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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김포에전해내려오는전설알켜주세요 급해요~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7,854 작성일200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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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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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바위 전설

김포시 감정동 굿우물에 중봉(重峰)선생을 제향한 우저서원(牛渚書院)이 있고, 이동네 좌측 벌판을 동쪽으로 흘러 나진(예전의 나진나루터)을 지나서 한강 본류에 이 르는 지류가 있다.
이 지류가 한강과 합류하는 강기슭에는 조그마한 비뿌리가 있고, 강안에는 약 7~8평쯤 되는 넓은 바위가 강심 (江心)을 향해 있어서 마치 인공적으로 만든 잔교와 같다. 그것은 나룻배나 어선의 이착에 매우 편리하게 이용되었다.
운양동 감암포 (甘岩浦)에 있는 이 바위를 '감바위', 이 나루터를 '감바위 나루터'라 부르는데 이바위에 서린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직전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의 왜구침략설이 무시된 채, 조선조정을 당쟁에 편할 날이 없이 국방을 소 홀히 했다.
외침을 걱정하던 율곡(栗谷)선생은 10만 양병을 주장하다 받아 들여지지 않자 고향 파주로 낙향하셨고, 율곡의 문인이었던 중봉선생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시다 뜻을 이루지 못함에 벼슬을 버리고 굿우물에 낙향하셔서 자연을 벗삼아 우국지정(憂國之情)을 달래고 있었다.
때로는 편주(翩舟)에 몸을 맡기고 나진나루터를 지나 한강변에 나가서 넓은 바위에 앉아 강심에 낚시를 드리우고 장차 몰려올 왜구들의 노략질에 치를 떠셨고, 무심히 노니는 갈매기를 보면서 당쟁에 여념이 없는 조정의 간신배 들의 작태에 한숨지으며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으셨다.

지당(池塘)에 비뿌리고 양류(楊柳)에 내끼인 제
사공은 어디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夕陽)에 무심(無心)한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노라
평사(平沙)에 낙안(落雁)하고 황촌(荒村)에 일모(日暮)로다
어선도 도아들고 백구(白鷗) 다 잠들 적에
빈 배에 달 실어 가지고 강정(江汀)으로 가리라

하루는 중봉선생께서 나루터 넓은 바위에 앉아 낚시를 드리우고 시름에 잠겼을 때 밀려오는 널빤지를 발견했다.
건져보니 그것은 우리나라산 나무가 아니라 일본의 삼목(杉木)이었다. 중봉선생은 일본이 많은 전선을 만들므로 해서 그 삼목의 조각들이 조수를 따라 떠밀려온 것임을 알고 그 널판조각에다 그 사연과 함께 왜구의 침공을 막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이 역시 무시되었다.
급기야 임진년 4월에 왜구는 많은 전선을 이끌고 부산에 쳐들어온 지 불과 두 달만에 조선 천지를 노략질하매 선조는 의주로 몽진하기 이르렀다.
이때 관군은 물론, 의병들이 각처에서 일어나 왜구를 무찔렀다.
중봉선생도 신난수(申蘭秀), 장덕개 (張德蓋)등 의병장들과 3천 의병을 거느리고 승병장 영규(靈圭)의 5백 승병을 합해서 왜군에게 함락되었던 청주를 탈환하고, 그해 8월 금산 역시 탈환하였다. 그러나 수백의 왜적과 싸우시다 중과부적으로 7백의 결사대는 끝내 순절(殉節)하고 말았다.
현재 금산의 칠백의총(七百義塚)은 그분들의 넋을 모신 곳이며, 굿우물의 우저서원은 중봉선생을 제향한 곳으로 우리고장의 자랑이자 정신적 지주로 삼는 곳이다.
그리하여 중봉선생께서 생전에 우국지정을 달래며 낚시하던 운양동 한강변의 넓은 바위를 '대감바위'로 불렀던 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대감바위의 대(大)자는 떨어져나가고 '감바위'로만 불리고 있다.
현재는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여 중봉선생의 체취를 가까이서 느낄 수 없음이 안타깝다.



미륵당 전설
대곶면 초원지 2리 미륵당 고개에서 서쪽 50m 지점에 '미륵당'이 있다.
이 마을은 광주이씨 집성촌으로 1820년경, 옛 노인들이 우연히 산에서 미륵당바위를 발견하고 그것의 신비로움을 마을의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하였으나 모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이 지역 유지 이석윤씨의 꿈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백발노인이 나타나 "너는 미륵당돌 부처를 잘 모시면 소원성취 할 것이다."라고 말한 후 사라졌다. 이석윤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동생 석명과 함께 부처의 하단부와 상단부를 모셔 놓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밤에 어제의 백발노인이 다시 나타나서 "너는 어찌 부처의 머리를 잊어 버렸느냐, 바로 옆으로 50발자국만 가서 파면 돌부처의 머리가 있을 것이다. 그 돌부처를 잘 모시 도록 하여라."라고 말해, 다음날 아침 노인이 말한 곳에서 돌부처 머리를 찾아내 잘 모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20년 가현리 750번지 거주 이인두씨가 딸만 셋을 두고 아들이 없어 늘 근심에 쌓여 아들을 소원하던 차에 이 미륵당에서 동북쪽으로 100m 떨어진 옹달샘에서 목욕재계하고 물을 길어다 밥을 짓고 정화수를 떠놓고 보름동안 지성을 드린 후 옥동자를 낳아 충향이라 했고, 2년 후 또 낳아 효향이라 했다.

그리하여 이인두씨는 그후 정월대보름에 이미륵당에서 지성을 드리고 이 집을 잘 관리하여 왔다고 한다.
한편 1920년경에는 이 마을 이하범이란 짓궂은 사나이가 있었는데 이 사나이 형제가 돌부처의 앞가슴을 돌로 무수히 때리고 나서 그날밤 자고 일어나니 그들의 앞가슴이 부어올라 3일간 고생을 하였다고 전한다.

옛날 미륵당은 초가였는데 풍우에 퇴락해 1981년 9월 광주이씨 문중에서 1.5평 블록벽채에 슬레이트를 얹은 건물로 신축해서 현재 잘 보존되고 있다.



검은바위 전설
통진면 서암 5리 가운데 마을 서쪽 산뿌리에 있는 바위에 오르면 동남쪽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동으로 봉성산과 넓게 펼쳐진 누산리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한강 너머 저 멀리 삼각산도 시야 에 들어온다.
동남으로는 가현산과 장릉산이 보이며 수맥이 서쪽 검은 바위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흐르는 곳이라 산세가 묘하여 옛날부터 지관들이 자주 모여들어 반드시 이곳에 명당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도선같은 명지관도 여러차례 이곳을 헤맸으나 명당자리인 와우형 묏자리를 찾지 못했다 한다.

그 이유는 이 검은 바위가 영험하여 아무리 명지관이라도 찾지 못하도록 신술을 쓰기 때문이며, 언제든지 이 동네를 빛내고 나라를 빛낼 만한 인물이 나와야 비로소 지관들이 찾을 수 있게 이검은 바위가 지시할 것이라는 전설이다.
옛날에는 주민들이 신비의 바위라 하여 이 바위를 동네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도 지냈으며, 고민거리가 있거나,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바위에 일의 해결을 빌었다는 전설도 있다.




동성산 전설
하성면 마곡리에 위치한 동성산은 고려때 토성을 쌓고서 그 이후 '동성산'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북쪽면으로 고려조 항몽전쟁때 말에게 물을 먹인 곳이라하여 '말 물먹이터'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지금의 양택리 저수지가 그 곳이다.
고려때에 읍터는 지금의 면소재지 자리이며, 이곳 동쪽 길가에 현감 신공호청덕선정비(申公護淸德善政碑)있던 것을 현 면사무소 앞으로 옮겨 세웠다.
동성산 동남향으로 옥로전(獄擄田)이 있었고, 동성산 서남향으로 원산리 원수골에 약효가 신비한 약수터가 있다.이런 사실들로 보아 이 곳이 옛날 현이 있던 곳이 틀림 없다.
여지승람(與地勝覽)등 옛 문헌에도 동성현(童城懸)은 통진 동 20리에 있으니 원래 고구려 동자홀(童子忽) 이었다.
신라 경덕왕때 동성으로 고쳤고 고려 공양왕때 통진현에 귀속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돌우물 전설
대곶면 석정리는 조선시대까지 통진현 고리곶면 읍정리였다.
이 곳 '돌우물'의 물맛이 좋아 통진현의 원 이 우물의 물을 길어오게 하여 식수로 사용하였는데 골(고을)의 우물 곧, '골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라고 하다 보니 그 이름이 전해져 주민들은 전래적으로 '골우물'로 불러왔으나, 일제강점기에 민족정기와 역사적 의의를 말살하기 위해 단순히 의미만을 옮긴 '석정(石井)'으로 고쳤다.

이 '돌우물'에는 전설이 서리어있다.

조선조에 김포 장릉(16대 인조의 부친으로 추존왕인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에 양주에서 이 곳으로 개장 하며 능 역사(役事)를 할 때, 광중(壙中)을 파니 많은 샘물이 솟구쳐 하관(下棺)을 할 수 없어 혼란을 겪던 차에 지관이 수맥을 따라 현 위치(당시는 갯벌이었다 함)에 도착하여 조그만 샘물을 크게 파헤치게 하니 돌틈에서 많은 수량이 솟구쳐나왔고, 그 결과 장릉의 광중에서 솟던 물이 멈춰 능역사를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1787년 무렵 옥과(玉果, 전라도 곡성군 소재) 현감이 우물 옆에서 살았었는데 방문객이 너무 많아 불편 하게 느끼던 차에 하인이, 문전적미(門前積米)를 하러 온 중에게 객이 안 오게 하는 묘방을 물으니, 우물 안에 있는 거북형상의 돌에서 그 머리를 깨어 버리면 된다고 하여, 그 말대로 했더니 출입객은 한산해진 대신 곧 그 집이 망해 버렸다고 한다.

오봉산은 이 마을의 기안역을 하는 주신의 원천이 서리어 있는 곳이다. 이 곳에는 옛날에 장사가 있었는데, 그가 이 우물에 내려와서 무릎 끓고 물을 마신 무릎 자국과 지팡이 자국, 소변을 본 자국이 지금도 선명히 남아 있다.

이 우물은 전체가 돌로 되어 있는데 동남간과 동북간에 거북 형상과 용의 형상이 있고, 샘은 동북방간 오봉산 낭맥간방에서 솟는데 수량이 엄청나서 옛날에는 이근방 못자리를 모두 꾸려나갔다고 한다.

현재도 김포에 유례가 없는 영천(靈泉)으로 알려져 경향각지에서 물을 길러 오는 사람이 많다.
1991년 중추절에 부락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적연와, 특수강으로 담을 두르고 주변을 정화(淨化)하여 전설과 함께 자랑스럽게 보전하고 있다.




용바위 전설
하성면 전류1리 앞산 중턱에 용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었다 하여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 바위를 '용바위'라고 불러왔다.

옛날 이름을 알 수 없는 노승 한 분이 어느 날 이 마을에 홀연히 나타나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하고 다녔다. 그 때 어느 집에서 노파가 시주하기에 "적선공덕으로 왕생극락하십시오"칭송하고 합장했다.

이 때 촌장이 다가와 노승에게 "다른 집에서도 적선을했습니까?"하고 묻자, "이댁에서 처음 입니다"하고 대답하니 촌장은 안타깝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먼 하늘을 보며 시주할 양식조차 없음을 한탄했다. 노승이 촌장에게 "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가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촌장은 연유 를 알 수 없다고 한탄했다.

이에 노승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무릎을 치며 말했다. "옳거니, 마을 지형을 살펴보아야겠군" 하며 촌장과 마을 뒷산에 올라 동네 주위 를 살핀 후 다시 앞산으로 가자고 했다. 앞산에 올라 보니 마을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용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었다. 노승은 촌장에게 "저 용의 형상이 마을의 양식을 먹어 치우므로 마을이 가 난한 것이요"하고 말하고 마을이 잘 살려면 저 거대한 '용바위'를 부숴야만 한다고 말하고 떠나갔다. 산에서 내려온 촌장은 마을회의를 열어 노승의 말을 전하고 용바위를 부수는 일을 논의했으나 마을사람 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바위를 부술 수 없어 마을 사람 모두가 목욕재계하고 매일 옥황상제께 치성을 드려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이에 옥황상제가 자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 오도록 일관에게 명했다. 일관이 용바위의 행패를 고하자, 옥황상제는 장사를 내려보내 용바위를 부숴, 착하고 부지런한 마을사람들이 소원을 이루도록 했다.

상제의 명을 받은 장사는 무쇠망치로 용바위를 부수고 승천했고, 용바위가 사라지다 마을사람들은 기뻐하며 더 열심히 일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용허리길 전설
월곶면 군하 3리 봉골 마을을 가로지르는 '용허리길'이 있는데, 이 길에 서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이 고을에 부모와 외아들이 부자로 살면서도 인심이 후해 항상 많은 객(客)들이 드나들었다.
외아들은 성장해서 장가를 가게되었고, 아들을 장가 보내고 얼마 안돼 부모는 세상을 떠났으나 부모 생전과 마찬가지로 객들의 왕래는 여전히 빈번했다.

그런데 이 부잣집에 새로 들어온 며느리는 객들의 빈번한 왕래를 반기지 않았다.
마침내, 자기집에 객들이 오지 못하도록 해야겠다고 궁리하던 차에, 어느 날 찾아온 시주승에게 후하게 시주를 한 다음 자기의 처지를 설명하고 묘안을 구하자, 승이 다음과 같이 일러 주었다.

묘책인즉, '밤중에 머리를 빗고 마을 뒷산에 길을 만들면 방문객이 없어질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그 스님은 이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묘안을 전해 들은 며느리는 어느 날, 하인들을 시켜 밤중에 뒷산 허리에 길을 만들도록 하고 자신은 머리를 감고 방문객이 찾아오지 않도록 빌면서 빗질을 시작하자 갑자기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이 집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이 때, 하인들이 산을 잘라 길을 만들고 있던 현장에는 하얀 피가 흘러내렸다고 하는데, 이 피는 용의 허리를 자랐기 때문에 거기서 나온 것이라 했다.

그 때부터 그 길을 '용허리길'이라 불렀으며, 또한 밤중에 여자가 머리를 빗으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여 밤중에 머리를 빗는 것이 금기(禁忌)로 전해오고 있다.





손돌공 전설
918년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여 제23대 고종에 이르기까지 314년간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고려는 많은 수난을 겪었다.

1231년 몽고(원나라)가 침입하매, 고종은 화친을 내세워 일단 회군시켰으나, 그들이 계속 부당한 조공(朝貢)을 요구하므로 결사항전할 것을 결심하고 1232년 몽고의 2차 침략 때 강화도로 천도 하게 되었다.

고종은 조정을 이끌고 개경을 떠나, 사공 손돌의 배를 타고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 임진강과 한강 하류를 지나 강화도로 가고 있었다.

도중 현재의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의 해협이 협소하고 급류인 목에 닿게 되었다.

이곳은 앞이 막힌 듯이 보이는 지형으로 처음가는 사람은 뱃길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지라, 천도 하는 고종도 심기가 불편한 나머지 뱃길도 없는 곳을 향하여 노를 젓는 사공 손돌을 의심하여 수차 뱃길을 바로잡도록 하명하였으나, 손돌이 아뢰기를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 하오나 좀더 나아가면 앞이 트이오니 폐하께서는 괘념치 마옵소서"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마음이 초조하여, 손돌의 흉계로 의심하고 신하들에게 손돌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고도 임금의 안전 항해를 바라는 충성에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을 아뢴 후 참수되고 말았다.

이후 왕의 천도 항해는 손돌의 바가지 안내대로 험한 협류를 무사히 빠져나와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왕은 늦게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을 후히 장사지내주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도 세워주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뱃길목을 지금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하여 '손돌목'이라 부르며, 공(公)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 쯤이면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하였다.

이 때에 거센 바람을 '손돌이바람', 이 무렵의 추위를 '손돌이추위'라 전해온다.

손돌공의 묘는 물 건너로 광성진을 보이는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있다. 공의 제사는 조선조말까 지 계속되어오다가 일제 강점후 중단되었었으나 1970년 이후 계속 지내오고 있으며, 묘는 1977년 박일양(朴一陽)씨등과 면민들이 묘비를 세우고 치산(治山)하여 크게 단장하였다.




애기봉 전설
유유히 흐르는 조강(祖江)물을 굽어보고 수백 길 높이 솟은 애기봉은 애절한 전설을 간직하고있다.
병자호란때에 일이다.

높새바람이 기세가 봄기운에 밀려 활기를 못띠던 때, 기생 애기(愛妓)는 봄의 따사로움을 만끽하며 평양감사와의 사랑을 막 피어나는 잔디위에 수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하늘의 시기인가, 노여움인가, 두 사람의 운명을 모질고 슬프게 만든 변란이 일어났다.
북쪽 오랑캐(후의 청나라) 의 침략과 노략질로 감사와 애기는 임금님이 계신 한양으로 피난길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당시는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못했으므로 걸어서 수천리 길을 가야만 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수천리를 걸어가야 하는 일이 힘겨운 노릇이었지만 감사를 따르는 애기는 참고 견디며 개풍군까지 왔으나, 감사는 오랑캐들에게 잡혀 북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감사와 생이별을 한 애기는 혼자 강을 건너 월곶면 조강리에 머물면서 감사가 돌아 오기를 학수고대 했다.
하루하루 더해지는 감사에 대한 그리움으로 날마다 쑥갓머리산(하성면 가금리 소재) 정상에 올라 임 계신 북녘을 향해 눈물로 소리치며 애타게 기다리다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명재경각(命在頃刻)의 애기는 임을 향한 그리움으로 매일 애타게 기다리던 산정(山頂)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했다.
애기의 유언에 따라 동네 사람들은 애기를 쑥갓머리산 꼭대기에 장사하고 그 산을 애기봉(愛妓峰)이라 불러왔다.

지금 애기봉 정상에는 강건너 북녘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서, 실향민들이 향수를 달래려 자주 찾는 망향(望鄕)의 동산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애기봉은 북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한으로 맺힌 곳이라 하겠다.




조헌과 괴호 전설
임진왜란 때 의병의 선봉장으로 왜군과 싸우다 7백 의사와 함께 장렬히 순국(殉國)하신 중봉선생은 김포시 감정동에서 출생한 분이다.

이 분은 어려서 집은 가난했지만 글공부를 하고 싶어서 이웃 동네의 글방 에 다녔다.

서당에 가려면 도중에 여우재고개라는 고개를 넘어서 다녀야 하는데, 하루는 서당을 가느라고 이 고개를 넘어가는데 예쁜 처녀가 나타 나더니 중봉선생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날마다 그 처녀가 나타나서 입을 맞추곤 했는데, 하루는 서당선생이 중봉선생을 보고서 "너는 어째서 얼굴에 화색이 없고 병색이 되어 가느냐? 너 요새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냐?"하고 물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중봉이 대답했다.

그러나 서당 선생은 재차 "너 서당에 오는 도중에서 이상한 일을 당하지 않았느냐?" 고 다그쳐 물었다.

이에 중봉이 "예, 있었습니다. 서당에 오느라고 고개를 넘노라면 예쁜 처녀가 나타나서 강제로 입을 맞추곤 했습니다." 선생은 이 말을 듣고 "그 처녀하고 입맞출 때, 그 처녀가 무슨 구슬같은 것을 네 입에다 넣었다가 다시 제 입으로 가져가지 않더냐?"하고 물었다. 중봉이 "그랬습니다"고 하니까 선생은 "여우가 둔갑한 처녀인데 그 여우가 네 정기를 빼앗아가느라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에 입을 맞추고 구슬을 네 입에 넣거든 입을 꽉 다물고 돌려주지 말고 거기서 쏜살같이 뛰어오너라"하고 일렀다.
중봉은, 선생이 이른 대로 그 처녀가 입을 맞추고 넣어준 구슬을 입에 문채 처녀를 떠밀고는 달려 오려고 했다.
그랬더니 처녀는 중봉을 붙잡고 구슬을 도로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중봉이 뺏기지 않으려고 둘이 한참 옥신각신 하다 중봉이 그 구슬을 삼켜 버렸다.
그랬더니 처녀는 흰여우로 변해서 슬피 울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중봉이 서당에 갔더니 선생이 그 구슬을 가져왔거든 내어놓으라고 했다. 중봉이 "여우에게 그 구슬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옥신각신하다가 삼켜 버렸습니다"하고 말하니, 선생은 "어허, 아까운 보배가 없어졌구나, 너는 그 구슬을 삼켰으니 지리(地理)는 환히알지만 천문(天文)은 모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 처녀는 원래 여우인데 사람의 정기를 빼앗아 먹고 사람이 되려고 너한테 달려 들어서 네 정기를 빼앗아 먹던 중이었다. 그것이 안되어 여우로 되돌아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중봉이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통진 앞바다에 난데없이 대팻밥이 떠밀려오므로 사람들이 중봉선생께 무슨 징조인가 물었다.
중봉이 그것을 왜놈들이 우리 조선을 침략하려고 수 없이 배를 만드느라고 대패질 한 그 대팻밥이 우리 조선에까지 흘러와서 그렇다고 말했다.
중봉이 그 여우 구슬을 삼켰기 때문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환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몇 년안가서 아니나 다를까 왜구가 조선땅을 쳐들 어와서 온 나라가 잿더미 가 되고 말았다.




남정동의 유래
남정동은 통진면 고정 2리에 있다.
이덕형이 광해군 무오에 폐대비론 (인목대비를 폐서인으로 하고 영창 대군을 사사한 사건의 발단)을 반대 하다 삭탈관직된 후, 통진의 한산(閑山) 아래 정자를 짓고 조수헌(趙守憲)과 매일 만나 글을 짓고 세월을 소유(消遺)하였는데 그 정자 이름을 남정(南亭)이라 했다.
또 정자의 구지(舊址)에는 늙은 괴목(槐木) 한 그루가 있는데 이상공(李相公)이 친히 심은 것이라 전한다.

남정동(南亭洞)은 이상공의 정자 남정(南亭)에서 유래한 것이라 전한다




서낭고개 전설
봉성 2리 해발 200 여m 산 중턱 100 여m 높이에 서낭(성황당)고개가 있다. 이 고개에는 옛날부터 효자에 대한 애틋한 절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에, 바보지만 효성이 지극한 덕칠이와 노모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집에서 살고 있었다.

덕칠이는 바보스럽지만 효성이 지극하여, 매일 땔나무를 열심히 해서 장에 내다 팔아 늙으신 홀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했다.

그러나이렇게 착하기만 한 덕칠이를 동네 사람들은 골려주기를 좋아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동네 청년들은 덕칠에게 길장가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봐 덕칠이, 우리가 자네 장가보내줄까?" "헤헤 좋아요." 이렇게 해서 덕칠은 마을 청년들은 따라 동구밖 서낭당고개에 이르렀다. 청년들은 서낭당고개를 지나가는 여자에게 장가가는 것이라고 하며 제각기 "나는 첫 번째 지나가는 여자." "나는 두 번째." "나는 세 번째."..."나는 몇 번째"... 해서 덕칠은 마지막 여자에게 길장가를 가기로 정 하고 고개 근처에 숨어서 여자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첫 번째 여자는 노파였고, 다음은 어린아이, 다음은 중년부인 등등, 모두가 우스운 상대였으나 마지막에는 젊고 아름다운 낭자가 나귀를 타고 성황당고개를 넘어갔다.

그날밤 으스름 달빛 아래, 덕칠이 성황당고개에서 본 낭자를 떠올리며 홀로 뜰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웬 낭자가 덕칠에게 사뿐히 다가와 곱게 절을 하며 "도련님, 저는 지금 갈 곳이 없는 몸입니다.

저를 거두 어 도련님댁에서 지내게 하여 주십시오. 비록 연약한 여자이오나 힘 닿는 데까지 도련님댁을 도와드리겠습니다."고 간청했다. 이렇게 해서 낭자는 덕칠이 집에서 살 게 되었는데, 그는 하룻밤 사이에 덕칠의 집을 고래등 같은 기와 집으로 바꾸고, 창고마다 곡식을 가득 채워 덕칠을 부자로 만들었다. 또 덕칠이도 그 낭자와 혼인한 후 둘이 어머니를 더욱 극진히 봉양하였다.

덕칠의 갑작스런 변화를 이상히 여긴 동네 사람들은 그에게 백년 묵은 여우의 요망한 짓이라고 하여, "자네 정신 차리게, 자네 반드시 요망한 여우에게 죽고 말거야. 여우는 썩은 고기를 좋아하니까 여우인지 아닌지 알려면 썩은 고기를 자네댁 머리맡에 놓아두고 어떻게 하는지를 보게."라고 덕칠이에게 끊임없이 권했다.

달 밝은 어느 보름날, 덕칠은 썩은 고기꾸러미를 아내의 머리맡에 놓아두고 밖으로나와서 아내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자 아내는 고기꾸러미를 풀어헤치고 허겁지겁 썩은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아내의 행동에 놀란 덕칠이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사람들의 말대로 아내는 무서운 여우로 변해서는 "예, 저는 인적이 없는 깊은 산중에서 백년 동안 인간이 되기 위해 수도한 여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보름달이 지는 새벽까지 당신의 간을 먹어야 저는 사람이 되고, 그 때까지 당신의 간을 먹지 못하면 영원히 죽고 맙니다. 자 어서 이리 가까이 오세요, 어서 당신의 간을 저에게 주세요"하면서 여우는 덕칠의 가슴을 풀어 헤치며 덕칠의 간을 먹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덕칠은 눈을 감으며 "나는 당신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내 간을 기꺼이 줄 수 있소,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고 계신 늙으신 우리 어머님을 모시지 못함이 안타까울 따름이오."이 말에 여우는 덕칠이 곁을 떠나 밖으로 뛰어 나갔다. 큰 바위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서 있던 언니 여우가 동생 여우를 보자 "어서 가서 그 놈의 간을 먹 어라. 오늘 새벽이 되기 적에 그 놈의 간을 먹지 못하면 정녕 인간이 되지 못하고 죽는다.

어서 빨리." 언니 여우는 동생을 다그쳤으나 동생은 "언니,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고 그 분은 안 됩니다. 그 분은 마음씨 곱고 효성이 지극한 분입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저에겐 낭군이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분을..." 이렇게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점점 새벽이 다가오자 언니 여우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동생 여우는 모질게 찬바람이 부는 눈 쌓인 언덕에서 죽어 갔다.

덕칠은 밤이 새도록 아내를 찾아 헤매다 눈 쌓인 언덕에서 성스럽게 죽어간 아 내 여우를 발견하자 부둥켜 안고 통곡하였으나 아내 여우는 영영 대답이 없었다.

그후 덕칠은 여우를 양지바른 언덕에 묻고 어머니를 모시고 어디론지 떠나 버렸다. 이렇게 여우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서낭당고개를 맴돌며 고을 사람들의 입에 오며 주민들의 무사를 빌고 지성(至誠)을 드렸다고 한다.

현재 이 고개는 이름은 남아 있으나 사람의 통행이 거의 없어 길의 흔적만 남아 있고 서낭당은 사라진지 오래다.




엄나무 전설
김포 장릉(章陵)을 원종왕릉묘(元宗王陵墓)로 정한 성지(聖智)라는 중이 대곶면 거물대리의 등산(登山)산록을 지나다 쉬면서, 엄나무 고목 숲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저 곳에 집을 짓고 살면9대독자에 12대를 부유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이 말을 듣고 김해배씨가 그 터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 다고 전한다.
현재까지 후손들 8가구 정도가 살고 있으며, 엄나무 한 그루가 고목으로 남아 있어 도(道)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미륵석불 전설
김포시 운양동 대촌부락에 가면 한강변에 용화사가 있다. 이조태종5년 4월2일에 정도명이란 사람이 나라의 조곡을 상납하고 배를 타고 한강을 내려오다가 물참이 되어 운양리 도당산앞에다 배를 대고 물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 정도명이 잠이 들어 꿈에 어떤 석불이 현몽하여 이르기를 “나를 운양산에다 봉안하여 주오”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잠이 깨어 본즉 물이 밀어서 닻을 잡아 당겼더니 그 닻에 석불이 걸려나왔다고 한다. 그는 꿈과 현실이 너무도 같음에 이상히 여겨 꿈대로 석불을 운양산에다 업어다 모시려고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석불을 등에 업고 산을 오르다가 힘이 들어서 땅에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업으려하니까 땅에서 떨어지지가 않아서 동리 사람들을 모아 나르려 해도 석불은 내내 움직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봉안키로 하고 자기 배(船)를 뜯어다 의지간을 하여 법당을 짓고 도명이 중(僧)이 되어 그곳에 영주하고 말았다. 그 후 법당앞으로 뒷짐을 집거나 담배를 피어물고 지나면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의 절은 퇴락되어 버렸고 1971년 4월에 새로 건립한 절이 지금의 절이다.

200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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