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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 여수시·광양시

손죽도

왜군과의 전투에서 큰 인물을 잃은 섬

[ 巽竹島 ]

요약 손죽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에 딸린 섬이다. 면적 2.919km2, 해안선 길이 11.6km이다. 인구는 146가구 241명(2016년)이다. 여수에서 약 74km, 면소재지인 거문리에서는 북동쪽으로 28.3km 떨어져 있다.
위치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위도 북위 34°17′
경도 동경 127°21′
면적 2.919km2
해안선 길이 11.6km
인구 146가구 241명(2016년)

손죽도 개요

지명 유래

임진왜란 때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이 전사한 곳으로, 큰 인물을 잃어 크게 손해를 보았다고 하여 '손대도(損大島)'로 불리다가 1914년 '손죽도(巽竹島)'로 개칭하였다.

손죽도는 여수시 삼산면에 딸린 섬이다. 면적 2.919km2, 해안선 길이 11.6km, 인구는 146가구 241명(2016년)이며 분교생은 3명이다. 이 섬은 여수에서 약 74km, 면소재지인 거문리에서는 북동쪽으로 28.3km 떨어져 있다. 지명 유래를 보면 임진왜란 때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이 전사한 곳으로, 큰 인물을 잃어 크게 손해를 보았다고 하여 '손대도(損大島)'로 불리다가 1914년 '손죽도(巽竹島)'로 개칭하였다.

손죽도의 역사를 보면 400여 년 전 제주에서 고씨, 부씨, 양씨가 최초로 섬에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후에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하여 육지로 피신하면서 주민들이 교체되는 일이 벌어졌다. 고고학적으로 따지면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더 올라갈 수도 있겠다.

마을 입구에서 조개더미가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선사시대에도 이미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수에서 오전 7시 40분에 거문도 가는 쾌속선에 올라 뭍을 떠난 지 1시간이 지나면 고흥 나로도에 닿는다. 촘촘히 떠 있는 섬들 사이를 30분 정도 미끄러져 간 여객선은 손죽도 선착장에 여행자들을 내려놓았다. 손죽도는 여수항에서는 1시간 반 정도 걸리지만, 고흥군 '외나로도'에서는 1시간 정도 걸린다. 고흥군 녹동항에서 거문도 가는 쾌속선과 차도선이 운항되어 그만큼 거문도 가는 길은 편리해졌지만, 먼 바다에 위치한 섬으로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 때문에 쉽게 가지 못하는 섬이다.

손죽도 선착장에 정박중인 범선 코리아나호

손죽도 선착장에 정박중인 범선 코리아나호

손죽도 둘러보기

선착장에는 2015년 새롭게 만들어진 이대원 장군의 동상이 세워졌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발전소 근처 후미진 곳에 무덤과 함께 동상이 있었는데 이번에 양지로 나와서 늦었지만 참 다행한 일이다. 선착장을 나와 마을 해변 길을 따라서 걸어간다. 정겨운 해안 풍경과 돌로 쌓은 조그만 선착장의 모습을 보면서 마을로 올라간다. 마을 입구에 아담한 해수욕장이 있다.

여름에 해수욕을 하고 바로 집으로 들어가기에 좋은 위치이다. 모래사장은 약 200미터가량 형성되어 있는데 맨발로 다니고 싶을 정도로 모래가 참으로 가늘다. 마을 큰길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아주 오래된 돌담길이 연속으로 나온다. 돌담에는 수백 년 세월 동안 비와 바람과 눈과 싸우면서 이끼가 끼었고, 담쟁이넝쿨도 돌담 여기저기에 얽혀 있다.

마을 안에는 입구에 보건지소가 있고 출장소와 우체국, 이대원 장군 사당이 있다. 사당 옆의 돌담을 따라 가다가 보호수와 함께 열녀각을 만나게 되고, 돌담 위에 기와를 얹은 고샅길을 돌아간다. 약간의 오르막인 골목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아름답게 보이는 하얀 교회가 있다. 조립식 주택으로 만들어진 교회는 참으로 잘 지었다. 교회가 마을의 가장 위쪽에 있는데 그 뒤쪽으로 그다지 높지도 않고 비교적 완만한 구릉을 형성하고 있었다.

깃대봉 정상에 올라가니 이웃 소거문도와 평도, 광도가 우선 보인다. 백도와 거문도, 초도 등의 섬도 손에 잡힐 듯하다. 1896년 일본이 지도 제작을 위해서 측량 기점으로 삼아 깃대를 꽂았다 하여 깃대봉으로 명명하였다. 깃대봉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양팔을 벌리듯 뻗어 있는데 왼쪽 끝에는 쌍봉, 오른쪽 끝에는 구릉이 평평한 댄머리(배들이 들어와 정박하는 곳)봉이 있어 낙타 등허리를 연상케 한다.

깃대봉에서 다시 봉화산으로 향하였다. 깃대봉 정상보다 오히려 봉화산에서 본 전망이 더 좋았다. 조선시대 때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이 진을 치고 방위하면서 봉화를 올렸다고 하는 '봉화산'은 손죽도에 올 때마다 바라만 보다가 와서 보니 기분이 그만이었다. 손죽도의 섬 오른쪽 끝부분에 두 개의 우뚝 솟은 봉우리가 이곳 방문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막상 와서 보니 두 개의 봉우리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하나의 커다란 바위였다.

깃대봉의 남쪽에는 '지지미재'라는 곳이 있어 예로부터 진달래가 필 무렵이면 마을 사람들이 화전인 지지미를 부쳐 먹으며 놀이를 했다고 한다.

선착장에 세워진 이대원 장군 동상

선착장에 세워진 이대원 장군 동상

이대원 장군 사당

이대원 장군 사당

손죽도의 어민들의 개척 정신

가난했던 50~60년대에도 손죽도는 보릿고개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육지에서 배를 타려고 손죽도에 들어 왔다고 한다. 손죽도가 유력한 섬이 된 것은 몇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먼 바다와 육지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탓에 풍선인 중선배가 발달을 하였다. 두 번째는 U자식으로 된 천혜의 항만으로, 배를 정박할 수 있는 넓은 장소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죽도 근해에서는 문어 · 삼치 · 방어 · 도미 등이 많이 잡히고, 자연산 전복과 톳, 미역, 돌김 등이 채취되고 있다. 물도 좋고 많지는 않지만 약간의 농토에서 농사도 지을 수 있는 곳이다. 손죽도는 이렇게 육지와 먼 바다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찍부터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풍선을 타고 서해의 위도와 연평도까지 진출하여 뱃길을 열고 어장을 개척했다. 농사가 최고인 시절에 전답이라곤 거의 없고, 작은 섬에서 천여 명이 살았으니 오직 바다 개척만이 살 길이었다. 그때는 동력선은 상상도 못했기에 바람 따라 물때 따라 가는 풍선을 이용했다. 그러므로 반드시 조류를 이용하여 항해를 하여야만 고생을 덜 하고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산면에 있는 손죽도와 초도, 거문도는 다른 지역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삼산면지(2000년, 여수지역사회연구소)를 보면 울릉도와 거문도의 교류는 1970년대까지 이어져 오징어 어획 철이면 많은 배들이 울릉도 어장에 진출하여 오징어를 잡았다. 이러한 어로 행위는 조기 철이면 서해안의 위도, 군산까지 진출하였으며 멀리는 황해도 장산곶까지도 다녀왔다고 전해진다. 특히 서해안까지 출어한 것은 중선배가 많았던 손죽도에서 주로 이루어졌는데, 손죽도의 중선배 조업은 설을 지내고 나서 흥양바다(손죽도 주변바다)의 조기잡이부터 시작되었다.

아랫녘(흥양바다)에서 조업할 경우에는 조금 때를 맞추어 며칠씩 고향에 돌아올 수 있지만 윗녘(연평도, 칠산 앞바다 등)에 출어할 때는 몇 개월씩 고향에 돌아올 수가 없었다. 조기떼의 이동을 따라 영광 법성포 앞바다, 칠산 앞바다로 이동하면서 조업하고 조기들이 산란하는 연평도 부근까지 출어하였다. 봄철에 조기들이 산란을 마치고 회유할 때부터 손죽도를 향해 남하하면서 조업을 하고, 흑산도 근해에서 강달이 조업을 마친 후, 조금이 되면 신안군 비금도에서 손죽도 배들이 서로 만나 회포를 풀었다.

이렇게 올린 수확으로 보리 등 생필품을 구입하여 음력 6 · 7월경 손죽도에 귀향하면 약 반 년이 걸렸다. 이후 1개월 정도 휴식과 정비를 마치고 가을철에는 진도 조도 앞바다, 추자도 근해, 부산 가덕도 등에서 갈치잡이를 하였는데 이때 올린 수입으로 생필품과 볏집 등을 구하여 가옥을 보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업구역은 1960년대까지 지속되다가 1960년대 중반 평화선이 한일어업협정으로 없어지고 연평도 조업이 묶이면서 동지나해로 출어 구역을 변화시켰다.

요즘처럼 선박의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던 시절 그래서 여느 섬이 그러하듯, 손죽도에도 슬픈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1950년대 말의 2월이었다. 손죽도와 초도 사이에서 노 젓는 배로 낚시를 하는데 갑자기 부는 샛바람 때문에 대부분 초도로 대피했으나 그 중 여섯 명이 탄 배 한 척이 손죽도로 오다가 그대로 수장되고 말았다. 1959년 9월 추석 무렵, 8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라호 태풍 때 부산 근해로 갈치잡이를 갔던 손죽도 배 두 척이 침몰하였다. 한 배에 일곱 명씩 탔는데 한 명은 구조되고 나머지 열세 명 모두 사망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에는 연평도에 조기잡이를 갔다가 배가 침몰하여 여섯 명 중 한 명이 살아남고 다섯 명은 수장되었으며, 1960년대 중반에는 동지나해로 조업을 나갔던 배가 초가을 손죽도 마을 사람 8명과 함께 바다로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어부들이 바다에 빠져 죽은 사건이 셀 수 없이 많아 슬프게도 제삿날이 같은 날이 일 년에 네 번 있다고 한다.

중선배(안강망)의 중심지

오랜 세월 손죽도가 풍요로운 섬이 된 것은 섬 주변의 환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부터 손죽도 근해에는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할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혀서 환경의 축복을 많이 받은 섬이다. 손죽도의 어업은 일제강점기부터이다. 그 당시는 재래식 어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았는데 일본의 선진 어업과 동력선이 등장하면서 손죽도에도 중선배 안강망이 시작되었다.

초기의 중선배는 선수(배 앞쪽, 이물) 모양이 특이했다고 한다. 배의 선수가 뾰족하게 뿔모양으로 되어있는데 아마도 큰바다에서 파도를 잘 타기 위하여 만들어서 그렇다. 그리고 좌현에는 긴 대나무 묶음이 보이는데 이것은 수엣대라고 하는 어구(漁具)이다. 수엣대도 처음에는 커다란 대나무였다가 지금은 단단한 철재로 바뀌고 어구도 많이 개량되어 수엣대가 사라졌다. 이제는 반대편 우현에는 거대한 닻이 실려 있다. 안강망어업이란 고기가 그물 속으로 들어가도록 한 다음 다시 나가지 못하게 하여 잡은 함정어구이다. 안강망은 사전에 '아귀를 잡는 그물'이라고 되어 있다. 일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말로, 안강망이라는 어려운 한자말을 버리고 순수한 우리말로 '아귀그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거문도행 여객선과 섬사랑호

거문도행 여객선과 섬사랑호

'손죽도지'에 의하면 섣달 그믐날이 되면 이른 새벽 경쟁적으로 서둘러 선주 집과 중선배에 풍어를 비는 오색기를 설치한다. 배 이름을 새긴 기(旗)와 오색 천으로 만들어 늘어뜨린 오색기를 대나무의 위와 아래에 묶어 배에는 앞 돛대에 달고, 집에는 상기둥에 깃대를 묶고 지붕처마에 기대어 올렸다. 선원들이 낮에 선주 집에 모여 봉기(奉旗)를 두 개 만들어 하나는 선주집의 담벼락을 이용하여 세우고, 다른 하나는 선창의 중선배로 고사를 지내려 갈 때 가져가서 선두에 꽂았다. 섣달 그믐날 오후가 되면 배를 깨끗이 청소하고 선주 집에서 별도의 오색기와 이미 만들어 놓은 봉기를 앞에서 들고 굿을 치면서 선창의 배로 내려간다. 배에다 제물을 차려놓고 풍어와 만선을 기원하고 안녕을 비는 고사를 지낸다. 고사가 끝나면 선주 집을 향하여 되돌아오는 길에 굿을 친다. 이를 길굿놀이라 하였다. 길굿놀이를 할 때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한다.

여기서 나온 노랫말이 무척 재미있고 해학적이며 익살스럽다. 길굿놀이는 흥겨운 춤과 함께 노래로 온 마을이 축제의 장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집밖으로 나와 구경을 하면서 함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렇게 중선배에 설치한 오색기와 봉기는 마을의 매귀(埋鬼)굿이 끝나는 날 막을 내렸다. 지금의 뱃고사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 당시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면 다음 해에 고기가 잘 잡히고 험악한 바다에서 무사할 것으로 여겼다.

수개월 동안 바다를 떠돌며 고기를 잡다가 가족들이 환호하며 기다리던 집으로 돌아오는 중선배를 이제는 더 이상 만나 볼 수 없게 되었다. 겪어보지 못하고 말로만 듣던 그 시절이 무척 그립다. 그때가 아니면 도저히 겪어 보지 못할 경험들이 글과 미디어로 재생되어 다행이다.

30년 만에 복원된 전통 화전놀이

지금은 91가구만 사는 손죽도, 이 섬의 최고봉은 '깃대봉'으로 섬 중앙에 있는데 그 높이는 242m라고 한다. 깃대봉의 남쪽에는 '지지미재'라는 곳이 있어 예로부터 진달래가 필 무렵이면 마을 사람들이 화전인 지지미를 부쳐 먹으며 놀이를 했다고 한다. 2011년에 이촌향도 현상과 주민 감소로 명맥이 끊긴 여수 손죽도 화전놀이가 30년 만에 복원되었다. 화전놀이는 예전에는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강남 갔던 제비가 날아오고, 나비가 날아들며, 진달래가 만발하는 시기에 제액(除厄)의 의미로 동천에 나가 제비맞이, 화전 즐기기 등으로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손죽도에서는 주로 부녀자들이 마을 뒷산 지지미 고개에서 '화전(花煎)'을 만들어 먹으면서 춤도 추고 잔치를 했다. 진달래 꽃잎을 찹쌀가루에 버물러 반죽 위에 올리고 쇠판에 기름을 둘러 전(煎)을 만들어 먹으면서 봄맞이 놀이를 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풍물로 춤곡을 벌리고, 여성들은 지지미고개에서 화전놀이를 한다.

손죽도 화전놀이

손죽도 화전놀이

왜구와 싸운 젊은 장수, 이대원 장군

선착장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전통한옥이 보인다. 바로 이대원 장군 사당인 '충렬사(忠烈祠)'이다. 안내문에 의하면 1587년(선조 20) 2월 17일 손죽도 앞바다에 왜구가 침입하였을 당시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이 이곳 손죽도 해전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 순국하였다.

싸움이 끝난 다음 해안가에 밀려온 이 장군과 병사들의 시신을 모아서 섬에 장사를 지내고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왔다. 이 장군 묘 앞에는 전사한 수군들이 묻힌 무덤자리인 무구장터가 있다. 1637년(인조 15) 사당이 처음 건립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초가 건물로 된 사당에서 손죽도 주민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동안 퇴락과 수리를 거듭해오다가 1983년 마을 주민들의 정성이 담긴 성금으로 대지 60평에 건평 5평의 목조 기와집으로 현재 사당 건물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3일에 이대원 장군 '숭모제(崇慕祭)'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어려운 어촌 생활에도 주민들의 성금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동상'도 세웠지만 마을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늘 안타깝게 생각하던 주민들은 2015년 5월 2일 '손죽인의 날'을 맞아서 손죽도 선착장에 손죽도 초등학교 출신들이 성금을 모아 동상을 세워 놓았다. 경기도 평택에는 이 장군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11대 후손들이 손죽도에 이 장군의 묘를 만들었고, 음력 3월3일을 이 장군 숭모제(崇慕祭)로 지내고 있다.

손죽도 화전놀이 후 기념 촬영

손죽도 화전놀이 후 기념 촬영

손죽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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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죽도

손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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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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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의 섬』 시리즈는 25년 동안의 현지답사와 섬에서 만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고 눈으로 보며 느낀 감상과 행정기관에서 갖고 있던 기존의 자료 등을 정리한 것으로, 각 지역별로 나누어 수필집 형태로 구성하였다. 총 13권으로 출간되었다. 자세히보기

  • 저자 이재언 섬 탐험 전문가

    섬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우리나라의 섬 탐험 전문가이다. 바나바선교회 섬 선교사로 파송되어 선교활동을 하던 중 섬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국의 446개 섬을 3번이나 순회하였다. 저자는 많은 섬을 찾아다니며 섬의 기본 현황과 역사, 문화, 민속, 주업, 삶의 애환 등 수많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을 촬영하여 기록을 남겼다(드론 사진 포함). 2009년부터 2019년까지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 재직하였고, 2020년 1월부터 목포과학대학교 해양레저사업단 섬해양 선임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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