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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천국과 연옥, 지옥에 대해서 질문 있습니다.
dant**** 조회수 1,551 작성일2009.02.10

찬미 예수님.

 

저는 모태신앙으로써 카톨릭 신자로 오랫동안 성당에 다니고 있습니다.

 

매주 일요일 미사에 절대 빠진적도 없고 하루에도 묵주기도도 까뗴나 포함해서 꼬박꼬박 5단씩 하고 있는데요.

 

요즘들어 정말 이상하게 느낀것이 무속인들 보면 귀신들 쫒아내고 하잖아요? 가짜는 아닌거 같은데 

 

솔직히 마귀라던가 귀신은 예수님꼐서도 내쫒으신 구절이 성서에도 있잖습니까?

 

정말 궁금한건 왜 죽으면 귀신이나 원혼들은 천국,연옥,지옥에 가는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있거나 아니면

 

떠돌아다니는 것입니까? 성서구절대로라면 이들이 왜 지상에 남아있는건지 궁금합니다. 왜 안 데리고 가나요?

 

전 단테의 신곡도 다읽어보고 성서도 어느정도 읽어봤지만 이 부분이 모순입니다.

 

뭐 TV나 무속인들이 하는것은 사실 다 가짜다. 귀신같은건 없다. 이런말은 하지마시고요.

 

그게 가짜인지 아닌지 사리판단할 능력은 됩니다.

 

지금 졸린상태에서 쓰다보니 글을 잘 쓴건지도 몰라보겠군요.(횡설수설;)

 

우문현답을 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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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님께서 모태신앙인으로 태어 나셨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그러시는분이 그런생각을 하신다면은 저희같은 신앙인들은 어떨까요....저희에게 희망과 용기를 넣어 주셔야 할분 인것 같은데요...제가 교리 공부를 하다가 이중섭 신부님강론 내용이 가슴에 와닿아서 그러는데 강론내용을 한번 올려 드려보겠습니다...원래 빛 이강하면 어둠도 강하다고 신부님께서 말씀 하시드라고요.....님의 신앙심이 강하시니까...사탄이 치고 들어 올려고 하는것 같네요...왜..예수님 께서도 사탄에 유혹을 많이 받으셨지만, 성경말씀 으로 사탄을 물리 치셨잖습니까...님께서도...

 

제 70강 천당(10월 20일 방송)
 

 천당이라는 말은 두 가지를 뜻한다. 현재 세상과 다른 상태를 뜻하고, 하느님이 계시는 곳에 우리가 있게 될 것이라는 인간의 희망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천당은 공간이나 장소가 아니지만 공간 개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구원의 대상은 인간인데, 인간은 부활한 몸으로 새로워진 우주 속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복락을 누릴 인간은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천당이라는 말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천당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전인적인 구원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구원받을 때 영혼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천당은 결코 영혼만이 행복을 누리는 곳이 아니다. 특별히 천당이라는 말은 인간의 희망을 잘 드러낸다. 죽은 다음에 하느님과 영원히 떨어져 사는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하느님을 안 믿겠다고 버티는 사람도 지옥보다는 천당에 가고 싶어 한다. 결국 천당은 인간이 가야 할 최후 목적지인 셈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천당은 없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덕분에 우리가 천당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없다면 천당도 없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천당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천당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천당의 성인들은 하느님을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천당에 있는 사람들은 매개체 없이 하느님을 계신 그대로 선명하고 명백하게 뵙는다. 이것을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 부른다.

천당의 의인들은 부활하신 성자의 인간성을 뵙고,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일치를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고 사람이라는 사실 파악은 지복직관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다. 성자의 인성은 일시적으로 취한 가면이 아니라 성자께서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당에 가게 되면, 인간이 되신 성자를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신비를 알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본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복직관을 하더라도 하느님의 본성 전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다 보여 주시지만, 피조물의 제한성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2) 의인들은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의인의 행복은 하느님을 직접 뵈옵는 것 자체를 말한다. 이러한 지복직관은 없어지거나 감소되지 않고 영원하다. 그러나 이러한 영복(永福)은 각 사람의 공로에 따라 차등이 있다.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고,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는 그리스도의 말씀 역시 영복의 차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복의 불공평성은, 우리가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영복이 우리에게 그냥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교리다. 저 사람이 이만큼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똑같은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은총의 무상성(無償性)을 모르는 유치한 생각이다. 성모 마리아가 받은 은총과 똑같은 은총을 달라고 주장할 권리가 우리에게 과연 있겠는가?

3) 지복직관은 죽는 순간 즉시 시작된다(교황 베네딕토 12세)
그렇지만 소죄 없이 죽는 의인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결국 직천당(直天堂)하는 사람은 순교자들뿐이라고 초대교회 때부터 생각해 왔다. 순교자들은 죽는 순간부터 즉시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 또한 죄가 없고 죄에 해당하는 벌이 없이 죽는 의인들도 죽는 순간에 지복직관을 누린다.

 
제 71강 동방교회의 연옥교리(10월 21일 방송)
 

연옥이라는 용어는 벌을 받는 지옥과 같은 장소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이것은 죄와 벌을 법률적으로 생각했던 우리 서방교회의 신학이 만들어 낸 문제점이다. 동방교회의 연옥 교리는 전혀 다르다. 동방교회는 연옥이 하느님과 만날 준비를 하는 기쁜 과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서방교회 신학자들은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법률주의적으로 생각했다. 대장간에서 쇠를 불에 달구어 두들겨 모양을 만들어가듯이, 죽은 사람도 연옥불의 단련을 받으며 벌을 기워 갚고 하느님께서 원하는 모양으로 바뀌어야 천당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것은 연옥불의 고통을 강조하는 대중신심에서 나온 사상이다. 이처럼 동방교회가 하느님과 만남을 준비하는 마지막 정화과정에 역점을 둔 반면, 서방교회는 벌을 기워 갚는 고통스러운 감옥이라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연옥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고안하는 등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즉 죄나 잠벌이 있는 상태로 죽은 사람들의 경우 정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과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옥 교리가 가능한 근거는 세 가지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과 죽은 다음 영생으로 들어가려면 정화가 필요하다는 것과 중간상태(中間狀態)에 대한 사상이다. 중간상태란 죽는 순간부터 공심판 사이의 기간을 말하는데, 모든 것이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고 우리 인생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신비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관습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다. 교회는 천당에 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그분들은 이미 하느님 안에서 지복직관을 누리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 또 교회는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는다. 지옥이란 일단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기에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교회는 죽은 이들 중에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여기서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이란 대죄 속에 죽은 사람이 아니라 소죄나 혹은 죄에 해당하는 보속을 다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아주 초기부터 기도했다는 증거는 로마의 지하묘지에서 발견된 비석, 교부들의 문헌, 동방교회의 성찬기도문 들에 나타난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상과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다. 죽은 이들은 비록 죽었어도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지상교회인 우리와 한 몸을 이룬다. 지상교회는 죽은 이들과 한 몸이기 때문에 기도와 희생을 통해 죽은 이들의 정화과정에 동참할 수 있다. 결국 연옥 교리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상과 성인들의 통공 교리로 요약될 수 있다.

연옥 교리의 근원은 중간상태를 믿은 후기 유다교에서 찾을 수 있다. 중간상태의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2세기말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스(+217)다. 클레멘스는 코린토 전서 3장 10-15절에 나오는 불을 통한 심판 사상에 근거하여, 성장하고 정화되어 가는 인간의 최후과정을 언급했다. 이렇게 정화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정화되는 영혼은 그리스도의 몸과 관계를 가지고 발전해 완성에 도달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로 결정한 사건은 세례성사인데, 우리의 이러한 결정은 죽은 다음에도 효과를 내고 마침내 완성에 도달한다. 클레멘스의 제자인 오리제네스 역시 불을 통한 정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의인은 불을 통해 완전히 정화되고 악인은 지옥불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동방교회의 연옥 교리는 5세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와서 정립되고 더는 발전하지 않았다. 연옥은 기쁨의 정화 시기라는 교리가 정립되었는데 그 이상 무슨 교리가 더 필요하겠는가?

제 72강 연옥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10월 22일 방송)
 

동방교회의 연옥 교리는 5세기에 완성되었지만, 서방교회의 연옥 교리는 상당히 오랜 기간을 두고 상당히 다른 측면을 강조하면서 발전했다.

서방교회의 연옥 교리에는 3세기 초 테르툴리아노의 ‘페르페투아의 순교기’가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서 그는 죽은 이들이 후세에서 고통을 받지만 교회의 기도 덕분에 고통이 덜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혼에 대하여’(De anima)라는 책에서는 마태오 복음 5장 26절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는 구절을 두고, 살아 있는 동안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한 자들은 하데스에 갇혀 있으면서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아야 한다고 해석했다. 서방교회의 연옥 교리의 핵심, 즉 정화보다는 형벌에 역점을 두면서 연옥이 감옥이라고 생각하는 서방교회의 연옥 교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258년 순교한 카르타고의 주교 성 치프리아노는 테르툴리아노의 견해를 바탕으로 사목적인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 당시는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던 시기였는데, 배교자들 중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와 보속하기를 원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배교자들이 교회로 돌아와 보속생활을 하다가 죽으면 후세에 가서도 보속생활을 계속하고 결국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지상교회 안에서 시작된 보속생활을 교회와 함께 후세에도 계속할 수 있고, 지상에서 시작된 정화가 후세에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교자들이 지상에서 한 정화와 보속이 불완전하더라도 교회가 그것을 완성한다고 생각했다. 테르툴리아노와는 달리 치프리아노 주교는 처벌보다는 정화를 강조했던 것이다.

연옥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소죄나 잠벌이 있으면 연옥에 간다.이는 죽은 뒤 하느님과 일치하려면 정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잠벌이 있다면 후세에 가서 연옥벌을 통해 잠벌을 없애야 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연옥교리에서 동방교회와 일치를 확인한 13세기 리옹 공의회(1274년)와 15세기 피렌체 공의회(1439-1441년)가 ‘연옥불’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린토 전서 3장 10-15절에는 심판의 불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데, 공의회는 왜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일까? 그것은 심판의 심각함과 준엄함을 말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실제 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옥불’은 다른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죽게 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얼마나 많이 배반했는지 깨닫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당분간 하느님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슬픔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은 연옥에서 당하는 고통의 핵심이다. 이처럼 ‘연옥불’은 연옥 영혼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연옥 영혼의 애타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교회가 가르치는 연옥 교리는 후세에서도 우리가 정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실제로 정화될 필요가 있음을 동시에 말한다. 인간은 죽은 다음에도 변화와 정화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 죽은 이들은 그리스도와 교회 덕분에 정화돼 그리스도의 품안에 들게 될 것이고, 그리 되면 마지막 날에 마침내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될 것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시작한 성화와 정화는 후세에 가서도 지속될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연옥 교리에서 교회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산 이와 죽은 이들 사이에 중개역할을 한다. 죽은 이들은 교회 덕분에 그리고 교회를 통해 지상에서 시작한 정화과정을 계속한다. 미사 성찬 기도문에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항상 들어가는데, 이것은 성인들의 통공 교리를 재확인하며 교회가 산 이와 죽은 이들을 맺어준다는 증거다.

2) 연옥은 공심판 뒤까지 연장되지 않는다. 공심판으로써 모든 사람의 정화과정이 완성되기 때문에 연옥이 더는 필요 없다.

 
제 73강 지옥에 관한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10얼 27일 방송)
 

 현대인들은 지옥에 상당히 거부감을 느낀다. 지옥 교리는 항상 현대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베르디세프(N. Berdiseff)라는 학자는 지옥은 남을 괴롭히려는 인간의 사악한 본능이 만들어낸 상상일 뿐이고, 영원한 지옥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현대인들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학자들은 지옥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3세기의 오리제네스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영원한 지옥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많은 교부가 오리제네스의 노선을 따라갔다. 그래서 상당히 오랫동안 신자들은 하느님이 지옥에서 신자들을 건져주실 것이고 영원히 저주받은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4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지옥 문제에 부딪혔다. ‘한 사람이라도 지옥의 고통을 당할 것을 하느님께서 아셨다면 하느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을까?’하고 고민했다.

 성경이 구원을 선포하지만 신약성경 안에는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60번 이상 등장한다. 예수님은 후기 유다교의 사상을 이어받아 당신의 설교 안에 지옥을 여러 번 언급하셨다. 특별히 예수님은 ‘게헨나’라는 공간적인 표상을 쓰면서 지옥을 말씀하셨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나 사목 서간, 요한 묵시록에도 지옥의 실재와 지옥 벌의 영원성이 여러 번 언급된다. 결국 신약성경은 사람들을 겁주려고 지옥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지옥을 단순히 신화로 간주하지 않고 지옥이 실제로 있음을 분명히 한다.

지옥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대죄가 있는 영혼들이 영원히 하느님을 잃고 벌을 받는 상태가 지옥이다.
전통적인 신학은 지옥 벌의 본질이 실고(失苦)라고 가르친다. 실고는 인생의 최후목적인 지복직관을 상실한 것을 말한다.

우리 인생의 최후목적은 하느님을 만나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 영혼은 하느님에게 가도록 창조되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헛된 것에 정신이 팔려 이 사실을 모르고 살다가 죽게 되면 속속들이 깨닫고 하느님께로 가고 싶어 애를 태운다. 그러나 애를 태우면 태울수록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리고 자기 탓으로 그렇게 되었고 값진 인생을 허송하였음을 생각할 때, 뼈아픈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느님을 만날 길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절망적인가? 영혼이 하느님을 잃어버려 모든 은총을 상실하고, 지성은 어두워져서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의지는 악으로 고정되어 버린다. 이것이 지옥 벌의 본질인 실고(失苦)다.

이에 덧붙여 각고(覺苦)라는 것도 있다. 각고는 하느님을 배척하고 피조물과 옳지 못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과 관계도 끊어지며 느끼는 고통을 말한다.

2) 지옥 벌은 영원히 간다.
성경은 지옥벌의 영원성을 가르친다. 천상복락이 영원하듯이 지옥 벌도 끝이 없다. 죽음으로써 인생의 시험기간은 끝나는 것이고 영혼의 상태가 개선될 여지가 없어진다. 나무가 한번 쓰러지면 쓰러진 그대로 있듯이, 대죄를 지닌 채 그대로 세상을 떠난 영혼은 악질로 고정되어 회개할 수 없으므로 그 죄악도 영원히 남을 것이고 그에 따르는 벌 역시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3) 대죄의 경중에 따라 지옥 벌이 서로 다르다.
다시 말해 지옥 벌에도 가볍고 무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천국 영혼들이 공로에 따라 복을 더 받고 덜 받고 하는 것처럼, 지옥 영혼들도 죄악의 크고 작음에 따라 벌을 더 받거나 덜 받는다.

제 74강 지옥의 가능성(10월 28일 방송)
 

 지옥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한번 베푸신 사랑과 은총을 다시 거두어들이지 않는데, 사람들이 하느님의 그러한 사랑과 은총을 거절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지옥이다. 이처럼 지옥은 하느님께서 결코 원하지 않으시는 상태다. 그러므로 지옥에 대한 교리는 죄에서 출발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 대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을 거절함으로써 스스로 하느님과 단절된 상태 즉 지옥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에 의해 거부될 수 있는 사랑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결정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즉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과 단절된 지옥을 선택하는 것까지도 존중할 정도로 그렇게 인간의 자유와 결정을 존중하신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의 외아들까지 우리에게 주신 것이 그 증거다. 못된 인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 정도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신다.

 비록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고 교회의 가르침에도 분명히 나타나지만 지옥은 그래도 역시 의아스럽다. 우리 인생의 최후 목적이 하느님인데, 하느님을 영원히 잃는 지옥이라는 모순이 과연 가능할까?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지옥 교리는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이 절대자 하느님을 모실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준다. 지옥 교리는 인간이 본래 하느님께 향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간다. 그래서 사실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본성이라는 물살을 거꾸로 헤엄쳐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 다만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를 거부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목적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결정에 상관없이 천당에 가도록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는 것처럼, 지옥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지옥이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모순이다.

대죄를 범해도 회개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 그러나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 하느님과 화해하기를 포기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 지옥은 일평생 하느님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베푸는 사랑을 배척하며 살아온 상태가 폭로되는 곳이다. 인간은 하느님이 자신의 최후 목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느님을 거부할 수 있는데, 이런 분열상태가 곧 지옥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상태를 자유롭게 원하여 일평생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원한 벌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벌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벌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이런 모순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의 최후 목적은 하느님인데, 하느님과 영원히 등지고 영원히 벌을 받는 지옥을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까?’ 그래서 지옥은 모순이다. 그러나 이런 모순은 있을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 천당을 선택하듯이 인간은 스스로 지옥을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도 죽음과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공연히 지옥을 만들어 놓고 인간을 괴롭히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옥은 하느님 편에서 볼 때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할 최악의 사태다. 위협이나 경고가 결코 아니라 하느님으로서는 어떻게든 막아야 할 최악의 위기상황이다..........님에게 도움이 됬으면 합니다...샬롬

 

 

 

 
 
 
 

200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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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수

아래는 펌글입니다.^^

 

 

 

 

 

 

 

하느님은 오직 삼위일체 그리스도교의 한 분이십니다.
마귀는 이 [유일신의 관념을 포기하게]하고, [다신론]을 믿도록,

그리고 유일하신 그 분의 다스림과 교회의 가르침 (원죄와 빠스카 구원,사심판 공심판. 천국 지옥의 존재)을
부정하도록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가톨릭 신문 신앙상담]


한마디로 귀신은 없어
최면·마귀의 소행일뿐
유일신 하느님 믿어야







<질문>

농촌에 사는 청년입니다. 저희 마을에서는 가끔 귀신과 관련된 소문들이 떠돌곤 합니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묘 자리를 잘못 쓴다거나 억울하게 죽은 조상의 영혼이 후손들에게 몹쓸 병을 앓게 한다든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서에도 악마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즘 같은 과학시대에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답>

한마디로 말한다면 귀신은 없습니다.

즉, 죽은 영혼이 떠돌아다니고 사람들에게 길이나 흉을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모두 천국에 있거나 연옥에 있거나 지옥에 있거나 합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께서 관장하십니다.





그렇다면 실제 경험으로 죽은 조상이 꿈에 나타나서 어떤 사람에게 지시하고 하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기 최면 아니면 마귀(악령)의 일입니다.

어떤 일이 꼬이고 풀리지 않는다면
묘자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악의 일에 동의해서입니다.


예를 들면 낙태 등의 죄를 지었다면 그 죄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꿈에 조상이 나타나 다음날 돈을 벌었다 해도 궁극적으로 축복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마귀가 노리는 것은 유일신에 대한 관념을 없애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마귀는 이 유일신의 관념을 포기하고 다신론을 믿도록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는 이 시대는 마귀의 존재와 역할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마를 신화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악마의 실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사탄에 대해서 말하게 되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기라도 하듯 당황해하고 사탄에 관한 통속적인 형상을 시인하고 과학의 발전을 무시하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두려워합니다.



교리와 설교, 대학교나 신학교에서 하는 신학 강의에서는 흔히 이 주제를 피합니다. 그리고 악마의 존재를 토론하는 모임에서조차 세상에 끼치는 악마의 영향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악마는 짐짓 시대에 뒤떨어진 시대착오인 체합니다. 이야말로 악마의 크나큰 교활함입니다』(교회문헌, 은사쇄신과 어둠의 세력, 1장 1항).


-김연준 신부



가톨릭 신문

기사입력일 : 200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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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가톨릭교회는
귀신, 영매(靈媒), 초령((招靈) 그리고 채널링 등의 이름으로 설명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이
사실은 성서적 개념인 「악령」의 장난이라고 본다.



바로 이 악령이 죽은 사람이 나타난 것처럼 귀신 행세를 하는 것이고,
한(恨) 많은 원혼 행세를 하는 것이고, 깨달은 영인 것처럼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그 이유(속임수를 쓰는 이유)는 명명백백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유일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곧 잡신들을 믿게 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이탈시키려는 것이다.
악령은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라도 동원할 수 있는 의지와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분명히 알자.

복음의 가르침은 명백하다.

귀신은 없다.

원혼도 없다.

그러므로 채널링은 거짓된 영의 속임수이다.

이에 반대되는 주장은 [복음에 대한 훼손]이다.



사도 바울로는 준엄하게 말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리워졌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리워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2고린 4, 3~4)



-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천상 성인 영혼들. 연옥 영혼은 귀신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죽은 영혼들은 오직 하느님 허락 하에서만, 죽은 이와 산 이는 직접 만나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거룩한 성인들의 발현이 그렇고, 또 하느님 허락 하에 기도부탁하러 지상에 나온, (선량한) 연옥영혼이 그렇습니다.

(오상의 비오 성인이 체험하신 사례)


왜냐면 천상 성인들과 연옥 영혼은 이른바, 귀신으로 불리는 루치펠 부하들(=마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요한 점이 있는데, 그들이 매우 선량하다는 것입니다.

200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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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답변

성경의 마귀, 귀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설의 고향 귀신하고는 개념이 다릅니다.

 

그리스말로 다이몬 또는 다이모니아 라고 하는 건데

 

이건 사람이 죽어서 된 영이 아니라

 

마귀이죠...

 

사람의 영은 천국 지옥 연옥에 가므로

 

사람죽은 귀신을 기독교에선 부정합니다.

 

예수님이 쫓아낸 귀신은

 

누군가 죽어서 영이 되었는데 그 영에 씌인 것을 쫓아내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 원어를 해설한 책을 잠시 보시거나 웹에서 성경원어를 탐구하는 사이트를 방문하시기를...

 

200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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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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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답변
영웅
서구에서는 사람의 영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현재는 대학에서 그 연구를 강의하기도합니다.

사후에 사람의 영은어떻게될가요?

만약 연구해서 사후에 영이 땅에 머무르지 못한다면 흔히 말하는 귀신은 없고 머무른다면 귀신은 있습니다.

지구가 도는 것은 진리이고 종교인이 하늘이 돈다고 주장해도 실제로는 지구가 주로 도는 것입니다.(하늘도 회전 운동은 함)

수많은  연구 결과 영은 다시 사람에게로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사후에 곧 들어오지않고
영적 공간에서 머무른다고합니다.

그리고 극히 일부는 영적 공간으로 가지 않는다고합니다.

그러니까 흔히 귀신이라하는 것은 집착에 의해 영적 공간으로 가기를 거부한 영이라 보면 됩니다.
그러나 악령이나 마귀 등은 원래 영적 공간에서 머무르지않고 지상에서 다른 영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가진 영이라보면 됩니다.

성경에 나온 것은 중요한 부분만 나옵니다.

사람의 영이 귀신이 되는 경우 그것만으로 악한 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악한 경우가 아니면 크게 상관없기에 (별로 영향을 못미침) 그런 부분을 자세히 기술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00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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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ekf2****
물신
정신건강의학과 61위, 개신교 98위, 가톨릭 68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성경을 읽으면 모든 답변이 나옵니다.

간단히 답변드릴테니 앞으로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모든 의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답변을 듣기 바랍니다.

 

귀신은 존재합니다.

귀신은 사탄의 일종이고 사람들을 속이고 여러가지 악한 일을 하는 영입니다.

무속인은 귀신에 사로잡혀서 귀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귀신(사탄)의 가르침에 속아 사람들이 죽으면 원혼이 되거나 귀신이 되어 지상에 떠돌아 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이 지상에 머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가 어떻게 되는지 그 결국에 대하여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믿은 자는 죽어서 낙원에 들어가고 믿지않는 자는 죽어서 음부에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죽은 자들의 마지막 심판이 있습니다.

믿은 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상급심판을 받고 믿음으로 행한대로 상을 받습니다.

불신자는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죄에 대해 심판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집니다. 이를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영원히 소망이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연옥은 없습니다. 성경에 연옥이라는 말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천국과 지옥에 관한 용어와 천국과 지옥에 관련된 말씀은 수백번씩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연옥에 대한 용어는 존재하지 않고 그런 곳도 없습니다.

연옥사상은 천주교가 성경을 한두구절 사용하여 그럴 것이라고 과도하게 추측한 가상의 장소입니다.

 

무속인들이 하는 일은 사실입니다. 사탄의 영에 사로잡혀 하는 실제현상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반동안 사역하실 때 많은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을 놓아 주시고 병든자를 고쳐 주시고 죽은 자도 살려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귀신을 좇아내는 권세도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200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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