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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흥 문화재 (빨리~~~~~~~~~~~~~~~~~~~)
minj**** 조회수 1,895 작성일2016.05.19

국어숙재예요 되도록 빨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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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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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의 문화재)

 

1)능가사 대웅전

 

목 보물 제1307호

지 정 일 2001.02.23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369

시 대 조선시대

 

능가사대웅전은 18세기 중엽에 중건된 정면 5칸, 측면 3칸, 57.58평의 건물로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 다포계의 일반적 수법을 따랐지만 정면 기둥머리의 안초공 수법과 건물 내·외부에 연봉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보물로 지정된 영광의 불갑사대웅전, 부안의 개암사대웅전과 그 맥을 같이 하며, 포벽 수장재에 도드라지게 새긴 첨차는 사찰건물에서 보기 드문 예에 속하는 등 조선 중·후기 호남지역 사찰건축의 일면을 보여주는 건물로 학술적·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2)고흥 능가사 동종

 

종 목  보물  제1557호 

지 정 일 2008.03.12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37 
시 대 조선시대


현존하는 김애립의 작품 가운데 가장 뒤늦은 시기인 1698년에 제작된 작품이지만,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종신의 전체적인 외형은 상부가 좁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넓게 벌어져 여수 흥국사 동종과 유사하며, 용뉴는 쌍룡으로 구성되었다. 연곽대와 연곽대 사이에는 4구의 보살입상이 유려한 모습으로 부조되었고, 종신 한쪽에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殿牌)가 마련되었다.

 

이 종은 용뉴의 웅건한 표현과 단정한 보살입상, 세부 문양의 정교함 등 김애립 범종의 완숙한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17세기를 대표하는 범종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3)고흥 존심당 및 아문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

지 정 일 1974.12.26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 200-2

시 대 조선시대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과 관리들이 집무를 보던 관청건물이다. 조선 영조 41년(1765)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고흥군청 안에 관아의 정문인 아문과 본채인 존심당이 남아있다.

 

본채인 존심당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정문인 아문은 3칸인 3문 형식으로, 가운데 칸의 지붕이 양쪽 칸의 지붕보다 높으며 3칸 모두에는 2짝씩의 널판장문을 달았다.

 

 

4)고흥 능가사 사적비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

지 정 일 1978.09.22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37-1 
시 대 조선시대


사적비란 어떠한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로, 이 비는 능가사의 창건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능가사는 비문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 3년(419)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창건 당시에는 ‘보현사’라 이름하였다 한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것을 인조 22년(1644) 정현대사가 다시 건물을 지어 ‘능가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새겨진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조선 숙종 16년(1690) 목덕스님이 절 안에 세워 놓았다. 

 

 

5)고흥 옥하리 홍교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3호

지 정 일 1978.09.22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 269-1 
시 대 조선시대


고흥읍 옥하리와 서문리 마을에 흐르는 고흥천에는 약 150m 간격을 두고 2기의 다리가 놓여 있는데, 모두 무지개다리(홍예교)의 양식으로 건립된 돌다리이다.

 

위쪽에 있는 다리는 맨 밑바닥에 다듬은 돌을 놓고, 그 위로 27개의 직사각형돌을 무지개 모양으로 쌓았으며, 그 양 옆으로는 다듬은 돌과 막돌을 섞어 쌓아 올렸다. 맨 위에는 다시 직사각형돌을 덮어 통행의 무게를 견디도록 하였다. 무지개 모양의 앞면에는 용머리를, 반대쪽에는 용꼬리를 새겨 놓았다.

 

아래쪽 다리는 옥하리쪽에 있으며 위쪽 다리보다 규모가 크다. 다리를 쌓는 수법과 형태는 비슷하나 용머리가 다리의 아랫면 천장에 달려있다. 이 다리에는 만든 시기가 적혀있어 고종 8년(187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다리 모두 조선 후기에 만든 것으로, 규모가 크고 장엄하다. 현재 두 다리의 정상이 지면보다 휠씬 높은데, 이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지형이 바뀐 탓으로 보인다.

 

 

6)금탑사 극락전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

지 정 일 1985.02.25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포두면 봉림리 700 
시 대  조선시대


금탑사는 천등산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원효가 지었으며, 처음 이곳에 절을 지을 때 금탑이 있었다 하여 금탑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정유재란(1597) 때 불탄 것을 선조 37년(1604)에 다시 지었으며, 수 백인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그 후 헌종 11년(1845)에 천재지변에 의해 절이 기울어 그 다음해 절을 다시 지었거나 또는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금탑사 극락전은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아미타불들 모시는 법당이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1층이며,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금탑사 극락전은 공포와 그 밖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말기적인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7)고흥향교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8호

지 정 일 1985.02.25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고흥읍 행정리 149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고흥향교는 세종 23년(1441)에 고흥현 서문 밖에 지었는데 선조 30년(1597)에 정유재란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숙종 21년(1695)에 현 위치에 새로 지었으며, 그 뒤에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걸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동재·서재 등이 있다.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고흥향교는 앞쪽에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배움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뒤쪽 높은 곳에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제사공간을 두고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제사만 지낸다.

 

 

8)고흥 용산리 석조보살좌상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지 정 일 1987.09.18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용산리 산143 
시 대  고려시대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용산리에 있는 높이 2.7m의 거대한 석조보살상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인데, 오른발을 의자 위에 걸치고 있으면서 다른 신체 부위보다는 작게 표현해서 독특한 자세를 보여준다.

 

머리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진 높은 관을 쓰고 있다. 계란형의 얼굴은 살이 올라 풍만하며, 눈·코·입과 더불어 둔중해 보인다. 우람한 체격에 주먹을 쥔 채 내려진 왼팔은 터무니없이 크게 표현되어 있다. 굵은 어깨와 팔뚝에 비해서 손은 너무나 작고, 허리는 가늘게 표현해 균형감이 떨어진다. 왼쪽 어깨만 걸친 얇은 옷은 소매자락에서 넓어져서 아래로 휘어져 있다.

 

의자에 앉은 모습, 관에 새겨진 작은 부처, 특이한 손모양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미륵보살로 추정된다.  

 

 

9)고흥 능가사 목조사천왕상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4호

지 정 일 2000.06.20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371-1 
시 대 조선시대


능가사의 천왕문에 모셔져 있는 4구의 사천왕상으로,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능가사는 신라 눌지왕 3년(419)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창건 당시에는 ‘보현사’라 이름하였다 한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것을 인조 22년(1644) 정현대사가 다시 건물을 지어 ‘능가사’로 고쳐 불렀다.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은 조선 현종 7년(1666)에 처음 지어진 후 순조 24년(1824), 1931년에 다시 고쳐 지어졌다.

 

이 사천왕상은 천왕문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현종 7년(1666)에 조성되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이 사천왕상은 원통모양의 보주에 특이하게도 동방지국천왕은 비파, 남방증장천왕은 칼, 서방광목천왕은 뱀을 쥐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것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능가사의 사천왕상은 만들어진 시기가 확실하여 다른 문화재의 시기 추정에 기준이 될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이다.

 

 

10)고흥 발포만호성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27호

지 정 일 1977.10.20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968

시 대 조선시대

 

발포만호성은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성촌마을을 중심으로 있는 성으로, 만호란 조선시대 때 각 도의 여러 진에 파견된 종 4품의 무관직을 말한다. 적의 침입을 막고자 해안선을 따라 성을 쌓았는데 그 모양이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

 

『성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발포만호는 조선 성종 21년(1490)에 쌓은 것으로, 둘레 1350척, 높이 13척이라 한다. 현재 성의 둘레는 560m, 높이는 4m이고, 서벽이 동벽보다 깊다. 동서남북 4벽이 거의 남아 있으나 동벽과 남벽은 민가의 담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 안에는 동헌과 객사 등의 관아 건물터가 남아있고, 배수로와 무기고의 터도 남아있다. 또 동문, 서문, 남문, 망루터도 확인된다.

 

발포만호는 조선 선조 13년(1580)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만호로 부임하여 18개월간 재임하였던 곳으로, 여천선소 유적과 함께 임진왜란 때 좌수영 산하의 수군기지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다.

 

 

11)흥양현읍성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35호

지 정 일 1978.09.22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 145-4

시 대 조선시대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에 있는 이 읍성은 뒷쪽에 주월산을 끼고 쌓은 성이다.

 

평지에 읍성을 만드는 것은 조선 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 태조 4년(1395) 광양현에 진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만든 것이라 여겨진다. 고종 8년(1871)에 크게 고쳐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원래는 여장(성 위에 쌓은 낮은 담), 곡성(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쌓은 작은 성)이 있었다.

 

현재 높이 약 6m, 폭 약 4m의 견고한 성벽과 길이 7m 정도의 옹성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초기 성곽의 축조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12)고흥 무열사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58호

지 정 일 1981.10.20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두원면 신송리 53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 진무성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송계 진무성 장군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 휘하의 군관으로 공을 세우고 용명을 날렸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이 있은 뒤에는 공로가 인정되어 북방요지 구성군수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순조 26년(1826)에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용강사를 지어 진무성 장군 및 3분의 위패를 모셨으나, 고종 5년(1868)에 서원철폐령으로 해체되었다가 고종 19년(1882)에 이곳에 복원하여 무열사라 하였다. 2번에 거쳐 고쳐 지었으며, 진무성 장군의 동상을 세워 놓았다.

 

 

13)송씨 쌍충일열각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74호

지 정 일 1985.02.15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 507-1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에서 전사한 송제와 광해군 8년(1616) 여진족의 침입 때 전사한 송덕일과 송제의 처 구씨의 절개를 표창하기 위해 세운 곳이다.

 

송제는 무관으로 임진왜란 때인 선조 26년(1593) 당시 왜군에게 포로가 되어 꿇어앉히려는 적장에게 ‘내 목을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 무릎은 굽힐 수는 없다.’라고 호령하며 항거하다 목숨을 잃었다. 이를 보고 감탄한 왜적은 시체를 매장한 후 ‘조선의사송제지시’라고 쓴 나무표식을 세웠다고 한다.

 

조은 송덕일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훈련원 첨정으로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또한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공을 세웠으며, 여진이 침입하자 이를 격파함으로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여진의 잔당 고면을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14)고흥 송씨 쌍충정려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110호

지 정 일 1987.06.01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 1166-3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순국한 송대립(1550∼1597)과 그의 아들인 송심(1590∼1697)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송대립 장군은 선조 27년(1594) 임진왜란 중에 과거에 합격하고 이순신의 부하로 들어가 많은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는 권율 장군의 명을 받아 의병을 이끌고 많은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첨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인 송심은 광해군 6년(1614) 무과에 합격한 뒤 늙은 노모를 모시기 위해 벼슬을 하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천거되어 선전관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이항 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안변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5)신여량장군 정려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111호
지 정 일 1987.06.01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 815-1 
시 대  조선시대

정려란 나라에서 충신·효자·열녀를 칭찬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우던 문이나 비로 이것은 임진왜란 때 순국한 신여량(1564∼1593)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신여량 장군은 16년(1583) 과거에 급제한 뒤 선전관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님을 의주까지 호송하였다. 그 뒤 권률 장군의 부장이 되어 행주산성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통영에서 수군을 지휘하여 왜군의 배를 크게 무찔러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과 당포싸움을 대승으로 이끌었으나 선조 26년(1593) 벽파진전투에서 아쉽게 적의 탄환을 맞아 전사하였다.
 

 

16)고흥 쌍충사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128호 

지 정 일 1990.02.24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2202

시 대 조선시대

 

충열공 이대원(1566∼1587)과 충장공 정운(1543∼1592)을 모신 사당이다.

 

이대원은 선조 20년(1587) 녹도만호가 되어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대파하였고, 다시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맞써 싸우다가 손죽도 해상에서 순절하였다. 이에 선조는 사당을 지어 모시게 했는데 이것이 쌍충사의 전신이다.

 

정운은 선조 24년(1591) 녹도만호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과 함께 목포·당포·한산해전 등에서 용감히 싸우다 부산 몰운대에서 순절하였다. 선조 25년(1592) 이순신 장군의 청으로 이대원과 함께 사당에 모시게 되었다.

 

정유재란으로 불타 버린 것을 숙종 7년(1681) 새로 짓고, 2년 뒤 쌍충사로 사액되었다. 영조 11년(1735)에 보수하였고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22년 고흥향교 선비들이 다시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42년 일본인들이 폐허로 만든 것을 1957년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 배치는 맨 위쪽에 앞면 2칸·옆면 1칸 반의 사당이 있고 아래쪽과 왼쪽에는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강당이 있다. 오른쪽 밑으로는 강당과 마주보게 관리사를 배치하였다.

 

 

17)고흥 여도진성지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155호 

지 정 일 1994.12.05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684외

시 대 조선시대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에 있는 성으로, 남쪽으로 팔영산을 등지고 돌로 쌓았다.

 

앞쪽에 원주도, 북쪽에 내백일도, 우모도, 계도, 동쪽의 향도로 둘러 쌓인 해상 요충지로서 여자만 해역을 방어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지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전라도 수군편제를 보면 무안현에 전라수군처치사영을 두고 그 밑에 좌우의 도만호영을 설치하였는데, 그 중 이 곳은 좌도도만호영이다. 이 곳은 8개소의 수군만호영을 통할지휘하는 전라좌도의 수군본부 역할을 하였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성종 22년(1491)에 쌓은 것으로 둘레 1,320척, 높이 15척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서벽(길이 95m, 높이 1.8m)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이 그 윤곽만 남아 있다. 그러나 서·남·북 양쪽에서 문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18)고흥 유둔리 덕암지석묘군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159호

지 정 일 1995.12.26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동강면 유둔리 103-1

시 대 선사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이 고인돌은 동강면의 남쪽 언덕 정상부에 약 60여 기, 주위 평지에 약 180여 기가 놓여 있어 청동기시대 이 지역에 대규모의 생활공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인돌은 덮개돌이 땅에 있는 것도 많지만 일부는 받침돌이 놓여 있고, 파괴된 덮개돌이 겹쳐진 경우도 있다.

 

고인돌의 가운데에는 높이 3.8m, 너비 2m의 선돌이 1기 세워져 있다. 선돌이 고인돌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거석(큰돌)문화로 함께 남아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고흥 중산리 지석묘군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160호

지 정 일 1995.12.26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남양면 중산리 산142외

시 대 선사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전라남도 고흥군 천봉산의 서남향으로 뻗은 줄기가 보성만과 만나는 산기슭에 있는 이 고인돌군은 바둑판식으로, 40여 기가 산기슭을 따라 남북으로 열을 지어 분포하고 있다. 또한 조그마한 도랑을 경계로 한 그 남쪽에도 5기가 있고, 북쪽에는 선돌처럼 세워진 고인돌 1기를 포함하여 6기가 있다.

 

이 고인돌군은 규모가 큰 것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받침돌을 세운 것이 15기 정도, 땅에 밀착되어 받침돌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26기, 덮개돌 밑에 돌방을 덮은 뚜껑돌이 드러나 있는 것이 6기이다. 규모가 큰 고인돌은 길이 5.5m, 너비 4.6m의 대형 덮개돌이 올려져 있다.

 

고인돌의 분포수가 40여 기 이상으로 대규모를 이루고 있는 이 고인돌군은 덮개돌이 잘 다듬어진 상태이며,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20)고흥 절이도 목장성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206호

지 정 일 2002.11.27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 산1-1, 석정리 870-1 일대

시 대 조선시대

 

고흥 절이도 목장성은 금산면 거금도의 어전리와 석정리 일대에 위치하는데, 절이도는 거금도의 조선시대 지명이다. 이 성은 적대봉(592.2m)과 용두봉(418.6m)의 중간 계곡을 형성하는 부분과 두 봉우리가 연결되는 능선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을 중간으로 나눈 남북방향으로 축성되어 있다. 성은 완만한 구릉이 형성되어 있는 부분의 서쪽 사면 끝자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해안선까지 이어진다.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세조 12년(1466) 전라도 점마별감 박식의 주청에 의하여 말을 기르기 위해서 절이도 가까이에 있는 선군을 동원하여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축성 당시 절이도 목장성에는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약 800여필의 말을 기를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으며, 실제로 성종 1년(1470)에는 364필의 말을 방목하고 있는 등 절이도 목장은 조선 전기에 중요한 목장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중간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축조된 차단성 즉 장성(長城)이며, 돌을 쌓아 만든 성이다. 성벽의 길이는 섬 북쪽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을 제하고도 4,652m에 이른다. 너비는 하부 3.2m, 상부는 1.4m이다.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된 흔치 않은 목장성이며, 축성시기 등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등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고흥 절이도 목장성은 금산면 거금도의 어전리와 석정리 일대에 위치하는데 절이도는 거금도의 조선시대 지명이다. 이 성은 적대봉(592.2m)과 용두봉(418.6m)의 중간 계곡을 형성하는 부분과 두 봉우리가 연결되는 능선의 안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을 중간으로 나눈 남북방향으로 축성되어 있다. 체성은 완만한 구릉이 형성되어 있는 부분의 서쪽 사면 끝자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해안선까지 이어진다.

 

 

21)고흥 남양리산성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207호

지 정 일 2002.11.27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남양면 남양리 산75-1, 중산리 산150 일대

시 대 백제

 

고흥 남양리 산성은 고흥군 남양면 남양리와 중산리 일대에 있는 해발 162m의 산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산성으로 동서 양쪽의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 지역 일대는 백제시대에 조조례현이 있었던 곳이다. 조조례현은 통일신라 경덕왕대에 이르러 충렬현이 되었다가 다시 고려시대에 이르러 남양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양리 산성은 돌을 쌓아 만든 산성이며, 총 둘레는 534m이고, 너비는 4m내외이다. 산성의 평면형태는 부정형으로 남북이 동서에 비해 길며, 성벽은 동벽과 북벽 일부가 잘 남아 있다. 성 안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완만하게 내려가는 지형으로 성 안의 평탄지는 12곳이 확인되는데, 계단식 형태를 띄고 있으며, 대부분이 예전에 논밭으로 경작을 하였던 폐경지이다. 성의 중앙부에는 돌로 쌓은 원형의 우물 2곳이 나란히 있는데, 지금은 폐쇄되어 물이 나지 않는다. 문터는 현 출입로로 이용되는 성의 남동쪽 회절부(回折部)에서 서쪽으로 40m정도에 있다. 현재 흙과 모래에 밀려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동쪽의 외측 모서리부분이 높이 90㎝가량 남아 있다.

 

성안에서 토기류·자기류·기와류·방추차·숫돌·석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들의 양상으로 볼 때 이 산성은 백제시대에 처음 쌓은 후 조선시대까지 계속해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양리 산성은 성이 자리잡은 위치 및 쌓은 방법,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쌓았던 산성이며, 전남 동부지역의 백제산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22)고흥 독치성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208호

지 정 일 2002.11.27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포두면 봉림리 산1, 상대리 산46 일대

시 대 백제

 

독치성은 서북쪽에 있는 조계산(해발 463.1m)의 동쪽 능선 끝자락에 위치한 성뫼산(해발 175∼212m) 봉우리를 감싸고 있다. 남쪽에 있는 평지가 한 눈에 들어오고, 동쪽의 바다도 보이고 있다.

 

독치성의 전체 길이는 508m로 전남 동부지역의 백제석성 가운데 광양 마로산성(길이 550m, 전남기념물 제173호)과 고흥 남양리산성(길이 534m, 전남기념물 제207호)에 이어서 세번째로 큰 산성에 해당한다. 성벽은 남쪽의 일부 구간만 없어졌을 뿐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경사면 지역은 수평쌓기 방식으로 쌓아올렸는데, 이는 성벽의 하중을 골고루 분산시켜 성벽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문터는 동·북쪽 2곳에 남아 있는데, 문터의 형태는 백제시대 산성으로 밝혀진 순천 검단산성(사적 제418호)과 여수 고락산성(문화재자료 제204호)처럼 외벽이 곡선을 그리고 내벽은 거의 직각을 이루고 있다.

 

성벽의 북서쪽 모서리부분과 북동쪽 모서리부분에는 사각형의 돌출된 치(稚)를 설치했는데, 성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행하였다. 치는 길이 4.5m·너비 6.4m 정도 규모로, 이 지역의 백제산성 가운데 처음으로 치가 확인되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성 안에서 삼국시대의 토기조각을 비롯하여 분청사기 조각, 평기와 조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와 안쪽에는 섶문양이 보이기도 있는데, 이는 전남 동부지역의 백제 산성들에서 예외 없이 출토되고 있는 특징적인 유물이다.

 

독치성은 백제 후기에 처음으로 쌓았던 산성으로, 전남 동부지역의 백제산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23)고흥 백치성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209호 

지 정 일 2002.11.27

소 재 지 전남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 산29, 30 일대

시 대 백제

 

백치성은 천등산(해발 550m)에서 비봉산(해발 447.6m)으로 연결되는 능선의 중간부분인 당치(해발 207.6m) 정상부를 둘러싼 산성이다. 특히 지리적으로 백치성에서 북쪽의 고흥 독치성(전남기념물 제208호)과 남서쪽의 고흥 오치 음성(전남기념물 제210호)이 눈으로 관찰될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돌로 쌓은 산성으로 성의 총 둘레는 444m이며, 평면형태는 남북방향으로 직사각형이다.

 

성 안에는 건물터로 추정되는 4곳이 남아 있다. 이 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류가 대부분인데 격자문·선문·무문·복합문 등의 평기와 조각이다.

 

백치성은 성이 자리잡은 위치 및 쌓은 방법,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쌓았던 산성으로 추정된다. 백치성은 고흥 독치성, 고흥 남양리 산성(전남기념물 제207호)과 함께 전남 동부지역의 백제산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201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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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문화재청 + 직접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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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호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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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능가사 대웅전

나로도 상록수림

고흥 운대리 고인돌

201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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