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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전주에서전해오는이야기
w468**** 조회수 4,818 작성일2011.04.27

전주에서전해오는이야기좀알려주세요....

(실화)

재미있는가짜이야기면책택않합니다.

전주에유명한사람이야기를해주세요.

(최명희씨이야기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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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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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1.노루목

 

남고산 꼭대기가 승암산을 바라보며 손살같이 곤두박질치며 내려오다가 좁은목 못미쳐 까무라친 형국이라 하는데 이 때 놀란 것은 바로 노루라고 한다.

또 승암산 꼭대기가 서북쪽 발산(鉢山)을 돋아놓고 한 가닥을 슬쩍 비껴 사뿐히 내려앉은 듯한 형세인 한벽류 부근을 옥류동이라고도 한다.

이 곳 옥류동 터를 멀리서 바라보면 대숲을 끼고 호랑이 한 마리가 엎드려 있는 형국인데 노루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놀다가 목이 말라서 물있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호랑이를 보고 깜짝 놀라 기절 초풍하여 숨을 곳을 찾아 날뛴데서 노루목이라고 불리어 오고 있다.

 

2.도마다리

 

고려 중엽인 8백여년 전, 조셋(현 초포) 마을에 사는 경주 김씨 문중은 수대를 이은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으나 인심이 가마귀 욕심이라 가난한 이웃을 돕기는 커녕 표독스럽기만 했다.

한 예로 스님들이 시주를 받으러 마을에 들르면 시주는 고사하고 콩주머니 전대를 머리에 묶고 물을 부으면 콩이 불어 머리가 쪼개어질 듯 아픈 대퇴고문을 하여 스님을 내여 쫓는 일들을 김씨 문중 청년들은 업으로 알았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옥동자 스님 한 분이 마을을 찾아가 확인하려고 시주를 청했더니 청년들이 달려들어 옥동자 스님에게까지 대퇴고문을 하여 말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자비를 내려 주려는 스님들을 박해하는 고약한 청년들의 버릇을 고쳐 주기로 마음을 작정한 옥동자 스님은 김씨 문중 선산을 두루 살펴본 즉 기린봉에 연결된 와우항 허리에 6기의 김씨 선조의 묘가 안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역시 명당 자리에 묘를 쓴 덕으로 부자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을로 내려와 주변을 살펴본 즉 구수(구시)다리라고 불리우는 다리가 있어 이의 명칭을 바꾸면 액을 당하리라고 판단하고 도마다리라고 하기로 하였다.

도마다리라고만 하면 허리가 잘리듯 명당과 마을이 떨어지는 것으로 예견한 스님은 구수다리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다리를 건너는 행인에게 동전 1량씩을 주면서 「도마다리 잘 건넜구나」라고 한 마디씩 하라고 일러주었다.

또한 인근 마을에 시주를 나서는 스님들에게도 시주를 해주는 사람마다 구수다리를 도마다리라고 하면 복을 많이 받게 되니 누구나 이 말을 하도록 하라고 일렀으니 며칠 지나자 구수다리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그저 할 일 없이 앉아서도 도마다리라고 씨부렁대니 도마다리는 금방 유명하게 되었다.

차츰 인심을 잃은 조셋 마을에는 아무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일꾼을 구할 수가 없으니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조셋 마을의 논밭은 잡초만 무성하고 점차 가세는 기울어져 생계가 막연하게 되었다.

문중 회의를 연 김씨촌 노인들은 집집마다 돈을 거둬 구수다리에서 큰 잔치를 벌여 주지육림에 인근 주민들을 초청했다.

완산부성내의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너도나도 많이 몰려 배불리 먹고 돌아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역시 도마다리라고 하면 먹을 것도 생기니 앞으로도 도마다리라고 해야겠구나」하였다니 조셋마을 김씨 문중은 놀라 자빠지고 말았다. 이후로 도마다리는 더욱 유명해졌다.

 

3.도무소

 

남고천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미륵산을 바라보며 관음사 부근 산허리를 굽어도는 부근을 두무소라고 부른다.

명나라 이여송의 막료 중에 당대 명유(名儒)이며 천문지리에 해박한 두사청이 있었는데 임란 때 이 곳 완산부성에 당도하여 산세를 보다가 명나라 중원의 서주와 흡사하다고 감탄하면서 서북쪽의 터진 곳이 있어 수적지지의 형세이며 남으로 뻗은 천혜의 요새지라고 했다.

이러한 산세에서는 비록 천만의 대적이 침노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침을 흘리며 감탄하는 나머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곳까지 답사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남고산의 기암괴석이 자유분망하게 흩어져 내린 풍치는 무질서하면서도 그 가운데 어쩌면 바위덩이라도 사람이 가져다 쌓아 놓은 듯한 정교하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물은 옥과 같이 맑아 청간수 같고, 심화가 끓는 듯 급히 흐르다가 잔잔히 흐르는 물에 비친 하늘은 청자빛을 머금어 꼭 신선대에 오른 듯 하여 두사청은 한동안 넋을 잃었다.

“과연 명소로다, 자고로 산자수명한 곳이 많다 한들 어찌 이 곳에 비길거냐 바로 이 자리가 명지(明地)로다”하며 경탄한 나머지 스스로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청간수를 마시고 있던 장군의 말도 덩달아 춤을 추니 하늘도 땅도 사람도 짐승도 한 몸이 되어 신선춤을 추었다.
그런 후로 사람들은 두사청이 진중을 떠나 자연에 취해 진중무를 추었다고 해서 이 곳을 두무소라고 불렀다고 전해오고 있다.

 

4.마당재

 

현재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정 주변을 가리켜 야단법석자리라고 한다.

흔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왁자지껄 수선을 피울 때 이런 경우를 야단법석을 떤다고 하는데 야단법석의 어원은 불가에서 나온 말로서 부처님께 올리는 불공예법 가운데 파격적인 집전의식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항간에서 걸핏하면 야단법석을 벌인다고 쉽게 빗대어 말을 하고 있는데 불가의 의식범절을 차분하게 따져 들어가면 지극히 엄숙하고 경건함 속에서 거행되는 집전 과정이 마당재인 것이다.

완산부성 밖의 사고사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사찰에는 4월 초파일이 아니더라도 연중 계절따라 불전 의식이 계속되었는데 불교문화가 꽃피울 때라서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불도들을 한꺼번에 다 법전에 수용할 수 없었다.

각 사찰의 스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어찌하면 좋을 거냐고 몇날 며칠 숙의한 끝에 소위 합동 집전을 하는데 중지를 모아 넓은 터를 구하게 되었다.

상업고등학교 부근의 나지막한 구릉지대가 적격지로 선정되어 야단에 법석을 마련했다고 하여 야단법석이요, 넓은 마당에서 재를 지냈다고 하여 마당재(齋)라고 한 것이 오늘날가지 마당재라고 알려졌다.

완산부성내의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나는 지금 마당재에 간다」고 말한 것은 목적을 말한 것이 행선지까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5.명재골

 

명주배의 집산이라고 해서 명지골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당초 이 곳은 소나무가 우거지고 인적이 드문 골짜기로 도적무리가 날뛰던 소위 우범지대로 할 일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드나들지 않던 곳이다.

조선조 말엽인 1894년 갑오경장 때 난을 피해온 선비들이 인적이 드문 이 곳에 하나 둘 정착하고 생활하다 보니 화전만으로는 연명을 할 수 없게 되자 뽕나무를 심고 누에고치를 시작했다.

북문 밖에 사는 한 노인이 명주 베짜기를 잘한다는 소문을 염탐한 선비들은 그 노인을 모셔다 놓고 요즘말로 특별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원래 성정이 고운 선비들이었고 하루가 급한 것도 아닌 터라 한올 한올 명주베 짜기에 정성을 다한 결과 어느 다른 지방에서 생산된 명주베보다 올이 가늘고 옷감이 좋아 나무랄데 없는 일품이 되었다.

차츰 선비들이 짠 명주베의 이름이 나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한적했던 골짜기에는 명주베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들끓게 되었고 이름없던 마을은 차차 명지골로 부르게 되었다.

일제 초기에는 선비들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매사가 눈에 가시처럼 보인 이 곳 명지골을 말살시키기 위해 인가 부근에 공동묘지를 만들어 하나 둘 마을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1978년 전주시의 제 6토지구획 정리사업으로 이제는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변모를 가져왔다.

 

6.물왕멀

 

누구나 택시를 타고 전고 뒤 물왕멀에 가자고 하면 어느 운전사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서슴없이 데려다 준다.

물왕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명한 곳이다. 20여년 전만 해도 좁은 고삿길이었는데 현재는 전주의 남북로가 관통 되었다.

견훤의 출생이 「지렁이」정기를 타고 낳다는 데서 전해오는 설화에 연유되고 있으나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후에 견씨로 고쳤다고 한다.

견훤이 진훤으로 발음되는데서 지렁이의 정기가 떠돌고 있으며 견훤은 이 물왕멀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궁궐을 지어 도읍으로서의 방위를 튼튼히 했으며 성곽을 쌓았다고 하는 데서도 물왕멀의 유래는 전해오고 있다.

 

7.미륵불골

 

옛날 난전 땅에 이두리라고 하는 노총각이 살고 있었다. 늙은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살림인데도 끼니를 끓일 보리쌀 한 톨이 없어 동냥질을 나섰다.

건장한 몸으로 어찌 막일이라도 하지 않고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날마다 비렁뱅이 신세를 면치 못하느냐는 부성 사람들의 질책이 무서워 달산 기슭을 그저 맴돌 듯 서성거리고만 있는데 대여섯 발이 넘는 장죽을 짚은 백발 노인이 나타나

“어찌 너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서성거리는고, 인생이 불쌍하여 소원 한 가지만 들어주겠노라. 자자손손 영화를 누리고 싶느냐 아니면 당대 영화냐 둘 중에 하나만 말하라”
하자 이두리는 서슴없이
”자자손손 뭡니까 우선 당장 배때기부터 원없이 채워 보고 싶소이다”
라고 하니 이두리를 가엾게 쳐다보던 백발노인은 이두리 손을 꼬옥 잡고 한 곳에 이르더니 죽장으로 땅방아를 찧으며 하는 말인 즉
“이 곳에 조상의 뼈를 묻으라”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두리는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으나 하여튼 부친의 백골을 당일로 파다가 이장을 했더니 몇 해 안되어 당대에 부럽지 않은 갑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고달산 서쪽 기슭 비바람 속에 묻혀 있는 미륵불을 옮겨 세우되 상체는 일월성신을 받게 하고 하체는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노인의 현몽대로 했다.

일설에 의하면 괴목이 서 있는 옆구리를 뚫고 솟아났다고도 하는데 하여튼 이두리는 당대의 소원을 성취했고 미륵불은 노인의 현몽대로 옮겨졌다.

오늘날 석불리(서서학동) 괴목나무 옆 미륵불이 바로 이두리 사연에 얽힌 미륵불이고, 이두리의 무덤도 그 부근에 있다고 하여 미륵불골 또는 이두리골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8.서낭댕이고개
 
우리 나라는 삼한시대부터 토속신을 섬긴 기록이 있다.

백제 때도 역대 임금들이 천지신에게 제사하며 시조 묘당을 세웠고, 고구려에서는 음사(淫杞)가 많았고, 신라시대 역시 묘를 비롯하여 왕묘를 세우고 명산 대천을 섬겼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선황신제사가 추가되더니 조선조시대부터는 민간신앙의 서낭댕이라고 하여 마을의 터를 지키는 소박한 신앙이 내려왔다.

사직단은 토, 곡의 신을 섬기는 곳이며 국토의 안태와 오곡의 풍요를 빌었고 기우(祈雨), 방역을 위한 고사가 행해졌다.

이로 보면 성황당은 시민생활 깊숙히 파고든 유일한 민간신앙이다.

전주의 성황사는 고려 신종 2년때 전주목의 사록겸 장서기인 이규보가 기린봉 북록에 세우고 성지의 수호를 치제 한데서 비롯되어 조선조시대에 이르러는 민간신앙으로 무병장수 입신영달 먼 길 떠나는 길손의 무사를 비는 등 생활 속에 파고 들었다.

전주에서는 이 곳에 처음 성황사가 세워졌고, 성황당으로서는 가장 번창한 곳이라고 해서 서민들의 말로 서낭댕이라고 불리웠다. 

 

9.용머리고개

 

마한의 기운이 쇠잔할 당시 민가에서 머리는 하나인데 몸둥이가 둘이 달린 소를 낳은 이변이 생겼다. 일관이 말하기를 일수이신이 태어나고 홍수가 범람하는 것은 용왕이 크게 일어날 징조라고 하자 인심은 날로 흉흉해졌다.

이 때 전주천 물은 좁은목에서 폭포로 떨어진 물이 지금의 다가산 밑에서 급히 소(沼)를 이루어 물이 많았고 물살 또한 급류였다.

일수이신의 송아지가 태어난 것은 일본관헌의 농락이었고, 이 전주천에서 자란 용이 천년을 기다려 승천하려고 안간힘을 쓰느라고 전주천 물을 모조리 삼키고 하늘에 오르려고 힘을 한번 쓰다가 힘이 빠져 떨어지고 말았는데 사실은 힘이 빠진 것이 아니라 천년에서 하루가 모자란 것이었다고 한다.

이 때 용이 떨어진 곳은 완산칠봉의 계곡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사람이 다니지 않은 원시림이었다.

몸부림치다가 승천하지 못한 한을 품고 용의 머리가 지금의 용머리고개에 떨어졌으며, 이 후로는 우거진 송림이 정리작업을 한 듯 깨끗하게 오솔길을 만들어 줌으로써 오늘날은 경목선이 되었고 용머리의 형상이라고 하여 용머리고개라고 했다.

 

10.추천교

 

4백여년 전 가르내(현재의 하가마을)일대는 전주 이씨들이 집단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비록 생활은 어렵다 하더라도 화목하고 효성이 지극했다. 추탄의 부친 달성공이 중병으로 몇 달 째 누워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위독한 사경을 당하게 되었다.

인근 비석날(현재 팔복동 버드랑주)에 거주하는 명의 소식을 듣고 선걸음에 달려가 동의보감에 의한 처방에 따라 명약첩을 받아들고 급히 귀가하는데 때 마침 뇌성벽력을 치며 폭우가 쏟아져 내려 삽시간에 전주천은 범람했다. 추탄은 암담한 가운데 촌각을 다투는 부친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앞뒤를 가릴 것 없이 홍수가 넘쳐대는 전주천에 뛰어들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냐! 제방을 넘실대던 물살이 양쪽으로 쫘악 갈라지면서 추탄이 걸어 갈 길이 트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 저것 가릴 겨를이 없는 추탄은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와 숯불에 약을 정성스럽게 달여 시각을 다투는 부친의 입술을 적셔드리자 잠시 후 전신을 흥건히 적시는 땀을 흘린 부친은 숨을 급히 몰아쉬고 난 뒤 마침내 기사회춘하여 완쾌되었다.

대홍수로 넘실대던 냇물은 추탄이 건너간 다음에 합쳐져 흐르게 되므로 그의 지극한 효성은 하늘도 도왔다는 인근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했을 뿐만 아니라 효행의 귀감이 되어 마을 주민들은 힘을 모아 나무다리를 놓기로 했다. 오늘날 추천교의 자리가 된 나무다리를 놓았을 때도 추탄의 「추」자를 따서 추천교라고 했다. 냇물이 갈라진 웃마을을 상가리(웃가르내), 밑으로 갈라진 마을은 하가리(아랫가르내)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다.

1925년 콘크리트 암거 교량을 건설하고, 옛 이름대로 추천교라고 했는데 팔복동 황방산 밑 추천대를 중건, 그 효행을 기리고 있는데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지의금부사, 사헌부, 대사헌, 추탄선생, 조대비' 라고 새겨진 비는 추천교를 흐르는 물을 지켜보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는 듯하여 보는 이들의 감회를 솟구치게 해주고 있다.

 

11.한벽당과 지네

 

옛날에 지금 한벽당이 서 있는 바위 벼랑 아래는 몇 길도 넘는 깊은 소를 이루고 있었다. 이 소의 깊은 바위그늘에는 커다란 괴물이 살고 있었는데, 해마다 단오날이 되면 처녀를 뽑아 이곳에 던져 제사지내지 않으면 온 고을이 언제 화를 입을지 몰라 전전긍긍 가슴을 죄이며 살아야 했다.

이 괴물은 신출귀몰하여 밤이면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무사로 변하여 말을 타고 중바위산성(견훤산성)의 험한 바위를 단숨에 오르내리곤 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잡아죽이려 뒤를 쫓아도 아무도 볼 수 없고 따를 수도 없었다.

때 마침 늙은 홀아비인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효심이 지극한 처녀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있으나 갸날픈 어린 딸의 힘으로는 아버지의 약값 마련은커녕 그날그날 끼니를 이어나가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처녀는 생각다 못해 사또를 찾아가 몸값으로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고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게만 해주신다면 소녀가 소에 몸을 바쳐 귀신을 제사하는 제물이 되겠다고 말하였다.

단오날이 가까이 오자 매일같이 성황사에 올라가서 엎드려 빌었다.
"제발 소녀의 정성으로 아버님 병환이 낫게 되어 편안히 사실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
라고 정성스럽게 기원하였다.

마침내 전날밤에도 처녀는 목욕재계하고 마지막 축수를 하기 위해서 호젓한 성황사로 올라갔다. 눈을 감고 손을 모아 한참을 빌고 있는데 어슴프레 성황대왕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너의 지극한 효성으로 너의 집에 좋은 영화가 올 것이니 안심하고 돌아가서 아버님을 잘 구완하도록 하라"

이날 밤 사또도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해마다 무고한 처녀를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커다란 악습이요, 그 괴물을 잡아 없애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이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그 귀신을 무찔러 다시는 화가 없게 하고 이 악습도 사라지게 하소서 하며 빌다가 어느덧 잠이 깜박 들고 말았다. 그랬더니 비몽사몽 중에 웬 백발노인이 사또 앞에 나타나더니 한벽당 밑 소에다가 소금가마니를 묻어 성을 쌓으면 고을 안이 평안해질 것이라고 일러주더니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렸다.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그러나 노인이 현몽이 하도 생생하고도 신기해서 즉시 관아의 벼슬아치들을 비상소집하여 소금창고를 풀어 있는대로 들고가서 한벽당 소에 묻으라고 일렀다. 밤새도록 물살이 요동치다가 아침에 보니 길이가 열발도 넘는 해묵은 지네 한 마리가 소금국에 잔뜩 간해져서 죽어 떠올랐다. 이 괴물은 바로 지네였던 것이다.

새삼 처녀를 제물로 바칠 까닭이 없게 된 것은 물론이다. 그뒤부터 고을은 아무 탈이 없게 되자 고을 사람들은 그 처녀의 효성을 신이 돌봐준 덕이라고 칭송하였다.

 

12.호운석

 

전라북도 전주엔 호운석이란 바위가 있다. 호운의 글자는 호랑이 `호', 떨어질 `운'자 인데 이 바위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라는 이와 얽힌 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안사가 젊었을 때였다. 마을의 두 청년과 들놀이를 가게 되었다. 맑은 공기와 멋진 경치와 함께 술과 음식을 들며 흥겹게 놀았다. 그런데 그렇게 놀던 중 이었다. '어흥!' 엄청나게 큰 소리가 진동하였다. 세사람은 그만 놀라 일어섰다. 집 채 만한 호랑이가 앞에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뒤로 돌아 도망치려는 생각을 하였으나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떡 버티고 있었다. 꼼짝없이 당하게 될 세사람이었다. 호랑이는 무서운 눈초리로 셋을 번갈아보았다.

그러자 한 사내가 바위 틈 새로 숨자고 낮게 읊조렸다. 그러나 호랑이에게 틈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있는 다른 사내가 거절 하였다. 그런 중 이안사는 호랑이와 맞서 계속 눈싸움을 벌였다. 이상히도 호랑이는 덤비지 않고 소리 지르며 어슬렁 거렸다. 이안사는 곧 호랑이가 원하는 사람이 있음을 느끼기 시작 하였다. 그걸 두 사내에게 말하자 그 두사내는 당장 호랑이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었다.
"이놈 호랑아, 네놈이 원하는 사람이라도 있느냐?"

이안사가 소리치자 놀랍게도 호랑이는 알아 들었는지 대답같은 울음을 울었다. 이안사는 사내들에게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나머지를 위해 희생하자고 말한 뒤 각각 윗도리를 벗게 하여 자신의 것과 함께 호랑이에게 던졌다. 호랑이가 고르는 옷의 주인이 호랑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긴장의 순간이 지나고 킁킁 거리던 호랑이는 이안사의 옷을 물었다.
"잘 있게나. 친구들..."

그는 말을 마치고 호랑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호랑이는 등을 쭉 폈다. 타라는 눈치였다. 이안사는등에 올랐다. 그러자 호랑이는 마구 달렸다. '우르르 꽝!' 엄청난 소리에 이안사는 뒤로 돌아 보았다. 뒤에 버티고 있던 바위가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남아 있던 두사내는 그만 깔려버렸다. 호랑이는 이안사를 마을까지 태워주었다. 그 바위가 이후 호운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201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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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전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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