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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개신교 신자인데 지옥형벌의 영구성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비공개 조회수 3,591 작성일2017.08.11
저는 모태신앙으로 개신교 신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읽을 수록

인자를 믿는 성도 이외에 다른 모든 사람이
죄의 높고 낮음에 상관 없이 동일한 지옥형벌을 받는다

라는 개신교의 교리에 문제가 있다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역사를 찾아봐도 기독교의 역사로 시작점에 있는
유대교와 천주교는 연옥과 사망 후 정화에 대한 개념이 교리로 있는데
이슬람교와 개신교만 연옥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개신교는 구원은 특정인원에게만 하나님에게서
내려지는 것이라는 칼빈주의랑

인자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으나 구원을 잃을 수도 있는
구원 대상이 완전히 정해지지는 않은 알미니즘주의로 이어지던데,

지옥 형벌이 영원하고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아닌가요?


잠시 성경을 인용해서 질문하자면


심판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 한 일도 명백해질 것입니다그날은 불로 나타날 것입니다.그리고 저마다 한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불이 가려낼 것입니다어떤 이가 그 기초 위에 지은 건물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삯을 받게 되고어떤 이가 그 기초 위에 지은 건물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입게 됩니다그 자신은 구원을 받겠지만 불 속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듯 할 것입니다. (고린 3장 13-15절)


나는 또 어좌들을 보았는데, 그 위에 앉은 이들에게 심판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의 상에 경배하지도 않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나머지 죽은 이들은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부활입니다.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이는 행복하고 또 거룩한 사람입니다.  (묵시 20:4-5)

불속에서 겨우 목숨 건지듯 하기도 하고,
나머지 죽은 이들이 천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했다는 건,

일단 연옥의 유무에서 떠나서

지옥 형벌이 영원한게 아니라, 그냥 지옥이 영원히 존재하는 거고
사람에 있어서 지옥 형벌에 끝도 있고 지옥에서도 구원이 있다는 뜻 아닌가요?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 20:7~15)

또 보면 인자의 날 이후에도 천년 뒤에 사탄도 풀려나오는데,
지옥형벌이 영원한 거라면 사탄은 일단 안 풀려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또 이해가 안 가는게 미국의 사도신경도 보면

1.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2. creator of heaven and earth.
3. I believe in Jesus Christ, 
4. his only Son, our Lord.
5. He was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6. and born of the Virgin Mary.
7. He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8.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9. He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에서 아홉 번째 고백이 우리 말과 어긋남이 있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지금 사도신경 외우기를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로 외웠는데

'He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는 그분이 지옥으로 내려가시고 사흘 째에 다시 부활하셨다가 맞지 않나요?


그가 성령으로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서 전파하셨으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셨을 때에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이 몇 명뿐이니 곧 여덟 혼들이라 (벧전 3:19,20)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그처럼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 (마 12:40)

따라서 그가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먼저 내려가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내려가셨던 그가 모든 하늘들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니 그가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려 함이니라(엡 4:9,10)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또 주의 거룩하신 분으로 썩어짐을 보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그가 미리 앞을 내다봄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한 것은, 주의 혼이 지옥에 버려지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육신도 썩어짐을 보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라 (행 2:27,31)

이런 연유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과 일치하여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과 일치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벧전 4:6).

위 구절들이 거듭 고백하는 내용들은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사흘 동안 그냥 땅에
묻혀 계시거나 천국에서 계셨던게 아니라,

대상은 명확하진 않지만 어떻든 인자가 직접
천국 아닌 곳에 가셔서 불순종해서 한번 죽었던 사람들에 복음을 전파했다면
죽음 이후에 구원 될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면 벧전 4장 6절에 언급된 죽은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과,
벧전 3장 19절에 언급된 불순종으로 감옥에 갇힌 자들이 서로 다른 사건들이여서

불순종한 사람들한테는 그냥 선포만 하고
원래 구원대상이였던 구약시절 죽은 사람들한테
그 이후로 한번 더 가셔서 거기서 복음을 전파한 것인지...


위에 것들을 다 제쳐놓고서 일단
제가 성경에서 읽은 주님 사랑에 대한 구절은

사람과 영구히 싸우시지는 않으신다던가,
사람의 불완전함을 아시고 고침받게 하려하시고,

또 사탄에 대한 심판도 한참동안 미뤄놓으셨다가
천년동안 지옥에 가두시고 그 후에 한번 풀어주실 정도로
회개를 바라시는 주님이라고 생각되고,

자기 외아들을 희생시켜서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게하고
그 이전의 심판 대상들은 한명도 심판 안하고
인자한테 심판권한을 주시고 믿지 않는 사람이였던

사르밧 과부의 아이를 엘리야의 청원기도로 되살려서
한번 더 아이가 엄마랑 같이 살 수 있게 하여주신 주님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사르밧과부는 바알을 숭배했던 사람이였고 그럼
아이가 불신자였을 확률도 높았을테고,

만약 그럼 그아이도 지옥형벌의 대상일텐데도

주님이 엘리야의 청원으로 살려주셨다면,
그 아이는 최소한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자기가
부활 되었으니까 믿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면 다른 수많은 경우를 제쳐두고
그 아이는 사망 이후의 두번째 구원 기회를 얻은 것 아닐까요?..


저는 모태 신앙으로 개신교 신앙을 받았고,
또 그게 엄청난 은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주님의 불산자에 대한 애증이 불신자가 사망한 후에는
없어질 것이란 개신교의 교리에 너무 큰 의문이 듭니다.


천주교로 개종을 해야하나 싶긴한데
주변 가족들 다 당황할게 눈에 보이기도 하고..

천주교는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성모를 너무 존격체 이상으로 인자 이외에 기도의 중보가 가능한
중보자급으로까지 높이는 것이 납득 안되기도 하고...


여러모로 혼란스럽습니다. 저에게 지식을 주실
형제자매 분들의 답변 꼭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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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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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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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대죄가 있는 영혼들이 영원히 하느님을 잃고 벌을 받는 상태가 지옥이다.


전통적인 신학은 지옥 벌의 본질이 실고(失苦)라고 가르친다. 실고는 인생의 최후목적인 지복직관을 상실한 것을 말한다.


우리 인생의 최후목적은 하느님을 만나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 영혼은 하느님에게 가도록 창조되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헛된 것에 정신이 팔려 이 사실을 모르고 살다가 죽게 되면 속속들이 깨닫고 하느님께로 가고 싶어 애를 태운다. 그러나 애를 태우면 태울수록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리고 자기 탓으로 그렇게 되었고 값진 인생을 허송하였음을 생각할 때, 뼈아픈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느님을 만날 길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절망적인가? 영혼이 하느님을 잃어버려 모든 은총을 상실하고, 지성은 어두워져서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의지는 악으로 고정되어 버린다. 이것이 지옥 벌의 본질인 실고(失苦)다.


이에 덧붙여 각고(覺苦)라는 것도 있다. 각고는 하느님을 배척하고 피조물과 옳지 못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과 관계도 끊어지며 느끼는 고통을 말한다.


2) 지옥 벌은 영원히 간다.


성경은 지옥벌의 영원성을 가르친다. 천상복락이 영원하듯이 지옥 벌도 끝이 없다. 죽음으로써 인생의 시험기간은 끝나는 것이고 영혼의 상태가 개선될 여지가 없어진다. 나무가 한번 쓰러지면 쓰러진 그대로 있듯이, 대죄를 지닌 채 그대로 세상을 떠난 영혼은 악질로 고정되어 회개할 수 없으므로 그 죄악도 영원히 남을 것이고 그에 따르는 벌 역시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3) 대죄의 경중에 따라 지옥 벌이 서로 다르다.


다시 말해 지옥 벌에도 가볍고 무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천국 영혼들이 공로에 따라 복을 더 받고 덜 받고 하는 것처럼, 지옥 영혼들도 죄악의 크고 작음에 따라 벌을 더 받거나 덜 받는다.


1033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로 자유로이 선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분과 결합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이나 이웃이나 우리 자신에 대해 중한 죄를 짓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1요한 3,14-15). 우리 주님께서는 만일 우리가 그분의 형제들인 가난한 사람들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기를 소홀히 한다면 당신과 갈라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죽을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은 곧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우리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옥’이라는 말은 이처럼 하느님과 또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 일컫는다.


1034예수님께서는 믿고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는 ‘지옥’(Gehenna)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 그곳에서는 영혼과 육신이 함께 멸망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그들은 그의 나라에서……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마태 13,41-42) 하고 엄숙히 선언하시며, “저주받은 자들아나에게서 떠나……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 25,41) 하고 단죄하실 것이다.


1035교회는 지옥의 존재와 그 영원함을 가르친다. 죽을 죄의 상태에서 죽는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다음 곧바로 지옥으로 내려가며, 그곳에서 지옥의 고통, 곧 “영원한 불”의632) 고통을 겪는다. 지옥의 주된 고통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며 인간이 갈망하는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다.


1036지옥에 대한 성경의 단언과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위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라는 호소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이기도 하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주님의 경고대로 우리는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므로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단 한 번뿐인 우리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친 다음에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 축복받은 이들과 함께 헤아려질 수 있을 것이며, 악하고 게으른 종들처럼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거나 바깥 어둠 속에 내쫓아 거기에서 절치 통곡하게 하라는 명령을 듣지 않을 것이다.


1037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신다. 자유 의사로 하느님께 반항하고(죽을 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함으로써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미사 전례와 신자들의 일상 기도를 통하여 교회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2베드 3,9)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빈다.


주님, 저희 봉사자들과 온 가족이 바치는

이 예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소서.

저희를 한평생 평화롭게 하시며

영원한 벌을 면하고 뽑힌 이들의 무리에 들게 하소서.


2017.08.12.

  • 출처

    가톨릭교회 교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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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
지존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네.

먼저 질문자님의 글로서 느껴지는 것은 '스스로 깨어 생각할 줄 아시는 성도'분으로 보여집니다.

아시다시피. 교리는 그저 교리 일뿐. '진리'는 아닌거구요.

요한계시록은 환상을 기록했다 하는 것으로.
사실 그 환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으니까요.

천년을 단지 '오랜 기간'을 상징한다 주장하기도 하는 등. 환상과 비유 해석이란. 하나님이 공식 선포하기 이전엔 그 답을 절대 알 수 없다 할 수 있습니다.

사실. .
성경이라는 것이. 성경무오설도 그저 '설'이듯.

과거 로마에 의해 편집되고 첨가되는 과정이 없었다 확신 할 순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저 '서로 사랑하라'라는 지상명령을 최고로 여기며, 순결한 주의 종이 되어 위의 계명을 지키며 모든 진리가 밝히 알려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고이자. 최선이라 할 수 있는데요.

큰 선택지가 개신교. 천주교 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게 생각이 들며. 말씀 한 가지 남기고 가겠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에서 일꾼들은 각자 일에 참여한 시간이 다르며.
그와 동시에 보상에 대한 개념도 다릅니다.

첫째 일꾼은 확실한 보상을 약속 받은 상태고 뒤로 갈수록 보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체 일하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모두는 같은 보상을 받게 되고 심지어 제일 하나님의 일을 적게 한 것처럼 여겨지는 마지막 일꾼들이 더 좋은 대우로 먼저 보상 받는 자들이 되는데요.

이처럼 미래에는 먼저 된 이들이 나중되고 나중 된 이들이 먼저 된다 합니다.

자. 과연 위 비유의 일꾼들이 현재의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누가 가장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교회 출석 열심히 하고. 헌금 꼬박꼬박 잘 내고. 본인은 천국에 간단 확신을 하며. 구원의 방법에 확신한 상태로 타인은 지옥에 가라 저주하는 첫번째 일꾼은 누굽니까?

교회에는 잘 가지 않고. 보상은 어떤지 잘 모르고. 그저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상명령인.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누굽니가까? 그저 사람에게 친절하고 배려심 깊으나. 사람들 눈에 보이기에는 하나님의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있는 마지막 일꾼들은 누굴까요?


이처럼 사람들 생각과는 다르게 사실 천국은 모두가 가게 될 겁니다.

완전한 규칙의 새 세상에서. 이기심 없이 사랑으로 가득한 그곳에 모두가 새 모습으로. 사랑만 가득한 상태로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선포에 일부는 기뻐하지 못하고.
내 애인 내 가족 내 친구들 모두가 천국에 감을 기뻐하지 못하고. 선한 주인을 향해 항의하는 이기심을 보일겁니다.

이들 조차도 모든 계획이 끝나고 나면 이기심은 사라지고 사랑만 남겨서 새 땅으로 데려가긴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세상에 남겨져 많은 고난을 겪을 것은 피하지 못할거라 합니다.

이 이야기를 오해하여 로마에서는 탕자의 비유를 만들어 넣게 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일이 많이지겠다는 미래의 예언은 빼고.

그저 교회내에 성도들 이야기인척 둔갑시켜. .

드린 이야기가 도움되어 평안 얻으셨으면 합니다.
늘 행복하세요.

2017.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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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을 원하시나요?  성경이 어떻게 가르치는지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원하시면 성경연구를 청하실 수 있습니다, 무료로 둘이서 할 수 있습니다,


 지옥
정의: “지옥”이란 단어는 많은 성서 번역판에 나온다. 다른 번역판에는 동일한 구절들이 “무덤”, “죽은 자의 세계” 등으로 되어 있다. 일부 성서에서는 종종 “지옥”으로 번역되는 단어의 원어를 단순히 음역한다. 즉 그 원어를 자국어의 글자로 표시하지만 번역은 하지 않은 채로 둔다. 히브리어 스올과 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하이데스는 개인 매장지가 아니라 죽은 인류의 일반 무덤을 가리킨다. 그리스어 게엔나는 영원한 멸망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국과 많은 비그리스도교 종교에서는 지옥이란 악귀들이 거하고 있고 악인들이 죽은 후에 벌을 받는 장소라고 가르친다. (또한 거기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성서는 죽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지에 대하여 알려 주는가?
전도 9:5, 10: “산 자들은 자기들이 죽을 것임을 의식하지만, 죽은 자들은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 네가 해야 할 바로서 네 손이 찾아 낸 일은 무엇이든 네 힘을 다하여 하여라. 네가 들어갈 곳인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한다면,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임이 분명하다.)(*“무덤”, 왕역, 녹스; “지옥”, 두에; “죽은 자의 세계”, 오영성; “스올”, 미표, 개표, 신영성, 예루살렘)
시 146:4: “그의 영이 나가면 그는 그 흙으로 돌아가고, 그 생각*도 그 날로 소멸되고 만다.” (*“생각”, 왕역, 두에의 경우에는 145:4; “기획”, 예루살렘; “계획”, 개표, 오영성)
성서는 몸이 죽을 때 영혼은 살아남는다는 암시를 하는가?
에스겔 18:4: “죄를 짓는 영혼*—그것이 죽을 것이다.” (*“영혼”, 왕역, 두에, 개표, 신영성, 녹스; “사람”, 예루살렘; ‘자’, 오영성)
“‘육체’와 분리되며 비물질적이고 순전히 영적인 존재라는 ‘영혼’에 대한 개념은 ··· 성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조르주 오주 저 「신의 약속」(La Parole de Dieu)(파리 1960년판), 128면, 프랑스, 루앙 신학교 성서학 교수.
“비록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 네페시가 종종 ‘영혼’으로 번역되기는 하지만, 그 말을 그리스어의 뜻으로 해석하면 부정확한 것이 된다. 네페시는 결코 ··· 육체와 분리되어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신약에서 그리스어 단어 프시케가 종종 영혼으로 번역되지만 이 단어 역시 그리스 철학자들이 알고 있던 그런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쉽사리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단어는 언제나 ‘생명’ 또는 ‘활력’을 의미하며 때로는 ‘그 자신’을 의미한다.”—「아메리카나 백과사전」(1977년판), 25권, 236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성서의 지옥으로 가는가?
성서는 악인들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는가?
시 9:17, 개역: “악인이 음부[“지옥”, 왕역, 두에는 9:18; “죽음”, 오영성; “죽음의 장소”, 녹스; “스올”, 미표, 개표, 신영성, 예루살렘, 신세]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성서는 정직한 사람들도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는가?
욥 14:13, 개역: “[욥이 기도하기를] 주는 나를 음부[“지옥”, 두에; “무덤”, 왕역; “죽은 자의 세계”, 오영성; “스올”, 미표, 개표, 신영성, 예루살렘, 신세]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느님께서는 친히 욥이 “나무랄 데 없고 올바르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나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욥 1:8.)
사도 2:25-27, 개역: “다윗이 저[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가로되 ··· 이는 내 영혼을 음부[“지옥”, 왕역, 두에; “죽음”, 신영성; “죽음의 장소”, 녹스; “죽은 자의 세계”, 오영성; “하데스”, 미표, 개표, 예루살렘, 신세]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지옥에 ‘버려’두시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적어도 한동안 지옥 또는 하데스에 계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성서의 지옥에서 풀려 나올 사람이 있을 것인가?
계시 20:13, 14, 개역: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지옥”, 왕역, 두에, 녹스; “죽은 자의 세계”, 오영성; “하데스”, 신영성, 미표, 개표, 예루살렘, 신세]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더라].”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 지옥에서 나올 것이다. 또한 지옥은 불못과 같은 곳이 아니라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는 점에 유의하라.)
지옥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에 혼란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초기 성서 번역자들이 히브리어 스올과 그리스어 하데스와 게헨나를 모두 지옥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큰 혼란과 오해가 생겼다. 성서의 개정판들을 번역한 사람들이 그 단어들을 단순히 음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혼잡과 오해를 확실히 없애기에는 역부족이었다.”—「아메리카나 백과사전」(1942년판), 14권, 81면.
번역자들은 원어의 단어들을 일관성있게 번역하지 않고 개인적인 믿음을 가미하여 왜곡하였다. 예를 들면: (1) 「왕역」에서는 스올을 “지옥”, “무덤” 및 “구덩이”로 번역하였으며, 하이데스를 “지옥”과 “무덤”으로, 게엔나 역시 “지옥”으로 번역하였다. (2) 「오늘의 영어 성서」는 하이데스를 “하데스”로 음역하면서 또한 그 단어를 “지옥”과 “죽은 자의 세계”로도 번역한다. 게다가 하이데스를 “지옥”으로 번역하면서도, 게엔나를 그와 동일하게 번역한다. (3) 「예루살렘 성서」에서는 하이데스를 여섯 번은 음역하지만, 다른 구절에서는 “지옥”과 “지하의 세계”로 번역한다. 또한 하이데스를 두 경우에 “지옥”으로 번역하면서 게엔나도 그렇게 번역한다. 그로 인해 원어의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가 모호해졌다.
악인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있는가?
마태 25:46, 개역: “저희는 영벌[“잘라냄”, 행간; 그리스어, 콜라신]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임패틱 다이어글롯」에는 “영벌” 대신에 “끊어짐”으로 되어 있다. 각주에서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콜라신은 콜라주에서 유래하였는데 후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잘라내다; 나무에서 가지를 잘라내는 것처럼, 베어내다. 2. 억제하다, 억압하다. ··· 3. 처벌하다, 벌하다. 한 개인을 생명 또는 사회에서 끊어버리는 것 혹은 속박하는 것은 형벌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그 단어의 세 번째 은유적인 사용법이 생겨났다. 첫 번째 의미가 본문의 후반절과 더욱 잘 부합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채택하여, 대조의 힘과 아름다움을 보존하였다. 의인은 생명에 이르고 악인은 생명에서 끊어짐 즉 죽음에 이른다. 참조 데살로니가 둘째 1:9.”)
데살로니가 후 1:9, 개역: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영원한 파멸”, 신미성, 신영성; “영원히 없어짐”, 예루살렘; “영원한 형벌을 내림”, 녹스; “영원한 형벌인 멸망”, 두에]을 받으리로다.” (사체로는 본서에서)
유다 7, 개역: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불은 수천년 전에 꺼졌다. 그러나 그 불로 인한 결과는 지속되어 왔으며, 그 도시들은 재건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느님의 심판은 그 도시들뿐만 아니라 그곳의 악한 거민들에게도 내려졌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경고의 본보기가 된다. 누가 17:29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멸”하여졌다고 말씀하셨으며, 유다 7절은 그 멸망이 영원한 것이라고 알려 준다.)
계시록에 언급되어 있는 ‘영원한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계시 14:9-11; 20:10: “누구든지 야수와 그 형상을 숭배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느님의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진노의 잔에 묽게 하지 않고 부어지는 것이다. 그는 거룩한 천사들이 보는 데서 그리고 ‘어린 양’이 보는 데서 불과 유황으로 심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심한 고통[그리스어 바사니스무]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갈 것이며, 야수와 그 형상을 숭배하는 자들과 또 누구든지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들은 주야로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릇 인도하던 마귀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졌는데, 거기에는 이미 야수와 거짓 예언자가 있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주야로 심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이 성구들에 언급되어 있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계시록 11:10에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심한 고통을 주는 예언자들’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한 고난은 그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소식들로 인한 치욕적인 폭로의 결과이다. 계시록 14:9-11에는 상징적인 “야수와 그 형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불과 유황으로 심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사후에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 될 수 없다. “죽은 자들은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도 9:5)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그러한 고통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야수와 그 형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으로 상징된 둘째 사망을 받으리라는, 하느님의 종들이 발하는 선포 때문이다. 연기가 영원히 피어오르는 것은 철저한 멸망과 관련이 있는데, 그 멸망이 영원하고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록 20:10에서는 마귀가 “불과 유황의 못”에서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알려 주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시록 21:8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 “둘째 사망”을 의미한다고 명백히 말한다. 그러므로 마귀가 거기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는 그가 구출받을 여지가 전혀 없으며, 영원히 감금 상태에 있게 되며, 사실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어 바사노스를 번역한 “고통”이란 말의 이러한 사용법은 마태 18:34에 사용된 다른 경우를 생각나게 한다. 거기 보면, 어근이 같은 그리스어 단어가 “간수”에게 사용되어 있다.—개표, 미역, 다이어글롯.
예수께서 말씀하신 ‘불타는 게헨나’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는 게헨나가 12번 언급되어 있다. 다섯 번은 직접 불과 관련되어 있다. 번역자들은 게엔난 투 피로스라는 그리스어 표현을 “지옥불”(hell fire, 왕역, 두에), “지옥의 불”(Fires of hell, 신영성), “불 구덩이” (미역), “게헨나의 불” (신미성)로 번역하였다.
역사적 배경: 힌놈의 골짜기(게헨나)는 예루살렘 성벽 밖에 있었다. 한 동안 그곳은 자녀 희생을 포함한, 우상 숭배를 행한 장소였다. 1세기에 게헨나는 예루살렘의 오물 소각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동물의 사체를 골짜기로 던져 불로 태워 버렸다. 그리고 잘 소각되도록 유황이 덧뿌려졌다. 또한 기념 무덤에 매장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 처형된 죄수들의 시체도 게헨나에 던져졌다. 따라서 마태 5:29, 30에서, 예수께서는 “온몸”이 게헨나에 던지어진다고 말씀하셨다. 시체가 끊임없이 타는 불 속에 떨어지면, 그것은 소각되어 버렸다. 그러나 시체가 깊은 골짜기의 바위 턱에 떨어졌다면, 살이 썩을 때 그곳에 항상 있는 벌레인 구더기가 들끓게 되었다. (마가 9:47, 48) 산 사람은 게헨나에 던져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곳은 고통을 느끼는 장소가 아니었다.
마태 10:28에서 예수께서는 청중에게 “영혼과 몸을 둘 다 게헨나에 멸할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훈계하셨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에서 게헨나의 불속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언급이 전혀 없음에 유의하라. 오히려 그분은 ‘게헨나에 멸할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영혼을 별도로 말씀하심으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의 전망 전체를 멸하실 수 있음을 강조하신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에게는 부활의 희망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불타는 게헨나에 대한 언급은 계시록 21:8의 “타는 못”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즉 멸망, “둘째 사망”이다.
성서에서는 죄에 대한 형벌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로마 6:23: “죄가 지불하는 삯은 죽음입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죄에 대한 형벌을 더 받아야 하는가?
로마 6:7: “죽은 사람은 자기의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악인이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 하느님의 성품과 조화되는가?
예레미야 7:31: “그들[배교한 유대인들]은 자기 아들딸들을 불사르려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있는 도벳의 산당을 지었는데, 그것은 내가 명령하지도 않았고 나의 마음 속에 떠오른 적도 없는 일이다.” (만일 그 일이 하느님의 마음에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다면, 그분이 더 큰 규모로 그러한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 확실하다.)
예: 자녀가 행한 잘못을 벌하기 위하여 아이의 손을 불 위에 대고 있는 부모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 첫째 4:8) 올바른 정신을 가진 인간 부모도 결코 하지 않을 일을 그분이 하시겠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악인이 사후에 고통을 받을 것을 가르친 것인가?
누가 16:19-31에 있는 이 이야기는 문자적인 것인가, 아니면 단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예인가? 「예루살렘 성서」의 각주에서는, 이 이야기가 “역사상의 인물을 언급하는 것이 아닌 이야기 형태의 비유”임을 인정한다. 만일 문자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갈 수 있으며, 손가락 끝의 물이 하데스의 불로 증발되지 않으며, 단 한 방울의 물이 그 불속에 있는 자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 말이 이치에 맞는 말로 들리는가? 이 이야기가 문자적이라면 성서의 다른 부분과 모순된다. 만일 성서가 그처럼 모순된다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성서를 자기 믿음의 근거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성서는 모순되지 않는다.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부자”는 바리새인들을 상징한다. (참조 14절) 거지 나사로는 바리새인들이 멸시했지만 회개하여 예수의 추종자들이 된 일반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참조 누가 18:11; 요한 7:49; 마태 21:31, 32) 그들의 죽음 역시 상징적이며, 상황의 변화를 의미한다. 전에 멸시받던 자들은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입장이 되었고, 전에 은혜받는 것처럼 보였던 자들은 하느님에 의해 배척당했으며 그들이 멸시하던 자들이 전하는 심판의 소식으로 고통을 받았다.—사도 5:33; 7:54.
지옥불 교리의 기원은 무엇인가?
고대 바빌로니아인들과 아시리아인들의 신앙에서 “지옥은 ··· 공포로 가득 찬 장소로 묘사되어 있고, 힘이 대단히 세고 포악한 신들과 악귀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종교」[The Religion of Babylonia and Assyria], 보스턴, 1898년판, 모리스 자스트로 2세 저, 581면) 그리스도교국의 지옥이 불타는 곳이라는 부면에 대한 초기 증거를 고대 이집트의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죽은 자 편」, 뉴하이드파크, 뉴욕, 1960년판, E. A. 월리스 버지의 서문이 들어 있음, 144, 149, 151, 153, 161면) 기원전 6세기까지 소급하는 불교는, 때가 되자 뜨거운 지옥과 차가운 지옥을 둘 다 교리로 삼게 되었다. (「아메리카나 백과사전」 1977년판, 14권, 68면) 이탈리아의 가톨릭 교회들에서 볼 수 있는 지옥에 대한 묘사는 그 근원이 에트루리아인들에까지 소급한다.—「에트루리아의 문명」(La civiltà etrusca), (밀라노, 1979년판), 워너 켈러 저, 389면.
하지만 하느님께 불명예를 돌리는 이 교리의 실제 근원은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고통의 지옥과 관련된 악귀적인 개념들은 하느님을 중상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주된 중상자 (“중상자”를 의미하는 마귀) 즉 예수께서 “거짓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자로부터 비롯한 것이다.—요한 8:44.

201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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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이란 영원히 흙에 갇힌다,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영원히 지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사람을 불로 튀기는 지옥이 있고 거기에 갔다 왔다는 주장은 하나님이 악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영(마음)이 살지 못한 사람은 흙의 상태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영이 살지 못하고 죽으면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흙으로 만들어 진 인생이 영이 "거듭" 나지 못했는데 육신이 죽으면 본래 모습인 흙으로 돌아가고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악을 행하시는 분으로 거짓 증거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귀신들린 자, 사단의 종이 된 자가 하나님을 악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며 인생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악을 행한 자는 자신의 악함으로 스스로를 멸하는, 자멸을 하는 것이지 그 이상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불로 튀기는 지옥의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런 곳을 만들어 낸 인생들이 사는 세상이 곧 지옥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신 대로 그저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의 말을 잘 들으면 죽어서 천국에, 안 들으면 지옥에 보내시는 분이라고 배워 알고 계셨습니다.
 
매너가 아주 좋은 어떤 남자가 집을 한 층에 두 채를 가지고 있는데 당신을 그 둘 중에 한 채로 들여보냈습니다. 들어가 보니 거기는 하얀 레이스 장식이 된 침대와 온갖 아름다운 색들로 치장된 집이었습니다. 먹을 것도 많고 장난감도 많아 나가고 싶지 않은 집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거워하며 지냈습니다.
 
그 방에서 지내던 어느 날, 가끔 주인 남자가 앞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앞집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앞집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집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묶여 있었고 그들을 고문하는 사람들과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 집 주인은 두 얼굴을 가진, ‘신사복을 입은 뱀’ 으로 불리는 ‘사이코패스’ 였던 것입니다. 사이코패스의 정신병질을 사이코 패시(psychopathy)라고 합니다.
 
당신이 작위적으로 만들어 믿던 하나님이 사이코 패시를 가진 사이코패스는 아니었을까요?
 
사람도 그런 사람을 보면 소름이 돋아 그 집에서 도망을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당신의 형제와 친구와 부모와 사랑하는 이들이 당신이 살고 있는 좋은 집 맞은편 집에 갇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당신은 죽기 전에, 천국에 가기 전에 당신도, 또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도 천국을 갈지 지옥을 갈지는 모른다고 배웠습니다. 아무런 증명 자료도 없는 자들이 ‘예천 불지’ 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근거 없는 공갈이며 협박입니다. 그 근거 없는 사이코적 공갈을 듣고 두려움을 느껴 모인 자들에게 돈을 요구하여 받아 내는 것은 명백한 ‘사기’ 인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사냥꾼의 올무에 잡혀 있던 새같이 도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당신은 "도망하라" 해야 도망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실을 안 당신은 저절로 도망하고 싶어집니다. 만일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도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이코패스일 것입니다.

천국도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성경은 죽어서 가는 곳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서 인식되는 것입니다.

천국이란 상대적 사고를 하는 인생이 세상에서 성령의 법으로 치리되는 영적인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천(天: 하늘)이란 하나님의 법을 뜻하는 용어이고 국((國: 나라)은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나라’ 라고 한다면 그 안에는 다스리는 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스림을 받는 상태라면 국민들이 아직은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불완전한 상태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길을 가는 것이고, 우리가 영이 살아 땅에서 살다가 육이 죽으면 아버지의 아들로 아버지께 가는 것인데, 그때에도 만일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인생의 입장과 동일하다면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겠는지요.


게다가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상태라면 상대적인 사고를 하고 살아가는 인생의 삶과 다른 것이 전혀 없는데, 그것이 어찌 아버지의 앞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천국이란 하나님의 의를 따라 가서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법에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영적인 조직체, 하나님이 모으신 ‘우리’ 가 일꾼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소속이 되는 무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 무리 안에서 하는 일은 자기 일을 온전히 쉬고 하나님의 일만을 하는 상태를 말하며, 그것이 곧 ‘다시 나감이 없는 하나님의 안식’ 에 든 상태가 됩니다.


그 상태는 이미 상대적인 사고를 하는 자기가 부인이 된 상태이므로 세상에서 인생들이 하는 높고 낮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도 떠나게 될 뿐만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상태가 아닌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관장하는 자가 되어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다음의 말씀처럼 되는 것입니다.


[시편 89편]

26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28 저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29 또 그 후손을 영구케 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위 시편의 말씀처럼 땅에서부터 하늘의 날을 살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구히 지킨다.” 혹은 “영구케 한다.” 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렇게 영원은 땅에서부터 인지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땅에서 살게 되는 천국의 모습인 것입니다. 천국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말은 성경 안의 논리로 보았을 때에도 환각 상태나 꿈 등의 비이성적 상태에서 본다는 것이나 죽어서 볼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성이 없는 것은 죽기 위하여 난 짐승의 상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생은 ‘지각 있는 자’ 라고도 하셨습니다. 지각과 이성을 갖춘 상태에서 확인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시편 53편]

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베드로후서 2장]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이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지각과 이성이 있어야 볼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왕은 하나님이 되시고 인생이 그 백성이면, 이제 그 나라를 다스리는 법만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구성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어야만 합니다. 인생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만들고 의지하는 우상으로서의 교단의 교회법이나 교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법으로 사용되는 곳이라면 그곳은 절대 하나님의 나라도 아니며 그곳에 거하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도 설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법이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말하고 있는 성령의 법령이 있고, 그 법으로 다스려지는 곳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네이버 까페 "갈릴라이아"에 있는 글입니다.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게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놓은 성경 까페입니다. 님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2017.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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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