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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외부에 비치는 기독교는 어떤 모습일까?
jesu**** 조회수 3,489 작성일2008.08.26

외부에 비치는 기독교는 어떤 모습일까?

아니 기독교인의 모습은 그들에게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까?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나는 늘 고민한다. 최근 ‘나쁜 그리스도인, 현대 기독교 이미지 평가 보고서’라는 설명이 덧붙여진 책 한 권이 번역 출판됐다. 왠지 ‘나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그 책에서도 말하고 있는 바처럼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그리스도인’라고 번역해 부르고 싶은 책이다. 수많은 연구 조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밝혀주고 있다. 비록 미국에서의 통계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도가 좀 더 심하지 않을까? - “외부인 중 37%가 현대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외부 젊은이들 중 17%는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극도로 기피하고 싶은 대상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기독교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한 것일까? “외부인들 중 4분의 1은 기독교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신앙의 변질’이라고 응답했다.” 결국 ‘변질’이 문제다. 한결같음이 사라진 것이다. 본성이 엉뚱한 것들과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진짜인 것처럼 위장해버린다. 기독교인의 부정적 이미지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위선’이라고 말한다.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인거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앞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변질이 무엇인가? 여기서 ‘말’한 것이 저기서 행하는 ‘행동’과 맞지 않는 것이다. 죄인이라면 죄인이라고 말해야 변질된 것이 아니다. 죄에 젊은 사람이 깨끗한 척 자기 혼자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예수 믿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우월한 척할 수 없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흠이 있기에, 그 흠 결로 인해 날마다 나의 뼈아프게 고백한다. 하지만 삶을 변화시키고 미래를 열어주시는 그분을 포기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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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와 예배당
    개념(槪念)부터 제대로 세우자 ……………………………………………………………………… (글 : ? 성문밖편지 中..)



교회와 예배당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 신앙의 공동체를 두고한 말이며, 예배당은 그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소를 특정 건물로 만들고, 그 장소를 신당이나 혹은 무슨 사원처럼 꾸며놓고, 그 건물 혹은 장소에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성직자를 구별해 따로 세우고, 하나님께 예물(헌금)을 바치게 함으로 그곳이(장소) 당당한 교회로 인식이 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라 하면, 일단은 건물을 교회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60년대만해도 예배장소에 예배당이라고 간판을 써붙인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때부터인가 건물에 교회란 간판을 부착한 교회들이 늘어났고, 지금은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교회라고 했을때, 건물을 교회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장소)에 나가는 사람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그 교회 교인 혹은 그 교회 성도, 그 교회 집사, 권사, 장로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성도, 즉 교회를 위해 예배당(장소)이 필요한 것이였지만, 지금은 예배당을 위해 성도(교회)가 필요한 결과가 된것입니다. 주께서 피흘려 사신 교회, 주께서 피흘려 부여하신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건물에 빼앗긴 채, 건물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오늘의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것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또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처소, 혹은 예배당과 교회를 혼동한체 열심만 갖고사는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만약, 예배당을 때려부수고, 사슬에 묶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반대하고 나설까요? 그것은 신앙심이 투철하다고 자랑삼는 소위 보수주의를 주장하는 분들이 앞장 설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됩니다. 과거 미국의 역사를 보면 그랬습니다. 흑인 노예 해방을 하자고 했을 때 가장 첨예하게 반대했던 사람들이 보수주의 미국남부교회 사람들 이였다는 사실이 증명해주고 있는것을 봐서입니다.

그래서 참 교회(사람)는 예배당을 섬기는 노예(?)가 되어,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돌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보다는 예배당(건물)을 섬기는것이 우선 되어야,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주객이 전도(主客顚倒)되었다, 고 말하는것 아닙니까? 왜 이런 현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교회당과 교회를 혼동하기 때문이랄수있고, 동시에 교회 공동체란 한계설정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현상일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일부 목사님들 중에는 그 장소를 "성전" 혹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성도들에게 인식을 시키고, 그 건물을 아름답게 건축하게 하고, 경건하게 하고, 소중하게 인식을 시켜, 교회당을 위해 아낌없이 봉사하게 만듭니다. 이와 같은 일은, 신당(神堂)에 신을 모시고 사는 이방 종교인들이 행하는 짓을, 성령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어둠의 자식들이 되게 했다는 것이 심각한 오늘의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것은 우리 자신들이 곧 교회라는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방 신은 신당에 모셔두고 신당을 찾아 섬기지만, 크리스천은 우리몸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몸을 성전이라 한것입니다.(고전 6: 19)

이 소중한 일을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고,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왜곡해서 예배당을 교회로 둔갑시키는 오류를 만들어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된것은 신당문화의 영향과 성직자(목사)들이 은연중에 자신들을 사제(司祭) 혹은 제사장이나 승려와 같은 중재자의 신분을 취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피흘려 사신바된 주의 백성(참 교회)들이 교회당이란 곳에 묶여, 목사 한 사람의 왕국을 위해서 혹은 목사기업 기능을 위해서 충성 봉사를 다해야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흑암권세의 포로들이 된것으로 봐야합니다. 교회당에 빼앗긴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들을 신자(교회)각 사람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고, 그 신분이 각 사람에게서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참 교회가 회복되는 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요, 주님의 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루터의 만인 제사장설의 주장을 한번쯤 되새겨 보면서, 오늘의 신자들의 처지를 가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중세교회를 두고, 사탄의회란 말을 했습니다. 사탄의 집단에 불과한 중세 교회를 떠나 개혁교회를 출발시켰지만, 지금의 교회상황은 중세 카톨릭보다도 더 사탄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면, 반드시 개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약시대의 성전에 관한 인식문제는 개혁의 중심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신앙이 성전이란 이름에 모아지고, 문제의 발생도 성전이란 이름에서 출발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전이라 말한것은 가시적 혹은 영적인것을 포함한 성전 전체 개념에 관한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 여기서 "성전된 자기 육체"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란것을 확인시킨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구약은 그리스도의 모형, 그림자, 비유, 등으로 설명 된것을 잘알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자기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긴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안식일, 둘째가 법궤, 셋째가 성전이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 실체는 사실 그리스도를 가르킨 모형에 불과한것들 이였습니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눅 6: 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요 1: 14 / 법궤는 말씀)
"성전된 자기 육체"(요 2: 21)

이와같이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폐기되고(성전 휘장이 갈라져 버리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으로 성전을 완성하신(다시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전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사실 교회 개혁을 말하게 된것은 땅에 다시 성전들이 등장하게 되고, 그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예수이름으로 포장된 신종 율법의 노예로 전락되어 땅의 건물(성전)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그런 교회가 없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 분들은 강단에 올라갈수 없다고, 교회법으로 정한 교단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교회들이 있을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배당은 하나님의 집(성전)이란 의식 때문이죠. 이같은 의식을 가진 분들의 생각은 그와 같은것이 가장 믿음이 좋은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혹 지금도 예배당을 신성시하거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처소나 집처럼 인식을 시키려 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 일은 하루속히 중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범죄 행위요, 하나님나라의 반역행위요, 주께서 피흘려 진리로 자유케한 백성들로 종교(성전)의 노예가 되게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행위는 그리스도의 값진 피흘리심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의 성막은 하나님의 임시 임재 처소 였다는것을 압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막을 대신해서 지어진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처소란 점에서 성전이란 말을 하게된 것입니다. 이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성취된 것이고,(요 2:21) 성전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분의 영(갈 4:6)이 오순절 성령으로 강림 하셨는데, 그 영(성령)이 임한 곳이 곧 성전이 된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어디로 임하셨는가?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요엘 선지의 말씀을 인용, "모든 육체에" 부어준 것이라 증거 함으로, 믿는자의 몸(마음)에 임한것을 말하고 있습니다.(갈 4:6)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 16) 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전은 성령이 임하신 믿는자의 각 사람의 몸이 성전이된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예배당을 지어놓고, 혹은 지으려 하면서 성전이란 말을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말하게 되면, 순진하기만한 신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게 됩니다. 이 일은,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목사 노릇을 한다 해도,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요, 주께로부터 부인(否認)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마 7:22-23) 일개 건축물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들먹이며 성전 운운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된 일이며, 수많은 영혼들을 어둠으로 이끄는데 그 사안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거짓을 가르쳐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고, 사람들을 수만명, 수십만명을 모은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는 아무런 유익이 없을뿐만 아니라, 범죄 행위가 될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대단히 거창하게 하기를 원하심이 아니요, 비록 사람들 보기엔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란 것을 분명히 인식했으면 합니다.(마 7:21, 마 25:34-40)

 

 

칼 바르트의 교회론

이신건 지음 <성광문화사. 1989, p.301>
[요약: 이 종 국]

서론

제1부: 초기의 교회이해(1913-1920년)

제2부: 변증법적 교회이해(1921-1931년)

제3부: 기독론적 교회이해(1932-1968년)

제4부: 칼 바르트와 카톨릭 교회(비교와 평가)

결론(요약과 평가)



서론

1. 바르트의 교회론의 의의

본서는 칼 바르트의 교회론을 그 결정적인 변천 속에서 기술하고 해석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의 신학은 조직적 체계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가 처한 시대적 정황 속에서 사색하는 예언자로서 분출해 놓은 외침이라고 해야 더 알맞다. 그의 교회론은 그의 신학의 기본적 통찰의 변화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또 그의 신학은 그가 처했던 시대적 정황과의 상관성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실로 바르트의 신학은 그가 자신과 세계 및 삶의 문제와 더불어 씨름한 투쟁의 소산임을 알아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단지 이론적 관시에서만이 아니라 그를 움직이고 감격시켰던 실제적인 물음에 참여하려는 관심에서 출발해야 한다.

2. 바르트의 신학의 교회성-교회의 신학성

"교의학은 자유로운 학문이 아니라 교회에 매여 있으므로써 의미있고 가능한 학문이다." 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교회야말로 신학의 실존근거이며 그 주체이다. 그는 개혁교회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며, 이러한 근본적 소여성은 가족, 학교 및 교회 속의 교육을 통하여 강화되었다. 개혁교회에서 형성된 젊은 시절의 경험이 바르트의 생애와 신학을 계속 규정지었다는 사실이다. 개혁교회의 첫 번 째 특징은 '말씀'에 대한 강조, 즉 경험적으로는 '설교의 교회'가 되고 신학적으로는'말씀의 교회'가 되려는 꾸준한 관심에 있다. 개혁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항상 개혁되어야 할 교회에 있다. 개혁이란 성서로부터 단순히 선험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교회의 상태와 성서본문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성찰의 결과로 얻어진다. "교회가 더 이상 개혁 중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곧 교회가 시련 속에 빠지고 비교회(非敎會) 속으로 추락하되 정말 구제 받을 가망 없이 빠져버린 것을 의미한다. " 바르트의 신학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꾸준한 특징은 그가 시종일관 교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신학적 실존은 '교회 안'의 신학적 실존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교회를 신랄히 비판하고 교회 파괴적인 발언을 토로한 경우에라도 항상 '교회를 위한' 신학적 실존이었다. 그의 교회론은 '위로부터' 획득되는 그러한 '신학성'에,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도론'에 종속되어 있다.

3. 본서의 개괄적 맥락(바르트의 신학과 교회론의 변천)

젊은 시절의 바르트의 신학에서는 다분히 인간중심적 사고가 지배했다. 그는 '교회'를 기독교적 경건을 도야하려는 관심에 의해 세워진, 본질적으로 교육적인 기관으로 이해했다.

제 I부에서 교회를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제 II부에서는 소위 '변증법적 신학' 시기에 나타난 바르트의 교회관이 다루어진다. 하나님의 불가시성, 피안성, 상이성. 소원성 및 은폐성, 인간과 교회에 대면해 있는 질문과 부정으로서의 하나님의 의미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불가시적·초월적인 실체로 이해되었고, 신개신교주의의 가시적 교회는 위기 속에 있다고 선언되었다. '성도들의 교제'마저도 가시적 친교가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 초월적·불가시적으로 통일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로마서 주석 제 2판이 출판된 지 얼마되지 않아 바르트에게 또 하나의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그의 신학의 척도와 동기였던 '하나님과 세계 간의 변증법적 원리' 대신에 이제 소위 '말씀의 신학'이 등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이제 그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두게 되고, 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는 교회'는 동시에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 '죄인들의 교회'로 정의된다. 바르트는 1926년부터 교회의 본질을 이전보다 더 긍정적으로 정의하여, 이를' 하나님이 설립하신 것'으로 정당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점차로 변증법적 교회관으로부터 결별하고 교회의 긍정적인 측면을 계약개념을 통하여 해명한다.

제 III부는 그리스도론적으로 규정되는 바르트의 교회관을 다룬다(1932-1968년). 제 1장은 교회관과 관련지어서 '기독교 교의학 개요'와 '교회 교의학'사이에 일어난 기본통찰을 고찰한다. 제 2장은 바르트가 독일의 제 3제국의 시절에 교회를 위해 투쟁하던 기간(1933년-1945년)에 나타난 교회관을 다룬다. 제3장에서는 '교회와 성서'의 관계에 관한 바르트의 견해가 다루어진다. 제 4장은 바르트의 '선택론' 내에서 다루어진 그의 교회관을 고찰한다. 제 5장에서 본인은 바르트의 화해론 속에서 다루어진 그의 교회관을 해명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서 그는 교회가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동 속에 정초되어 있음을 보았다.

제 IV부는 바르트의 교회론을 로마 카톨릭 교회론과 비교하고자 한다.


제I부 초기의 교회이해(1913년-1920년)

1. '거짓된 교회들'에 대한 항거

1)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

그의 지배적이고 특징적인 관심은 무엇보다도 매우 진지하게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사실에 있었다. 바르트는 베드로 수위권을 공박했다. 바르트는 교황계승에 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도 반박했다. 1913년 11월 2일데 행한 설교에서 바르트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문자의 기독교, 과거의 기독교라고 표현하고, 그것은 영의 기독교의 진정한 계승자인 종교개혁 신앙과 지금까지 대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은 다음과 같이 첨예화된다 : 그리스도가 카톨릭교인들에게 있어서는 기껏해야 제 2인자이지만,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제 1인자라고 하는 사실이다.

2) 신개신교주의에 대한 비판

세계 제 1차 대전의 발발은 바르트로 하여금 그를 심취시켰던 모든 종류의 자유주의의 경향으로부터 결별하게 만들었다. 그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존경했던 스승들이 모두 시대정신에 굴복하여 전쟁신학에 동조한 사실이었다. 로마서 주석 제1판에는 낭만주의, 이상주의, 경건주의 및 종교사회주의와도 투쟁한 그의 내면적 고심이 드러나 있고, 그 시대와 교회에로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번득거린다. 왜 교회가 궁지에 빠졌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한때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이 이젠 교회를 버리셨기 때문이다. 교회의 궁지는 그의 숙명이 아니라 잘못 때문이다. 그 잘못은 교회가 하나님께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만이 그의 사역 속에서 유일한 통치자가 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고, 그 결과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했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바르트는 괴테의 유명한 말 - "교회는 참 좋은 위(胃)를 가리고 있다." -을 인용하여 현실교회를 비판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뜻과 일을 인간의 목적에 유익하게 변형시키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안전한 길을 가려고 복음의 모든 거리끼는 요소를 제거하려는 당대의 교회,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지 않고 인간적 복리에 맞게 그의 일을 뜯어고치려는 당대의 교회,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려는 당대의 교회에 맞서서 맹렬히 항거했다.

3) 경건주의에 대한 비판

겔처에게 쓴 1917년 5월 26일의 편지에서 그는 경건주의자들을 '사탄의 교회'라고 혹평하고, 이 사탄은 이미 신약성서 안에서 결국 비틀거리고 있음을 본다고 말했다. 그의 비판은 대체로 두 가지 이유, 즉 개인주의와 기계주의에 근거를 둔 것이다.

⑴ 개인주의 : 바르트는 경건주의를 세상에 주어진 하나님의 대답으로부터 살지 않고 개인의 성취, 개인의 회심, 개인의 성화, 개인의 구원, 개인의 축복을 추구하는 개인주의라고 보았다. 바르트는 교회를 철두철미 유기적인 관계, 살아있는 친교와 공존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경건주의의 개인주의는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⑵ 기계주의 : 여기서 '기계적'이란 말은 구원을 자신의 행동으로 스스로 이루려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유기적'인 것에 대한 반대의미로서 사용된 용어이다.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 제 1판에서 하나님과 인간 및 세계 사이의 유기적 일치관계를 특히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자력적인 구원의 노력을 기계주의라는 표현아래서 공격했다.

2.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바르트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교회를 '공동체'로 이해하고 방어하려는 데 있었다. 교권계급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 인본주의적인 신개신교주의 교회 그리고 개인주의적인 경건주의 교회에 대항하여 그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을 부각시켰고,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 사상과 '하나님의 나라'사상에 접맥시켰다.

1) 그리스도의 몸

바르트의 의하면 교회란 더 높은 뜻에 의해 형성되고 보존되는, 내적으로 필연적인 공동체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받아들여짐으로서 이 세상에서 개인의 불행한 처지로부터 건짐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실존 안으로 들어 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2)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바르트가 말하려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요 그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세상 및 인간 간의 상실된 유기적 일치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요, 지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재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출현 속에서 빛나고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교회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교회는 집, 제도 혹은 사업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의 유기체요 그 공동체이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세상의 밭에 뿌리는 사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우월성을 부숴버린다.


제II부 변증법적 교회이해(1921년-1931년)

1. 교회관과의 관련 속에서 본 1919년과 1921년 사이의 기본관점의 변화

1) 유기적-불가시적

로마서 주석 제 2판에서는 가장 분명한 차이점은 '유기적'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그대신 '불가시적'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점에 있다.

2) 역사의 종말-원역사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로서 종말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고, 새 세계는 이미 교회 안에서 시작하고 있다. 즉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서 이미 터전을 잡고 있다. 역사의 종말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사상, 차안적인 세계의 종국으로서의 종말론 이해 대신에 초시간적인 '원역사'의 개념이 바르트에게도 등장했다. 원역사는 생명 그 자체 안에 출발점을 가지고 있고, 그러기에 그것은 '생성사'이다. '계시'의 개념을 더 자세히 정의할 수 있기 위하여 원역사의 개념을 사용했다.

3) 보편주의-개인

바르트는 하나님-세계-인간의 관계를 실존적인 관계로 해석함으로써 이를 실존화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개인의 개체성은 개인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결과이다. 교회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한 몸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개체이다. 교회를 공동체로 구성하는 그리스도도 역시 한 개체이다. 그는 교회의 일치의 근거이다.

2. 로마서 주석(제 2판)교회관

1) 교회의 위기

바르트의 두 번째 '로마서 주석'은 "엄청난 폭발과 같이" 그 당시 우세하던 종교주의적·인간중심적·인본주의적 신학을 강타했다. 바르트는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위기를 선언한다. 교회는 불가피한 재앙 속에 빠져 있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대립은 무한하다. 복음과 교회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어디서나 무한하다. 복음과 교회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어디서나 무한하다. 교회가 복음의 폐기이듯이 복음도 교회의 폐기이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교회가 위기와 재앙 속에 처해 있는 이유를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입장에서 해명하였다.

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본질, 소유 및 행위의 순수한 한계이시자 순수한 시초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정 속에 계신 긍정이시며, 우리의 긍정속에 계신 부정이시고, 처음과 나중이시며, 그러한 분으로서 미지의 분이시고, 결코 우리가 아는 많은 실체들 중의 한 실체가 아니다.

⑵ 교회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

복음과 교회의 무한한 대립이 교회를 위기로 몰아 넣는다. 교회의 버림받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하려는 교회 안의 인간의 시도가 심판 받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⑶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의 의이고 결코 원하거나 달리는 인간의 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어떠한 인간의 신실에 의해 제약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의 신실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이다. 교회의 위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의, 신앙, 기적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하고 입증하며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데에 있다. 교회가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없애 버리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것이고, 경건한 인간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의롭게 하고 구원하려는 것이다. 교회의 위기와 재앙은 "교회가 진정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적대감이 드러나는 곳이고 인간의 무관심, 오해, 저항이 가장 고상하고도 가장 유치한 형태를 취하는 곳이라는 사실 속에서 밝혀진다."

2) 인간의 가능성으로서의 교회

그는 교회를 하나님의 불가능한 가능성 앞에서 최종적인 인간의 가능성을 형체화한 것으로 파악했다. 바르트는 교회와 문화를 , 교회와 종교를 혼합하여 교회를 문화와 실체로 파악하려던 신개신교주의의 교회관에 대해 불가피한 수정을 가했다.

3)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의 교회

그의 비판은 종교, 문화, 경건주의, 관념주의와 같은 인간의 가능성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잘못된 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위기와 심판을 선언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지, 교회 그 자체에 대한 부정과 파괴의 행위가 아니었다. 참된 교회는 무엇이고,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기적의 교회다.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회개한 교회,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다. 죄인들의 교회다. 은총과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 교회다. 그런데 여기서 바르트가 참된 교회라고 이해하는 야곱의 교회는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변증법적 실체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4) 성도들의 교제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은 바르트가 장소나 역사, 회원이나 모임도 없는 비역사적. 변증법적 실체인 교회, 오직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가 주어질 때에만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사건인 교회를 또 한편으로는 "성도들의 교제"라고 칭했다는 사실이다. 바르트는 인격적인 사귐을 나타내는 의미로 Communio Sanctorum을 표현한다. "교회는 사귐" 이다.

3. 로마서 주석(제 2판)과 "교회 교의학" 사이의 교회관.

1)1921년과 1923년 사이의 신학적 전환

"말씀의 신학"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성서에서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모든 인간적인 자기이해를 제한하고 규정하는, 탁월하고 새로운 것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하여 바르트의 신학의 척도와 동기였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놓는 원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2)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는 교회

"바르트가 1923년에 뤼벡에서 행한 강연 '교회와 계시'는 그가 교회의 문제를 새로이 다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근거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주관주의의 종말이며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예언의 전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르트의 강조는 그가 1925년에 행한 강연 '개혁교회의 성서원리'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교회가 계시로부터, 오직 하나님의 결단 안에서만 정초된 하나님의 자기인식에의 참여로부터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여 성서도 계시의 직접적 현재화가 될 수 없다. 계시가 다음 시대로 전달되는 것은 유출, 발전 혹은 조립의 경로 위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계시의 전달은 결코 연속이 아니라 새롭고 놀라운 기적이며, 계시 그 자체와 같이 동일하고 절대적인 의미로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바르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스스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며, 역사적 자료, 마음과 양심의 암흑 속에 있는 우리에게 오는 계시 속에서 무시간적·동시대적활동을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⑴ 교회의 권위는 시간적. 역사적. 간접적 권위이다.

⑵ 교회의 권위는 상대적 권위이다.

⑶ 교회의 권위는 형식적 권위이다.

교회에서 주어진 이러한 전권위임은 오순절의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교회의 개념'이라는 강연에서는 바르트는 교회의 권위가 하나님의 계시의 이해와 선포의 준거가 되는 사도들의 증언 위에 정초되어 있고 또 항상 거듭 정초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⑷ 죄인들의 교회

교회에 관한 본래적·본질적·내적인 진술의 하나는 '죄인'이라는 개념 속에 있다. 그는 이미 1926년에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불렀고, 1927년에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용서받은 죄인들의 중간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오직 용서 속에서만 존속할 수 있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 십자가 아래의 교회, 죄인들의 교회이다.

⑸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

"죄인들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심판 받게 됨과 더불어 계시의 은폐성 안으로 놓여진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계시와 화해의 연속, 현재화, 구체화 및 명시화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를 등장시킬 수 없고 묘사할 수 없으며 활동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구원을 나누거나 번식 혹은 확장할 수도 없다. "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는 구원케 하는 말씀, 계속적인 신적 권위, 절대적 지식, 분명한 지시, 직접적으로 확신시키는 영광이 없는 궁지와 실존의 궁지에 빠진다. '새로운 교회의 현실주의'로 나아가려 한다.

그런데 교회의 궁지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회라 하는 이상주의'로 도피한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보이는 인간적인 교회라고 하는 현실주의'로 도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간의 이러한 긴장은 교회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항상 상기시킨다.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완전히 궁극적으로 발언된 하나님의 확약으로부터 살아야한다.

⑹ 하나님이 제정하신 교회

1926년부터 바르트는 교회가 하나님의 화해의 결의안에서 제정되었음을 보게 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죄인의 공동체, 신앙하고 순종하는 인간들의 공동체라고 정의되었다. 1927년에는 바르트는 교회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체결된 계약에 근거하여 창조되고 성령을 통하여 각성된 신앙의 백성의 소집으로 정의했다.


제III부 기독론적 교회이해(1932년-1968년)

1. 교회관과의 관련 속에서 본 1927년과 1932년 사이의 기본통찰의 변화

1) 변증법에서 유비론(類比論)으로

바르트는 그가 1920년에 행한 강연 '성서적 질문, 통찰 및 전망'에서 성서적인 사고와 발언의 특성을 변증법적인 것이라고 기술했다. 로마서 주석 제 2판(1921년)에서는 바르트는 '바울의 로마서의 내용의 내적인 변증법'을 기술하는 것을 자신의 신학과제로 삼았다. 바르트는 그가 행한 강연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1922년)에서 형식적 변증법의 신학적 배경에 관해 숙고했다.

1925년에 행한 강연 '교회와 신학'에서 바르트는 신학의 변증법적인 특징을 단절, 역설, 철저한 보충의 필요성, 모든 신학문장의 원칙적 개방이라고 표현했다. 바르트는 변증법적 원리는 어디에서부터 유래하는가? 그 자신은 이것을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의 변증법'이라고 말했다. 바르트는 "우리가 어떻게 신학의 대상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적합하게 말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질문 앞에서 점점 더 고심하게 되었다. 이 질문은 그에게 점점 더 회피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왔다. 그 동기는 설교의 상황, 선포의 문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물음과 들려진 계시와 과제에 대한 신학적 사고와 발언의 책임성 문제였다. 이 물음을 놓고 씨름한 것을 보여주는 문서는 '신학에 있어서의 운명과 이념'(1929년)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바르트가 신학을 '그 대상에 일치하여 오직 교회 안에서만 가능한 학문' 이라고 파악한 것을 볼 수 있다. 신학은 단지 입문, 교정, 지시, 방주(傍註) 혹은 식탁의 양념일 수만은 없다. 변증법은 신학적 진술을 대체할 수 없다. 신학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또 계시할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그리하여 바르트에게서 변증법적 발언 속에 나타난 움추리는 몸짓은 점점 사라지고, 계시의 사건에 더욱 접근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즉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발언의 변증법적 구조에 관한 분명한 관심 대신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비(Analogia:類比)에 관한 관심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르트는 아날로기아를 정의하기를 "동일성 및 비동일성과 마찬가지로 동일성도 제한하는, 두 가지 혹은 더 이상의 다른 실체들 간의 부분적인 상응과 합치, 즉 유사성이라고 했다.

2) 그리스도론적 집중

변증법에서 유비론으로 신학적 인식원리를 전환시킨 바르트는 이제 그의 신학의 새로운 기초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새로운 과제는 "이전에 말했던 것을 다시 한번 완전히 다르게, 즉 이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학으로서 끝까지 숙고하고 표명하는 것이었다. 계시의 본질과 내용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변증법적 실체였던 교회 대신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등장한다. 이 새로운 교회관은 그리스도론적 집중에 의하여 강하게 각인 되었으며,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의 몸 이해를 통해 규정되었다.

3) 역사의 종국으로서의 종말론의 재발견

바르트에게서 세계사적, 목적론적 종말론은 그리스도론적인 방식으로 그 의를 재획득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모든 시간의 신비요 영원이라고 주장되던 변증법적 시대와는 달리 이제 종말론은 역사적 사건의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재평가 되었다.

2. '고백교회'의 투쟁기(1933년-1945년)에 나타난 바르트의 교회관

1) 정치와 교회의 상황

⑴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등장과 '고백교회'의 탄생 : 모든 신학적 성찰에서 벗어난 광신주의와 다름없는 '독일 그리스도인들'(DC) 조직의 가장 중요한 교회정치의 목표는 루터적 특징과 아리안 종족의 통일제국교회를 설립하려는 것이었다. '아리안 조항을 통하여 많은 자들이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운동에서 탈퇴했고. 이 운동은 여러 갈래로 찢겨졌다. 이 즈음에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⑵ 바르트는 무엇을 하였는가? : 바르트는 '오늘의 신학적 실존'(1933)에서 교회가 신학적 실존을 상실했으며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소리를 들으려고 하다가 교회됨을 망각했다는 것, 그러나 성서가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신학적 실존이 있고 교회개혁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했다. 바르트는 1934년 5월 31일에 채택된 '바르멘 신학선언'을 기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 교회의 본질

⑴ 교회의 자리 :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셨으므로 인간이 그 말씀을 듣는 바로 그곳에 교회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위대한 행위의 언어로써 말씀하시고 인간이 이를 듣는 바로 그곳에 교회가 생기고 존재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성서의 원천, 핵심 및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⑵ 형제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 '바르멘 선언' 제 3항에서 바르트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례전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로서 현존하시면서 행동하시는 형제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이 개념은 '그리스도의 몸'이해와 매우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⑶ 교회의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서 주로서 현존하시면서 행동하시고, 이 행동을 통하여 항상 새롭고 교회를 창조하시며 교회를 보존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교회의 첫째가는 본질적인 주체이시다. 바르멘 선언은 처음으로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론적으로 정립할 수 있었다.

3) 교회의 사명

⑴ 증언봉사의 주체로서의 교회 : 우리는 우리의 선포와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말씀에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증언봉사는 하나님의 능력 속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 속에 반복하는 데에 있다.

⑵ 시대사(時代事) 속에서의 교회의 증언책임 :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되고 선포할 때 시대를 떠난 어떤 추상적인 영역 속에 있지 않고 바로 시대 속에 있기 때문에, 교회는 시대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과 연루되어 있고 그것의 도전과 요구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시대에서 시대사에 참여해야 한다.

4) 교회의 형태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어떠한 형태를 취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 결정권을 가진 자, 즉 교회의 형성자가 누구인가?"하는 물음에 답변이 주어져야 한다. 모든 교회형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직분의 행위로서, 오직 그분만이 교회를 형성하는 자이다. 바르트는 지배가 아니라 오직 봉사만이 교회 위에 세워지는 표지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5)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 사이에서 투쟁하는 교회

교회는 자신이 참된 교회인지, 거짓 교회인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지 적그리스도의 교회인지 항상 필수적으로 자신을 검증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항상 거짓 교회가 될 가능성의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류를 진리로써 극복하려는 자세가 없는 교회는 그 자체상 거짓 교회일 것이다.

3. 교회와 성서(교회 교의학I/2, 1938년)

1) 교회에게, 교회를 위하여 주어진 성서

바르트는 성서를 교회의 선포와 대면해 있는 삶의 법정을 지시하는 표지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성서란 무엇인가?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그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의 형태를 가진다.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및 선포된 말씀.

2)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형성된 성서

성서는 카논의 형태로 교회에 의해 성서로 발견되고 인정된 문서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카논 형성은 하나님의 증인선택과 증인소명에 대한 교회의 고백이다.

3) 성서 아래에 있는 교회의 권위

성서를 떠나서는 교회가 아무런 독립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권위는 자신 속에 세워진 성서의 권위를 통해서 정초되고 제한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존재, 근거 및 본질을 이루는 성서에 대하여 순종의 관계에 있다.

4) 성서 아래에 있는 교회의 자유

교회의 권위가 순종의 객관적 규정이라면, 교회의 자유는 순종의 주관적 규정이다. 교회의 자유는 말씀의 자유로 말미암아 정초되고, 또 간접적ㆍ상대적ㆍ형식적 자유로서 제한된다. 교회 안의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에 상응하는 자유로서 다름아닌 성서주석과 그 적용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행위로 나타난다. 성서의 해석과정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는 교회의 자유로서 관찰, 숙고 및 적용이라는 삼중적인 성서주석의 행위로 이루어진다.

4. 공동체의 선택(교회 교의학 II/2, 1942년)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선택의 중개자로서의 공동체

⑴ 복음의 요약으로서의 하나님의 선택 : 바르트의 선택론은 그의 전체의 신학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선택론은 창조, 화해 및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계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열쇠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의 신학의 중심적 주제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인식근거와 존재근거는 무엇인가? 교회의 전통, 선택론의 교육적ㆍ목회적 가치와 유용성, 경험적 자료 혹은 전능자로서의 신개념에 있지 않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선택은 곧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을 의미한다.

⑵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은 공동체의 선택을 포함한다. 은총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하나님의 공동체의 영원한 선택이다. 이 공동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 증언 되고, 온 세상은 그에 대한 신앙으로 부름 받는다. 바르트는 이러한 공동체의 선택을 중보적ㆍ중개적 선택이라고 정의한다.

2) 이스라엘과 교회

⑴ 바르트의 신학에서의 이스라엘의 의미

로마서 주석 제1판에서 '이스라엘'을 신학적 주제로 받아들여 이스라엘과 교회 간의 연대적 관계를 강조했으며, 그리하여 자신의 사명에 부응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당대의 교회와 동일시함으로써 교회비판의 해석학적 모델을 찾았다. 교회로서 공동체는 이스라엘이고, 바로 이스라엘로서 공동체는 교회이다.

⑵ 이중적 형태와 기능을 갖는 하나의 공동체

바르트의 선택론에 드러난 그의 이스라엘 이해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그는 이스라엘을 낡은 인간의 사라지는 형태로서 부정적으로 파악했다. 그에 반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오고 있는 형태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5. 하나님의 화해의 역사로서의 교회(교회 교의학 IV/1-3, 1953년-1968년)

1) 하나님의 삼위적 행동 안에 있는 교회

⑴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화해의 선행적 묘사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객관적 화해가 개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일이 일어난다. 화해는 하나님의 전 존재요 그분의 전 삶이다. 화해는 모든 하나님의 행위의 목표요 하나님의 원래적 의지와 근본의지이며, 창조자로서의 그분의 의지와 의미와 근거이다. 화해는 또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맺어진 '계약'의 성취이기도 하다. 계약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처음부터 존재하다가 교란되고 위협받게 된 사귐인데 그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즉 화해의 역사 안에서 성취되었다.

⑵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해의 주관적 묘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름받은 자들의 공동체'(Communio vocatorum)로 일으켜 세워졌다.

⑶ 성령의 역사(役事)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를 창조하고 계속적으로 갱신시키는 능력은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이다. 교회가 설립되고 바로 그렇기에 항상 거듭 설립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성령이 활동함으로서 교회가 생겨났고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그런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다.

2) 교회의 삼중적 본질

⑴ 그리스도의 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ㆍ역사적 실존형태', 즉 그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과 부활하신 분으로서 천상적ㆍ역사적 실존형태로, 그리고 교회라는 지상적ㆍ역사적 형태라는 두 종류의 실존형태를 가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 교회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몸, 교회이시기도 하다.

⑵ 성도들의 교제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이다. 성도들의 교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회집되고 생동된 인간들의 활동 안에서 일어난다. 바르트는 성도들의 교제를 전통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이해했다. 하나는 '성도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된 인간들의 친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거룩한 것들', 거룩한 관계들, 거룩한 은사들, 거룩한 임무들, 거룩한 직분들, 거룩한 역할들 안의 교제이다.

⑶ 하나님의 백성

교회는 하나님의 '소명'의 역사와 '조명하는' 성령의 역사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교회는 다름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실존양식을 가리킨다. 즉 교회는 세상 뒤에 숨어 있거나 세상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지금 여기에, 다른 사람들 한 가운데에 있다.

3) 교회의 질서(교회법)

바르트는 교회의 법을 일차적 행동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와 이차적 행동의 주체인 성도들의 공동체 간의 관계의 척도에서 볼 때 올바른 것이라고 파악했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명령 및 지시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들의 공동체의 순종적ㆍ복종적 행위가 중시된다. 이 관계야말로 곧 교회의 질서원리, 기본법이다. 교회의 법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가 여기 머리와 주 그리고 일차적 행동의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에 있다.

교회법은 어떤 내용을 갖는가? ⑴ 봉사의 법의 특성과 의미를 갖는다. ⑵ 예배의 법이다. 교회의 모든 법은 예배의 사건에 그 본래적 자리와 고유한 목적을 갖는다. ⑶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인격으로서 그의 교회를 통치, 보존, 조직하심으로써, 교회 법은 필연적으로 역동적으로 움직여지는 살아있는 법의 특성을 갖게 된다. ⑷ 교회 법은 인간의 일반적인 법의 제정과 실행에 대해 모범적인 것이어야 한다.

4) 교회의 임무

교회의 임무는 그리스도 대신에 그리고 말씀과 성례 전을 통해 그의 말씀과 사역에 봉사하면서 값없는 은총의 복음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는 것에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교회의 모든 봉사의 총괄적 요약이다.

5) 교회와 세상

⑴ 세계사의 변혁요인으로서의 교회

세계사는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진행된다. 교회는 세계사 한복판 속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계사를 달리 보고 달리 그것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사의 한복판에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행하지 않고 또 행할 수도 없는 바로 그것을 항상 어디서나 구체적 순종과 고백 속에서 행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사의 한복판에서 그러한 결딴을 실천함으로써 세계사를 분명히 변혁시킬 것이다.

⑵ 세상을 위한 교회

교회는 자신에게 부여된 전권에 힘입어 세상으로 보냄 받음으로써 그 자체선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자신의 임무를 실행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보냄 받았다. 교회가 세상에 관해 앎으로써, 교회가 세상과 연대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으로써, 교회는 세상에 대해 함께 책임적이게 된다.


제IV부 칼 바르트와 카톨릭 교회(비교와 평가)

1. 바르트의 '그리스도의 몸'-피오(Pius) 12세의 '신비한 그리스도의 몸'(1943년)

⑶ⓛ바르트에게서는 교회의 설립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대리자로서 자신의 몸 안에서 죄의 몸을 지고 죽으심으로써 이를 제거하신 행위에 근거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 반면에, 피오 12세의 교서에서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그의 몸으로 설립되었거나 사들여졌다고 설명된다.

②피오12세의 교서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유일독특한 신분 때문에 교회의 머리라고 불린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장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대리권, 즉 교황의 수위권도 도출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에서 자신을 대리하는 자를 통하여 자신의 신비한 몸을 조직형태로 다스리신다. 즉 그는 사도의 우두머리에게 보이는 통치권을 넘겨주신다. 그와 달리 바르트에 의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교회의 머리와 통치자이시다. 그리고 교회는 오로지 그에 의해서만 통치되는 자매들과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머리, 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③ 바르트의 교회론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 간에 관계가 뒤바뀔 수 없는 한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바울적 어법을 똑같이 강조한 사실과 아울러 피오12세의 교서로부터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바르트는 말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렇지만 피오12세의 교서에서는 "그리스도가 교회이시다"는 문장이 뒤바뀔 수도 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이다"고 말할 수 있다.

2. 바르트의 '하나님의 백성'-제 2 바티칸 공의회의 '세상의 빛'(1966년)

⑴ 제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Lumen Gentium(세상의 빛)은 교회의 구원사적 차원에 역점을 두어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을 구원사의 관점과 결합시켰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라는 신약성서의 특별한 문장으로부터 특별한 역사, 구원사를 이해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계시로부터 역사를 향해 사고한다. 오직 이 길에서만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인식된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구원사'의 개념은 점차로 퇴색하고 '계약사'의 개념이 점차로 나온다. 계약사란 계약 안에서 진행되는 역사를 말한다. 바르트의 '하나님의 백성' 이해는 '계약사'와 어떤 관련을 갖는가?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역사는 계약사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바르트에게서는 구원사의 개념이 계약사의 개념에 의한 해명, 요약 혹은 전화되긴 했어도, 그의 교회이해는 근본적으로는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구원사적 교회이해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⑵ 바르트는 참된 보편적 교회에 대한 질문을 교회의 어떤 시간적 초기형태들과의 동일성에 대한 질문에만 국한시키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시도에 이의를 제기한다.

⑶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는가? 교회에 속하는 것은 구원에 필수적인가? 바르트는 교회의 중개를 통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건에 포함되는 은밀한 방식에 열린 태도를 보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카톨릭 교회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⑷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은 구원사의 연속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의의를 보여준다.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는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이해는 주요 강조점이 교회의 종말론적 역동성에 놓여 있다. 바르트에게서도 교회의 종말론적 역동성은 자신의 '교회 교의학' 안에서 점차로 큰 비중을 획득한다. 바르트는 "교회가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가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IV/3에서도 바르트는 도상에 있는 지나가는 교회의 실존을 강조한다. 교회는 이미 왔으나 아직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요 그 반사이다. 자신을 '완전한 사회'나 '지상의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실존 형태'로 보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자기 갱신과 종말론적 희망 및 고통 당하는 자들과의 연대성을 선포한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세상의 빛'은 바르트의 '세계사 한복판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아니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요약과 평가)

⑴ 교회란 무엇인가? : 바르트에게 압도적으로 빈번한 교회개념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로마서 주석 제 1판(1919년)에서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유기적으로 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로 매우 유기적으로 이해했다. 로마서 주석 제 2판(1921년)에서 그는 교회의 일치를 구성하는 초월적 원리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제시했다.

⑵ 교회는 어떤 형태를 갖는가? : 바르트는 점차로 '직무'(Amt)'의 개념 대신에 '봉사'(Dienst)의 개념을 교회질서의 본질적 개념과 내용으로서 부각시키려고 했다. 화해론 IV/3에서는 교회의 질서가 명백하게 그리스도론적ㆍ교회론적 개념에 따라 '형제애적 그리스도통치'의 형태로, 즉 봉사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교회에서 적용될 법은 오직 봉사의 법으로서 명백하고 전체적이며 보편적이어야 한다.

⑶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교회의 중심적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에 귀착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증언의 원천이요 그 근거 및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세계의 제반 관계로부터 분리된 고백이 아니라 당대의 시대사를 위해 결정되는 명확한 고백이다.

⑷ 교회의 미래는 무엇인가? :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겨자씨 형태처럼 세워진 하나님 나라로부터 와서 나무형태처럼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기원이면서도 그 목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세워진 지배, 그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미래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의 교회론

………………………………………………………………………………………………………………………………………………………… 김 동 수(성산 효도대학원 대학교 교수)

 

 

I. 들어가는 말


본 소고는 신약 성서 요한 복음에 나타난 교회론에 관한 연구이다. 이 주제는 20세기 후반 요한 신학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이슈였다. 그 논쟁의 이슈는 크게 세 부분으로 대별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요한 복음에 교회론적 개념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 다음으로는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 특징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 마지막으로는 그러한 특징이 소위 요한 복음이 생성되고 읽힌 요한 공동체와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위의 세 이슈를 포괄적으로 다룬 전문 서적이 없었고, 또한 학자들이 요한 교회론을 다룰 때 교회론에 관한 본문을 다 고려하면서 다루기보다는 일부분만을 이용해서 요한 교회론의 특징을 제한적으로 기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 복음에 나타난 교회상에 관한 모든 본문을 다루면서 요한 복음의 교회론에 관한 가장 중요한, 그러나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려 하는 것은 의의가 있을 것이다. 본인은 본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위의 세 질문에 답하려 했다.



2. 요한 복음에 공동체적 사상이 존재하는가?


요한 복음 기자에게 교회론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 질문이 나오게 된 것은 요한 복음서에는 교회(εκκλησια 엑클레시아, 집에서 공공장소로 불려나온 시민들의 모임, 예배와 종교적인 만남을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교회)라는 단어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혹은 새 이스라엘 같은 초대 교회의 전통적인 교회론적 용어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의 학위 논문은 요한 복음 교회론의 유무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그 이유는 요한은 다른 신약 성서 기자들과 그 교회론적 용어를 공유해야 될 이유가 없으며, 요한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용어와 사상으로 그의 교회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구약 성서의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목자와 양'(10:1-18), '포도나무와 가지'(15:1-17) 등의 이미지를 신약의 교회의 표상으로 그리고 있으며, 제자들의 공동체(8:31; 13:35; 14:12; 15:5; 20:19-23), 제자들의 하나됨(17:20-23),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1:12; 11:52), 성령 공동체의 모임(14:6-7, 25-26; 15:26-27; 16:7-11, 12-15) 등으로 교회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신부로서의 교회(3:29), 교회의 씨로서의 밀알(12:14)등의 신약 동시대의 전통적인 교회 용어도 요한 기자에게 전혀 낯설지는 않다.


요한 복음서에서 교회론적 이미지와 사상의 유무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요한 복음에서 교회론이 존재한다면, 요한 복음 기자의 사상 안에서 교회론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1) 본인의 연구 결과는 요한 교회론은 요한 신학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요한 신학에 있어서 핵심 주제는 예수의 그리스도이심, 하나님 아들되심에 관한 것, 즉 기독론이다.


요한 복음서의 소위 '실현된'(현재적) 종말론도 요한 복음서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학자들은 요한 복음의 교회론이 요한 복음의 다른 신학적 주제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종합적으로 밝혀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본 연구는 요한 복음의 교회론은 먼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서 기독론과 교회론을 떼어 내기가 때로 불가능할 정도이며, 요한 복음의 교회론은 요한 복음의 현재적 종말론과 연관되어 있어 교회는 현재의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된 장소임이 강조되고, 요한의 교회는 성령론적이서 교회의 시작이 보혜사의 오심으로 시작되고 교회의 모든 교회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음을 밝혔다.



3. 요한 교회론의 특징은 무엇인가?


요한 교회론의 특징은 무엇인가? 요한 교회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교회론이 철저하고, 예외없이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데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다.2) 모든 교회론적 이미지가 일관성 있고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목자와 양'과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미지를 예로 들면, 이 두 이미지는 모두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던 것으로서 요한 복음에서는 목자와 포도나무가 각각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공관 복음서에도 이러한 이미지가 나오지만(마 18:12-14; 눅 15:3-7; 막 12:1-11 병행 구절) 요한 복음에서처럼 이 구절들이 예수의 메시야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구약과 공관 복음서에서 포도원이 이스라엘을 상징한다면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 자신이 참 이스라엘이고, 이런 의미로 보면 예수가 곧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회를 형성하는 주 구성원이 신자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이고 신자는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목자의 양으로서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신약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교회상이 요한에게만 독특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바울의 몸 교회론(고전 12:12-27)에서도 전형적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성의 정도에 있어서 바울은 요한 만큼 철저하지 못하다. 요한의 이미지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이 교회인데 반해, 바울은 그리스도가 머리로서 몸의 지체와 함께 교회를 형성한다.


이와 관계되어 요한 복음 교회론의 두 번째 특징은 요한 교회론은 그리스도와 신자 간의 개인적 관계를 교회 형성의 또 하나의 축으로 중시되고 있다는 데 있다. '목자와 양'에서는 상호 앎의 관계로, 목소리를 인식하는 관계로 그리스도와 신자 각자의 밀접한 관계를 묘사한다. 양으로서의 신자가 목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은 양이 목자의 음성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목자도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독특한 목소리를 인식하며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부른다. 이들의 관계는 '알다'(ειδω 에이도, 보다, 인지하다, 발견하다, 알다, 이해하다, 방법을 알다, 주의하다)라는 동사로 표현되는 아주 친밀한 관계이다.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아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까지 그 관계의 친밀성을 표현한다(10:14-15).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개인적 연합에 대한 강조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미지에서는 더욱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어떤 가지도 포도나무와의 생명적 접촉 없이 생명을 유지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도 그리스도와의 계속적, 개인적, 생명적 관계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성을 유지할 수 없다. 신자는 그리스도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관계를 표현한 동사는 '거하다'(μεινατε  εν  εμοι 메이나테 엔 에모이, 나의 안에 거하라)라는 동사인데 이것은 '알다'(ειδω)가 앞에서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상호적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신자 개인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요한의 교회론적 이미지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한다. 이것 또한 바울의 몸 교회상과 비교하면 그 특징이 분명해진다. 여기서 바울의 관심은 신자 상호 간의 관계, 즉 수평적 관계를 다룬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요한 교회론 이미지는 그 수직적 관계에 집중되어 있어 교회 안에서 신자들 간의 수평적, 공동체적 개념을 잃어버렸다고 한다.3) 부정하지 못할 것은 요한 복음서의 교회론적 이미지에는 수평적 관계보다 수직적 관계가 더욱 더 강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한다고 반드시 수평적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예컨데, 포도나무와 가지(15:1-8)의 이미지의 주위 문맥(15:1-7)에서 그리스도인 상호 간의 사랑의 관계, 친구의 관계가 또한 강조되어 나타난다. 특히 포도나무 비유의 핵심구인 '거하다'(μενω εν)는 이 넓은 문맥에 걸쳐 계속 나타나서 포도나무 비유가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이다. 즉 여기에서 수직적 관계는 수평적 관계와 서로 관계되어 있고 이런 의미에서 포도나무의 이미지는 그 수평적 관계, 그리스도인 상호 간의 공동체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요한 교회론의 세 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요한의 '민주적 교회 직제론'일 것이다. 물론 요한 복음서에는 요한 복음 원저자의 것인지 논란이 되는 21장을 제외하고는 어떤 교직제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공관 복음서 특히 누가에 있어서는 새 이스라엘을 형성하는 주요 직책으로서 나타나는 '사도'(αποστολος 아포스톨로스, 대리자, 사자, 명령을 가지고 보내진 자)라는 전문 용어도 요한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4)


요한 복음서에 '십이'(제자) 라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만(6:67, 70, 71; 20:24), 이들을 지칭 할 때도 '십이 제자'라는 말보다 '제자'라는 말이 선호된다. 요한 복음서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동등하게 제자로 묘사된다. 여자가 제자라고 명시적으로 기록된 경우는 없지만 요한 복음에 나타나는 사마리아 여인(4:7-42), 막달라 마리아(19:25; 20:1-2, 11-18), 마르다(11:1-44), 베다니의 마리아(12:1-8), 예수의 어머니(2:1-11; 19:25-27) 등의 여인들은 남자들과 대등한 신앙 고백을 하고 선교활동을 한다. 한 마디로 말해 요한 복음이 이해하는 직제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공동체 안에 그 어떤 지배 그룹이나 특권층이 없는 민주적 교직제라 하겠다. 이러한 직제 이해에 의하면 그 신분으로서 구별되는 어떠한 제 2급의 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교회 직제 이해는 요한 복음과 동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목회 서신서들이나 2세기 초 문서인 이그나시우스의 편지들에 나타난 교직 이해와 상당히 대조되는 것이다. 목회 서신서에 나타난 교직은 감독, 장로, 집사 등이 어느 정도 위계 질서의 관계로 나타나며(딤전 3:1-13 참조), 목회 서신서에 나타난 교회 안에서의 여자들의 위치는 그리 높은 것이 아니다(딤전 2:8-11 참조).


이러한 위계 질서적 교직 이해는 이그나시우스의 편지에 극단화되어 나타나는데, 요한 복음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면, 이그나시우스의 편지에서는 감독이 곧 교회와 동일시된다( "감독이 있는 곳에만 교회가 존재하고"<Ignatius, Letter to the Smyrnaeans 8:1>, 감독이 없으면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Ignatius, Letter to the Trallians 3:1>).



4. 요한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였나?


1) 요한 공동체는 섹트(종파적, 파당적)였는가?


위에서 고찰했듯이 요한 교회론의 특징은 신약에서 유일하지는 않을지라도 독특하다.5) 이러한 요한 교회론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전통적으로는 요한 신학의 독특성은 요한 복음 저자의 개인적, 문학적, 신학적 특이성에 기원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요한 신학의 특징을 요한 복음서 기자 개인의 신학적 특징을 넘어서 요한 공동체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연관된 것으로 널리 이해되면서6) 많은 요한 신학자들은 요한 복음의 독특한 교회론은 요한 공동체의 섹트적인(sectarian) 특징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먼저 섹트라는 말의 정의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요한 공동체가 섹트였는가? 아니였는가? 는 그 말의 정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섹트는 일반적으로 동일 종교 집단 내의 다른 교파에 대해서 혹은 일반 사회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의 대립 상태에 있는 집단을 말한다. 주로 사회에 대한 것이라면 요한 공동체뿐만 아니라 1세기 교회 모두가 어느 정도 섹트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7) 여기서 본인이 질문하려고 하는 것은 요한 공동체가 동시대의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 관계해서도 섹트였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한 공동체가 그 신학적 특성 때문에 동시대의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는 완전히 대립 혹은 소외되어 서로 대화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의 견해가 엇갈린다. 발터 레벨(Walter Rebell)은 요한 공동체가 동시대의 주류 교단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았다는 것은 허구라고 말한다.8) 반면 데이비드 렌스베르거(David Rensberger)는 요한 공동체가 동시대의 유대교와 관계해서는 섹트였을지라도 동시대의 주류 기독교 교단과 관계해서는 섹트가 아니었다고 한다.9)


우리가 초대 교회에서 한 기독교 공동체가 섹트였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공동체가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 구별되는 자인식이 있음이 확인되어야 한다.10) 둘째, 그 공동체의 신학과 이념이 다른 공동체의 그것들과는 상당한 정도로 다른 것이 확인되어야 한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러한 독특한 자인식으로 인해 그 공동체가 주류 교단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요한 복음 본문에서 위의 사실을 확인하고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 복음은 초대 교회 안에서의 여러 상이한 기독교 공동체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록하기 위한 문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을 통해서 독자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은 요한 복음 저자가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도 자신의 공동체 내부의 문제와 무관하게는 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한 공동체 문서인 요한 삼서에서 장로와 디오드레베 간의 기독교 공동체 내부의 논쟁이 있었음을 볼 때,11) 어떤 형태로든 요한 공동체의 내부 문제가 요한 복음서에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12) 특히 요한 복음에만 베드로와 그 사랑하는 제자가 같이 등장하여 상호 작용을 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한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상징성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베드로와 그 사랑하는 제자가 요한 복음에만 자주 같이 등장하는데 이 두 인물은 각각 자기 공동체의 대표로 나타난다. 그 사랑하는 제자가 요한 공동체를 대표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사랑하는 제자는 요한 공동체의 설립자이며, 요한 복음서의 저자이다(21:24). 그는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향유하는데(요 13:23-24), 이것은 요한 공동체와 예수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10:14; 15:5; 17:23 참조). 베드로는 공관복음(마 16:16-19; 막 8:27-29)과 요한 복음에서(1:42; 6:68; 13:6; 20:2; 21:2) 공히 12사도의 대표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사도적 공동체의 상징 혹은 대표로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요한 복음에만 이 두 제자가 예수의 중요한 사역 현장에 계속해서 나타나면서 상호 미묘한 경쟁 관계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13:21-30; 18:15-18; 20:1-10; 21:1-25).


혹자는 요한 복음에서 베드로와 그 사랑하는 제자의 관계를 악의적 혹은 적대 관계로 해석하고13) 혹자는 우정의 관계로 보는데14), 진실은 양극단의 중간 어디엔가 있는 것 같다. 요한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제자 무리의 대표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다. 베드로는 부정적인 묘사든지 긍정적인 묘사든지 제자의 대표이다. 그러나 그 사랑하는 제자는 그의 통찰력에 있어서 베드로보다도 앞서는 것으로 요한 복음서에는 묘사되어 있다(20:8; 21:7). 이러한 통찰력은 그 사랑하는 제자가 예수와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13:23-25; 19:26-27; 21:20). 즉 요한 공동체는 그 사랑하는 제자를 통하여 자기 공동체가 예수와의 친밀성에서 사도적 공동체보다 뛰어남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한 공동체의 자인식은 사도적 공동체를 부인한다거나 적대적인 관계로 귀결되지 않는다. 베드로를 대표로 한 사도적 공동체는 여전히 주류 교단이며 그 신학과 이상은 다를지라도 계속해서 교제(κοινωνια 코이노니아, 교제, 사귐, 공동체, 공유, 참여, 사귐)의 악수를 나누어야 할 형제로 인식된다.


이와 같은 고찰로 볼 때 요한 공동체가 신약 시대의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 연관하여 섹트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스카 쿨만(O. Cullmann)의 말을 빌리면 요한 공동체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독립성을 의식적으로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공동체와 상호 공동 이익을 위하여 같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또한 인식하고 있다.15) 요한 공동체를 섹트로 보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요한 신학이 신약에서 독특한 것이긴 하지만 신약의 다른 부분과 전혀 조화를 이룰 수 없을 정도의 독특성은 아니라는 데 있다.16) 요한 복음의 신학과 신학의 다른 부분과의 신학을 비교 연구한 최근의 논문들은 요한의 신학이 신약의 다양성 속에서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바레트(C. K. Barrett)는 최근에 사도 행전과 요한 복음을 종말론, 성령론, 교회론, 기독론의 주제로 비교한 결과 두 문서는 상당한 정도의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요한을 기독교 전통의 일반 흐름 내부에 포함시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고 중요하다. 아마도 요한 복음서 기자는 종종 주장되어왔던 것처럼 그렇게 외로운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요한 공동체가 비협조적이고 유리된 공동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비협조자 라고 해서 모두가 다 주류 교단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요한 공동체를 1, 2세기 기독교 역사와 흐름 속에 넣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17)


무디 스미스(D. Moody Smith)도 요한 복음서와 공관 복음서를 비교하면서 요한 복음서가 매우 독특해서 어떤 측면으로 외경 복음서(apocryphal gospels)와 연결점이 있지만, 그 신학의 일관성의 유지 등 외경 복음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오히려 정경의 복음서들과 접촉점이 더 많다고 주장한다.18)



2) 초대 교회 갱신의 신학으로서의 요한 교회론


(1) 신약 시대 기독교 공동체의 다양성


초대 교회에는 다양한 성격의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었다. 즉 신약 시대에는 하나의 정통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서로 다른 입장의 기독교 공동체가 다양성 속에 서로 공존, 협조, 때로는 긴장 관계에 있었다.


사도 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도 이미 헬라어를 말하는 신자들과 히브리어를 말하는 유대인의 분파가 발생한다(행 6:1). 처음에 기독교 공동체가 출발한 것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인 제자 무리에서였다.


지미 던(James D. G. Dunn)은 이 공동체의 특징은 종말론적이며, 따름의 원리가 강조되었고(막 1:17; 2:14; 10:21; 눅 9:57-62),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었고, 예수 자신에게 그 중심이 있었다고 잘 요약한다.19) 제자들의 무리는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이룬다. 이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은 열정적인 특징으로 출발하여, 교회 안에 직제와 기구를 갖추게 된다.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 교인들이 흩어지면서 각 지역과 지도자에 따른 다양한 공동체가 출현한다. 요한 공동체도 그 다양한 공동체 중 하나였으며 1세기 말 교회 내외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 신학을 전개해 나갔다.



(2) 요한 교회론: 교회 갱신의 신학


앞에서 요한 공동체는 1 세기말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의 교류 속에 자기의 신학을 전개하였음을 논증하였다. 그러면 요한 공동체가 요한 복음서를 통해서 동시대의 다른 기독교 공동체들에게 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인가?


우선 베드로와 그 사랑하는 제자가 같이 등장시켜 상호 미묘한 관계로 계속해서 나타나게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다. 첫째, 베드로와 그 사랑하는 제자가 나란히 등장하는 모습을 통해서 요한 공동체도 사도적 공동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공동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 같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은 요한 공동체는 요한 복음서를 통해서 사도적 공동체에게 갱신의 목소리를 내려 한 것 같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무리라는 개념에서 멀어지는 것을, 또 그와의 개인적 친교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요한 공동체는 경계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요한 공동체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적, 주류 기독교 공동체와 동반자임을 주장하지만 예수와의 친밀한 관계, 그의 뜻을 깨닫는 것에는 항상 우위성을 주장하는 데서 이러한 입장을 암시받을 수 있다. 이것은 1세기 내의 기독교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교제를 통해서 그 생명성을 회복하자는 교회 갱신의 운동이었다.


이러한 교회 갱신의 신학은 요한 복음서가 기록된 1세기말의 교회적 상황을 관찰해 보면 분명해 진다. 1세기 말의 교회는 점점 더 기구화(institutionalization), 보수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미 고찰한대로 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무리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주교, 장로, 집사 등이 직제의 서열로 존재하는 양상을 띤다(딤전 3:1-13 참조). 이러한 경향성은 2세기 초 중반 이그나스우스에 의해 극단화되어 나타나는데,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독이 곧 교회와 동일시된다.20)


비록 암시적이기는 하나 요한 복음서는 위와 같은 교회적 상황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다. 첫째, 요한 복음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와의 생명적 관계 없이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 그것도 누구의 중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신자의 예수와의 직접적인 생명적 관계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양의 목자이신 예수는 양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양도 이에 호응하여 따라 간다(요 10:3-4). 요한 교회의 표상인 포도나무와 가지(요 15:1-8)의 관계도 바울의 교회상인 머리와 몸(고전 12:12-27)의 관계보다도 밀접하다. 바울의 교회상이 교회 안에서의 은사의 다양성에 있다면, 요한의 강조점은 교회 안에서 각 신자의 예수와의 생명적 관계에 있다. 요한에 의하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결국 말라 불에 살라져 버리게 된다. 요한은 더 나아가 이러한 신자와 예수와의 생명적 관계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의 관계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요 17:20-23 참조) 교회의 구성 요소 중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요한 공동체가 우려했던 바는 교회가 예수와의 생명적 결합에서 멀어져 점점 더 기구화, 직제화 된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것은 요한의 교회 직제 이해에서도 볼 수 있다. 요한에 의하면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명칭은 '제자'였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에만 사도라는 명칭이 나오지 않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사도 혹은 12제자가 많은 무리의 제자와 구별되어 나타나긴 하지만(요 6:66), 12 제자도 '사도' 혹은 '12제자'라는 말보다 제자라는 말이 더 선호되어 불린다. 여자가 제자로 명명된 적은 없지만 요한 복음서에서 여자는 남성 제자와 거의 동일한 신앙 고백과 선교의 역할을 담당한다(4:7-11; 11:1-44; 19:25; 20:1-2, 11-18). 또한 교회에서도 어떤 직책이나 교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신도 각자에게 임하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가장 중요하다(요일 2:20, 27). 즉 요한 공동체에게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교회 안에는 직제에 따른 신앙 등급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만약 구별이 있다면 신자 각자와 예수와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 또는 신자 각자가 얼마나 예수를 사랑하는 지에 의해서 구별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한 신학은 동시대 교회의 흐름에 도전하는 것으로 이것은 당시에 일종의 개혁 운동, 교회 갱신 운동의 하나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단 사상이나 쿰란 공동체와는 다르게 요한 공동체는 다른 기독교 공동체의 사도성을 인정하면서 자기의 개혁적 목소리를 낸, 일종의 내부의 개혁운동으로서 1세기 말 다양한 기독교 공동체 중의 하나였다.



5. 결론


본 소고에서는 요한 교회론의 유무와 그 특징, 그 생성된 공동체적 배경을 다루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나름대로의 용어와 방법으로 교회 공동체적 사상을 그의 다른 신학 사상과 함께 전개했다. 요한 교회론은 그의 사상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아니었을지라도 결코 부수적 주제는 아니었다. 요한 복음의 교회론은 신자 개인과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교제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고, 교회는 기구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관계를 갖고 있는 신도들의 모임으로 이해된다.


본 소고는 요한 복음 교회론이 생성된 배경을 요한 공동체의 상황에서 설명했다. 이와 연관하여 요한 공동체가 섹트였는가를 고찰했는데, 본 소고는 현대 사회학적 용어로서 요한 복음의 섹트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지만, 신학적으로 요한 신학이 일세기 말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 유리된 이단적 성격의 공동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박하였다. 요한 공동체는 1세기 말 다양한 성격의 기독교 공동체의 하나로서 기존의 다른 공동체에 대하여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요한 복음서에만 나타나는 베드로와 그 사랑하는 제자와의 미묘한 관계의 묘사에서 추론된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 공동체가 그 역사적 배경에 따라 적절한 신학화 작업을 하면서 존재했다. 그래서 신약 공동체는 그 신학과 이념에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가 존재했으며 일치된 특징으로서의 하나의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21) 다양한 신약 공동체의 모델을 정형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스타일에 따라 크게 바울의 은사적 모델, 목회 서신서의 초기 공교회주의(Early Catholicism)22) 모델, 그리고 요한의 갱신 모델 등으로 대별해 볼 수 있겠다. 바울의 은사적 모델은 그의 몸 교회론(고전 12:12-27; 롬 12:3-8; 엡 4:11-12)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는 성령을 체험한 모든 신자의 은사의 다양성이 강조되고 은사로서 서로 섬기는 삶이 요청된다. 그런데 목회 서신의 교회를 보면 은사의 다양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감독, 장로, 집사 등의 서열에 따른 교회 직제가 전면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그 교회 직제가 계층적인 상하 관계를 이룬다. 이에 반해 요한의 갱신 모델은 이미 우리가 고찰한 대로 초기의 제자 공동체에서처럼 공동체 개념의 초점이 예수에게 향해져 있고 그 교회의 직제에서도 남녀와 직책을 구별하지 않는 직제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모델이다.23)


이러한 신약 공동체의 다양성은 후대 기독교 역사상 교회의 신학의 다양성과 교회의 직제의 다양성에 그 신약 성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 하겠다.24) 중요한 것은 어떤 신약 교회론의 정당성과 유용성은 예수의 말씀을 기독교 공동체 내외의 역사적 상황에 적절히 응답한 것이었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요한의 교회론 신학은 본 소고에서 고찰한대로 1세기 말 교회론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친밀한 관계에서보다 교회 직제 안에서 혹은 교회 구성원의 다양성 안에서 이해되어지는 데 대해서 형제애적 입장에서 다른 기독교 공동체에게 충고의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서 초대 교회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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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ongsoo Kim, "The Church in the Gospel of John," unpublished Ph.D. thesis at the University of Cambridge, 1999.


1) 불트만(R. Bultmann)이 요한 복음의 무교회론을 주장한 대표자라면, 에두아르트 쉬바이쳐(E. Schweizer)는 최소주의자의 대표자이고, 래이몬드 브라운(Raymond E. Brown)과 쉬바켄부르크(R. Schnackenburg) 등 가톨릭 학자들은 아마도 최대주의자의 대표자들일 것이다. 이것에 관한 자세한 논의와 참고 문헌은 본인의 학위 논문 제 1장을 참조하라.


2) 카이자(R. Kysar)는 요한의 교회론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요한 기자의 확신을 논리적으로 교회론과 연관되게 확장시켜 놓은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The Fourth Evangelist and His Gospel: An Examination of Contemporary Scholarship(Minneapolis, MN: Augsburg Publishing House, 1975), 248. 3) 이러한 대표적인 견해로는 John F. O' Grady, "Johannine Ecclesiology: A Critical Evaluation," BTB 7(1977), 36-44; John Austin Baker, "The Myth of the Church: A Case Study in the Use of Scripture for Christian Doctrine," What About the New Testament: Essays in Honour of Christopher Evans M. Hooker and C. Hickling(eds.)(London: SCM, 1975), 173-75를 보라.


4) 요한 복음에는 αποστολο?라는 단어가 한번 나온다(13:16). 그러나 여기에서 αποστολο?는 전문적 용어로서의 '사도'가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쓰였다.


5) 신약 성서 각 책의 교회 이해 가운데 요한 복음에 나타난 교회 이해와 가장 유사한 것으로는 히브리서의 교회론을 들 수 있다. 두 문서 모두 기독론 중심적인 교회론을 발전시켰으며 교회론의 주제들이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다루어져있다. 히브리서의 교회론에 관해서는 Markus Bockmuehl, "The Church in Hebrews," A Vision for the Church: Studies in Early Christian Ecclesiology in Honour of J. P. M. Sweet M. Bockmuehl and M. B. Thompson(eds.)(Edinburgh: T & T Clark, 1997), 133-51.


6) 요한 교회론을 요한 공동체적 컨텍스트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D. Moody Smith 등에 의해 주창되어 Raymond E. Brown 등에 의해 요한 교회론을 이해하는 방법론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D. Moody Smith, "Johannine Christianity: Some Reflections on its Character and Delineation," NTS 21(1974-75), 222-48; Raymond E. Brown, The Community of the Beloved Disciple: The Life, Loves, and Hates of an Individual Church in New Testament Times(NY: Paulist Press, 1979).


7) Robin Scroggs, "The Earliest Christian Communities as Sectarian Movement," Christianity, Judaism and Other Greco-Roman Cults: Studies for Morton Smith at Sixty. Part Two. Early Christianity. J. Neusner(ed.)(4 vols.; Leiden: E. J. Brill, 1975), 1-23을 참조하라. Scroggs에 의하면 신약 시대 여러 기독교 공동체는 섹트의 전형적인 특징을 모두 다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세상과 관계되어 요한 공동체가 섹트였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요한 문헌의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요 14:17, 19, 27; 15:18, 19; 16:8, 11, 20, 33; 17:9, 14, 16, 25; 요일 2:15, 16; 3:1, 13; 4:5; 5:4, 5, 19)는 요한 공동체가 세상과 심한 대치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이러한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신약 성서에서 요한의 특징만은 아닐지라도(고전 1:20-21; 3:19 참조), 신약 성서 중 요한 문서에 이것이 가장 극명한 형태로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8) W. Rebell, Gemeinde als Gegenwelt: Zur sozialischen und didaktischen Funktion des Johannesevangeliums(Frankfurt am Main: Peter Lang, 1987), 113; J. H. Neyrey, An Ideology of Revolt: John's Christology in Social-Science Perspective(Philadelphia, PA: Fortress, 1988), 115; John Bogart, Orthodox and Heretical Perfectionism in the Johannine Community as Evident in the First Epistle of John(Missoula, MT: Scholars Press, 1977), 140을 참조하라.


9) 이러한 견해로는 D. Rensberger, Johannine Faith and Liberating Community(Philadelphia, PA: Westminster, 1988), 113; Johannes Beutler, "Kirche als Sekte?: Zum Kirchenbild der johanneischen Abschiedsreden," Studien zu den johanneischen Schriften(Stuttgart: Katholisches Biblelwerk, 1998), 21-32; John W. Pryor, "Covenant and Community in John's Gospel," The Reformed Theological Review 47(1988), 44-51을 참조하라.


10) 신약 성경에 나오는 요한 문헌(Johannine corpus) 배후에 이 문헌이 기록되고, 유포되고, 읽혔던 특정한 공동체가 존재했는데 이 공동체를 학자들은 요한 공동체라 부른다. 요한 공동체의 존재에 관해서는 요한 문헌 본문 내증과 상황적인 증거가 있다. 첫째, 요한 복음 21:24에 보면 본문의 저자와 구별되는 '우리'라는 일단의 무리가 나온다. 그들은 "그의 증거가 참이라"고 말함으로써 저자의 증언을 인증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편집적 '우리'가 아니라 일인칭 복수 '우리'이다(U. Schnelle, Antidocetic Christology in the Gospel of John: An Investigation of the Place of the Fourth Gospel in the Johannine School [Minneapolis, MN: Fortress, 1992], 42 참조). 둘째, 요한 서신서들은 요한 복음서와 문학적, 신학적, 언어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는 그 문서 배후에 특정한 신학과 용어를 가진 공동체의 존재를 암시해 준다. 셋째, 복음서와 서신서 사이의 동일한 윤리적 교훈(cf. 요 13:34-35; 요일 2:7-11)과 동일한 교회론적 표상(cf. 요 15:13-15; 요3 15) 등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문헌이 최소한 같은 공동체 안에서 태동되었음을 보여준다. 요한 공동체는 신약 시대의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는 구별된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 신약 학자들은 요한 공동체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요한 본문 내에서 추적할 수 있다고 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 공동체가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여러 발전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는 것에는 충분한 개연성은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요한 공동체는 신약 성서 시대의 다른 공동체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특징이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것은 요한 문헌과 다른 신약 문서를 비교함으로써 또한 요한 문서 내의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의 관계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밝혀 낼 수 있다.


11) 장로와 디오드리베간의 갈등을 기독교 내부의 대화와 논쟁으로 보는 견해로는 H.-J. Klauck, "Gemeinde ohne Amt?: Erfahrungen mit Kirche in den johanneischen Schriften," BZ 29(1985), 215-18을 보라.


12) 필자와 같은 견해로는 Terrence V. Smith, Petrine Controversies in Early Christianity: Attitudes towards Peter in Christian Writings of the First Two Centuries(Tubingen: J. C. B. Mohr, 1985), 143-44를 보라.


13) 이러한 해석으로는 Eric L. Titus, The Message of the Fourth Gospel(NY: Abingdon, 1957), 220; Graydon F. Snyder, "John 13:16 and Anti-Petrinism of the Johannine Tradition," BR 16(1971), 5-15; A. H. Maynard, "The Role of Peter in the Fourth Gospel," NTS 30(1984), 531-48을 보라.


14) 이러한 견해로는 Kevin Quast, Peter and the Beloved Disciple: Figures for a Community in Crisis(Sheffield: JSOT Press, 1989)를 보라.


15) O. Cullmann, The Johannine Circle(London: SCM, 1976), 55.


16) 케제만은 요한 복음의 가현적 기독론과 열광주의적 신학이 신약의 다른 책의 신학과는 독특성이 너무 지나쳐 요한 복음이 신약 성서에 포함된 것은 "인간의 실수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E. K semann, The Testament of Jesus: A Study of the Gospel of John in the Light of Chapter 17(London: SCM, 1968), 75. 이것은 요한 복음의 신학을 극단화시켜 잘못 이해한 것이다.


17) C. K. Barrett, "The Parallels between Acts and John," Exploring the Gospel of John: In Honor of D. Moody Smith(Louisville, KY: Westminster, 1996), 175-76.


18) D. Moody Smith, "The Problem of John and the Synoptics in Light of the Relation between Apocryphal and Canonical Gospels," John and the Synoptics A. Denaux(ed.)(BETL 101; Leuven: Leuven University Press, 1992), 147-62.


19) James D. G. Dunn, "Models of Christian Community in the New Testament," Strange Gifts: A Guide to Charismatic Renewal David Martin and Peter Mullen(eds.)(Oxford: Basil Blackwell, 1984), 2-3.


20) 1세기말에 발생한 교회의 기구화 그 자체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교회의 기구화는 이단 사상을 방어하고 교회가 효과적으로 관리되기 위해서 필연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부정적인 현상 또한 발생했다는 것이다.


21) "There is clearly no single model of Christian community which emerges which emerges from as the New Testament church. We see different churches in different situation(inevitably?) reflecting something of the dominant characteristics of their Circle(London: SCM, 1976), 39; K asemann, "Unity and Multiplicity in the New


Testament Doctrine of the Church," New Testament Question of Today, 252을 참조하라.


22) 초기 공교회주의에 대해서는 James D. G. Dunn,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ment: An Inquiry into the Character of Earliest Christianity(2nd ed.; London: SCM, 1990) 제 14장을 보라. 이것의 특징으로는 재림에 대한 희망의 쇠퇴, 교회의 기구화, 신앙의 신조화 등을 들 수 있다.


23) Kysar, The Fourth Evangelist and His Gospel: An Examination of Contemporary Scholarship, 247을 참조하라.


24) 기독교 역사상 위의 세 공동체 모델이 공존해왔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가톨릭 교회가 목회서신 모델인 공교회주의를 따랐다면, 개신교 주류 교단들은 바울의 은사적 모델을 교회의 이상형으로 보았다. 반면 요한의 교회 갱신 모델은 경건주의(Pietism), 19세기 미국의 부흥 운동, 20세기 오순절 운동 등 예수와의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강조함으로 교회 내에서 교회를 갱신해 보려는 운동 등에서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로 설정한 것이다. Dunn,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ment: An Inquiry into the Character of Earliest Christianity, 199을 참조하라. 던은 요한 공동체 교회론 모델의 역사적인 예를 비교권적 입장, 체험적 신앙, 완전주의 등의 특징을 가진 19세기 미국의 부흥 운동에서 찾는다.


25) 본인은 요한이 1세기 말 처해있던 기독교 공동체적 상황이 어느 면으로 한국 교회의 현재적 상황과 비슷한 면이 없지 않음을 발견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관계에서보다 어느 교단, 어느 교회, 어느 목사에게 속했나를 통해서 자신의 정통성을 찾으려 하는 것은 교회가 보수화, 화석화된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교회”란 건물이냐 성도냐?
콘크리트와 돌들에게 구속사를 펼쳐 나아가시는 하나님이시냐?…… (글 : jth5458 2006. 04. 18)


일반적으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교회’라고 하면 건물을 생각하고 말한다.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생각이 정답으로 믿어지고 말하여 진다. 한 마디로, 교회란 성도들이 모여져 있는 교회 건물을 말하기에 교회란 무엇이냐고 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부터 고학력의 소유자까지, 그리고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았다고 하는 목사들까지도 거의 80%정도가 ‘교회’라고 하면 건물을 말할 것이 틀림없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보다 더 귀하신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벽돌로 쌓아놓은 건물을 말하는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부동산인 교회를 귀하게 여기고, 그곳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聖殿)으로 알게 되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모여지는 것만을 최종의 목표로 생각했지 흩어져야 할 교회로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줄, 사라지는 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왜 흩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하늘에(천국) 두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인 우리는 모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혔다면 마땅히 제자된 자로서 천국의 복음을 세상에 나가 전해야 할 것이다.

■ 교회의 명칭에 대한 고찰(考察)

교회라는 명칭은 기독교에서만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 교회라는 명칭은, 어떤 사람들이 각기 자신이 섬기는 신을 향하여 예배 또는 제사의 의식을 위해 무리를 이루었다면 그들을 가리켜 ‘교회(敎會)“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명칭은 유교나 불교 신흥종교에서도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있으나, 모든 종교들이 앞에 교(敎)를 사용하면서도 뒤에 오는 회(會)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교회라고 하면 그것은 예수를 믿는 그 집단의 모임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평신도신앙총서④P.4, 대한기독교서회,1993년).

1). 구약성서에서의 교회명칭

구약성서는 교회를 말할 때 히브리어로 ‘카할’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에다’라고도 한다. ‘카할’이라는 말의 유래는 ‘모으다’ ‘의논하기 위하여 소집된 공동체’라는 의미를 갖고 있음으로 당연히 건물을 말함이 아니다. 어느 장소에 건물을 지정하고 혹은 지으셔서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에다’라는 말도 ‘지정된 장소에 모인다’라는 뜻을 갖고 있음으로, 부르셔서 모여든 것은 사람이지 지정된 장소의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 것이지 결코 지정된 건물, 부동산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교회란 살아있는 유기체(有機體)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에 쓰시고자 하는 피조물인 도구이며 생명력이 있는 ‘하나님의 종들’인 것이다.

성도(聖徒)란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로부터 구별 되이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죄로부터의 구원을 허락하셨으며 감사함으로 찬양과 예배 드리기를 즐거워하기에, 모이기에 좋은 지정된 장소를 필요로 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부름 받은 자들의 신앙의 공동체 그 자체가 바로 교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신약성서에서의 교회 명칭

신약성서에서 교회를 말할 때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란 단어로 말한다. 이것은 ‘퀴리콘 ; κυρικον ’과 같은 어원인 영어의 ‘Church'는 ‘주(主)의 것’또는 ‘주(主)에게 속하는’을 의미하는 헬라어의 ‘퀴리아콘; κυριακον ’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신약성경에서 같은 뜻으로 쓰이는 ‘에클레시아’는 원래 헬라인들이 공적인 일과 관련된 전령관(傳令官)에 의해 소환된, 또는 ‘불러냄을 받은’자유시민들의 모임 혹은 회중을 의미하기 위해 구사한 말이었다(행19 : 39). 때때로 어떤 모임이 합법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어떤 종류의 모임이든지 모임 자체에 적용되기도 했다(성서대백과 P. 397, 기독지혜사).

또한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불러내다’라는 의미 외에 ‘오다’ ‘모이다’라는 뜻의 ‘쉬나고게συναγωγη ’의 뜻으로 교회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 듯 보이나, 이 단어는 두 가지 모두 70인 역에서 유래되었고, 이중 ‘쉬나고게’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모임 또는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 장소를 의미하고 있다(마 4:23, 행 14:1). 이렇게 ‘쉬나고게’는 모이는 장소에 있어서 건물을 말하고 있지만, ‘에클레시아’는 소집된 회중의 모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쉬나고게’와는 확실하게 구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회중을 소집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신약성서에 있어서의 교회의 의미는 회당인 건물이나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 모임 자체를 교회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마 16:18에 보면, 예수께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이 말의 의미는 예수께 몰려온 그 회중을 교회라고 하셨던 것이다(평신도 신앙총서④, P. 15, 대한기독교서회).

주님 자신은 이 ‘에클레시아’란 말을 4복음서에서 두 번 사용하셨다. 첫 번의 경우는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께 그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던 때였고(마 16:16이하), 또 다른 예는 범죄한 형제에 대한 제자들이 해야할 의무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하신 교훈의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다(마18 :17).

사도들의 서신에서는 이 단어의 (에클레시아)사용이 매우 보편화되었다. 어느 때는 “갈라디아 교회들”의 경우와 같이(갈1:2)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의미하기 위해 쓰였으며, 또 그 외 다른 경우에는 ‘안디옥 교회’의 경우와 같이(행13:1) 그 부근의 같은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의미하기 위해서 쓰였다.

한편, 예배를 드리고 교화하기 위해 한 집에 함께 모이는 신자들의 작은 모임도 교회로 언급이 되어 있음을 본다(롬 16:5, 고전 16:19, 골 4:15, 몬 1:2).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대중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건물’을 가리키기 위해 이 단어가 쓰인 적은 결코 없다.

‘교회’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사람들에게 적용되며, 가장 넓은 의미로는 ‘온 세상에 흩어진 신앙의 무리’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다(성서대백과P.979,기독지혜사). 그렇다. 분명 교회란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구별 되이 부르신 자들을 말함인데, 어찌 교회란 말이 건물 성전이 될 수 있으며 건물 자체가 교회로 불릴 수 있는가 말이다.

그렇게 불려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건물 안에, 좀 더 좋은 건물로 신을 모시듯 하려하고, 건물을 신성시하고, 성도들을 건물에 종속되어지는 세속의 단체로 전락되었으니,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

칼빈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교회라고 하면 보이는 건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참 교회는 건물에 있지 않고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말한다”고(주제별 칼빈주의 P. 95, 한국문서선교회, 1988년)하였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 23장에 보게 되면‘“보편적 또는 우주적 교회는 무형적이다. 이 교회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아래 하나로 지금까지 모여들었고, 지금 모여들고 있고, 장차 모여들게 되는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의 충만 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교회는 부동산인 건물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여전히 교회를 ‘건물’로 가르치고 착각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도 사람이 아닌 생명 없는 물건일 것인데, 이러한 불경(不敬)스러움의 죄는 어떻게 씻음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건물과, 콘크리트 내지는 돌들과 더불어 구속사를 펼쳐 나아가시는 하나님, 그러한 하나님으로 알게 하려는 사단의 노리개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지금 내 교회에서 성도들을 예수제자 삼아 세상으로 보내져서 교회 문을 닫게 된다 손치더라도, ‘교회’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흩어져서 증거하고, 다시 모여져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권능을 받아 다시 보내지기를 감당하여 천국의 복음을, 십자가의 복음을 외쳐댈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입으로, 삶으로!

그러므로 지금과 같이 ‘교회 〓 건물’ 이라는 식의 잘못된 개념에서 하루속히 탈피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 드리고, 말씀으로 교육받고, 친교하고, 전도하며, 세례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예식을 행하는‘예배당(禮拜堂)’으로 바르게 불러져야만 한다. 그리하여 성경적인 바른 ‘예배당’의 기능을 회복하여,교회인 성도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이다.

교회(마 16:18, 롬 16:5, 고전 16:19, 엡 1:23),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별 되이 부르신 성도들을 말함이지 결코 건물이 아님을 잊지 말자!

 

 

 

  수탈체제로 이끈 헤롯 성전을 헐라!
   착취를 시스템화 시킨 성전(돌과 콘크리트)을 헐어버린 예수 ………………… (글 : 김강기명 2007. 11. 08)


 

1.
마흔 여섯해나 걸려서 지은 웅장한 성전. 이스라엘 본토, 지중해, 아프리카, 아라비아의 전 지역에서 몰려온 유대인 순례객으로 넘쳐나는 예루살렘, 그들이 그 순례기간 동안 풀어놓는 엄청난 돈과 헌금, 그들에게 제공되는 각종 종교적 서비스. 이런 것들이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유월절 풍경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서 있던 성전은 헤롯 대왕이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의 성전은 애초에 허름하게 지어진 성전이었고(스 6:3-4), 그나마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침략으로 훼파되고 불결하게 되어버린 성전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도 아니었던 헤롯 대왕은 이 성전을 무려 46년에 걸쳐 그리스식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다시 지음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통치를 위한 '국민통합'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성전에 의해 만들어진 성전체제는 수탈체제였습니다. 민중에게 초월적 하나님을 '서비스'해주는 대가로 이 체제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까지 탈취했습니다. 민중은 로마제국에 바치는 세금과 함께 성전세를 이중으로 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성전이 완성되면서 각 지방(사마리아, 갈릴리)의 토착적 유대종교는 모두 이단이 되어버리고, 성전종교에 흡수되든지, 아니면 배제되어야 했습니다. 예수의 고향인 갈릴래아 사람들도 '자신들의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강요받았을 것입니다.

예수가 무너뜨리려 한 건 단순히 성전 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이 성전체제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성전체제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공중의 새와 들의 풀도 먹이시는 하나님을 그 체제에 충성하는 사람들에게만 팔아왔습니다. 예수는 그 성전체제를 향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일갈하십니다(요 2:16).

2.
오늘도 많은 종교들이,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을 팔고 있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잔치로 만민을, 특히 고난 받는 이들을 초청하여 먹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일진대 교회는 거기에 충성하는 이들에게만 하나님을 팔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죄 용서받고, 복 받고, 부자 되고, 대학 가고, 죽어서 천국 간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들을 향해 여전히 소리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종교의 지도자들만이 예수의 비난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중들도 예수의 이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그 어떤 지배 체제도 대중의 공모 없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대중은 재미있는 존재입니다. 성전을 짓는다고 세금을 쥐어짜고, 노역에 동원할 때는 힘들어 저항하기도 하고, 대규모 공사에 대한 반감도 드러내지만, 막상 46년이 지어 거대한 건축물이 지어졌을 때 그들은 저항하기를 그치고 성전을 자랑스러워하며 금방 성전체제에 흡수되고 맙니다.

물론, 이건 저의 역사적 상상이지만, 단순히 상상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일이 역사에 반복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가까이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추진한 청계천 복구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일단 지어지고 나면,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피해와 고통을 입었고, 그 결과와 과정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는 더 이상 회자되지 않고, "어쨌든 그는 성공했다"는 신화만 남아 찬사를 합니다. 그리고 대중은 기꺼이 그것이 만든 새로운 풍경 속에 흡수되어 버리지요.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배제된 자들의 아픔은 은폐되고 맙니다.

예루살렘의 대중들도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고, 이 새로운 성전을 보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에게 환전과 제물을 제공하고, 여행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은 꽤나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이내 성전이 단순히 하나님 계신 곳만이 아니요, 자신들에게 부를 가져다주는 화수분임을 깨닫고 그 체제에 충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통에, 이전까지는 함께 고통 받던 사람들을 대중들 스스로가 배제하고 성문 밖으로 내어 쫓았을 것입니다(히 13:12). 성전체제의 봉사자인 이들 예루살렘의 대중 역시 예수의 비판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3.
더 나아가 예수는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성전을 허물면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그것을 "자신의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예수에게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성전과 거기에 기생하는 성전체제(왜곡을 통한 착취)는 허물어져야 했습니다. 예수는 몸소 성전이 되었습니다. 예수 자신이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 안에, 혹은 종교체제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몸 안에 계신 것입니다.

성전체제는 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지만, 예수는 민중의 몸(신앙의 공동체)으 로 부활하십니다. 갈릴리 촌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하고, 성령을 받고,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온 지중해로 퍼져나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체제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성전인 사람들입니다. 종교나 정치의 체제(시스템), 이데올로기 같은 초월적 체제로 도피하여 자신의 안식처를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에 직면하여 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헤롯 성전'으로 도피합니다. 영화 <밀양> 속의 신애라는 캐릭터는 어쩌면 이러한 우리들 모습의 대표격인 캐릭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바람 피다가 사고로 죽은 남편이 자신에게 준 고통을 그대로 직면하지 못하여, '남편을 잊지 못해 남편의 고향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미망인'이라는 허위의식 속으로 도피합니다. 아들이 유괴당하여 죽자, 그 고통을 직접 대면치 못하고 마약과 같은 즐거움을 주는 초월적 종교 안으로 도피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이웃과의 관계, 아들과의 관계, 그를 흠모하는 종찬(송강호)과의 관계 등 모든 관계에서 피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헤롯 성전으로 도피하는 이들은 이웃과의 관계 역시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전인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증언을 필요치 않습니다(요 2:25). 아름다운 미망인 척할 필요도 없고, 땅을 알아보러 다니는 알부자인 척 할 필요도 없고, 위대한 믿음의 일꾼인척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죽는 그날까지 헤롯 성전이 마련해준 자리에서 고통 받으며, 또 고통을 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우리를 몸-성전의 삶으로 초청합니다. 스스로 성전이 되어, 신처럼(요 10:34-35, 시 82:6) 세상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헤롯 성전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것을 무너뜨려야 우리는 성전으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성전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누구의 증언도 필요치 않는 참 자유인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율법의 십일조, 예수도 안했다.
율법 아래서도 목수는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 …………………………………………………… (글 : 신 완 식 ㆍ. ㆍ. ㆍ.?)

 

1. 목사는 레위 족속이 아니고 제사장도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십일조는 율법시대에 주어진 것인데 지금은 율법이 완성된 복음의 시대요 은혜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왜 십일조만 시행하고 할례는 시행하지 않나요? 여성들은 예배 시간에 왜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나요?

2. 교회는 성전이 아니고 예배는 제사가 아니며 헌금은 제물이 아닙니다. 요즘도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 등을 하고 있나요?

3. 아브라함이 드린 것은 자신이 거둔 땅의 소산인 농작물이나 소유한 가축에서 드린 것이 아니고 전리품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이 드린 것은 결코 전리품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반드시 개인의 소유에서 나온 소득에 근거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은 오직 유일회적인 일이요 정기적으로 행한 구약시대의 십일조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4. 야곱의 서원은 십일조를 드리기 전에 한 것이고 반드시 ‘If~’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지적하신 대로 그가 실지로 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는 성전도 제사장도 율법도 생기기 전이고요.

5. 구약시대에 드린 십일조 품목에 ‘돈’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지금은 돈만 받지요?

6. 구약시대에도 십일조 의무를 면제 받은 직업들이 있습니다. 수확을 위한 바구니를 만든 상인들,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신는 신발을 만든 사람들, 추수 수확을 위해 마차를 만든 목수들,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물을 길어 나르도록 물통을 만든 도자기공들, 들판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외투를 만든 여인들, 임금을 받고 들에서 일한 종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였기(마 13:55, 막 6:3) 때문에 십일조 뿐 아니라 성전세도 내지 않으셨습니다(마 17:24-27).

7. 헌금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합니다(마 10:8하, 마 5:42, 롬 15:26-27, 눅 6:38 등). 즉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8. 바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유다가 쓴 성경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전무 합니다. 즉 초대교회는 이미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지요.


그 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유럽 교회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가 다니는 영국 교회도 공식적으로 십일조는 언급조차 않고 있어요. 물론 아프리카나 스리랑카 인도 등에서 온 이들 중에 하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사실은 위의 내용들을 잘 모르고 있지요. 유럽 성도들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십일조를 중심으로 헌금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교 회 인건비, 유지비, 구제비 등 실질적인 재정관련 사항들은 ‘십일조’를 강조함으로 해결할 게 아니라 목회자들이 구체적인 재정 필요 사항들을 교인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게 해야 하는 데 한국 교회처럼 그렇게 강조하니, 심각한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지요. 저희 교회는 십일조 강조 하나도 안하고 저도 지금 십일조 안 해도 할 일은 다하는 교회랍니다. 구제와 선교를 위해 적극적으로 헌금을 하기 때문에 담임목사님은 제 기억으로 지난 5년 동안 꼭 한 차례 그것도 스쳐 지나가는 말로 헌금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 оо님께서 참조하신 성경주석을 쓴 이는 위의 기본적인 사실을 모른 채 의례적인 논리를 따라 쓴 것 같습니다.


한 국도 머지않아 십일조 문제를 극복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영국 교회도 100여 년 전까지는 했으나 지금은 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태의연하게 대처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한국 교우들은 유럽 교회는 죽었다고 하는 데 그런 측면도 있으나 영국은 ‘병든 한국 교회’와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살아있는 교회랍니다.


십일조는 무조건 소득의 십 분을 내는 것이 아니랍니다. 구약 시대에서는 반드시 소출과 가축에서 드렸고, 직업에 따라서 면제되는 것도 많았습니다. 어부와 목수가 그 대표적인 예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베드로도 십일조를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십 일조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성전 제사가 있을 때 유효했던 제도로서 초대교회 때는 시행하지 않다가 중세에 들어 교회가 제도화 되면서 다시 시행된 제도입니다. 영국과 서구 교회는 더 이상 십일조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습니다. 이는 믿음의 부족 문제가 아니라 성서적인 근거 문제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십일조의 근본 취지인 극빈자, 장애인, 노인, 어린이, 여성 그리고 사회보장 및 복지에 대해 깊은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제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도 맹목적으로 십일조를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그 근본 취지와 뜻을 밝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 한다고 복이 굴러 온다거나 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 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감언이설에 불과 합니다. 저는 기득권의 욕심과 이익을 대변하는 왜곡된 성경해석이나 잘못된 설교를 지적하고 성경이 적시하고 있는 정확한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참된 목회요, 진리말씀으로 영혼을 자유케하는 고귀한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기 독교가 사제중심의 브로커 종교체제나 사제만 행세하고 공공연히 착취하는 노예종교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거룩하게 개혁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만약 십일조를 강조한다면 초대교회(초대교회는 십일조가 없었음)의 연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불완전한 사람이나.. 혹은 사제나 교주에게 무조건 ‘아멘’하는 것이나, 덮어놓고 맹종하는 일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뱀같이 지혜로와야 합니다. 무엇이 자유케하는 성경적 참 진리인지 무엇이 율법과 제도와 사람에게 종노릇하게 하는 사람의 계명인지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 농경 목축 사회에서 토지 소산과 가축이 '모든' 소득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이미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고(참고 - 농경 목축 시대였던 아브라함 시대와 전통적인 십일조가 처음으로 시행되던 모세 여호수아 시대에도 화폐가 중요한 교환 수단으로 유통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돈이 아닌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만을 오직 원하셨음, 창23:12-16, 신14:24-26) 다른 일거리나 매매 행위 등을 통해 여러 형태의 소득들이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왕정시대로 넘어갈수록 다른 종류의 소득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성전세나 헌금, 다른 세금들은 돈으로 냈으나 십일조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돈으로 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양식의 형태로 성전 곳간에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가나안 땅에서 토지 분배가 있은 연후의 토지 소산과 가축의 개념은 소득이나 부의 축적 수단이라기보다 양식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레위인, 또는 가난한 자들과 양식을 나눠 먹는 구제의 정신 가운데서 행해졌다. 한 가족이 1년 동안 먹는 양식의 10분 1을 내어놓아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양식의 10분 1은 될지언정 '모든' 소득의 10분 1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말라기와 느헤미야 시대까지는 십일조가 토지 소산의 10분 1로 양식에 국한되었다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러다가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더 많은 성전 수입을 위해 제사장들과 함께 십일조의 대상을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토지 소산 이외에 박하, 회향 같은 특수(양념) 작물들도 십일조의 대상이 되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십일조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화폐 소득을 십일조에 포함시키고부터였다. 화폐 소득을 포함시키자 자연히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으로 확장되었다. 화폐와 박하와 및 향료의 십일조는 탈무드의 랍비들이 주문하는 내용이었으나 이는 성경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성서 대백과》 제4권, p.752, 기독지혜사)

중세 교회에서도 4세기 무렵 십일조를 채택하고 나서 근 1000년 가까이 지난 13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시켰다는 사실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거의 독점 체제에 가까웠던 중세 교회가 왜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장시키는 데 1000년이나 걸렸을까. 그것은 중세 교회에서도 전통적인 십일조의 대상은 '모든' 소득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화폐 소득을 중심한 '모든' 소득이 십일조의 대상이 됨으로써 십일조가 변질되고, 그것이 전통적인 십일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십일조가 나눔의 양식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의 치부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 (십일조를 넘어서 中..)

 

 

°(롬 3:30-31)“때문에 한분 그 하나님이 이 의롭다고 간주하심이 할례 받아도 믿음으로 부터요 할례 받지 않아도 그 믿음에 의해서라. 따라서 그 믿음 때문에 율법을 무익케 함이니, 율법을 세우지도 않고 |(율법의 고안품을)| 만들지도 아니하노라.”


‘(율법의 고안품을)’은 문맥의 의미에 맞게 첨가 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율법적 흉내내기 장치(裝置)들론 ‘주일성수’, ‘십일조’, ‘성전건축(?)’..등등이 있을 겁니다.


하 여, 주와 함께 걷는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또한 그런 믿음 안에서, 오늘날의 의식률(儀式律 : 주일성수, 십일조..등등)을 잘 지켜야만 신실한 크리스찬 이라고 평(評)하는 자들의 변은(딤전 6:5),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무지의 소치(所致)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성전되신 예수- 요 2:19-21, 행 6:14, 마 26:61, 막 14:58, 마 18:20) 안에서 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마 12:5】, 주의 백성은 공동체 안에서(교회를 이룬 각 지체- 엡 2:19-22, 고전 12:27, 롬 12:4-5, 엡 1:22-23) 그들의 자손에게 할례를 베풀었으며【요 7:23】, 주와 함께한(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의 몸- 고전 3:16, 고전 6:19, 고후 6:16, 히 3:6) 다윗은 그 종자들과 안식일에 성막(혹은 산당)의 진설병을 먹었습니다【삼상 21:1-6 / 레 24:8-9】.


따라서, 우리 유일하신 성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조항들은 이미 채워진(πληροω 플레로오 | 가득하게 하다, 채우다, 풍성하게 하다, 완성하다, 끝까지 채우다, 완벽하게 하다, 실재가 되게 하다, 수행하다 / 마 5:17) 하찮은 보조수단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참된 말씀을 따르고, 배워서 주께로 활발히 자라가는 것이지, 사람들의 손으로 지어낸 그런 고안품(εργον 엘곤 | 사업, 고용, 생산된 것, 손으로 만들어진 것, 예술, 제조업, 행동, 행위 / 딛 3:5)들로 자라나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적 사고로 믿음의 크기를 잰다거나, 칭송한다거나, 자랑해 대는 것은 그들의 무지만을 더더욱 크게 알리는 허망한 노래일 뿐입니다.



“ 그러나 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실상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모든 상징이 사라지며, 그가 본체이시므로, 그가 나타나실 때에 그림자는 버려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안식의 진정한 실현이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으며,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 목적은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는 것이다(롬 6 : 4-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다른 곳에서 안식일은(골 2 : 16)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한다(골 2 : 17).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실상의 바로 본체시며,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잘 설명했다. 이 일은 어느 하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때까지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있을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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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거짓 선지자들의 너절한 이야기는 사라진다. 그들은 수 백년 전에 유대교적 견해를 사람들에게 감염시켰다.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만이(그들의 소위 제 칠일의 "정"만이) 지폐지된 것이고 도덕적 부분은-즉, 이레 가운데서 하루를 정하는 것은-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의미로 날을 변경했을 뿐이고,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하는 생각은 여전하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 같이, 그날의 신비성에 중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런 사상을 가르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자기들의 교회 규정을 고집하는 자들의 미신은 유대인 이상이요 세 갑절이나 더 유치하고 육적인 안식일 미신이다. 따라서 이사야가 당시의 사람들을 책망한 말은 현대의 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사 1 : 13-15, 58 : 13). 그러나 우리가 특히 견지해야 하는 일반적 교훈은 이것이다. 즉, 우리들 사이에서 경건이 소멸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회에 부지런히 출석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도을 수 있는 외면적 보조수단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Ⅱ, 8장 28 - 34 中 에서..

 

 

이스라엘에 왕정이 시작된 후 십일조는 어딧다가 냈나?

구약에 보면, 십일조의 쓰임새가 다양했습니다. 그 첫 번째로 이스라엘 모든 처음 난 자를 대속해【민 8:14-19, 민 3:12-13 / 출 13:13, 출 22:29, 출 34:20, 레 27:26-27, 민 18:15-16】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분깃으로 주어졌으며【민 18:21-32】, 혹 얼마는 정성 드린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먹기도 했고【신 14:22-27】, 또 그 ⅓은 구제(救濟)에 쓰였습니다【신 14:28-29, 신 26:12-15 / 레 25:1-7】.

그로부터 한참 후 이스라엘 민족이 왕을 세울 때부터 십일조는 왕한테 내라
【삼상 8:15, 17】한 성구도 있고, 실제로 왕이 걷어들인 기사도【왕상 4:7-19】 있 습니다. 어떤 자들은 앞에서 말한 십일조를 ‘십삼조’{?}라 우기고는 소득에 십분의 삼을내라 하는데, 이는 자기 아는 것으로만 둘러대는 거짓말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이 왕한테 내는 십일조까지 합해서 십의 사를 내야한다는 말도 되기 때문입니다.

왕도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로써 이스라엘 각지파의 십일조를 걷어, 그 신하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인 성전의 문지기, 창고지기, 찬양대, 수종자, 유사들에게도
【대상 24:20-26:32, 대하 19:11】 나눠줬습니다【대상 25:6, 느 11:22-24】. 분명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도 왕의 신하라고 성경에는 씌여있습니다【왕상 2:35, 왕상 4:2-4】.

따라서,‘사회보장기금’과 ‘세금’에 성격이 강한 십일조두고 그 수납처(收納處)를 교회당으로만 한정시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또, 자기들 눈에 보이는 곳에다 십일조를 내지 않았다해서
【말 3:8-10】에 말씀을 들어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것 또한 결코 옳지 못한 행태(行態)입니다〈어찌 ‘하나님이 교회당 안에만 계시다’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 6:2-4, 마 25:34-40, 눅 14:12-14】 하셨으며, 걷둬드린 십일조 가운데 ⅓【신 14:28-29, 신 26:12-15 / 레 25:1-7】 은 구제(救濟)에 쓰여져야 한다는 율을 어기고 백분의 삼(3%)만으로 생색내는 자들이 더더욱 큰 도둑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9】 여기서 ‘온 나라’라 했으니, 어찌 레위인들이라고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느 13:4-14】 큰 도둑이 좀 도둑 정죄하는 짓(초등한 자가 범하는 우, 딤전 3:6)을 이젠 그만 그칩시다.

“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혼란하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의 제물과 피와 (피를 빼지 않고)목졸라 죽인 것과 음행에서 떠나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것들만 삼가면 스스로 잘 해내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행 15:23-29】

또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졸라 죽인 것과 음행에서 떠나 멀리하는 것”말고는 다른 짐【계 2:24】으로 성도를 괴롭히지 않으려했던 ‘사도와 장로의 규정(δογμα)’에 따르지 않고, 사도로 부터 보냄 받은 바(사도적 계승) 없이 지식의 열쇠【눅 11:52】만을 갖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성도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마 11:28) φορτιζω 프홀티조 G5412, 짐을 얹다, 짐을 싣다, (관습과 부당한 교훈의)짐을 지우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위에 군림하려는 자의 계략을 간파하여 속지맙시다. 주의 이름으로 구제(救濟)하기 보단,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사치하고 치장하길 더 좋아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을 탐하며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데에【마 23:1-7, 막 12:38-40, 눅 20:45-47】 여념 없는 자들이 지운 짐을 이제는 벗어 던져버립시다.

 

 

과부의 두 렙돈 기사는 헌금강조용인가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눅 21: 1- 4)………………………………………………………… (글 : 오세용 2007. 09. 26)



누 가복음 21장 1- 4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과연 이 본문이 헌금에 관한 것일까, 헌금을 강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래 들어온 설교들이 모두 그랬기에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이 과부처럼 정성껏 혹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을 보시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넣는 것 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크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칭찬하신 일이 이것이니 우리가 헌금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칭찬해도 되지 않는가?”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가진 소유의 비율을 볼 때 과부가 바친 헌금은 전부입니다. 다른 부자들은 많이 바쳤습니다. 과부가 바친 돈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의 거액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바친 많은 금액은 한마디도 칭찬하지 않고, 이 과부가 바친 적은 것은 왜 칭찬하셨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단순히 액수의 많고 적음만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비율적으로 헌금액수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이 명쾌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이 헌금 평가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의 헌금 생활을 반성하라는 뜻이 있지 않겠는가? 저 가난한 과부를 본받자. 하나님을 우리 영혼의 구주로 참으로 믿고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그에게, 그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저 가난한 과부처럼 정성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자.”


이 본문이 과연 그러한 말씀인가 생각해보려고, 몇가지를 관찰하여 보았습니다. 본문 3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 수님께서 성전에서 두렙돈 헌금하는 과부를 본 후에 그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본문이 마가복음(막 12: 41-44)에도 기록이 되어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막 12 :43)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 얘들아 내가 오늘은 너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마…. 내가 오늘 성전에 갔더니…’  하면서  제자들에게 헌금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들은 금과 은도 없거니와 두벌 옷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헌금을 할래야 헌금을 할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앞으로 너희들이 성도들을 관리할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하실리도 없습니다.

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듣는 사람이 제자들이건, 아니면 다른 사람이든 유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여자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그 런 말을 들었다면, 예수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먼저 했을까요? ‘아하, 저 여자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으니 나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니면 ‘아니, 그렇게 생활비 전부를 헌금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얼 먹고 산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마 유대사람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는 특별 보호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잘했다, 나도 그 여자를 본받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당시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열 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도대체, 그렇게 헌금을 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서기관들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여자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을 한단 말입니까? 서기관들과 부자들은 과부가 그렇게 헌금을 하는 것을 보고도 가만 있었습니까?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헌금을 중요시 여겨 사람들에게 헌금을 가르친 말씀이라고 가르친 것이라 한다면,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이 본문은 결코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그런 용도로 사용한다면, 한마디로 예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앞뒤 문맥을 한번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21장은 20장에 이어서 나오고 있으니 20장 마지막 구절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0장 45절-47절입니다. 47절, 그들(서기관)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원래 성경이 쓰여질 때에는 장, 절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장을 나누고 절로 구분하여, 성경을 찾고 읽는데 편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경우 본문의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는 과부의 두 렙돈 기사가 12:41-44에 나오고, 그 다음 장인 13장 1- 3절까지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5절부터 예수님은 다가올 심판, 예루살렘의 멸망, 말세의 징조 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맨 먼저 46절에서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바로 뒤(눅 21:5—6)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20장 45- 47 서기관 …과부
21장 1- 4절  과부 …두 렙돈 헌금
21장 5절  성전 ..미석과 헌물
21잘 6절 성전 ….무너짐

그러니 이렇게 말을 이어가며 뜻을 해석해야 합니다.
20장 47절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21장 4절 (가산을 뺏긴) 과부들은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헌금을 하고….. ..
21장 5절 (그러한 과부들은 돌보지 않고) 성전은 과부가 헌금한 헌물로 호사스럽게 꾸며지고 ….
21장 6절 그러한 성전이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이 렇게 연결이 되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율법학자들에게 경고하심으로 시작하여 성전이 무너질 것이다, 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중인데 중간에 본문을 뚝 떼어내어 헌금을 잘 하라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면 이 얼마나 엉뚱한 해석입니까?

그러니 오늘 본문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과부 즉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고, 또한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성전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등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골몰하여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경고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지 금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특별히 본문 말씀이 교회 개혁을 위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교훈을 찾기는커녕 이 본문을 거두절미하고 뚝 떼어 내어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오용하고 있으니, 정말로 한국교회가 얼마나 매(?)를 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사장들을 향한 말라기 선지자의 책망

말라기 3:8-10 은 술사(術士)의 주문이 될 수 있는가?…………………………………… (글 : ?  )


앞 에서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었던 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부산의 C목사님은 누구나 흔히 그러는 것처럼 말라기서를 가지고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셨는데 과연 말라기 선지자가 그런 뜻에서 말했을까요? 여기에서 그의 진정한 속 뜻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한국의 목회자들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7-12절을 우선 읽어 봅시다.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 리는 항상 성경을 읽을 때 읽고 있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과 문맥을 조심스럽게 먼저 살펴보고 읽는 습성을 길러야 합니다. 전체의 내용과 문맥을 무시하고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하여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위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라기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말라기서가 기록된 시기는 스룹바벨 성전과 제사장들의 부패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성전재건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전 539 년경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고대 근동지역을 지배했던 나라였습니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성전을 재건하기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재건하고 수 십년이 지나도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 영광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흉년과 기근이 들어 고통의 나날이 연속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의 형통을 부러워 하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의심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잘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들이 신실했는데도 불구하고 재앙이 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며, 형식적으로 제사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은 흠 없는 것이어야 했는데도 제사장들은 좋은 것은 자기들이 차지하고 흠있는 것을 골라서 희생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그렇게 해도 괜챦다고 가르쳤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했으며,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면 율법에 명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라기서는 주전 약 430 년경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던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1장 6절을 보세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2장1절에도 "너희 제사장들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2장10절에 가면 "우리는"이란 말이 나옴으로써 유대 백성들을 향한 책망이라고 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3장 8절로 가면 헌물을 도적질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헌물은 이미 백성들이 성전에 바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제사장들을 향한 책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물
(תּרמה ㆍ תּרוּמה 테루마 | 기부금, 조세, 제물, 거제)이 란 유대인들의 3대 절기에 바치던 것입니다. 헌물은 원래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헌물을 잘못 냈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백성들이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을 제사장들이 도적질했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그러한 도적질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가 1장에 나타나 있음이 그 증거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너를 가납하겠느냐”(말라기 1:7-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14)

위에 나오는 더러운 떡이나 눈먼 희생, 저는 것과 병든 것, 토색한 물건.. 등등은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가지고 온 것들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은 제사에 쓰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15:21). 그러나 제사장의 입에는 율법이 있어 그러한 행위를 막는 것이 당연했지만 제사장들은 부패하여 대강 제사를 드리고 자기에게 돌아올 양식이나 돈만을 챙겼던 것입니다. 말라기 본문에 나타나는 '희생을 드린다'는 말은 백성들과는 상관이 없는 제사장들과 관련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제사장들의 부패상입니다.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적질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백성들이 아니라 제사장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3장8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면 본문의 의미가 뚜럿하게 나타납니다. 말라기 3잘8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라는 반문을 할 수 있는 자들은 결코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1:10과 2:3을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우리말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것' 또는 '나의 것' 또는 '주의 것'이란 단어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을 해놓는 바람에 십일조에 대한 오해가 가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바
(קבע 카바 | 강탈하다, (덮어)속여 빼앗다)'라는 단어는 영어의 Cover와 같이 '덮다' 또는 '속이다' 또는 '속여 빼앗다'라는 의미로써 백성들이 가져온 희생제물을 제사장들이 속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에 대한 도적질은 굳이 말라기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라기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느헤미야도 여기에 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13:4-14까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를 보면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주라고 바친 십일조를 제사장들이 중간에서 빼돌리고 성전 창고를 다른 곳에 사용한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히 성전의 일을 돌보던 레위인들은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도적질하는 자들 때문에 받지 못해서 성전에 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으므로 성전은 피폐되었기 때문에 말라기 선지자가 이때 나타났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총독은 급기야 십일조를 조직적으로 거두기 위하여 전국적인 감독체제를 갖추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10:38과 12:44에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감독들을 시켜 타작마다에 직접 가서 십일조를 거두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느12:47).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없는 동안에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 도비야의 세간들을 모두 끄집어내서 밖에 내던지고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하여 성전을 회복했던 것입니다(느13;12).
느헤미야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빼돌리는 제사장들을 모두 갈아 치우고 사람을 세워 십일조를 관리하도록 했습니다(느13:13).

이렇게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빼돌린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책망의 말씀을 가지고 부요의 원칙이니 뭐니 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곡해하는 행위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그저 난감할 따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터 배우라
그분의 말씀을 알고 믿으라 ………………………………………………………………………………………… (글 : e-GOT 2007. 11. 11)



「작 성자: lovesbabo (2007. 11 .10) ::: 마5:19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문 : 1. 이를 = 율법이 아닌지요? 2.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 -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라는 뜻이 아닌지요?」


앞뒤 성구는 무시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성구만 쏙~뽑아다가 자신의 논리에 맞춰 끼우는 문자적 도구화는 결코 좋지 못합니다. 그 구절이 뭔가를 설명하기 위한 부분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는 곧 오류와 왜곡을 낳기 때문입니다.


유 대인들이 안식일 마다 읽었던(행 15:21, 행 13:27)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분(요 1:14),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분(눅 6:5, 막 3:28, 마 12:8), 참 성전 되신 그분(요 2:21)”인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가리키는 손과 같습니다(요 1:36, 마 3:13-17, 막 1:9-11). 즉 점 없고 흠 없는 자가되라는 율법의 결국도(눅 16:29.31) 주를 만나 죄사함 받고 두 번째 나타나실 때에 주께로 진정한 의인이라 인정받아 영생을 얻기 위한 것이기(신 4:29, 신 30:6) 때문입니다(요 11:25-26, 요 17:3). 오늘날의 신학의 역활도 결코 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딤전 4:5). “…… 그는(칼 바르트) 항상 복음을 새로이 가리키는 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세례요한의 손 이상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하나님과 이웃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나름대로 노력한 것을(신학) 나중의 사람들이 훨씬 더 잘해 주길 바랬다.……” ― 이신건


율 법과 선지자의 말한 것을 채워서(마 5:17) 다 이루실(마 5:18) 그분이야 말로,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는 바리사이 해석자와 서기들(마 23:4, 눅 11:46)과는 달리 진정한 선생님이요 진정한 지도자요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이기(마 23:8-10) 때문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그분을 증언하고 지향(志向)하며 그분의 모습을 묘사하고 표현하고 알리려했던 것일 뿐 실체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율법과 선지자가 사소하고 작게 언급한 것도 본체인 그분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버려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거기계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터 배우라는 것입니다(마 5:19). 이렇게 말씀하신 후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문자적 해석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해석을 내보이신 겁니다(마 5:21-48, 마 7:29, 막 1:22, 눅 4:22).


믿 음이 더욱더 자라서 장성하고 싶으십니까? 그럼 믿음을 자라나게 못할 겉만 번지르르한 거짓 해석과 율법적 흉내내기인 ‘십일조, 주일성수, 새벽기도, 일천번제, 성전건축?…’등등에 하찮은 보조수단들을 떠나 하나님 말씀을 읽고 거기서 말씀하시고 계신 그분을 발견하여 그분께로 부터 배워 나가십시오.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바로 그 하나님뿐입니다(고전 3:6-7).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번제물을 희생제물에 섞어 그 고기를 먹어치워라. 내가 너희 조상을 에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올 때 그들에게 번제물과 희생제물에 대하여 이야기하거나 명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명령을 그들에게 내렸다. “내 목소리에 순종하여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길만을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되리라.”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너희 조상들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목덜미를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요,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나님 목소리에 순종치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 (렘 7:21-26)


당신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시리이다.” (시 51:16)

내 백성아, 듣거라. 내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아, 나 너를 거슬러 증언하노라. 나는 하나님, 너의 하나님이로다. 너의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려는 것이 아니니 너의 번제야 늘 내 앞에 있도다. 나는 네 집에 있는 수소도, 네 우리에 있는 숫염소도 받지 않노라. 숲속의 모든 동물들이며 수천 산들의 짐승들이 내 것이기 때문이니라. 나는 산의 새들을 모두 알며 들에서 움직이는 생물들도 내게 속한 것들이로다. 내 비록 배고프다 하여도 네게 말하지 않으리니 누리와 그를 채운 것들이 나의 것이기 때문이니라. 내가 황소의 고기를 먹고 숫염소의 피를 마시기라도 한단 말이냐? 하나님께 찬미로 제사를 드리고 지존께 네 서원을 채워드려라. 그리고 불행의 날에 나를 불러라. 나 너를 구하여주고 너는 나를 공경하리라.” (시 50:7-15)

“ 저는 가련하고 고통 중에 있나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송가로 그분을 칭송하리라. 이것이 주님께는 더 좋도다, 수소들보다 뿔 달리고 굽 갈라진 황소들보다. 가난한 이들이 이를 보고 즐거워하리라.” (시 69:29-31)


‘주 저의 하나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기적과 계획 들을 많이도 행하셨으니 그 누구도 당신께 견줄 수 없나이다. 제가 알리고 말하려 해도 헤아리기에는 그것들이 너무나 많사옵니다. 당신께서는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주셨나이다. 번제와 속죄제를 당신께서는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두루마리에 저에 대하여 쓰여있나이다. 저의 하나님, 저는 당신의 뜻 행하기를 즐기며 제 가슴속에는 당신의 가르침이 새겨져있나이다.”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께서는 알고 계시나이다. 당신 정의를 제 마음속에 감추어두지 아니하고 당신 성실과 당신 구원을 이야기하며 당신 자애와 당신 진실을 큰 모임에서 숨기지 않나이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게 당신의 자비를 거절하지 않으시니 당신 자애와 당신 진실이 항상 저를 지켜주리이다.’ (시 40:6-10)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두루마리 책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히 10:5-10)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이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예지이다.’ (호 6:1-6)

이스라엘아! 주 너의 하나님께 돌아오너라. 너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나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 (호 14:1-3)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합니까? 번제물을 가지고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까? 수천 마리 숫양이면, 만 개의 기름 강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미 6:6-8)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찐 짐승의 기름기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을 저지르기를 그만두고 선을 행하기를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주어라.” (사 1:10-17)

“너희는 베델로 오너라. 그리고 죄를 지어라. 길갈로 오너라(거짓 산당 거짓 성당 거짓 교회당). 그리고 더욱더 죄를 지어라. 아침에 희생제물을 바치고 셋째 날에 십일조를 바쳐라. 누룩 든 빵을 감사 예물로 살라 바치고 큰 소리로 자원 예물을 공포하여라. 이스라엘의 자손들아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 주 하나님의 말씀이다.” (암 4:4-5)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제물 바치는 것을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삼상 15:22-23)


‘예수님께서 그 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 9:9-13)

註) ― 근동 특히 팔레스티나에서 식사는 사람들 사이의 일치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때라고 생각하였다. 율법 준수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세리와 죄인”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피하였다. 더구나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 곧 부정(不淨)한 자의 초청을 받아들이시어, 다른 많은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유다교 랍비들의 중요한 거짓 규정을 의도적으로 깨뜨리신다.

‘ 그 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들이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 12:1-7)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
한국교회가 설교 홍수 속에 있지만 말씀은 기근 ……………………………………………………… (글 : 정 병 선 2007. 11. 09)



본문: 마가복음 11장 12~25절


드 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성전에 들어가셨다.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성전에 들어가셔서 구석구석을 둘러보셨다. 어떤 제자는 성전의 외형을 보고 그 규모와 위용에 놀란 나머지 ‘얼마나 굉장한 돌이며 건물이냐’고 감탄을 하였는데(막 13:1), 예수님은 성전의 외형을 보지 않고 내부와 구석을 살폈다.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았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성전에 있을 수 없게 되자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내려가 밤을 보냈다. 


이 튿날 다시 예루살렘에 가려고 베다니를 떠나는 길에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던 예수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멀리 있는 것을 보시고, 혹시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갔다. 가보니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다. 아직은 열매 맺을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열매 없는 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막 11:14)며 저주를 퍼부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라는 거야 예수님도 아실 터. 그런데 어찌하자고 저주를 퍼붓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 ‘철’을 ‘계절’로 이해하면 혼란이 생긴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철’은 무화과 철을 가리키는 계절상의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때를 나타내는 종교적인 용어, 마가가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막 1:14~15)고 말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용어(kairos)라는 사실을 알면 더 이상 헷갈리지 않는다.


마 가는 본문을 구성할 때 치밀하게도 ‘하나님의 때’를 의미하는 종교적 용어를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도입함으로써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종교적 차원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곧바로 이어지는 성전 이야기와의 연결 고리를 맺어준다. 다시 말하면, 본문은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통해 성전 이야기를 읽어야 성전 이야기가 제대로 읽히고, 또 무화과나무 이야기도 성전 이야기를 통해 읽어야 제대로 읽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강도의 굴혈이 된 성전


이 튿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다시 성전에 들어가셨다. 성전에 들어가자 성전 안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성전 뜰에는 희생 제사로 드릴 소·양·비둘기 등을 판매하는 자들과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성전세로 사용되는 세겔을 교환해주는 환전상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종교적인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희생 제사에 쓰는 기구를 가지고 아무나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등 성전은 말할 수 없이 무질서했다. 예수님은 그런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었다. 성전이 상업적으로 운용되고, 종교적으로 기능화 되어버린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은 가차 없이 상업상의 거래를 중단시키고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성전을 가로질러 종교의식에 필요한 물건 운반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성전의 종교의식도 중지시켰다. 


그 리고는 여느 때와 똑같이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치는 가운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막 11:17)며 정곡을 찌르는 말씀도 서슴지 않았다. 아! 강도의 소굴이라!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하다. 요즘 네티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노골적이고 신성모독적인 언사가 아닐 수 없다. 이 행동이 예수님의 행동이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데 익숙해 있지만, 세속화되었다고 하는 현대 교회에서조차도 누군가가 교회를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교회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팔매질을 당할 언사를 내뱉었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은 여간해서 중심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왜 이처럼 중심을 잃은 듯한 언행을 하셨을까? 


그 당시 유대 종교의 실상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성전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환전상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자기들만의 상호 이익을 보장하는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고, 모든 이익은 그들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본래 성전은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곳으로 만민에게 개방되어야 한다.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통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성전의 비전이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성전의 비전을 저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물 론 유대 종교의 외피를 보면 결코 피폐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성전을 떠날 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성전을 보고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막 13:1)라며 감탄할 정도로 위용이 대단했다. 또 성전 마당이 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종교적인 활동도 활발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세를 바치고, 희생 제사를 드리며, 말씀과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결코 말라비틀어진 죽은 종교가 아니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성전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오래 전에 말한 것 그대로였다.


“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라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보았다.”(렘 7:10~11).


그 랬다. 예레미야가 지적한 대로 성전은 도둑들이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는 곳이 되어버렸다. 온갖 죄악을 범하고, 탐욕에 이끌려 과부의 가산을 강탈하고도 성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숨길 수 있었고 포장할 수 있었다. 성전은 온갖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는 방패막이였다. 당시의 유대 종교는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 바로 그것이었다.


이익에 눈먼 종교지도자들과 진리 들을 줄 아는 백성


예 수님이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가감 없이 말씀하고, 성전 중심의 종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말하며 비참하게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을 예고하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주변부를 건드릴 때는 적의를 표출하지 않았지만 저들의 체제와 이익의 중심부를 뒤흔들고 위협한다고 생각될 때는 여지없이 사나운 발톱을 드러내며 죽일 방도를 찾는 것이 저들이었다.


저 들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백성들을 진리로 자유케 하거나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저들의 관심사는 언제나 자기들의 이익이었다. 저들이 좇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익이었다. 그런데 진리는 언제나 현실적 이익에 반한다. 진리가 이익을 동반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때문에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가려야 했다. 진리를 가리지 않으면 이익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에 이익을 쫓는 자는 진리를 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진리를 가로막고 억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반 면에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 갈릴리와 이방에 살던 주변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던 것처럼 예루살렘의 군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다. 백성들은 우둔한 것 같지만 진리를 들으면 깨우친다. 백성들이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는 것은 듣지 못해서다. 이익에 집착한 종교지도자들이 포장된 진리, 왜곡된 진리, 자기들 이익에 부합되는 거짓 진리만을 말하기 때문에 진리를 듣지 못해서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지 진리를 정직하게 들려주면 백성의 귀는 열린다.


그 러기 때문에 이익에 눈먼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귀가 열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백성들의 귀가 열리면 자기들의 거짓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여, 저들은 할 수만 있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의 귀를 열어주는 자를 제거하려 한다. 참 진리를 듣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제도와 권력으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에게 그랬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에게 그랬으며, 오늘의 교회도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의 귀를 막으려 한다.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의 입을 막으려 한다. 그것도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또한 진리의 이름으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


바 로 이것이 교회의 역사요, 종교의 역사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귀를 틀어막고 입을 틀어막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요, 교회의 역사였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막으려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을 들려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듣는 자가 있게 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희망이 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시피 하나님나라는 만민에게 개방되어 있다. 듣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은혜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하나님께 나와 듣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하 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렇다면 기도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기도는 소통이다. 기도는 소통의 종교적 표현이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전부이며, 알파요, 오메가다. 더 이상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부활하신 것도,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을 만드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것도 피차 소통하기 위해서다. 하나님나라도 하나님과 만물이 소통하는 나라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니다. 때문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은, ‘만민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집’이라는 말로 읽을 수 있다.

하 지만 이 소통은 조직이나 제도로 되지 않는다. 훈련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 공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이 소통을 돕는 하나의 방편일 수는 있지만, 그런 것들로 소통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소통의 길은 오직 하늘로부터 시작된다. 소통은 은혜요, 선물로만 존재한다. 그러기 때문에 소통인 기도는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업적이 될 수도 없으며, 축복을 받는 도구로 동원될 수도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일 뿐이다. 기도-소통은 진실로 신앙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본질이다.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


예 수님의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비유이지만 단순히 비유만은 아니다. 비유이면서 동시에 사실이요, 사실이면서 동시에 예언이다. 실제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저주를 받은 무화과나무가 정말 뿌리 채 말라 죽어 있었다. 베드로는 전날 일이 생각나 예수님께 말했다.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막 11:21) 이 말을 할 때 베드로의 가슴이 어땠을까? 아마 놀라는 정도를 넘어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두려움 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이 어떠함을 보고 놀라기도 했겠지만,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가 뭔가를 암시하는 것 같다는 직감 때문에 더 놀라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 렇다.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은 이스라엘의 미래, 성전 신앙의 미래를 보여주는 예언이었다. 무화과나무가 죽은 것처럼 이스라엘의 미래, 성전 신앙의 미래 또한 그러할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호하며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 11:11)라고 외쳤지만, 실제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와 같은 운명이 될 것임을 예언적으로 보여주었다.   


기도하는 집의 위력


성 전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성전 신앙의 운명이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처럼 될 것임에 반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진정한 능력을 행사하는 참 자유의 집이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말라 죽어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라고 충격적인 말을 하자, 예수님이 곧바로 기도 이야기를 하신다. 나는 이게 조금은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묵상해보니 뜻이 통한다.  


예 수님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대뜸 하신 말씀이 “하나님을 믿어라”(막 11:22)였다. 그리고 곧바로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막 11:23)고 했다. 연이어 용서를 말씀하셨다(막 11:25).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는 믿음·기도·용서다. 그런데 믿음·기도·용서는 이미 도래한 새로운 공동체의 본질과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증하는 요소다. 예수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편이나 방어막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될 것이고, 기도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막힘없는 소통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피차 용서하고 용서받는 공동체로서 허물과 죄악과 비난이 더 이상 기를 쓰지 못하는 공동체, 그래서 지금의 성전 공동체와는 질적으로 다른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이 결코 헛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특 히 믿음의 기도는 산을 옮긴다고 말한다. 당신의 말씀이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한 것처럼 믿음의 기도는 산을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고, 믿음의 기도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바로 거기에 기도가 있다. 기도는 단지 내가 믿는 것도 아니고, 내가 확신하는 것도 아니며, 원하는 것을 얻는 방편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럴 때 기도는 산을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


나 는 여기서 산을 단지 눈에 보이는 산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산은 단지 산이 아니다. 산은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통칭한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세상의 우상들을 통칭한다. 모든 사람들이 오르기 원하는 욕망과 성공을 의미한다. 산처럼 견고하여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돈과 명예와 세상적 가치를 의미한다. 이 높고 견고한 산을 어느 누가 어떻게 바다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 정말 정복할 수 없는 요새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한다. 높은 산을 바다에 빠뜨려버릴 수 있다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는 산을 허물어버릴 수 있다고.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서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아는 자는 세상의 우상들을 발로 찰 수 있다고. 세상의 우상들로부터 넉넉히 자유할 수 있다고. 그렇다. 나는 바로 이것이 기도의 진정한 능력이라고 믿는다. 세상의 우상들 앞에 절절매지 않는 능력, 세상이 우러러 보는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길 수 있는 능력, 그런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기도의 저력이라고 믿는다.


기도의 홍수 속에 기도의 빈곤?


교 회와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돈이나 권세나 외적인 거룩함에 있지 않다. 오직 기도에 있다. 아니다. ‘기도’조차도 많이 왜곡되고 오염되어서 ‘기도’라고 하면 자칫 뜻이 와전되어버릴 수 있다. 하여, ‘기도’보다는 ‘하나님과의 소통’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과의 소통,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요, 교회의 근본이며, 능력의 근원이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은 채로 종교적인 활동만 무성하고, 종교를 빙자한 상거래의 장이 되어버린 성전은 더 이상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담아낼 수 없다. 그런 성전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뿌리째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처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막 13:2).


하 지만 기도하는 집이 되면, 하나님을 움직이는 종교적 수단으로써의 기도가 아니라 소통으로서의 기도하는 집이 되면 비록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 할지라도 높은 산을 바다에 던져버릴 수 있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 역사의 중심-하나님나라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주님은 교회를 향하여 한 가지 기대를 갖고 계신다.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그래서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허물어뜨리기를.


그 런데 한국교회의 기도소리는 크고 높으나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허물어뜨리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우러러보며,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다. 기도로 열심히 세상의 우상들을 손에 넣게 해달라고 조른다.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라고 소문은 자자한데 산을 바다에 빠뜨리지 못하고 산으로 기어오르기 바쁘다. 무엇 때문일까? 진정으로 기도하는 집이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설교의 홍수 속에 있지만 말씀의 기근이듯이, 기도의 홍수 속에 있지만 기도가 빈곤한 건 아닌지….

 

이것들 중 만들어진 것과 버리지 말아야할 것은 과연 무엇?
버릴 것과 버리지 말 것을 옳게 분별하라(마 23:23-24, 눅 11:42)………………………………………………… (글 :  e-GOT 2007. 10. 12)



¤【마 23:23-24】°화로다 바리사이 해석자들과 너희 서기들아, 박하와 양념과 회향의 십일조로 인해서 율법의 중요한 판정과 긍휼과 믿음은 내어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내버릴 것도 아니다. 눈먼 인도자들이 날벌레는 걸러내나 낙타는 단숨에 삼키도다.

{° ουαι  υμιν  γραμματεις  και  φαρισαιοι  υποκριται  οτι  αποδεκατουτε  το  ηδυοσμον  και  το  ανηθον  και  το  κυμινον  και  αφηκατε  τα  βαρυτερα  του  νομου  την  κρισιν  και  το  ελεος  και  την  πιστιν (우아이 휘민 그람마테이스 카이 화리사이오이 휘포크리타이 호티 아포데카투테 토 헤뒤오스몬 카이 토 아네똔 카이 토 퀴미논 카이 압헤카테 타 바뤼테라 투 노무 텐 크리신 카이 토 엘레오스 카이 텐 피스틴, 화로다 바리사이 해석자들과 너희 서기들아, 그 박하와 그 양념과 그 회향의 십일조로 인해서 율법의 중요한 그 판정과 그 긍휼과 그 믿음은 내어버렸도다) ταυτα  | δε | [δε] |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 αφειναι | αφιεναι | (타우타 | 데 | [데] |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 압헤이나이 | 압히에나이 |, | 그러나 |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 내버릴 | 내버릴 | 것도 아니다) ° οδηγοι  τυφλοι | | οι | διυλιζοντες  τον  κωνωπα  την  δε  καμηλον  καταπινοντες (호데고이 튑흘로이 | | 호이 | 디윌리존테스 톤 코노파 텐 데 카멜론 카타피논테스, 눈먼 인도자들이 그 날벌레는 | | 그 | 걸러내나 그 낙타는 단숨에 삼키도다)}



¤【눅 11:42】°또한 화로다 너희 그 바리사이들아,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로 인해서 판정과 하나님의 사랑은 지나쳐버렸다.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지나쳐버릴 것도 아니다.

{° αλλα  ουαι  υμιν  τοις  φαρισαιοις  οτι  αποδεκατουτε  το  ηδυοσμον  και  το  πηγανον  και  παν  λαχανον  και  παρερχεσθε  την  κρισιν  και  την  αγαπην  του  θεου (알라 우아이 휘민 토이스 화리사이오이스 호티 아포데카투테 토 헤뒤오스몬 카이 토 페가논 카이 판 라카논 카이 파렐케스떼 텐 크리신 카이 텐 아가펜 투 데우, 또한 화로다 너희 그 바리사이들아, 그 박하와 그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 로 인해서 그 판정과 그 하나님의 사랑은 지나쳐버렸다) ταυτα  δε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παρειναι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파레이나이,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할 의무가 있는 것도 지나쳐버릴 것도 아니다)}



앞의 두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과연 율법에선 십일조를 누가 무얼 드렸는지와 또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가 판정 긍휼 확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어야한다.


율법에서 말하는 십일조는, 하나님께 땅을 대여 받은 자들(레 25:23)과 십일조의 수혜자인 레위인들이(민 18:25-29) 내 는 것이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이 농경과 목축 사회였음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따라서 땅을 대여 받지 못한 노예, 어부, 물건을 만들어 파는 장인들.. 등은 십일조라는 율법의 의무에서 빠져있는 자들이다. 땅이 있어야 희년에(레 25:8-22) 맨 처음 대여 받았던 자의 자손이에게 땅을 되돌려주는 것이 가능해 지고(레 25:23-28, 민 27:6-11, 롯 4:1-12, 렘 32:8), 땅이 있어야 안식년(레 25:1-7)도 지킬 것이 아닌가? 또 땅이 있어야 그 소산물인 곡물과 과실과 굽이 갈리고 되새김질 하는 정결한 가축을 바칠게(레 25:30-33) 아니겠는가?


이런 이유로 한참 후대의 바리사이 해석자들은(υποκριτης 휘포크리테스 | 대답하는 사람, 해석자, 통역자, 배우, 연극배우, 위선자) 율법에서 빠진 이들 중 누구까지 십일조를 내야 되는지, 율법에서 빠져있는 이들 작물 중 어디까지 십일조를 해야 되는지 신학적으로 정립(Mishnah, 미쉬나 : 미쉬나는 대부분 기원 70-220년경에 생존한 랍비들의 토론에서 성립되어 있다. 이들의 율법적 토론은 점차로 집성되고, 탄나임으로서 알려지는 학자의계속적 노력에 의해 성문(成文)으로 되었다)하는데 논쟁하고 답하는 걸로 소일할 만큼 온 종일을 매진했다. 이런 해석자들의 연구를 모으고 편집하는 자가 바로 서기관들이다(γραμματευς 그람마튜스 | 서기, 필사자, 비서, 기록자, 성경에서는 모세의 율법과 성경을 배운 자, 해석자, 교사). 이들 모두에겐, 십일조의 본질을 이해하기 보다는 ‘십일조 할 것과 안할 것’을 결정짓는 세부조항의 확장이 더 중요했다. 연구하고 논의하며 가르치고 기록할 방향이 틀린 것이다.


~ ταυτα  | δε | [δε] |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 αφειναι | αφιεναι | (타우타 | 데 | [데] |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 압헤이나이 | 압히에나이 |, | 그러나 | 이것들을 만들어서 할 의무가 있는 것도 | 내버릴 | 내버릴 | 것도 아니다)’, ~ ταυτα  δε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παρειναι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파레이나이, 그러나 이것들을 만들어서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지나쳐버릴 것도 아니다)(이것들은 만들어서 할 필요가 없고 이것들은 지나쳐버려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이 바로 이것들에 관해서 이다.


박하(ηδυοσμον 헤뒤오스몬 | 달콤한 냄새, 박하), 양념(ανηθον 아네돈 | 아니스, 딜(향신료나 약재로 사용되는 식물)), 화향(κυμινον 퀴미논 | 회향, 쓰고 강한 맛과 향기로운 맛을 가진 씨를 가진 팔레스타인에서 재배되는 식물), 운향(πηγανον 페가논 | 운향풀, 약효를 지닌 약 60 cm(2 피트)정도의 관목), 모든 채소(παν  λαχανον 판 라카논 ; λαχανον 라카논 | 풀, 채소). . . . . . (και) 판정(κρισις 크리시스 | 분리, 절단, 분할, 선택, 판정, 판결, 재판관의 단체, 정의) 긍휼(ελεος 엘레오스 | 자비, 긍휼) 확신(πιστις 피스티스 | 진리에 대한 확신, 믿음, 충성, 충실, 성실) 하나님의 사랑(την  αγαπην  του  θεου 텐 아가펜 투 데우 ; αγαπη 아가페 | 형제의 사랑, 애정, 선의, 사랑, 자비, 사랑의 제사) 이러한 것들(ταυτα 타우타 | 이것들, 이러한 것들) 중에서 ‘필요 없이 만들어서하고 있는 것과 무심히 지나치지 말아야할 것’을 구분하라는 것이다.


너희들이 만든 세부 조항(유전, 의문)으로 걸러낸(διυλιζω 디윌리조 | 여과하다, 거르다, 여과기를 통해 쏟다, 물기를 빼다) 티끌만한 날파리를(κωνωψ 코놉스 | 포도주를 발효시켜 증발시키는 포도주 각다귀 또는 모기붙이) 가지고(레 11:20-23, 신 14:19) 의미 없이 말장난할 필요(εδει 에데이 | 필요하다, 의무가 있다, 옳고 적합하다)도 없고(κακεινα  μη 카케이나 메 ; κακεινος 카케이노스 | 그리고 그는, 그 역시 ; μη 메 | 아니다, 하지 않도록, ~도 아니다), 율법의 의미(본질)로 더 훨씬 무겁고 중한(βαρυς 바뤼스 | 무게가 무거운, (비유) 짐스러운, 엄한, 대단히 중요한, 잔인한) 낙타를(καμηλος 카멜로스 | 낙타) 너희는 잡아내지도 않았다(κακεινα  μη 카케이나 메 ; κακεινος 카케이노스 | 그리고 그는, 그 역시 ; μη 메 | 아니다, 하지 않도록, ~도 아니다)함이니, 바리사이 해석자와 서기들의 재앙이다(ουαι 우아이 | 아아, 슬프도다, 화로다). 하찮은 양념들의 십일조에 대해 훈계당하는 사람들의 잘못이 아닌, 무지와 무감각과 어둠에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너희 소경된 인도자의(οδηγοι  τυφλοι 호데고이 튑흘로이) 잘못을 혹독하게 질타하시니(마 7:3-5, 눅 6:39-42), 그렇게 박식하다 들먹거리던 율법사들이(νομικος 노미코스 | 법과 관련된 사람, 법에 정통한 사람, 신약에서는 모세의 율법 해석자나 교사) 욕으로(υβριζω 휘브리조 | 거만하다, 오만하게, 무례하게 행동하다, 거만하며 수치스럽게 행동하다, 나쁜 말로 상처를 입히다) 밖에 듣질 못한 것 아니겠는가(눅 11:45)?


십 일조를 강요하면서도, 정작 옳은 선택(정의)과 올바른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을 내보일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베품과 나눔을 무시해버린 저기 유대 바리사이들 보다 더 악랄하게 장성치 못한 코흘리개에게 조차도 십일조의 짐을 지우는(φορτιζω 프홀티조 | 짐을 얹다, 짐을 싣다, (관습과 부당한 교훈의)짐을 지우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결국 오늘날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문자적 해석을 내놓고, 율법적 흉내 내기 조항을 들이댄 눈먼 인도자들의 날파리식 십일조는, 과거 농경사회였던 유대공동체를 삼켜버린(καταπινω 카타피노 | 단숨에 들이키다, 삼키다, 게걸스레 먹다, 몽땅 없애다, 파괴하다) 것처럼 여기서도 그 위력을 떨칠 허상들 중 하나란 말인가? 미개한 이천년 전 바리사이보다 못한 지금을 어찌해야하나..

 

 

200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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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9****
초인
가톨릭 1위, 개신교, 소규모종교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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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더욱 확실하게 알고 개선 하려면 아래 책을 꼭 한번 읽어 보세요

한국 개신교의 현실을 직시 하고 건전한 대안 까지 제시 한책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교보문고 , 동대문 만나 서점)

입니다

2008.08.26.

  • 출처

    본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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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os****
초인
개신교 8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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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본질은

진리로 즉 예수의 영생떡을 먹고

신령한몸 즉 새사람으로 다시태여나 예수와 하나 되여

 

즉 하나님의 자녀 되여 기쁨과 평안과 희망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예수와 함께 영생하는 것인데

 

현 한국기독교 개신교는

장사꾼이 된 목사들의 잔치 이며.

 

목사가 무당이 되여 세상복 빌어주고

복체를 받는 기복신앙으로 변했다.

 

목사가 예수의 가르침과 본을 전하며 가르쳐야 하는데

모세의 기복적인 간증글로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유도하며

복종과 순종만을 주입시켜 죄인으로 살게 하는 율법주의자 들이 되여 있다.

2008.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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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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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r****
중수
힙합, 브레이크 댄스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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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꼭 교회와 헌금이 필요한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없어 학교 강당을 빌려 믿는 자들도 있고 돈이 없어도 하루하루 성경 한구절 읽으며 마음의 부자가 되는 분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2008.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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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mh****
초인
본인 입력 포함 정보

개신교는 믿기만 하면 천당에 간다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타 종교에 비해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목사나 교인들이 드물다?

 

잘못된 교리로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00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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