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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장희빈의 아들에 대해서..?
hyei**** 조회수 10,511 작성일2002.12.26
장희빈의 아들이 있잖아요

균인데..

세자로 일단은 책봉 됬는데

왕이 됬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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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장희빈에 관한 내용입니다.




분류

역사와 지리 > 역사 > 한국사 > 조선시대
인물 > 정치 > 한국정치 > 조선시대
지역 > 아시아 > 한국 > 한국일반


요약

조선 후기 숙종의 빈(嬪).


본문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당시 소의(昭儀)였던 장씨와 가까이 하여 왕자 윤(:景宗)을 낳자 1689년(숙종 15) 1월 윤을 세자로 봉하였다. 이에 따라 소의 장씨는 희빈에 오르고, 세자책봉은 불가하다고 상소한 송시열은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되어 권대운(權大運) 등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己巳換局).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자 서인 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1694년(숙종 20) 서인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다시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인현왕후의 폐출을 후회한 바 있던 숙종이 남인을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일이 발각된 장희빈은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아래는 윤, 즉 경종에 관한 겁니다

요약

조선의 제20대 왕(재위 1720∼1724).
본명 : 윤
별칭 : 자 휘서
활동분야 : 정치


본문


휘(諱) 윤(). 자 휘서(輝瑞). 숙종의 아들. 어머니는 희빈 장씨(禧嬪張氏). 비(妃)는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 단의왕후(端懿王后). 1690년(숙종 16) 송시열(宋時烈) 등이 반대하는 가운데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이복동생인 연잉군(延君: 뒤의 영조)은 노론(老論)의 지지를 받고 그는 소론(少論)의 지지를 받았다. 1717년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으나, 그해 숙종이 몰래 노론의 이이명(李命)을 불러 세자가 무자다병(無子多病)함을 이유로 그의 즉위 후의 후사는 연잉군으로 정할 것을 부탁한 일이 있어 노 ·소론이 크게 대립하였다. 1721년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한 뒤 다시 노론이 그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건의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그 뒤 대리청정의 부당함을 극간(極諫)하는 소론 이광좌(李光佐)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친정(親政)하였는데, 김일경(金一鏡)의 탄핵으로 세제 대리청정의 발설자인 김창집(金昌集) ·이이명 ·조태채(趙泰采) ·이건명(李健命) 등의 노론 4대신을 유배보냈다. 1722년 노론이 시역(弑逆)하고 이이명을 추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이 있자, 유배 중인 노론 4대신을 사사(賜死)한 뒤 노론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것이 신임사화(辛壬士禍)이다. 이후 소론의 과격파인 김일경 중심의 정권은 노론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벌여서 그의 재위 4년 동안은 당쟁(黨爭)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능은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懿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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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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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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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로 책봉이 되서 왕이 된걸로 알고 있어염

200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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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lj****
고수
대학 입시, 진학, 고등학교진학, 사회, 도덕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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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희빈 장씨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20대 임금 경종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 의하면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기 전에 아들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연잉군을 보내니까 갑자기 남자의 생식기를 꽉잡고 않놓아주어서 건강이 악화 되고 후사가 없는걸로 압니다

200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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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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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d****
시민
사회, 도덕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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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어요.
20대 경종대왕...
이름은 이균
희빈 장씨의 아들이지요.
하자만 왕위에 오른지 얼마안 되어 돌아가시고 마십니다.
슬하에 자식도 두지 못한채 말입니다.
그리하여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 이금이 보위를 잇게 됩니다.
그가 훗날 21대 영조대왕 이심니다.
20대 왕 경종대왕 께서는 두 분의 정부인이 계셨는데 첫재부인은 단의왕후 심씨로
세자빈때 돌아가셔서 왕후로 추존돼셨습니다.(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2년전에 병사,그리하여 경종이 왕이 된후 왕후로 추존)
그리고 두번째 부인은 선의왕후 어씨로 단의왕후께서 돌아가신 이듬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왕 세자빈의 자리에 오르시고 경종대왕께서 즉위하시자 왕후로 책봉되신 분입니다.
어찌되었든 희빈 장씨의 아들 이균은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종대왕께서 후사가 없으신 이유는 희빈 장씨가 사약을 먹기 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마지막으로 보게 해달라고 숙종대왕께 간청 해 그 보게 되는 시간에 경종을 보자마자 경종의 생식기를 잡아 빼 본래 몸이 허약 했던 경종은 그때 부터 자리에 들어눕게되고,후사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아셨죠?

200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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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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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ja****
고수
한국사, 사회, 도덕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사실 군주는 다변(多變)하면서도 종사와 왕실을 유지한다는 축으로서 정국을 운영해 가야한다. 가장 군주다운 군주는 덕만 있어도 안되고 지나치게 엄해서도 안되고, 지나치게 독단으로 흘러서도 안되며, 지나치게 패도적이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염치나 명분, 충효, 인 · 의 · 예 · 지 · 신(仁義禮智信)이라는 논리가 군주에 있어서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군주는 수없이 다양한 일들을 처리하여야 하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고 또 그러면서도 하나의 몸체를 가지고 있어야만 만민의 위에 설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본다면 명종의 경우 본인 스스로의 의지라기 보다 모후인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의 척신(戚臣) 등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는 점은 그의 재위기간 동안 군주권의 한계로 나타났다. 물론 여기에는 우연적인 요소도 존재하였다. 즉,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승하하였다는 점과 그에게 후사가 없었다는 점, 또 문정왕후에게 아들이 명종 하나였다는 점, 왕실 내에 그와 맞경쟁할 수 있는 대군이나 왕자군이 없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비록 열두살이라는 어린 나이였지만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조선 13대 군주로서 그를 용좌에 앉혔던 것이다.

 왕위계승의 경우 부자지간이 아닌 형제간 혹은 반대로 조카를 숙부가 계승하였을 경우 일반적인 예와는 달리 명분상 부자관계가 성립된다. 즉 인종과 명종은 형제지간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부(父)와 자(子)라는 계서(階序)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문정왕후가 실 질적인 모후이지만 명분상은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 박씨가 당연히 모후가 되는 것이다. 이는 왕실의 계승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순서에 있어 혼란을 피하는 방안이었고, 이것이 바로 왕실이 갖는 오례(五禮)적 질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인종과 명종의 관계는 그 둘만의 관계가 아니었다. 이들을 둘러싼 제반 정치세력의 대립갈등이 첨예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적대적 관계는 결국 한 측의 몰락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명종 자신이 자의지(自意志)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은 그러한 사정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또 사실 사왕(嗣王)이 어릴 경우 국정의 운영을 보조할 수 있 는 제도가 있는데 수렴청정(垂簾聽政)과 원상제(院相制)가 그것이다. 특히 이러한 선례가 있어 참고되기도 하였다. 즉, 예종이 승하한 뒤 세조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가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였고, 한명회 등의 대신들이 원상이 되어 보좌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인종의 승하 뒤 국정의 공백을 메우고 정치 행정 등의 혼란 을 막기 위해 문정왕후와 대신들의 섭정이 제시된다.

 물론 수렴청정을 할 경우 그 주체인물로 친 모후인 문정왕후와 인종비인 인성왕후 박씨가 있었으나 중국에서의 선례에서 보다 서열상 위에 있는 왕후가 청정(聽政)을 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 하여 문정왕후가 하게 된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실세가 작용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200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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