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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경기도의 문화유산을 알려 주세요. 4...
na-0**** 조회수 10,494 작성일2018.04.17
경기도의 문화유산을 알려 주세요.
4학년 숙제인데 너~~~~무 어려워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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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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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문화유산를 올려드리니 몇개 적어 가세요.

경기도의 문화유산


(용인시)


1.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종 목 보물 제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111

시 대 고려시대


서봉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절터의 크기로 보아 아주 큰 규모의 절로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곳은 탑비의 비각을 세우는 공사를 하던 도중에 기록이 남아있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서봉사의 옛터임이 밝혀졌다.


명종 15년(1185)에 세워진 이 탑비는 현오국사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만들어졌다. 보통 부도와 함께 건립되는데 절터에 부도의 흔적은 없고 이 비석만 남아 있다. 화강암의 비받침위에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비몸돌이 놓여있는 단촐한 모습이다.


비받침부분의 윗면은 4변을 비스듬히 잘라내었고,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에도 윗부분의 양 귀끝을 사선으로 접듯이 잘라서 마무리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15세에 불일사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의 주지를 거쳐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로 삼고 시호를 ‘현오’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그 외에도 글을 지은 이와 건립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한 고려 후기 석비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2.용인 서리 고려백자 요지


종 목 사적 제329호

지 정 일 1989.01.1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 산23-1외

시 대 고려시대

 

함박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끝에 있는 고려시대 가마터이다. 이곳에는 거대한 퇴적층이 있는데, 퇴적층에서 가마의 유구와 백자, 청자, 도기 조각 등과 작업에 관계되는 건물터도 조사되었다.


가마는 벽돌로 된 가마와 진흙으로 지은 가마가 확인되었는데, 벽돌가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고 진흙가마는 길이 83m의 대형가마로, 출입구가 27개나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그릇이 많으며, 특히 해무리굽을 가진 대접(완)이 대부분이다. 제작시기는 10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전반까지로 추정한다.


거대한 퇴적층과 벽돌·진흙가마의 존재, 다양한 모양의 백자 조각 등의 발견은 고려백자의 발생과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역할을 하며, 한국도자사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준다.


3.용인 보정동 고분군


종 목  사적  제500호 
지정(등록)일 2009.06.2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산121-2번지 일원 
시 대 신라


용인 보정동 삼막골 고분군은 6세기 후반 신라가 한강유역 진출후 9세기까지 조성된 유적으로 충청 이북지역에서 확인된 신라고분군 중 가장 장기간에 걸친 유적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충청·경기지역 소재 신라고분군 중 충주 누암리고분군, 여주 매룡리고분군에 필적하는 것으로서 지금까지 발굴결과 유구가 잘 남아있고 유물도 다수 출토되는 등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4.심곡서원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203-2

시 대 조선시대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은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사림파의 대표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기묘사화(1519) 때 죽음을 당하였다. 효종 원년(1649)에 세워 ‘심곡’이라는 현판과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마을 뒤쪽 야산에 서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외삼문·강당인 일소당·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 안의 여러 행사와 유림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로서 각 칸마다 널문을 달아 사면을 전부 열 수 있게 하였다.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사당은 앞면에 트인 퇴칸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으며, 내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 형식이다.


5.충렬서원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118

시 대 조선시대

 

고려 후기 충신이자 동방성리학의 시조인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서원이다. 조선 선조 9년(1576)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져 선조 38년(1605)에 다시 지었다. 이때 정보와 이시직을 같이 모셨다. 광해군 원년(1608)에 임금이 이름을 짓고 현판을 하사하여(사액),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선현배향과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담당하였으나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으나, 1924년에 복원하였다.


마을 뒤쪽의 야산 기슭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공부하는 강당을 앞쪽에 배치하고 사당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외삼문·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강당이 축에서 벗어나 사당과 나란히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재실이나 장경각·교직사 등 부속건물이 없이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8세기 이후에 서원이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 중심의 시설로 바뀌어 갔음을 보여 준다. 강당도 교육공간보다는 제향 때 모임 장소로 쓰였다.


전하는 유물로 『유한집』과 『단심가』등을 서원에서 보존하고 있다. 강당과 사당만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서원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다.


6.채제공선생 뇌문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지 정 일 1978.11.10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역복동 산3-4

시 대 조선시대


뇌문비는 뇌문, 즉 왕이 신하의 죽음을 애도하며 손수 그의 공적을 찬양하는 글을 적어 보낸 조문 형식의 글을 새겨놓은 비로, 이 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채제공(1720∼1799)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채제공은 영조 19년(1743) 문과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를 지냈으며 도승지·병조판서·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10여년을 재상으로 있는 동안 여러 분야에 걸쳐 왕을 보필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그의 묘 앞에 평생동안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가 없는 것은 그가 죽은 뒤 그의 후손인 남인이 정치권에서 밀려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비는 묘소의 오른쪽에 건립된 비각 안에 있으며,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었다. 비문을 쓴 사람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비문은 정조 임금의 필체로 보이며 비의 명칭은 허목의 글씨체로 짐작된다.


정조 23년(1799)에 세운 비이다.


7.문수산 마애보살상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지 정 일 1984.09.12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산25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 문수산의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50m 떨어진 바위면에 조각한 마애불이다. 바위를 잘 다듬어서 양쪽으로 대칭되게 선 두 보살상을 새겼는데, 돋을새김과 선으로 새기는 기법을 같이 사용했다.


연꽃무늬의 대좌 위에 선 두 보살상 중 정면을 향한 왼쪽 보살상은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마멸이 심하지만 머리에 보관을 썼고 풍만한 얼굴에 눈·코·입이 선명함을 알 수 있다. 상체에는 옷을 걸치지 않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데, 잘록한 허리에는 속옷의 매듭이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가슴에서 구부려 엄지와 검지를 맞댄 모습인데, 팔목에는 팔찌가 끼워져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웃는 표정이고 두 귀가 어깨까지 길게 내려오고 있다. 양 손은 왼쪽의 보살상과 반대로 처리되어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왼쪽 보살상과 거의 같은 양식을 보인다.


이 두 보살상은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크고, 어깨를 움추려 경직된 모습을 보이지만 대담하게 단순화시킨 모습과 얼굴, 손, 발 등의 세부 표현에서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볼 수 있다.


8.어비리 삼층석탑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4호

지정일 2004.11.29

소재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어비리 산99-2

시 대 고려시대


동도사내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폐허가 된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63년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탑은 1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네 장의 판돌을 세워 면을 이루게 하고, 그 위로 판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네 면의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본 떠 새겨 두었으며, 윗면에는 별도의 판돌을 하나 더 두어 탑신의 1층 몸돌을 괴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다른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은 면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새겼고, 처마는 수평으로 흐르다 네 귀퉁이에 이르러 날카롭게 위로 들려 경쾌함을 실었다. 3층 지붕돌 위에는 다른 유물에서 가져온 듯한 돌 몇장이 놓여 머리장식을 대신하고 있다.


전체에 흐르는 양식이나 조각솜씨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9.정몽주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3

시 대 고려시대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공민왕 9년(1360)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예부정랑, 대사성 등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5부 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으며, 일본에 가서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지면서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한 후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銘旌: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묘비에는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쓰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10.처인성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44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산43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산성으로, 흙으로 성벽을 쌓아 올렸다. 이곳은 고려 때 처인부곡으로 불렸던 곳으로,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 때 고려의 승장 김윤후 장군이 살리타이 장군을 사살한 격전지이기도 하다.


야산의 끝자락인 구릉 위에 쌓은 평지성으로 오랜 세월동안 풍우에 훼손되어 흔적만이 남아 있는데, 잔존하는 성의 길이는 약 250m 정도이다. 주변보다 높은 지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평면은 사다리꼴에 가까우며, 성을 쌓은 방법을 보면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다졌다. 지형의 높이를 고려하였기 때문에 성벽의 높이는 4.8∼6.3m로 차이가 난다.


이 성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말안장같은 야산이 있는데, 여기서 살리타이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사장터’라고 부른다.


11.용인 전음애 이자고택


종 목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10호

지 정 일 1997.12.26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297-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종 때 덕행 높은 이자(1480∼1533) 선생이 살던 곳이라고 전하는 옛집이다. 현재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ㄷ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는데 별도로 사당을 짓는 일반 양반집과 달리 이 집에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았다. 다만 본채 북서쪽에 청방을 두고 단청을 하여 이곳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을 구분하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경기지역의 중류주택이다.


12.양지향교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리 379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양지향교는 조선 중종 18년(1523)에 처음 지었으며,최근까지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쪽 내삼문 안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공포의 형태나 가구 수법을 보아 17세기 건물로 보이는데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명륜당과 대성전만을 갖춘 조선 후기 작은 규모의 향교 형식을 보여주는 건축이다.


13.용인 공세리 오층석탑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2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홍구 공세동 264

시 대 고려시대


이름을 알 수 없는 옛 절터에 불상과 함께 보존되어 있는 탑으로,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연꽃을 장식한 바닥돌 위로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한 4장의 판돌을 사방에 세워 만들었는데, 현재 2장이 없어졌다. 탑신부의 몸돌은 1층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위층은 거의 줄지 않았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두툼한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가 경쾌하게 위로 들려있어 날렵한 멋을 풍긴다.


기단의 맨윗돌이 탑의 전체 비례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규모로 되어 있지만, 지붕돌이 위층으로 갈수록 적절하게 줄어들어 안정감을 준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성남시)


1.봉국사 대광명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1호

지 정 일 1980.06.02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216-2

시 대 근대


봉국사는 영장산 기슭에 있는 절로 고려 현종 19년(1028)에 세우고, 태조 4년(1395)에 수리하였다. 현종 15년(1674) 임금은 어려서 일찍 죽은 명혜, 명선 두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주의 능 근처에 있던 이 절을 다시 짓고 이름을 봉국사라 하였다. 한국전쟁 때 무너진 것을 1958년 법운이 새로 짓고 1974년 해체·복원하였다.


봉국사 대광명전은 원래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나 이 절에서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가장 단순한 맞배집이다. 지붕의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몸체에 비해 지붕이 커서 외관이 장중하다. 기단의 양쪽에는 사자형태를 한 조각상이 있어서 특이하다.


법당의 내부에는 중앙에 불단이 설치되어있고,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이 있다. 불상의 좌우로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2.망경암 마애여래좌상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2호 

지 정 일 1980.06.02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553-1

시 대  조선시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망경암의 암벽을 우묵하게 파서 방을 만들고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불상을 새겼다. 이 암벽에는 그 외에 14곳에 얕은 방을 파고 글을 새겼다.


서울이 한 눈에 보이는 이 곳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역대 임금이 친히 거동하여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빌었던 곳이라고 한다. 조선 왕실에서는 세종의 7째 아들인 평안대군과 제안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칠성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불상 주위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광무 1년(1897)에 이규승이 관음상을 새기고 절을 세웠다. 불상은 민머리를 하고 있는데, 얼굴은 마모가 심해서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조각 솜씨가 특별하지 않지만 만들어진 연도가 뚜렷한 작품으로 가치가 있다.


3.수내동가옥(이택구가옥)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8호

지 정 일 1989.12.29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84

시 대  조선시대


한산 이씨의 살림집 가운데 하나로 사용된 부재나 지은 수법으로 보아 19세기 말 건물로 추정한다.


바깥마당에 면한 一자형 문간채 뒤에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안채 뒤로는 널찍한 뒷마당이 흙담에 둘러싸여 있다.


안채는 10칸 규모의 초가로 1칸 반 건넌방과 4칸 대청, 2칸 안방을 일렬로 배열하였고 안방 앞에서 꺾여 부엌과 광이 있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반침이 설치되어 공간의 효용도가 높다.


문간채는 6칸 규모를 가진 초가인데 가운데에 대문이 있고 오른쪽에 온돌방이 있다.


현재 신도시 중앙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어 주변에 밀집한 아파트군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집 주위에는 마을 어귀에 있던 큰 느티나무와 연못, 정자터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 지은 집으로 경기지방 살림집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4.청주한씨 문정공파 묘역 신도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4호

지 정 일 1994.04.20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2-1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가까이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문정공 한계희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한계희(1423∼1482)는 세종 23년(1441) 진사가 되고, 세종 29년(1447)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특히 세조의 신임을 두터이 받았으며, 예종과 성종 때에는 두차례에 걸쳐 공신이 되어 그 벼슬이 우찬성에까지 올랐다. 조선 전기의 명문가였던 집안배경이 그가 벼슬길에 오르게 되는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이나, 그가 지닌 학식과 곧은 성품 역시 그 바탕이 되었고, 주위로 부터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죽은 후에는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선생의 묘 아래쪽에 자리한 비는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전기 당시의 위패 형식을 하고 있다. 받침돌은 윗면에 높직한 연꽃무늬를 둘러 새겼으며, 머릿돌은 연꽃이 엎어져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고,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돌이 솟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연산군 6년(1500) 즈음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며, 그의 친구였던 서거정이 지은 글에, 안침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 두었다.


5.풍산군 이종린 묘역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6호

지 정 일 2005.07.28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 산41-10

시 대  조선시대


풍산군 이종린( 1538~1611)은 중종의 손자이며 덕양군 이기의 장남이다. 1581년 덕양군이 돌아가자 관례에 따라 정경의 품계에 오르고 임진왜란 때에는 어가를 호종하였다. 1607년 종1품 가덕대부에 제수되고 1610년에는 소덕대부에 올라 왕실 종친부의 일을 관장하였고 사옹원제조와 오위도총부 도총관도 겸임하였다.


일반 사대부의 봉분이 보통 12폭의 병풍석을 두르고 문인석에도 5량관을 씌우는 데 비해 풍산군의 봉분은 큰 받침돌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8폭의 병풍석을 둘렀으며 문인석에도 7량관을 씌우는 등 왕릉이 아님에도 제왕의 예에 따라 매장한 특징이 있어 2005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안성시)


1.칠장사 오불화괘불탱


종 목  국보  제296호 
지 정 일 1997.09.22
소 재 지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칠장사 
시 대 조선시대


3단구도로 도솔천궁을 묘사한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칠장사 괘불은 길이 6.56m, 폭 4.04m 크기로 구름을 이용하여 상·중·하 3단으로 구분되었다.


맨 윗부분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불과 노사나불이 좌우에 모셔진 삼신불을 묘사하고 있고, 중간은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들이 있어 삼세불을 표현하였으며, 맨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그려져 수미산 정상의 도솔천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3단 배치는 예배자들에게 삼신불과 삼세불의 세계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게 하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구원으로 도솔천궁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괘불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다.


채색은 녹색을 주로 하고 황색과 황토색을 대비시켜 다소 어두워 보이나, 옷 처리를 붉은색으로 하여 경쾌함을 느낄 수 있다.


이 괘불은 조선 인조 6년(1628)에 법형이 그린 것으로 괘불함 없이 종이에 싸서 대웅전에 보관하고 있다.

이 괘불에서 보이는 단아하고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짜임새 있는 구도, 섬세한 필치 등은 당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 작품은 17세기 전반의 불화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사인비구 제작 동종-안성 청룡사 동종


종 목  보물  제11-4호 
지 정 일 2000.02.15
소 재 지 경기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28 청룡사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준다는 대나무 모양의 음통에 역동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또한 종의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어깨 띠 아래에는 사각형 모양의 대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을 세웠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수법이 특히 돋보이는 작품으로, 사인비구의 작품세계와 조선 종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3.죽산리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435호 
지 정 일 1966.02.28
소 재 지 경기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148-5 
시 대 고려시대


지금은 주변이 경작지로 변한 봉업사의 옛터에 위치하고 있는 탑으로,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하나로 짠 두툼한 널돌 위에 올려 완성하였는데, 이 때의 석재가 두툼한 탓인지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준다. 기단 위의 탑신은 1층 몸돌만 4장으로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한 돌로 구성하였다. 각 층의 네 모서리에는 폭이 좁은 기둥을 새겼다. 1층 몸돌 남쪽면 중앙에는 작은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만들어 놓았으나 모양만 새기는 형식에 그치고 말았다. 지붕돌은 얇고 추녀는 거의 수평을 이루었으며 끝에서의 치켜올림도 미미하다.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탑의 전체적인 체감도 적당하지 못하고, 각 부의 조각도 형식에 그치고 있다.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석재의 조합 방식은 우수하나, 기단에 새긴 조각이 형식화 되는 점 등에서 약화되고 둔중해진 고려석탑 특유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4.봉업사 석불입상


종 목  보물  제983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칠장사 
시 대  고려시대


원래 봉업사지에 있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기고 그 뒤 다시 선덕여왕 5년(63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로 옮겼다.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 높이는 1.57m이고 총 높이는 1.98m이다. 눈·코·입은 심하게 닳았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 입고 있다. 옷주름은 여러 겹의 둥근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치마가 양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신체표현에 있어서는 손이 다소 큰 편이기는 하나 머리, 어깨 너비 등의 신체비례가 비교적 좋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가 있는데 주위에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당당한 어깨, 발달된 신체표현, U자형의 옷주름,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5.덕봉서원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108 
시 대 조선시대


덕봉서원은 오두인의 충절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 백성의 교육을 위해 지었다. 충정공 오두인(1624∼1689)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의 문신으로,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의주로 유배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 서원은 숙종 21년(1695)에 지어진 후 숙종 23년에 임금이 ‘덕봉’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 때에도 헐리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마을입구 언덕에 남동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아래쪽 낮은 곳에 공부하는 장소가 있고 위쪽 높은 곳에는 제사지내는 사당이 배치되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정의당과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그리고 외삼문·내삼문·홍살문 등이 있다. 소장 전적과 유물로는 오두인이 지은 『양곡집』과 숙종 7년(1681) 김창협이 그린 오두인의 초상화 1점 등이 있다.


덕봉서원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건물도 훌륭하고 공간도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이천시)

 

1.영월암 마애여래입상


종 목  보물  제822호 
지 정 일 1985.01.08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관고동 산64-1 
시 대 고려시대


높이 7∼8m의 자연 암석을 다듬고 바위면 전체에 꽉 채워 조각한 마애불로 전체적으로 장대하며 힘찬 솜씨를 보이고 있어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와 양 손은 얕은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고 옷주름 등은 선으로 조각되었다. 원만하고 둥근 얼굴에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하며 지그시 감은 듯한 눈과 굵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에서 힘차고 후덕한 고승의 느낌을 갖게 한다. 양 손은 가슴에 모아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으며, 손바닥이 밖을 향하고 있는 설법하는 모양이다.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부드러운 사선을 그리며 흐르고, 끝에서는 지그재그 모양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옷주름선은 소박한 모습이며, 스님의 얼굴에 어울리는 은은한 덕망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영월암의 창건조사 혹은 이 사찰과 인연이 깊은 나한이나 고승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유례가 드문 고려시대 마애조사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작품이다.


2.태평흥국명 마애보살좌상 


종 목  보물  제982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183-1 
시 대 고려시대


속칭 ‘미륵바우’라고 하는 커다란 화강암벽 전면에 걸쳐 얕게 돋을새김한 고려시대 마애보살상으로 전체 크기는 3.2m에 이른다.


높은 관을 쓴 이 보살상은 손에 연꽃을 들고 있으며, 관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어 관음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보살은 반가상의 자세로 오른발은 내려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대좌 위에 놓고 왼발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얼굴과 신체는 전체적으로 큼직하며 비례가 맞지 않아 둔중한 느낌이 든다. 보살상이 새겨진 바위 뒷면에는 고려 초인 981년에 만들어진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글이 적혀 있다.


전반적으로 지방색이 짙고 조각 기술이 다소 뒤떨어지지만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천의에, 높은 보관을 쓰고, 연꽃가지를 손에 든 독특한 형식의 관음보살상으로 금릉 광덕동 석조보살입상(보물 제679호)과 함께 비교 연구해야 할 10세기의 중요한 조각이라 하겠다.


3.설봉산성


종 목  사적  제423호 
지 정 일 2000.09.16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사음동 산 24번지외 
시 대 백제


설봉산은 이천의 진산으로, 이 산의 7∼8부 능선, 속칭 칼바위를 중심으로 한 약 3만여 평에 달하는 고원지대가 바로 옛 산성터이다.


계곡을 감싸안고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은 대부분 흙으로 쌓았으나 돌로 쌓은 석축도 군데군데 있다. 석축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거나 매몰되고 있는데, 아직도 정상 아래 부분에는 3∼10m의 석축의 흔적이 뚜렷한 형태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이 일대에서는 석축·석편·토기편은 물론, 건물터 임을 알리는 정면 9m, 측면 6.30m의 인공 주춧돌 9개가 정연히 배치되어 있어, 이 곳이 웅장한 규모의 삼국시대 산성터 임을 알려 준다. 정상 밑 서쪽 능선 평평한 부분에는 주춧돌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 장대지로 추정되며, 군기를 꽂았던 홈을 판 바위와 돌싸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돌무더기도 3곳 남아 있다. 또 산성의 필수요건인 우물터 2곳, 수구와 인접한 북문의 흔적도 남아 있다.


축성연대는 대략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한강 이남을 점유하고 이 곳에 처음으로 남천현을 설치한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서 신라·백제세력이 이 곳을 다시 수복하던 신라 진흥왕 12년(551)사이에 고구려군이 쌓은 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산의 정상에 서면 주변 지역이 한눈에 들어와,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세력 다툼이 있었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대의 역할을 하였던 성으로 여겨진다.


4. 어재연장군 생가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27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율면 산성리 74 
시 대 조선시대


고종 때의 무관으로 미국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군함과 광성진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전사한 어재연(1823∼1871)장군의 생가이다. 1800년대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초가집이다. 앞에 넓은 마당을 두고 사랑채와 안채·광채가 모여 튼 ㅁ자형의 배치구조를 이루고 있다.


광채 옆에 있는 대문을 통하여 들어서면 오른쪽 앞으로 낮은 담이 뻗어있어 안채가 자리한 안마당이 훤히 들여다 보이지 않는다. 그 담의 한 곳을 터서 안채로 통하는 출입구로 사용하였다. 안채는 ㄱ자형 구조로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이 배치되었고 부엌광이나 골방은 따로 두지 않았다. 툇마루나 쪽마루가 방 앞에 없는 간결한 구조이다. 대문의 왼쪽에 위치하는 一자형의 사랑채는 부엌·대청·사랑방으로 되어있다. 대청은 안마당쪽을 막아놓고 바깥마당과 동쪽벽을 터 놓았다. 사랑부엌은 안마당에서만 출입을 할 수 있다. 광채의 뒷모서리에서 뒤로 큼지막하게 돌려진 토담은 집안을 둘러싸고 있다.


전체적으로 여유있게 배치되어 있으며 원형의 변형 없이 비교적 잘 보존된 집이다. 


5. 이천 중리 삼층석탑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6호

지 정 일 1981.07.16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중리동 187 
시 대 고려시대


이천읍 진리라는 마을에 붕괴되어 흩어져 있던 것을, 197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탑으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4매의 널돌로 짜 놓았고 윗면에 2단의 괴임을 두었다. 위층 기단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 하였고, 윗면에 탑신의 1층 몸돌을 받기 위한 3단의 괴임을 새겨 놓았다. 탑신부의 각 몸돌 중에서 1층을 제외한 2·3층은 탑을 옮길 때 새로이 보강한 것으로, 각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두툼한 지붕돌은 느린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치켜올랐으며, 밑면에 1·2층은 5단, 3층은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기단이 2층이고 3층의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어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단과 탑신의 괴임 표현, 지붕돌의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른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6. 이천 어석리 석불입상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7호

지 정 일 1981.07.16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 564-4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 마을 한가운데 있는 이 석불은 상·하 2매의 커다란 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에 돌갓을 쓰고 있고 네모진 몸통 위에는 네모진 머리를 올려놓아 마치 4각의 돌기둥과 같다.


민머리의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낮게 표현되어 있고, 그 위에 8각형의 돌갓이 올려져 있다. 이마는 네모이지만 뺨과 턱에서는 비교적 둥근 맛이 난다. 큼직한 눈썹, 짧은 코, 작은 입, 길다란 귀 등의 표현은 부처님의 친근한 모습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얼굴 표현은 괴산 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과 비슷한데, 고려시대 때 충청·경기지역에서 유행하던 지방화한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몸통은 네모진 기둥모양으로 정강이 부분에서 상·하 2장의 돌로 갈라놓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서 손등을 보이고 있고, 왼손은 배 부분에서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양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두꺼워 보이며, 굵은 선으로 간략하게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옷 밑으로는 투박하게 조각된 두 발이 드러난다.


이 석불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불상의 한 유형으로, 당시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7.소고리 마애여래좌상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9호

지 정 일 1984.09.12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91-9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마옥산 기슭의 커다란 바위 면에 조각한 마애불이다. 높이 4.7m로 불상의 형태를 얕게 돋을새김한 후 주로 선으로 새겼다.


민머리 위에는 큼직한 머리묶음이 솟아 있고, 넓적하고 둥근 얼굴에는 눈꼬리가 긴 눈과 코, 굳게 다문 입 등이 묘사되었다. 양 귀는 길게 늘어졌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있다.


목 주위에는 뒤집어진 옷깃이 새겨져 있고, 가슴에는 흘러내리는 U자형의 옷주름이 조각되어 있다. 가슴 앞으로 들어올린 두 손은 손끝을 맞대어 부처가 설법할 때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손모양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과 비교되는 것으로, 고려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불상의 머리 뒤에는 여섯 겹의 둥그런 머리광배를 표현하였고, 몸 주위에는 두 겹의 몸광배를 표현하였다.


근엄한 얼굴, 간략화된 옷주름, 세부표현의 형식화, 탄력이 줄어든 선각 등에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8. 설성산성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76호

지 정 일 1984.09.12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930-1 외 
시 대 삼국시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설성산 봉우리와 그 아래의 큰 계곡을 포함한 험준한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이다.


지금까지 성의 자취가 비교적 분명하게 남아있어 성 전체의 윤곽을 알아 볼 수 있는데, 성의 둘레 약 1㎞, 폭 5m, 높이 4∼5m이다. 성은 바깥을 향해 경사지게 쌓고 안쪽으로 돌을 메우는 방식으로 쌓았는데, 매우 견고하여 발달된 성쌓기임을 알 수 있다.


성벽은 대부분 돌로 쌓았지만 동쪽 능선에는 흙과 돌을 섞어 쌓은 곳도 있다. 설성산 정상 바로 밑에 건물터의 흔적이 남아 있어 기와조각과 토기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성 안에는 도랑을 판 흔적도 있고, 동·서·북쪽에 문터의 흔적이 있다.


이 성은 신라 내물왕(재위 356∼402) 때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하며, 성을 쌓을 때 성이 쌓여질 자리로만 띠를 두른 듯 흰 눈이 내려있어 그 자취를 따라 성을 쌓았기 때문에 ‘설성’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이 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성이었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이 지역을 다스릴 때 계속 보완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9.이천향교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2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창전동 336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이천향교는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처음 지었으나, 지금 있는 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수리한 것이다.특히 동무는 1967년, 서무는 1980년에 새로 지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명륜당과 담장을 수리하였다.


지대가 높은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고,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반의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장식한 익공 양식이다. 대성전 내부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성전 앞쪽 좌우에 있는 동무와 서무는 각각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의 맞배지붕으로, 형태와 구조가 서로 비슷하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주변 지형의 구조를 적절히 이용한 배치가 돋보이는 조선 후기 향교이다.

 

10.자석리 석불입상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1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 51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의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용화사 경내의 노천에 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미륵당이라고 전해진다.


전체 2개의 돌로 이루어진 이 석불은 머리에 원형의 넓은 갓을 쓰고 있으며, 긴 타원형의 얼굴에 눈·코·입이 작게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잃고 있다.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은 양 손의 표현과 더불어 마멸이 심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 불상은 얼굴과 더불어 짧은 목, 몸체에 비해 좁은 어깨, 간략화된 옷주름 등에서 고려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준다. 

 

11.이평리 석불입상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0호

지 정 일 1985.09.20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마장면 이평리 267-22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이평리에 있는 여래입상으로 하반신이 파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멸이 심하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낮게 표현되었으며, 얼굴은 마멸이 심해 세부표현을 알 수 없지만 타원형의 통통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목은 얼굴로부터 어깨선이 바로 이어져 거의 표현되지 않았으며, 어깨는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가슴은 볼륨감이 없으며, 양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두꺼운 옷은 어깨로부터 굵은 옷주름이 U자형을 그리며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무릎으로 내렸으나 손목 이하는 확인할 수 없으며, 왼손은 살짝 구부리고 있다.


이 불상은 왼쪽으로 기운 어깨, 두껍고 간략한 옷주름, 볼륨감 없는 가슴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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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문화유산를 올려드리니 몇개 적어 가세요.

경기도의 문화유산


(용인시)


1.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종 목 보물 제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111

시 대 고려시대


서봉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절터의 크기로 보아 아주 큰 규모의 절로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내려와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곳은 탑비의 비각을 세우는 공사를 하던 도중에 기록이 남아있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서봉사의 옛터임이 밝혀졌다.


명종 15년(1185)에 세워진 이 탑비는 현오국사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만들어졌다. 보통 부도와 함께 건립되는데 절터에 부도의 흔적은 없고 이 비석만 남아 있다. 화강암의 비받침위에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비몸돌이 놓여있는 단촐한 모습이다.


비받침부분의 윗면은 4변을 비스듬히 잘라내었고,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에도 윗부분의 양 귀끝을 사선으로 접듯이 잘라서 마무리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15세에 불일사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의 주지를 거쳐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로 삼고 시호를 ‘현오’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그 외에도 글을 지은 이와 건립연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한 고려 후기 석비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2.용인 서리 고려백자 요지


종 목 사적 제329호

지 정 일 1989.01.1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 산23-1외

시 대 고려시대

 

함박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끝에 있는 고려시대 가마터이다. 이곳에는 거대한 퇴적층이 있는데, 퇴적층에서 가마의 유구와 백자, 청자, 도기 조각 등과 작업에 관계되는 건물터도 조사되었다.


가마는 벽돌로 된 가마와 진흙으로 지은 가마가 확인되었는데, 벽돌가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고 진흙가마는 길이 83m의 대형가마로, 출입구가 27개나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그릇이 많으며, 특히 해무리굽을 가진 대접(완)이 대부분이다. 제작시기는 10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전반까지로 추정한다.


거대한 퇴적층과 벽돌·진흙가마의 존재, 다양한 모양의 백자 조각 등의 발견은 고려백자의 발생과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역할을 하며, 한국도자사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준다.


3.용인 보정동 고분군


종 목  사적  제500호 
지정(등록)일 2009.06.2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산121-2번지 일원 
시 대 신라


용인 보정동 삼막골 고분군은 6세기 후반 신라가 한강유역 진출후 9세기까지 조성된 유적으로 충청 이북지역에서 확인된 신라고분군 중 가장 장기간에 걸친 유적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충청·경기지역 소재 신라고분군 중 충주 누암리고분군, 여주 매룡리고분군에 필적하는 것으로서 지금까지 발굴결과 유구가 잘 남아있고 유물도 다수 출토되는 등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4.심곡서원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203-2

시 대 조선시대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은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사림파의 대표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기묘사화(1519) 때 죽음을 당하였다. 효종 원년(1649)에 세워 ‘심곡’이라는 현판과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마을 뒤쪽 야산에 서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외삼문·강당인 일소당·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 안의 여러 행사와 유림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로서 각 칸마다 널문을 달아 사면을 전부 열 수 있게 하였다.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사당은 앞면에 트인 퇴칸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으며, 내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 형식이다.


5.충렬서원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118

시 대 조선시대

 

고려 후기 충신이자 동방성리학의 시조인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서원이다. 조선 선조 9년(1576)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져 선조 38년(1605)에 다시 지었다. 이때 정보와 이시직을 같이 모셨다. 광해군 원년(1608)에 임금이 이름을 짓고 현판을 하사하여(사액),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선현배향과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담당하였으나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으나, 1924년에 복원하였다.


마을 뒤쪽의 야산 기슭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공부하는 강당을 앞쪽에 배치하고 사당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외삼문·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강당이 축에서 벗어나 사당과 나란히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재실이나 장경각·교직사 등 부속건물이 없이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8세기 이후에 서원이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 중심의 시설로 바뀌어 갔음을 보여 준다. 강당도 교육공간보다는 제향 때 모임 장소로 쓰였다.


전하는 유물로 『유한집』과 『단심가』등을 서원에서 보존하고 있다. 강당과 사당만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서원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다.


6.채제공선생 뇌문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지 정 일 1978.11.10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역복동 산3-4

시 대 조선시대


뇌문비는 뇌문, 즉 왕이 신하의 죽음을 애도하며 손수 그의 공적을 찬양하는 글을 적어 보낸 조문 형식의 글을 새겨놓은 비로, 이 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채제공(1720∼1799)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채제공은 영조 19년(1743) 문과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를 지냈으며 도승지·병조판서·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10여년을 재상으로 있는 동안 여러 분야에 걸쳐 왕을 보필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그의 묘 앞에 평생동안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가 없는 것은 그가 죽은 뒤 그의 후손인 남인이 정치권에서 밀려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비는 묘소의 오른쪽에 건립된 비각 안에 있으며,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었다. 비문을 쓴 사람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비문은 정조 임금의 필체로 보이며 비의 명칭은 허목의 글씨체로 짐작된다.


정조 23년(1799)에 세운 비이다.


7.문수산 마애보살상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지 정 일 1984.09.12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산25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 문수산의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50m 떨어진 바위면에 조각한 마애불이다. 바위를 잘 다듬어서 양쪽으로 대칭되게 선 두 보살상을 새겼는데, 돋을새김과 선으로 새기는 기법을 같이 사용했다.


연꽃무늬의 대좌 위에 선 두 보살상 중 정면을 향한 왼쪽 보살상은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마멸이 심하지만 머리에 보관을 썼고 풍만한 얼굴에 눈·코·입이 선명함을 알 수 있다. 상체에는 옷을 걸치지 않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데, 잘록한 허리에는 속옷의 매듭이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가슴에서 구부려 엄지와 검지를 맞댄 모습인데, 팔목에는 팔찌가 끼워져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웃는 표정이고 두 귀가 어깨까지 길게 내려오고 있다. 양 손은 왼쪽의 보살상과 반대로 처리되어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왼쪽 보살상과 거의 같은 양식을 보인다.


이 두 보살상은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크고, 어깨를 움추려 경직된 모습을 보이지만 대담하게 단순화시킨 모습과 얼굴, 손, 발 등의 세부 표현에서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볼 수 있다.


8.어비리 삼층석탑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4호

지정일 2004.11.29

소재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어비리 산99-2

시 대 고려시대


동도사내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폐허가 된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63년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탑은 1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네 장의 판돌을 세워 면을 이루게 하고, 그 위로 판돌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네 면의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본 떠 새겨 두었으며, 윗면에는 별도의 판돌을 하나 더 두어 탑신의 1층 몸돌을 괴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다른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은 면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새겼고, 처마는 수평으로 흐르다 네 귀퉁이에 이르러 날카롭게 위로 들려 경쾌함을 실었다. 3층 지붕돌 위에는 다른 유물에서 가져온 듯한 돌 몇장이 놓여 머리장식을 대신하고 있다.


전체에 흐르는 양식이나 조각솜씨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9.정몽주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3

시 대 고려시대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공민왕 9년(1360)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예부정랑, 대사성 등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5부 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으며, 일본에 가서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지면서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한 후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銘旌: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묘비에는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쓰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10.처인성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44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산43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산성으로, 흙으로 성벽을 쌓아 올렸다. 이곳은 고려 때 처인부곡으로 불렸던 곳으로,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 때 고려의 승장 김윤후 장군이 살리타이 장군을 사살한 격전지이기도 하다.


야산의 끝자락인 구릉 위에 쌓은 평지성으로 오랜 세월동안 풍우에 훼손되어 흔적만이 남아 있는데, 잔존하는 성의 길이는 약 250m 정도이다. 주변보다 높은 지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평면은 사다리꼴에 가까우며, 성을 쌓은 방법을 보면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다졌다. 지형의 높이를 고려하였기 때문에 성벽의 높이는 4.8∼6.3m로 차이가 난다.


이 성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말안장같은 야산이 있는데, 여기서 살리타이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사장터’라고 부른다.


11.용인 전음애 이자고택


종 목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10호

지 정 일 1997.12.26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297-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종 때 덕행 높은 이자(1480∼1533) 선생이 살던 곳이라고 전하는 옛집이다. 현재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ㄷ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는데 별도로 사당을 짓는 일반 양반집과 달리 이 집에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았다. 다만 본채 북서쪽에 청방을 두고 단청을 하여 이곳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을 구분하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경기지역의 중류주택이다.


12.양지향교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리 379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양지향교는 조선 중종 18년(1523)에 처음 지었으며,최근까지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쪽 내삼문 안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공포의 형태나 가구 수법을 보아 17세기 건물로 보이는데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명륜당과 대성전만을 갖춘 조선 후기 작은 규모의 향교 형식을 보여주는 건축이다.


13.용인 공세리 오층석탑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2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홍구 공세동 264

시 대 고려시대


이름을 알 수 없는 옛 절터에 불상과 함께 보존되어 있는 탑으로,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연꽃을 장식한 바닥돌 위로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한 4장의 판돌을 사방에 세워 만들었는데, 현재 2장이 없어졌다. 탑신부의 몸돌은 1층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위층은 거의 줄지 않았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두툼한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가 경쾌하게 위로 들려있어 날렵한 멋을 풍긴다.


기단의 맨윗돌이 탑의 전체 비례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규모로 되어 있지만, 지붕돌이 위층으로 갈수록 적절하게 줄어들어 안정감을 준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성남시)


1.봉국사 대광명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1호

지 정 일 1980.06.02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216-2

시 대 근대


봉국사는 영장산 기슭에 있는 절로 고려 현종 19년(1028)에 세우고, 태조 4년(1395)에 수리하였다. 현종 15년(1674) 임금은 어려서 일찍 죽은 명혜, 명선 두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주의 능 근처에 있던 이 절을 다시 짓고 이름을 봉국사라 하였다. 한국전쟁 때 무너진 것을 1958년 법운이 새로 짓고 1974년 해체·복원하였다.


봉국사 대광명전은 원래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나 이 절에서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가장 단순한 맞배집이다. 지붕의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몸체에 비해 지붕이 커서 외관이 장중하다. 기단의 양쪽에는 사자형태를 한 조각상이 있어서 특이하다.


법당의 내부에는 중앙에 불단이 설치되어있고,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이 있다. 불상의 좌우로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2.망경암 마애여래좌상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2호 

지 정 일 1980.06.02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553-1

시 대  조선시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망경암의 암벽을 우묵하게 파서 방을 만들고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불상을 새겼다. 이 암벽에는 그 외에 14곳에 얕은 방을 파고 글을 새겼다.


서울이 한 눈에 보이는 이 곳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역대 임금이 친히 거동하여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빌었던 곳이라고 한다. 조선 왕실에서는 세종의 7째 아들인 평안대군과 제안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칠성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불상 주위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광무 1년(1897)에 이규승이 관음상을 새기고 절을 세웠다. 불상은 민머리를 하고 있는데, 얼굴은 마모가 심해서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조각 솜씨가 특별하지 않지만 만들어진 연도가 뚜렷한 작품으로 가치가 있다.


3.수내동가옥(이택구가옥)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8호

지 정 일 1989.12.29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84

시 대  조선시대


한산 이씨의 살림집 가운데 하나로 사용된 부재나 지은 수법으로 보아 19세기 말 건물로 추정한다.


바깥마당에 면한 一자형 문간채 뒤에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안채 뒤로는 널찍한 뒷마당이 흙담에 둘러싸여 있다.


안채는 10칸 규모의 초가로 1칸 반 건넌방과 4칸 대청, 2칸 안방을 일렬로 배열하였고 안방 앞에서 꺾여 부엌과 광이 있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반침이 설치되어 공간의 효용도가 높다.


문간채는 6칸 규모를 가진 초가인데 가운데에 대문이 있고 오른쪽에 온돌방이 있다.


현재 신도시 중앙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어 주변에 밀집한 아파트군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집 주위에는 마을 어귀에 있던 큰 느티나무와 연못, 정자터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 지은 집으로 경기지방 살림집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4.청주한씨 문정공파 묘역 신도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4호

지 정 일 1994.04.20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2-1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가까이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문정공 한계희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한계희(1423∼1482)는 세종 23년(1441) 진사가 되고, 세종 29년(1447)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특히 세조의 신임을 두터이 받았으며, 예종과 성종 때에는 두차례에 걸쳐 공신이 되어 그 벼슬이 우찬성에까지 올랐다. 조선 전기의 명문가였던 집안배경이 그가 벼슬길에 오르게 되는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이나, 그가 지닌 학식과 곧은 성품 역시 그 바탕이 되었고, 주위로 부터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죽은 후에는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선생의 묘 아래쪽에 자리한 비는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전기 당시의 위패 형식을 하고 있다. 받침돌은 윗면에 높직한 연꽃무늬를 둘러 새겼으며, 머릿돌은 연꽃이 엎어져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고,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돌이 솟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연산군 6년(1500) 즈음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며, 그의 친구였던 서거정이 지은 글에, 안침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 두었다.


5.풍산군 이종린 묘역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6호

지 정 일 2005.07.28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 산41-10

시 대  조선시대


풍산군 이종린( 1538~1611)은 중종의 손자이며 덕양군 이기의 장남이다. 1581년 덕양군이 돌아가자 관례에 따라 정경의 품계에 오르고 임진왜란 때에는 어가를 호종하였다. 1607년 종1품 가덕대부에 제수되고 1610년에는 소덕대부에 올라 왕실 종친부의 일을 관장하였고 사옹원제조와 오위도총부 도총관도 겸임하였다.


일반 사대부의 봉분이 보통 12폭의 병풍석을 두르고 문인석에도 5량관을 씌우는 데 비해 풍산군의 봉분은 큰 받침돌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8폭의 병풍석을 둘렀으며 문인석에도 7량관을 씌우는 등 왕릉이 아님에도 제왕의 예에 따라 매장한 특징이 있어 2005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안성시)


1.칠장사 오불화괘불탱


종 목  국보  제296호 
지 정 일 1997.09.22
소 재 지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칠장사 
시 대 조선시대


3단구도로 도솔천궁을 묘사한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칠장사 괘불은 길이 6.56m, 폭 4.04m 크기로 구름을 이용하여 상·중·하 3단으로 구분되었다.


맨 윗부분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불과 노사나불이 좌우에 모셔진 삼신불을 묘사하고 있고, 중간은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들이 있어 삼세불을 표현하였으며, 맨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그려져 수미산 정상의 도솔천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3단 배치는 예배자들에게 삼신불과 삼세불의 세계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게 하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구원으로 도솔천궁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괘불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다.


채색은 녹색을 주로 하고 황색과 황토색을 대비시켜 다소 어두워 보이나, 옷 처리를 붉은색으로 하여 경쾌함을 느낄 수 있다.


이 괘불은 조선 인조 6년(1628)에 법형이 그린 것으로 괘불함 없이 종이에 싸서 대웅전에 보관하고 있다.

이 괘불에서 보이는 단아하고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짜임새 있는 구도, 섬세한 필치 등은 당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 작품은 17세기 전반의 불화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사인비구 제작 동종-안성 청룡사 동종


종 목  보물  제11-4호 
지 정 일 2000.02.15
소 재 지 경기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28 청룡사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준다는 대나무 모양의 음통에 역동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또한 종의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어깨 띠 아래에는 사각형 모양의 대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을 세웠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수법이 특히 돋보이는 작품으로, 사인비구의 작품세계와 조선 종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3.죽산리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435호 
지 정 일 1966.02.28
소 재 지 경기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148-5 
시 대 고려시대


지금은 주변이 경작지로 변한 봉업사의 옛터에 위치하고 있는 탑으로,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하나로 짠 두툼한 널돌 위에 올려 완성하였는데, 이 때의 석재가 두툼한 탓인지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준다. 기단 위의 탑신은 1층 몸돌만 4장으로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한 돌로 구성하였다. 각 층의 네 모서리에는 폭이 좁은 기둥을 새겼다. 1층 몸돌 남쪽면 중앙에는 작은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만들어 놓았으나 모양만 새기는 형식에 그치고 말았다. 지붕돌은 얇고 추녀는 거의 수평을 이루었으며 끝에서의 치켜올림도 미미하다.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탑의 전체적인 체감도 적당하지 못하고, 각 부의 조각도 형식에 그치고 있다.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석재의 조합 방식은 우수하나, 기단에 새긴 조각이 형식화 되는 점 등에서 약화되고 둔중해진 고려석탑 특유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4.봉업사 석불입상


종 목  보물  제983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칠장사 
시 대  고려시대


원래 봉업사지에 있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기고 그 뒤 다시 선덕여왕 5년(63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로 옮겼다.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 높이는 1.57m이고 총 높이는 1.98m이다. 눈·코·입은 심하게 닳았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 입고 있다. 옷주름은 여러 겹의 둥근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치마가 양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신체표현에 있어서는 손이 다소 큰 편이기는 하나 머리, 어깨 너비 등의 신체비례가 비교적 좋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가 있는데 주위에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당당한 어깨, 발달된 신체표현, U자형의 옷주름,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5.덕봉서원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108 
시 대 조선시대


덕봉서원은 오두인의 충절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 백성의 교육을 위해 지었다. 충정공 오두인(1624∼1689)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의 문신으로,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의주로 유배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 서원은 숙종 21년(1695)에 지어진 후 숙종 23년에 임금이 ‘덕봉’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 때에도 헐리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마을입구 언덕에 남동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아래쪽 낮은 곳에 공부하는 장소가 있고 위쪽 높은 곳에는 제사지내는 사당이 배치되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정의당과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그리고 외삼문·내삼문·홍살문 등이 있다. 소장 전적과 유물로는 오두인이 지은 『양곡집』과 숙종 7년(1681) 김창협이 그린 오두인의 초상화 1점 등이 있다.


덕봉서원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건물도 훌륭하고 공간도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이천시)

 

1.영월암 마애여래입상


종 목  보물  제822호 
지 정 일 1985.01.08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관고동 산64-1 
시 대 고려시대


높이 7∼8m의 자연 암석을 다듬고 바위면 전체에 꽉 채워 조각한 마애불로 전체적으로 장대하며 힘찬 솜씨를 보이고 있어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와 양 손은 얕은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고 옷주름 등은 선으로 조각되었다. 원만하고 둥근 얼굴에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하며 지그시 감은 듯한 눈과 굵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에서 힘차고 후덕한 고승의 느낌을 갖게 한다. 양 손은 가슴에 모아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으며, 손바닥이 밖을 향하고 있는 설법하는 모양이다.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부드러운 사선을 그리며 흐르고, 끝에서는 지그재그 모양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옷주름선은 소박한 모습이며, 스님의 얼굴에 어울리는 은은한 덕망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영월암의 창건조사 혹은 이 사찰과 인연이 깊은 나한이나 고승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유례가 드문 고려시대 마애조사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작품이다.


2.태평흥국명 마애보살좌상 


종 목  보물  제982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183-1 
시 대 고려시대


속칭 ‘미륵바우’라고 하는 커다란 화강암벽 전면에 걸쳐 얕게 돋을새김한 고려시대 마애보살상으로 전체 크기는 3.2m에 이른다.


높은 관을 쓴 이 보살상은 손에 연꽃을 들고 있으며, 관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어 관음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보살은 반가상의 자세로 오른발은 내려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대좌 위에 놓고 왼발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얼굴과 신체는 전체적으로 큼직하며 비례가 맞지 않아 둔중한 느낌이 든다. 보살상이 새겨진 바위 뒷면에는 고려 초인 981년에 만들어진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글이 적혀 있다.


전반적으로 지방색이 짙고 조각 기술이 다소 뒤떨어지지만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천의에, 높은 보관을 쓰고, 연꽃가지를 손에 든 독특한 형식의 관음보살상으로 금릉 광덕동 석조보살입상(보물 제679호)과 함께 비교 연구해야 할 10세기의 중요한 조각이라 하겠다.


3.설봉산성


종 목  사적  제423호 
지 정 일 2000.09.16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사음동 산 24번지외 
시 대 백제


설봉산은 이천의 진산으로, 이 산의 7∼8부 능선, 속칭 칼바위를 중심으로 한 약 3만여 평에 달하는 고원지대가 바로 옛 산성터이다.


계곡을 감싸안고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은 대부분 흙으로 쌓았으나 돌로 쌓은 석축도 군데군데 있다. 석축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거나 매몰되고 있는데, 아직도 정상 아래 부분에는 3∼10m의 석축의 흔적이 뚜렷한 형태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이 일대에서는 석축·석편·토기편은 물론, 건물터 임을 알리는 정면 9m, 측면 6.30m의 인공 주춧돌 9개가 정연히 배치되어 있어, 이 곳이 웅장한 규모의 삼국시대 산성터 임을 알려 준다. 정상 밑 서쪽 능선 평평한 부분에는 주춧돌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 장대지로 추정되며, 군기를 꽂았던 홈을 판 바위와 돌싸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돌무더기도 3곳 남아 있다. 또 산성의 필수요건인 우물터 2곳, 수구와 인접한 북문의 흔적도 남아 있다.


축성연대는 대략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한강 이남을 점유하고 이 곳에 처음으로 남천현을 설치한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서 신라·백제세력이 이 곳을 다시 수복하던 신라 진흥왕 12년(551)사이에 고구려군이 쌓은 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산의 정상에 서면 주변 지역이 한눈에 들어와,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세력 다툼이 있었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대의 역할을 하였던 성으로 여겨진다.


4. 어재연장군 생가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27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율면 산성리 74 
시 대 조선시대


고종 때의 무관으로 미국 로저스 제독이 지휘하는 군함과 광성진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전사한 어재연(1823∼1871)장군의 생가이다. 1800년대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초가집이다. 앞에 넓은 마당을 두고 사랑채와 안채·광채가 모여 튼 ㅁ자형의 배치구조를 이루고 있다.


광채 옆에 있는 대문을 통하여 들어서면 오른쪽 앞으로 낮은 담이 뻗어있어 안채가 자리한 안마당이 훤히 들여다 보이지 않는다. 그 담의 한 곳을 터서 안채로 통하는 출입구로 사용하였다. 안채는 ㄱ자형 구조로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이 배치되었고 부엌광이나 골방은 따로 두지 않았다. 툇마루나 쪽마루가 방 앞에 없는 간결한 구조이다. 대문의 왼쪽에 위치하는 一자형의 사랑채는 부엌·대청·사랑방으로 되어있다. 대청은 안마당쪽을 막아놓고 바깥마당과 동쪽벽을 터 놓았다. 사랑부엌은 안마당에서만 출입을 할 수 있다. 광채의 뒷모서리에서 뒤로 큼지막하게 돌려진 토담은 집안을 둘러싸고 있다.


전체적으로 여유있게 배치되어 있으며 원형의 변형 없이 비교적 잘 보존된 집이다. 


5. 이천 중리 삼층석탑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6호

지 정 일 1981.07.16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중리동 187 
시 대 고려시대


이천읍 진리라는 마을에 붕괴되어 흩어져 있던 것을, 197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탑으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4매의 널돌로 짜 놓았고 윗면에 2단의 괴임을 두었다. 위층 기단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 하였고, 윗면에 탑신의 1층 몸돌을 받기 위한 3단의 괴임을 새겨 놓았다. 탑신부의 각 몸돌 중에서 1층을 제외한 2·3층은 탑을 옮길 때 새로이 보강한 것으로, 각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두툼한 지붕돌은 느린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치켜올랐으며, 밑면에 1·2층은 5단, 3층은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기단이 2층이고 3층의 탑신부를 구성하고 있어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단과 탑신의 괴임 표현, 지붕돌의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른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6. 이천 어석리 석불입상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7호

지 정 일 1981.07.16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 564-4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 마을 한가운데 있는 이 석불은 상·하 2매의 커다란 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에 돌갓을 쓰고 있고 네모진 몸통 위에는 네모진 머리를 올려놓아 마치 4각의 돌기둥과 같다.


민머리의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낮게 표현되어 있고, 그 위에 8각형의 돌갓이 올려져 있다. 이마는 네모이지만 뺨과 턱에서는 비교적 둥근 맛이 난다. 큼직한 눈썹, 짧은 코, 작은 입, 길다란 귀 등의 표현은 부처님의 친근한 모습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얼굴 표현은 괴산 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과 비슷한데, 고려시대 때 충청·경기지역에서 유행하던 지방화한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몸통은 네모진 기둥모양으로 정강이 부분에서 상·하 2장의 돌로 갈라놓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서 손등을 보이고 있고, 왼손은 배 부분에서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양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두꺼워 보이며, 굵은 선으로 간략하게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옷 밑으로는 투박하게 조각된 두 발이 드러난다.


이 석불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불상의 한 유형으로, 당시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7.소고리 마애여래좌상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9호

지 정 일 1984.09.12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91-9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마옥산 기슭의 커다란 바위 면에 조각한 마애불이다. 높이 4.7m로 불상의 형태를 얕게 돋을새김한 후 주로 선으로 새겼다.


민머리 위에는 큼직한 머리묶음이 솟아 있고, 넓적하고 둥근 얼굴에는 눈꼬리가 긴 눈과 코, 굳게 다문 입 등이 묘사되었다. 양 귀는 길게 늘어졌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있다.


목 주위에는 뒤집어진 옷깃이 새겨져 있고, 가슴에는 흘러내리는 U자형의 옷주름이 조각되어 있다. 가슴 앞으로 들어올린 두 손은 손끝을 맞대어 부처가 설법할 때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손모양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과 비교되는 것으로, 고려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불상의 머리 뒤에는 여섯 겹의 둥그런 머리광배를 표현하였고, 몸 주위에는 두 겹의 몸광배를 표현하였다.


근엄한 얼굴, 간략화된 옷주름, 세부표현의 형식화, 탄력이 줄어든 선각 등에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8. 설성산성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76호

지 정 일 1984.09.12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930-1 외 
시 대 삼국시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설성산 봉우리와 그 아래의 큰 계곡을 포함한 험준한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이다.


지금까지 성의 자취가 비교적 분명하게 남아있어 성 전체의 윤곽을 알아 볼 수 있는데, 성의 둘레 약 1㎞, 폭 5m, 높이 4∼5m이다. 성은 바깥을 향해 경사지게 쌓고 안쪽으로 돌을 메우는 방식으로 쌓았는데, 매우 견고하여 발달된 성쌓기임을 알 수 있다.


성벽은 대부분 돌로 쌓았지만 동쪽 능선에는 흙과 돌을 섞어 쌓은 곳도 있다. 설성산 정상 바로 밑에 건물터의 흔적이 남아 있어 기와조각과 토기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성 안에는 도랑을 판 흔적도 있고, 동·서·북쪽에 문터의 흔적이 있다.


이 성은 신라 내물왕(재위 356∼402) 때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하며, 성을 쌓을 때 성이 쌓여질 자리로만 띠를 두른 듯 흰 눈이 내려있어 그 자취를 따라 성을 쌓았기 때문에 ‘설성’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이 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성이었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이 지역을 다스릴 때 계속 보완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9.이천향교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2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창전동 336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이천향교는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처음 지었으나, 지금 있는 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수리한 것이다.특히 동무는 1967년, 서무는 1980년에 새로 지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명륜당과 담장을 수리하였다.


지대가 높은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고,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반의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장식한 익공 양식이다. 대성전 내부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성전 앞쪽 좌우에 있는 동무와 서무는 각각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의 맞배지붕으로, 형태와 구조가 서로 비슷하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주변 지형의 구조를 적절히 이용한 배치가 돋보이는 조선 후기 향교이다.

 

10.자석리 석불입상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1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 51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의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용화사 경내의 노천에 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미륵당이라고 전해진다.


전체 2개의 돌로 이루어진 이 석불은 머리에 원형의 넓은 갓을 쓰고 있으며, 긴 타원형의 얼굴에 눈·코·입이 작게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잃고 있다.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은 양 손의 표현과 더불어 마멸이 심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 불상은 얼굴과 더불어 짧은 목, 몸체에 비해 좁은 어깨, 간략화된 옷주름 등에서 고려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준다. 

 

11.이평리 석불입상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0호

지 정 일 1985.09.20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마장면 이평리 267-22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이평리에 있는 여래입상으로 하반신이 파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멸이 심하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낮게 표현되었으며, 얼굴은 마멸이 심해 세부표현을 알 수 없지만 타원형의 통통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목은 얼굴로부터 어깨선이 바로 이어져 거의 표현되지 않았으며, 어깨는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가슴은 볼륨감이 없으며, 양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두꺼운 옷은 어깨로부터 굵은 옷주름이 U자형을 그리며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무릎으로 내렸으나 손목 이하는 확인할 수 없으며, 왼손은 살짝 구부리고 있다.


이 불상은 왼쪽으로 기운 어깨, 두껍고 간략한 옷주름, 볼륨감 없는 가슴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2019.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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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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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2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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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일단 경기도의 문화유산중에 제가 아는거
간단하게 알려드릴께여.
수원화성이요.수원화성이 조사하시기에는 쉬워여..
이상 허접하고 늦은 답변 이었습니닷;;

201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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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크림린아CreamRinA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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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은 아니지만 님도여?

2021.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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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tjal****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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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런 숙제 지금하는데 많이 어렵네요 ㅠ_ㅠ

202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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