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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용인시의 문화유산좀 알려주세요.급해요...
욱이아부지 조회수 3,277 작성일2018.04.25
용인시의 문화유산좀 알려주세요.급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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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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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의 문화유산)

 

1.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종 목 보물 제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111

시 대 고려시대

 

서봉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절터의 크기로 보아 아주 큰 규모의 절로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곳은 탑비의 비각을 세우는 공사를 하던 도중에 기록이 남아있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서봉사의 옛터임이 밝혀졌다.

 

명종 15년(1185)에 세워진 이 탑비는 현오국사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만들어졌다. 보통 부도와 함께 건립되는데 절터에 부도의 흔적은 없고 이 비석만 남아 있다. 화강암의 비받침위에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비몸돌이 놓여있는 단촐한 모습이다.

 

비받침부분의 윗면은 4변을 비스듬히 잘라내었고,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에도 윗부분의 양 귀끝을 사선으로 접듯이 잘라서 마무리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15세에 불일사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浮石寺)의 주지를 거쳐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로 삼고 시호를 ‘현오’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그 외에도 글을 지은 이와 건립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한 고려 후기 석비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2.용인 서리 고려백자 요지

 

종 목 사적 제329호

지 정 일 1989.01.1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중덕로 7 (서리 산23-1)외

시 대 고려시대

 

함박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끝에 있는 고려시대 가마터이다. 이곳에는 거대한 퇴적층이 있는데, 퇴적층에서 가마의 유구와 백자, 청자, 도기 조각 등과 작업에 관계되는 건물터도 조사되었다.

 

가마는 벽돌로 된 가마와 진흙으로 지은 가마가 확인되었는데, 벽돌가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고 진흙가마는 길이 83m의 대형가마로, 출입구가 27개나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그릇이 많으며, 특히 해무리굽을 가진 대접(완)이 대부분이다. 제작시기는 10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전반까지로 추정한다.

 

거대한 퇴적층과 벽돌·진흙가마의 존재, 다양한 모양의 백자 조각 등의 발견은 고려백자의 발생과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역할을 하며, 한국도자사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준다.

 

3.용인 보정동 고분군

 

종 목 사적 제500호
지 정 일 2009.06.2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산121-2번지 일원
시 대 신라

 

용인 보정동 삼막골 고분군은 6세기 후반 신라가 한강유역 진출후 9세기까지 조성된 유적으로 충청 이북지역에서 확인된 신라고분군 중 가장 장기간에 걸친 유적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충청·경기지역 소재 신라고분군 중 충주 누암리고분군, 여주 매룡리고분군에 필적하는 것으로서 지금까지 발굴결과 유구가 잘 남아있고 유물도 다수 출토되는 등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4.용인 심곡서원

 

종 목 사적 제530호

지 정 일 2015.01.28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16-9 (상현동 203-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종 때 사림파의 영수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년)를 주향(主享)으로 하는 심곡서원은 강당이 전면에 위치하고 사우가 뒤쪽에 배치된 조선 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전학후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1871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시 조광조를 모신 서원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고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최근 이루어진 사우와 강당의 중수 시, 각각 1636년과 1657년에 작성된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으며, 심곡서원 강당기(1673년, 송시열)와 심곡서원 학규(1747년, 이재), 숙종대왕 어제(1740년, 민진원) 등이 전하고 있어 심곡서원의 역사와 내력을 알 수 있다.

경내에는 조광조가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수령 500여 년의 느티나무가 남아 있으며, 정암집 등 관련 고문서가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 매년 춘추향사와 매월 삭망(朔望) 분향 의식을 거행하고 있음. 아울러, 서원 인근에 있는 ‘조광조 묘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제169호)를 통해 심곡서원의 가치와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5.충렬서원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충렬로 9-19 (능원리 118-1)

시 대 조선시대

 

고려 후기 충신이자 동방성리학의 시조인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서원이다. 조선 선조 9년(1576)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져 선조 38년(1605)에 다시 지었다. 이때 정보와 이시직을 같이 모셨다. 광해군 원년(1608)에 임금이 이름을 짓고 현판을 하사하여(사액),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선현배향과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담당하였으나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으나, 1924년에 복원하였다.

 

마을 뒤쪽의 야산 기슭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공부하는 강당을 앞쪽에 배치하고 사당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외삼문·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강당이 축에서 벗어나 사당과 나란히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재실이나 장경각·교직사 등 부속건물이 없이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8세기 이후에 서원이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 중심의 시설로 바뀌어 갔음을 보여 준다. 강당도 교육공간보다는 제향 때 모임 장소로 쓰였다.

 

전하는 유물로 『유한집』과 『단심가』등을 서원에서 보존하고 있다. 강당과 사당만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서원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다.

 

6.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지 정 일 1978.11.10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역복동 산3-4

시 대 조선시대

 

뇌문비는 뇌문, 즉 왕이 신하의 죽음을 애도하며 손수 그의 공적을 찬양하는 글을 적어 보낸 조문 형식의 글을 새겨놓은 비로, 이 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채제공(1720∼1799)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채제공은 영조 19년(1743) 문과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를 지냈으며 도승지·병조판서·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10여년을 재상으로 있는 동안 여러 분야에 걸쳐 왕을 보필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그의 묘 앞에 평생동안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가 없는 것은 그가 죽은 뒤 그의 후손인 남인이 정치권에서 밀려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비는 묘소의 오른쪽에 건립된 비각 안에 있으며,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었다. 비문을 쓴 사람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비문은 정조 임금의 필체로 보이며 비의 명칭은 허목의 글씨체로 짐작된다.

 

정조 23년(1799)에 세운 비이다.

 

7.문수산 마애보살상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지 정 일 1984.09.12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산25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 문수산의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50m 떨어진 바위면에 조각한 마애불이다. 바위를 잘 다듬어서 양쪽으로 대칭되게 선 두 보살상을 새겼는데, 돋을새김과 선으로 새기는 기법을 같이 사용했다.

 

연꽃무늬의 대좌 위에 선 두 보살상 중 정면을 향한 왼쪽 보살상은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마멸이 심하지만 머리에 보관을 썼고 풍만한 얼굴에 눈·코·입이 선명함을 알 수 있다. 상체에는 옷을 걸치지 않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데, 잘록한 허리에는 속옷의 매듭이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가슴에서 구부려 엄지와 검지를 맞댄 모습인데, 팔목에는 팔찌가 끼워져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웃는 표정이고 두 귀가 어깨까지 길게 내려오고 있다. 양 손은 왼쪽의 보살상과 반대로 처리되어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왼쪽 보살상과 거의 같은 양식을 보인다.

 

이 두 보살상은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크고, 어깨를 움추려 경직된 모습을 보이지만 대담하게 단순화시킨 모습과 얼굴, 손, 발 등의 세부 표현에서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볼 수 있다.

 

8.용인 어비리 삼층석탑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4호

지정일 2004.11.29

소재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어진로 842 (어비리 산99-2)

시 대 고려시대

 

동도사내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폐허가 된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63년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탑은 1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네 장의 판돌을 세워 면을 이루게 하고, 그 위로 판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네 면의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본 떠 새겨 두었으며, 윗면에는 별도의 판돌을 하나 더 두어 탑신의 1층 몸돌을 괴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다른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은 면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새겼고, 처마는 수평으로 흐르다 네 귀퉁이에 이르러 날카롭게 위로 들려 경쾌함을 실었다. 3층 지붕돌 위에는 다른 유물에서 가져온 듯한 돌 몇장이 놓여 머리장식을 대신하고 있다.

 

전체에 흐르는 양식이나 조각솜씨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9.정몽주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 45 (능원리 산3)

시 대 고려시대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공민왕 9년(1360)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예부정랑, 대사성 등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5부 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으며, 일본에 가서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지면서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한 후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銘旌: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묘비에는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쓰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10.처인성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44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산43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산성으로, 흙으로 성벽을 쌓아 올렸다. 이곳은 고려 때 처인부곡으로 불렸던 곳으로,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 때 고려의 승장 김윤후 장군이 살리타이 장군을 사살한 격전지이기도 하다.

 

야산의 끝자락인 구릉 위에 쌓은 평지성으로 오랜 세월동안 풍우에 훼손되어 흔적만이 남아 있는데, 잔존하는 성의 길이는 약 250m 정도이다. 주변보다 높은 지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평면은 사다리꼴에 가까우며, 성을 쌓은 방법을 보면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다졌다. 지형의 높이를 고려하였기 때문에 성벽의 높이는 4.8∼6.3m로 차이가 난다.

 

이 성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말안장같은 야산이 있는데, 여기서 살리타이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사장터’라고 부른다.

 

11.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

 

종 목 경기도 민속자료 제10호

지 정 일 1997.12.26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흥구 지삼로198번길 30-4 (지곡동 297-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종 때 덕행 높은 이자(1480∼1533) 선생이 살던 곳이라고 전하는 옛집이다. 현재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ㄷ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는데 별도로 사당을 짓는 일반 양반집과 달리 이 집에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았다. 다만 본채 북서쪽에 청방을 두고 단청을 하여 이곳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을 구분하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경기지역의 중류주택이다.

 

12.양지향교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향교로13번길 20 (양지리 379)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양지향교는 조선 중종 18년(1523)에 처음 지었으며,최근까지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쪽 내삼문 안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공포의 형태나 가구 수법을 보아 17세기 건물로 보이는데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명륜당과 대성전만을 갖춘 조선 후기 작은 규모의 향교 형식을 보여주는 건축이다.

 

13.용인 공세리 오층석탑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2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홍구 공세로81번길 48 (공세동 264)

시 대 고려시대

 

이름을 알 수 없는 옛 절터에 불상과 함께 보존되어 있는 탑으로,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연꽃을 장식한 바닥돌 위로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한 4장의 판돌을 사방에 세워 만들었는데, 현재 2장이 없어졌다. 탑신부의 몸돌은 1층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위층은 거의 줄지 않았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두툼한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가 경쾌하게 위로 들려있어 날렵한 멋을 풍긴다.

 

기단의 맨윗돌이 탑의 전체 비례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규모로 되어 있지만, 지붕돌이 위층으로 갈수록 적절하게 줄어들어 안정감을 준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201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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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문화재청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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