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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경기도의 문화유산에는 어떤 것들이 있어요?
비공개 조회수 10,248 작성일2018.07.01
경기도의 문화유산중에 유명한것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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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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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문화유산 중에서 사적으로 지정된 것들을 적어 드립니다.


(경기도의 문화유산)


1.수원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1-2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고양 행주산성


종 목 사적 제5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1592)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다.


산꼭대기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2중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의 땅이었으며, 서해안과 연결된 수로의 거점지역으로 남북 교통의 요충지대이다.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조각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많이 나오고, 물고기뼈무늬를 새긴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서 고려시대까지도 사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선조 26년(1593)에 왜병과의 전투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이 산성은 한강 유역에 있는 다른 산성들과 함께 삼국시대 이후 중요한 방어요새의 역할을 한 곳으로, 현재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남아 있으며, 권율 장군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다.


3.남한산성

 

종 목  사적  제5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시 대 조선시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된 곳으로 손꼽힌다.

 

4.수원 화령전


종 목  사적  제11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신풍로23번길 34 (신풍동 9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재실·전사청·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특히 이안청은 지붕이 있는 복도식으로 정전과 연결이 되어있어,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젖지 않도록 하였다.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들과는 달리, 수원에 세워진 화령전은 대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5.김포 문수산성

 

종 목 사적 제139호

지 정 일 1964.08.29

소 재 지 경기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산36-1

시 대 조선시대

 

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조선시대의 성이다.

 

조선 숙종 20년(1694)에 돌을 이용해 쌓은 석축산성으로 순조 12년(1812)에 고쳐 쌓았다. 잘 다듬어진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몸을 숨기기 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둘렀다. 당시의 성문은 취예류·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비밀통로인 암문 3개가 있었다. 이 중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육지로 나오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마을이 되었으며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벽만 남아있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6.고양 벽제관지


종 목 사적 제144호

지 정 일 1965.02.02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벽제관로 34-16 (고양동 5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성종 7년(1476) 11월에 세운 벽제관은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 사신의 공용숙박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중국 사신들은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예를 갖추어 서울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또한 이곳이 중국으로 통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신들도 여기서 머물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군대와 왜군과의 벽제관 싸움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지금의 자리는 인조 3년(1625)에 고양군을 옮길 때 세운 객관으로, 그 후의 보수흔적은 확실하지 않다. 한국전쟁으로 불타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벽제관은 관서지방으로 가는 큰 길에 설치된 첫 역관이었으며, 또한 국왕이 중국 사신을 친히 배웅하고 맞이하던 모화관에 버금가는 곳이다.


7.북한산성


종 목  사적  제162호 
지 정 일 1968.12.05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로384번길 19-40 (북한동 산1-1)외 서울 은평구,성북구,강북구 
시 대 삼국시대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로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우물터·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8.화성 당성

종    목  사적  제217호 
지 정 일  1971.04.15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 
시     대 삼국시대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남북으로 길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는 동문·남문·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성의 내벽은 흙으로 쌓고, 외벽은 돌로 쌓았다.

이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하였으나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하고,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성벽은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흙성의 성벽을 돌로 쌓아 올린 흔적이 남벽 쪽에 약간 남아있다.

당성이 소재하는 남양지역은 지금은 화성시이지만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으로서,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해서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당항성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9.김포 덕포진

 

종 목 사적 제292호

지 정 일 1981.09.25

소 재 지 경기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103-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진영으로, 이곳은 서울로 통하는 바닷길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대였던 곳이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현종 7년(1666)에 강화에 포함되었다.

 

높직한 평지에 세운 포대인 돈대와 대포를 쏘는 포대, 그리고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고 포병을 지휘하는 파수청이 있다. 돈대는 중요한 전략지에 있어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싸웠다.

 

1980년에 행한 발굴조사 결과 7개의 포탄과 2개의 상평통보 등이 출토되었고 주춧돌과 화덕자리를 발견하였다.

 


10.용인 서리 고려백자 요지

 

종 목 사적 제329호

지 정 일 1989.01.1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중덕로 7 (서리 산23-1) 외

시 대 고려시대

 

 함박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끝에 있는 고려시대 가마터이다. 이곳에는 거대한 퇴적층이 있는데, 퇴적층에서 가마의 유구와 백자, 청자, 도기 조각 등과 작업에 관계되는 건물터도 조사되었다.

 

가마는 벽돌로 된 가마와 진흙으로 지은 가마가 확인되었는데, 벽돌가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고 진흙가마는 길이 83m의 대형가마로, 출입구가 27개나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그릇이 많으며, 특히 해무리굽을 가진 대접(완)이 대부분이다. 제작시기는 10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전반까지로 추정한다.

 

거대한 퇴적층과 벽돌·진흙가마의 존재, 다양한 모양의 백자 조각 등의 발견은 고려백자의 발생과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역할을 하며, 한국도자사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준다.


11.이천 설봉산성


종 목  사적  제423호 
지 정 일 2000.09.16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사음동 산 24번지외 
시 대 백제


설봉산은 이천의 진산으로, 이 산의 7∼8부 능선, 속칭 칼바위를 중심으로 한 약 3만여 평에 달하는 고원지대가 바로 옛 산성터이다.

 

계곡을 감싸안고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은 대부분 흙으로 쌓았으나 돌로 쌓은 석축도 군데군데 있다. 석축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거나 매몰되고 있는데, 아직도 정상 아래 부분에는 3∼10m의 석축의 흔적이 뚜렷한 형태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이 일대에서는 석축·석편·토기편은 물론, 건물터 임을 알리는 정면 9m, 측면 6.30m의 인공 주춧돌 9개가 정연히 배치되어 있어, 이 곳이 웅장한 규모의 삼국시대 산성터 임을 알려 준다. 정상 밑 서쪽 능선 평평한 부분에는 주춧돌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 장대지로 추정되며, 군기를 꽂았던 홈을 판 바위와 돌싸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돌무더기도 3곳 남아 있다. 또 산성의 필수요건인 우물터 2곳, 수구와 인접한 북문의 흔적도 남아 있다.

 

축성연대는 대략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한강 이남을 점유하고 이 곳에 처음으로 남천현(南川縣)을 설치한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서 신라·백제세력이 이 곳을 다시 수복하던 신라 진흥왕 12년(551)사이에 고구려군이 쌓은 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산의 정상에 서면 주변 지역이 한눈에 들어와,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세력 다툼이 있었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대의 역할을 하였던 성으로 여겨진다.


12.파주 칠중성

 

종 목 사적 제437호
지 정 일 2002.01.29
소 재 지 경기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산148외
시 대 삼국시대


칠중성은 해발 147m의 중성산 정상부와 그 남서쪽에 위치한 해발 142m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한 테뫼식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603m이고 남북 폭은 198m, 동서 폭은 168m이다. 전체 높이는 북동쪽이 가장 높고 서벽에 비해 동벽 부분이 현저히 낮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임진강 중류의 남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관서지방과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삼국시대에 많은 전투가 있었다. 신라와 고구려의 전쟁이 이 성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시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침공 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에는 신라와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그 역할이 매우 컸던 산성이다.

 

지표조사(2000.10.27∼2001.1.15) 결과 문지 3개소, 건물지 5개소, 우물지 2개소 등이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칠(七)자명의 평기와와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등 우리나라 고대사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13.수원 화성행궁


종 목  사적  제478호 
지 정 일 2007.06.08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 (남창동 6-2) 외 
시 대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다. 또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루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 시기 이후 갖가지 용도의 건물로 이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게 되었다.

 

1995년부터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1996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7년 봉수당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2006년에는 행궁앞 광장부지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루어져 명당수 호안석축과 신풍교 교대지가 확인되어 2007년에 새롭게 복원이 이루어졌다.
 

 

14.용인 보정동 고분군

 

종 목  사적  제500호 
지 정 일 2009.06.2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산121-2번지 일원 
시 대 신라


용인 보정동 삼막골 고분군은 6세기 후반 신라가 한강유역 진출후 9세기까지 조성된 유적으로 충청 이북지역에서 확인된 신라고분군 중 가장 장기간에 걸친 유적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충청·경기지역 소재 신라고분군 중 충주 누암리고분군, 여주 매룡리고분군에 필적하는 것으로서 지금까지 발굴결과 유구가 잘 남아있고 유물도 다수 출토되는 등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2018.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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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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