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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저 방학숙제로 진주의전설을 찾아와라하는데 진주의 전설이뭔지가르쳐주세요
kimd**** 조회수 3,264 작성일2011.08.15
저 진주의 전설은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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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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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전설)

 

1.나막신쟁이의 날

 

나막신쟁이 날이란 진주지구만이 쓰는 절기의 말로서 한겨울이 다가고 동지섣달 스무이튿날을 말하는데 겨울이 다 간 듯한 속에 마지막 제일 추운날을 말한다. 서부경남에서만이 쓰는 절후로서 서울이나 그 외의 도시에서는 듣지 못하는 말이다. 우리가 음력으로 24절기를 따지는데 겨울철의 것으로 입동,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 등이 있다. 나막신쟁이 날은 대한도 다 지난 다음 가장 모질게 추운 날씨를 말하는데 이 나막신쟁이 날에는 정말로 가난이 서럽고 모진매를 단돈 석냥과 바꾸어 맞다가 죽은 나막신쟁이의 애틋한 전설이 하나 있다.

 

지금부터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기 수백년 전 말띠고개 언덕바지에 마음은 착하기가 흥부보다도 곱고 사람됨이 유순한 나막신쟁이가 살고 있었다. 나막신이라고 하면 지금의 우화니 장화니 하는 것으로서 나무를 깎아 만든 밑이 높은 나무신을 말하는데 옛날에는 이것이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 신는 신이다. 살림이 구차하고 식구는 많아서 생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가난도 못 따라 온다는 속담이 있지만 못하는 사람이 한밑천 모아서 잘 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막신이 잘 팔리는 여름도 가고 눈이 오는 겨울철도 다 지나 입춘이 오려는데 나막신도 팔리지 않으니 하루 세끼가 아니라 한끼의 입도 큰 걱정이었다.

장날이라 하나 별 신통한 수도 없이 돈 못 번 빈손으로 탈래탈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때 마침 성내에 사는 부자가 어떻게 잘못되어 관가에서 곤장 서른대를 맞게 되었는데 대신 매 맞을 삯 군을 찾는다는 것이다. 우연히 주막집 앞을 지나다가 이 말을 듣게 되었으니 끼니를 굶게 된 나막신쟁이는 귀가 번쩍 띄었다. "여보게 박생원 성내 그 아무개 부자 있지 않나" "어! 있고 말고 그것이 어쨌다는 건가" "허-참 어떻게 된 셈인지 관가에서 매를 맞게 되었는데 미리 짜 놓았는지 대신 매맞을 사람이 나오면 대신 가서 매를 맞아도 된다네 그려" "여보게 그럴 수 있나 대신 매맞을 사람이 바보 아닌 다음에야 누가 공짜로 나서겠나-" "아닐세 미리 돈주고 짜놓은 것이라 매도 사려 때릴 뿐 아니라 곤장 서른대를 대신 맞아 주면 돈 석냥을 더 주겠다네 그려-"

 

이런 수작의 말이 오고 가는 것을 듣고 있던 나막신쟁이는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들한테 달려가서 "여보소 에나 매를 대신 맞으면 돈을 석냥 주는거요?"하고 케 어 물으니 "그거야 내가 돈줄사람이 아니니 잘 모르지만 오늘 저녁까지 관가 사람이 그런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소" 아무튼 그 부잣집을 찾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바로 대신 매맞을 사람을 찾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막신쟁이는 스스로가 돈석냥에 몸을 팔아 관가에 가서 매를 맞기로 했다. 물론 이때에 그 부잣집에서는 애처로이 생각하고 일찍 저녁을 먹여서 호출장을 대신 들려 관가로 보냈다. 평소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나막신쟁이가 한끼니를 잘먹은들 피골이 상접하고 영양실조의 몸이 갑자기 회복 될 수가 없었다. 부모와 아내,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 하는 일념에서 단돈 석냥과 곤장 서른대와 바꾸고 보니 그만 나막신쟁이는 매에 못이겨 넘어져 넋을 잃고 말았다. 한참만에 정신을 차린 나막신쟁이가 말띠고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만 매 맞은 것에 견디다 못해 죽고 말았다. 나막신쟁이가 죽자 마자 이상하리 만큼 겨울날씨 치고는 매섭고 모질게 바람이 불고 추웠다. 집에서 기다리던 가족들은 밤이 되어도 착실한 집주인이 돌아오지 아니하자 찾으러 나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다음날 손에 돈 석냥을 꼭쥐고 있었으니 뒷소문과 함께 기둥을 잃은 온식구의 슬픔은 어떠했겠습니까?

나막신쟁이가 죽은 그 날로부터 꼭 일년이 되면서 세세연년 반드시 가장 추운날이 되돌아 오니 언제부터인가 이날을 진주사람은 나막신쟁이날이라 부르게 되었으니 바로 동지섣달 스무이튿날 음력으로 제일 마지막 장날을 말하는 것이다.

 

2.돌팔매꾼 조씨

 

함안에 살았던 조씨는 편모 슬하에 성장하면서 밥만 먹으면 산으로 올라가 돌팔매질을 했다. 그의 돌팔매질은 나중에 포수 경지에 까지 이르러 나는 새나 산짐승을 잡아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다. 이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도 별 수 없이 왜군에 쫓기는 몸이 되어 진주성으로 밀려왔다. 진주성에서 그의 솜씨는 그 진가를 발휘했는데 그의 돌팔매에 이마를 맞고 쓰러진 왜군은 1백 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3.용다리의 슬픈 짝사랑 (중안동)

 

동성동 쪽에서 남강으로 내려가는 길을 다시 왼쪽으로 돌아 동쪽으로 10m쯤 가면 지금은 땅에 묻혀서 보이지 않지마는 예전에 그 자리에 용머리가 양쪽으로 붙여 있던 돌다리가 하나 있었다. 진주시의 고적보존을 위해 용다리를 파내어 옛 모습대로 찾아내자는 여론이 크게 일어난적이 있다. 이 용다리는 그 옛날 진주성의 동문을 들어오는 길목이었으며 40∼50년 전에는 소전 거리였다. 이 용다리에는 머슴이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하여 미쳐서 남강에 빠져 죽은 슬픈 이야기가 하나 남겨져 있다. 머슴이 상전의 딸을 사랑했다면 옛날에 능지처참 감이었다니 어디 돌쇠라는 성도 없는 상놈이 양반 집 규수를 얼굴인들 맞댈 수 있었겠습니까, 관찰사 밑에 이씨라는 군수가 있었는데 아들 복이 없었던지 딸만 셋이 있었다.

 

그런데 둘째딸이 불행히도 출가하여 남편이 죽자 집에 돌아와 수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때의 관습제도가 개가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니 아마 시대를 추측하건대 고려 초기인 듯 하다. 그때는 남몰래 보자기로 씌워서 밤중에 과부를 훔쳐 가는 보쌈 이외는 개가시키는 양반 집은 상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돌쇠는 군수의 딸이 돌아온 뒤부터는 더욱더 열심히 일하고 시중을 들었으나 그때부터 돌쇠의 눈엔 이상한 핏발이 서고 군수딸을 만날적마다 몸가짐이 이상하고 어느때는 멍청한 날이 많았다. 그러나 사랑은 계급도 신분도 체면도 없는 듯 독수공방을 지키던 군수의 딸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친절히 보살펴 주는 돌쇠가 어쩐지 모르게 좋아졌다. 그러나 어떠한 세상이라고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 질 수 있었겠습니까? 지척이면서 만리보다 먼 상사병에 걸린 두 남 여는 벙어리인양 가슴만 태우고 손목 한번 못 잡아 보고 군수의 둘째딸은 시름시름 하다가 죽고 말았던 것이다.

 

울지도 못하고 미칠 것 같은 돌쇠는 성내에서 선학재 넘어 장사 지내러 가는 길목인 용다리 위에서 무심결에 도랑물에 자기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물에 비친 자기얼굴이 꼭 죽은 귀신 같다가 죽은 군수 딸 얼굴 같기도 하여 "아씨-"하고 고함치다가 그만 미쳐 버렸다. 함께 가던 하인이나 일꾼들이 아마 아씨가 죽어서 슬퍼하는 줄만 알았지 짝사랑하고 있는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군수도 딸을 잃고 이곳에 정이 떨어지자 충청도로 벼슬자리를 옮겨가며 용다리를 건너가는데 뒤 따라와야 할 돌쇠를 부르니 보이지 않기에 사람을 놓아서 찾아보니 벌써 돌쇠는 다리 옆 고목에 목을 메고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 하나 일어났다. 여태까지 조용하던 용다리 밑 개천에서 수천 마리나 될 듯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며 마치 미친 돌쇠가 중얼거리며 우는 소리와 같았다고 한다.

 

그 뒤부터 용다리 밑에는 진주에서 개구리가 제일 많이 모여 우는데 짝을 지은 남녀나 부부가 지나가면 개구리 울음이 끊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수십년전만 하여도 해 가진 다음에는 남강에서 혼자 빨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하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용다리를 두 번 왔다갔다하면 씻은 듯 병이 나았다고 하는데 돌쇠가 못 이룬 사랑을 남에게는 이루게 하는 지성이라고들 이야기한다. 6.25전 까지만 해도 돌쇠가 목메어 죽은 고목에 아들을 원하던 사람들이 한식에 한번씩 제사를 지냈다고도 한다.

 

4.처녀골 (상대1동)

 

처녀골이란 시내에서 뒤벼리로 가는 강변도로 중간에 있는 산골의 이름인데 지금의 도동수리조합의 뒷골짜기를 말한다. 지금부터 3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씨조선의 중엽 그때 진주의 원님의 딸이 진의 지방호족인 함안 조씨의 부자 양반집에 시집가기로 혼담이 결정되었다. 이때의 진주 원님이란 곧 관찰사로서 벼슬이 높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도지사에 대당하고 더욱이 경찰권과 사법권 그리고 행정권 밖에도 입법권을 처리할 수 있었던 어마어마한 자리의 벼슬이 있었다. 이분의 딸이 진주로 시집오게 되니 상대방의 선비집에서도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두 집에서 결혼의 신물인 납폐를 서로 마치고 혼인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시집올 원님의 딸이 갑자기 병이 들어 죽게 되었으니 일은 매우 딱하게 되었다.

 

그러나 옛날에는 지금과 달라서 납폐를 서로 주고받으면 시집간 것과 똑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가히 봉건제도하의 결혼관이나 윤리관을 엿볼 수 있다. 처녀는 죽었으나 이미 납폐를 끝낸 뒤라 할 수 없이 처녀골에 묘를 쓰고 묘막에 위폐를 모셨다. 함안조씨집의 아들은 혼약한 처녀를 잊은 지 오래되고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장원하여 진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말을 타고 처녀골 앞을 지나가는데 묘막의 위패가 갑자기 공중으로 뛰기 시작했다. 묘막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고 있는데 위패는 날아서 조도령의 도포자락 속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조도령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도 기이한 일이라 조도령이 사연을 자초지종 알아보니 뜻밖에도 자기와 혼약한 처녀의 위패임을 알게 되었다. 조도령은 이 신비로운 처녀 영혼의 행적에 전생과 현생, 후생의 인연을 깊이 깨달아 어른과 상의하여 조씨문중에서 제각을 지어 영혼을 모셔 달래고 제사를 지내니 조도령 또한 벼슬이 참판에까지 이르러 경사가 겹쳤다. 이 이야기가 산남(경남)지방에 퍼지자 모든 사람의 칭송이 높았다. 이때부터 이 골짜기를 처녀골이라 불렀다.

 

5.순천봉 (수정동)

 

수정반조라 하여 가을의 단풍철에 저녁노을의 햇빛이 수정봉의 단풍에 부딪치는 아름다움에 더욱이 저녁제를 지내는 연하사 종소리가 신비한 조화를 이루면 가히 진주12경의 하나라 할 것이다. 풍수지리설에 순천봉(하늘의 뜻에 따른다는 뜻)이 시내 복판에 앉았으면 이 도시는 굉장하게 발전하고 잘 산다고 했다. 옛날 어느날 새벽에 신선이 순천봉을 어깨에 메고 말띠고개를 넘어오고 있었다. 지금의 봉래 초등학교 (옛날 대안면) 앞에 새벽 일찍 빨래하던 아낙네가 신비스럽게도 큰산을 메고 오는 노인을 보고서는 깜짝 놀라서 "아이구 저 노인이 산을 메고 온다."고 그만 고함을 질러 버렸다. 그러자 이 소리를 들은 신선이 혀를 차면서 "이 요망한 계집 같으니, 하늘의 뜻이 이러하다면 할 수 없지"하고 산을 내려놓으니 바로 지금의 수정봉이다.

 

신선은 몇 번이고 순천봉을 뒤돌아보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 순천봉이 진주 복판에 앉았으면 복 받았을 것인데-"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래도 진주는 전국에서 제일가는 비옥하고 문물이 다 갖추어 있고 가장 풍성한 도시인 것은 택리지에도 적혀 있다. 그러나 순천봉이 진주시의 변두리에 앉아 졌으니 도시는 이상하게도 더 커지지 않고 꼭 옛날 그대로 모습을 지키는 고전적인 전통도시가 되었다. 순천봉에는 몇 천년부터 가야사람들이 살았고 가야시대의 무덤도 남겨 놓은 좋은터요, 절도 있고 교회도, 서제 학교 연계재 경로당도 있어 비봉산 망진산과 더불어 순천봉은 삼대의 진주명산이다.

 

천리(하늘의 이치)는 순천봉을 그대로 두지 아니 하였다. 애당초에 순천봉은 진주의 한복판에 세워 두려는 것이 하늘의 뜻이었다. 이제 와서 다시 순천봉은 하늘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주의 도시 위치를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서쪽으로는 시내와 평거 판문동을 바라보고, 남으로는 칠암벌과 가호, 정촌을 이어주고 동으로는 상대 상평동을 개척하고 있어 이제는 저절로 순천봉이 진주의 한복판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천지의 조화와 민심이 일치될 때 순천(하늘의 듯에 따른다)의 깊고 큰 원리가 발동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살아서 움직이는 순천봉의 참된 뜻만큼 진주 사람들의 마음도 뻗어가고 착하게 살며 이 고장 진주도 내일의 복을 받을 것이다. 진주사람들은 신선이 와서 순천봉을 메고 가지 않도록 치성을 올려야 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6.한병사

 

한범석은 평거에 살았다. 그를 낳기 전, 그의 아버지 영세공이 잠결에 꿈을 꾸는데 강 건너 산기슭 덤불속에서 한 마리의 호랑이(용이라고도 함)가 나타나더니 자기의 입으로 들어왔다.

꿈에서 깬 영세공은 입을 꼭 다문 채 사랑을 나와 내실 방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문을 잠가둔 채 열어주지 않았다.

입을 열면 입안으로 들어온 호랑이가 나갈 것이라는 생각으로, 할 수 없이 하녀의 방으로 갔다. 그리하여 태어난 아이가 한범석이었다.

 

아기 범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빼어나 대여섯 살쯤에 강 건너 나동에 있는 서당으로 글을 배우러 다녔다.
그의 나이가 여남은 살이 되었을 즈음의 일이다.

형들과 같이 서당을 다니는데 서출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고, 형을 형이라 불러 보지 못하는 처지였다. 어느 날은 홍수가 나서 강물이 크게 불어났다.

형들은 자기들을 아우인 범석에게 업고 건너라는 것이었다. 아직 나이 어린 몸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한 그는 큰 형부터 업어 건너기 시작했다. 그는 큰 형을 업고 강 복판에 이르러 버티고 섰다. 그리고 형 더러

"앞으로 아우(동생)라고 부를거요, 안부를 거요. 아우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강물에 집어 던져 버리겠소,"

 

이에 겁에 질린 형은 앞으로 아우라고 부르마 했다. 다음형도 마찬가지로 다짐을 받아 냈다. 강을 건너 범석이 옷을 추스르는 사이 형들이 먼저 당도하니 아버지가 아우 일을 물었다. 형들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아버지는 내심 대견스러웠다.

그 뒤 자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머리를 풀게 했는데 그 때도 형들로부터 다짐을 받아내고 상주노릇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의 습속은 서모의 죽음에는 적손이 복을 입지 않았던 때여서 그의 범상치 않은 행동은 돋보였던 것이다.

한범석은 1695년 무과에 급제하여 5도병마절도사와 3도통어사를 거쳐 부총관에 이르렀고, 한 때 해적을 탐정하는 일로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러한 그가 종명하니 하늘에서는 벌이 떨어졌으며, 그의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장례를 치르던 그의 부장이 말하기를

"명정에 8도병사를 써라."

 

그러니 그의 관이 땅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즉 7도명사를 역임하고 1도병사를 지냈는데 죽어서 1도병사를 더 사니 시체가 떨어졌다고 구전되나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7.공북당

 

진주성내에 있는 충의당은 공북당의 자리이다.그 곳은 또 고려 시랑 하공진이 태어난 태지이기도 하다.

그 터에 관아의 하나인 공북당을 지을 때의 일로, 공역으로 집을 짓는데 낮 동안 집의 뼈대를 지어 놓았다가도 이른 새벽에 나가 보면 집이 무너져 있었다.

이러한 일은 한번 두 번도 아니고 거듭되었다. 지어야 할 날짜에 못 짓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예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급기야 방백은 나졸들에게 일러 밤에 지키도록 하였다. 그 날 밤이었다. 밤중이 되자 한 장군이 위엄있는 장군복을 입고 나타나더니 "여기는 내가 태어난 자리인데, 너희들이 무례하게 집을 지을 수 있느냐, 헐어도 또 짓고 헐어도 또 세우니 또 헐어 버리도록 하라". 하면서 호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장군을 옹위하고 있던 군사들이 달려들어 일시에 허물어버리는 것이었다.

밤을 지킨 나졸들은 방백에게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죄다 보고했다.

그제서야 방백은 말하기를 "아! 우리가 잘못했다. 거란군이 침범하여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 가실 때 자신의 볼모조건으로 거란군을 철병케 하시어 구하신 그 어른의 태지에 우리가 집을 짓다니 큰 잘못이다. 그러니 그 어른 집부터 먼저 짓자".

2007년 3월 8일 목요일 그런 뒤로부터는 헐리는 일이 없었다. 공북당을 지으면서 시랑공의 집이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공북은 공진과 같은 탓으로 "진(辰)"자도 북쪽(북극성)을 뜻을 지닌 까닭이라 했다.

 

8.대나무열매(죽실)

 

진주에는 봉산이 있다. 봉황새는 오동에 깃들고, 고결하여 굶주려도 좁쌀을 먹지 않고 죽실을 먹고산다. 그래서 산에는 오동을 심고 강가에는 대나무를 가꾸었다.

봉황새가 사는 곳에는 인재가 나고 후손이 번영한다고 하는 전설적인 믿음과 소망으로 대나무를 심고 가꾸어 온 것이다.

진양지의 관기총설에는 비봉산을 봉으로 설정하고 대룡, 중룡, 소룡사를 비봉산 둘레에 창건하여 봉황새를 보호하는 형국을 취하였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죽실이 유용한 때가 있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지리산 남북의 마을은 그 소용돌이에 곤욕이 큰데다 보리농사마저 흉년이 들어 마을에서는 밥짓는 연기를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산에 올라 칡뿌리를 캐거나 송기를 벗겨 먹는 등 초근목피로 연맹했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7·8월경에 산죽이 결실하여 죽실 추수가 수만포대에 이르는 이적이 일어났다.

죽실의 낱알은 보리쌀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 보다는 약간 작았고, 잘 고르면 밥도 지을 수 있지만, 가루로 빻으면 수제비로 끓일 만 했다.

죽을 쑤어도 되었으며 술을 빚어도 되는, 그런 비상 음식물로 죽실이 대용되었다 한다.

 

9.강혼의 로맨스

 

목계 강 혼은 젊은 시절 한때 아리따운 관기와 깊은 사랑을 불태운 일이 있다.

강 혼이 기생과의 사랑에 빠져 있을 무렵 공교롭게도 진주 방백이 바뀌어 새 사또가 부임해 왔다.

새로 온 사또가 기생들을 일일이 점고하는데 강 혼의 연인이 사또의 눈에 들어 수청을 들게 되었다.

속절없이 빼앗기게 되었다. 더욱이 관기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 혼은 북받쳐 오르는 분함과 연정을 주체할 수 없어 수청을 들러가는 기생의 소매자락을 부여잡고 한 수의 시를 지어 소매에 써 갈겼다.

"사또는 위풍당당한 3군 원수요, 나는 왕권청등의 벼슬 없는 한 선비 너도 분명 경수의 강물은 흐리고 위수는 맑음을 아련만 그 단분은 누구 위한 것인가 나는 몰라라."

 

강 혼의 행동거지에 놀란 기생은 저고리를 갈아입을 생각마저 잊어버리고 엉겹결에 신관 사또의 방으로 들어갔다.

쫓긴 듯 들어서는 기생의 소매 자락에 쓰인 시를 발견한 사또는 그 연유를 물었다.

시의 작자가 누구냐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기생은 밝히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는 잡아들이라는 호통이 떨어졌다. 강 혼이 붙들려 왔다.

 

수청 기생은 말할 것도 없고 이속들은 큰 변이 일어났다며 몸둘 바를 몰라하는데 사또는 뜻밖이었다. 주안상을 준비케 하고 백면서생 강 혼을 따뜻이 맞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사또는 기생의 소매 자락에 쓰인 시를 보고 그의 글재주와 호기에 마음이 끌려 한 잔 술은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수청을 들 뻔한 기생도 되돌려 주고자 작정한 것이다.

술잔이 돌면서 취기가 올랐고, 때에 취흥이 감돌아 사또는 강 혼에게 넌지시 권학을 타일렀다.

이에 강 혼은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지난날들을 잊고 분발하니, 1486년에는 문과에 오르게 되었으니 나중에는 벼슬이 도승지 좌찬성에까지 이르렀다.

※ 경위 : 중국 경수의 강물은 흐리고 위수의 강물은 맑은데서 청탁의 구별이 분명하다는 뜻으로 나온 말.

 

10.상소광 강응룡

 

진주에 강응룡이라는 분이 살았다. 그의 글은 행문 정도였으며, 성품은 약간 괴팍스러워 상소 올리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소장을 올리되 반드시 방백을 통해 올렸는데 작고 큰 일을 가리지 않고 번번이 방백을 찾으니, 방백들도 한결같이 강응룡의 상소문 받기를 꺼렸다.

강응룡은 방백이 자기의 상소문 받기를 꺼리는 기색이 보이면 한 술 더 떠 가마채를 잡아 흔들어 대거나 말고삐를 붙들고 실랑이를 벌이기가 일쑤였다.

그러면서 "진주 고을 강응룡의 상소문이오! " 하고 외치며 물고늘어지는 바람에 내노라는 방백일지라도 배겨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하찮은 일에도 소를 써 올리기 때문에 그의 상소문은 번번이 일축되거나 대수롭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한 그의 상소가 제때에 맞춘 일이 있었다. 그것은 성균관 식객들에게 일대의 이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때의 성균관 식솔들은 3백 여명 가량으로 대가족이었으며 과거에 오른 유생들이어서 나라에서도 후한 대접을 했는데 그 식탁은 호화로워 쇠고기가 올랐고 침식까지 제공되었다.

여기에 성균관 유생들의 식탁준비를 위한 무리들이 한 몫 보고있었고 이들은 소를 낮은 값으로 사들여 올린 값에 납품하는 등 톡톡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성균관 하인배들이 진주의 소가 헐하다는 소문을 듣고 소를 사러 왔다가 강응룡의 눈에 띄었다. 성균관 유생들의 반찬감으로 진주 소가 죽어나가는 것도 불쾌하거니와 국록으로 그들에게 육식이 제공된다는 것이 못마땅하여 붓을 들었다.

"성문대하에 도살이 웬 말이며 유생의 호식은 당치도 않다"며 분개했다.

임금은 이 상소문의 의의가 지당하다고 판단하고 성균관에 금육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성균관 식탁에 올라지던 쇠고기는 사라졌으며 그 뒤부터 성균관에 금육 관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11.조국문

 

하진백은 국화를 사랑함이 유달라 그의 아호도 국담이라 하였다.

그는 국화를 연못가에 심어두고 그 꽃이 만개할 때면 으레 벗을 불러 시회를 열고 국화술을 빚어 벗과 두 아우와 더불어 즐겼다.

일찍이 나이 세 살에 글을 알고 여섯 살 때는 능히 시를 지은 문장가였다.

 

1790년 진사시에 나아가 등과하고 다섯 차례에 걸쳐 임금에게 입시 하니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고, 정조 또한 눈여겨본 인재였다.

그러나 끝내 출사가 좌절되어 큰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다.

국화사랑은 이래서였을까, 사람들은 말하기를 국화사랑은 도연명이라고 하나 형제와 더불어 즐긴 아취는 도연명도 갖추지 못한 바라고 일컬었다.

웬일일까, 선학처럼 살다가 종명하니 구망일이면 망울을 터뜨리던 국화가 시들어 죽는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국화도 공을 따라 순절한 것이라고들 말했다.
아우 진중의 슬픔은 더욱 사무쳤다.

 

"국화여 오늘 너 죽음은
주인이 가니 너도 간단 말인가
형 그리는 아우 마음 헤아려
다시 피어날 줄 믿노라."

 

다음 해 가을 국화는 다시 피어났다고 한다.

 

12.최경회의 철인

 

1747년 남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 어부가 철인 하나를 건져 올렸다.

건져 올린 철인은 '경사우도병마절도사'이라 새겨져 있었고 그 뒷면에는 '만력 13년 월 일조' 라고 새겨져 있었다.
만력 13년은 1585년으로 선조 18년이다.

그 당시 병사 최진한은 이 사실을 장계로 올리면서 1593년에 순국한 최경회의 직인이라고 증술하였다.
영조는 철인을 보고 몹시 창감하여 새로 동으로 인갑을 만들고 친제 인명을 은으로 발라 진주 본영으로 하여금 고이 간직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철인은 진주영의 보장물이 되었는데 영중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밤을 택해 울었다 한다.

이 철인은 1839년 운주당이 실화로 불 탓을 때 병사가 불에 타 희생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잿더미 속에서 되찾을 수 있었고 1899년 속칭 환갑 불이 났을 때도 운주당은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철인만은 중건 때 다시 찾았다.

 

이러한 수난 속에서도 자리를 지켜주던 고인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13.무학대사와 진주의 지맥 (상봉서동)

 

무학대사라고 하면 이씨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를 점쳐주고 또 서울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긴 괴상하고 해박한 중이였음은 한국의 야사에서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이성계가 등극 후에 산남 지방에 河, 姜등의 인물이 많이 나옴을 싫어하여 무학대사를 시켜 진주의 지리를 살피게 하였다. 진주성을 살폈으나 그렇게 마음 쓸 곳이 없어 비봉산쪽을 살피니 과연 명당 명승의 자리이며 더욱이 비봉산의 지맥이 대룡골의 황새터와 연결되어 있음에 절로 놀랜 무학대사는 지금의 비봉산과 봉원 초등학교 사이의 가마못이 있는 등을 끊어서 한시름 놓았다.

 

다시 동쪽을 살피니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비봉루 옆자리에 향교가 엄수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나 무학대사의 마음을 섬뜩하게 하였다. "어쩌면 이 조그마한 비봉산을 둘러싸고 이렇게도 좋은 자리가 많을까? 이 태조가 신기한 사람이 많이 나온 것과 앞으로 나올 것을 염려하고 장차 새로 만든 이씨 조선을 뒤엎을 역적질 할 사람이 나올 땅이라 우려하드니 정말로 그러한 땅이 로고"하여 향교를 옮겨 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남쪽을 살피는데 남강하류 새벼리 덤고개 밑에 돌산이 튀어 나왔는데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하고 있음에 더욱 놀란 것은 무학대사였다. 지금도 우리들은 석용골이라 부르고 있는 곳이다. 대사는 크게 신음을 하며 "음- 정말 말못할 땅이로구나- 웬 이렇게도 골골 마다 명당자리만 있다니-"하며 인부를 시켜 석용을 파괴하는데 떨어져 나오는 돌마다 하나 하나가 모두 용비늘 같았고 그 용비늘 같은 돌이 떨어져 나올 적마다 붉고 붉은 빨간 피가 흐르는데 이 핏줄기는 의령에 까지 흘러갔다니 전설이란 정말 같은 거짓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이태조는 무학대사를 이렇게 믿었느냐하면 이태조가 일찍이 고려말에 신하로 있을 때 무학대사와 무학대사의 스승인 명승 뇌옹조사가 함께 고려 공민왕을 내어쫓고 왕위에 오르자 국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 이씨조선 500년의 도읍지를 삼게 하고 대한민국의 서울도 되게 하였으니 이태조가 무학대사를 얼마나 믿었는가 상상할 수 있다.

 

무학대사가 비록 진주의 지맥을 끊기는 하였으나 인물은 여전히 나왔으니 이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곧 태종을 도와 왕위에 앉게 한 '하륜'이며 임진란때 비록 외지사람이나 주씨 '논개'가 나고, 또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기를 만든 '정평구'며 '삼열사' '삼장사'가 있으니 지금도 진주땅의 정기를 받아 우리나라의 지도적 인물에 진주사람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지간에 무학대사가 지맥을 끊은 이후에는 보수안정의 고을로 바뀌었으니 과연 우리는 이 운명적 전설을 따라야 할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이 마당에 풍수지리설을 내동댕이치고 발전하는 문화, 예술, 교육도시로 발전함에 모든 시민은 새시대의 새 무학대사가 되어야 하겠다.

 

14.욱면랑염불하여 서방에 오르다

 

8세기 신라 경덕왕 때 진주에서의 일이다.

선사 수 십인이 모여 극락정토의 대발심을 모으니 혜숙 법사가 고을 경내에다 미타사를 세우고 1만일을 기약하고 법회를 열었다.

 

그때 아간(신라 17관등중 제6등관) 귀진의 집에 한 여자 종이 있어 이름을 '욱면'이라 하였다. 그녀는 그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불당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절 뜰에 서서 중이 하는 대로 염불을 따라 했다.

욱면의 주인 귀진은 그녀가 여자 종의 신분으로 자기 직분에 충실치 않고 불사를 돈독하게 드리는 것이 못마땅하여 매일 벼 두섬을 주면서 하루 저녁에 다 찧게 했다.

그러노라면 욱면은 초저녁에 방아 찧는 일을 마치고는 절에 와서 염불을 들이는데 밤낮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절 뜰의 좌우에다 긴 말뚝을 세우고 자기의 두 손바닥을 줄로 꿰어서는, 그 줄을 양쪽의 말뚝에 메어, 합장한 채로 좌우로 왔다갔다하면서 스스로를 격려 정진했다.

이렇게 하기를 9개성상이 되는 날, 을미년 정월 스무 하루 하늘에서 한 외침이 있어 공중을 울렸다.
"욱면랑은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을 드릴지어다"

이 소리를 들은 뭇사람들은 미천한 신분으로 9년 동안 불당에 한번도 들어가지 못하고 눈 비바람 이슬을 맞으며 지성껏 염불을 드리던 욱면을 권하여 불당에 들어가 염불을 드리도록 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천악이 서쪽으로부터 울려 왔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욱면은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불당의 천장을 뚫고 서쪽 하늘로 날아갔다.

욱면은 서쪽으로 가서 형해를 버리고 진신으로 변형하여 연대에 앉더니 금빛 찬란한 대광명을 내리비치면서 천천히 서쪽 하늘로 사라졌는데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천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욱면은 날아가다가 소백산에 이르러 한 짝의 신을 떨어뜨렸으니, 그 곳에는 보리사를 지었고. 또 산 아래에는 그 육신을 버렸는데 그 자리는 제2보리사를 지어 "욱면등천지전"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욱면이 하늘로 솟아오르면서 뚫어진 구멍은 열 아름쯤 되었으나 폭우나 함박눈이 쏟아져도 그 구멍에는 새어 들지 않았다.

어떤이가 나중에 금탑1좌를 그 구멍에다 대고 만들어 그 이적을 기록해 두었다.

욱면이 간 뒤 그녀의 상전이었던 귀진 역시 그의 집을 이인이 몸을 붙여 태어난 곳이라 하여 절로 희사하니 법왕사라 이름하였다.

201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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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진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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