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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저희 할아버지께서 쓰신 함자가 엄복동 이시라고 하시든데....
sals**** 조회수 14,793 작성일2009.01.28

 

 

할아버지께서 쓰신 함자가 엄복동 이신데 제 부친 9살때 돌아가셨다고 하시는군요...

 

제 부친 연세는 지금 67세 이시고  그때 당시 할아버지께서는 자전거로 유명하셨다고 합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 계시면서 한의원을 하시면서 병자를 많이 돌보셨다고 합니다...

 

시대의 영웅이신 엄복동 님이 맞는지 궁굼합니다... 

 

제부친 말씀이 625 사변때 돌아 가셨다고 하시고...

 

정확한 데이터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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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주소를 클릭해 보시면 알겠지만 말씀하신 할아버님이 엄복동님인것 같습니다.

한번 찾아 보세요.

 

http://cafe.naver.com/nipponclassicbicycl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36

 

 

조선자전차왕 엄복동을 아십니까?

 

그는 1892년 서울에서 아버지 엄선양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엄 선수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은 평택입니다. 당시 평택에 자전거포가 많았다고 하는데, 10대 시절에 평택의 일미상회라는 자전거 점포에서 일을 하면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평택 서울간을 오가는 자전거 행상이 빈번했는데, 엄복동 역시 평택 서울간 자전거 행상을 하면서 자전거 실력을 키웠습니다.

독립협회 윤치호 등이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하던 시절이었죠. 1906년 4월 22일에 국내 최초 자전거 대회가 열렸습니다. 장소는 서울운동장 앞 성동훈련원이었고, 육군참위였던 권원식과 일본인 요시카와(吉川)가 자전거대회를 주최했지요.

당시 자전거대회는 곡마단 서커스와 비슷한 구경거리였습니다. 이 때는 자전거상회를 운영하던 사람들이 자전거를 보급하고 판매를 장려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들이 많았습니다.

그 시절 자전거는 자행거(自行車)라고 불리며 일부 부유층의 호사품이었습니다. 자행거라는 것은 가마꾼 없이 스스로 가는 수레라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1907년엔 한일 자전거 상점 주최 대회가 있었고, 1909년 조선일일신문사가 점원들을 위로하기 위해 훈련원에서 자전거 경기대회 주최했는데, 이 때까지는 사실상 친목 모임 성격이 강했습니다.

엄복동의 이름이 알려진 대회는 바로 1913년 대회였습니다. 1913년 4월 12-27일 경성일보사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대회로 이름이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였습니다. 인천(12일), 용산(13일), 평양(27일) 등 세 군데서 열린 대회로 꽤 규모가 컸는데, 여기서 엄복동이 우승합니다.

첫 출전에 우승이라니 대단했죠. 이 대회는 일본인 자전거 상인들과 친일계 상인들이 주최한 대회였는데, 당시 용산연병장에 약 10만여명의 관중이 모였다고 해요. 엄청난 숫자였죠.

마지막 평양역전광장에서 펼쳐진 결승전, 즉 조일 일류선수 연합경기에 한국인 2명, 일본인 4명이 참가했는데, 엄복동(21세)과 황수복(17세)이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했습니다. 당시에는 자전거 선수를 일류(一流), 이류(二流), 삼류(三流)로 구분하여 등급을 정하였는데, 일류가 가장 최정상급 선수들이었습니다. 일류는 운동장을 40바퀴 돌고, 이류는 30바퀴 도는 식이었습니다.

아무튼 최고 실력있는 한일 선수들이 참가한 대회에서 엄복동이 우승하면서 그는 바로 민족 스타로 떠올랐죠. 이 때 이후로 자전거 경기대회는 한일전 양상을 띄웠는데, 항상 한국인인 엄복동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대단한 것은 엄복동 선수는 중고 자전거를 타고 시합에 참가해서 승리를 따낸 것이었죠.

또 엄복동의 경주법도 특이했는데, 중간그룹에 끼어 달리다 마지막 한바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갑자기 엉덩이를 치켜 올린 뒤 빠른 발놀림으로 선두그룹을 제치고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엄복동이 엉덩이를 세우면 '올라간다'는 함성과 함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고 해요.

엄복동 선수는 화끈한 성격으로 유명한데, 그 성격이 잘 드러난 게 1920년 5월 3일 경복궁 마당(창경궁이라는 이야기도 있음)에서 열린 '경성시민대운동회'였습니다. 종목은 마라톤과 사이클 단 두 개였습니다.

이 경기에 엄복동은 영국 자전거 회사로부터 받은 자전거를 타고 참가했습니다. 그 전까지 타던 자전거는 중고자전거였는데, 처음으로 새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한 거죠. 엄복동의 기분이 아마 무척 좋았겠죠.

엄복동은 트랙을 50바퀴 도는 일류 결승 경기에 참가했는데, 일본에서 제일 자전거를 잘 탄다는 모리 다카히로를 비롯 전체 8명이 경기에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경기 도중 선수들끼리 부딪혀 2명을 빼고 다 넘어졌습니다. 엄복동과 일본인 선수 1명, 즉 모리 다카히로만 남은 상황이었죠. 그런데 엄복동이 일본 선수보다 세 바퀴나 앞서 있어, 여유있는 우승이 예상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망신을 당할까 우려해서인지 일본쪽 심판이 편법을 썼습니다. 일몰을 이유로 결승경기를 중단시켜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엄복동 선수의 성격이 나오는데, 격분한 상태로 본부석으로 뛰어든 뒤, 우승기를 잡고 꺾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일본인들이 엄복동에 몰매를 가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다시 관중들이 항의하면서 경기장이 일 대 소란에 빠졌습니다. 곧장 일본 순사들이 진압에 나서면서 경기는 중단됐지만, 아무튼 엄복동은 결국 우승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 때 우승을 했으면 우승기와 금메달, 양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후 슬럼프에 빠질 만도 한데, 엄복동 선수는 여전히 승승장구했습니다. 1922년 5월 31일부터 2일간 평양 윤업회(輪業會)주최로 광성고등보통학교(光成高等普通學校)운동장에서 열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도 일본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했구요.

1923년 4월 29일-30일 마산체육회 주최 전조선자전거경주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외에도 '조일일류선수권대회' '조선 일류선두 책임경주대회' '일류 20바퀴 경주' 등 연승을 거두죠.

자전거 도시로 유명한 상주에서도 자전거 대회가 열렸습니다. 1925년 경북 상주에서 상주 기차역 개통 기념 '조선8도 자전거대회'를 개최했는데, 이 대회에서 엄복동과 박상헌이 우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28년 6월 전국운수조합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구요.


엄복동 선수의 선수생활은 40대까지 이어집니다. 엄복동은 나이와 체력 저하를 이유로 1920년대 말 은퇴를 합니다. 그러나 경기장을 잊지 못해 다시 복귀를 선언하죠.

그 대회가 바로 1932년 4월 20일 열린 '전조선 남녀 자전거 대회' 1만미터 경주였습니다. 몇 년간 공백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엄복동은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 때 나이가 41세였습니다. 당시 신문들은 '엄복동 선수 노익장'이라며 대서 특필했죠. 랜스 암스트롱이 지금 우리나이로 37살이니까, 엄복동 따라가려면 앞으로 4년은 더 현역생활을 해야 할 나이입니다.

그 뒤로 엄복동의 자전거 대회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이 대회가 마지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타까운 점은 은퇴한 뒤로는 특별한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세간의 관심에서 사라졌고, 특별히 기록될 만한 일을 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광복후 경기도 동두천과 연천 부근에서 떠돌이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 것을 보면 특별한 직업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은퇴 뒤에 자전거포를 차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만큼 돈을 모으진 못한 모양입니다.

민족 영웅 치고는 참 초라하게 삶을 마감하는데, 그는 1952년 한국전쟁 때 동두천 부근 어느 야산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그냥 횡사합니다.

그렇게 잊혀진 엄복동의 이름은 27년이 지난 뒤 다시 등장합니다. 대한사이클연맹이 1977년부터 엄복동 선수 기념 엄복동배 쟁탈 대회를 매년 개최합니다. 처음엔 단체 도로 대회를 하다 이 종목이 나중에 올림픽에서 빠지면서 트랙종목으로 바꿉니다.

그런데 트랙종목의 경우 최소 4일은 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 부담이 컸습니다. 대한싸이클연맹은 10개가 넘는 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어 여력이 없었고, 또 지자체에서도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죠.

결국 1999년 22회 대회를 끝으로 엄복동 대회는 사라졌습니다. 그 뒤엔 엄복동이란 이름을 건 자전거 대회는 없습니다.

의정부 벨로드롬경기장 안 엄복동 동상

엄복동 선수는 딱히 상징물이랄 것도 없는데, 의정부시가 1986년 대한사이클연맹의 건의를 받아들여 세운 동상이 있는데, 그게 전부입니다.

경기 의정부시 녹양동 사이클 벨로드롬경기장 입구에 있습니다. 남산미술원 원장이던 원로조각가 이일영씨가 조각한 작품입니다. 좌대 높이가 2.8m고 동상 높이는 3m짜리 청동입상입니다.

일제 시대 영웅이던 고 손기정 선수는 지금껏 사랑을 받고 있고, 서울시에 손기정 공원까지 있는데 비하면 엄복동은 제 대접을 못받고 있는 것이죠.

엄복동 선수가 닦아놓은 사이클 실력은 그 뒤에 쭉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58년 동경 아시아경기대회에 처음 도로선수를 파견했는데, 전 종목(2개)을 석권하며 대번에 아시아 사이클 강국으로 떠오릅니다.

이후에도 계속 선수단을 파견해 1998년 방콕아시아대회까지 총 16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일본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후 1990년 북경대회 이후에는 트랙종목에도 뛰어들어 보다 많은 금메달을 따고 있구요.

계속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자전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데, 자전거 영웅에 대한 관심도 같이 높아졌으면 좋겠습니다.

* 잊혀지긴 참 쉬운 일입니다. 잊혀진다는 게 그리 나쁜 일도 아닙니다. 바위가 바람과 비를 맞으며 그렇게 깎여나가듯이 그렇게 사람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왜 태어났을까를 생각해보면서 몇 십년 전 치열하게 살았던 그 사람을 생각해봅니다.

2009.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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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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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행, 역사학, 한국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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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차로 유명하신 분은 맞는데요.  지역과 한의원은 좀 안맞네요. 동명이인일수도 있어요.

엄복동은 기념사업회가 있고 그 후손이 사업회장을 하고 있거든요.

2019.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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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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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확실한 답변을 드릴 수는 없지만, 엄복동은 625 사변때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산면에 계시면서 한의원을 하시면서 병자를 돌보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자전거로 유명하셨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혹시 그분이 엄복동이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부친님의 말씀을 토대로 더 자세한 조사를 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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