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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천국과 지옥" 어떻게 보셨나요?
thef**** 조회수 5,805 작성일2009.03.22

서점가니 기독교 베스트셀러 2위에 있던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과 그의 다른 저서인 "천국과 지옥"을 읽고 느낀 점입니다. 비교인이라면 상관없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좀 혼란을 주는 책 같으네요. 다른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해요. 개신교에서는 당연히 펄쩍 뛸테니 천주교에 함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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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을 이처럼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 또 있을까! 이 책은 요약본임을 감안할때 스베덴보리의 수십년간의 영계체험은 정말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 읽고 나서 느낀점은 참 책이 빨리 잘 읽어진다는 것이었다

 

"천국과 지옥" 원서와 비교해보면 번역 및 요약이 참 잘 되어있다(오타는 종종 있음)

 

다만 기존 기독교인으로서 몇가지 궁금함은 남기고자 한다

 

1. 자유의지

 

자유의지에 대하여는 수백년간 치열한 신학적 논란이 있어왔고 지금도 여전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책은 구원의 길은 100프로 자유의지에 달렸다고 한다. 자유의지로 선을 행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언뜻 보면 천국 가는 것이 어렵지 않은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원죄에 물들어 실제로도 수많은 유혹과 죄에 넘어가는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면 이는 저주가 될수도 있다. 책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선하면 결국 천국 간다고 하나 매순간 시험을 이기고 선을 택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일것 같다. 자유의지가 절대적이라면 구원은 인간이 살아있는한 계속 유동적일 수 밖에 없는 불안한 것이며 하나님은 천국에만 계시고 사랑은 단지 그분의 속성에 그친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거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는 섣부른 단정이다. 바울의 경우 자유의지로 회심했지만 이는 결국 하나님이 일방적인 사랑으로 바울의 잘못된 신앙과 자유의지를 꺾으신 것 아닌가?

 

2. 하나님 그리고 천국

 

하나님, 천국에 대해 직접 체험한적 없어 스베덴보리의 경험에 관해 아무말 할수 없고 그러려니 생각한다. 그냥 전체적으로 느낌은 영계란 지상과 구별되는 또다른 세계이고 지상과 참 비슷하다는 정도이고 평소에 막연하게 생각했던 하나님이나 천국보다는 오히려 작다는 느낌이다. 필자는 神과 천국은 시공간적 무한 그 이상이라고 생각했기에...

 

3. 자살 및 유아구원

 

이 부분은 정말 명쾌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한 결론이라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약간의 의문이 든다.

 

4. 우주론

 

스베덴보리의 저작中 "우주안의 지구들"이란 책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란 책에는 토성인, 수성인 같은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분명히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러한 언급이 전혀 없고 천국과 지옥에는 "지구인"만 산다고 하여 스베덴보리의 원저 내용과 상이하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오늘날의 시각과 맞지 않아 의도적으로 왜곡시킨듯 하다. 만약 스베덴보리가 인정한 외계인이 허무맹랑한 착각이었다면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작의 진위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최소한 그의 체험기와 이론이 100프로 진실은 아닐수도 있는 것이다

 

5. 그외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완전한 직접 계시라 하여 후대에 설립된 것이 새교회와 예수교회이고 이 책의 편역자 스베덴보리학회 역시 그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스베덴보리의 사상은 수많은 후대인에게 영감을 주었고 교훈적이며 흥미로운 부분이 많지만 그의 가르침을 이미 확립된 성경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많은 부작용을 낳으리라 본다. 성경의 그릇된 해석으로도 수많은 교회 분열과 이단이 난립하는데 한 개인의 사적 계시(환상일 수도 있고)를 절대시하면 이는 인간의 종교에 다름 아니다

 

6. 주의사항

 

교회와 성경을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에게는 혼란을 줄수 있는 책이다. 스베덴보리의 교리(성직자 아니고 교회 세운적도 없지만 보리의 가르침은 분명 종교적인 교리이다)중에서 삼위일체론, 자유의지 부분은 기존 교회의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방대하고 세부적인 서술은 통일교 같은 이단종교에서도 그대로 인정하고 다른 사이비교회에서 즐겨 인용, 변형, 추가하여 사용하는듯 하다. 세밀하고 방대하다 하여 반드시 진리란 보장은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 책은 독자의 상식에 호소하고자 성경에서 십계명, 주기도문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계명만 뽑아 인용하는데 그 해석의 오류는 없으나 하나님과 기독교와 성경을 인간의 상식선으로 끌어내려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다른 종교나 사상과 혼합시켜 버림으로써 진리와 비진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순전한 엉터리는 바로 표나지만 진리와 비진리의 절묘한 혼합은 웬만해서는 분간하기 어렵고 그 결론이 어떻게 날지도 모르니 본인으로서는 이 책을 흥미롭게 다 읽고도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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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

천당과 지옥에 대한 천주교 교리 입니다 ....참고 바람니다...

 

천당

천당이라는 말은 두 가지를 뜻한다. 현재 세상과 다른 상태를 뜻하고, 하느님이 계시는 곳에 우리가 있게 될 것이라는 인간의 희망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천당은 공간이나 장소가 아니지만 공간 개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구원의 대상은 인간인데, 인간은 부활한 몸으로 새로워진 우주 속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복락을 누릴 인간은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천당이라는 말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천당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전인적인 구원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구원받을 때 영혼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천당은 결코 영혼만이 행복을 누리는 곳이 아니다. 특별히 천당이라는 말은 인간의 희망을 잘 드러낸다. 죽은 다음에 하느님과 영원히 떨어져 사는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하느님을 안 믿겠다고 버티는 사람도 지옥보다는 천당에 가고 싶어 한다. 결국 천당은 인간이 가야 할 최후 목적지인 셈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천당은 없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덕분에 우리가 천당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없다면 천당도 없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천당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천당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천당의 성인들은 하느님을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천당에 있는 사람들은 매개체 없이 하느님을 계신 그대로 선명하고 명백하게 뵙는다. 이것을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 부른다.

 

천당의 의인들은 부활하신 성자의 인간성을 뵙고,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일치를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고 사람이라는 사실 파악은 지복직관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다. 성자의 인성은 일시적으로 취한 가면이 아니라 성자께서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당에 가게 되면, 인간이 되신 성자를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신비를 알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본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복직관을 하더라도 하느님의 본성 전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다 보여 주시지만, 피조물의 제한성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2) 의인들은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지옥의 가능성

지옥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한번 베푸신 사랑과 은총을 다시 거두어들이지 않는데, 사람들이 하느님의 그러한 사랑과 은총을 거절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지옥이다. 이처럼 지옥은 하느님께서 결코 원하지 않으시는 상태다. 그러므로 지옥에 대한 교리는 죄에서 출발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 대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을 거절함으로써 스스로 하느님과 단절된 상태 즉 지옥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에 의해 거부될 수 있는 사랑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결정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즉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과 단절된 지옥을 선택하는 것까지도 존중할 정도로 그렇게 인간의 자유와 결정을 존중하신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의 외아들까지 우리에게 주신 것이 그 증거다. 못된 인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 정도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신다.

 

비록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고 교회의 가르침에도 분명히 나타나지만 지옥은 그래도 역시 의아스럽다. 우리 인생의 최후 목적이 하느님인데, 하느님을 영원히 잃는 지옥이라는 모순이 과연 가능할까?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지옥 교리는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이 절대자 하느님을 모실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준다. 지옥 교리는 인간이 본래 하느님께 향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간다. 그래서 사실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본성이라는 물살을 거꾸로 헤엄쳐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 다만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를 거부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목적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결정에 상관없이 천당에 가도록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는 것처럼, 지옥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지옥이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모순이다.

 

대죄를 범해도 회개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 그러나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 하느님과 화해하기를 포기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 지옥은 일평생 하느님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베푸는 사랑을 배척하며 살아온 상태가 폭로되는 곳이다. 인간은 하느님이 자신의 최후 목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느님을 거부할 수 있는데, 이런 분열상태가 곧 지옥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상태를 자유롭게 원하여 일평생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원한 벌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벌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벌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이런 모순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의 최후 목적은 하느님인데, 하느님과 영원히 등지고 영원히 벌을 받는 지옥을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까?’ 그래서 지옥은 모순이다. 그러나 이런 모순은 있을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 천당을 선택하듯이 인간은 스스로 지옥을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도 죽음과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공연히 지옥을 만들어 놓고 인간을 괴롭히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옥은 하느님 편에서 볼 때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할 최악의 사태다. 위협이나 경고가 결코 아니라 하느님으로서는 어떻게든 막아야 할 최악의 위기상황이다.

 

 

지옥에 관한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
의인의 행복은 하느님을 직접 뵈옵는 것 자체를 말한다. 이러한 지복직관은 없어지거나 감소되지 않고 영원하다. 그러나 이러한 영복(永福)은 각 사람의 공로에 따라 차등이 있다.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고,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는 그리스도의 말씀 역시 영복의 차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복의 불공평성은, 우리가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영복이 우리에게 그냥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교리다. 저 사람이 이만큼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똑같은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은총의 무상성(無償性)을 모르는 유치한 생각이다. 성모 마리아가 받은 은총과 똑같은 은총을 달라고 주장할 권리가 우리에게 과연 있겠는가?

 

3) 지복직관은 죽는 순간 즉시 시작된다(교황 베네딕토 12세)
그렇지만 소죄 없이 죽는 의인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결국 직천당(直天堂)하는 사람은 순교자들뿐이라고 초대교회 때부터 생각해 왔다. 순교자들은 죽는 순간부터 즉시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 또한 죄가 없고 죄에 해당하는 벌이 없이 죽는 의인들도 죽는 순간에 지복직관을 누린다.

 

현대인들은 지옥에 상당히 거부감을 느낀다. 지옥 교리는 항상 현대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베르디세프(N. Berdiseff)라는 학자는 지옥은 남을 괴롭히려는 인간의 사악한 본능이 만들어낸 상상일 뿐이고, 영원한 지옥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현대인들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학자들은 지옥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3세기의 오리제네스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영원한 지옥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많은 교부가 오리제네스의 노선을 따라갔다. 그래서 상당히 오랫동안 신자들은 하느님이 지옥에서 신자들을 건져주실 것이고 영원히 저주받은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4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지옥 문제에 부딪혔다. ‘한 사람이라도 지옥의 고통을 당할 것을 하느님께서 아셨다면 하느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을까?’하고 고민했다.

 

 성경이 구원을 선포하지만 신약성경 안에는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60번 이상 등장한다. 예수님은 후기 유다교의 사상을 이어받아 당신의 설교 안에 지옥을 여러 번 언급하셨다. 특별히 예수님은 ‘게헨나’라는 공간적인 표상을 쓰면서 지옥을 말씀하셨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나 사목 서간, 요한 묵시록에도 지옥의 실재와 지옥 벌의 영원성이 여러 번 언급된다. 결국 신약성경은 사람들을 겁주려고 지옥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지옥을 단순히 신화로 간주하지 않고 지옥이 실제로 있음을 분명히 한다.

 

지옥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대죄가 있는 영혼들이 영원히 하느님을 잃고 벌을 받는 상태가 지옥이다.
전통적인 신학은 지옥 벌의 본질이 실고(失苦)라고 가르친다. 실고는 인생의 최후목적인 지복직관을 상실한 것을 말한다.

우리 인생의 최후목적은 하느님을 만나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 영혼은 하느님에게 가도록 창조되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헛된 것에 정신이 팔려 이 사실을 모르고 살다가 죽게 되면 속속들이 깨닫고 하느님께로 가고 싶어 애를 태운다. 그러나 애를 태우면 태울수록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리고 자기 탓으로 그렇게 되었고 값진 인생을 허송하였음을 생각할 때, 뼈아픈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느님을 만날 길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절망적인가? 영혼이 하느님을 잃어버려 모든 은총을 상실하고, 지성은 어두워져서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의지는 악으로 고정되어 버린다. 이것이 지옥 벌의 본질인 실고(失苦)다.

이에 덧붙여 각고(覺苦)라는 것도 있다. 각고는 하느님을 배척하고 피조물과 옳지 못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과 관계도 끊어지며 느끼는 고통을 말한다.

 

2) 지옥 벌은 영원히 간다.
성경은 지옥벌의 영원성을 가르친다. 천상복락이 영원하듯이 지옥 벌도 끝이 없다. 죽음으로써 인생의 시험기간은 끝나는 것이고 영혼의 상태가 개선될 여지가 없어진다. 나무가 한번 쓰러지면 쓰러진 그대로 있듯이, 대죄를 지닌 채 그대로 세상을 떠난 영혼은 악질로 고정되어 회개할 수 없으므로 그 죄악도 영원히 남을 것이고 그에 따르는 벌 역시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3) 대죄의 경중에 따라 지옥 벌이 서로 다르다.
다시 말해 지옥 벌에도 가볍고 무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천국 영혼들이 공로에 따라 복을 더 받고 덜 받고 하는 것처럼, 지옥 영혼들도 죄악의 크고 작음에 따라 벌을 더 받거나 덜 받는다.

2009.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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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평화방송 이중섭신부님 가톨릭교리 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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