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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조선왕들에대해서
na03**** 조회수 2,660 작성일2008.08.21

조선왕들에 대해서 간단하면서 알아보기쉽게 간단하게 정리해주세요.

좋은답변은 채택됩니다......간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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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쉽게 현대적 용어로 설명하겠습니다.

 

1대 태조

 이성계. 6년 동안 재위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왕입니다. 본래 군인이었습니다.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물리치면서 군부 내 실력자로 떠올랐습니다. 이성계가 이끈 젊은 군인들은 고려 군부의 실권자 최영 장군이 이끄는 구세력과 대립구도를 형성했습니다. 최영은 젊은 군인들을 내치기 위해 이성계와 조민수를 요동 정벌에 보냅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에 가면  중앙권력에서 밀려난다는 것을 깨닫지요.

 한편 문인들의 세계에서는 기존 문벌귀족과 사대부들이 대립하게 됩니다. 이 사대부 중에서도 정도전과 조준이 이끄는 혁명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최영과 대립하는 이성계를 충동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종용합니다. 이 쿠데타가 위화도 회군입니다. 여기서 승리한 이성계는 최영 및 구군부 숙청, 토지 재분배, 온건파 사대부(정몽주 등) 숙청 등의 작업을 통해 권력을 다집니다.

 

 즉위 후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투쟁이 벌어집니다. 정안대군을 비롯한 첫째부인의 아들들은 적통도 있고, 혁명 동지인만큼 왕위를 이어받을 명분이 있었습니다. 한편, 신권중심 정치를 원한 정도전과 일부 혁명파 사대부들은 약한 왕을 원했기 때문에, 계비의 어린 아들을 왕위로 올리려 합니다. 태조도 계비에 대해 사랑이 깊었고, 장성한 아들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정도전 편을 들려고 합니다. 그러자 첫째부인의 아들들이 선수를 쳐 정도전을 죽이고 권력을 잡습니다. 이에 분노한 태조는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납니다.

 유교 국가인 조선이지만 불교도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무학대사와 오랜 친구입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태조는 폴로와 비슷한 스포츠를 즐겼다고 하는군요.

  

2대 정종

 영안대군 이방과. 2년 재위

 동생 정안대군만큼 결정적인 역할은 못했지만, 아버지의 혁명과 형제들의 왕자의 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재위 중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재천도했습니다.

 2년만에 동생 정안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3대 태종

 정안대군 이방원. 18년 재위

 재임(재위) 기간까지 같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여러모로 많이 닮았다고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이방원은 군인의 아들이지만 문인이었습니다. 정도전으로부터 성리학을 공부했고, 과거에 장원합격한 수재였습니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 스승 정도전과 함께 조선건국의 3대 주역으로 꼽힙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정몽주 등 온건파 사대부를 철저히 숙청한 인물이 이방원입니다. 그리고 신권중심체제를 원한 정도전과 대립하였고, 1차 왕자의 난을 승리로 이끌어 권력을 잡게 됩니다. 재위 기간 중에는 성리학 원리에 입각해 철저히 왕권중심정치를 구축합니다. 그래서 조선은 역대 왕조 중 가장 왕권이 강력했던 시기로 꼽힙니다.

 왜 박정희와 비교되냐면 나라의 기틀을 잡았고, 카리스마적인(혹은 잔인한) 통치를 구사했기 때문입니다. 태종은 1차 왕자의 난,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동생들을 여럿 죽입니다. 2차 왕자의 난에서는 어머니까지 같은 친동생을 죽입니다. 온건파 사대부 처리도 철저히 죽임이라는 방법으로 끝냈습니다. 재위 중에는 친인척 관리를 위해 처남들과 사돈(세종의 장인)까지 죽입니다. 그래서 원한도 많이 샀습니다.

 

 여기부터 존칭어는 그만 쓰죠.

 

 그러면서 태종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고, 조선 정치의 기틀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고려 시절 문란한 사회기강을 바로 잡았고, 세종 시대 전성기를 마련했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원했기 때문에 능력있는 아들이 왕이 되길 원했다. 그래서 광인 행세를 하는(이게 진짜인지 연기인지는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나 나중에 계유정난에 개입하는 것을 보면 평생 미치광이로 살지는 않은듯 싶다)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셋째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4대 세종

 충녕대군 이도. 32년 재위

 태종이 마련한 중앙집권 체제 위에 신권정치를 절묘하게 배합했다. 유능한 신하들을 많이 얻었고, 이들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했지만, 튼튼한 왕권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 상 최고의 정치 9단이라는 평가와, 아버지의 후광을 받은 정치인을 뿐이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역사 상 위대한 성군들 중 하나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다.

 세종 시대는 경제와 문화가 융성했던 시기였다. 이 때 그가 키운 과학기술은 농업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조선 경제의 전성기가 온 것이다. 또한 6진을 개척해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고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조선이 요동정벌을 포기한 사대주의 국가라는 일부의 비판을 문화적으로 잠재우기 위한 정치적 목적의 산물일 뿐이라는 평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악평가에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을 듯 싶다.

 세종도 불교도였다. 이때 세종의 도움으로 불교가 많이 융성했다. 이 때문에 신하들의 반발이 컸지만 결국 세종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또한 과로, 운동부족 및 편식습관으로 인해 건강이 매우 안 좋았다는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세종은 골프와 비슷한 스포츠를 즐겼다고 한다.

 세종은 며느리 때문에 골머리를 썩었다. 첫번째 며느리(문종의 부인)는 "사람을 미혹하는 술법을 써" 요사스럽다는 이유로 내쫓겼다. 둘째 며느리는 여종과 동성연애를 한 것이 발각되어 내쫓겼다. 셋째 며느리는 단종을 낳고 바로 죽었다.

 

5대 문종

 이향. 2년 재위

 세종의 장남이다. 드디어 왕의 장남이 왕위를 잇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닮아 병약해 즉위 2년만에 승하했다.

 문종은 2년만 재위했지만 그의 족적은 사실 크다. 세종 조 후기 정치는 거의 문종이 처리했기 때문이다. 세종이 몸 관리와 훈민정음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문종은 주요 정사를 맡았다. 세종을 닮아 매우 똑똑했다는 것으로 전해진다. 세종 조 치세는 사실 문종에게 큰 공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6대 단종

 노산대군 이홍위. 3년 재위 

 문종의 아들이다. 문종은 죽기 전 김종서, 황보인 등 대신들에게 어린 아들을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단종 대에는 신권이 막강했다. 그러나 이는 김종서와 황보인의 권력전횡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러자 태조 대와 마찬가지로 왕권주의자와 신권주의자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김종서와 황보인은 안평대군과 손잡아 신권주의 세력을 형성했고, 수양대군은 양녕대군과 종친들을 불러모아 왕권주의 세력을 형성했다.

 결국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고 집권에 성공했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폐위하고 즉위했다. 그 뒤 사육신들의 반란을 명분삼아 수양대군(세조)은 단종을 죽였다. 자신과 대결했던 안평대군도 세조에 의해 죽임당했다.  

 단종은 반란 주모자로 여겨져 죽임당했기 때문에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연산군,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노산군이라 불려졌다. 그러다가 숙종 대에 단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7대 세조

 수양대군 이유. 13년 재위.

 세종의 둘째 아들, 문종의 동생, 단종의 숙부다.

 정치 스타일은 조부 태종과 흡사하다. 동생과 조카를 망설임없이 죽이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것이다. 또한 경국대전을 만들어 법체계를 정비했다. 홍문관을 설립해 성종 대 치세에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종종 무시되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 세조 대에 이루어진 바 있다. 세조는 조부 태종과 달리 왕을 내쫓고 죽이는 반역을 저질렀다. 그래서 사육신이 죽음으로 맞섰고, 생육신이 은둔으로 세조에 저항했다. 이때부터 조선의 재야세력이 형성되었다. 사실 이 재야세력의 뿌리는 고려말에서부터 시작한다. 고려 문벌귀족에 맞선 성리학적 사대부 중에는 온건개혁파와 급진혁명파가 있었다. 이들 중 정도전과 급진혁명파가 조선을 건국했다. 반면 정몽주와 온건개혁파는 숙청당했다. 이 온건개혁파가 바로 세조에 맞선 재야세력의 뿌리다. 이들은 세조의 계유정난을 계기로 조선 조정과 완전히 대립각을 세웠고, 재야에서 집단을 형성했다. 이 집단이 사림파다. 이 사림파는 성종 대에 다시 조정으로 발탁되는데, 이때부터 훈구와 사림 간의 피튀기는 대결이 시작된다. 결국 사림이 승리하고, 사림의 후예들이 집권하는 숙종 대에 이르러 단종과 사육신이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8대 예종

 해양대군 이광. 13개월 재위

 세조의 큰아들이 일찍 죽어, 차남 예종이 왕위를 이었다. 즉위 13개월만에 승하했다. 일찍 죽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예종은 그 1년 동안 세조보다 더욱 잔인한 통치를 했다고 한다. 의심이 심해 여러 신하들이 희생당했다고 한다. 그 한 예가 남이 장군 사건이다. 유자광이 예종에게 남이 장군이 반란을 꾀한다고 거짓 밀고해, 예종이 남이 장군을 죽인 사건이다.

 

9대 성종

 자산군(잘산군) 이혈. 25년 재위.

 세조의 손자이자, 뒷날 추존된 덕종의 아들, 예종의 조카다. 세조의 큰아들이 일찍 죽었는데, 예종이 후사없이 죽자 그 큰아들(덕종)의 아들 자산군이 왕위를 이었다. 

 세종, 영조, 정조와 함께 조선의 성군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세종이 태종의 강력한 권력을 이어받아 평화로운 치세를 이룰 수 있었듯이, 성종도 세조의 유산을 많이 이어받았다. 2년도 안되어 왕이 두번 바뀐 탓에 정국이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세조가 남긴 통치 체제와 예종의 강력한 통치 덕분에 대체로 왕권은 안정되었다. 특히 성종은 홍문관을 통해 문화 및 정치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조선의 정치체제 정비가 완결된 때가 성종 대이다.

 성종은 폐비 윤씨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종의 중전 윤씨는 질투가 심해 성종이 여러 후궁을 데리고 사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성종은 유난히 건강도 좋고, 계비도 많고, 자식도 많았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다툼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전에 방영된 사극 <왕과 비>에서는 성종은 중전 폐위를 망설인 반면, 덕종의 처 즉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중전 폐위에 앞장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성종이 다소 마음 착하지만 우유부단한 왕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우선 성종은 세조와 예종이 너무 잔인하게 통치한데 비해 유화적일 뿐이지, 매우 과단성 있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중전 폐위에 앞장선 사람도 성종이지 인수대비가 아니었다.

 성종은 또한 사림파를 등용한 점 때문에 중요하다. 조선 초기 훈구파들은 막강한 지위를 누렸다. 그만큼 부패가 심했다. 그래서 성종은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훈구파에 대한 대항마로서 사림파를 키웠다. '정치 9단' 성종은 훈구파와 사림파 간에 존재한 긴장과 균형을 적절히 조정했다. 그러나 성종이 죽자 이 긴장은 깨졌다.

 

10대 연산군

 이융. 12년 재위.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종이 재위 기간 내내 병상에 있었고, 단종이 반역자로 찍혀 죽임당했기 때문에, 연산군은 사실상 조선 왕조 최초의 장남 출신 임금이었다. 이는 연산군에게 엄청난 프리미엄이었다. 또한 성종이 강력한 왕권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연산군은 그만큼 자신감이 충만했다.

 연산군이 실제로 미치광이였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잔인하기로 따지자면 태종(동생 및 각종 친인척 살), 세조(동생 및 어린 조카 살), 광해군(여섯살 동생 살), 영조(아들 살)가 연산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정사기록과 연려실기술은 그를 미치광이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쪽이 정설이다.

 연산군은 재위 초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개혁이 추진되면서 정국이 다소 시끄러워지면서 훈구파와 사림파 간 갈등이 증폭되었다. 그러다가 유자광과 이극돈의 계획에 빠져 사림파를 대거 숙청하는 무오사화를 벌였다.

 시대의 모사꾼 유자광은 그 다음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사건을 알려준다. 성종의 명령 때문에 그 전까지 신하들은 조정 내에서 폐비 윤씨 사건을 들먹거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건의 전모를 몰랐던 연산군은 사건을 알게 되자 분노를 금치 못하고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이번에는 사림파 뿐 아니라 상당수 훈구파까지 학살당했다. 연산군은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치는 패륜행위를 저질렀는데, 인수대비는 이 때 얻은 충격으로 곧 사망했다.

 연산군의 폭정은 이어진다. 장녹수와의 스캔들, 훈민정음 사용 금지, 독재정치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결국 훈구파를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났다. 중종반정이다.

 

11대 중종

 진성대군 이역. 38년 재위.

 성종의 차남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훈구파의 쿠데타로 즉위한 중종은 처음에는 사실상 허수아비 왕이었다. 중종의 첫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는 연산군 부인과 누이였고, 그 아버지(연산군과 중종의 장인)가 연산군 시절 실권자였다는 이유로 훈구파에 의해 폐위되었다.

 중종과 사림파는 이러한 훈구파의 전횡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중종은 사림이었던 조광조를 발탁했다. 천민들과 춤추기를 꺼리지 않았을만큼 기존 사대부와는 아주 달랐던 조광조는 세계사 상에서도 사례를 찾기 어려운 급진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이상주의적 개혁은 훈구파의 저항을 받았다. 특히 조광조가 반정공신 중 진가를 가려내는 작업을 추진하면서 불만은 극에 달했다 (실제로 중종반정 때 공신은 숫적으로 태조 때 개국공신이나 인조 때 반정공신에 비해 지나치리만큼 많았다. 이 때문에 중종도 나중에 가려내는 작업을 벌였는데 1/3이 공신 작위를 잃었다고 한다). 또한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중종을 피곤하게 만들었고, 신권중심적 사상도 중종의 불만을 얻었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와 사림파를 숙청하는 기묘사화를 추진했다. 조광조의 개혁으로 인해 훈구파의 힘이 다소 꺾이고, 사림파도 결국 숙청되면서, 최종적으로 이득을 본 것은 왕권 강화를 이룬 중종이라는 평가도 있다.

 

12대 인종

  이호. 1년 가량 재위.

  중종 후기에는 외척의 힘이 강대해졌다. 특히 둘째부인 장경왕후 윤씨를 중심으로 한 대윤과 셋째 부인 문정왕후 윤씨를 중심으로 한 소윤이 충돌했다. 인종은 장경왕후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즉위한지 얼마 안돼 승하한다. 당시 문정왕후가 인종을 독살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지금도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다.

 

13대 명종 (윤원형 외척정치)

 이환. 22년 재위.

 이의가 있을 수 있겠으나 조선 역사 상 최악의 시기가 명종 대였다. 명종은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자, 인종의 이복동생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대비와 그 오라버니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이 집권했다. 그리고 장난아니게 부패한 외척정치가 이루어졌다. 문정대비는 보우 스님을 궁궐로 종종 불렀고, 심지어 과거시험에서 궁중 스님을 뽑는 승과 시험까지 만들었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 이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문정대비의 의지로 관철되었다. 영의정 윤원형은 정치를 마음대로 휘둘렀는데, 윤원형의 재산이 궁궐 전체의 재산보다 크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회자되기도 하였다.

 정치가 이꼴이니 국민들이 잘 살 리 없었다. 임꺽정이 활약한 시기도 이 때였다. 임꺽정이 의적으로 미화될 수 있을지는 논란거리지만, 적어도 많은 민중들이 그를 의적으로 미화하게 된 이유를 따지고 보면 결국 당시 민중들의 빈곤과 사회혼란이 배경이다.

 그러나 외척정치도 문정대비의 사망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문정대비가 죽자마자 보우와 윤원형이 처형당했다. 얼마 안돼 명종도 죽었다.

 

14대 선조

 이균. 41년 재위.

 명종도 후사없이 사망했다. 결국 중종의 다른 자식들 중에서 골라야 했다.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덕흥대원군인데, 그 아들이 즉위했다.

 조선 후기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선조 대의 특징은 크게 보아 두 가지다. 하나는 사림파가 집권하고 붕당정치가 시작했다는 것이다. 반정공신들이 죽으면서 훈구파는 거의 맥이 끊어졌다. 또한 오랜 부패 외척정치에 염증을 느낀 선조는 개혁적인 사림파를 적극 등용했다. 이에 따라 남은 훈구파도 사림파에 가담하면서 비로소 사림시대가 열린다. 사림 시대가 열리면서 새로 나온 현상이 붕당 정치다. 이 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다. 사림들은 붕당정치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지만, 고려 문벌귀족이나 조선 전기 훈구파에 비해 도덕적인 면에서는 크게 나았다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임진왜란이다. 특별한 설명이 필요없을듯 싶다.

 

15대 광해군. (북인, 특히 대북 집권기)

 이혼. 15년 재위.

  선조의 둘째 아들이다.

 선조 말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다시 한번 논란이 빚어졌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와 대신들은 부리나케 평양-의주로 피난을 갔다. 반면 광해군은 형 임해군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의병을 불러모아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광해군은 정인홍 등 북인 세력을 지지층으로 확보했다. 또한 항왜 전쟁 참여 경력 때문에 광해군은 민중들의 지지를 얻었다.  

 북인은 뿌리로 볼 때 동인 혹은 영남학파에서 갈라져 나왔다. 그러나 조정 내 동인들이 퇴계 이황의 제자들인데 비해, 북인들은 남명 조식 혹은 화담 서경덕의 제자들이었다. 동인들이 정치 참여에 부정적이지 않았던데 비해, 북인들은 재야에 은둔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북인들은 정치적으로 아웃사이더였다. 이는 임진왜란 내내 조정 밖에서 지냈던 광해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조정 내 대신들은 광해군과 북인들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다. 광해군 역시 피난에 바빴던 서인(이이의 제자들 혹은 기호학파)과 남인(퇴계의 제자들)에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선조 역시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그 대신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유는 모르게도 선조는 결국 세자를 바꾼다는 유언을 남기지 않고 승하했다. 그래서 광해군이 즉위한 것이다.

 광해군의 정치는 논란이 많다. 광해군은 명분론적인 사대주의 외교를 포기하고, 새로운 강대국 청나라와 오랜 동맹 명나라 사이에서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실용 외교를 구사했다. 이 외교정책이 뒷날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지만, 양차 호란이 벌어지면서 누가 옳았는지는 금방 판명되었다. 광해군은 또한 왜란 후 피폐해진 국가를 다시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광해군 역시 많은 피를 부르는 정치를 했다. 북인 중에서도 영창대군 왕위계승에 찬성했던 소북이 숙청당했다. 또한 어린 영창대군, 능창대군, 그리고 친형 임해군을 죽였다. 아버지 선조의 계비, 즉 광해군의 어머니뻘인 인목대비를 서궁(본궁이 아님)으로 유폐시켰다.

 결국 불만을 품은 서인들이 남인들을 일부 이끌고 능양군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사건이 인조반정이다.

 

16대 인조 (서인 집권기)

 능양군 이종. 26년 재위.

 정원군의 아들이다. 선조의 손자이자, 광해군의 조카다.

 인조는 조부 선조와 함께 무능한 국왕 중 하나로 꼽힌다. 인조 대에 국가가 많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우선 반정공신 이괄이 난을 일으켜, 한때 한양이 점령당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혼란이 일어났다.

 우선 광해군의 실용외교가 문제시되고, 서인의 친명 사대외교가 실행되었다. 이에 따라 청나라와 충돌을 빚게되자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했다. 정묘호란에서 패배하자 형제관계를 맺었고 (이래서 우리나라와 중국은 형제의 나라라는 말은 지금도 하면 안되는거야~근데 종종하는 무식한 외교관들이 있지), 병자호란 뒤에는 아예 군신관계를 맺었다. 병자호란이 패배로 끝나자 삼전도에서 군신관계를 맺는 의식을 치렀는데, 이는 대단히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삼배구고두라 불리는 이 의식은, 높은 단 위에 청 태종이 앉고, 그 아래 인조가 절을 하면서 삼십번 정도 머리를 땅에 찧는 것이었다. 그런데 머리를 찧는 소리가 청 태종에게 들려야 했기 때문에, 이 의식을 치르면서 인조의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렀다고 한다. 수많은 여인들이 이때 청나라 병사들에게 정절을 잃었고, 또한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갔다.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이때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아담 샬을 만나 과학을 배우는 등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귀국한 뒤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자는 주장을 인조에게 건했다. 이 때문에 둘은 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17대 효종 (서인 집권기)

 봉림대군 이호. 10년 재위.

 인조의 차남이다. 병자호란 뒤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형과 달리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추진한 것이 북벌정책이다. 효종은 내부적으로는 남인 김육을 등용해 경제를 안정시키고, 국방력을 강화시키면서 북벌을 준비했다.

 그러나 북벌은 쉽지 않았다. 우선 낌새를 파악한 청나라가 수시로 조선의 군사 체계를 검사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북벌에 찬성한 송시열과 서인들이 효종에게 내치를 중시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오랜 전란에 지친 국민들이 전쟁에 찬성하지 않았다. 전란으로 인해 경제가 피폐해 북벌에 필요한 재정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결국 북벌은 실행하지 못하지만, 청나라의 요구로 러시아 원정에 파병해 조선의 발전된 군사력을 선보였다.

 결국 효종은 형처럼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효종은 북벌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양반들의 비리를 전면 수사해, 부정축재한 양반들의 재산을 몰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돼, 의사의 의문스러운 실수로 인해 효종은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돌연 승하했다.

 

18대 현종 (서인 => 남인)

 이연. 14년 재위.

 효종의 아들이다.

 붕당 정치는 이 때 극에 달했다. 인조-효종 대를 거치면서 권력을 굳힌 서인은 1차 예송논쟁을 통해 남인을 거의 궁궐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현종은 서인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차츰 남인을 등용했다. 그러던 중 2차 예송논쟁이 일어나고, 여기서는 남인의 편을 들어주면서 마침내 남인 집권기가 도래했다.

 현종 시대는 예송논쟁을 통해 조선의 성리학이 크게 발전한 시기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힘들었던 시대였다. 가뭄이 잇따라 찾아왔기 때문이다. 어느 해에는 경상도에서만 가뭄 때문에 20만명 가량이 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도 조정은 당파싸움에만 골몰해 있었다.

 

19대 숙종 (남인 => 서인(노론) => 소론 => 노론)

 이순. 재위 46년.

 현종의 아들이다.

  '정치 10단' 숙종의 시대는 정치적 격변이 심했지만 왕권은 오히려 튼실해진 시기였다. 일단 숙종이 즉위했을 때 집권세력은 남인이었다. 그러나 남인의 전횡이 심해지자, 숙종은 남인 출신 영의정이 왕의 허락없이 국가재산을 사용했음을 문제삼아 남인을 내리친다. 이 때 남인은 거의 재야세력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서인이 집권하자 남인과 별다를 것없는 작태가 반복되었다. 숙종은 다시한번 권력집단을 견제할 필요를 느꼈다. 게다가 당시 숙종은 중전 인현왕후에게 흥미를 잃고, 장희빈에게 빠지고 있었다.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의 유력가문 출신이었고, 장희빈은 남인 가문 출신이었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았다. 이에 극렬하게 반대한 서인의 거두 송시열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다시 남인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다른 문제가 벌어졌다. 일단 남인이 다시 권력을 전횡하는 태도를 보였고, 특히 장희빈 집안이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또한 장희빈이 자꾸 숙종의 후궁들을 투기하자, 숙종도 인현왕후 폐위를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인현왕후가 사망한 얼마 후 숙종이 장희빈 처소에 찾아왔다. 그 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것이 발각되면서, 숙종은 장희빈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있는 상황이었다. 사제관계였던 송시열과 윤증이  윤증의 아버지를 위한 비문 때문에 다툼을 빚은 것이 직접적 계기였다. 노론은 송시열의 제자들로 서인 중 보수파였다. 소론은 윤증의 제자들로 남인과 북인의 영향을 다소 받은 개혁파였다. 장희빈 처형 당시 소론은 처형에 반대했고, 노론에 적극 찬성했다. 노론은 한 발 더 나아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 폐위까지 건의했다. 노론은 알게 모르게 세자를 죽이려는 시도를 했다.

 결국 장희빈은 처형당했다. 숙종은 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때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는 등 경종을 압박했다. 그러나 결국 세자는 폐위되지 않았다. 선조가 영창대군 세자 책봉 유언을 남기지 않은 것과 함께 미스터리로 남는 일이다.

 

===본인의 상상 같은 의견을 첨가하자면, 숙종은 세자 경종을 폐위할 마음이 없었다고 본다. 당시 권력구조를 생각해본다면, 숙종과 노론이 합심하는 이상 경종을 폐위하는 것은 어떤 억지를 부리더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이미 붕당 간 권력 전횡을 잇따른 환국으로 막은 바 있듯이, 노론의 권력 전횡을 원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미 자신은 늙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노론을 내치는 것은 힘에 부칠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아들 경종에게 일을 맡긴 것이다. 그토록 세자를 거칠게 대하면서 노론을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훈련시킨 것은 아닐지.

 

20대 경종 (소론 집권기)

 이윤. 4년 재위.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어머니 희빈 장씨 폐위에 반대하다 처형당한 소론 인사들을 복권시켰다. 또한 희빈 폐위에 앞장선 노론 4인방을 처형했다.

 경종은 세종의 아들 문종과 닮았다. 경종의 재위기간은 짧지만, 경종은 아버지 숙종이 늙자 아버지를 대신해 정치를 담당했다. 숙종과 노론의 압박이 심했던만큼 경종은 매우 정치를 조심스럽게 행했다. 그래서 경종은 큰 실수 없이 정치를 했다.  숙종 대 치세도 결국 경종없이 불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종은 즉위 4년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경종은 평소 위가 나빴다고 한다. 그런데 세제(뒷날 영조)가 식사 대접을 하면서 게와 감을 경종에게 주었다. 그런데 게와 감을 같이 먹는 것은 위에 대단히 나쁘다고 한다. 이 게와 감을 먹고 경종은 위장병으로 죽었다. 이 때문에 영조는 독살설에 휘말렸다.

 

21대 영조 (탕평책. 노론 우위)

 연잉군 이금. 52년 재위.

 숙종의 서자, 경종의 이복동생.

 우리나라 역사 상 가장 오래 재위한 왕, 세계사 상으로 따져보아도 재위기간이 20위 안에 드는 왕이다. 잘 알려졌듯이 그의 어머니는 무수리였다. 출신이 다소 '천하다' 보니 궁궐보다 누추한 외갓집에서 자랐다. 그러면서 검소한 식습관을 갖고, 추위나 더위에 강한 몸을 갖게된 것이 그의 장수비결로 여겨진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경종에 의해 죽은 노론 4인방을 복권시켰다. 그러나 이는 격렬한 반발을 샀다. 경종 독살설이 퍼지면서 영조에 반대하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여기서 교훈을 얻은 영조는 모든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했다.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이 모두 등용되었던 것이다. 탕평책 위에서 정국은 비로소 안정되었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영조는 다양한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균역법을 도입하고, 대동법을 확대했으며, 청계천 공사를 통해 실업을 줄이는 등 정말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세종대왕의 정치가 사실 일반 저계급 민중들에게는 많은 혜택이 돌아가지 못한 것과 달리, 영조의 정치는 실제로 서민들의 여러 부담을 덜어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정국은 완전히 안정되지 못했다. 사도세자 사건이 터진 것이다. 본래 영조는 아버지 숙종이 그랬듯이 나이가 들자 세자에게 정치를 맡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종과 달리 사도세자는 다소 미숙했다.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했지만, 결국 노론의 편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젊은 혈기에 개혁을 추진하면서, 기득권층인 노론과 잇따른 충돌을 일으켰다. 경종이 즉위할 때까지 조용히 칼을 갈고 있던 것과 대비된다. 그러자 노론은 자꾸 영조에게 사도세자에 관해 험담을 했고, 영조 역시 자꾸 갈등을 빚는 세자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사도세자와 영조 및 노론은 자꾸 충돌하게 되었다.

 갈등의 수위가 높아지자, 노론은 급기야 사도세자 폐위 및 왕세손(뒷날 정조) 대안론을 내세웠다. 많은 혼란 끝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처형했다. 노론은 반기면서도 한편으로 아연실색했다. 사도세자를 처형하게 되었으니, 세손이 할아버지 영조와 노론에 한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자 노론은 도리어 세손에 흠집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조는 끄떡도 하지 않고 세손을 보호했다. 노론은 경종에게 그랬듯이, 자객을 보내는 등 정조를 죽이려고 여러 시도를 했다. 그러나 영조는 그만큼 정조를 아꼈고, 철저히 보호했다. 아버지 숙종과 다른 모습이었다.

 

 22대 정조 (탕평책. 소론 우위)

 이산. 24년 재위.

 영조의 손자,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미국에서 역사적인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그 해, 조선에서는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했다.

 정조는 노론을 극도로 증오했지만, 할아버지의 탕평책을 계승했다. 사실 숙종 때 조선의 붕당정치는 균형이라는 특징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미 집권층 노론과 이념적으로 크게 갈리는 남인이 무너졌고, 수적으로 열세인 소론은 노론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조의 탕평책은 어찌보면 노론에 더욱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소수파가 다수파를 이기려면 강력한 투쟁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조는 탕평책을 통해 노론과 소론의 강경파를 없앴다. 이에 따라 소론의 '전투력'이 사라진 것이다. 그에 따라 노론을 견제하기가 매우 어려워진 상태였다.

 그러나 정조는 차분히 개혁을 추진하면서 노론을 약화시켰다. 정조 시대는 세종, 성종 시대와 함께 최고의 치세로 꼽힌다.

 그러나 정조 역시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게 정확히 1800년이다. 그 때부터 조선은 수난의 19세기를 맞게 된다.

 

 23대 순조 (노론. 경주 김씨 => 안동 김씨)

 이공. 34년 재위.

 정조의 차남이다.

 순조의 즉위는 정확히 19세기의 시작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150년 가량 이어지는 조선의 수난사가 시작된 시기다.

 순조가 어렸기 때문에 증조모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증조모지만 15살에 66살의 영조와 결혼했기 때문에 젊었다. 그런데 정순왕후 김씨의 가문이 사도세자 폐위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집안이기 때문에 정조는 할머니를 아주 싫어했다. 그러나 정조의 급서로 정순왕후가 뜻밖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기 동안, 그녀의 가문 경주 김씨의 세도정치가 이루어졌다.

 정순왕후는 또한 천주교도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정조가 천주교에 관대했던 것과 대비되었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천주교 박해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순조가 친정에 나서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바야흐로 순조의 장인 김조순과 그의 가문 안동 김씨 시대가 온 것이다.

 상황은 뻔했다. 안동 김씨는 과거 명종 시대에 파평 윤씨가 누렸던 기득권을 그대로 누렸다. 사실 그보다 더 강했다. 첫째, 지방 곳곳에 안동 김씨가 들어갔다. 정조는 재위 중 지방자치적 요소를 많이 강화했다. 김조순은 이 체제를 이용해 안동 김씨를 지방 곳곳에 심어놓았다. 둘째, 그 뒤 왕들이 안동 김씨와 계속 인연을 맺었다.

 그 외에도 대구 서씨, 풍양 조씨, 경주 김씨 등 여러 세도가문들이 힘을 가졌다. 이러니 나라는 파탄으로 달려갈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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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김씨와 안동 김씨는 김해 김씨와 함께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문중 중 최다의 인구 수를 자랑하는 문중이다. 그 이유가 있다. 조선 후기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족보조작이 많이 이루어졌다. 이왕 새로운 가문에 들어간다면 당연히 명문가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세도가문이었던 경주 김씨와 안동 김씨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오히려 왕가 전주 이씨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중전을 많이 배출했던 파평 윤씨, 또다른 세도가문 남양 홍씨, 밀양 박씨 등도 이때 인기를 끌어 인구를 늘린 문중이다.

 

24대 헌종 (안동 김씨)

이환. 15년 재위.

순조 대와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졌다.

 

25대 철종 (안동 김씨 + 풍양 조씨) 

이원범. 14년 재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강화도령 이원범이 즉위했다. 이원범은 전계대원군의 아들이자 은언군의 손자인데,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다.

이는 세도정치가 낳은 희극 같은 비극이었다. 비록 왕족이지만 궁궐에서 밀려난 조상 밑에서 태어나 강화도에서 농부로 살아가고 있던 이원범이었다. 당연히 정치에 대해 뭘 알리가 없었다. 이를 이용한 것이다. 옛날에 정도전이 왕권을 약화하기 위해 어린 왕자를 왕으로 삼으려 했듯이, 왕권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 무식한 임금을 세운 것이다.

 안동 김씨의 힘은 계속 이어졌다.

 

26대 고종 (흥선대원군 => 여흥 민씨)

이명복, 나중에 이재황으로 개명. 44년 재위.

 안동 김씨는 왕권을 약화하기 위해 똑똑한 것으로 알려진 왕족을 소리없이 제거하고 있었다. 이를 피해 흥선군 이하응은 미치광이인 척하다가, 풍양 조씨 출신 대비에게 안동 김씨 척결을 약속하며 차남 재황을 왕으로 만들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우선 영조가 추진하려다 균역법으로 양보하고 말았던 호포법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군역을 지게 된것이다. 또한 세도정치를 중앙정계에서 척결했다. 그러나 워낙 곳곳에 세도가문이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에 세도정치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고종이 친정을 선포한 뒤로는 중전 명성왕후의 가문 여흥 민씨가 세도정치를 부렸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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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대한제국의 황제이지, 조선의 국왕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외한다.

200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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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나의머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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