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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조선 영조의 어머니가 무수리가 였나요?
베스트드레곤 조회수 13,148 작성일2014.10.04

안녕하세요.

조선 영조의 어머니가 무수리가 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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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
은하신
한국사 13위, 국어 어원, 어휘 20위, 세계사 38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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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서 무수리설이 정설처럼 퍼져서

무수리인 어머니를 두어 영조가 컴플렉스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수리는

서민입니다

즉 평인 즉 양인이라는 말이지요

양인 여인들이 일종의 부업 삼아 하는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애들 학원비 벌겠다고 식당이나 마트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생각하면 되는 문제입니다

대채로 힘쓰는 일은 중년 여자들이 많이 합니다

그리고 궐에는 꽃다운 궁녀가 많습니다

중년이지만 꽃다운 여인이라면

그전에 어느 남자가 채갔을 것입니다

 

사실 무수리설은

궁중의 위계가 흐트러진

구한말 이후의 상황을 본 궁녀들의 증언에 끼워 맞춘 것이라

현재로서는 큰 설득력은 없습니다

사극에서 무수리들이 하는 것은

사실 무수리가 아닌 각심이라 불린 방자 즉 궁녀의 몸종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후궁 소생 왕들의 어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입궐했는지가

비교적 어렴풋이라도 짐작할 수 있게 나오는 반면

영조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일종의 전설 형태로

인현왕후와 인연이 있지 않았나 라고 전하기만 합니다

다만 일종의 전설이나 야사 형태로

영조와 숙빈 최씨의 대화가 전하는데

숙빈 최씨는 여러 옷 중에서 누비 옷 만들기가 어려웠다고 하고

그래서 영조는 왕이 되자 궐에서 누비 옷을 금지시킵니다

실제 한중록에도 화완옹주가 세손이었던 정조 환심을 사기 위해

누비옷을 해주엇다고 나오죠

이런 일화로 보면

그녀는 침방이나 수방 등에 있었거나

인현왕후전 나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침방이나 수방은 아주 높은 부서라

그런 일을 한 궁녀들은 대우가 남달랐는데

그런 어머니를 둔 영조가

엄마 신분에 치를 떨 정도로 컴플렉스를 가질 이유가 없죠

인현왕후와의 인연도 후대 창작일 가능성이 크고요

 

현재 짐작가능한 것은

공노비에서 차출한 궁녀보다 더 낮은 신분으로

진짜 노비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정도입니다

정병설 교수는 각심이 설을 제시했는데

이게 가장 현재로서는 설득력 있는 설입니다

노비 출신인 궁녀의 시중을 드는 노비인 각심이가

어쩌다 인연이 되어 임금의 승은을 입고 애를 가졌다....

그래서 영조가 자기 엄마 신분에 치를 떤다

실제 채제공이 이 컴플렉스를 기록에 남겼습니다

고로

숙빈은

궁에서 일하던 노비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할 수 있습니다

201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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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밍
고수
한국사, 세계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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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최씨에 대하여

1670년(현종 11)∼1718년(숙종 44).

조선 숙종의 후궁으로 영조의 어머니이다. 본관은 해주.

7세에 궁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으나 주로 궁중에서 청소, 설거지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종인 무수리였다.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되자 최씨는 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드리는 중에 숙종의 은총을 받아 1693년 아들 영수군을 낳았다. 그러나 영수군은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났고,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에 그 해 9월 13일 연잉군 이금을 낳았으니 후에 영조이다. 이어 아들 하나를 더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최씨는 숙종 19년 4월에 숙원이 되었으며 숙종 20년에 숙의가 되고, 숙종 21년에 귀인이 되었다. 숙종 25년에는 단종의 복위를 축하하면서 정1품 숙빈으로 봉해졌다.

양주 고령동 옹장리에 묻힌다. 1725년 영조가 즉위한 후에 휘덕이라는 호를 올린다. 존호는 휘덕안순수복이다.

능원은 소령원이고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에 있다.

출처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시스템

201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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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답변
영조 정권때 일어난 사건이 이인좌의 난이었죠. 이때 영남의 유생들을 비롯해 사림세력들이 영조가 정통성이 없는 왕이라는 것을 이유로 하여 대거 들고 일어납니다. 

영조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을 하게 되고, 당시 사림의 거점지역이었던 영남 남인 세력의 등용을 이제 막게 되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남 남인들이 딱히 그를 대단한 조치로 생각하지도 않았죠. 왜냐하면 정통성 없는 왕을 위해 자신들이 일을 해야 할 이유나 필요를 그들 역시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조의 정통성 시비는 수십년동안 계속해서 끊임없이 나왔으며, 그의 자질논란을 시비를 건 선비들은 하나같이 고결한 선비정신으로 무장이 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있죠. 

영조가 무수리의 자손이 아니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자질논란이었던겁니다. 



영조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단 한번도 속시원한 해명을 했던 바가 없었고, 또한 해명이 되어질 수도 없었던 출생적 한계를 명백하게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것이 한평생 그가 왕통이 아니라는 자질논란을 불러 일으킨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기도 하죠. 

201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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