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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천국,지옥,연옥
프린켑스 조회수 7,750 작성일2009.03.10

 

 

천국 지옥 연옥에 대해서 가르쳐 주세요

 

 

간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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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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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간단하게라는 말에 초점을 두고 정말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천국은 천사들과 성인들이 하느님을 모시고 끝없는 복락을 누리는 곳을 말합니다.

 

지옥은 마귀들과 악인들이 혹독한 형벌을 끊임없이 받는 곳을 말합니다.

 

연옥은 세상을 떠날 때 완전한 보속을 하지 못한 영혼이 천국에 들어 갈때까지 정화를 받는 곳을 말합니다.

 

 

끝으로 하느님의 심판 기준은 인간의 눈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찌보면 죄를 짓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일 수 있습니다. ^^

2009.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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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천당
 

 천당이라는 말은 두 가지를 뜻한다. 현재 세상과 다른 상태를 뜻하고, 하느님이 계시는 곳에 우리가 있게 될 것이라는 인간의 희망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천당은 공간이나 장소가 아니지만 공간 개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구원의 대상은 인간인데, 인간은 부활한 몸으로 새로워진 우주 속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복락을 누릴 인간은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천당이라는 말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천당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전인적인 구원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구원받을 때 영혼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천당은 결코 영혼만이 행복을 누리는 곳이 아니다. 특별히 천당이라는 말은 인간의 희망을 잘 드러낸다. 죽은 다음에 하느님과 영원히 떨어져 사는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하느님을 안 믿겠다고 버티는 사람도 지옥보다는 천당에 가고 싶어 한다. 결국 천당은 인간이 가야 할 최후 목적지인 셈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천당은 없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덕분에 우리가 천당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없다면 천당도 없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천당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천당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천당의 성인들은 하느님을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천당에 있는 사람들은 매개체 없이 하느님을 계신 그대로 선명하고 명백하게 뵙는다. 이것을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 부른다.

천당의 의인들은 부활하신 성자의 인간성을 뵙고,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일치를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고 사람이라는 사실 파악은 지복직관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다. 성자의 인성은 일시적으로 취한 가면이 아니라 성자께서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당에 가게 되면, 인간이 되신 성자를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신비를 알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본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복직관을 하더라도 하느님의 본성 전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다 보여 주시지만, 피조물의 제한성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2) 의인들은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의인의 행복은 하느님을 직접 뵈옵는 것 자체를 말한다. 이러한 지복직관은 없어지거나 감소되지 않고 영원하다. 그러나 이러한 영복(永福)은 각 사람의 공로에 따라 차등이 있다.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고,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는 그리스도의 말씀 역시 영복의 차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복의 불공평성은, 우리가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영복이 우리에게 그냥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교리다. 저 사람이 이만큼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똑같은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은총의 무상성(無償性)을 모르는 유치한 생각이다. 성모 마리아가 받은 은총과 똑같은 은총을 달라고 주장할 권리가 우리에게 과연 있겠는가?

3) 지복직관은 죽는 순간 즉시 시작된다(교황 베네딕토 12세)
그렇지만 소죄 없이 죽는 의인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결국 직천당(直天堂)하는 사람은 순교자들뿐이라고 초대교회 때부터 생각해 왔다. 순교자들은 죽는 순간부터 즉시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 또한 죄가 없고 죄에 해당하는 벌이 없이 죽는 의인들도 죽는 순간에 지복직관을 누린다.

 
동방교회의 연옥교리
 

연옥이라는 용어는 벌을 받는 지옥과 같은 장소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이것은 죄와 벌을 법률적으로 생각했던 우리 서방교회의 신학이 만들어 낸 문제점이다. 동방교회의 연옥 교리는 전혀 다르다. 동방교회는 연옥이 하느님과 만날 준비를 하는 기쁜 과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서방교회 신학자들은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법률주의적으로 생각했다. 대장간에서 쇠를 불에 달구어 두들겨 모양을 만들어가듯이, 죽은 사람도 연옥불의 단련을 받으며 벌을 기워 갚고 하느님께서 원하는 모양으로 바뀌어야 천당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것은 연옥불의 고통을 강조하는 대중신심에서 나온 사상이다. 이처럼 동방교회가 하느님과 만남을 준비하는 마지막 정화과정에 역점을 둔 반면, 서방교회는 벌을 기워 갚는 고통스러운 감옥이라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연옥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고안하는 등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즉 죄나 잠벌이 있는 상태로 죽은 사람들의 경우 정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과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옥 교리가 가능한 근거는 세 가지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과 죽은 다음 영생으로 들어가려면 정화가 필요하다는 것과 중간상태(中間狀態)에 대한 사상이다. 중간상태란 죽는 순간부터 공심판 사이의 기간을 말하는데, 모든 것이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고 우리 인생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신비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관습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다. 교회는 천당에 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그분들은 이미 하느님 안에서 지복직관을 누리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 또 교회는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는다. 지옥이란 일단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기에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교회는 죽은 이들 중에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여기서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이란 대죄 속에 죽은 사람이 아니라 소죄나 혹은 죄에 해당하는 보속을 다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아주 초기부터 기도했다는 증거는 로마의 지하묘지에서 발견된 비석, 교부들의 문헌, 동방교회의 성찬기도문 들에 나타난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상과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다. 죽은 이들은 비록 죽었어도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지상교회인 우리와 한 몸을 이룬다. 지상교회는 죽은 이들과 한 몸이기 때문에 기도와 희생을 통해 죽은 이들의 정화과정에 동참할 수 있다. 결국 연옥 교리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상과 성인들의 통공 교리로 요약될 수 있다.

연옥 교리의 근원은 중간상태를 믿은 후기 유다교에서 찾을 수 있다. 중간상태의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2세기말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스(+217)다. 클레멘스는 코린토 전서 3장 10-15절에 나오는 불을 통한 심판 사상에 근거하여, 성장하고 정화되어 가는 인간의 최후과정을 언급했다. 이렇게 정화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정화되는 영혼은 그리스도의 몸과 관계를 가지고 발전해 완성에 도달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로 결정한 사건은 세례성사인데, 우리의 이러한 결정은 죽은 다음에도 효과를 내고 마침내 완성에 도달한다. 클레멘스의 제자인 오리제네스 역시 불을 통한 정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의인은 불을 통해 완전히 정화되고 악인은 지옥불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동방교회의 연옥 교리는 5세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와서 정립되고 더는 발전하지 않았다. 연옥은 기쁨의 정화 시기라는 교리가 정립되었는데 그 이상 무슨 교리가 더 필요하겠는가?

연옥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동방교회의 연옥 교리는 5세기에 완성되었지만, 서방교회의 연옥 교리는 상당히 오랜 기간을 두고 상당히 다른 측면을 강조하면서 발전했다.

서방교회의 연옥 교리에는 3세기 초 테르툴리아노의 ‘페르페투아의 순교기’가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서 그는 죽은 이들이 후세에서 고통을 받지만 교회의 기도 덕분에 고통이 덜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혼에 대하여’(De anima)라는 책에서는 마태오 복음 5장 26절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는 구절을 두고, 살아 있는 동안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한 자들은 하데스에 갇혀 있으면서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아야 한다고 해석했다. 서방교회의 연옥 교리의 핵심, 즉 정화보다는 형벌에 역점을 두면서 연옥이 감옥이라고 생각하는 서방교회의 연옥 교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258년 순교한 카르타고의 주교 성 치프리아노는 테르툴리아노의 견해를 바탕으로 사목적인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 당시는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던 시기였는데, 배교자들 중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와 보속하기를 원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배교자들이 교회로 돌아와 보속생활을 하다가 죽으면 후세에 가서도 보속생활을 계속하고 결국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지상교회 안에서 시작된 보속생활을 교회와 함께 후세에도 계속할 수 있고, 지상에서 시작된 정화가 후세에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교자들이 지상에서 한 정화와 보속이 불완전하더라도 교회가 그것을 완성한다고 생각했다. 테르툴리아노와는 달리 치프리아노 주교는 처벌보다는 정화를 강조했던 것이다.

연옥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소죄나 잠벌이 있으면 연옥에 간다.이는 죽은 뒤 하느님과 일치하려면 정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잠벌이 있다면 후세에 가서 연옥벌을 통해 잠벌을 없애야 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연옥교리에서 동방교회와 일치를 확인한 13세기 리옹 공의회(1274년)와 15세기 피렌체 공의회(1439-1441년)가 ‘연옥불’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린토 전서 3장 10-15절에는 심판의 불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데, 공의회는 왜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일까? 그것은 심판의 심각함과 준엄함을 말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실제 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옥불’은 다른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죽게 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얼마나 많이 배반했는지 깨닫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당분간 하느님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슬픔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은 연옥에서 당하는 고통의 핵심이다. 이처럼 ‘연옥불’은 연옥 영혼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연옥 영혼의 애타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교회가 가르치는 연옥 교리는 후세에서도 우리가 정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실제로 정화될 필요가 있음을 동시에 말한다. 인간은 죽은 다음에도 변화와 정화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 죽은 이들은 그리스도와 교회 덕분에 정화돼 그리스도의 품안에 들게 될 것이고, 그리 되면 마지막 날에 마침내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될 것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시작한 성화와 정화는 후세에 가서도 지속될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연옥 교리에서 교회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산 이와 죽은 이들 사이에 중개역할을 한다. 죽은 이들은 교회 덕분에 그리고 교회를 통해 지상에서 시작한 정화과정을 계속한다. 미사 성찬 기도문에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항상 들어가는데, 이것은 성인들의 통공 교리를 재확인하며 교회가 산 이와 죽은 이들을 맺어준다는 증거다.

2) 연옥은 공심판 뒤까지 연장되지 않는다. 공심판으로써 모든 사람의 정화과정이 완성되기 때문에 연옥이 더는 필요 없다.

 
지옥에 관한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
 

 현대인들은 지옥에 상당히 거부감을 느낀다. 지옥 교리는 항상 현대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베르디세프(N. Berdiseff)라는 학자는 지옥은 남을 괴롭히려는 인간의 사악한 본능이 만들어낸 상상일 뿐이고, 영원한 지옥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현대인들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학자들은 지옥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3세기의 오리제네스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영원한 지옥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많은 교부가 오리제네스의 노선을 따라갔다. 그래서 상당히 오랫동안 신자들은 하느님이 지옥에서 신자들을 건져주실 것이고 영원히 저주받은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4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지옥 문제에 부딪혔다. ‘한 사람이라도 지옥의 고통을 당할 것을 하느님께서 아셨다면 하느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을까?’하고 고민했다.

 성경이 구원을 선포하지만 신약성경 안에는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60번 이상 등장한다. 예수님은 후기 유다교의 사상을 이어받아 당신의 설교 안에 지옥을 여러 번 언급하셨다. 특별히 예수님은 ‘게헨나’라는 공간적인 표상을 쓰면서 지옥을 말씀하셨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나 사목 서간, 요한 묵시록에도 지옥의 실재와 지옥 벌의 영원성이 여러 번 언급된다. 결국 신약성경은 사람들을 겁주려고 지옥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지옥을 단순히 신화로 간주하지 않고 지옥이 실제로 있음을 분명히 한다.

지옥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대죄가 있는 영혼들이 영원히 하느님을 잃고 벌을 받는 상태가 지옥이다.
전통적인 신학은 지옥 벌의 본질이 실고(失苦)라고 가르친다. 실고는 인생의 최후목적인 지복직관을 상실한 것을 말한다.

우리 인생의 최후목적은 하느님을 만나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 영혼은 하느님에게 가도록 창조되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헛된 것에 정신이 팔려 이 사실을 모르고 살다가 죽게 되면 속속들이 깨닫고 하느님께로 가고 싶어 애를 태운다. 그러나 애를 태우면 태울수록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리고 자기 탓으로 그렇게 되었고 값진 인생을 허송하였음을 생각할 때, 뼈아픈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느님을 만날 길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절망적인가? 영혼이 하느님을 잃어버려 모든 은총을 상실하고, 지성은 어두워져서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의지는 악으로 고정되어 버린다. 이것이 지옥 벌의 본질인 실고(失苦)다.

이에 덧붙여 각고(覺苦)라는 것도 있다. 각고는 하느님을 배척하고 피조물과 옳지 못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과 관계도 끊어지며 느끼는 고통을 말한다.

2) 지옥 벌은 영원히 간다.
성경은 지옥벌의 영원성을 가르친다. 천상복락이 영원하듯이 지옥 벌도 끝이 없다. 죽음으로써 인생의 시험기간은 끝나는 것이고 영혼의 상태가 개선될 여지가 없어진다. 나무가 한번 쓰러지면 쓰러진 그대로 있듯이, 대죄를 지닌 채 그대로 세상을 떠난 영혼은 악질로 고정되어 회개할 수 없으므로 그 죄악도 영원히 남을 것이고 그에 따르는 벌 역시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3) 대죄의 경중에 따라 지옥 벌이 서로 다르다.
다시 말해 지옥 벌에도 가볍고 무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천국 영혼들이 공로에 따라 복을 더 받고 덜 받고 하는 것처럼, 지옥 영혼들도 죄악의 크고 작음에 따라 벌을 더 받거나 덜 받는다.

 지옥의 가능성
 

 지옥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한번 베푸신 사랑과 은총을 다시 거두어들이지 않는데, 사람들이 하느님의 그러한 사랑과 은총을 거절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지옥이다. 이처럼 지옥은 하느님께서 결코 원하지 않으시는 상태다. 그러므로 지옥에 대한 교리는 죄에서 출발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 대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을 거절함으로써 스스로 하느님과 단절된 상태 즉 지옥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에 의해 거부될 수 있는 사랑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결정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즉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과 단절된 지옥을 선택하는 것까지도 존중할 정도로 그렇게 인간의 자유와 결정을 존중하신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의 외아들까지 우리에게 주신 것이 그 증거다. 못된 인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 정도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신다.

 비록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고 교회의 가르침에도 분명히 나타나지만 지옥은 그래도 역시 의아스럽다. 우리 인생의 최후 목적이 하느님인데, 하느님을 영원히 잃는 지옥이라는 모순이 과연 가능할까?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지옥 교리는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이 절대자 하느님을 모실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준다. 지옥 교리는 인간이 본래 하느님께 향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간다. 그래서 사실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본성이라는 물살을 거꾸로 헤엄쳐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 다만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를 거부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목적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결정에 상관없이 천당에 가도록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는 것처럼, 지옥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지옥이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모순이다.

대죄를 범해도 회개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 그러나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 하느님과 화해하기를 포기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 지옥은 일평생 하느님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베푸는 사랑을 배척하며 살아온 상태가 폭로되는 곳이다. 인간은 하느님이 자신의 최후 목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느님을 거부할 수 있는데, 이런 분열상태가 곧 지옥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상태를 자유롭게 원하여 일평생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원한 벌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벌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벌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이런 모순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의 최후 목적은 하느님인데, 하느님과 영원히 등지고 영원히 벌을 받는 지옥을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까?’ 그래서 지옥은 모순이다. 그러나 이런 모순은 있을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 천당을 선택하듯이 인간은 스스로 지옥을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도 죽음과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공연히 지옥을 만들어 놓고 인간을 괴롭히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옥은 하느님 편에서 볼 때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할 최악의 사태다. 위협이나 경고가 결코 아니라 하느님으로서는 어떻게든 막아야 할 최악의 위기상황이다..........님에게 도움이 됬으면 합니다...샬롬

 

2009.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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