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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역사드라마'동이'에 대해서
hee0**** 조회수 6,915 작성일2010.09.08

숙종과 최씨에 대해서 묻고 싶어요..여태까지의 역사드라마는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전부라서 최씨에 대해서는 인현왕후가 데리고 들어온 무수리라고 알고 있는게 전부였어요.

근데 최근 '동이'를 보며 느낀건데, 작가의 상상력인건가요..아님정말 동이는 왕의 은총을 받고 궁궐을 나가 영조를 키우다가 들어온건가요..그리고 경종의 자식 못낳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던 부분인건가요..

동이를 보고 있으면 새 역사를 보는거 같은 느낌이 들거던요...

그당시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아시는 분의 말씀과 지식을 얻고 싶어요..

꼭 답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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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332650

숙종의 여인들 전편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332654

숙종의 여인들 후편

 

오픈사전에 등록한 제 글을 편집하여 올립니다.

 

길지만, 역사에 근거해 썼으니 참고가 되실 거에요~

 

 

최씨는 1693년(숙종19년) 4월 26일 24세의 나이로 처음 내명부 종 4품 숙원을 받았다.


최씨가 숙원에 책봉되는 계기가 되었던 일화가 하나 있다.

첩지를 받지는 못했으나 이미 왕의 승은을 입은 다음이었으니 승은상궁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하루는 숙종이 낮잠(임금의 낮잠은 오수라 한다)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용이 땅속에서 나오지 못해 애를 쓰다가 머리를 겨우 빼고는 숙종에게 울면서 살려 달라 애원하는 것이었다.

잠에선 깬 숙종은 누군가의 태중에 있는 자신의 아이가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곧 바로 장옥정의 처소로 달려갔다.

승은을 입은 지 얼마 안 된 최씨가 아닌 자신의 아이를 둘이나 출산한 장옥정이 또 임신을 한줄 알았던 것이다.

왕비였던 장옥정의 처소에 도착한 숙종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장옥정과 궁녀들이 처소 뒷마당에 모여 안절부절 못하고 있음을 본 것이다.

캐물어도 묵묵부답인 장옥정을 의심한 숙종은 담장 아래 엎어져 있는 큰 장독을 보고 수상히 여겨 치우라 명하였고, 고문당하는 와중에 왕의 행차를 알고 부랴부랴 장독 안에 가둬 숨겨진 최씨를 구하게 된다.

장옥정은 최씨가 왕의 승은을 입어 회임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위기감을 느껴 잡아다 죽이려고 하였고, 마침 최씨의 태중에 있던 용종이 숙종의 꿈에 나타나 자신과 모친을 구했다는 이 일화 속 왕자는 최씨의 첫째 아들인 영수였다.


영수왕자는 1693년 10월 6일 태어났으나 겨우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

그 첫 왕자는 일찍 죽었지만, 어머니인 최씨에게 든든한 첩지를 안겨 주었고, 후손이 빈(貧)한 왕실을 걱정하는 숙종에게 빠른 생산력을 보인 궁인 최씨를 인식 시켰다.


숙빈 최씨에 대한 기록은 다른 후궁들 보다는 많은 편이다.

그녀가 왕의 어머니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기록들은 대부분 풍문이나 설화의 성격이 강했다.

예를 들어 최씨와 인현왕후와의 관계 등이 그렇다.


기록들은 일관되게 최씨의 출신이 미천하다고 기록 하고 있는데 미천한 최씨가 어린 시절부터 인현왕후와 인연이 되어 그 집에서 길러졌고, 인현왕후가 중전이 되어 입궐하게 되자 왕후를 따라 궁에 들어왔다는 설도 있는데 실록에는 최씨가 숙종 2년(1676) 7세에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씨의 출신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많다.

최씨는 무수리로 알려져 있었다.

무수리는 궁에서 일하는 노비를 말하는데 주로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을 주업으로 해 수사라고도 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최씨가 7세에 선발되어 입궁했다는 실록의 기록을 들어 본래 궁녀출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특히 최씨와 아들 영조와의 일화를 들어 침방나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 일화란, 어느 날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던 영조가 문득 어머니에게 묻기를

“침방에서 일하실 때 무슨 일이 제일하시기 어렵더니까?”

하니, 최씨가

“중누비, 오목누비, 납작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더니다.”

라고 말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모친의 말을 들은 영조는 이후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용숙 교수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라는 책에 수록된 이야기로 김용숙 교수는 이를 고종황제가 후궁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숙종 당대 인물이었던 이문정의 저서인 수문록(숙종, 경종, 영조 시대 당쟁사를 기록한 책)에는 최씨가 중궁전 지밀나인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이 어느 깊은 밤 궁궐 안을 거닐다 나인들 처소를 지나게 되었는데 유독 한 나인의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어 호기심에 몰래 들여다보았더니 나인 하나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상 앞에 꿇어 앉아 있더란다.

숙종이 이상히 여겨 “너 지금 뭐하고 있느냐?” 물으니 궁녀가 대꾸하길

“소녀는 중전의 시녀로서 특별한 총애를 받았습니다.” 라며, 폐비된 인현왕후의 탄신일이 내일이라 생신상을 차려놓고 하례 올리고 있었다는 대답이었다.

숙종이 그 충정을 가상히 여겨 최씨를 총애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었다.

수문록은 이때를 1692년(숙종18년)이라 기록하였고, 인현왕후의 탄신일 하루 전날이니 음력 4월 22일이었다.


이렇게 왕과의 첫 만남을 이룬 최씨는 곧바로 다음해 숙원이 되어 영수왕자를 출산 하였고, 영수왕자가 두 달 만에 사망하여 상심한 와중에도 금세 임신하여 1694년 9월 13일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 이금을 출산 하였다.

숙종은 몸을 푼 지 얼마 안 되어 임신을 한 최씨의 왕성한 생산력을 치하하며 출산 전인 6월 2일 종 2품 숙의를 내렸다.


물론 최씨의 승급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1694년 6월 1일 폐비된 인현왕후가 복위된 것이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바로 다음날 숙의 책봉을 받았다는 것은 최씨가 인현왕후의 복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반증이었다.

 

최씨는 초반부터 장옥정과 안 좋은 관계로 시작 했다.

모시던 주인인 인현왕후가 장옥정으로 인해 쫓겨났고, 천우신조의 기회로 승은을 입어 회임까지 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도 장옥정이었으니 자신이 장옥정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음을 절감 했을 것이다.


최씨와 서인의 동맹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최씨는 끊임없이 인현왕후가 무고함을 숙종에게 고하였고, 노골적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돼야 함을 주장했다.

숙종도 그런 최씨의 주장을 충정이라 하여 매우 기꺼워했다.


그러던 중 1694년(숙종20년) 최씨가 두 번째 회임을 했음이 알려졌을 때, 장옥정이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남인은 서인이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고, 서인들은 남인이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이때 최씨가 숙종에게 남인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주장했고, 숙종은 정황 확인도 없이 남인 숙청에 들어갔다.


갑술환국의 시작이었다.


‘최씨 독살 사건’을 계기로 4월 12일 장옥정이 폐비되어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이어 6월 1일 폐비 된지 5년 만에 인현왕후가 복위되어 그 다음날인 6월 2일 최씨의 숙의 진봉례를 중전으로서 축하 할 수 있었다.


이 해(1694) 인현왕후의 나이 28세였고, 장옥정(당시 희빈)의 나이 36세, 최씨(당시 숙의)의 나이 25세였다.

 

인현왕후는 복위된지 7년 만인 1701년(숙종27년) 8월 14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인현왕후가 사망하기 전부터 장옥정이 자신의 처소에서 왕후를 저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을 숙종에게 전달한 인물은 역시 최숙빈이었다.

 

숙종은 이번에도 사건의 정황을 조사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실제로 장옥정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숙종과 조정이 그것을 사실로 믿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장옥정을 제거할 명분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했는지도 모른다.


장옥정 제거 계획은 인현왕후가 죽고 한 달 만인 9월 23일 장옥정의 오빠로 그녀의 수족이 되어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장희재를 처형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어 보름만인 10월 8일 드디어 장옥정에게 자진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자진으로 마감한 장옥정의 나이 43세였다.

 

다음해인 1702년(숙종28년) 10월 13일 인원왕후 경주 김씨가 왕비로 책봉되어 입궁하였다.

숙종의 나이 42세, 인원왕후의 나이 16세였고, 최숙빈의 나이 33세였다.


이미 숙종의 사랑을 받은 지 10년이요, 그의 아들을 셋이나 낳은 최숙빈 이었으나, 꽃 같은 나이에 숙종이 직접 왕비 간택한 인원왕후에게는 밀리는 양상이었던 듯하다.

이후 최숙빈에 대한 기록이 한동안 보이지 않는 것이다.


1704년(숙종30년)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이 11세의 나이에 서종제 녀 달성 서씨를 맞아 길례를 올렸다. 

달성군부인 서씨의 나이 연잉군 보다 2세 많은 13세였다.

연잉군이 길례를 올리자 출합의 문제가 대두 되었다.

출합이란 길례를 올린 왕자나 왕녀를 궁 밖으로 이사 보내는 것을 말하는데 새집을 짓거나 헌집을 개보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숙종조 말년에 왕실의 재정이 넉넉하진 않았던 듯하다. 

숙종은 유씨를 후궁 삼을 때도 거금을 써 중신들을 한숨짓게 하더니 사랑하는 왕자를 출합 보내면서도 거금을 들여 집을 지어 주려 하니 중신들이 남몰래 탄식 하더라는 기록이 실록에 있는데 그 중 이런 대목이 있다.


“숙빈 최씨는 이현에 크고 너른 집이 있는데 임금이 또 왕자를 위해 별도로 저택을 짓고자 하였다.”


최숙빈에게 크고 좋은 집이 있는데 거기 놔두고 또 새집을 지어 준다는 사실에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부모 없는 천애 고아인 최숙빈의 사가가 크면 얼마나 크다고 왕자의 사저로 손색이 없다는 것일까?

단순한 최숙빈의 사가가 아닌 최숙빈이 현재 머물고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로 이현궁은 숙빈방이라고도 불린다.

 

최숙빈은 어느 순간 그러니까 인원왕후가 간택된 숙종 28년 10월 이후부터 연잉군이 길례를 올린 숙종 30년 4월 사이 궁 밖에 처소를 두게 되었다.

자연히 궁 안에 거소하는 숙종과 아들 연잉군을 자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숙종이 왜 10세도 안된 어린 아들과 어미를 떼어 놓았는지는 의문스럽다.

최숙빈이 뭔가 큰 잘못을 한 것일까?

노골적으로 중전자리를 탐했다가 숙종에게 미운털이 박힌 것일까?

단순히 사랑이 식었다고 하기엔 뭔가 미심쩍다.

게다가 출합하는 아들과 함께 사는 것도 허락 되지 않았다. 

굳이 새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한 것이다.


최숙빈이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이 허락 된 것은 1711년(숙종37년) 6월 22일 이다.

이날의 실록을 보면 숙종이 연을 타고 이현궁 옆을 지날 때 마다 저 크고 넓은 집에서 최숙빈 혼자 사는 것이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며 거처를 아들이 사는 창의궁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한다고 기록 되어 있다.


안타깝고 미안했다 하기엔 무려 7년이 흐른지라 느닷없는 감이 없지 않지만, 최숙빈은 마흔둘이 된 이 해부터 죽는 순간까지 아들과 함께 며느리의 효도를 받으며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아쉽게도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47세 되는 숙종 42년부터 병에 걸려 자리보전하게 되었고, 2년의 투병 끝에 숙종 44년(1718) 3월 9일 49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이 때 연잉군의 나이 25세 였다.

 

 

영조는 궐에서 태어나 궐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궐을 나온 것은 11세 되던 해에 길례를 올린 것이 계기 였고, 이후 이복형 경종에 의해 왕세제로 책봉되면서 다시 궁에 들어와 살게 됩니다.

 

경종의 후사 문제 어렸을 때부터 불거진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경종 스스로 후궁을 두지 않았으니 자신의 생산력에 문제가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경종은 등극 후 가까운 종친의 아이를 입양하여 후사를 세우려고 했으나 노론의 반대로 일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결국 이복아우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봉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답이 되셨길 바랍니다.

 

201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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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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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에서는 숙빈 최씨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인현왕후가 출궁한 이후 한 궁녀가 인현왕후의 생일을 홀로 기념하고

있었는데 숙종이 이를 보고 감동하여 그 궁녀를 후궁으로 삼았다는

기록과, 그녀가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점과, 인현왕후 사후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음을 숙종에게 고했다는 부분 정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드라마의 70% 이상은 작가의 상상에 의한 허구이고, 실제로

기록된 사실도 드라마 상에서 다르게 만든 부분도 있습니다.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궁궐을 나가 영조를 홀로 키운 점도 허구입니다.

 

역사는 영조는 태어날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궁에서만 자란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숙빈 최씨 역시 궁궐에서 무탈하게 지내다가 장희빈

사후 숙종의 뜻에 의해 출궁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경종이 병약한 것은 사실입니다. 자식도 못 낳았고요.

 

따라서 연잉군은 경종 재위시에 대리청정을 한 적이 있었고, 경종이

일찍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영조가 됩니다.

 

과거의 대장금, 이산, 선덕여왕 등과 마찬가지로, 이 드라마도 역시

소재만을 실제 역사에서 따온 그냥 지어낸 이야기로 봐야합니다.

 

다큐의 본질은 실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지만, 드라마의

본질은 허구이죠. 이것을 가지고 역사와 다르다고 문제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겠죠.

201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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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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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궁궐에쫒겨남니다..하지만나중에돌아오죠..그리고경종은 진짜로후사를잊지못합니다/...부인만있을뿐..그래서 그러한이유로새로들어온 인원왕후가영조에게많은도움을주워임금이됨니다..

 

201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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