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캔스피크" '잉글리시' 배우는 할머니들

최미랑·심윤지 기자
지난 13일 서울 성북구 동선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실버왕초보영어교실’ 수업에서 수강생들이 강사의 발음을 큰 소리로 따라하고 있다. 최미랑 기자.

지난 13일 서울 성북구 동선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실버왕초보영어교실’ 수업에서 수강생들이 강사의 발음을 큰 소리로 따라하고 있다. 최미랑 기자.

위안부 할머니의 미 의회 피해 증언 과정을 그린 영화 <아이캔스피크>에서 주인공 나옥분 할머니(나문희 역)는 영어를 배우려고 무진 애를 쓴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다. 영어를 배우는 과정은 험난했다. 그러나 열정만큼은 젊은이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현실 속 할머니들도 영어를 배운다. 거창한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배움을 향한 열망은 뜨겁다. 영어로 된 아파트 이름을 읽고 싶어서, 해외여행 가서 음식을 주문하려고, 손주들에게 자랑스러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서…다양한 이유로 영어 ‘열공’을 하는 이들을 만났다.

“여러분, 롸이스(rice)는 ‘쌀’이고 라이스(lice)는 ‘이’예요. ‘밥 주세요’ 해야 되는데 ‘라이스’하면 안 되겠죠? 그건 벌레를 달라는 소리지!”

강사 최범자씨(73)가 이렇게 말하자 열네 명의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지난 13일 오전 ‘실버왕초보영어교실’이 열린 서울 성북구 동선동주민센터 2층 강의실. 강사가 단어를 읽으면 돋보기 안경을 쓴 수강생들은 입술에 힘을 바짝 넣고 이를 따라했다. 이날의 진도는 알파벳 피(P)부터 알(R)까지였다.

이 영어교실은 지난 7월부터 문을 열었다. 10년 정도 영어 강사를 했던 최씨가 노인 대상 영어강의를 자원봉사로 하고 싶다고 주민자치회의에서 제안한 것을 주민센터가 받아들여 강좌를 개설했다. 참가비는 무료,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1시간 동안 ‘쓰면서 배우는 알파벳과 발음’이란 시중 교재를 가지고 공부한다.

“선생님 발음이 너무 좋아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땐 그렇게 안 했어요. 쌀도 뭐 그냥 ‘라이스’ 이렇게 했지.” 이렇게 말하는 강미현씨(63)는 성북구 석관동에서 한 시간을 걸려 영어 수업을 들으러 온다. 집에서 모시던 시어머니가 치매로 고생을 하다 지난해 세상을 떠나자 강씨는 “나도 내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어릴 적 좋아하던 영어공부를 다시 해 보자 싶어 수소문한 끝에 이곳을 찾아냈다. 월요일 아침이면 우선 시아버지 아침상을 챙겨 드리고, 화장할 새도 없어 기초화장품만 바르고 후다닥 집을 나온다고 한다.

“옛날에 시골서 여자는 학교를 안 보냈어. 겨우 초등학교밖에 못 나왔어. 영어를 모르니까 핸드폰 할 때도 굉장히 불편할 때가 많아요. 컴퓨터도 그렇고.” 이행자씨(73)는 길에서 만난 외국사람에게 길 안내는 해 줄 정도로는 영어를 하게 됐으면 한다. 자녀들과 외국여행을 갈 때, 식당에서 음식 주문을 한 번 영어로 해 보는 것도 희망사항이다. 이씨는 “욕심은 있는데 맘과 같이 잘 안 되네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학생 조영자씨(73)도 초등학교만 다녔다. 배움에 대한 갈증은 계속 남았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다. “환갑 되기 전에는 주부학교도 열심히 다녔어요. 2년간 다녔는데 영어는 영 안 되더라고. 좀 더 다니고 싶었는데 딸을 결혼시키느라 늦게 등록했더니 이미 사람이 꽉 차서 더는 못 다녔어.” 자꾸 잊어버리는 알파벳을 여기 와서는 그래도 좀 읽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쇼핑할 때가 제일 불편해. 메이커 이름도 다 영어로 돼 있잖아요. 알고서 찾아다니고 그래야 될 것 아녜요. 간판같은 것도 그렇고. 배우고 싶어, 계속 배우고 싶어.” 조씨가 말했다.

강사 최씨에게도 수업은 보람찬 시간이다. “‘아이파크’ 아파트를 바로 앞에 가서도 찾지 못했다는 수강생이 있었어요. 한글이 아니고 영어로 써있으니까 이름을 읽지를 못 한 거예요. (수강생들이) 이제는 간판 같은 것은 좀 눈에 들어온다고 하더라고요. ‘메이드 인 재팬’, ‘메이드 인 차이나’같은 것도 알아볼 수 있어 좋다고 하고요.”

다음날인 14일 오전 서울 강서구 강서영어도서관에서도 배움의 열기가 한창이었다. ‘왕초보실버영어’ 초급반의 이날 참가인원은 19명. “보이(boy)!” 강사 최인영씨(43)가 칠판에 적힌 단어를 발음해 보이자 따라하는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교실에 울려퍼졌다. 수강생들은 새로 배운 단어는 공책에 연필로 꼭꼭 눌러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졸거나 딴청피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지난 14일 오전 서울 강서구 강서영어도서관에서 열린 ‘왕초보실버영어’ 초급반 수업에서 두 참가자가 영어동요 ‘머리어깨무릎발’을 부르며 손동작을 하고 있다. 유명종 PD.

지난 14일 오전 서울 강서구 강서영어도서관에서 열린 ‘왕초보실버영어’ 초급반 수업에서 두 참가자가 영어동요 ‘머리어깨무릎발’을 부르며 손동작을 하고 있다. 유명종 PD.

매주 화요일 열리는 이 영어교실의 참가비는 분기당 4만5000원. 초·중급 2개반에 정원은 각각 20명이다. 강지순 영어도서관장은 “원래 1개 반을 운영했는데 사람이 많아져 2개 반으로 분반했다”며 “등록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마감되고 지금도 증원 요구가 높지만 여력이 안 돼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인천이나 김포 등지에서 부러 찾아오는 수강생들도 있다. 강 관장은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처럼 영어가 우리 일상에 너무 많이 스며있어 영어를 모르면 요즘은 문맹이나 다름없다”며 “우리는 익숙해서 잘 모르지만, 영어를 배우지 못한 어르신들은 고충을 많이 토로하신다”고 말했다.

김정자씨(75)는 배운 것을 손주들에게 써먹는 재미로 수업에 나온다. 지난 추석에는 “아이엠 글래드 투 미트 유(I am glad to meet you·만나서 반가워)”하고 인사를 건넸더니 아이들이 “우리 할머니가 최고”라며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같은 반 이양숙씨(64)는 노르웨이인 사위와 대화하고 싶어 영어를 배운다. “나이스, 베리 나이스!”라고 해 준다는 사위의 응원은 이씨에게 큰 힘이 된다. 1년을 공부하자 이제 영어에 자신감이 좀 붙었다. 지난 4월 손주들이 놀러왔을 때는 드문드문 알아듣는 말도 생겼다.

중급반 송정옥씨(59)는 수업이 있는 화요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누구 엄마’, ‘몇호 엄마’로 불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본인만을 위해 쓰는 시간이 흔치 않아서다. 1년 남짓 영어를 배웠다는 송씨에겐 롤모델도 있다. 지난해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만난 한국인 할아버지다. 은퇴 후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는 그는 영어가 유창했다. “그 분을 보면서 ‘저렇게 살고 싶다, 나도 한 번 배워 보자’ 결심을 했죠. 수업 때는 집에 가서 꼭 예습 복습 해야지 하는데…살림하는 엄마이다 보니 지난주 가방을 그대로 가지고 올 때도 있어요.” 송씨는 이렇게 말하며 멋쩍게 웃었다.

참가자들은 나이와 상관 없이 배우는 것, 그 자체가 즐겁다고 입을 모았다. 초급반의 ‘청일점’ 조성봉씨(69)는 “새로운 단어 하나 알았을 때, 그게 참 뿌듯하다”고 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옆에서 김정자씨가 “그렇지, 그게 진짜 재미지다”며 맞장구를 쳤다. “우리도 열심히 배워야 멋쟁이 할머니로 남을 수 있는 것 같아.”(이양숙씨,) “우리는 머리를 써야 해. 좋은 세상에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지!” 김씨의 이 말에 급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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