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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연잉군이 희빈 장씨에게 핍박받았나요?? [추가 - 세제시절좀 알려주세요]
블랙토키 조회수 34,468 작성일2008.02.23

요즘 '이산'에서 영조가 죽었죠.

 

영조의 과거가 알고 싶어서 글올립니다.

 

영조 어렸을적 군호가 연잉이었죠.

 

희빈 장씨가 숙빈 최씨에게 핍박을 가한거는 알겠는데

 

연잉군에게까지 해코지를 했는지 궁금하네요.

 

몇년전에 전광렬, 김혜수주연 '장희빈'에서

 

제가 후반부를 자세히 못봐서 잘모르겠네요...

 

또 더 첨가하자면 연잉군이 세제시절에 무었을 했는지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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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n****
물신
한국사 26위, 사회, 도덕 84위, 전통 예절, 의식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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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리가 있습니까...

 

연잉군이 태어난 것은 숙종 20년 9월,

희빈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후궁으로 강등된 것은 이보다 앞선 숙종 20년 4월의 일입니다.

 

숙종 20년 4월이후, 희빈장씨는 처소에 유폐되다시피 했었습니다.

 

즉, 훗날 연잉군이 태어난 시점에는 

장희빈은 모든 권력을 빼앗기고, 오직 명목상의 후궁이 되어

그야말로 궁안에서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오히려 희빈의 아들 왕세자가 연잉군의 탄생으로  핍박받게 된 셈이었죠.

 

숙종은 희빈을 죽이는 순간까지 철저히 장희빈을 무시했으며, 장희빈또한 철저히 인현왕후를 무시하여, 유폐된 7년동안 단 한번도 인현왕후를 찾아가 하례를 올린 적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왕과 인현왕후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던 숙의최씨나 그 아들인 연잉군또한 단 한번도 장희빈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연잉군이 태어난 이후부터 왕세자 윤은 끊임없이 불안한 지위에서 생활했습니다.

아버지 숙종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장희빈을 죽이고 난 뒤 숙종은 틈만나면 왕세자에게 '누구의 자식인가?'라며 아들을 비난했습니다.), 인현왕후와 이후의 인원왕후까지 철저히 연잉군을 싸고 돌았고,

결국 숙종 말년에는 폐세자의 위기까지 몰렸으나, 숙종의 죽음으로 겨우 왕위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끊임없이 노론의 견제속에서 살아야 했지만,

경종도 그리 무능력하거나 녹록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나름대로 자신만의 정치를 하기 위해 신임사화를 일으켜 아버지 숙종마저 실패했었던 노론4대신을 숙청하는 쾌거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경종말년 노론과 연잉군의 행보는 역모라 해도 좋을 만큼 노골적으로 왕위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고, 경종은 자신의 총력을 기울여 연잉군의 폐세제를 결심합니다.

그제야 노론을 등에 엎고 형님왕을 우습게 여기던 연잉군은 경종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구걸을 하였으나, 경종은 냉정히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직후 경종이 갑자기 와병하였는데,

죄인의 입장이던 연잉군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어의들을 통제하는, 누가봐도 역모를 의심할 수 밖에 없는 행위를 하였고, 연잉군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가 아픈 경종과 독대한 직후 경종이 승하함으로써, 영조는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조의 행보로 인해 즉위초부터 그 정통성을 심각하게 의심받게 되어,

심지어는 군란을 일으킨 소론 강경파 이인좌에게 경종살해범으로 몰리고 '나으리'소리까지 듣게된 거죠.

 

경종과 영조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영조가 아니라 오히려 경종입니다. 

 

장희빈이 악랄하다는 기록은 실록보다는 '인현왕후전'의 기록에 더 근거를 둡니다.

실상, 실록을 읽었을때는, 오히려 두 사람중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공격한것은 장희빈이 아니라 인현왕후 쪽입니다. 실록기록상 유일하게 후궁에게 매를 든 왕후였고,

숙종에게 ' 꿈에 현종과 명성왕후가 나타나 장씨는 전생에 왕이 죽인 금수의 환생이라 자식이 없다라는 말을 하였으니 장씨를 멀리하라'는 막말까지 해대었고,

이런 발언은 인현왕후민씨의 폐위의 근거로 제시되었습니다.

 

인현왕후전은 철저히 서인측의 시각에서 쓰여졌으며,  대략 영조대에 쓰여진 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서인노론계의 궁녀가 경험을 바탕으로 인현왕후를 추앙하기 위해 쓴 궁정수필로,

그 본 제목도 단순히 '인현왕후전'이 아니라, '인현성후덕행록'입니다.

이미, 그 저작의도는 철저히 인현왕후를 성모로 추앙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었습니다. 저작의도에서 보자면, 자신과 친정을 변호하고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혜경궁이 썼던 '한중록'과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장희빈의 폐비조치또한,

인현왕후처럼 '실덕'하여 폐비된 것이 아닙니다.

장희빈의 강봉은 '실덕'이 아니라 단순히 조강지처인 '인현왕후가 복위'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녀의 강봉에 있어서 폐비윤씨나 인현왕후 민씨의 폐비때처럼 구구절절한 비망기가 없었습니다.

 

실록 어디에서도 장희빈이 후궁들과 마찰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없으며,

또한, 장희빈이 후궁의 자리로 밀려났을때, 오히려 중궁전의 궁녀들까지도 장희빈을 지지하고 은밀히 도왔음을 돌이켜 보았을때, 

장희빈이 왕비의 지위에 있었을때, 숙의를 괴롭히고 아이를 유산시키려 했었다는 것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특히나, 인현왕후전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숙종이 최씨를 가까이 할 무렵 이미 왕비 장씨에 대해 정이 떨어지고 있었던 시점인데,

과거 인현왕후가 총애하던 후궁 장씨를 비난할때 그리도 노발대발 난리를 치며 장씨를 옹호했던 성질 뭐같던 숙종이, 과연 그 꼴을 그대로 보고 있었을까 싶네요...

 

2008.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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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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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시대는 당파싸움이 가장 치열했을 때입니다. 숙종은 각 당파의 치열한 다툼을 빌어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조선은 원래 왕권이 약하고 사대부의 입김이 더 센 나라입니다. 왕이 아무리 무엇을 하고 싶어도 사대부들이 '통촉하옵소서'라고 버티면 끝인 것이지요. 게다가 숙종 이전에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으로 연산군과 광해군이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쫒겨난 전력이 있기 때문에 왕도 자신의 지위를 그냥 보장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숙종은 서인과 남인이 치열한 당파싸움을 틈타 번갈아가며 정권을 바꿔가며 사대부들의 왕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정권이 바뀌는 것을 '환국'이라 했고, 이 때마다 타 당파의 사람들을 무수히 죽였습니다. 서인(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도 이 과정에서 사약을 받아 죽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민비와 장희빈의 이야기는 사실 치열한 당파싸움의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서인 세력은 민비에게 줄을 대고 있었고, 야당이던 남인은 장희빈을 통해 수권을 도모하려 했습니다. 숙종은 이런 와중에 중전이던 민비를 멀리하면서 서인 정권으로 하여금 긴장을 하도록 했지요. 그러면서 가까워진 장희빈에게 남인들이 줄을 댄 것입니다. 결국 숙종은 민비를 폐서인하고 장희빈을 중전에 앉힙니다. 당연히 서인들이 반발을 막기위해 아루아침에 삼정승을 남인으로 교체해버립니다. 남인 정권은 서인 숙청을 시작하지요. 하지만 숙종은 남인 정권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또 은근슬쩍 중전이 된 장희빈을 멀리하고, 숙빈 최씨를 가까이 합니다. 숙빈 최씨는 민비를 모시던 무수리로 하룻밤 잠자리로 임신을 하게 됩니다. 이 때 태어난 아이가 영조입니다.

장희빈은 갖 상궁이 되어 회임상태인 숙빈 최씨를 갖은 방법으로 탄압을 하고, 아이를 지우려 애를 쓰지요. 자신의 아들이 세자이기는 하지만 서인과 가까운 숙빈 최씨의 왕자가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으니까요. 어릴 적 영조는 장희빈 덕에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남인을 증오하게 됩니다. 사실 당파 자체를 증오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고요. 당파싸움의 와중에 왕자시절의 자신의 목숨이 왔다갔다 했으니까요.

 

숙종은 다시 한번 하루아침에 정권을 갈아치웁니다. 장희빈을 죽여버리고, 민비를 다시 중전으로 세우면서 서인정권을 들인 것입니다. 남인들은 그들이 했던 것 처럼 서인에게 숙청을 당해 떼죽음을 당합니다.

하지만 서인 정권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장희빈의 아들, 세자입니다. 장희빈을 죽인 장본인이 자신들이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날, 그 날이 끝 아니겠습니다. 연산군 시절의 교훈도 있고요. 그래서 폐세자하고 숙빈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세자로 앉히기 위해 갖은 공작을 다합니다. 연잉군은 세자의 자리에 이름이 거론된 이상, 왕이 되거나 죽거나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할 수 없이 서인들과 공동운명체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숙종은 완강하게 세자를 감싸돕니다. 이것 또한 숙종의 왕권 강화책이라 할 수 있는데, 세자의 존재는 서인들이 함부로 굴 수 없는 약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숙종의 이런 정책은 당대에는 왕권강화를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왕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경종은 남인들의 왕이 되고, 영조는 서인들의 왕이 되어버려 왕이 당에 속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으니까요.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가 왕위에 올랐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경종은 연산군같이 대가 센 왕은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고, 어미가 죽는 장면을 보아와서 정말 심약한 왕이 되어 버렸습니다. 경종의 즉위로 남인들이 복권되기는 했지만 수권하지는 못했고, 서인들도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남인들의 왕 밑에서 영의정을 하는 것이 곤욕이죠. 그래서 이들이 택한 방법이 왕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왕이 밤일도 못하는 고자라 거짓을 퍼뜨리고, 연잉군을 세제로 앉힙니다. 심약한 경종은 이것을 막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제 연잉군은 대리청정을 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경종은 3년만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데, 독살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왕이 된 연잉군, 영조는 어렸을 때 부터 용상을 두고 어려운 외줄타기를 해야했습니다. 만약 경종이 조금만 대가 세었어도 죽은 목숨이었죠. 숙종시대에 세자 자리를 두고 목숨걸기를 하고, (숙종이 아들은 끔찍히 여겨 당시 세자와 연잉군 모두 다치지는 않았지만) 경종이 즉위하고나서도 세제가 되기까지 또 목숨을 걸어야했으며, 세제가 되고 나서도 대리청정이라는 강수를 두어 또 목숨을 걸었습니다. 왕이 건장한데 대리청정을 논하는 것은 역모죄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이렇게 왕이 되었습니다.

2008.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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