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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흥인지문에대해
shih**** 조회수 2,805 작성일2008.04.05

흥인지문의 역사적 가치와,보존상태 가치와 의의를 찾아주세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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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형식(多包系形式)의 우진각지붕건물. 보물 제1호. 일명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하는데, 서울 도성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397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함께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세워졌다. 1452년(단종 1)에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전반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의 기부(基部)는 화강암의 대석(臺石)을 잘 다듬어 무사석(武砂石 : 네모 반듯한 돌로 쌓아올린 축석)을 이루고 중앙에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어 출입구를 삼았으며 기부 위에 목조의 2층 누각을 세웠다.

문의 바깥쪽에는 무사석 한쪽에서부터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쳐서 적을 방어하는 작은 성)을 쌓아 적에 대한 방비를 견고히 하였는데, 도성 내의 여덟 개의 성문 중 옹성을 갖춘 것은 이 문뿐이다. 이 옹성 역시 창건될 때부터 마련된 것이며 고종 때 다시 개축되었다.

옹성의 벽은 두껍게 화강석 마름돌을 앞뒤로 쌓은 위에 내외 겹으로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돌리고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만들었으며 옹성 위로는 파수꾼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무사석 위 주변에는 누각을 둘러막은 여장을 벽돌로 쌓고 양측에는 작은 일각문 형식의 협문을 하나씩 두어 누각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가구(架構)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고 상하층의 대량(大樑)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고 맞끼어져 연결되었으며, 안쪽 네 귀퉁이에 고주를 세운 것이 그대로 연장되어 상층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이룬다. 상층의 변주는 하층 대량 위 중간쯤에 세워졌다.

바닥은 하층에는 중앙에만 마루를 깔고 상층은 전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벽의 하층은 모두 개방하고 상층은 사방에 판문(板門)을 달았다. 천장은 연등천장〔椽背天障〕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의 각 마루에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배치하였다.

이 문은 같은 도성 내의 숭례문(崇禮門 : 남대문)과 비교하여 건물의 규모나 형태는 거의 비슷하나, 남대문에 없는 옹성을 갖추고 있는 점이 주목되며, 남대문이 조선 초기의 양식적 특성을 갖추고 있는 데 비하여,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시대적 변천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대한민국 보물
지정 번호보물 1호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69번지
제작 시기조선 태조 5년
1963년 1월 21일 지정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의 문이다.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년)에 처음 지어졌다. 1453년(단종 1년)과 1869년(고종 6년) 고쳐 지었다.

조선총독부가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겨 1934년 보물 2호로 지정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본래 흥인지문은 동대문구에 속했으나, 수 차례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지금은 종로구 관할에 속한다.

명칭의 유래

사대문의 이름은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신”에서 따왔는데, 이에 따라 동서남북의 사대문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지(智)를 대신하여 정(靖)을 썼다)이다(마지막 신은 고종 때 한양의 중심이었던 “보신각”의 이름에 쓰였다). 이때 다른 사대문의 이름이 석 자인데 반해 흥인지문만 넉 자인데, 이는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 자로 지었다고 한다.

특징

화강석으로 된 홍예문의 축석 위에 지어졌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 다포계형식의 목재 중층건물이다. 숭례문이 조선 초기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 양식으로 되어 있어 서로 대비된다.

200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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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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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 보물 제1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 : 1棟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종로구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도성을 쌓을 때 같이 짓기 시작하여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다.

흥인지문은 도성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문화재이다.

200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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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2. 조선시대

 

3.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4. 흥인지문이란 이름에 대한 유래
흥인지문의 경우 처음에는 흥인문으로 정했었는데 어떤 기인이 나타나 문이름에
갈지자를 넣으면 임금의 자손 중에서 목숨을 건질 수가 있다는 말을 해서 흥인지문으로 했답니다.
나중에 (병자호란때) 인조가 피란을 가시는데 청나라의 장수인 용골대가 갖고온 지도에는 흥인문으로 기록이 되어있어서 흥인문을 찾으러 지나간 사이에 인조가 흥인지문을 빠져나가 남한산성으로 갔다고 합니다.

 

5.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동쪽은 오행상 木이요, 仁을 상징한다.
동대문만 유일하게 흥인지문이라 하여 之자가 첨가된 것은, 옛부터 동쪽이 낮아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으므로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첨가하였다.


 

6. 잘모르겠어요 ㅠㅠ

 

7.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200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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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경상남도 진해시에 있는 동
위치경남 진해시
문화재진해 사화랑산 봉수대(경남기념물 186)
본문

원래 웅천군()에 속한 지역으로, 명동이라 하였다가 1908년(융희 2) 창원군() 웅천읍에 편입되었다. 1910년 마산부제 실시로 마산부()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창원군 진해면 명동리가 되었다.
1931년 진해면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55년 진해읍이 시로 승격함에 따라 진해시 명동리가 되었다. 1973년 7월 리가 동으로 바뀌면서 명동이 되었다. 명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웅천동 관할하에 있다.

원포동()과 죽곡동()을 포함하여 진해국가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죽곡천(900m)과 죽곡서천(500m)이 경유한다. 곰섬(일명 )·굿지남찌거리·메주섬(일명 모자섬)·벗섬(일명 )·소구리섬·음지도(지도리()·초리도() 등의 섬, 맛방우·선바우·옷방우 등의 바위, 옛마을인 삼포(), 야산인 봉오터, 곰고지고개 등이 있다. 굿지남찌거리섬은 굿을 하고 남은 찌꺼기를 버렸다는 데서, 옷방우는 선녀가 목욕하고 나서 옷을 벗어 놓은 곳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데서, 봉오터는 봉화터가 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유적으로는 웅천명동왜성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성으로 둘레 365m, 높이 1~2m로 80m 높이에 있고 무기도 생산한 것으로 추정한다. 노거수로는 팽나무가 있는데 수령 95년, 높이 9m, 둘레 64㎝이다.

문화재로는 진해 사화랑산 봉수대(경남기념물 186)가 있다.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
지정번호보물 제1호
지정연도1963년 1월 21일
소재지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시대조선시대
서울 흥인지문 / 서울 종로구 종로6가. 조선시대. 보물 제1호.
본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의 우진각 지붕이다. 통칭 동대문이라고 한다. 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정동()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이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으로 홍예문()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栱)는 아래층이 내삼출목() 외이출목()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인데 쇠서[]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2008.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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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형식(多包系形式)의 우진각지붕건물. 보물 제1호. 일명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하는데, 서울 도성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397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함께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세워졌다. 1452년(단종 1)에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전반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의 기부(基部)는 화강암의 대석(臺石)을 잘 다듬어 무사석(武砂石 : 네모 반듯한 돌로 쌓아올린 축석)을 이루고 중앙에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어 출입구를 삼았으며 기부 위에 목조의 2층 누각을 세웠다.

문의 바깥쪽에는 무사석 한쪽에서부터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쳐서 적을 방어하는 작은 성)을 쌓아 적에 대한 방비를 견고히 하였는데, 도성 내의 여덟 개의 성문 중 옹성을 갖춘 것은 이 문뿐이다. 이 옹성 역시 창건될 때부터 마련된 것이며 고종 때 다시 개축되었다.

옹성의 벽은 두껍게 화강석 마름돌을 앞뒤로 쌓은 위에 내외 겹으로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돌리고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만들었으며 옹성 위로는 파수꾼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무사석 위 주변에는 누각을 둘러막은 여장을 벽돌로 쌓고 양측에는 작은 일각문 형식의 협문을 하나씩 두어 누각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가구(架構)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고 상하층의 대량(大樑)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고 맞끼어져 연결되었으며, 안쪽 네 귀퉁이에 고주를 세운 것이 그대로 연장되어 상층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이룬다. 상층의 변주는 하층 대량 위 중간쯤에 세워졌다.

바닥은 하층에는 중앙에만 마루를 깔고 상층은 전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벽의 하층은 모두 개방하고 상층은 사방에 판문(板門)을 달았다. 천장은 연등천장〔椽背天障〕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의 각 마루에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배치하였다.

이 문은 같은 도성 내의 숭례문(崇禮門 : 남대문)과 비교하여 건물의 규모나 형태는 거의 비슷하나, 남대문에 없는 옹성을 갖추고 있는 점이 주목되며, 남대문이 조선 초기의 양식적 특성을 갖추고 있는 데 비하여,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시대적 변천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대한민국 보물
지정 번호보물 1호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69번지
제작 시기조선 태조 5년
1963년 1월 21일 지정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의 문이다.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년)에 처음 지어졌다. 1453년(단종 1년)과 1869년(고종 6년) 고쳐 지었다.

조선총독부가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겨 1934년 보물 2호로 지정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본래 흥인지문은 동대문구에 속했으나, 수 차례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지금은 종로구 관할에 속한다.

명칭의 유래

사대문의 이름은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신”에서 따왔는데, 이에 따라 동서남북의 사대문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지(智)를 대신하여 정(靖)을 썼다)이다(마지막 신은 고종 때 한양의 중심이었던 “보신각”의 이름에 쓰였다). 이때 다른 사대문의 이름이 석 자인데 반해 흥인지문만 넉 자인데, 이는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 자로 지었다고 한다.

특징

종목 : 보물 제1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 : 1棟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종로구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도성을 쌓을 때 같이 짓기 시작하여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다.

흥인지문은 도성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문화재이다.

화강석으로 된 홍예문의 축석 위에 지어졌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 다포계형식의 목재 중층건물이다. 숭례문이 조선 초기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 양식으로 되어 있어 서로 대비된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흥인지문의 경우 처음에는 흥인문으로 정했었는데 어떤 기인이 나타나 문이름에
갈지자를 넣으면 임금의 자손 중에서 목숨을 건질 수가 있다는 말을 해서 흥인지문으로 했답니다.
나중에 (병자호란때) 인조가 피란을 가시는데 청나라의 장수인 용골대가 갖고온 지도에는 흥인문으로 기록이 되어있어서 흥인문을 찾으러 지나간 사이에 인조가 흥인지문을 빠져나가 남한산성으로 갔다고 합니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에 우진각지붕의 건물이다.

서울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동쪽에 위치하였다.

1396년(태조 5)에 완성되고, 1453년에 다시 고쳤으며, 이것이 조선 말기까지 계속 존속되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고쳐 지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화강암의 무사석으로 홍예문(虹蜺門)을 만들고 그 위에 2층의 누각(문루)을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돌리고 있으나 이것도 고종 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때문에 숭례문은 조선 초기의 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흥인지문은 조선 말기의 건축 양식을 각제 된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판문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를 일렬로 배치하였는데 위아래층의 대량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하고 있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아래층이 내삼출목 외이출목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인데 쇠서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말기의 쇠퇴된 수법을 보인다.

보물 제 1호이다.

다른 사대문은 모두 세 글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흥인지문만 네 글자인 것은 서울의 동쪽이 지세가 약하기 때문에 지(之) 자를 넣어 기를 보충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200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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