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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흥인지문
skgu**** 조회수 8,469 작성일2005.10.11

제가 급해서 그러는데요.......

흥인지문에 대한 많은 정보좀 알려주세요

그리고 흥인지문 가는길과(자세히,월계역),흥인지문에 대한 많은 이야기, 또 흥인지문에대한 전설 좀 알려주세요..... 이번주 목요일까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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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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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이다. 통칭 동대문이라고 한다. 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정동(正東)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으로 홍예문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아래층이 내삼출목외이출목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인데 쇠서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흥인지문의 이름의 유래 : 원래는 동대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흥인지문이란 원래 흥인문이라고 이름을 지으려고 하는데, 어떤 한 사람이 와서 "문 이름에 지를 넣으면 왕의 자손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해서 흥인지문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동대문이라는 이름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때, 이름을 맘대로 바꿨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흥인지문의 관련된 이야기

 

4대문은 유교 이념에 의하여 만들어 진건데요
흥인지문(興仁之門) 방위는 동쪽 의미는 어질고 착함을 뜻합니다
돈의문(敦義門) 방위는 서 뜻은 의로움을 나타내지요
숭례문(崇禮門) 방위는 남 뜻은 공손하고 예의 바름
소지문(昭智門) 방위는 북 뜻은 지혜로움을 말합니다
이렇게 유교의 인의예지의 덕목을 상징적으로 반영한거죠

 

보존 상태: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가치와 의의: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동쪽은 오행상 木이요, 仁을 상징한다.
동대문만 유일하게 흥인지문이라 하여 之자가 첨가된 것은, 옛부터 동쪽이 낮아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으므로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첨가하였다.


소제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만들어진 시대: 조선시대




도움되셨길 바래요~

200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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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흥인지문(동대문) 서울興仁之門(東大門)
지정번호
:
보물 제1호
지정연월일
:
1963년 1월 21일
 시 대
:
조선 고종 6년(1869)
 규모·양식
:
1동, 정면 5칸, 측면 2칸, 2층의 우진각지붕 다포집
 재 료
:
석조기단 목조
 소 유 자
:
국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69

서울흥인지문은 서울성곽의 동쪽 문으로서 인(仁)은 오행의 목(木)에 속하고 목은 동(東)에 해당하므로 흥인(興仁)은 곧 동방을 의미한다고 하며, 흔히 동대문(東大門)이라고 부른다. 또한 '흥인문'이 '흥인지문'으로 언제 개칭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철종 말까지의 ≪실록≫에는 흥인지문이란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에 고쳐 짓고 흥인문을 흥인지문으로 개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흥인지문은 문을 창건한 지 50여 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과 단종 원년(1453)에 일부 보수가 있었고, 그 후 400여년이 지난 고종 5년(1868)에 개축한 기록이 있다. 당시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공사를 완료한 다음 광화문 밖 좌우편에 나열되어 있는 의정부·호조·이조·중추부·사헌부 등의 관아를 중수하는 동시에 흥인문을 개수하였는데, 《고종실록》에는 동대문 전체가 썩고 상하여 지탱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개수하였다고 한다. 1958년 동대문 보수공사를 할 때 문루 천장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훈련도감(訓練都監)에서 공사를 담당, 고종 5년(1868) 10월 2일에 착공하여 고종 6년(1869) 2월 20일 정초(定礎), 3월 11일에 상량하고 같은 달에 완공하였는데, 문루가 매우 낮아 문지(門址)를 8척 돋우고 그 위에 새로 홍예(虹霓)를 쌓고 초루(譙樓)를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고종 5년의 흥인문의 공사는 완전히 개건한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옹성도 고종 5년의 문루 건축 때에 새로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그 형태가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높은 기둥을 일렬로 배치하고 위·아래층의 큰 들보는 모두 이 기둥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천장은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흥인지문은 다른 문과는 달리 옹성(甕城)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은 곡성(曲城) 또는 치성(雉城)이라고 하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성문을 둘러쌓은 작은 성으로서 적을 방어하고 지키기에 편리한 것이다. 동대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공하였다.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이 옹성을 쌓아서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흥인지문 주변의 성벽은 일제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융희 2년(1908) 3월부터 동대문 북쪽과 남쪽의 성벽을 철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광무 3년(1899) 5월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가 개통되면서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가는길 : 1호선 / 4호선 동대문역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국보1호 밑에다가 지하철을 뚫어 놓다니 무식한넘들..

200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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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사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2. 보존 상태: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3. 가치와 의의: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동쪽은 오행상 木이요, 仁을 상징한다.
동대문만 유일하게 흥인지문이라 하여 之자가 첨가된 것은, 옛부터 동쪽이 낮아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으므로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첨가하였다.


4. 소제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5. 만들어진 시대: 조선시대


6. 전설이나 유래:

흥인지문이란 이름에 대한 유래

흥인지문의 경우 처음에는 흥인문으로 정했었는데 어떤 기인이 나타나 문이름에

갈지자를 넣으면 임금의 자손 중에서 목숨을 건질 수가 있다는 말을 해서

흥인지문으로 했답니다.

나중에 (병자호란때) 인조가 피란을 가시는데 청나라의 장수인 용골대가 갖고온

지도에는 흥인문으로 기록이 되어있어서 흥인문을 찾으러 지나간 사이에 인조가

흥인지문을 빠져나가 남한산성으로 갔다고 합니다.

200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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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이다. 통칭 동대문이라고 한다. 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정동(正東)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200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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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j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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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흥인지문(동대문) 서울興仁之門(東大門)
지정번호
:
보물 제1호
지정연월일
:
1963년 1월 21일
 시 대
:
조선 고종 6년(1869)
 규모·양식
:
1동, 정면 5칸, 측면 2칸, 2층의 우진각지붕 다포집
 재 료
:
석조기단 목조
 소 유 자
:
국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69

서울흥인지문은 서울성곽의 동쪽 문으로서 인(仁)은 오행의 목(木)에 속하고 목은 동(東)에 해당하므로 흥인(興仁)은 곧 동방을 의미한다고 하며, 흔히 동대문(東大門)이라고 부른다. 또한 '흥인문'이 '흥인지문'으로 언제 개칭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철종 말까지의 ≪실록≫에는 흥인지문이란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에 고쳐 짓고 흥인문을 흥인지문으로 개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흥인지문은 문을 창건한 지 50여 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과 단종 원년(1453)에 일부 보수가 있었고, 그 후 400여년이 지난 고종 5년(1868)에 개축한 기록이 있다. 당시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공사를 완료한 다음 광화문 밖 좌우편에 나열되어 있는 의정부·호조·이조·중추부·사헌부 등의 관아를 중수하는 동시에 흥인문을 개수하였는데, 《고종실록》에는 동대문 전체가 썩고 상하여 지탱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개수하였다고 한다. 1958년 동대문 보수공사를 할 때 문루 천장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훈련도감(訓練都監)에서 공사를 담당, 고종 5년(1868) 10월 2일에 착공하여 고종 6년(1869) 2월 20일 정초(定礎), 3월 11일에 상량하고 같은 달에 완공하였는데, 문루가 매우 낮아 문지(門址)를 8척 돋우고 그 위에 새로 홍예(虹霓)를 쌓고 초루(譙樓)를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고종 5년의 흥인문의 공사는 완전히 개건한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옹성도 고종 5년의 문루 건축 때에 새로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그 형태가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높은 기둥을 일렬로 배치하고 위·아래층의 큰 들보는 모두 이 기둥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천장은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흥인지문은 다른 문과는 달리 옹성(甕城)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은 곡성(曲城) 또는 치성(雉城)이라고 하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성문을 둘러쌓은 작은 성으로서 적을 방어하고 지키기에 편리한 것이다. 동대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공하였다.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이 옹성을 쌓아서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흥인지문 주변의 성벽은 일제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융희 2년(1908) 3월부터 동대문 북쪽과 남쪽의 성벽을 철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광무 3년(1899) 5월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가 개통되면서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가는길 : 1호선 / 4호선 동대문역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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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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