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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구리 남양주 역사유적지
비공개 조회수 6,827 작성일2013.09.06
구리나남양주에 역사유적지나 박물관답사하기좋은곳좀추천해주세요
조사할거있는데로요!!!내공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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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의 역사 유적지)

 

1.구리 동구릉

 

종 목 사적 제193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구리시 인창동 산2-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 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과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2.구리 명빈묘

 

종 목 사적 제364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구리시 아천동 산14

시 대 조선시대

 

조선 3대 태종(재위 1400∼1418)의 후궁 명빈 김씨의 무덤이다. 명빈 김씨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태종의 후궁으로 성종 10년(1479)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무덤은 일반 사람들의 무덤처럼 눈에 띄지 않고, 몇몇 석물만이 갖추어져 있다. 무덤에 있는 비석 앞면에는 ‘명빈김씨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3.아차산일대 보루군

 

종 목 사적 제455호

지 정 일 2004.10.27

소 재 지 경기 구리시 및 서울 광진구 중랑구·노원구 일대

시 대 삼국시대

 

아차산일대보루군은 출토유물이나 축성방법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며, 고구려가 5세기 후반에 한강 유역을 진압한 후 551년에 신라와 백제에 의해 한강유역을 상실하기까지의 역사를 밝혀줄 수 있는 유적이다.

 

아차산일대보루군은 아차산보루, 용마산보루, 시루봉보루, 수락산보루, 망우산보루 등 17여개의 보루로 이루어진 유적으로 그 중 일부를 제외한 10여개의 보루가 고구려의 보루로 추청된다. 아차산일대보루군은 중랑천과 아차산, 용마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여기에 존재하는 10여개의 보루는 현재 남한 내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고구려 관련유적으로서 발굴 등을 통해 고구려 군사시설의 면모가 규명되고 있으며, 백제나 신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료가 부족하여 그동안 연구활동이 부진했던 고구려 관련 고고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삼국시대 특히 고구려 국경지대 요새의 구조와 성격, 국경방위체계, 군 편제 등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서 고구려의 남하과정, 한강유역에서의 대치와 관리방식,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과 발전과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4.나만갑선생 신도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지 정 일 1985.06.28

소 재 지 경기 구리시 사노동 산163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나만갑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나만갑(1592∼1642)은 광해군 5년(1613)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형조참의로 있을 때 시정을 논하다가 일시 파직되기도 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홀로 말을 타고 적진을 뚫고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공조참의가 되어 국난극복에 힘썼다. 저서로는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56일간 생겨난 병자호란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병자록』이 있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렸다. 비문은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수항이 새겼다. 비문은 나만갑의 조상들을 소개하고, 그의 청년시절, 관직생활, 병자호란 당시 나라를 위해 힘썼던 일, 성실하고 효성스런 부인과 자손들에 대한 사실들을 적고 있다.

 

효종 9년(1658)에 세운 비로, 숙종 9년(1683) 그의 둘째 손자 나양좌가 묘를 지금 자리로 옮긴 사실 등을 첨가하여 새겨 놓았다.

 

5.구리 한용운 묘소


종 목 등록문화재  제519호 
지 정 일 2012.10.19
소 재 지 경기 구리시  교문동 산84-2 
시 대 일제강점기


한용운선생은 민족대표 33인으로 3·1독립선언을 주도하였던 독립운동가이자 승려로서 《불교유신론》을 제창하여 불교의 개혁을 주창한 불교계의 지도자 그리고 《님의 침묵》으로 저항 문학을 선도하였던 인물로, 이곳은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릴 수 있는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큰 곳이다.
 

 

(남양주의 역사 유적지)

 

1.남양주 광릉

 

종 목 사적 제197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99-2

시 대 조선시대

 

 광릉은 조선 7대 대왕인 세조(재위 1455∼1468)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형인 문종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계유정란을 일으킨 후에 1455년에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세조는 군제 개편·집현전 폐지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토지제도 정비·서적간행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6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 윤씨는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왕대비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당시 예종·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사를 돌보게 된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14년(1483)에 세상을 떠났다.

 

왕의 유언에 따라서 무덤방은 돌방을 만드는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돌방과 병석을 없앰으로해서 백성의 고통과 국가에서 쓰는 돈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난간석을 세우고 그 밖으로 문인석·무인석·상석·망주석·호석·양석을 세웠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광릉 밖에 없으며, 글자로 난간석에 표시하거나 나중에는 24방위까지 새겨 넣게 된다.

 

무덤배치에 있어서도 최초의 동원이강의 형식이다. 지금까지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나란히 두고자 할 때는 고려 현릉·정릉 식의 쌍릉이나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의 형식으로 왕과 왕비를 함께 묻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광릉은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로 후세의 무덤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세종의 영릉이 조선 전기 왕릉 제도를 총정리한 것이라 한다면, 광릉은 조선 전기 왕릉 제도의 일대변화를 이룬 조선 왕릉 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남양주 홍릉과 유릉

 

종 목 사적 제207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141-1

시 대 조선시대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왕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광무 원년(1897)에 대한제국으로 선포됨에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난간 밖으로 둘레돌과 양석을 세우지 않았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에 앞면 5칸·옆면 4칸의 침방이 있는 집 즉, 침전을 세웠으며 문·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낙타 등의 수석을 놓았다. 문·무인석은 크고 전통적인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유릉은 순종과 동비 순명효왕후, 동계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무덤 중 한 봉우리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 뿐이다. 12면의 면석에 꽃무늬를 새긴 병풍석과 12칸의 난간석을 세웠다. 무덤 아래에는 침전이 정자각을 대신하였으며 그 아래 문·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상 등을 배치하였다.

 

홍릉과 유릉은 철종 이전의 무덤과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 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가 달라졌으며, 임금의 침실, 제사지내는 방의 위치가 달라졌다. 2개의 무덤을 하나로 묶기위해 외곽으로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양릉 중간에 돌로 만든 연못을 두었다.

 

3.남양주 사릉

 

종 목 사적 제209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 산65-1

시 대 조선시대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하지 않았고, 무덤 앞에 상석과 양석, 둘레돌이 있으며 그 밖으로 3면을 낮은 담으로 쌓았다. 단종의 무덤이 장릉으로 봉해졌을 때에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동물모양의 돌만 세웠는데 이는 왕릉으로 봉해진 것에 대한 예에 따른 것이다. 사각지붕 모양의 명등석은 장릉과 같은 것으로 숙종대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4.남양주 순강원

 

종 목 사적 제356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150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4대 선조(재위 1567∼1608)의 후궁인 인빈김씨(1555∼1613)의 무덤이다.

 

인빈김씨는 조선 16대 인조의 할머니이며,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추종된 왕)의 생모이다. 무덤 주위를 둘러쌓는 담장(곡장)을 둘렀으며, 묘비석을 비롯하여 여러 석조물이 있다.

 

영조 31년(1755)에 무덤을 순강원이라 명하고 지위를 승격시켰다. 또한 위패는 저경궁에 모셨으며, 순종 2년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후궁들의 위패를 모신 칠궁으로 포함되어 옮겼다.

 

5.남양주 휘경원

 

종 목 사적 제360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67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 22대 정조(재위 1776∼1800)의 후궁 수빈 박씨(1770∼1822)의 무덤이다. 수빈 박씨는 숙선옹주를 낳고 수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며, 정조 14년(1790)에는 왕자 순조를 낳았다. 순조 22년(1822)에 세상을 떠났다.

 

철종 6년(1855)에 순조의 무덤인 인릉을 다른 자리로 옮기면서 휘경원을 순강원으로 옮겼다. 철종 14년(1863)에 순강원의 자리가 풍수지리학상 좋지 못하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인 조선시대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이의 생모인 7후궁의 신위를 모신 칠궁에 모셔져 있다.

 

무덤 주변에는 여러 석물들과 정자각, 비각이 있다.

 

6.남양주 광해군 묘

 

종 목 사적 제363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59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과 문성군 부인 유씨의 무덤이다. 봉분이 두개인 쌍분이며, 무덤 주변에는 석물들이 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아들로 형인 임해군 대신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경희궁에 가두는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였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이 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강화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인조 19년(1641)에 사망했다. 처음엔 제주도에 묻혔다가 인조21년(1643) 이곳으로 옮겨졌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임진왜란 이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서적 편찬과 대동법 실시, 국방력 강화 등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부인유씨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고,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로 함께 유배를 갔다가 1623년 사망했다. 양주에 무덤를 모시고, 광해군이 죽은 후 같은 곳으로 옮겨졌다.

 

7.성묘

 

종 목 사적 제365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5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4대 선조(재위 1567∼1608)의 후궁이며 광해군을 낳은 공빈김씨의 무덤이다. 공빈김씨는 명종 8년(1533)에 태어나 선조의 후궁이 되었으나 선조 10년(1577)에 세상을 떠났다.

 

무덤 주변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비롯한 많은 석물이 있으며, 왕의 무덤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의 규모이지만 비석 등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8.안빈묘

 

종 목 사적 제366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6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7대 효종(재위 1649∼1659)의 후궁 안빈이씨의 무덤이다. 안빈이씨는 광해군 14년(1622)에 태어나 숙종 19년(1693)에 죽었다.

 

무덤 주변에는 여러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의 앞면에는 ‘조선국안빈경주이씨묘표’라는 글이 새겨 있다.

 

9.남양주 영빈묘

 

종 목 사적 제367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17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9대 숙종(재위 1674∼1720)의 후궁인 영빈김씨의 무덤이다. 영빈김씨는 현종10년(1669)에 태어나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 그러나 장희빈으로 인하여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친정으로 돌아왔고, 영조 11년(1735)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복위할 때 같이 복위한 영빈김씨의 무덤에는 여러 석물을 세워놓아 죽은 이에 대한 깍듯한 예를 갖추고 있다. 그 중 봉분 앞에 있는 비석의 내용을 통해 영빈 김씨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행장과 장례 등 여러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10.진접 여경구가옥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29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내곡리 286

시 대 조선시대

 

 현재의 소유자 여경구의 장인인 이덕승의 8대조가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180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산을 뒤로 하고 있어 주변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안채와 사랑채·문간채·행랑채·사당채가 연결되지 않고 각각 떨어져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안채는 집안 깊숙히 ㄱ자형으로 자리잡았고 안마당을 중심으로 광채가 ㄴ자로 배치되어 튼 ㅁ자형 배치를 보이고 있다. 一자형 사랑채·대문채·사당채가 있으며, 사랑채 앞에는 헛간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헐리고 없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인데 왼쪽으로 사랑채가 있고 앞쪽으로 광채가 보인다. 광채의 오른쪽 끝에 있는 중대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의 평범한 ㄱ자형 집에 안방의 뒤쪽으로 골방·뒷방·광을 둔 것이 경기도 사대부 집의 특이한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기단의 높이와 건물의 크기가 같으나 사랑채가 약간 앞으로 나가 위치하여 대문에 들어오는 사람이 바로 안채를 감지할 수 없도록 하였다. 사당채는 사랑채의 뒤편 한단 높은 터전에 따로 꾸몄다.

 

사랑마당과 안마당의 정원시설은 앞면이 툭 터져 전망이 시원할 뿐 어떠한 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지만 안채 뒤안에는 화단을 만들었다. 부엌 동쪽의 조그만 뒤뜰을 지나면 개울이 흐르고 수목이 울창하게 심어졌는데 아마도 인위적으로 만든 숲으로 여겨진다.

 

11.궁집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30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평내동 426-1

시 대 조선시대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가 구민화에게 시집가자 왕이 그를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북한강변에 위치한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어 자연적인 조경이 잘 이루어져 있다. 궁집이라는 칭호는 나라에서 재목과 목수를 보내어 집을 지었기 때문에 생겼다.

 

전형적인 ㅁ자형의 안채는 남향으로 자리하였는데, 대문을 들어선 정면으로 부엌·안방·대청이 있고 꺾어져서 오른쪽에는 건넌방·부엌, 왼쪽에는 아랫방과 사랑뒷마루, 대문 옆으로는 광 ·책방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의 서남쪽 귀퉁이에 있는 ㄱ자형의 사랑채는 안채의 사랑뒷마루와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방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사랑채와 안채는 한덩어리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문간채는 일찍이 헐린 듯하며 담장이 공간의 구분을 대신하고 있다.

 

이 집은 화길옹주가 시집가서 죽을 때까지(1765∼1772) 살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이렇게 절대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12.정약용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7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선생의 묘소이다.

 

16세에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민생을 위한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이후 새로운 학문인 서학에 흥미를 가졌다. 정조 13년(1789)에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형조참의를 지내면서 규장각의 편찬 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정조 16년(1792)에 거중기를 제작하여 수원성을 축조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순조 1년(1801) 신유박해 때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된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으로 옮겨진 후 순조 18년(1818)까지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선생은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고, 고향인 양주에 돌아와서도 여생을 오직 저술에 몰두하여『목민심서』·『경세유표』등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현재 묘역에는 선생과 부인 풍산 홍씨가 합장되어 있는데, 표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마련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 1쌍이 있다. 후에 묘 뒤로 담을 둘렀으며, 묘비도 1기 추가하였다.

 

13.흥선대원군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48호

지 정 일 1978.10.10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2

시 대 조선시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묘이다.

 

그는 철종이 후계자 없이 죽은 후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조대비와 힘을 합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뒤의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대원군이 되어 직접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안으로 세도정치 근절, 서원철폐, 세제개혁, 법전정비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밖으로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서양세력의 접근에 대해서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통해 통상요청을 거부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는 그들의 침략을 무력으로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여 백성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근대 문명의 수용이 늦어졌으며, 집권 후반기에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와 대립하게 되어 정치에서 실권을 잃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고양군 공덕리에 모셨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옮겼으며 1966년 4월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묘 주위에는 돌담이 둘러져 있고, 묘역은 2단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상단에는 둘레석을 두른 봉분과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이 있고, 하단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과 문인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14.수석리토성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94호

지 정 일 1986.09.07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수석동 산2-2

시 대 삼국시대

 

수석리토성은 ‘토미제’라 부르는 한강 옆의 낮은 산꼭대기에 있는 토성으로, 한강을 건너는 나루를 지키기에 알맞은 곳에 있다.

 

이곳에서는 주위의 아차산, 이성산, 남한산, 천마산, 수락산과 마을 앞의 나루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지세는 이곳이 성을 만들 당시 한강을 중심으로 한 전략적 요충지대임을 알게 한다.

 

반달모양의 성은 전체 둘레가 145m이며, 높이 4∼5m의 성벽은 흙을 다져 쌓은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높은 곳을 깎아서 만들었다. 성안에는 봉화를 올렸던 장소로 짐작되는 곳이 있으며, 삼국시대의 회청색 경질토기 조각들이 발견됨으로써 성을 쌓은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볼 때 수석리 토성은 삼국시대에 한강을 중심으로 한 군사적인 요충지로 사용되다가 조선시대에는 봉화를 올리는 통신기능을 지녔던 곳으로 추정된다.

 

15.덕릉마을 산신각

 

종 목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96.12.24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2리 산5

시 대 조선시대

 

산신각은 한국의 토속신인 산신 즉 산신령을 모시는 곳으로, 마을과 절을 수호하는 기능을 갖는다.

 

덕릉 마을에 있는 이 산신각은 약 300여 평의 대지에 마련한 높직한 단 위에 건립되어 있다. 앞부분은 비어있고 뒷부분에 방이 있는 전당후실의 구조로, 옆면에서 볼때 지붕선이 ‘사람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을 얹었으며, 양 옆으로 바람을 막아주는 풍판을 달아 놓았다. 산신각 전체에는 책걸이·꽃·‘희(喜)’자 무늬 등을 새겨 화려하게 꾸몄으나, 지금은 많이 퇴색되어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다.

 

후실 내부 정면에는 탱화풍의 산신도가 걸려 있는데, 화폭의 중앙에는 산신이 연꽃 모양의 부채를 들고 앉아있고, 왼쪽에는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복숭아를 들고있는 낭자와 차를 끓이는 스님, 동자 2명이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목재와 단청 및 장식이 다른 산신각에 비해 격식있게 건립된 것으로 보아 약 110년 이상 된 건물로 추정된다. 산신신앙·불교신앙·유교의례가 융화되어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져오던 민간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로, 지금도 매년 음력 1월과 10월 초하루 밤에 마을사람 중 1명을 뽑아 유교식으로 산신제를 조용히 지내고 있다 한다.

 

201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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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문화재청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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