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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경복궁
kimi**** 조회수 441 작성일2008.05.30

경복궁에서 국가행사를 치르거나 임금과 신하가 중요한 정책을

결정한 곳, 그리고 언제 경복궁이 불에 탔고, 누구에 의해 다시

세워졌는지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경회루 돌난간에 세워진 불가사리,

무엇때문에 세워진것인지도 알려주시면 더감사하겠습니다.

 

 

부탁하나 더 드렸습니다.

 

내공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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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으로 옮겨 신도()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을 두고 청성백() 심덕부(), 좌복야 김주(), 전정당문학 이염(), 중추원학사 이직()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을 주산()으로 삼고 임좌병향(:西에 앉아 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 )’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경복궁(景福宮)은 대한민국 서울에 위치한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이다.

목차

[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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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경복궁의 건립 역사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1394년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고 종묘사직궁궐 등의 공사를 착공하여 1395년 9월 29일 총 755칸 규모의 경복궁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그 해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은 이 때 지어진 것이다.

이후 1411년 태종은 경복궁에 금천을 파도록 명하고 이듬해에는 경회루를 건축하였다.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대왕 때였는데, 1426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명종 8년에는 실화로 경복궁이 전소되었는데, 이를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지었다. 이 때에 동원된 인력이 부역이 2,200명이었고 품팔이꾼이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대에 건립된 경복궁을 그린 ‘한양궁궐도병’이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림은 임진왜란 당시에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1592년년 선조가 피란할 때에 난민이 발생하였고, 노비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궁궐들을 불태웠다.[1] 그 후로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1865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이 시작되어 1868년 재건되었고, 경복궁의 재건을 주도한 흥선 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 일제는 경복궁 건물 대부분을 훼철하여 해방 직후에는 전체의 십분의 일 규모만 남게되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광화문과 만춘전등이 불타기도 하였다. 이후 1990년에 들어서 정부는 20년 계획으로 단기 복원 계획을 진행하고 있으며 2009년까지 원래 규모의 40퍼센트 수준 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편집] 경복궁의 건축물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들을 두고 남쪽으로 정전, 편전, 침전과 후원을, 그리고 동쪽으로 동궁과 자전, 서쪽으로 궐내각사와 경회루를 각각 배치하는 형태로 수십 개의 전각들이 건축되었다.

[편집] 광화문

광화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위치한 정문이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 지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편집] 건춘문

건춘문(建春門)은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동쪽은 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주로 왕족, 척신, 상궁이 드나들었던 문이었다. 건천문의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건춘문의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문 밖에는 왕실의 종친들을 교육하는 종학(宗學)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편집] 영추문

영추문(永秋門)은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한 문으로, ‘서쪽은 가을에 해당하여 가을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영추문이라 이름하였다. 문 밖에는 명당수가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주로 일반 관료들이 드나들었다. 영추문의 천장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궐내 각사가, 문 밖에는 궁궐에 물자를 조달하는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다.

[편집] 신무문

신무문

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쪽에 위치한 문으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와 신무문이라 이름하였다. 신무문의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그 이름처럼 음기가 강하다 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그 후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청와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부대가 경복궁 경내에 주둔하게 되면서 45년 동안 폐쇄되었다. 현재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다.

[편집] 흥례문

흥례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흥례문(興禮門)은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간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편집] 영제교

근정문과 영제교
근정문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지엄하고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전의 외당 앞에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금천에 설치한 다리이며, 덕수궁의 금천교, 창덕궁의 옥천교와 금천교도 같은 이치로 지어진 다리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가량으로 비교적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중앙이 3.4m, 그리고 양쪽이 각각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어도(御道-왕의 길)로서 왕의 어가가 지나는 길이다. 다리 발은 홍예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돌난대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난간 전후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가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광화문 밖의 서수가 뿔이 보이지 않는 데 반해 영천교의 이 서수들은 뿔이 보이고 있는데 정전의 앞이기에 더욱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듯 하다.

[편집] 근정문

근정문(勤政門)은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되어 있다.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일이 없는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고 대신 관리들이 궁에 출입할 때는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이용하였는데, 음양으로 볼 때 태양을 뜻하는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

[편집] 근정전

근정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편집] 사정전

사정전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의 중심 건물로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편전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사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

그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이는 누구나 높고 영광되고자 아니하고 위태롭고 악하고자 하였겠습니까마는, 옳지 못한 사람을 가까이 해서 계책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에 화패(禍敗)에 이르게 된 것이니, 진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편집] 강녕전

강녕전

강녕전(康寧殿)은 왕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으로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의 초익공 팔작 지붕이다.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으며,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 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다.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곳인만큼 화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건물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강령전 뒷편의 교태전으로 가는 양의문 좌우에 굴뚝을 붙여 지었다.

다음은 정도전의 설명이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魏)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너의 벗한 군자를 보니 너의 얼굴을 부드럽게 한다. 잘못이 있어도 멀리 하지 아니하고 너의 방에 함께 있으니, 방 한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편집] 수정전

수정전(修政殿)은 돌로 높고 넓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으로, 원래 이 자리엔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이 있었다. 1456년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을 폐지하였고,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버려져 있었다. 1867년(고종 4년)에 건물을 다시 짓고 이름을 수정전이라 하였다.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으로 추정되는 이 전물은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고 이후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은 지금은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는 담 역할을 하는 긴 집채인 행각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주변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여러 관청이 있었다. 서쪽에는 궁중의 경서, 문서 등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였던 옥당과 역대 왕들이 쓴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변사의 당상관 등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빈청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 등의 건물이 영추문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수정전 좌측 앞에는 장영실이 자격루를 세웠던 곳이라는 표식이 세워져 있다.

[편집] 경회루

경회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국보 제224호이다.

[편집] 교태전

교태전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강령전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면 9칸 규모의 건물이다. 건물 뒷편에는 정원인 아미산이 위치하고 있는데 아미산을 볼 수 있도록 후면동쪽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강령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편집] 아미산

아미산 굴뚝

보물 제811호. 아미산(峨嵋山)의 굴뚝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으로,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4개가 남아있는데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를 벽돌로 구워 배열하였고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 등 길상의 무늬 및 화마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윗부분은 조형전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도록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을 설치하였다. 굴뚝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의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편집] 자경전(慈慶殿)

대한민국 보물 제809호.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興善大院君)이 경복궁 재건사업을 하던 1867년(고종4) 대왕대비 조씨를 위하여 지은 전각으로, 두 번에 걸친 화재로 불탄 것을 1888년(고종25)에 다시 지었다. 자경전의 담장은 벽돌로 모양을 내어 꾸몄는데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던 건물인 만큼 만(卍),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등의 글자들과 소나무, 국화, 거북 등, 연꽃, 대나무, 모란, 국화 등의 대왕대비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들어 만(卍)의 경우 글자의 모양을 계속 그려나가면 끝이 없으므로 영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거북 등 그림의 경우 장수하는 동물 중 하나가 거북이므로 역시 대왕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또한 자경전의 굴뚝에는 십장생도가 그려져있는데 이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편집] 집경당

[편집] 향원정(香遠亭)

향원정

[편집] 건청궁

건청궁(乾淸宮)은 1873년에 지어졌으며, 1909년 이전에 철거되었다가 복원되어 2007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2]

[편집] 집옥재

집옥재(集玉齋)는 고종이 개인 서재 겸 전용 도서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무문의 동쪽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건물의 측면 좌우 끝에 박공을 달아 벽면 상부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구조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다.

[편집] 태원전

태원전(太元殿)은 왕의 비빈들이 살던 곳으로, 태조 이성계어진(御眞: 임금의 화상)이 봉안됐던 곳이자, 명성황후의 빈전(殯殿)으로도 활용되었다. 빈전은 빈소의 높임말로, 왕이 죽으면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그곳에서 시신을 모시고 의례를 치렀다. 그러나 태원전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어, 그 자리에 일본군과 미군 뿐만 아니라, 청와대가 바로 뒤인 관계로 97년까지 한국군도 주둔해 있었다.[3] 현재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편집] 자선당

자선당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 빈의 거처다. 입구를 바라봤을때 오른쪽 방에 세자가 살았으며, 맞은 편인 왼쪽 방에 세자 빈이 살았다.

[편집] 비현각

비현각

비현각(丕顯閣)은 크고 밝은 전각이란 뜻으로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던 편전이다.

[편집] 주석

2008.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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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으로 옮겨 신도()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을 두고 청성백() 심덕부(), 좌복야 김주(), 전정당문학 이염(), 중추원학사 이직()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을 주산()으로 삼고 임좌병향(:西에 앉아 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 )’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경복궁(景福宮)은 대한민국 서울에 위치한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이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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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경복궁의 건립 역사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1394년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고 종묘사직궁궐 등의 공사를 착공하여 1395년 9월 29일 총 755칸 규모의 경복궁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그 해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은 이 때 지어진 것이다.

이후 1411년 태종은 경복궁에 금천을 파도록 명하고 이듬해에는 경회루를 건축하였다.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대왕 때였는데, 1426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명종 8년에는 실화로 경복궁이 전소되었는데, 이를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지었다. 이 때에 동원된 인력이 부역이 2,200명이었고 품팔이꾼이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대에 건립된 경복궁을 그린 ‘한양궁궐도병’이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림은 임진왜란 당시에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1592년년 선조가 피란할 때에 난민이 발생하였고, 노비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궁궐들을 불태웠다.[1] 그 후로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1865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이 시작되어 1868년 재건되었고, 경복궁의 재건을 주도한 흥선 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 일제는 경복궁 건물 대부분을 훼철하여 해방 직후에는 전체의 십분의 일 규모만 남게되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광화문과 만춘전등이 불타기도 하였다. 이후 1990년에 들어서 정부는 20년 계획으로 단기 복원 계획을 진행하고 있으며 2009년까지 원래 규모의 40퍼센트 수준 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편집] 경복궁의 건축물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들을 두고 남쪽으로 정전, 편전, 침전과 후원을, 그리고 동쪽으로 동궁과 자전, 서쪽으로 궐내각사와 경회루를 각각 배치하는 형태로 수십 개의 전각들이 건축되었다.

[편집] 광화문

광화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위치한 정문이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 지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편집] 건춘문

건춘문(建春門)은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동쪽은 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주로 왕족, 척신, 상궁이 드나들었던 문이었다. 건천문의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건춘문의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문 밖에는 왕실의 종친들을 교육하는 종학(宗學)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편집] 영추문

영추문(永秋門)은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한 문으로, ‘서쪽은 가을에 해당하여 가을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영추문이라 이름하였다. 문 밖에는 명당수가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주로 일반 관료들이 드나들었다. 영추문의 천장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궐내 각사가, 문 밖에는 궁궐에 물자를 조달하는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다.

[편집] 신무문

신무문

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쪽에 위치한 문으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와 신무문이라 이름하였다. 신무문의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그 이름처럼 음기가 강하다 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그 후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청와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부대가 경복궁 경내에 주둔하게 되면서 45년 동안 폐쇄되었다. 현재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다.

[편집] 흥례문

흥례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흥례문(興禮門)은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간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편집] 영제교

근정문과 영제교
근정문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지엄하고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전의 외당 앞에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금천에 설치한 다리이며, 덕수궁의 금천교, 창덕궁의 옥천교와 금천교도 같은 이치로 지어진 다리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가량으로 비교적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중앙이 3.4m, 그리고 양쪽이 각각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어도(御道-왕의 길)로서 왕의 어가가 지나는 길이다. 다리 발은 홍예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돌난대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난간 전후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가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광화문 밖의 서수가 뿔이 보이지 않는 데 반해 영천교의 이 서수들은 뿔이 보이고 있는데 정전의 앞이기에 더욱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듯 하다.

[편집] 근정문

근정문(勤政門)은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되어 있다.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일이 없는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고 대신 관리들이 궁에 출입할 때는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이용하였는데, 음양으로 볼 때 태양을 뜻하는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

[편집] 근정전

근정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편집] 사정전

사정전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의 중심 건물로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편전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사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

그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이는 누구나 높고 영광되고자 아니하고 위태롭고 악하고자 하였겠습니까마는, 옳지 못한 사람을 가까이 해서 계책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에 화패(禍敗)에 이르게 된 것이니, 진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편집] 강녕전

강녕전

강녕전(康寧殿)은 왕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으로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의 초익공 팔작 지붕이다.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으며,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 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다.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곳인만큼 화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건물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강령전 뒷편의 교태전으로 가는 양의문 좌우에 굴뚝을 붙여 지었다.

다음은 정도전의 설명이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魏)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너의 벗한 군자를 보니 너의 얼굴을 부드럽게 한다. 잘못이 있어도 멀리 하지 아니하고 너의 방에 함께 있으니, 방 한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편집] 수정전

수정전(修政殿)은 돌로 높고 넓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으로, 원래 이 자리엔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이 있었다. 1456년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을 폐지하였고,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버려져 있었다. 1867년(고종 4년)에 건물을 다시 짓고 이름을 수정전이라 하였다.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으로 추정되는 이 전물은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고 이후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은 지금은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는 담 역할을 하는 긴 집채인 행각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주변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여러 관청이 있었다. 서쪽에는 궁중의 경서, 문서 등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였던 옥당과 역대 왕들이 쓴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변사의 당상관 등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빈청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 등의 건물이 영추문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수정전 좌측 앞에는 장영실이 자격루를 세웠던 곳이라는 표식이 세워져 있다.

[편집] 경회루

경회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국보 제224호이다.

[편집] 교태전

교태전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강령전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면 9칸 규모의 건물이다. 건물 뒷편에는 정원인 아미산이 위치하고 있는데 아미산을 볼 수 있도록 후면동쪽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강령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편집] 아미산

아미산 굴뚝

보물 제811호. 아미산(峨嵋山)의 굴뚝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으로,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4개가 남아있는데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를 벽돌로 구워 배열하였고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 등 길상의 무늬 및 화마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윗부분은 조형전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도록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을 설치하였다. 굴뚝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의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편집] 자경전(慈慶殿)

대한민국 보물 제809호.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興善大院君)이 경복궁 재건사업을 하던 1867년(고종4) 대왕대비 조씨를 위하여 지은 전각으로, 두 번에 걸친 화재로 불탄 것을 1888년(고종25)에 다시 지었다. 자경전의 담장은 벽돌로 모양을 내어 꾸몄는데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던 건물인 만큼 만(卍),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등의 글자들과 소나무, 국화, 거북 등, 연꽃, 대나무, 모란, 국화 등의 대왕대비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들어 만(卍)의 경우 글자의 모양을 계속 그려나가면 끝이 없으므로 영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거북 등 그림의 경우 장수하는 동물 중 하나가 거북이므로 역시 대왕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또한 자경전의 굴뚝에는 십장생도가 그려져있는데 이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편집] 집경당

[편집] 향원정(香遠亭)

향원정

[편집] 건청궁

건청궁(乾淸宮)은 1873년에 지어졌으며, 1909년 이전에 철거되었다가 복원되어 2007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2]

[편집] 집옥재

집옥재(集玉齋)는 고종이 개인 서재 겸 전용 도서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무문의 동쪽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건물의 측면 좌우 끝에 박공을 달아 벽면 상부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구조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다.

[편집] 태원전

태원전(太元殿)은 왕의 비빈들이 살던 곳으로, 태조 이성계어진(御眞: 임금의 화상)이 봉안됐던 곳이자, 명성황후의 빈전(殯殿)으로도 활용되었다. 빈전은 빈소의 높임말로, 왕이 죽으면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그곳에서 시신을 모시고 의례를 치렀다. 그러나 태원전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어, 그 자리에 일본군과 미군 뿐만 아니라, 청와대가 바로 뒤인 관계로 97년까지 한국군도 주둔해 있었다.[3] 현재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편집] 자선당

자선당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 빈의 거처다. 입구를 바라봤을때 오른쪽 방에 세자가 살았으며, 맞은 편인 왼쪽 방에 세자 빈이 살았다.

[편집] 비현각

비현각

비현각(丕顯閣)은 크고 밝은 전각이란 뜻으로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던 편전이다.

[편집] 주석

2008.06.01.

  • 출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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