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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흥인지문역사점알려주세여☆
비공개 조회수 4,175 작성일2012.04.12
 흥인지문역사가무엇인가요. 꼭!알려주세여    잡솔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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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우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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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

1. 역사적 사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2. 보존 상태: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3. 가치와 의의: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동쪽은 오행상 木이요, 仁을 상징한다.
동대문만 유일하게 흥인지문이라 하여 之자가 첨가된 것은, 옛부터 동쪽이 낮아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으므로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첨가하였다.

4. 소재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5. 만들어진 시대: 조선시대

6. 전설이나 유래:

흥인지문이란 이름에 대한 유래
흥인지문의 경우 처음에는 흥인문으로 정했었는데 어떤 기인이 나타나 문이름에
갈지자를 넣으면 임금의 자손 중에서 목숨을 건질 수가 있다는 말을 해서
흥인지문으로 했답니다.

나중에 (병자호란때) 인조가 피란을 가시는데 청나라의 장수인 용골대가 갖고온
지도에는 흥인문으로 기록이 되어있어서 흥인문을 찾으러 지나간 사이에 인조가
흥인지문을 빠져나가 남한산성으로 갔다고 합니다.

201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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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j7****
식물신
사회, 도덕 28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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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사대문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 동쪽은 오행상 木이요, 仁을 상징한다.동대문만 유일하게 흥인지문이라 하여 之자가 첨가된 것은,옛부터 동쪽이 낮아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으므로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첨가함.

서대문(돈의문:敦義門) : 서대문은 본래 흥인지문에서 광화문을 통과하는 일직선상에있었으나, 그 문밖의 경사가 가팔라 통행에 지장이 많다하여, 세종 연간에 약간 남쪽으로 옮겨 문을 새로 내었다.그래서 오늘날 새문안이니 신문로(新門路)’니 하는 지명의 흔적을 남기고,그나마 일제에 의해 헐리어 없어졌다. 오행상 金이요, 義를 상징한다.

남대문(숭례문:嵩禮門) : 오행상 火요, 禮를 상징한다.
()자는 원래 염()자와 同一하며, 비상(飛上)을 상징한다. 이는 궁궐을 직면하는관악산이 불산이라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함이다. (지금 광화문 앞의 해태상도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북대문(홍지문:弘智門) : 북문은 오행상 土요, 智를 상징하며, 현재 삼청동 터널 위쪽에복원해 놓은 숙정문(肅靖門)이다. 그런데 이 숙정문은 본래 방위에 맞추어 문을 내기는했지만 문의 구실을 하지는 않았다. 숙종문 이후에는 풍수설에 의해, 북문을 열어 놓으면음기(淫氣)가 침범하여 서울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 진다 하여, 문을 만들어
놓기만 했을 뿐, 그곳을 통해 드나들지는 않았다. 대신 숙정문에 들어 서북쪽으로약간 비껴 오늘날 상명대학교 앞쪽에 홍지문(弘智門)을 내고 그쪽을 통해 다니게 되었다

 

 

축성

1395년(태조4) 한양(지금의 서울)을 방위하기 위한 도성을 쌓으려고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의 조사 측정을 실시하였다.

1396년(태조 5) 음력 1월 9일기공식을 올리고 춘추 2회에 걸쳐 전국에서 징발한 장정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 전후 98일 만에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따라 성의 축조를 완료하였다. 성의 길이는 9천 9백 70보(步 : 1보는 6자)이며 높이는 40자 2치로서 성을 97구(區)로 나누어 구마다 천자문에 따른 번호를 하늘 천(天) 자부터 조상할 조(弔) 자까지 붙였다.

성이 낙성된 후에는 배수지(排水地)로 5칸 수문(五間水門)·2칸 수문 등을 만드는 한편 성곽의 관문(關門)으로 숙청문(肅淸門 : 북대문)·흥인문(興仁門 : 동대문)·돈의문(敦義門 : 서대문)·숭례문(崇禮文 : 남대문)의 4대문과 홍화문(弘化門 : 동소문)·광희문(光熙門 : 수구문)·창의문(彰義門)·소덕문(昭德門 : 서소문) 4소문을 합해 8문을 완성하였다.

 

흥인지문은 동쪽의관문이며 함경도등 여진지역 출입시 사용한 관문

 1396년(태조5년)에 처음 지어졌다. 1453년(단종1년)과 1869년(고종6년)에 고쳐지었다.

 

사대문의 이름은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신”에서 따왔는데, 이에 따라 동서남북의 사대문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지'智'를 대신하여 정'靖'을 썼다)이다(마지막 신은 고종 때 한양의 중심이었던 “보신각”의 이름에 쓰였다). 이때 다른 사대문의 이름이 석 자인 데 반해 흥인지문만 넉 자인데, 이는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 자로 지었다고 한다.

 

역사적가치

보물1호

 



 
문화재청자료

201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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