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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동을 빛낸 인물과 전통적인 문화, 음식으
wint**** 조회수 5,335 작성일2009.07.30

          

이거 제 방학숙제걸랑요...

요약해서 적어주세요

이상한글, 내공얌얌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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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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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동의 인물


태사묘 ∥ 삼태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


삼태사
   삼태사는 신라말기 안동의 성주 김선평(金宣平), 권행(權行),
장길(張吉)을 말한다. 이들은 930년(경순왕 4년) 후삼국이 패권을 다투던 역사적 전환기에, 함께 향병을 모으고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안동)의 병산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을 물리치고 고려왕조의
개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충렬공 김방경(1212 - 1300)
   김방경(1212~1300년)은 려몽연합군(麗蒙聯合軍)의 총사령관으로
   일본정벌에 참여했던 고려말의 인물이다. 자(字)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1212년(고려 강종 1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회곡리에서 태어났다.


   충렬공 김방경의 영정
   ∥ 무관복을 입은 부분 얼굴 확대.

 


불곡 이천

불곡 이천(1376 - 1451)
   본관 예안(禮安). 호 불곡(佛谷). 시호 익양(翼襄). 군부판서(軍部判書) 이송(李竦 )의 아들이다.
   1393년 별장(別將)에 임명되었다. 1402년 무과 초시에, 1410년 무과 중시에 각각 급제하여 동지총제(同知總制) ·충청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1420년 공조참판으로 세종의 명을 받아 경자자(庚子字)를 만들고, 1434년 중추원지사로 갑인자(甲寅字)를 만드는 등 세종대의 인쇄술 발달에 크게 공헌하였다. 1437년 평안도 도절제사로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의 설치를 건의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1438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간의(簡儀) ·혼의(渾儀) ·앙부일구(仰釜日晷) 등 천문
기구의 제작을 지휘했다. 1450년 중추원지사가 되고 중추원판사에 이르러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무신으로서 요직을 역임하면서 세종대의 과학기술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농암 이현보(1467 - 1555)
   본관 영천(永川), 호 농암(聾巖)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의 벼슬과 검열(檢閱)을 거쳐
   1504년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공박하여 안동으로 귀양 갔다. 1506년 중종반정 후 지평(持平)에 복직, 밀양·안동의 부사, 충주목사를 지냈다.
   1523년(중종 18) 성주목사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고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542년 호조참판, 이듬해 상호군이 되고 자헌대부에 올랐다. 1554년 중추부지사가 되었다.
   10장으로 전해지던 어부가(漁父歌)를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하며, 예안(禮安)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농암집’이 있다. 


농암 이현보

 


수운잡방 ∥ 조선시대 식생활문화를 알려주는 요리서 


탁정청 김유(1491 - 1555)
   김유(1491~1555)는 조선시대 식생활문화를 알려주는 귀중한 요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의 저자이다. 자는 유지(綏之), 호는 탁청정(濯淸亭)이며, 1491년(성종 22) 광산김씨 예안파의 파조(派祖)인 김효로(金孝廬)와 그의 부인 양성이씨(陽城李氏)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주로 안동군 예안면 오천동에 거주하며 집안을 돌보았다.
   김유는 사대부의 신분으로서 부녀자들의 관심사였던 요리서를 저술할 만큼 실용과 탐미를 적절히 조화해 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퇴계 이황(1501 - 1570)
   본관 진성(眞城).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 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경상북도 예안
(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李堣)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
(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박사(博士)·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1539년 수찬(修撰) · 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15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 · 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芑)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 1554년 형조·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계 이황 영정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기(氣) 이원(二元)으로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산서원(陶山書堂)을 설립하여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그의 사후인 1574년에 도산서원이 창설되었고 1575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송암 권호문 

송암 권호문(1532 - 158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이다.
   1549년(명종 4) 아버지를 여의고 1561년 29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564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이황(李滉)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은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이들로부터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만년에 덕망이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56세로 일생을 마쳤으며, 묘소는 청성서원(靑城書院) 뒤편 언덕에 있다.
   안동의 청성서원(靑城書院)에 제향 되었다. 

 

학봉 김성일(1538 - 1593)
   학봉 김성일은 1538년(중종 33)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아버지 김진(金璡)과 어머니 정부인 여흥민씨 사이의 4째 아들로 태어났다.
   1543년 여섯 살에 “효경”을 배우기 시작하여 19세에 퇴계의 문하로 들어간다.   이후 소수서원, 계상서당, 도산서원 등에서 퇴계에게 서경과 역학계몽,  주자서절요 등 성리학적 학문을 전수받고, 퇴계학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1568년 3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가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35세에 단종과 사육신을 왕과 충신으로 복위시켰으며, 40세에 명나라  외교사절로 다녀와 당시 중국과 외국의 문물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학봉신도비 및 묘방석

   41세에 홍문관 교리, 42세에 사헌부 장령이 되어 부정과 부패를 바로 잡고, 46세에 사간, 황해도 순무어사로 나갔다.   1588년에 종부시첨정을 제수받았으며 52세 되던 해인 1590년 3월 황윤길과 함께 일본 통신사 행렬에 부사로 참여하여 일본을 방문한 후 다음 해 2월 부산에 귀항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학봉은 경상우병사를 제수받고 경상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왜란 소식을 접한 후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고 의령의 곽재우, 진주의 김시민 등의 장수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왜국과의 전투에 임하였다.
   그리고 진주 대첩을 이끌어냈다. 내부의 갈등과 왜군과의 대비책으로 건강을 몹시 해친 학봉은 1593년 4월 29일 진주공관에서 숨을 거두었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선(錄選) 되었고 1607년 사림이 임천서원에 향사 되었다. 


서애 묘소

서애 류성룡(1542 - 1607)
   본관 풍산(豊山). 자 이현(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의성  출생. 이황(李滉)의 문인.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교리 ·응교(應敎)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建儲)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 경상 ·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편서에 '황화집(皇華集)', '정충록(精忠錄)' 등이 있다.  

정부인안동장씨(1598 - 1680)
   정부인 안동장씨는 임진왜란이 끝나지 않은 1598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의 봄파리 마을에서 퇴계의 학통을 계승한 아버지 경당 장흥효와 어머니 권씨부인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정부인 안동장씨는 아버지에게 “소학”과 “십구사략”등을 배웠다.
   40대의 아버지 경당 장흥효는 당시 영남사림의 최고의 학자였고, 수많은 학인이 경당에게 배움을 청하였다. 정부인 안동장씨는 이러한 가운데 학문을 틈틈이 배웠으며 특히 학인들이 모르는 부분까지 정부인 안동장씨가 깨우쳐 아버지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19세 때 정부인 안동장씨는 아버지 장흥효의 수제자인 8살 연상의 이시명과
   혼인을 치른다. 이시명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김해의 딸과 혼인한다.
   혼인 후 정부인 안동장씨는 전 부인인 김씨 부인의 자녀 1남 1녀 포함하여 모두 7남 3녀를 둔다.
   정부인 안동장씨는 퇴계의 학통을 잇는 학봉 김성일 - 경당 장흥효 -  (석계
   이시명)- 갈암 이현일 - 밀암 이재로 이어지는 중심에 있었던 여성이었다.


정부인안동장씨 영정

    말하자면 경장 장흥효를 아버지로, 석계 이시명을 남편으로 갈암 이현일을 아들로 둔 딸이자 부인이자 어머니였다.
   조선 후기 여성은 성리학적 인성론으로 말미암아 여성은 편벽한 성격을 가졌다는 편성론이 일반화되었다. 내외구분이  심화하여 남자는 정치사회활동에, 여성은 가사와 직조, 육아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그럼에도 농사와 같은 생산 활동은 남녀가 공동으로 부담하게 됨으로써 여성에게 사회적 부담이 편중된다. 17세기를 살다간 정부인 안동장씨는 이런 어려운 사회적 정황 속에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슬기롭게 이겨나가고 자녀교육을 충실하게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안면 대산 종가

대산 이상정(1711 - 1781)
   이상정은 목은 이색(1328-1398년)의 14대손으로 1717년(숙종37년) 고향인 안동 일직현에서 태어났다. 호는 대산(大山)이며, 본은 한산이다.
   14세에 외조부인 밀암 이재로부터 사사받으며 퇴계학문을 소개받게  된다. 그뒤 학문에 크게 힘써 문장율려 등 제도문물에 대하여 연구하고 경학에 침잠하게 된다. 그는 1735년(영조10) 25세 때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한다.
   1739년(영조14) 선생께서 29세 되던 해에 연원찰방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인 1740년(영조15)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일직으로  돌아와 대산서당을 짓고 제자교육과 학문연구에 몰입한다.
   1748년(영조23) 38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던 중에 ‘사례 상변통고’와 ‘약중편’을 편찬하였다.  

 


석주 이상룡(1858 - 1932)
   호 석주(石洲). 일명 상희(象羲)·계원(啓元). 경북 안동(安東) 출생이다.
   1905년 김동삼(金東三)·유인식(柳仁植)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부를  조직, 회장이 되어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쓰며, 강연회 등을 통하여 국민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간도(間島)로 망명,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 · 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열어 교포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1912년 계몽단체 부민단(扶民團)을 조직,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한족회(韓族會)를 조직, 동료들의 자치활동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조직에 참여하여 독판(督辦)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후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석주 이상룡 영정

 


육사 이원록 영정 

육사 이원록(1904 - 1944)
   호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또는 원삼(源三), 활(活). 경북 안동(安東) 출생.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위 자료는 '안동문화컨텐츠' 홈페이지에서 참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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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안동의 전통음식

 

 안동식혜 

안동식혜는 고기식해에서 생선종류가 빠진 것이 소식해(素食)가 되고 또 이 소식해에서 양념과 소금간이 빠짐으로써 반찬류에서 음청류에 속하게 되었다. 즉 안동식혜는 소식해에서 파생된 반찬이었으나 시대와 환경의 변화로 달고 물이 많은 음청류로 되어 물이 적은 식해(食)에서 물이 많은 식혜(食醯)로 변형되었다

안동식혜 재료는 찹쌀 혹은 멥쌀, 엿기름, 무, 생강, 고춧가루, 생수가 들어가며 유산균음료로 저온에서 후숙 할수록 유산균이 많고 3일 후가 가장 많으며 25일 후에도 여전히 젖산균음료로서 최고 수치를 유지한다.

소화 작용을 도와주며 고춧가루와 생강의 매콤한 맛과 무가 어우러져 후식으로 더 없이 좋은 음식이다. 

향토 음식으로 손님접대에 빼 놓지 않고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며, 안동의  식당에는 후식으로 나오는 곳이 많다.

 

 헛제사밥 


안동에서는 예로부터 많은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특히 기제사를 지내고 나서 제사상에 올렸던 여러 가지 나물을 얹어서 비빔밥을 비비고 여러 가지 산적과 해물을 곁들여서 제사밥을 먹게 되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고 제사밥과 똑같이 비빔밥과 산적 탕국등과 함께 먹는 것을 제사를 지내지 않은 제사밥이라고 해서 헛제사밥이라고 한다.

헛제사밥은 공부하는 유생들이 밤에 출출하면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서 제사를 핑계삼아서 헛제사밥을 해 먹게 된데서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등 유명 서원이 많은 안동지역의 유생들이 쌀이 귀한 시절 제사음식을 차려놓고 축과 제문을 지어 풍류를 즐기며 허투루 제사를 지낸 뒤 제사 음식을 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보편적이다.

요즘은 웰빙 열풍으로 우리나라 3대 비빔밥의 하나로 꼽히는 헛제사밥은 안동을 찾는 관광객들이 한번씩 꼭 맛을 보고 가는 먹거리가 되었다.
 
 간고등어 

옛부터 안동사람들은 70km 정도 떨어진 영덕 바닷가에서 해물을 구입한 뒤 해뜰무렵 걸어서 출발하면 중간지점인 지금의 안동시 임동면에 해질무렵에 도착을 했으니 그곳이 바로 "챗거리 장터"였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안동으로 옮겨 지면서 햇볕을 받고 소금에 절여져 "안동간고등어"가 되었다고 한다.

내륙지방에서 생선을 이용 지역상품화 하는 것은 매우 드믄 일로 그 맛은 구워도 비린내가 나지 않으며, 고소한 감칠맛이 일품이다. 간고등어를 만드는 데는 열 차례 이상이 손이 간다.

산지(부산,제주 등)에서 직송된 고등어를 우선 내장을 제거하고 맹물에 최소 1시간 이상 담가 핏기 뺀다음 왕소금을 치고 바닷물 염도와 같은 소금물에 서너시간 담갔다가 다시 '물빼기'작업을 하고 그 후 3~5도C의 숙성고에서 24시간 숙성시켜 소금기가 고루 배게 한다. 냉동고등어를 쓰지않고 연근해에서 잡은 생고등어를 그대로 사용해 등푸른 생선 특유의 맛이나고 청백색 빛깔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동 건진국시 



보통 국수라 하면, 언제든지 부담 없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지방에서는 국수가 귀한 손님에게 내놓던 음식에 속하였는데, 길한 음식, 장수하는 음식이라는 의미를 지닌 안동의 건진 국수는 안동의 명물음식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건진 국수는 말 그대로 삶은 국수를 재빨리 찬물에 건져낸 국수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안동의 건진 국수는 국수 한 그릇 달랑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밥과 계절야채, 각종 찬이 곁들어진다는 점이 특징인데, 매끈한 국숫발과 까슬까슬한 조밥이 서로의 맛을 돋울 뿐 아 니라, 쉽게 소화되는 국수의 허함을 보완해주고 있다.

그 맛이 깔끔하고 담백한 건진국수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서 사용한다는 점이다.

예로부터 안동에서는 구수한 맛을 내는 콩가루 음식이 발달하였고, 건진 국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밀가루와 생콩가루를 섞어 만든 손국수를 삶아 찬물에 건져낸 다음 시원한 [장국 : 토장국이 아닌 국물의 총칭. 열구자나 전골 등의 국물로 쓰는 간장을 탄 물]에 말아 고명을 얹어 담아내면 안동의 건진 국수가 완성되는데, 최근에는 주로 멸치를 사용하지만, 예전에는 꿩, 닭, 민물고기 등을 이용한 육수가 사용되어 계절 따라 다양한 국물 맛을 내왔다.


 안동 찜닭 



안동찜닭의 유래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옛날에는 도성안쪽을 안동네, 바깥쪽을 바깥동네라 불렀답니다. 그 동네 사이에는 상당한 빈부의 격차가 있었다고 합니다.

도성 안쪽 이란 지금의 사대문 안이지요. 도성 안쪽 사람들은 특별한 날에는 닭은 쪄서 먹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를 일컬어 도성 바깥쪽의 사람들은 호화스러운 도성 안쪽 사람들의 먹거리를 일컬어 안동네찜닭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안동네찜닭이 세월이 흘러흘러 점차 간략화 되어 지다 안동찜닭이라고 요근래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푸짐한 양과 적은비용으로 여러 사람이 정감을 나눌 수 있고 특이한 맛으로 신세대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안동찜닭은 안동 구시장 찜닭 골목에서 그원조의 맛을 만나볼 수 있다. 조리과정에서 감자, 시금치, 대파 등의 야채와 한 입 크기로 토막친 닭고기에 당면이 어우러져 매콤하면서도 달콤하며 담백한 맛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음식이다.

[출처] 안동의 전통음식 - 윤태하 | 안동넷

 

 3. 안동의 전통문화

 

차전놀이 
  한국을 대표하는 남성대동놀이이다. 나무로 만든 긴 동체기구를 들고 싸움을 벌이는 것으로 그 장쾌한 맛과 힘으로 인하여 독일의 하노버 엑스포에 공식초청되기도 하였다.
  이 놀이는 안동의 역사와 관련깊은 전설을 가지고 있어 더욱 신비한 놀이로 흥미와 긴장감이 상존하는 한국놀이의 백미이자 세계최고의 놀이로 자부할 만한 것이다.

 

놋다리밟기 
   강강술래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대동놀이로 여성의 우아함과 집단무의 신명이 함께한다. 안동의 역사전설이 함께하는 이 놀이는 참여자들이 함께 판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더욱 즐거운 놀이이다. 남성대동놀이인 차전놀이와 더불어 안동을 대표하는 놀이이다.

 

 하회별시눗탈놀이 

 

별신굿이란 3·5년 혹은 10년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섣달 보름날(12월 15일) 내지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무진생(戊辰生) 성황님에게 별신굿을 해왔으며 굿과 더불어 성황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각시의 무동마당·주지마당·백정마당·할미마당·파계승마당·양반과 선비마당·혼례마당·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대내림을 하는데, 정월 초이튿날 아침 성황당에 올라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성황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성황대에 옮겨 달고 산에서 내려온다. 성황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고 비로소 놀이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로는 주지승·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이 있다.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해학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제사의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외에는 볼 수 없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또한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뒷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200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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