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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평택의 문화재를 알려주세용~
비공개 조회수 2,894 작성일2017.01.23

제가 방학숙제로 평택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있는데요

네이버에 찾아보니까 제가 원하는 내용이 안 나오드라고요.

평택의 문화재를 사진과 함께 문화재 이름, 소재지, 지정된 날짜와 그 문화재를

한문장으로 간단하게 써 주세요

(참고로 저는 이제 11살이 되는 여자아이입니다.  그리고 2월 1일까지는 꼭 답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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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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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의 문화재를 올려드립니다.다 쓰기가 힘들면 아래의 초록색으로 된 글자만 쓰시면 됩니다. 

 

(평택의 문화재)

 

1.평택 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보물 제565호

지 정 일 1972.03.02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현덕면 심복사길 22 (덕목리 275) 심복사

시 대 통일신라

 

심복사 능인전 안에 모셔진 이 불상은 고려말에 파주군 몽산포에 살던 천노인이 덕목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고 전한다. 불상 모실 곳을 찾아 옮기던 중 광덕산에 있는 지금의 심복사 자리에 이르자 갑자기 무거워졌으므로 여기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낮게 표현되어 있다. 둥글고 원만한 얼굴에 귀가 크고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깃과 소매깃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배부분에는 안에 입은 옷을 묶은 띠매듭이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옷주름은 규칙적인 계단식 선들로 나타내어 단조롭고 형식적이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는 16개의 연꽃무늬가 겹쳐서 새겨져 있고, 중대는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들어 상대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하대는 8개의 겹잎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다소 둔중해진 느낌도 있지만 안정되고 단정한 모습의 이 불상은 전체적인 조형이 도식화된 것으로 보아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평택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종 목 보물 제567호

지 정 일 1972.07.22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진위면 진위로 181-82 (동천리 548) 만기사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만기사에 있는 이 철조여래좌상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없고 불신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오른팔과 양 손은 새로 만들어 끼운 것이고 원래의 것은 절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있다. 갸름한 얼굴의 세부표현은 분명하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어깨에만 걸치고 있으며 어깨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은 편이다. 어깨 부분에서는 크게 접어 계단식의 주름을 만들었고, 팔과 다리 부분에도 주름을 표현하였는데 매우 형식적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배 부분에 놓고 있는 모습이다.

 

상체가 약간 긴 편이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은 편이어서 안정감이 있다. 당당한 형태이지만 도식적인 옷주름의 표현과 단정해진 얼굴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3.대동법 시행기념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

지 정 일 1973.07.10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소사동 140-1

시 대 조선시대

 

대동법의 실시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쳐야 했던 이전의 폐단을 없애고, 쌀로써 대신 바치도록 한 조세제도이다. 조선 선조 41년(1608)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고, 효종 2년(1651)충청감사로 있던 김육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토록 상소를 하여 왕의 허락을 얻어 실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어려움에 처했던 백성들의 수고가 덜어지는 등 좋은 성과를 이루게 되자, 왕은 이를 기념하고 만인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맨위에 머릿돌까지 갖춘 모습으로, 각부분의 조각은 형식에 그친 감이 있다. 비의 원래 명칭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또는 ‘호서선혜비’이다. 비문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던 이민구가 짓고, 의정부 우참찬 오준이 글씨를 썼다.

 

효종 10년(1659)에 세운 비로, 원래는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970년대에 옮겨 놓았다.

 

4.삼봉집 목판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2호

지 정 일 1986.05.07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189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며, 조선개국의 으뜸공신인 삼봉 정도전(1337∼1398)의 시문과 글을 모은『삼봉집』의 목판이다.

 

정도전은 공민왕 11년(1360)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고려 때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개국일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를 거쳐 삼도도총제사, 보문관대학사 등 중요한 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몸에 안았다. 1396년 이후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계속 간섭하자 요동수복계획을 세웠으며, 이를 실천하던 중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후의 태종)의 기습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태조 2년(1393)에는 이성계의 조선건국을 찬양하는 「문덕곡」, 「몽금척」, 「수보록」 등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이나 경제와 백성들에 대한 사랑은 조선을 세우는 사상적·이론적·제도적인 밑받침이 되었다. 시호는 ‘문헌’이다.

 

원래『삼봉집』은 조선 태조 6년(1397) 정도전의 아들 정진이 2권으로 처음 간행하였으나, 세조 11년(1465) 안동부에서 6권 6책으로 재간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성종 17년(1486)에 8권 8책으로 발행하였으나 정조 15년(1791) 임금의 명에 따라 모두 14권 7책 분량으로 총 228판 목판으로 발행하였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5∼6권에는 중앙집권체제를 강조한『경제문감』과 7∼8권에는 조선시대 법전인『경국대전』의 모체가 된『조선경국전』그리고 9-10권에는『불씨잡변』,『심기리현』, 11∼12권에는 고려 역대왕의 치적을 실은『경제문감별집』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목판은 글자 새김이 정교하여 인쇄문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건국이념이기도 한 정도전의 정치, 경제, 철학 사상이 망라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된다.

 

 

5.팽성읍 객사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7호

지 정 일 1989.06.01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팽성읍 동서촌로 101-3 (객사리 117)

시 대 조선시대

 

팽성객사는 조선 성종 19년(1488)에 크게 지었으며, 그 후로 2번의 수리를 거쳤다. 일제시대에는 양조장으로 바뀌었다가 주택으로 사용되었는데, 1994년 해체·수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다.

 

본채는 전체 9칸으로 가운데 3칸은 중대청이고 양 옆에 동·서헌이 각각 3칸씩 있다.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관리들이 한달에 두번 절을 하던 곳이다. 이곳은 지붕도 동·서헌보다 높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동·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되었다.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꼭대기 양끝에는 용머리조각을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팽성읍 객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6.이대원장군 묘 및 신도비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56호

지 정 일 1980.06.02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포승면 희곡리 산83-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무신 이대원(1556∼1587)의 묘지이다.

 

그는 선조 16년(1583)에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전라도 녹도에서 종4품 무관직인 만호가 되었다. 선조 20년(1587)에 남해안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다시 왜구가 흥양에 침입하자 군사 100여 명을 이끌고 출병하여 손죽도 해상에서 적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으나 끝까지 항거하다 전사하였다.

 

묘지는 봉분이 3기인데, 가운데 장군의 묘가 있고 좌우에 부인의 묘가 있다. 가운데 봉분 앞에는 묘비, 향로석,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한 상석이 있다. 좌우에는 문인석과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이 각각 1쌍 있다.

 

묘역 아래에는 숙종 25년(1699)에 건립한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비문은 남구만이 짓고 조상우가 글씨를 쓴 것이다. 비문에는 왜구를 물리친 장군의 공적이 잘 기록되어 있다.

 

7.원균장군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57호

지 정 일 1980.06.02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도일동 산82

시 대 조선시대

 

경기도 평택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무신 원균(1540∼1597)장군의 묘이다. 그의 자는 평중으로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여러 관직에 올랐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을 통솔하는 절도사로서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적을 물리쳤다. 그 후 선조 25년(1592)의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등 여러 차례에 걸친 크고 작은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선조 30년(1597)에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하였으며, 선조 36년(1604)에 권율, 이순신과 함께 선무 1등공신으로 벼슬이 높여졌다.

 

묘역 안에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과 무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국한문 혼용체로 쓴 비문에는 왕이 내린 교서와 장군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8.농성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74호

지 정 일 1981.07.16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산41-5

시 대 미상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마을의 북쪽 논 가운데 있는 성으로, 흙으로 쌓았다.

 

전체 모습은 타원형으로 둘레는 약 300m이고 높이는 4m 내·외이며, 동쪽과 서쪽에 문터가 있다. 무너진 곳의 단면을 보면 붉은색의 고운 찰흙을 층층이 다져 쌓은 흔적이 있다.

 

성을 쌓은 이유는 삼국시대에 도적 때문에 쌓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신라 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이 축조하여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전한다. 성 바로 옆에는 겨울철에는 따뜻한 물이, 여름철에는 찬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성은 평지에 만든 소규모의 성으로 이런 흙으로 쌓은 성곽들은 대부분 초기 국가의 형성단계에서 나타나는 형태인데, 이 지역의 토착 세력 집단들이 그들의 근거지로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9.안재홍 생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35호

지 정 일 1992.12.31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고덕면 계루지1길 7 (두릉리 646)

시 대 조선시대

 

정치가이며 사회학자인 안재홍(1891∼1965)선생이 태어나 살던 집이다.

 

선생은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일본 동경 유학시절에 학우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귀국 후에도 언론과 교육활동을 통한 민족계몽과 독립사상 고취에 헌신하였다. 저서로는『조선상고사감』,『한민족의 기본노선』등이 있다.

 

가옥은 계루지 마을 야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대문간채까지 남아 있던 큰 집이었으나, 현재는 1914년에 지은 안채와 1932년에 지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사랑채 동쪽에 대문과 뒷간이 있다.

안채는 10칸 반 규모의 ㄱ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다. 건넌방과 대청·안방이 일렬로 있고, 안방 앞에서 꺾여 부엌과 광이 있다. 양쪽 맨 끝칸을 적절히 이용하여 공간을 효율적으로 나누고 있는데, 특히 부엌과 대청 사이에 있는 연결 통로는 이 집만의 특색이다.

 

사랑채는 8칸 규모로 一자형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툇마루가 있는 온돌방이 있고 서쪽에는 대청보다 한 단 높은 누마루가 있다.

 

최근 생활의 편의를 수용하여 변화된 경기지역 살림집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0.평택향교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팽성읍 부용로17번길 40 (객사리 185)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국립교육기관이다.

 

평택향교는 조선 태종 13년(1413)에 처음 지었는데, 병자호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여러 차례 고쳤으며 1986년에는 명륜당을 세웠다.

 

지대가 높은 언덕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고 그 앞쪽에 공부하는 공간으로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꾸민 익공 양식이다. 이곳에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좌우에는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11.홍학사 비각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3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 때 삼학사 중 한 사람인 홍익한(1586∼1637)선생의 비를 보호하고 있는 건물이다.

 

홍익한 선생은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이 청나라와 화의를 맺자는 것에 끝까지 반대하다 윤집, 오달제와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처형당하였다.

 

1964년 처음 지었고 1982년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겨 다시 세웠는데 포의각이라고도 한다.

 

선생의 묘소 앞에 자리잡고 있으며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고, 앞쪽 부분에 1964년 비각을 세울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12.진위향교 대성전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진위면 진위로 49 (봉남리 167)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진위향교는 조선 전기에 처음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1923년과 1934년 두 차례 보수를 하였다.

 

현재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서재, 외삼문, 내삼문 등이 남아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진위향교 대성전은 큰 건물은 아니지만 18세기 건축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1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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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문화재청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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