리지 못하고 산으로 기어오르기 바쁘다. 무엇 때문일까? 진정으로 기도하는 집이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설교의 홍수 속에 있지만 말씀의 기근이듯이, 기도의 홍수 속에 있지만 기도가 빈곤한 건 아닌지….

 

이것들 중 만들어진 것과 버리지 말아야할 것은 과연 무엇?
버릴 것과 버리지 말 것을 옳게 분별하라(마 23:23-24, 눅 11:42)………………………………………………… (글 :  e-GOT 2007. 10. 12)



¤【마 23:23-24】°화로다 바리사이 해석자들과 너희 서기들아, 박하와 양념과 회향의 십일조로 인해서 율법의 중요한 판정과 긍휼과 믿음은 내어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내버릴 것도 아니다. 눈먼 인도자들이 날벌레는 걸러내나 낙타는 단숨에 삼키도다.

{° ουαι υμιν γραμματεις και φαρισαιοι υποκριται οτι αποδεκατουτε το ηδυοσμον και το ανηθον και το κυμινον και αφηκατε τα βαρυτερα του νομου την κρισιν και το ελεος και την πιστιν (우아이 휘민 그람마테이스 카이 화리사이오이 휘포크리타이 호티 아포데카투테 토 헤뒤오스몬 카이 토 아네똔 카이 토 퀴미논 카이 압헤카테 타 바뤼테라 투 노무 텐 크리신 카이 토 엘레오스 카이 텐 피스틴, 화로다 바리사이 해석자들과 너희 서기들아, 그 박하와 그 양념과 그 회향의 십일조로 인해서 율법의 중요한 그 판정과 그 긍휼과 그 믿음은 내어버렸도다) ταυτα  | δε | [δε] |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 αφειναι | αφιεναι | (타우타 | 데 | [데] |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 압헤이나이 | 압히에나이 |, | 그러나 |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 내버릴 | 내버릴 | 것도 아니다) ° οδηγοι  τυφλοι | | οι | διυλιζοντες  τον  κωνωπα  την  δε  καμηλον  καταπινοντες (호데고이 튑흘로이 | | 호이 | 디윌리존테스 톤 코노파 텐 데 카멜론 카타피논테스, 눈먼 인도자들이 그 날벌레는 | | 그 | 걸러내나 그 낙타는 단숨에 삼키도다)}



¤【눅 11:42】°또한 화로다 너희 그 바리사이들아,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로 인해서 판정과 하나님의 사랑은 지나쳐버렸다.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지나쳐버릴 것도 아니다.

{° αλλα ουαι υμιν τοις φαρισαιοις οτι αποδεκατουτε το ηδυοσμον και το πηγανον και παν λαχανον και παρερχεσθε την κρισιν και την αγαπην του θεου (알라 우아이 휘민 토이스 화리사이오이스 호티 아포데카투테 토 헤뒤오스몬 카이 토 페가논 카이 판 라카논 카이 파렐케스떼 텐 크리신 카이 텐 아가펜 투 데우, 또한 화로다 너희 그 바리사이들아, 그 박하와 그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 로 인해서 그 판정과 그 하나님의 사랑은 지나쳐버렸다) ταυτα  δε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παρειναι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파레이나이,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지나쳐버릴 것도 아니다)}



앞의 두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과연 율법에선 십일조를 누가 무얼 드렸는지와 또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가 판정 긍휼 확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어야한다.


율법에서 말하는 십일조는, 하나님께 땅을 대여 받은 자들(레 25:23)과 십일조의 수혜자인 레위인들이(민 18:25-29) 내 는 것이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이 농경과 목축 사회였음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따라서 땅을 대여 받지 못한 노예, 어부, 물건을 만들어 파는 장인들.. 등은 십일조라는 율법의 의무에서 빠져있는 자들이다. 땅이 있어야 희년에(레 25:8-22) 맨 처음 대여 받았던 자의 자손이에게 땅을 되돌려주는 것이 가능해 지고(레 25:23-28, 민 27:6-11, 롯 4:1-12, 렘 32:8), 땅이 있어야 안식년(레 25:1-7)도 지킬 것이 아닌가? 또 땅이 있어야 그 소산물인 곡물과 과실과 굽이 갈리고 되새김질 하는 정결한 가축을 바칠게(레 25:30-33) 아니겠는가?


이런 이유로 한참 후대의 바리사이 해석자들은(υποκριτης 휘포크리테스 | 대답하는 사람, 해석자, 통역자, 배우, 연극배우, 위선자) 율법에서 빠진 이들 중 누구까지 십일조를 내야 되는지, 율법에서 빠져있는 이들 작물 중 어디까지 십일조를 해야 되는지 신학적으로 정립(Mishnah, 미쉬나 : 미쉬나는 대부분 기원 70-220년경에 생존한 랍비들의 토론에서 성립되어 있다. 이들의 율법적 토론은 점차로 집성되고, 탄나임으로서 알려지는 학자의계속적 노력에 의해 성문(成文)으로 되었다)하는데 논쟁하고 답하는 걸로 소일할 만큼 온 종일을 매진했다. 이런 해석자들의 연구를 모으고 편집하는 자가 바로 서기관들이다(γραμματευς 그람마튜스 | 서기, 필사자, 비서, 기록자, 성경에서는 모세의 율법과 성경을 배운 자, 해석자, 교사). 이들 모두에겐, 십일조의 본질을 이해하기 보다는 ‘십일조 할 것과 안할 것’을 결정짓는 세부조항의 확장이 더 중요했다. 연구하고 논의하며 가르치고 기록할 방향이 틀린 것이다.


~ ταυτα  | δε | [δε] |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 αφειναι | αφιεναι | (타우타 | 데 | [데] |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 압헤이나이 | 압히에나이 |, | 그러나 | 이것들을 만들어서 할 의무가 있는 것도 | 내버릴 | 내버릴 | 것도 아니다)’, ~ ταυτα  δε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παρειναι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파레이나이,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지나쳐버릴 것도 아니다)(이것들은 만들어서 할 필요가 없고 이것들은 지나쳐버려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이 바로 이것들에 관해서 이다.


박하(ηδυοσμον 헤뒤오스몬 | 달콤한 냄새, 박하), 양념(ανηθον 아네돈 | 아니스, 딜(향신료나 약재로 사용되는 식물)), 화향(κυμινον 퀴미논 | 회향, 쓰고 강한 맛과 향기로운 맛을 가진 씨를 가진 팔레스타인에서 재배되는 식물), 운향(πηγανον 페가논 | 운향풀, 약효를 지닌 약 60 cm(2 피트)정도의 관목), 모든 채소(παν  λαχανον 판 라카논 ; λαχανον 라카논 | 풀, 채소). . . . . . (και) 판정(κρισις 크리시스 | 분리, 절단, 분할, 선택, 판정, 판결, 재판관의 단체, 정의) 긍휼(ελεος 엘레오스 | 자비, 긍휼) 확신(πιστις 피스티스 | 진리에 대한 확신, 믿음, 충성, 충실, 성실) 하나님의 사랑(την  αγαπην  του  θεου 텐 아가펜 투 데우 ; αγαπη 아가페 | 형제의 사랑, 애정, 선의, 사랑, 자비, 사랑의 제사) 이러한 것들(ταυτα 타우타 | 이것들, 이러한 것들) 중에서 ‘필요 없이 만들어서하고 있는 것과 무심히 지나치지 말아야할 것’을 구분하라는 것이다.


너희들이 만든 세부 조항(유전, 의문)으로 걸러낸(διυλιζω 디윌리조 | 여과하다, 거르다, 여과기를 통해 쏟다, 물기를 빼다) 티끌만한 날파리를(κωνωψ 코놉스 | 포도주를 발효시켜 증발시키는 포도주 각다귀 또는 모기붙이) 가지고(레 11:20-23, 신 14:19) 의미 없이 말장난할 필요(εδει 에데이 | 필요하다, 의무가 있다, 옳고 적합하다)도 없고(κακεινα  μη 카케이나 메 ; κακεινος 카케이노스 | 그리고 그는, 그 역시 ; μη 메 | 아니다, 하지 않도록, ~도 아니다), 율법의 의미(본질)로 더 훨씬 무겁고 중한(βαρυς 바뤼스 | 무게가 무거운, (비유) 짐스러운, 엄한, 대단히 중요한, 잔인한) 낙타를(καμηλος 카멜로스 | 낙타) 너희는 잡아내지도 않았다(κακεινα  μη 카케이나 메 ; κακεινος 카케이노스 | 그리고 그는, 그 역시 ; μη 메 | 아니다, 하지 않도록, ~도 아니다)함이니, 바리사이 해석자와 서기들의 재앙이다(ουαι 우아이 | 아아, 슬프도다, 화로다). 하찮은 양념들의 십일조에 대해 훈계당하는 사람들의 잘못이 아닌, 무지와 무감각과 어둠에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너희 소경된 인도자의(οδηγοι  τυφλοι 호데고이 튑흘로이) 잘못을 혹독하게 질타하시니(마 7:3-5, 눅 6:39-42), 그렇게 박식하다 들먹거리던 율법사들이(νομικος 노미코스 | 법과 관련된 사람, 법에 정통한 사람, 신약에서는 모세의 율법 해석자나 교사) 욕으로(υβριζω 휘브리조 | 거만하다, 오만하게, 무례하게 행동하다, 거만하며 수치스럽게 행동하다, 나쁜 말로 상처를 입히다) 밖에 듣질 못한 것 아니겠는가(눅 11:45)?


십 일조를 강요하면서도, 정작 옳은 선택(정의)과 올바른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을 내보일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베품과 나눔을 무시해버린 저기 유대 바리사이들 보다 더 악랄하게 장성치 못한 코흘리개에게 조차도 십일조의 짐을 지우는(φορτιζω 프홀티조 | 짐을 얹다, 짐을 싣다, (관습과 부당한 교훈의)짐을 지우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결국 오늘날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문자적 해석을 내놓고, 율법적 흉내 내기 조항을 들이댄 눈먼 인도자들의 날파리식 십일조는, 과거 농경사회였던 유대공동체를 삼켜버린(καταπινω 카타피노 | 단숨에 들이키다, 삼키다, 게걸스레 먹다, 몽땅 없애다, 파괴하다) 것처럼 여기서도 그 위력을 떨칠 허상들 중 하나란 말인가? 미개한 이천년 전 바리사이보다 못한 지금을 어찌해야하나..

 

 

 

200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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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본인은 황금률 성공 개발뤈 원장 강경록 입니다. 저는 자기계발 원칙으로 20년간 연구하다가 성공하는 것을 성공책임합의 각서로 책임지는 신기술을 개발하여 2008년12월부터 10명에게 무료입증 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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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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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
성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로 돈이나 명예겠지
하지만 돈 많아도 죽음을 택하고 불행한 사람 많이 보지 않았는가?
돈이 많으면 돈때문에 자유가 없고 주위에 돈 때문에 다가오는 속이 시커먼 사람도 많다
명예또한 한번 잘못하면 끝장
어떻게 살아갔는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201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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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ha****
지존
국내가수, 사회문화, 인체건강상식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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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

 

세계는 돈의 의해서 구성되며,돈에 의해 유지된다

 

나는 생각한다,고로 돈이 최고다

 

돈에 돈을 돈의위한 일을 하라

 

돈은 없어지지 않는다,다만 잠자고 있을뿐이다

 

돈보기를 신처럼 하라

 

상대방이 부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라

 

네가 저금한 돈은  너에게 이자가 되어 되돌아 온다

 

모든 돈은 100원이상의 복리를 낳는다

세계는 충분한 원인, 곧 돈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천재는 1%의 노력과 99%의 돈이다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 속에서 부도를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이자를 찾아낸다

 

노력할수록 이자는 따른다.

꿈꿀 수 있다면, 100%이자도 가능하다.

 

훌륭한 돈이 훌륭한 말보다 낫다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라도 꼭 돈은있다.

2008.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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