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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아차산정보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2,024 작성일2010.03.21

님들...., 저 학교숙제인데요,아차산정보 알아오래요.

그래서 아차산 갈 수도 없고.., 님들이 답변해주면 좋겠네요

빠른시간 네에 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당(ㄳㄳ)

지식내공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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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5****
태양신
산, 계곡 2위, 등산, 암벽등반 3위, 강원도여행 3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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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은 높지도 빼어나지도 않지만, 산 위에 서면 서울시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산과 시가지 전체를 거의 볼 수 있다.

특히 굽이치는 한강의 푸른 물과 강변의 경관을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아차산은 워커힐호텔이 한강변을 바라보며 들어서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한편으로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삼국시대 백제의 산성이 남아 있는 곳으로 주목되는 유적지이기도 하다.

백제가 처음 오늘의 서울 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을 때 남하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막기 위하여 아차산에 성을 쌓았던 것이다.

이 성을 아차산성 또는 아단성이라 불렀는데, 백제 책계왕 1년(286)에 이를 중수하였으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漢城)을 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이 성 밑에서 목을 베어 죽인 바 있다.

이후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한강유역을 놓고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서로 쟁탈전을 벌였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장군도 신라에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고자 이 아차산성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설화가 전재지고 있다.

아차산에서는 백제의 유구와 고구려의 군사 보루와 석축 등이 오늘날에도 확인되며, 많은 석실고분군이 산재되어 있음도 볼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남경 오덕구의 하나로 각광받아 북쪽에서 남쪽으로 달려간 남행산으로 불리어 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왕조가 개창되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니 기존의 한양에 살던 주민들은 양주땅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곳이 동촌(東村) 대동리(大同里)인데 옮겨간 양주의 부치(府治)가 있던 곳으로 양주군 고양주면에 해당한다.

이곳이 곧 아차산의 남쪽 기슭인 것이다.

따라서 아차산은 풍수지리적이나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오늘날 북악을 주산으로 하는 도성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 때부터 아차산 서쪽 기슭은 사냥터로 각광을 받아 국립목마장이 설치되었다.

즉 사복시(司僕寺) 살곶이목장이 설치되어 이후 역대 왕들에 의해 광진구 뚝섬에 성덕정(聖德亭)과 화양정(華陽亭)이 마련되고 기마 군사들의 열무행사를 시행하였다.

이 목장의 동쪽 경계가 바로 아차산이었다.

또 지금은 모두 이장되었지만 일시나마 익종의 유릉(綏陵)이 아차산 용마봉 아래에 위치하였었다.

본래 유릉은 천장산(경희대 뒷산) 북동편에 있었는데, 헌종이 즉위한 뒤 그의 아버지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1846년에 이곳으로 능을 옮기고 일시 사복시목장을 폐지하였다.

그후 1855년 다시 검암산(구릉산)으로 옮겼다.

또 순종 황제의 황후인 순명황후(純明皇后) 민씨가 황태자비로 1904년에 세상을 떠나자 용마봉 자락에 유택을 마련하니, 이곳이 유강원(裕康園)으로 오늘날 어린이대공원 자리가 된다.

그후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남양주시 금곡의 유릉(裕陵)으로 옮겨졌다.

조선초에는 아차산 동남쪽에 태종의 후궁인 명빈(明嬪) 김씨의 묘역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아차산 남쪽에는 일찍이 한강을 건너는 광나루가 개설되어 도성에서 충청, 강원, 경상도로 향하는 교통로가 발달하였다.

따라서 흥인문과 광희문을 지난 교통로가 살곶이다리가 있는 전관원(箭串院), 광나루의 광진원(廣津院)으로 이어져 교통의 중심지 역활을 하였다.

아울러 기록에는 아차산봉수가 있어 남산 제1봉화에 연결되었다고 하는데, 실제 조사결과 봉수대의 위치는 신내동에 있는 봉화산인 것으로 밝혀졌다.

1950년 6·25전쟁 때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탈환을 목전에 두고 한강도하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어 9월 26일 국군제17연대 1대대와 3대대가 아차산 줄기를 따라 북진하여 오후 반나절을 지나서 용마봉을 점령하고 다시 292고지를 확보하였다.

이렇게 망우리고개에 도착한 국군은 진지를 구축하고 경춘국도를 차단하였다.

그러나 이날부터 아차산 일대에서 국군과 인민군과의 격전이 3일간 전개되어 인근 주민들이 아차산으로 피난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그리고 6·25전쟁에 전사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워커힐이 남쪽 넓은 한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아차산의 북쪽 능선으로 뻗은 망우산 기슭에 1933년에 공동묘지가 마련되었는데, 독립유공자와 일반시민의 묘역으로 오늘날 서울 지역의 유일한 묘지공원을 이루어 조상숭배와 애국선열의 뜻을 기리는 교육및 휴양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그후 아차산은 1970년대에 들어 아차산공원, 용마공원, 용마돌산공원 등 도시자연공원으로 조성되어 서울시민들의 위락및 휴양의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그리고 용마봉 정상에는 해발 높이를 측정하는 기준점이 설치되어 있어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정치가, 문인, 예술가, 역사적인 인물들의 묘소가 많이 산재되어 있다.

아차산에는 산책길을 겸한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특히 아차산공원쪽 산길은 산책길로 안성맞춤이다.

관리사무소로부터 204봉까지 이르는 산책로에는 송림이 우거져 있고 15분 정도 걸어 팔각정에 오를 수 있다. 

해 맞이 광장에 올라서면 발밑으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며 강남의 빌딩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광진구 구의동과 광장동에 걸쳐 2만 7천여평에 조성된 아차산공원은 지난 1977년에 지정된 자연공원이다.

능선을 따라 북쪽은 용마산과 연결되어 있다.

낙타고개를 넘어 구리시 방향으로는 온달샘이 있고, 정상에는 아차산성이 있다.

또한 울창한 숲과 완만한 암반으로 형성된 계곡에는 여러개의 약수터가 있어 산책하면서 목을 축일 수 있다.

관리사무소, 매점, 팔각정, 낙타고개, 아차산성, 장로회신학대학 입구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돌아오는데 30분 정도 걸린다.

그리고 지금은 울타리로 막혀 있지만 영화사 경내를 지나 미륵당을 거쳐 팔각정으로 오르기도 하는데, 곳곳에 화강암의 절리된 바위층이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외 아차산으로 오르는길은 워커힐 뒤쪽의 야외 휴식공간에서 곧바로 산능선으로 오르는 길과 포장된 길을 따라 가다가 구리시 아천동의 우미내 계류를 타고 대성암쪽으로 오르는 길이 있고, 구리시 교문동쪽으로 형성된 흰다리·아치울마을 뒷기슭으로 산에 오르는 길도 있다.

중곡4동 용마봉기슭으로 오르는 길 또한 잘 다듬어져 있어 많은 시민이 이용하는데, 이 길은 용마봉에서 아차산성의 정상이나 망우산쪽으로 종주할 수 있어 산책길 보다는 등산길로 알맞다.

아울러 용마봉 북쪽이나 망우산쪽의 접근로는 면목3동 한신아파트 남쪽길, 면목6동 서일공전 북쪽 보육원과 만민교회를 끼고 돌아 오르는 길, 망우3동 면북초등학교를 따라 용마종합궁도장이 있는 용마공원길, 망우1동의 주한연립과 현대빌라를 지나 묘지공원쪽으로 향하는 길과 묘지관리사업소를 지나 잘 포장된 순환도로 선상에서 능선을 따라 산정으로 오르는 길 등 아차산 일대 곳곳에서 산행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망우산과 용마봉 및 아차산성 정상을 따라 종주하는 등산길은 여유있는 하루의 산행이 될 수 있다.

1) 영화사(永華寺) 

영화사는 광진구 구의동에서 광장동으로 너머가는 고갯마루 왼편의 아차산 남서쪽 기슭 구의동 산 9번지에 위치해 있다.

절은 원래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양사(華陽寺)라고 이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절에 있는 미륵불이 고려말의 것으로 짐작되므로 늦어도 고려말 이전에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태조 4년(1395)에 이 절의 등불이 궁성에 까지 비친다고 하여 용마산 아래의 군자동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중곡동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화양사는 조선 후기에 번창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한성동역도(漢城東域圖)」에서 화양사는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회랑이 둘러져 있고 미륵당이 앞쪽에 자리잡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1851~1856년 사이에 편찬한 『여도비지(與圖備志)』 에도 화양사라는 절이 언급되어 있다.

그후 1907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영화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1992년 3월부터는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지금은 극락보전을 고쳐 짓고 선불장을 새로 마련하였다.

조선시대 세조가 지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기도 성취하였다는 전설이 담긴 미륵석불을 모신 미륵전이 자연암반 위에 세워져 있다.

 미륵불은 전신에 호분이 칠해져 있어 본래의 모습을 잘 알아 볼 수 없으며, 조각기법으로 보아 고려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삼성각의 독성탱화는 왼쪽 밑부분에 화기가 남아 있어 주목된다.

이에 의하면 1880년에 그려진 것으로 상궁 이씨 등 6명의 시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영화사 안에는 1980년에 세운 석가탄신일 공휴제정기념비가 있다.

영화사는 수령의 400년 느티나무 등 많은 아름드리 나무와 아차산 구민공원의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여 지역 주민의 심신단련의 안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2) 대성암(大城庵)

대성암은 아차산 동남쪽 215m 능선상에 한강을 바라보고 위치해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구리시 아천동 산 57번지에 해당된다.

대성암은 신라 진덕왕 원년(647)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고, 이름을 범굴사(梵窟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후 고려 우왕 원년(1375)에 나옹화상이 중창하여 대성암이라 하였다.

조선 영조 26년(1750)에 거사 방지성(方智性)이 폐허 터에 초가 암자 한칸을 세웠고, 그후 거처하고 있던 승려가 기와를 올렸다.

고종 19년(1882)에 임오군란으로 불에 탔고, 이후 연차적으로 중건하였다고 한다.

대성암 뒤편의 바위에는 자연 암혈(岩穴)이 있는데 이곳은 의상대사의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이 암혈로 인하여 범굴사라는 절이름이 붙은 것으로 생각된다.

속전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고 있을 때 매일 하오에 바위에서 천공미(天供米)가 나와 많은 대중에게 공양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양짓는 사자가 더 많은 공양미를 얻기 위하여 구멍을 더 뚫자 쌀뜨물과 타버린 쌀 서너섬이 나오다가 멎었다고 한다.

현재 바위 구멍 두 곳이 있다.

3) 아차산성과 장한성(長漢城)

광진구 광장동 산 16-46번지와 구의동 산 1-2번지에 걸쳐 있는 아차산성은 일명 아단성·아차성·양진성(楊津城)·광진성(廣津城) 등으로 불리운다.

그리고 1962년 워커힐호텔이 건립되면서 그 경내에 포함되었으며 1973년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는 서울시내 전역과 한강변 일대 풍납토성·몽촌토성·이성산성·남한산성·북한산성·미사리 선사유적·암사동 선사유적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아차산성에 대한 기록은 광개토왕비문의 영락 6년조에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공격하여 빼앗은 58성 가운데 아단성의 이름이 보이며, 광개토왕을 수묘하기 위하여 차출한 점령지 주민의 출신지로서 기록되어 있다.

또 백제 책계왕 때에는 고구려의 침구를 두려워하여 아단성과 사성을 수리하였다.

이렇듯 아차산성은 백제의 왕성이었던 한성의 방위에 절대적 비중을 가진 전략 요충지였다.

그리고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끈 군대가 한성을 포위 함락시킴에 따라 개로왕은 생포되어 아단성 아래서 처형되었다.

당시 아단성은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 군사진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뒤 77년간 한강유역을 통치한 고구려의 전방기지로서 기능하였다고 추측된다.

이렇듯 아차산성은 백제의 왕성이었던 한성의 방위에 절대적 비중을 가진 전략 요충지였다.

그리고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끈 군대가 한성을 포위 함락시킴에 따라 개로왕은 생포되어 아단성 아래서 처형되었다.

당시 아단성은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 군사진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뒤 77년간 한강유역을 통치한 고구려의 전방기지로서 기능하였다고 추측된다.

조선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 양주의 성지(城池)항에 의하면 아차산에는 양진성과 아차산고성이라는 2개의 성곽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진성은 아차산 동쪽 절벽의 광진 위에 구부려 한수에 임하고 있는데, 광주 평고성과 더불어 강을 격하여 상대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아차산고성은 “산정에 있는데 유지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양진성은 아차산의 지봉인 광나루 북방 약 100m 높이의 동남면에 위치한 광진성 즉 현재의 광장동 워커힐 후면에 있는 사적지를 가리키며, 「대동여지도」에 보이는 망우리쪽 아차산에 소재하고 있는 성곽을 아차산고성의 유지로 보고 있다.

아차산성은 석축성으로 기본형태는 테뫼식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산 정상부를 돌아가며 축성한 테뫼식과는 달리 아차산 능선 말단부의 남쪽 지역을 적절히 이용하여 작은 계곡이 포함되도록 함으로써, 성내에 우물과 작은 계곡이 흐르는 포곡형 산성에 가까운 형태이다.

이 성은 완전한 석축성으로 정상부에서 산 아래쪽으로 성벽 윗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토사가 덮여 원래의 축성형태를 알 수 없으나, 전체적으로 성벽의 윤곽이 뚜렷하다.

성곽은 아차산 남쪽 봉우리의 해발 205.5m 지점을 북쪽 장대지로 하여 등고선을 따라 축성되었다.

산성 전체의 축성형태는 약간 길쭉한 부정형의 6각형이며 전체 길이는 1,125m, 내부면적은 약 25,000평(133,700㎡) 정도이다.

그리고 성지 내에서 7개의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아차산성 내부에 대한 전체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채집된 유물은 많지 않다.

그 대부분은 기와편이며 소수의 토기편 중 고구려나 백제 토기로 추정되는 것도 한 두점 있지만 신라 토기류가 주종을 이룬다.

다음으로 아차산의 장성에 대해 살펴보자.

장성의 유구는 본래 뚝도 부근의 한강변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고지를 따라 아차산에 이르고 다시금 망우리에 이르는 산줄기를 따라 용마봉에 못미치는 벼랑바위산에 이르기까지 산마루를 따라 석성터가 있으며, 구리시 아천동까지 그 유구가 나타난다.

이를 장성 또는 장한성이라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고적조에 “장한성이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 여기에 중요한 진영을 두었으며, 고구려에 의해 점령당하였다가 군사를 동원하여 수복하고, 장한성가(長漢城歌)를 지어 그 공을 기리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성은 산 정상이나 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토성이나 석성이 아니고, 산정상을 지나 능선을 따라 일직선 형태로 축조된 성벽으로 하남시 춘궁리에 있는 이성산성과 축성양식이 같은 신라시대의 산성이다.

특히 삼국통일 전쟁수행을 위한 북진기지 가운데 군사적 요충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아차산 일원은 백제의 왕성이었던 풍납리토성과 몽촌토성을 한강 너머의 북안에서 보위해 주는 형세로서 아차산 능선에서 확인되는 보루가 주목된다.

아차산성 자체는 남쪽을 살피고 한강을 출입하는 선박을 통제하기 쉬우나, 북서쪽의 육로를 통한 남침에는 취약하다.

따라서 아차산 줄기를 따라 양쪽 평야지대로 뻗은 중곡동쪽 중랑천 방향과 그 반대편인 광장동쪽 아차산 지봉에는 방위목적을 가진 수많은 보루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목이 긴 항아리와 같은 고구려 토기가 보루나 보루로 추정되는 유구에서 출토되었다.

따라서 최소한 고구려 군대 주둔처로 인정된다.

이 보루의 연결선상과 관련하여 아차산 장성의 존재가 주목된다.

아차산 장성은 입지조건으로 볼 때 서쪽의 뚝섬 방향에서 침입해 오는 적에 대비하여 도성의 운명을 좌우하는 아차산성 일원의 방위에 기여하였을 것이다.

즉 아차산 보루를 연결하는 형식으로 길게 축조된 장성은 한강하구를 비롯한 서·북방향이 주방어 대상인 아차산 일원의 방어력을 한층 강화시켜 도성의 외곽을 보장하는 기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추정은 아차산 보루 주변에서 백제 토기편들이 다량으로 수습되었거니와 장성 부근의 지표상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또 아차산에서는 백제 고배편이 수습되기도 하여, 장성은 백제 때의 유구일 가능성이 크다.

4) 아차산 고분(峨嵯山古墳)

아차산 전역에 고분들이 산재되어 있다.

현재 확인된 파괴 고분만 해도 70여기 정도이며 파괴되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150여기가 훨씬 넘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분은 주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서 축조되었는데 확인되는 것들은 도굴로 인하여 대부분 파괴된 상태이다.

고분의 형태는 대체로 수혈식 석곽이나 석실분으로 대부분 풍화암반지대를 바닥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현재 노출된 고분에서 직접 출토된 유물은 없으나 파괴된 석곽묘 주변에서 상당량의 토기편이 채집되었다.

그중 해발 393m 용마산 최정상부의 서쪽 바로 아래부분에서는 고배·병·항아리·석제 방추차 등이 채집되었다.

이들 고배와 병 등 유물은 전형적인 신라토기로서 최근 조사된 자유로·통일동산·이성산성·호암산성·산본지역 고분군에서 출토된 신라 토기의 유형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우미내 마을 서편 바위산 정상부 해발 125m 지점에 고구려 집안의 적석총 옆에 있는 수인묘(守人墓)와 같은 횡혈식 석곽분이있다.

지형조건을 이용하여 넓고 편편한 바위 위에 석곽을 조성하였는데, 석곽은 장벽에 2매, 단벽에 1매의 대형 판석을 세워서 벽을 조성하고 천장에는 2매의 대형 판석을 덮었다.

석곽 내부의 규모는 길이 240cm, 폭 80cm, 높이 약 90cm 정도이다.

장축은 남-북향이다.

이처럼 능선 정상부 가까운 곳의 바위를 현실 바닥으로 무덤을 축조한 경우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형태이다.

5) 명빈(明嬪) 묘.

아차산 동쪽 기슭 구리시 아천동 산 14번지에 조선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의 묘소가 있다.

1991년 묘역과 주변 2,500여평이 사적 제364호로 지정되었다.

명빈 김씨는 김구덕(金九德)의 딸로 태종의 후궁이 되어 성종 10년(1479)에 세상을 떠났다.

묘는 민묘처럼 나지막하게 봉분이 조성되어 있고 후면에 ‘楊州□□面成化己亥七月初七日’이라고 새겨져 있어 1479년에 세운 것임을 밝히고 있다.

6) 살곶이목장.

아차산을 주봉으로 하여 그 서쪽 기슭에 조선시대 국립목장인 살곶이목장이 있었다.

당시 행정구역은 양주목 고양주면이었다.

1788~1802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조선 사복시 살곶이목장 지도」에 의하면 그 둘레는 약 20km에 이르는데, 여러 문헌기록에는 30~40리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살곶이목장의 구체적인 경계를 살펴보면 동쪽 경계는 아차산 줄기가 되고, 서쪽 경계는 오늘날의 배봉산으로부터 한양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구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된다.

북쪽 경계는 오늘날의 중랑교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중랑포 아래쪽에서 냇물과 벌판을 가로질러 면목리 위쪽의 아차산 줄기까지 이어지는 선이었다.

이 세 면은 명종 이전에는 목책을 세운 토성이었다가 그 이후에는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살곶이목장의 설치 기원은 태조 때 만들어졌다는 견해와 태종 때 생겼다는 견해가 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점차로 이루어진 것 같다.

살곶이목장에 대한 맨 처음 기록은 태종 13년의 목장 안의 민전(民田)에 대한 것이다.

그뒤 살곶이목장은 세종 때와 연산군 때 일시 폐지되었다가 다시 설치되었다.

첫째로 세종 때인 1424년 아마도 살곶이벌을 사냥터와 열무 장소로 전용하려고 사복마장을 살곶이에서 해주로 옮겼다가 1434년에 다시 살곶이에 설치하였다.

둘째로 연산군은 1504년 살곶이벌에서 목장을 없애고 그 땅을 내농포(內農圃)의 밭과 왕의 사냥터로 돌렸으며, 중종이 즉위하자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그 뒤 1788년 장용영(壯勇營)에 딸린 배봉진(拜峰鎭)이 목장의 경계가 지나가는 배봉산에 설치되었다.

이에 살곶이목장은 배봉진에 통합되었다가 장용영이 해체될 때 배봉진도 혁파되자 다시 독자의 감목관을 지닌 목장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400여년 동안 존속하였던 살곶이목장은 헌종 12년(1846)에 익종의 능인 유릉(綏陵)을 천장산에서 용마봉으로 옮겨옴에 따라 폐지되었다.

그런데 학자들은 아차산 줄기를 타고 남아 있는 살곶이목장 외곽시설의 유구를 삼국시대 성곽의 자취로 보기도 한다.

즉 서쪽의 뚝섬평야로부터 침입하는 적에 대비한, 즉 왕성의 운명을 좌우하는 아차산성 일원의 방위에 그 목적이 있었던 장성(長城)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장안평 이라는 지명을 지렛대로 이 유구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장한성(長漢城)으로 보기도 하고, 그외에 면목동 일대에 남아 있는 ‘궁뜰’이라는 지명과 중랑천가의 ‘장안평’이라는 지명을 인용하여 이 일대를 백제 초기의 ‘하북위례성’으로 보기도 하였다.

201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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