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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수양대군의업적에는뭐가있나요?
비공개 조회수 31,903 작성일2011.05.10

수양대군의업적에는뭐가있나요?

 

지금 제가 책을 읽고 있긴 하지만

 

혹시나 내가 수양대군의 업적 중 놓친 부분이 있으면

 

좀 보강 할려고 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냥 긴글 적어주셔도 되지만

 

그냥 짧게 년도랑 적어 주시면 정보를 더욱 감사히 쓸께요.

 

P.S 많이 적어주신분것을 채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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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루
초인
철학, 심리철학, 문화, 예술 52위, 사회문화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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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조 ·병조판서(吏曹兵曹判書),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하면서 병마권을 장악하고 좌의정에 정인지(鄭麟趾), 우의정에 한확(韓確)을 임명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 찬양의 교서를 짓게 하였다. 1455년 단종이 선위(禪位)하게 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치적에는 괄목할 만한 것이 많다. 그리고 왕권을 확립한 뒤 지방의 수신(帥臣- 병마절도사)은 그 지방출신의 등용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이를 대체시키자 이에 반감을 품은 함길도 회령출신 이시애(李施愛)가 1467년에 지방민을 선동하여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세조는 이 반란을 무난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수립하였다.

 

  ① 의정부(議政府)의 정책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육조(六曹)의 직계제(直啓制)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1467)을 계기로 유향소(留鄕所)를 폐지하고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승정원의 기구는 점차 강화되어 이러한 추세하에서 1468년에는 원상제(院相制)의 설치를 보게 된 것이다. 이 원상은 왕명의 출납기관인 승정원에 세조 자신이 지명한 삼중신(三重臣-신숙주, 한명회, 구치관)을 상시 출근시켜 왕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 결정하도록 한 것이니, 이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다단한 정무의 처결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또 후사의 장래문제도 부탁하려는 의도에서 설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② 국방력 신장에 힘써 호적(戶籍) ·호패법(號牌法)를 강화, 진관체제(鎭管體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방위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中央軍)을 5위(五衛)제도로 개편하였다. 북방개척에도 힘써 1460년(세조 6) 북정(北征)을 단행,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두만강 건너 야인(野人)을 소탕하게 하고, 1467년(세조 13) 서정(西征)을 단행, 강순(康純) ·남이(南怡)·어유소(魚有沼) 등으로 건주(建州)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하삼도(下三道) 백성을 평안 ·강원 ·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고 각도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

 

  ③ 경제정책에서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과전을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수입을 늘렸다. 또한 궁중에 잠실(蠶室)을 두어 비(妃)와 세자빈으로 하여금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 《금양잡록(衿陽雜錄)》《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주해(蠶書註解)》 《양우법초(養牛法抄)》 등의 농서를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④ 성삼문(成三問)등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자 집현전을 폐지하였으나 문교면에도 진력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그는 즉위 전에 《역대병요(歷代兵要)》 《오위진법(五衛陣法)》을 편찬했으며, 1465년(세조 11)에는 발영 ·등준시(拔英登俊試)를 두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다.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훈사십장(訓辭十章)》 《병서대지(兵書大旨)》 등 왕의 친서를 저술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등의 사서(史書)를 편찬하도록 했다. 국초 이래의 《경제육전(經濟六典)》《속육전(續六典)》 《원육전(元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 등의 법전과 교령(敎令) ·전례(典例)를 종합 재편하여 법전을 제정하고자 최항(崔恒) ·노사신(盧思愼)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성종때 완성을 보게 한 것은 그의 치적 중에서도 특기할 만하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세조 7)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信眉) ·김수온(金守溫) 등에게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등 불경을 간행하게 하는 한편, 《대장경(大藏經)》50권을 필인(畢印)하기도 했다. 그의 능은 경기 남양주시의 광릉(光陵)이다.

  그리고 세조 즉위 해 8월에 집현전직제학(集賢殿 直提學) 양성지(梁誠之)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의 지리지(地理誌)와 지도를 찬수(撰修)하게 하였으며 11월에는 춘추관(春秋館)에서 《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비록 의롭지 못한 행위로 왕위에 오르고 상왕이 된 자신의 조카의 작위를 격하시킨 뒤 다시 그를 죽여서 큰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후 스스로 뉘우치고 정사에 몰두하여 재위 14년간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조선 초기의 왕권 확립에 공헌이 많았다. 글씨에 뛰어났다는 평도 있다.

세조의 치세 동안 신권이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왕권은 조선 역사상 최고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아닌 강압적인 철권 통치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새로운 인재들을 과감히 발탁하기 보다는 한명회, 신숙주등의 측근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또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양정이나 남용신처럼 무조건 가차없이 죽여 버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해준 공신들을 대부분 죽인 할아버지 태종에 반해, 세조는 공신들을 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대하여 결국 조선의 당파 싸움을 최초로 시작한 훈구파의 형성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201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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