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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평택시 포승읍의 문화재들
qhdm**** 조회수 2,107 작성일2010.06.22

경기도 평택시는 송탄시와 통합된 도농복합도시로 알고있어요.

 

평택시포승읍에 현재 있는 문화재에대하여 자세하게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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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 포승읍의 문화재)

 

1. 이대원장군 묘 및 신도비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56호

지 정 일 1980.06.02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포승면 희곡리 산83-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무신 이대원(1556∼1587)의 묘지이다.

 

그는 선조 16년(1583)에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전라도 녹도에서 종4품 무관직인 만호가 되었다. 선조 20년(1587)에 남해안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다시 왜구가 흥양에 침입하자 군사 100여 명을 이끌고 출병하여 손죽도 해상에서 적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으나 끝까지 항거하다 전사하였다.

 

묘지는 봉분이 3기인데, 가운데 장군의 묘가 있고 좌우에 부인의 묘가 있다. 가운데 봉분 앞에는 묘비, 향로석,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한 상석이 있다. 좌우에는 문인석과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이 각각 1쌍 있다.

 

묘역 아래에는 숙종 25년(1699)에 건립한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비문은 남구만이 짓고 조상우가 글씨를 쓴 것이다. 비문에는 왜구를 물리친 장군의 공적이 잘 기록되어 있다. 

 


2.원정리 봉수대


종 목  평택시 향토유적 제 1호
소 재 지  경기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109-54
시 대  조선시대

 
원정리 봉수대는 봉화재, 또는 용수로 불리우며 조선시대 서남쪽 봉화의 주요 직봉을 이루었던 순천봉화와 연결을 가지며 서해안의 외적침입을 알리게 하는 등 군사적 통신수단으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해발 250m지점 산정에 설치되어 봉화수가 상주하며 화성군 우정면 조암리 쌍봉산과 충남 당진군 면천면, 충남 아산군 인주면 신창봉화와 응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봉화재 정상에는 약 2m높이의 방형 석축으로 된 500평의 평지가 있으며 현재 석축은 부분적으로 훼손되었고 봉화대 북쪽 100m 아래에는 봉화수의 주거지와 샘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봉화재는 남양만 상단부에 위치하여 하단의 모양이 용이 누운것 같다하여 용수지 라고도 하며 전체 산맥은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형상이라 전해진다.


3.원정리유적


종 목  평택시 향토유적 제7호
소재지  경기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산 109-430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특수한 일에 종사하는 집단 내지 계층의 일시적인 숙소로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 온돌유구이다.

 

방과 부엌의 구조로 방은 1~2평 규모로 비교적 작으며 부엌은 이보다 작아 2~4명이 거주한 침식전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집의 방향은 바람의 영향에 따른 아궁이와 굴뚝의 방향을 고려 경사면에 서남향으로 하고 온돌의 골은 직선으로 배치한 후 두둑에 고임돌을 놓아 고래를 냄으로써 온돌의 열효율을 고려하여 축조하였다.

 

 이 일대에서는 총 28기의 집자리가 발견되었으나 집자리의 하부구조에 튼튼한 기초가 없고 가족생활이 불가능할만큼 면적이 협소하며 작업공간, 외양간, 공동우물터등의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부대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장기적으로 거주하며 가족생활을 영위하던 곳은 아닌것으로 보인다.

 

발굴 당시 집자리에서 1678년이후 주조된 상평통보가 출토된것으로 보아 18세기 이후 축조된것으로 보이며 이중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집자리의 구조와 성격을 나타내는데 가장 적합한 3기를 이전해 보존한 것이다.

201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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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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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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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평택 운정리 및 석정리 유물 수습지 []

 

위치: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운정리와 포승읍 석정리 인근의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곳.

 

운정리구석기 수습지는 평택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포승 방면으로 가다보면 나오는 구억 주유소 뒤편의 낮은 구릉에 위치한다. 이곳은 붉은 갈색 토양이 기반암을 얕게 덮고 있으며, 규암질의 다양한 석기가 본래 층위를 잃어버린 채 출토되었다. 

또한 구억 주유소 길건너 동북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인 포승면 석정리에서도 몸돌 등 다양한 석기가 수습되었다. 1998년 경기도 박물관의 지표조사팀에 의해 발견된 유적이다.

운정리 유적과 석정리 유적은 행정구역상 현덕면과 포승읍으로 나뉘어 있으나 거리상으로는 매우 가까워 두 곳을 같은 구석기인들의 생활 무대로 추측할 수 있다.
2.이대원장군묘 및 신도비 []
 
위치: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무신 이대원의 묘.
 
묘역은 함평이씨 문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신도비는 1699년(숙종 25) 정문() 앞에 세워졌으며 비좌에는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남구만()이 지었고 조상우()가 글씨를 썼으며 김진규()가 전액()을 하였는데, 왜구를 토벌한 기록이 자세히 쓰여져 있다.

이대원은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전라도 녹도()의 만호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 남해안에 왜구들이 침범하자 이를 토벌하였으며 흥양()에 칩입한 왜구를 몰아내기 위하여 손죽도 해상에서 싸우다 왜구에게 붙잡혔으나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병조참판이 추증되고 고향인 양성(:지금의 평택)에 충신 정문이 세워졌다. 흥양 쌍충사()에 제향되었다.

1980년 6월 2일 경기도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

 

3.평택 수도사 부도 []

 

위치: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에 있는 조선시대 부도().

 

수도사지에서 현대의 수도사로 자리를 옮길 때 함께 옮겨온 부도이다. 전체 높이 95cm로 기단 및 탑신,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도사를 세운 염거대사의 사리를 보관한 부도로 보는 의견이 있으나 염거대사는 844년(신라 문성왕 6년)에 입적하였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지며 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석축 밑에서 기단부와 탑신부, 옥개석이 따로 흩어져 있다.

 

4.평택 최성익 효자정문 []

 

위치: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도곡리()에 있는 효자정문으로 조선 후기 효자 최성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1880년(고종 17) 조선 후기 영·정조 때 효자 최성익(, ?~1859)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정문()이다. 최성익은 어머니의 다리에 난 종기가 몇 해 동안 낫지 않자 매일 밤 정수를 떠 놓고 빌었다. 그의 정성이 간절하여 현몽()하기를 "어머니의 종기는 입으로 빨아야만 낫는다"고 계시하였다. 이로부터 매일같이 입술이 부르트도록 빨기를 3년 간 계속한 결과 어머니의 환후가 완쾌되었다고 한다. 남의 집 머슴을 살면서도 어머니를 정성으로 봉양하고, 그 와중에도 남모르게 학문에 힘써 30세에는 이미 향촌의 문장으로 알려져 있었다.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애통해 하면서 3년 간의 시묘를 정성스럽게 치루자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처음에는 종가댁 사당에 위패를 모시다가 1955년 경 현재의 정각을 수성군의 22세손 최일균()이 세웠다. 대지 10평, 건평 4평의 한식 기와집으로 최근에 담장을 둘렀다.

201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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