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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임진왜란에 대해...
Quenny 조회수 17,163 작성일2012.07.07

 학교 숙제가 임진왜란에 대해 조사해 오는 것인데....

임진왜란의 시대적 배경, 당시 상황, 활약한 사람들을 알려주세요~

 

도배,악플 글 등 사절!

오늘 까지써주세요~

 

내공 100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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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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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임진왜란이란 임진년(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입니다.
그 후 1598년까지 전쟁이 계속되구요.

#1. 임진왜란의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일본인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릴려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또한 명나라를 정복할려는 야심도 있었던 걸로 보인다.

 

#2. 임진왜란의 결과

 꽤 많은 결과를 초래했다. 많은 유적들이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붙잡혀 갔으며, 조선의 땅이 폐허가 될 만큼 농사짓기도 힘들었고 많은 기술자들을 강제로 데리고 갔다.

 

#3. 임진왜란의 영향

 민심 (백성들의 마음, 民心) 이 나라에서 멀어졌다. 나라가 혼란스러워졌으며 명나라도 국고 (나라의 창고, 國庫) 가 비어 청나라의 공격을 막을 힘이 거의 없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예술이 일본의 예술을 발달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4. 관련된 인물 10명 

 - 선조 : 동인과 서인의 붕당으로 힘들어하던 왕. 동인의 말을 들어 전쟁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명나라에 의존했던 왕이다.

 - 광해군 : 선조의 아들. 처음에는 나라와 나라의 관계를 파악하고 청나라를 공격하지 않았으나, 중신들의 반대에 부딫쳐 결국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억울한 왕이다.

 - 율곡 이이 :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폈다.

 - 이순신 : 바다에서 거북선을 만들어서 일본인들을 많이 죽인 명장. 명량대첩, 한산도 대첩 등이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 권율 : 행주산성에서 일본인들을 무찌른 명장.

 - 원균 : 이순신을 모함하여 삼군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지만 패했다.

 - 논개 : 여자이지만 촉석루에서 잔치를 열 때, 관기로 참석하여 왜장을 유인하여 남강에 몸을 던진 여인.

 - 곽재우 : 홍의 장군 곽재우이며, 의병이다. 나라를 위해 왜군을 무찔렀다.

 - 정인홍 : 의병이였으나 광해군 때 부정부패를 일삼아 인조반정때 쫓겨났다.

 - 유성룡 : 선조가 피신할 때 어가(임금의 수레) 가 조선을 떠나면 안된다고 주장하여 훌륭한 신하였다.

 

 

201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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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祿]의 역(),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이라고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좌기관()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사항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 말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使)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한편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편당()정치, 기강의 해이, 전세제()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조정에서는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비()를 중지하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따라서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일본국왕사(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의 서사()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주교수() 조헌()은 만언소()를 올려 시폐()와 국방을 논하는 등 일본 정벌의 강경론을 주장하자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를 이유로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1590년 3월 황윤길()을 정사(使), 김성일()을 부사(使), 허성()을 종사관()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동인세력은 서인들이 전쟁을 빌미로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 제3차 일본 사신 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놀라 그 해 5월에 일본의 서계 내용과 함께 왜정()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晬) ·이광() ·윤선각() 등으로하여금 경상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신립() ·이일()에게는 변비()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더욱 성숙하여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西]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使) 정발()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使) 송상현() 이하 군민()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 ·도도 다카토라[] 등의 9,000여 수군()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는데 이 중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제1군은 중로()로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충주()-여주()-양근()-용진()나루-경성동로(), 제2군 좌로()는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조령-충주-죽산()-용인()-한강, 제3군 우로()는 김해()-성주()-무계()-지례()-등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使),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岉)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使), 김근(玏)을 좌도안집사(使)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과 변기()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使) 류성룡()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조령·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을 수성대장()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使)였던 김명원()을 도원수()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개성을 향하여 피란길에 올랐다. 서울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달아났다. 파천에 대한 민심이 거제지자 파천을 주동한 사람은 영의정 이산해로 내몰고, 류성룡은 파천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거짓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임해군()은 함경도로, 순화군()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였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두 왕자를 붙잡아 왜군에게 인도하였다.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이 달아나자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란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창덕궁  등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강원·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군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는 왜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대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출동하여, 옥포()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당항포()·한산도()·부산 등지에서 계속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진주성()싸움·행주산성()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임진왜란 해전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과 왜군의 전함 비교]
 
- 조선수군의 전함
 


판옥선

 
- 왜군의 전함

 


아타케부네

 


세키부네

 


고하야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조선군으로 인해,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부산진·동래의 수성전()과 김해성()의 저항, 경상우방어사(使) 조경()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의 추풍령전투, 밀양 작원()에서의 밀양부사 박진()의 선전, 유도대장() 이양원()의 해유령()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한편 혼란과 민심의 이산 속에서도 근왕()을 부르짖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김면(정인홍()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김천일(), 호서에서는 조헌()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거병하였다. 또한 조선 사대부들에게 천대만 받았던 승려들이 봉기하여 가세하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령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길주()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도 대소의 허다한 의병이 봉기했으며 휴정()·유정()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여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왜군의 군사행동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왕이 파천하는 도중 사신을 명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명에서는 조선 땅에서 왜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파병을 결정하여, 선봉장으로 낙상지()와 사대수() 등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송응창(이여송()이 4만 5000의 동정군()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치()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패퇴하자 고립되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을 치고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서울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임진강을 끼고 조선·명의 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일본측 고니시의 강화회담 제의로 이덕형()과 일본의 야나가와 초신[調]·겐소[]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어 강화는 교섭단계에 들어갔다. 그 즈음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퇴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는데 김천일·황진(최경회() 등이 역전했으나 함락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싸움은 행주싸움에 못지않은 격전이었고 특히 제1차 진주성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에 든다. 조선측의 강화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은 진척되어 심유경()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우리측에서도 황진을 통신사로 보내게 되었다.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명은 왜군의 재공격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5년간 계속된 명·일간의 강화회의는 1596년 9월 일본 오사카성[] 회담에서 결렬되었다.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명에서는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을 허락한다는 봉공안()으로써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도요토미는 ① 명의 황녀로써 일본의 후비()로 삼게 할 것, ②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③ 감합인(:貿)을 복구할 것, ④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심유경은 이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을 보냈는데, 화의는 결렬되고 이듬해 왜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공산()·화왕산성()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를 경리, 마귀()를 제독()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
1596년 12월에 고니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군이 다대포()에 상륙하여 양산()을 함락하고 서생포(西)에 진을 쳤다. 정유재란 때의 왜군 총병력은 14만 1500으로, 수군도 강화되었다. 왜군은 임진년 당시와는 달리 경상·충청·전라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순천()·김해()·창원() 방면에서, 가토는 밀양()·초계()·거창()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왜군은 황석산성()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에서 상주목사 정기룡()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 싸움에서도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해전에서는 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군의 본거지를 공격하지 않고 소극적이라는 죄명으로 하옥되고 원균()이 그 후임이 되었으나 7월의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의 수군이 전멸하였다. 이에 다시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병선으로 전선을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명량()대첩에서 적함 133척을 맞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고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였다.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이를 계기로 왜군은 총퇴각하였다. 왜군의 가토가 울산의 도산성()에서 퇴각하고 순천의 고니시도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자 왜의 수군 300여 척이 이를 후원하려 노량()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 진린()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최후의 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전후 7년간에 걸쳤던 왜란은 조선·명·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위정자들의 급선무는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정치·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비변사()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또한 난중에는 각종 무기가 제작되어 이장손()은 비격진천뢰()를, 변이중()은 화차()를 각기 발명하였고 왜의 조총과 명군이 사용한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도 모조하여 사용하였다. 전화로 인한 농촌의 황폐, 은결()의 증가, 국가질서의 문란 등으로 대동법()의 실시, 면세전() 확대의 방지, 균역법()의 시행, 기민()을 위한 환곡()·모곡()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한편 혼란한 사회와 민심의 흉흉함을 틈타 이몽학()의 난 등 사방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함께 시행된 속오군()제도, 공명첩()의 발행 등은 조선의 신분제도 붕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문화적 손실로는 왜병의 방화로 불국사·경복궁 등의 건물과 사고()에 보관 중이던 역대 왕조의 실록·서적 등이 소실되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였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으로 질병퇴치를 위한 의학서인 《동의보감()》이 편찬되었고 사상적인 측면으로는 의병·승병을 통한 애국심의 발로와 자아반성과 함께 명의 내원()에 대한 사대사상이 고조되는 반면에 왜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사상이 더욱 강해졌다.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의 막부()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포로로 잡아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획기적으로 요업()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약탈하여 간 많은 서적은 성리학() 등 그들의 학문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냥 지식백과 보세요 라는게 답 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머리에 잘들어와요^^

2012.07.09.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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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사항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 말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使)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한편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편당()정치, 기강의 해이, 전세제()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조정에서는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비()를 중지하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따라서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일본국왕사(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의 서사()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주교수() 조헌()은 만언소()를 올려 시폐()와 국방을 논하는 등 일본 정벌의 강경론을 주장하자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를 이유로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1590년 3월 황윤길()을 정사(使), 김성일()을 부사(使), 허성()을 종사관()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동인세력은 서인들이 전쟁을 빌미로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 제3차 일본 사신 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놀라 그 해 5월에 일본의 서계 내용과 함께 왜정()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晬) ·이광() ·윤선각() 등으로하여금 경상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신립() ·이일()에게는 변비()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더욱 성숙하여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西]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使) 정발()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使) 송상현() 이하 군민()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 ·도도 다카토라[] 등의 9,000여 수군()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는데 이 중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제1군은 중로()로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충주()-여주()-양근()-용진()나루-경성동로(), 제2군 좌로()는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조령-충주-죽산()-용인()-한강, 제3군 우로()는 김해()-성주()-무계()-지례()-등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使),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岉)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使), 김근(玏)을 좌도안집사(使)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과 변기()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使) 류성룡()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조령·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을 수성대장()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使)였던 김명원()을 도원수()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개성을 향하여 피란길에 올랐다. 서울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달아났다. 파천에 대한 민심이 거제지자 파천을 주동한 사람은 영의정 이산해로 내몰고, 류성룡은 파천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거짓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임해군()은 함경도로, 순화군()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였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두 왕자를 붙잡아 왜군에게 인도하였다.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이 달아나자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란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창덕궁 등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강원·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군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는 왜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대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출동하여, 옥포()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당항포()·한산도()·부산 등지에서 계속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진주성()싸움·행주산성()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임진왜란 해전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과 왜군의 전함 비교]
- 조선수군의 전함


판옥선

- 왜군의 전함


아타케부네


세키부네


고하야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조선군으로 인해,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부산진·동래의 수성전()과 김해성()의 저항, 경상우방어사(使) 조경()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의 추풍령전투, 밀양 작원()에서의 밀양부사 박진()의 선전, 유도대장() 이양원()의 해유령()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한편 혼란과 민심의 이산 속에서도 근왕()을 부르짖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김면(정인홍()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김천일(), 호서에서는 조헌()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거병하였다. 또한 조선 사대부들에게 천대만 받았던 승려들이 봉기하여 가세하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령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길주()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도 대소의 허다한 의병이 봉기했으며 휴정()·유정()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여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왜군의 군사행동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왕이 파천하는 도중 사신을 명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명에서는 조선 땅에서 왜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파병을 결정하여, 선봉장으로 낙상지()와 사대수() 등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송응창(이여송()이 4만 5000의 동정군()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치()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패퇴하자 고립되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을 치고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서울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임진강을 끼고 조선·명의 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일본측 고니시의 강화회담 제의로 이덕형()과 일본의 야나가와 초신[調]·겐소[]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어 강화는 교섭단계에 들어갔다. 그 즈음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퇴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는데 김천일·황진(최경회() 등이 역전했으나 함락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싸움은 행주싸움에 못지않은 격전이었고 특히 제1차 진주성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에 든다. 조선측의 강화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은 진척되어 심유경()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우리측에서도 황진을 통신사로 보내게 되었다.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명은 왜군의 재공격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5년간 계속된 명·일간의 강화회의는 1596년 9월 일본 오사카성[] 회담에서 결렬되었다.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명에서는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을 허락한다는 봉공안()으로써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도요토미는 ① 명의 황녀로써 일본의 후비()로 삼게 할 것, ②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③ 감합인(:貿)을 복구할 것, ④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심유경은 이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을 보냈는데, 화의는 결렬되고 이듬해 왜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공산()·화왕산성()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를 경리, 마귀()를 제독()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
1596년 12월에 고니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군이 다대포()에 상륙하여 양산()을 함락하고 서생포(西)에 진을 쳤다. 정유재란 때의 왜군 총병력은 14만 1500으로, 수군도 강화되었다. 왜군은 임진년 당시와는 달리 경상·충청·전라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순천()·김해()·창원() 방면에서, 가토는 밀양()·초계()·거창()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왜군은 황석산성()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에서 상주목사 정기룡()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 싸움에서도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해전에서는 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군의 본거지를 공격하지 않고 소극적이라는 죄명으로 하옥되고 원균()이 그 후임이 되었으나 7월의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의 수군이 전멸하였다. 이에 다시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병선으로 전선을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명량()대첩에서 적함 133척을 맞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고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였다.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이를 계기로 왜군은 총퇴각하였다. 왜군의 가토가 울산의 도산성()에서 퇴각하고 순천의 고니시도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자 왜의 수군 300여 척이 이를 후원하려 노량()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 진린()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최후의 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전후 7년간에 걸쳤던 왜란은 조선·명·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위정자들의 급선무는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정치·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비변사()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또한 난중에는 각종 무기가 제작되어 이장손()은 비격진천뢰()를, 변이중()은 화차()를 각기 발명하였고 왜의 조총과 명군이 사용한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도 모조하여 사용하였다. 전화로 인한 농촌의 황폐, 은결()의 증가, 국가질서의 문란 등으로 대동법()의 실시, 면세전() 확대의 방지, 균역법()의 시행, 기민()을 위한 환곡()·모곡()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한편 혼란한 사회와 민심의 흉흉함을 틈타 이몽학()의 난 등 사방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함께 시행된 속오군()제도, 공명첩()의 발행 등은 조선의 신분제도 붕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문화적 손실로는 왜병의 방화로 불국사·경복궁 등의 건물과 사고()에 보관 중이던 역대 왕조의 실록·서적 등이 소실되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였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으로 질병퇴치를 위한 의학서인 《동의보감()》이 편찬되었고 사상적인 측면으로는 의병·승병을 통한 애국심의 발로와 자아반성과 함께 명의 내원()에 대한 사대사상이 고조되는 반면에 왜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사상이 더욱 강해졌다.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의 막부()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포로로 잡아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획기적으로 요업()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약탈하여 간 많은 서적은 성리학() 등 그들의 학문에 크게 기여하였다.
[출처] 임진왜란 [壬辰倭亂 ] | 네이버 백과사전
  1. 이순신 장군을 만나볼까?

400여년 전 어느 날, 한양의 백성들이 남산에 있는 봉수대에서 다섯 줄기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대. 조선 시대에 봉수대는 연기와 불로 급한 일을 전달하던 통신 수단이었어. 특히 한양에 있는 남산 봉수대는 우리나라 전 지역의 소식을 모으는 곳이었지. 게다가 다섯 줄기의 연기는 위급한 일이 일어났다는 의미인 거야. 도대체 어떤 큰일이 벌어진 걸까?

임진왜란의 발발 - 1592년 4월, 일본이 침입했어

교과단원 5학년 1학기 3. 유교 전통이 자리 잡은 조선|중학교 역사(상) Ⅵ. 조선의 성립과 발전

10만 군사를 기르자 - 이이의 십만양병설
1583년 어느 날, 이이는 왕을 찾아가 “나라가 태평하니 군대와 식량이 준비되지 않아 적이 침범해 와도 막아낼 수 없습니다.”라며 10만의 군사를 길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얼마 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소식에 조정에서는 일본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사신으로 보냈지. 황윤길은 침략 가능성이 높으니 전쟁에 대비하자고 했지만 김성일은 반대했어. 그리고 10년 뒤, 일본은 20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침략했어.

빠르게 밀려오는 왜군
1592년 4월, 왜군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달라는 구실로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어. 왜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한양을 향해 쳐들어왔어.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조선 군대는 여기저기서 패하고 말았지. 선조는 신립 장군에게 희망을 걸었어. 신립은 탄금대1)에서 배수진2)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막아내는 것은 어려웠지. 결국 신립은 강물에 몸을 던졌어. 왜군은 20여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고, 선조는 평양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가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로

김성일과의 인터뷰

Q. 왜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나요?

일본의 기운이 심상치 않기는 했으나 전쟁의 위험이 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소.
또 황윤길의 의견에 찬성하면 전쟁 준비에 허리가 휘는 것은 백성들이라 반대한 것이오.

읽을 거리조선 시대에는 긴급한 일을 어떻게 알렸나요?

조선 시대에는 긴급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국경 지역에서 한양까지 이어지는 전국의 주요 산봉우리에 횃불이나 연기를 피울 수 있는 봉수를 설치했어. 여러 갈래로 나뉜 봉수는 한양의 남산에 모여들었는데, 평상시에는 횃불을 한 개, 외적이 나타나면 두 개, 외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개, 국경을 넘으면 네 개, 접전이 벌어지면 다섯 개를 올렸어. 날씨 때문에 횃불이나 연기를 피울 수 없을 경우에는 대포, 뿔피리 소리로 알리거나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알렸지. 봉수는 빠르지만 자세한 소식을 전할 수 없었고, 비밀리에 알리는 것이 불가능해 ‘파발’이란 걸 만들었어. 파발은 약 30리(12km)마다 역참을 만들어 릴레이 방식으로 문서와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인데, 말을 타고 달려가는 ‘기발’과 걸음이 빠른 사람이 달려가는 ‘보발’이 있었어.

의병과 관군의 승리 - 조선의 반격이 시작되다

교과단원 5학년 1학기 3. 유교 전통이 자리 잡은 조선|중학교 역사(상) Ⅵ. 조선의 성립과 발전

우리 고장은 우리가 지키자 - 의병(義兵)
전쟁 초기에는 관군의 패배로 나라 전체가 큰 어려움에 처했어.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손에 죽었고, 온 나라가 일본군에 짓밟혔지.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나라를 지켜낸 분이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우리 수군이야. 한편, 바다에서 승리가 계속되는 동안 육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났어. 의병이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난 의로운 병사들을 말해. 의병은 마을의 지리에 밝다는 이점을 이용해 매복·기습·유격(게릴라)전을 벌이며 용감히 왜군을 막아냈지. 주로 전직 관료와 유생, 승려가 의병장이었고, 농민이 중심이 되었어.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은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경상도의 곽재우와 정인홍,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고경명과 김천일, 함경도의 정문부 등이 있어. 또 묘향산의 서산대사와 금강산의 사명대사도 승병장으로 이름을 떨쳤지. 특히 곽재우는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채 백마를 타고 싸워 ‘홍의장군’이라 불리었는데, 왜적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해.

주요 의병의 활동 지역


곽재우는 개인의 전 재산을 의병에 쏟아부으며, 왜적에 대항해 열심히 싸웠어.

행주치마를 두르고 승리하다 - 행주 대첩
이처럼 수군과 의병의 활약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명나라의 구원병이 도착했어.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1593년 1월 평양성을 공격하여 되찾았고, 후퇴한 왜군은 행주산성으로 향했지. 이때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백성들과 관군이 죽을 각오로 싸워 왜군을 물리쳤어.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 대첩이야. 특히 행주 대첩 당시 왜군과의 전투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덧치마를 만들어 입고, 그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어. 이때 입은 앞치마를 부녀자들의 공을 기린다는 의미로 ‘행주치마’라고 부른 거야.

읽을 거리코무덤, 귀무덤이 뭐예요?

일본의 교토에 가면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적이 있어. 조선 사람들의 코를 베어가 묻어 놓은 귀무덤(耳塚)이 바로 그것이야. 그런데 왜 이런 무덤이 생겼을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람의 귀는 둘이고 코는 하나다. 죽인 조선 사람의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보내라.”라는 상상도 못할 악랄한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야. 그러자 왜군들은 군인과 민간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코와 귀를 베었어. 전쟁의 끔찍함을 상상할 수 있겠니? 그런데 우리 선조들의 한이 서려 있는 귀무덤과 코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진주 대첩과 진주성 함락 - 피로 싸워 막아내다

교과단원 5학년 1학기 3. 유교 전통이 자리 잡은 조선|중학교 역사(상) Ⅵ. 조선의 성립과 발전

적장을 안고 뛰어 내리는 논개

1592년 4월, 전쟁이 시작된 후 일본군의 세력은 파죽지세3)였어. 그래서 전쟁 초기 1~2개월 동안 관군은 계속 지기만 했지. 하지만 가을로 접어들면서 조선군도 승전보4)를 보내기 시작했어. 대표적인 전투가 10월에 벌어진 진주성 싸움이야. 당시 진주 목사 김시민은 4,000명도 안 되는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어. 3만에 가까운 일본군에 비하면 크게 열세였지. 10월 6일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어. 일본군은 사다리와 나뭇단을 성벽에 기대어 놓고 그것을 밟고 기어올라 성벽을 넘으려 했지. 또 3층짜리 누각을 만들어 그 위에서 조총으로 사격을 가했어. 하지만 성안의 백성들은 김시민의 지휘 아래 활을 쏘아 일본군을 막아내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에게는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물을 끼얹어 물리쳤어. 일본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해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어. 하지만 아쉽게도 김시민은 왜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지.

그런데 1593년, 진주성에서의 패배를 앙갚음하려는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어.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은 함락당하고 말았지. 이 싸움 당시, 논개라는 여성은 적장을 끌어안고 장렬하게 순국5)했어.

왜란의 영향 - 전쟁이 가져온 것들

교과단원 5학년 1학기 3. 유교 전통이 자리 잡은 조선|중학교 역사(상) Ⅵ. 조선의 성립과 발전

불타고 있는 경복궁

전쟁은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도착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됐어. 명군과 일본군이 두 차례의 전투를 치른 뒤 1593년 4월, 휴전 회담을 시작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어서, 백성들은 왜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명나라 군대를 먹여 살리느라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어. 1597년 일본이 휴전 회담을 깨고 다시 쳐들어 왔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해. 하지만 조선의 육군과 수군은 왜군을 모두 물리치고 전쟁을 끝냈어.

7년에 걸친 두 차례의 왜란으로 온 나라는 폐허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잡혀갔어. 또 정부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백성에게 곡물을 받고 벼슬을 팔아 신분을 높여 주어 신분 제도에도 큰 변화가 생겼어.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 경복궁, 불국사 등이 불에 타는 등 문화재의 손실도 컸어. 그리고 도자기 기술자와 성리학자들이 일본에 납치되어 갔는데, 이들은 후에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돼.

더 알아보기임진왜란을 부르는 다른 말이 있나요?

일본은 원래 도자기 만드는 기술이 보잘 것 없어서 우리나라처럼 청자나 백자를 만드는 건 꿈도 꾸지 못했어.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은 조선의 훌륭한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지. 납치된 도공들은 쉴 틈 없이 도자기를 만들고, 일본인에게 기술을 가르쳤어. 조선 도공들 덕분에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게 된 일본은 17세기 중엽부터 유럽에 백자를 수출했어. 이로 인해 유럽은 일본을 ‘도자기의 나라’로 부르기 시작했어. 그러나 뛰어난 기술자를 모조리 빼앗긴 조선에서는 오히려 도자기 문화가 후퇴하고 말았지. 임진왜란이 조선과 일본의 도자기 기술을 서로 뒤바꿔 놓은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기도 해.

이순신 장군을 만나볼까?

이순신 장군의 생애
이순신 장군은 1545년 서울에서 태어났어.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했던 그는 28세 때 무과(武科)에 응시했지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거꾸로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나 낙방을 했어. 하지만 4년 뒤 무과에 합격한 후 여러 변경 지역의 장수와 정읍 현감을 거쳐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었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전라 좌수사로 있던 이순신은 1592년 5월 옥포 해전을 첫 승리로 이끌었어. 이어 사천·당항포·한산도·부산포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지.

거북선이 뭐예요?
거북선은 조선의 판옥선을 개량해 만들었어. 판옥선이란 조선 수군의 전투함이야. 노를 젓는 1층과 함포를 발사하는 2층으로 구성된 크고 높은 배로, 왜군이 쉽게 배 위에 뛰어오르지 못했지. 거북선은 돌격용 전투함으로, 구조는 판옥선과 비슷하지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철심이 박힌 거북 등딱지 같은 것이 있고, 그 아래 노를 젓는 사람과 포를 쏘는 포수가 있었어. 또한 뱃머리에 용머리와 도깨비 머리를 달고 있어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지. 또한 2개의 돛이 기동력을 높일 수 있어, 적의 배 사이로 깊숙이 침투하여 접근전을 펼칠 수 있는 조선 수군의 최고 무기였어.

한산도 대첩
이순신 장군의 가장 통쾌한 승리가 뭘까? 바로 세계 3대 해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한산도 대첩이야. 1592년 7월 몇 차례의 해전에서 패한 일본 수군이 모든 함대를 모아 총공격에 나서자, 이순신 장군은 이들을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로 유인했어. 그런 다음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적의 함대를 둘러싸 포위하는 ‘학익진 전술’을 폈지. 포위당한 왜군은 많은 군사와 배를 잃고 도망치기에 바빴어.

명량 대첩
1597년 8월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어 돌아왔을 때, 남아 있는 배는 겨우 13척이었어.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실망하지 않고, 부녀자들에게 강강술래를 하며 빙글빙글 돌게 하여 군사가 많은 것 같이 위장하고, 물살이 거센 울돌목(명량)으로 왜선을 유인하여 133척을 대파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어. 그것이 바로 명량 대첩이야.

노량 대첩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어. 1598년 11월, 이순신 장군은 퇴각하는 왜군을 격파하기 위해 일본군 전함 300척과 노량에서 최후의 해전을 벌였어. 안타깝게도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을 맞아 사망해.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죽는 순간까지도 “싸움이 위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대. 우리 민족의 진정한 영웅은 이렇게 죽음을 맞았어.

각주
  • 1) 탄금대 우륵이 제자에게 가야금과 춤을 가르쳤다는 장소로,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이 전투를 함
  • 2) 배수진(背 등 배, 水 물 수, 陣 진칠 진) 물을 등지고 진을 친다는 뜻으로, 물러설 곳이 없으니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는 전술
  • 3) 파죽지세(破 깨뜨릴 파, 竹 대 죽, 之 갈 지, 勢 형세 세 ) 대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으로, 적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가는 기세
  • 4) 승전보(勝 이길 승, 戰 싸울 전, 譜 계보 보) 싸움에 이긴 결과를 적은 기록
  • 5) 순국(殉 따라죽을 순, 國 나라 국)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

    정의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 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개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케이초(慶長)의 역(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했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문약(文弱)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러할 즈음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즉,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일본에는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때 도요토미(豊臣秀吉)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마도주(對馬島主) 소(宗義調)에게 명하여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修好)하도록 시켰다.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데에 있었다.

    이에 대마도주는 가신(家臣)인 다치바나(橘康廣) 등의 일행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부산포(釜山浦)에 보내어 통호(通好)를 청하였다.

    이 소식이 경상우수사의 치보(馳報)로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찬탈시역(簒奪弑逆)한 나라에서 보낸 사신을 받아들여 접대할 수 없으니 대의(大義)로써 타일러 돌려보내라.”는 뜻을 비치고, 2품 이상의 정신(廷臣)들에게 가부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정신들의 결론은 관례대로 접대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내키지 않았으나 정의(廷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치바나 일행이 서울에 올라와서 바친 수교문에 오만무례한 구절이 있자 보서(報書)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도 보류하고 있었다.

    일본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조헌(趙憲)은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려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지 말 것을 극언하기도 하였다.

    그대로 해를 넘긴 조정에서는 이듬해인 1588년 문무반 2품직과 육조의 참의 이상을 중추부(中樞府)에 모아놓고 가부를 재론하였다. 그 결과 “바닷길이 어두어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다치바나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와중에 소가 사망하고 양자 소(宗義智)가 그를 승계하여 새로 대마도주가 되었다. 그 역시 도요토미로부터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入朝)에 대한 독촉이 심해지자, 1589년 하카와시(博多市)의 세이주사(聖住寺) 주지인 겐소(玄蘇)와 가신 야나가와(柳川調信) 및 고니시(小西行長)의 사신인 시마이(島井宗室) 등과 일행이 되어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칭하고 다시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구례(舊例)에 따라 이조정랑 이덕형(李德馨)을 선위사로 삼아서 부산포에 보내어 접대하게 하였다. 소 등은 부산진 객관에 머무르면서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며 함께 일본으로 가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해서는 조선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통신사 파견 문제를 결정짓지 못한 채 소 일행은 일단 돌아갔다.

    대마도로 돌아간 그들은 정사에 겐소, 부사에 소를 구성하여 다시 부산포에 왔다. 겐소를 정사로 삼은 것은 국왕사(國王使)로 위장하려는 것이었다.

    이들을 다시 맞이한 조정에서는 이미 일본 사신으로부터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병화(兵禍)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았던 터라 통신사 파견의 여부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정신들의 찬반이 엇갈려 결정을 짓지 못하던 중, 왕의 전교(傳敎)에 따라 조선의 반민(叛民)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자들이 가끔 왜구(倭寇)의 앞잡이가 되어 변방을 소요시키니 그들을 잡아보내면 통신에 응하겠다는 것을 내세워 조선의 명분을 찾고 그들의 성의를 시험하고자 하였다.

    이에 소는 선뜻 응하여, 야나가와를 자국으로 보내 사화동(沙火同) 등 10여 인을 잡아와서 조선의 처치에 맡긴다 하여 이들을 모두 베어 죽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통신사 파견을 결정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보빙(報聘)을 겸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그런데 곧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이에 집중되어 사행을 선정하지 못하다가 11월 중순이 넘어서야 통신사 일행을 선정하였다. 즉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으로 결정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0년 3월에 겐소 일행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대마도에서 한달간 머무르다가 7월 22일에 경도(京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도요토미가 동북 지방을 경략중이어서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에 가서야 접견하여 국서(國書)를 전하게 되었다.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려 하는데도 도요토미는 답서를 주지 않아 국서를 전한 지 4일 만에 경도를 떠나 계포구(堺浦口)에 와서 답서 오기를 기다리다가 보름 만에 받았다.

    그런데 내용이 오만불손하여 김성일은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여러 곳의 문자를 고쳐서 가져오게 되었다. 일행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 3월이었으며, 이때 일본 사신 겐소·야나가와 등도 따라왔다.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지을 때는 그 가부를 가지고 논박을 벌였으며, 사행이 돌아온 뒤에는 그 보고 내용을 놓고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반하여,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 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黃進)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부사의 무망(誣罔)을 책했다고 한다.

    이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 사이에는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맞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동서의 정쟁이 격화된지라 사실 여하를 묻지 않고 자당(自黨)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을 쫓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

    또 선위사 오억령(吳億齡)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겐소 등에게 “일본은 다음해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 일본의 발병(發兵)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가 도리어 파직을 당하였다.

    또 겐소 등이 그를 위문하는 황윤길과 김성일 등에게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入貢)을 거절한 것을 도요토미가 분개하여 동병(動兵)을 꾀하고 있으니,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하여 일본의 공로(貢路)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할 것”이라 했으나 이것도 거절하였다.

    겐소 등이 답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소는 다시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청화통호(請和通好)하는 것이 좋다.”라고 거듭 변장(邊將)에게 말했으나, 10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자 그대로 돌아갔다.

    그 뒤 왜관(倭館)에 머무르던 일본인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고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김수(金睟)를 경상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신립(申砬)을 경기·황해도에, 이일(李鎰)을 충청·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 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만이 전비(戰備)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을 정비하고,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전력하고 있었다.

    전쟁의 발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나고야(名古屋)에서 제군(諸軍)을 지휘할 계획을 세웠으며, 대군을 9번대(番隊)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각 대를 지휘한 주장(主將)과 병력은 다음과 같다.

    제1번대는 주장 고니시로 병력 1만 8700명이며, 제2번대는 주장 가토(加藤淸正)로 병력 2만 2800명, 제3번대는 주장 구로다(黑田長政)로 병력 1만 1000명, 제4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吉成)·시마즈(島津義弘)로 병력 1만 4000명, 제5번대는 주장 후쿠시마(福島正則)로 병력 2만 5000명, 제6번대는 주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로 병력 1만 5000명, 제7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元之)로 병력 3만명, 제8번대는 주장 우키다(宇喜多秀家)로 병력 1만명, 제9번대는 주장 하시바(羽柴秀勝)로 병력 1만 15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상의 병력 15만 8700명은 육군의 정규 병력이었다. 그밖에 구키(九鬼嘉隆)·도토(藤堂高虎) 등이 인솔한 수군(水軍) 9,000명이 승선하여 해전에 대비했고, 구니베(宮部長熙) 등이 이끄는 1만 2000명이 전쟁을 전후하여 바다를 건너 후방 경비에 임하였다.

    이밖에도 하야가와(早川長政) 등이 부산에 침입하여 부대의 선척을 관리하는 등 정규 전투 부대 외에도 많은 병력이 출동하여, 전체 병력은 20여 만명이나 되었다.

    일본이 침입할 당시에 총병력은 30여 만명으로서, 출정 병력을 제외한 군대는 나고야에 약 10만명을 머무르게 하고 3만명으로 경도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는 1592년 4월 14일에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일본군을 맞이한 부산진의 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적은 이어 동래부를 침공했고, 부사 송상현(宋象賢) 또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고니시의 부대는 그 뒤 거의 조선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중로(中路)를 택하여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순변사 이일이 거느린 조선의 관군을 파하고 조령으로 향하였다.

    가토가 인솔한 제2번대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하여 제1번대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부산 상륙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 길로 경상 좌도를 택하여 장기·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을 거쳐 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빠져 중로군과 합하여 충주로 들어갔다.

    같은날 구로다가 인솔한 제3번대는 동래에서 김해로 침입하여 경상 우도를 따라 올라와 성주의 무계(茂溪)에서 지례·김산(金山)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와 청주 방면으로 침입하였다.

    모리·시마즈가 이끄는 제4번대는 김해에서 제3번대와 함께 창녕을 점령한 다음 성주·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다.

    후쿠시마 등이 인솔한 제5번대는 제4번대의 뒤를 따라 부산에 상륙하여 북으로 침입하였고, 고바야가와 등이 이끄는 제6번대와 모리 등이 이끄는 제7번대는 후방을 지키며 북상하였다.

    우키다의 제8번대는 5월초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서울을 향하여 급히 북상하였다. 그리고 제9번대는 4월 24일 이키도에 유진(留陣)하고 있으면서 침략을 대기하고 있었다.

    적이 대거 침입했다는 변보(邊報)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난이 일어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으로부터 부산진성이 함락된 것 같다는 장계(狀啓)에 이어 그 장계 내용이 확실하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급히 대책을 논의한 끝에 임시변통으로 다음의 인물들을 선발하여 적의 북침에 대비하게 하였다.

    즉,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충주 방면의 중로를,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하여 죽령·충주 방면의 좌로를,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청주·죽산 방면의 서로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또,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을 방수하게 했으며, 전 강계부사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하여 경주부윤에 임명하여 각자 관군을 뽑아서 임지로 떠나도록 하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백성들은 군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형편이라 인솔하여 전장으로 떠날 군사가 없었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장수가 군사 모이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이일은 명령을 받은 지 3일 만에 홀로 떠나야 했으며, 별장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뒤에 따라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한,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뒤를 이어 떠나게 하고,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로 삼아 제장을 검독(檢督)하게 하였다.

    한편, 이일 등이 내려가기에 앞서 경상감사 김수는 왜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열읍(列邑)에 공문을 발하여 각자 소속 군사를 인솔하고 안전한 지역에 모여 주둔하게 하고 경장(京將)이 이르기를 대기하였다.

    문경 이하의 수령들 또한 각기 소속 군사를 영솔하고 대구 천변에 나가 순변사를 기다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당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적세가 점차 가까워오자 군사들이 놀라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비도 많이 내려 우장이 젖은 데다가 군량 보급마저 끊기자 밤중에 모두 흩어져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되었다.

    수령들은 할수없이 홀로 말을 달려 순변사가 있다는 문경으로 바삐 돌아갔으나 고을은 이미 텅 비어 사람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이에 창곡(倉穀)을 털어서 이끌고 온 잔여 군사를 먹이고 함창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澥)는 산속에 숨어버리고 판관 권길(權吉)만이 읍(邑)을 지키고 있었다.

    중로의 방어 책임을 짊어지고 내려간 이일은 상주에 이르러 판관에게 군사가 없음을 꾸짖으며 참수하려 하자, 그가 용서를 빌며 자신이 나가 군병을 불러모으겠다고 자청하였다. 밤새 촌락을 탐색하여 수백명을 불러모았으나, 그들은 군사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상주에 하루를 머무르면서 창고를 열고 관곡을 내서 흩어진 백성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산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모여들어 수백명에 이르자 이일은 급히 대오를 편성하였다.

    그는 상주에서 모은 사람과 서울에서 내려온 장사 중 800∼900명을 인솔하고 상주 북천변(北川邊)에서 습진(習陣)을 시키면서 산을 의지, 둔진하여 전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제1번대 고니시군의 갑작스런 급습으로 대패하자 관군은 전의를 잃었다. 이일은 단신으로 탈주하여 문경 땅에 이르러서야 상주에서의 패상(敗狀)을 치계(馳啓)하고 물러나서 조령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신립이 충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신립은 고니시의 부대가 26일에 조령을 넘어 다음날 충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도에서 모은 8,000여의 군사를 이끌고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일전을 각오하던 중이었다.

    잠시 후 왜군이 단월역(丹月驛)을 따라 길을 나누어 공격해왔다. 한 부대는 산을 따라 동으로 침입해오고, 다른 부대는 강을 끼고 내려오면서 조총을 쏘아대니 형세가 풍우가 몰아치는 듯하였다.

    총성이 진동하여 신립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말을 달려 두어 차례 적진에 돌진했으나 실패하고 전군이 함몰하자 달천강(達川江 : 속칭 달래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러나 이일만은 동쪽 계곡을 따라 탈주하는 데 성공하였다.

    고니시의 군사는 가토의 군과 충주에서 잠시 합류했으나 다시 진로를 달리하였다. 고니시의 군은 경기도 여주로 나와 강을 건너 양근을 경유, 동로로 빠지고, 가토의 군은 죽산·용인으로 빠져 한강 남안에 이르렀다. 또한, 구로다·모리의 군은 25일에 성주에 이르렀으며, 지례·김산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으로 나가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기도를 빠져나와 서울로 향하였다.

    일본군이 북상한다는 급보가 계속 전해왔으나 충주 패보를 접하기 이전까지는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중신들의 결의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선조의 피난을 주장하는 일부 조관들도 대의에 억눌려 강력한 주장을 표면화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4월 28일 선조는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源)이 각각 안주목사와 황해감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민심이 의지하고 따른다 하여, 이원익을 평안도의 도순찰사로 삼고, 최흥원을 황해도의 도순찰사로 임명하여 먼저 가서 백성들을 무유(撫諭)하도록 하였다.

    선조가 이렇게 서행(西行)의 채비를 갖추자 대간(臺諫)·종실(宗室)들은 사직(社稷)을 버리지 말 것을 애원했고, 유생들 또한 소를 올려 반대했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또한 이 날 대신들은 국세가 날로 다급하니 저군(儲君)을 세워 인심을 계속(繫屬)하기를 청하였다. 선조도 이 청을 받아들여 둘째 아들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했고 백관들은 권정례(權停例)로써 진하(陳賀)하였다. 백관에 명하여 융복(戎服 : 전복)을 입도록 한 것도 이날이었다.

    4월 29일 충주 패보가 전해지자, 선조의 서행에 대한 시비를 따질 겨를도 없이 그날 밤으로 이를 결정하였다. 대신들도 “사세(事勢)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평양으로 이어(移御)하시어 명나라의 원병을 청하여 회복을 도모하소서.”라고 아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령 권협(權悏) 등이 청대(請對)하여 도성을 끝까지 지킬 것을 주장하자 유성룡은 “협의 말은 진실로 충성이나, 다만 사세가 부득불 그렇지 못하다.” 하였다. 이어 왕자를 제도(諸道)에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불러모아 회복을 도모하게 하고 세자는 어가(御駕)를 따라갈 것을 청하니 왕도 그것에 응하였다.

    이에 맏아들 임해군(臨海君)에게 명하여 함경도로 가게 했으며 김귀영(金貴榮)·윤탁연(尹卓然) 등을 따르게 하였다. 셋째 아들 순화군(順和君)을 강원도로 가게 하고 황정욱(黃廷彧)과 그의 아들 혁(赫)을 비롯, 이기(李墍)가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기는 강원도에 이르러 신병을 들어 따라가지 않았다. 순화군 또한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이 강원도에 들어오자 북으로 향하여 임해군과 동행했으며, 김귀영·황정욱에게 명하여 협동해서 호행하도록 하였다.

    국왕 일행이 서행에 오르기에 앞서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하여 도성을 수비하게 하고,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수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병비가 허술하여 대적하기가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밤이 깊어 이일의 장계가 도착했는데 “왜적이 금명간에 반드시 도성에 다다를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장계가 들어오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 왕은 사관(祠官)에게 명하여 종사(宗社: 종묘와 사직)의 주판(主版)을 받들고 먼저 가게 하고 왕은 융복으로 고쳐 입고 말을 타고 나섰다.

    세자 광해군이 왕의 뒤를 따랐고, 왕세자 신성군 후(信城君珝)와 정원군 부(定遠君琈)가 광해군의 뒤를 따라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을 나와 도성을 떠났다. 왕비는 교(轎)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을 나서자 시녀 수십명이 뒤를 따랐다.

    그런데 달이 없는 데다가 비까지 내려 더욱 어두워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왕이 서울을 떠나자 노비들은 그의 문적(文籍 : 노비문서)을 맡고 있던 장례원과 형조를 불질렀다. 이때에 경복·창덕·창경의 세 궁궐도 모두 불타 없어졌다.

    왕의 일행이 개성까지 도착하는데 3일이 걸렸는데, 출성(出城) 당시 100여 명이던 호종 인원이 그 사이에 상당히 줄어있었다. 그리하여 개성까지 따라온 인원만으로 관원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어 관직의 변동도 많았다.

    적군이 서울에 당도한 것은 고니시의 군이 5월 2일, 가토의 군이 3일이었다. 이때 한강을 수비하던 김명원은 적이 쏜 탄환이 지휘본부 제천정(濟川亭 : 현 普光洞 소재)에 떨어지자 한강 수비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임진강으로 퇴각하였다. 따라서 유도대장 이양원도 도성 수비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개성에 머무르고 있던 선조 일행은 도성이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행재소를 다시 평양으로 옮겼다. 이어 김명원의 임진강 방어마저 실패하여 개성이 함락되고 적군이 계속 북침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평양 수비마저 포기하고 의주로 옮겼다.

    5월 초에 왜군은 서울을 함락하여 본거로 하고 잠시 쉬었다가 전열을 정비하여 바로 북침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양주 해령(蟹嶺 : 속칭 게너미고개)에서 부원수 신각(申恪) 군의 기습을 받고 패했으나 북침을 중단할만한 큰 타격은 아니었다.

    그 뒤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이 지휘하는 관군이 적의 침입을 저지하려 했으나 도리어 적의 전술에 말려들어 실패하였다.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하삼도(下三道)의 대군마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상 도중 용인·수원 사이에서 소수의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대패하자 관군에 대한 기대는 절망적이었다.

    임진강을 건넌 적군은 3군으로 나누어 북상하였다. 고니시의 군은 평안도 방면으로 침입하여 6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본거로 삼았다.

    함경도로 침입한 가토의 군은 함경도감사 유영립(柳永立)을 체포하고 병사 이혼(李渾)은 반민에게 피살되었다. 또한 함경도로 들어간 임해군과 순화군도 반민에 의해 포박되어 적진에 인도되는 등 도 전체가 적중에 들어갔다. 황해도로 들어간 구로다의 군은 해주를 본거로 삼고 대부분의 고을을 침범하여 분탕질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6월 이후, 8도 전역에서 의병(義兵)과 의승군(義僧軍)이 봉기하여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 트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월에 진주목사 김시민(金始敏)은 군관민과 합세하여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의병의 활동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한마디로 관군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토가 일본군에 의하여 짓밟히고 많은 생령(生靈)이 죄없이 쓰러져가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향리를 수호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의병은 신분적으로 보면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어, 의병 활동을 벌이는 기간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文班出身)이 압도적으로 많고 무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덕망이 있어 지방에서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적합지로는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그곳 지방민들이 잘 따를 수 있는 곳을 택하였다. 나아가 이를 확대하여 넓은 지역에 걸쳐서 의병을 불러 모았고, 자연히 활동 무대도 넓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의병의 바탕을 이룬 것은 민족적 저항 의식이며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의병장이었다. 또한 오랜 유학교육을 통하여 유교의 도덕적 교훈인 근왕정신(勤王精神)이 깊이 뿌리를 박은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보인다.

    1593년 정월에 명나라의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26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수는 의병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임진년(1592년)에 비하여 많이 줄어든 숫자이다.

    그것은 난이 일어난 다음해에 관군이 차차 회복되어 의병을 절제하고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어, 의병이 해체되거나 관군에 흡수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의병장으로는 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김천일(金千鎰)·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정문부(鄭文孚)·이정암(李廷馣)·우성전(禹性傳)·권응수(權應銖)·변사정(邊士貞)·양산숙(梁山璹)·최경회(崔慶會)·김덕령(金德齡)·유팽로(柳彭老)·유종개(柳宗介)·이대기(李大期)·제말(諸沫)·홍계남(洪季男)·손인갑(孫仁甲)·조종도(趙宗道)·곽준(郭)·정세아(鄭世雅)·이봉(李逢)·임계영(任啓英)·고종후(高從厚)·박춘무(朴春茂)·김해(金垓)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다시 벼슬에 들어간 사람도 있으나,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도 있었다.

    의병장의 대표적인 활약상을 지역별로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곽재우는 현풍(玄風) 유생으로서 사재를 털어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통칭되었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과 싸워 의령·삼가·합천·창녕·영산 등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 우도가 그의 보호 밑에 있었다. 또한 전라도로 향하는 적을 정암진(鼎巖津 : 속칭 솥바위나루)에서 차단하여 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인홍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물리치고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함안 등지를 방어하였다. 김면은 조종도·곽준 등과 거창·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공격해오는 적의 선봉을 관군과 함께 지례에서 요격하여 격퇴시켰고, 무계에서도 승전하여 그 공으로 합천군수가 되었다.

    경상좌도에서 기병(起兵)한 권응수는 정세아 등과 함께 휘하의 의병을 이끌고 영천을 탈환하였다. 또 학연·예천·문경 등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여 적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김해는 9월 예안에서 일어나 경상도 북부지방을 제압하는 등 적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하였다.

    호남에서는 고경명과 김천일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먼저 고경명은 유팽로 등과 의병을 일으켜 담양에서 회맹(會盟)하고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각 도는 물론 제주도에까지 격문을 보내고 근왕병을 이끌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할 무렵에 적이 금산에 들어오자, 임진년 7월 9일 금산에 주둔한 적군과 정면대결하였다.

    그러나 대패하여 아들 인후(因厚)와 유팽로·안영(安瑛)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 뒤 맏아들 종후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 해 12월에 의병을 일으켜 다음해 6월 2차 진주성싸움에 참가했다가 전사하였다.

    김천일은 나주에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수백명을 이끌고 선조가 피난한 평안도로 향하다가 강화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적 점령하에 있는 도성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백성들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얻었으며, 한강변의 여러 적진지를 급습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충청도에서는 조헌이 10여명의 유생과 함께 공주와 청주 사이를 왕래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와 거의 같은 때에 옥천에서 봉기하였다. 이들 의병은 차령(車嶺)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이를 격퇴시켰다.

    또 온양·정산·홍주·회덕 등 도내 여러 읍에서 의병 1,600명을 얻은 다음, 의승장 영규(靈圭)가 이끄는 의승군 500명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다시 금산에 주둔한 적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동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관군이 오지 않아 의병들 상당수가 흩어지고 칠백의사(七百義士)만이 남아 생사를 함께 할 것을 결심하였다.

    의승장 영규도 조헌과 함께 진격하여 금산성에 육박하였다. 적군은 후속 부대가 없음을 알고 조헌이 채 진영을 정돈하기도 전에 전병력으로 공격해왔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끝내는 조헌 부자와 영규 그리고 의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조헌은 고경명에 이어 싸움에서 패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수차에 걸친 의병과의 싸움으로 적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함에 따라 호서·호남 지방은 온전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경기도에서는 홍계남과 우성전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홍계남은 아버지 언수(彦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서 양성·안성을 활동 무대로 용맹을 떨쳤다.

    적정을 보아 동서로 달리며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군이 감히 이 지역에 접근하지 못했으며, 경기도에 인접한 충청도의 여러 읍도 안전할 수 있었다. 우성전은 강화·인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강화를 수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황해도에서는 전 이조참의 이정암이 의병을 일으켜 연안성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벌였다. 당시 황해도에는 구로다의 군이 열읍을 정벌하고 온갖 약탈을 자행했으며 반민들도 많았다. 그런데 오직 연안성만은 침해를 당하지 않고 있었다. 구로다는 이정암이 의병을 영솔하고 이 성을 지킨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침입해왔다.

    성중에 있는 의병들은 성을 빠져나가 기회를 보아서 도모하자 했으나 이정암은 이를 듣지 않고 굳은 결의로써 수성을 결심하였다.

    이에 1592년 8월 27일부터 9월 2일 아침에 이르기까지 4주야를 싸워 끝내 구로다의 5,000병력을 물리쳤다. 이로 인하여 연해 열읍도 회복되었고, 양호(兩湖)의 해상 교통도 강화도와 연안을 통하여 의주의 행재소까지 이를 수 있었다.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현직 관원으로서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같은해 9월에 경성을 수복하고 길주·쌍포 등에서도 가토의 군을 격파하고 함경도를 수복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가토가 북쪽 깊숙이 들어와 주둔할 수 없도록 수시로 위협을 가하였다.

    의병 중에서도 의승군은 특수 집단으로 활약이 컸다. 묘향산(妙香山)의 노승 휴정(休靜: 西山大師)은 수천의 문도(門徒)로 승군을 일으키고 각 사찰에 격문을 보냈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영규 이외에도 호남의 처영(處英), 관동의 유정(惟政 : 松雲大師), 해서의 의엄(義嚴) 등 휴정의 문도들이 승군을 일으켜 호응하였다. 이밖에 전국 사찰에서 일어난 의승군의 수도 많았고 그들의 전과 또한 컸다.

    수군의 활약

    왜란 직전에 조선이 소유한 판옥선(板屋船 : 戰艦) 수는 모두 250여 척으로 추측된다. 이때 경상·전라 양도의 수군 진용은 경상좌수사에 박홍, 경상우수사에 원균(元均), 전라좌수사에 이순신, 전라우수사에 이억기(李億祺)였다.

    그러나 난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또한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세가 불리하자 전선과 전구(戰具)를 모두 침몰시켜 수군도 흩어지고 단지 4척의 전선만이 남게 되었다. 이런 실정이라 조선의 수군은 전라좌·우수사 휘하의 수군과 전선이 주축이 되었고 그 지휘는 이순신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제1차 출동에는 원균도 가세했으나 이순신 단독에 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592년 5월 4일에서 8일에 걸쳐 벌어진 이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해전에서 적선 37척을 분파(焚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우리 피해는 경상 1명에 불과했을 뿐이다.

    제2차 출동은 5월 29일에서 6월 10일에 있었다. 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 네차례의 해전에서 왜선 72척을 침몰시키고 적병 88명을 참획하였다. 이때도 아군의 피해는 전사 11명, 전상 26명으로 적에 비하여 경미하였다.

    이 2차 출동에서는 도중에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도 가세하여 원균의 3척을 합하여 연합 함대의 규모는 51척이나 되었다. 특히 사천 해전부터 거북선[龜船]이 사용되어 그 효능이 증명되었고, 적 수군의 주력이 괴멸되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것은 그 뒤 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3차 출동은 제2차 출동 후 약 1개월이 지난 7월 6일부터 13일사이에 있었다. 6일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90여 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남해 노량(露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견내량(見乃梁)에 정박중인 일본의 대선단을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각종 총통(銃筒)을 쏘아 먼저 2, 3척을 부수니 적이 도망하려 하였다.

    이 때 우리 함대가 일시에 달려들어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파괴하고 나포하는 등 대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을 지휘했던 와키사카는 쾌속선으로 겨우 탈주하고 적선 10여 척이 간신히 도망했을 뿐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이순신의 한산대첩(閑山大捷)이다.

    이순신 함대는 이날 견내량에 임시로 정박하고 9일 다시 적선을 찾아 떠났다. 10일에서 다음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안골포(安骨浦)에 정박중인 적선을 포격과 엄습으로 모두 파괴하고 육지로 도망한 잔적을 소탕하였다.

    그 뒤 12일에 한산도에 이르러 원균에게 한산도 해전에서 육상으로 도망친 적을 소탕하게 하고 13일 여수로 돌아왔다. 안골포 해전에서 대패한 적군은 구키가 지휘한 수군이었다.

    이 3차 출동에서는 적선 약 100여 척을 격파 또는 나포하고 적 250급(級)을 참획하여 개전 이래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아군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한산도·안골포 해전으로 조선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적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할 수 있었다.

    제4차 출동은 다음 8월 24일부터 9월 2일에 걸쳐서 있었다. 이순신의 연합 함대는 적선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향하여 절영도(絶影島 : 지금의 부산 영도)에 이르러 적선 수 척을 파괴하였다.

    이어 이순신은 왜선 470여 척이 나란히 정박하고 있는 부산포 내항으로 거북선을 앞세우고 전함대를 돌진시켜 적선을 분파하였다. 그러나 적장은 군사를 하선시키고 육지에서 총포를 난사, 종일 교전한 끝에 적선 100여 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 함대는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하고 2일 여수로 돌아왔다. 그러나 본거지를 기습당한 적은 그 뒤 해전을 기피하고 육병(陸兵)으로 변화하는 이변을 가져왔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의 전사를 비롯, 6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와 같이 수군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의 지휘 능력의 탁월함과 밝은 전략 전술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 전선이 일본 전선에 비하여 견고하며 화력이 우세한 데 있었다.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은 의병의 활동과 함께 불리했던 전국(戰局)을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활력소가 되었다.

    조ㆍ명군의 반격과 휴전 성립

    앞서 선조는 피난 도중에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파병 여부의 의논이 분분했으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에 요양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은 5,000의 병사를 이끌고 고니시의 본거지인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들 원병은 명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군사는 아니고 국경 수비병이었다.

    그들은 1592년 7월 15일 평양에 도착하여 풍우가 심한 밤을 이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우참장(右參將) 대조변(戴朝弁)과 유격(遊擊) 사유(史儒) 등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조승훈이 잔여병을 거두어 퇴각하니 1차 구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고니시는 임진강에서 대진하고 있을 때와 대동강에 이르러 두 차례의 강화(講和)를 청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1차 명나라 군사의 내원(來援)을 계기로 명나라와의 강화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명나라도 조승훈의 군이 패하자 화의에 응할 기세를 보이던 중 석성의 건의로 심유경(沈惟敬)이 화의 교섭을 맡게 되었다.

    심유경은 8월 29일 평양에 와서 고니시를 만나 쌍방의 강화 조건을 논의하여, 50일 이내로 본국에 돌아가 구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평양 이상은 침입하지 말 것과 조선군도 남쪽에 들어와 작전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심유경은 약속대로 11월 14일에 돌아와서 고니시를 만나고 임의로 화의를 성립시키려 하였다.

    1차 원병에 실패한 명나라는 화전양론의 의논끝에 파병으로 기울어져, 간쑤성(甘肅省) 영하(寧下)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복귀한 이여송(李如松)을 다시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 삼아 2차 원병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 해 12월에 이여송은 4만 3000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부총병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 부총병 이여백(李如栢 : 이여송의 아우)을 중협대장(中協大將),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군의 제2차 원병이 압록강을 건너기에 앞서 조선에서는 임진년 10월 재정비된 관군과 휴정이 이끄는 의승군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11월에는 의승군 단독으로 평양성을 진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심유경이 화의차 적진에 있으니 그가 귀환하는 것을 기다려 관군과 합세하여 진병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으로 때를 잃고 말았다.

    그 뒤 이여송의 원병이 압록강을 건너서 다음해인 1593년 1월에 평양 근방에 이르렀다. 이에 순변사 이일과 별장 김응서가 관군을 이끌고 합세했고, 휴정 휘하의 의승군 수 천여 명도 이에 합세하여 28일 평양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조명 연합군이 칠성(七星)·보통(普通)·함구(含毬)의 세 문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니 고니시 등은 감당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내성(內城)에 불을 지르고 그 길로 성을 빠져나와 대동강의 얼음을 밟고 패주하였다. 이때 휴정이 이끄는 의승군도 모란봉 격전에서 많은 적을 참획하여 평양 수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고니시는 주야로 속행하여 10일 배천에 당도하였다. 황해도 해주를 근거로 했던 구로다는 고니시를 먼저 후퇴하게 하고 자신도 군사를 거두어 개성으로 철수하였다.

    좌의정 유성룡은 황해도방어사 이시언(李時彦)과 김경로(金敬老)를 시켜 관군을 이끌고 고니시군의 퇴로를 끊어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도 그 길로 바로 남진하여 개성에 육박해왔다. 그러자 여기를 지키고 있던 고바야가와는 함께 머무르던 구로다와 같이 서울로 퇴각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대결하지도 않고 계속 퇴각하자 이여송은 적을 경시하고 바로 그 뒤를 따라 서울로 향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일본 진영에서는 고바야가와 등으로 하여금 서울 북쪽 40리 지점인 벽제관(碧蹄館) 남쪽 여석령(礪石嶺 : 속칭 숫돌고개)에다 정예병을 매복하게 하고 명나라 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급습하였다.

    이곳에서 대패한 이여송은 기세가 꺾여 더이상 진격을 못하고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조선측에서 재차 공격을 주장했으나 이여송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함경도에 있는 가토의 군이 양덕·맹산을 넘어 평양을 기습한다는 유언(流言)이 있자, 이여송은 부총병 왕필적(王必迪)을 개성에 머무르게 하고, 조선 제장(諸將)에게도 임진강 이북에 포진하도록 명한 다음 다시 평양으로 퇴진하였다.

    한편, 함경도 방면에 침입한 가토는 명군의 내원으로 평양성이 수복되고 고니시 등이 서울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래서 퇴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하여 즉시 철군을 서둘러 서울로 퇴진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평양성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졌으나 여석령 전투(일명 벽제관싸움)에서 승리하여 회복세에 있었다. 이때 마침 전라감사 권율(權慄)이 명군과 함께 도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진하던 중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이르러 배수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2월 12일 도성에 머무르던 일본 대군이 일시에 공격을 해왔다.

    권율과 의승장 처영 등은 휘하군을 지휘하여 격전 끝에 그들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지난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도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삼대첩(三大捷)의 하나이다.

    그동안 명군은 다시 심유경을 서울의 일본 진영에 보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다. 일본군도 각지의 의병 봉기와 명군의 진주, 보급 곤란, 악역(惡疫)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따라 4월 18일 도성에서 철수하여 강원·충청도에 주둔한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켰다. 그리고 서생포(西生浦)에서 웅천(熊川)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의의 진행 도중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은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어 성안에 있던 수만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임진왜란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한편, 심유경이 일본군과 같이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 3년간 사신이 왕래했으나 화의는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하여 ①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② 감합인(勘合印 : 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③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④ 조선 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구했고, 붙들려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명나라의 허가를 얻었다. 이에 1596년 명나라의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金印)을 전하였다.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뒤 다시 조선 침입을 꾀하였다. 심유경은 본국에 돌아가 국가를 기만한 죄로 처단되고, 이로써 오랫동안 결말을 보지 못하던 화의마저 끝내 결렬되었다.

    정유재란

    1597년 화의 결렬로 일본의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렸다. 먼저 가토·고니시·소 등을 장수로 한 1만 4500명의 군사를 선봉으로 정월 15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가토는 울산·죽도의 구루(舊壘)를 수축하고 부산의 수병(戍兵)을 합하여 잠시 기장에 주둔했다가 이어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들어가 둔진하였다.

    고니시는 앞서 지난해 말에 두모포(豆毛浦)로 상륙하여 2월에 부산의 원영(原營)을 수복하고 영주할 계획을 서둘렀다. 이때 조선에서는 한산도를 통제영(統制營)으로 삼아 남해안을 지켜오던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고, 그를 대신하여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의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었다.

    3월 중순부터는 일본의 대군이 속속 바다를 건너왔다. 대부분 구로다·모리(毛利秀元)·시마즈·나베시마(鍋島直茂)·하시수가(蜂須賀家政)·우키다·고바야가와·아사노(淺野長慶) 등 임진왜란 당시에 침입해왔던 제장들로서 총병력 14만 1500명이었다.

    이밖에 수군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도토·와키사카·가토(加藤嘉明) 등이 지휘하였다. 일본군은 먼저 동래·기장·울산 등 각지를 점거하고, 웅천·김해·진주·사천·곤양 등지를 왕래하였다.

    명나라에서는 병부상서 형개(邢玠)를 총독, 첨지도어사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재차 원병을 보냈다.

    명군은 압록강을 건너 양호는 평양에 머무르고, 마귀가 먼저 서울에 들어와 6월에 제장을 나누어 부총병 양원은 남원, 유격 모국기(茅國器)는 성주, 유격 진우충(陳愚衷)은 전주,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충주를 각각 기지로 삼게했다.

    조선은 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이덕형·김수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두어 8도에 모병하였다. 또 명군의 계획에 따라 장관(將官)을 분파하여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 방어사 권응수를 경주에 주둔시켜 조령로(鳥嶺路)를 막고, 우병사 김응서는 의령에 주둔하게 하여 부산로(釜山路)를 막으며, 그밖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申浩), 남원부사 임현(任鉉) 등은 모두 양원을 따라 남원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 해 4월 일본 수군은 조선 근해로 들어왔다. 조선 수군이 이를 중도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제로 물러났고, 일본 수군은 겨우 부산으로 입항하였다.

    그 뒤 통제사 원균은 미숙한 전술과 무지한 싸움으로 일본 수륙군의 전략에 말려 패사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등도 전사하니 이순신이 쌓아놓은 한산도의 수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거제 해전의 소식을 듣고, 울산 죽도성에서 부장(部將) 회의를 열어 육군은 호남·호서 지역을 석권할 것과 수군은 전라 해안을 침범할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7월 28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우키다를 대장으로 한 1대(隊) 5만 병력이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수륙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모리를 대장으로 한 1대 역시 5만의 군사로 초계·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하고, 그 일부는 모국기의 본거인 성주로 우회하여 역시 안의·전주 방면으로 향하였다.

    당시 조명 연합군이 전력을 기울인 곳은 남원이었다. 남원으로 향한 일본군은 8월 14일부터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다. 격전 끝에 마침내 16일에 남원이 함락되어, 병사 이복남 등 많은 전사자를 내고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은 50기(騎)로서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그리고 2,000 병력으로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의 유격 진우충도 따라서 성을 버리고 패주하여 일본군은 전주를 무혈 점령하였다.

    한편, 전주로 향하던 모리의 군은 8월 안음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던 안음현감 곽준(郭) 등의 치열한 반격을 받았다. 그러나 산성은 하루 만에 함락되고 모리 휘하의 가토군은 전주로 들어가 우키다 휘하의 고니시군과 합류하였다.

    이에 서울에서는 도성민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조신 가운데는 왕의 피란을 주장하는 건의까지 나오게되었다. 그리하여 남쪽에서 퇴각한 명군이 한강에서 서울을 지켰으며, 경리 양호는 평양에서 급히 서울로 와서 일본군의 북침 저지를 지휘하게 되었다.

    전주에서 합류한 일본군 가운데 모리·가토군은 전주·공주를 거쳐 전의·진천에 이르고, 다시 그 일부인 구로다군은 직산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양호는 부총병 해생(解生)·우백영(牛白英) 등을 남쪽으로 나가게 했는데, 마침 9월 5일 여명에 직산 북방 소사평(素沙坪)에서 구로다군과 충돌하여 크게 싸워 일본군의 북상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또 원균이 패사한 뒤 다시 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이 소사평의 대첩이 있은 지 10일이 지난 9월 16일 명량(鳴梁)에서 대첩을 하여 일본군의 서진(西進)도 봉쇄하였다.

    진로를 봉쇄당한 일본군은 겨울이 닥쳐온다는 이유로 10월부터 남해안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수만의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00리에 성을 쌓고 나누어 주둔하였다.

    울산에는 가토와 나베시마군이, 양산에는 우키다와 모리군이, 사천에는 시마즈군이, 남해에는 다치바나(立花宗茂) 등의 군이, 순천에는 고니시군이 각각 주둔하였다.

    이 때 명군은 남원 함락 이후 적극 전세를 펴서 수륙 원병이 다수 내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 또한 지난해 명량대첩 이후 본영 우수영이 황폐하여 각지로 왕복하던 중 1598년 2월 고금도로 진을 옮겨 전투를 하면서, 장기 작전으로 병영을 세우고 난민을 이주시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수개월만에 민가가 수만 호에 이르게 되어 한산도 당시를 능가하였다.

    이 해 7월 명나라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의 수군 5,000이 고금도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명군은 한때 그 위세를 믿고 방자하여 사단(事端)을 자주 일으켰다. 그러나 이순신이 강온으로 잘 대처하여 명군의 군기를 감독하는 권한을 얻고, 조명 수군의 총지휘권도 실질상으로 양보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 양호가 파직되고 그의 자리에 천진순무(天津巡撫) 만세덕(萬世德)이 임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명군은 일대공세를 취하기로 하고 4로(路)로 나누어 일제히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마귀는 2만 4000의 군사를 이끌고 동로(東路)를 따라 가토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평안·강원·경상좌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동일원(董一元)은 1만 3500의 군사로 중로(中路)를 따라 시마즈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경기·황해·경상우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유정(劉珽)은 1만 3600의 군사로 서로(西路)를 택하여 고니시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충청·전라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진린은 수군 1만 3300으로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해상을 담당하게 했으나 별다른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8월 18일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였다. 일본군은 상(喪)을 감추고 회군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철수를 시작하여 형세는 일변하였다.

    명나라 제독 유정은 9월 중순 순천의 고니시군이 철수하여 귀환한다는 보고를 받고 9월 20일부터 육상에서 이를 공략하고, 이순신과 진린은 수상에서 봉쇄하여, 퇴로를 얻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일본군과 수일간 격전을 치루었다.

    그러나 그 뒤 곤경에 처한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은 유정은 10월 16일에 군사를 철수시켜 최후의 기회인 수륙 협공 작전이 수포로 돌아갔다. 진린 또한 고니시에게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 주려했으나 이순신의 설복으로 뜻을 거두었다.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가 병선 500여 척을 거느리고 11월 18일 야조(夜潮)를 타고 남해 노량으로 습격해 왔다. 삼경(三更)에 이순신은 분향을 하며 하늘에 맹세하고, 명군과 함께 호응하여 사경(四更)에 노량에서 적의 선대를 맞아 적함대의 절반을 분파하였다.

    적은 견디지 못하여 남해 관음포(觀音浦)로 빠졌으나, 퇴로가 막혀 다시 나오는 것을 이순신이 직접 적진에 뛰어들어 독전하였다. 이 와중에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고, 그의 유명을 받은 조카 완(莞)이 대신 지휘하여 적함 200여 척을 분파하고 무수한 적을 무찔렀다.

    이에 시마즈 등은 50여 척을 건져 탈주했고 고니시는 격전중에 묘도(猫島)로 몰래 빠져나갔으며, 유정은 순천으로, 진린은 남해로 돌아갔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죽고 일본의 국내 사정이 불안하여 적군이 급히 철수하는 줄은 얼마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7년간에 걸친 조일전쟁은 끝났다. 이때 좌의정 이덕형과 황신(黃愼) 등은 소를 올려 명군과 함께 대마도를 칠 것을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99년에 명군도 철수하였다. 1월에 유정·진린·마귀·동일원 등이 진영을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오고, 4월에는 총독 형개가 이들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경리 만세덕, 도독동지(都督同知) 이승훈(李承勳), 산동안찰부사(山東按察副使) 두잠(杜潛) 등이 군사 2만 4000으로 서울에 잠시 주둔하다가 다음해 9월에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 7년 동안의 중요전투 상황을 보면 앞의 [표]와 같다.

    [표] 임진왜란 중의 대소전투

    연월일\구분

    전 투 지

    장 수

    전 투 결 과

    조선(명)
    1592. 4.14.

    부산

    鄭撥

    少西行長

    부산 함락, 정발 전사

    1592. 4.15.

    동래

    宋象賢

    少西行長

    동래 함락, 송상현 전사

    1592. 4.18.∼19.

    밀양

    朴晉

    少西行長

    밀양성 함락

    1592. 4.19.

    김해

    徐禮元

    黑田長政

    김해성 함락

    1592. 4.21.

    경주

    朴毅長

    加藤淸正

    경주성 함락

    1592. 4.24.

    상주

    李鎰

    少西行長

    이일 패주

    1592. 4.26.

    문경

    申吉元

    少西行長

    신길원 패주

    1592. 4.26.

    탄금대

    申砬

    少西行長

    신립 전사

    1592. 4.23.∼28.

    거창 신창 추풍령

    趙儆

    黑田長政

    왜군 다수 사살

    1592. 5. 2.

    한강

    金命元

    加藤淸正

    한강방어 실패

    1592. 5. 7.

    옥포

    李舜臣

    藤堂高虎

    왜선 30척 격파

    1592. 5. 7.

    합포

    李舜臣

    脇坂安治

    왜선 5척 격파 왜군 패주

    1592. 5. 8.

    적진포

    李舜臣

    脇坂安治

    왜선 11척 격파

    1592. 5.18.

    양주

    申恪

    ?

    조선국 육전 첫승리

    1592. 5.18.

    임진강

    金命元

    加藤淸正

    임진강방어 실패

    1592. 5.22.

    여강

    元豪

    毛利吉成

    왜군 50명 사살

    1592. 5.29.

    사천

    李舜臣

    脇坂安治

    왜선 12척 격파

    1592. 6. 2.

    당포

    李舜臣

    ?

    왜선 20척 격파

    1592. 6. 5.

    당항포

    李舜臣

    ?

    왜선 26척 격파

    1592. 6. 5.

    용인

    李洸

    脇坂安治

    삼도의 근왕병이 패전

    1592. 6. 5.

    회양

    金鍊光

    毛利吉成

    조선군 패전

    1592. 6. 6.

    무계

    金沔

    村上景親

    왜군 다수 살상

    1592. 6. 7.

    율포

    李舜臣

    來島通久

    왜선 1척 격파

    1592. 6.12.

    철령

    李渾

    毛利吉成

    조선군 퇴각

    1592. 6.15.

    예천부근

    禹伏龍

    吉川廣家

    왜군 격퇴

    1592. 6.18.

    평양

    尹斗壽

    少西行長

    평양 함락

    1592. 6.19.

    금화

    元豪

    島津忠豊

    원호 전사

    1592. 6.25.

    운암

    梁大樸

    ?

    왜군 격파

    1592. 6월말경

    마진

    孫仁甲

    毛利輝元

    왜군격파, 손인갑 전사

    1592. 7. 8.

    웅치

    李福男

    小早川隆景部長

    조선군 패전

    1592. 7. 8.

    이치

    權慄

    小早川隆景部長

    왜군 격퇴

    1592. 7. 8.

    한산도

    李舜臣

    脇坂安治

    왜선 73척 격파

    1592. 7. 9.

    금산

    高敬命

    小早川隆景部長

    고경명 전사

    1592. 7.10.

    안골포

    李舜臣

    九鬼嘉隆

    왜선 40척 격파

    1592. 7. 1.일경

    우척현

    金沔

    小早川隆景部長

    왜군 격파

    1592. 7.17.

    평양

    (祖承訓)

    少西行長

    조승훈 패주

    1592. 7.18.

    해정창

    翰克誠

    加藤淸正

    조선군 패전

    1592. 7.27.

    영천

    權應銖

    福島正則

    영천 수복

    1592. 7월말경

    의령

    郭再祐

    小早川隆景部長

    정암진에서 왜군 격파

    1592. 7월말경

    현풍

    郭再祐

    羽柴秀勝휘하부대

    왜군 격파

    1592. 7월말경

    영산

    郭再祐

    羽柴秀勝휘하부대

    왜군 격파

    1592. 7월말경

    안성

    洪季男

    福島正則

    왜군 격파

    1592. 8. 1.

    평양

    金命元

    少西行長

    조선군 패전

    1592. 8. 1.

    청주

    趙善 靈圭

    蜂須賀家政의 일부병력

    청주 수복

    1592. 8. 2.

    경주노곡

    金虎

    石田康勝의 部兵

    왜군 격파

    1592. 8. 3.

    거창부근

    金沔

    小早川隆景의 部將

    왜군 격추

    1592. 8.18.

    금산

    趙憲 靈圭

    小早川隆景部長

    조헌 전사

    1592. 8.20.

    경주

    朴晉

    多川內記

    조선군 패전

    1592. 8.21.

    성주

    金沔

    桂元綱

    조선군 퇴각

    1592. 8.22.

    봉화

    柳宗介

    毛利吉成

    조선군 패전

    1592. 8.25.

    영원산

    金悌甲

    毛利吉成

    조선군 패전

    1592. 8.28.∼9. 2.

    연안성

    李延

    黑田長政

    연안성 대첩

    1592. 9. 1.

    부산

    李舜臣

    ?

    왜병의 해상활동제지

    1592. 9.11.

    성주

    金沔

    桂元綱

    왜군 격파

    1592. 9.16.

    경성

    鄭文孚

    加藤右馬允

    왜군 격추

    1592. 9.20.∼30.

    인동부근

    張士珍

    禾下重賢

    왜군 격퇴

    1592. 9.27.

    노현 창원

    柳崇仁

    木村重玆

    조선군 패퇴

    1592.10. 6.

    진주

    金時敏

    加藤光泰

    진주대첩

    1592.10.18.

    삭녕

    沈岱

    伊東祐兵

    조선군 패전

    1592.10.30.

    길주 장평

    鄭文孚

    加藤右馬允

    왜군 격파

    1592.10. 9.∼11.10.

    함흥 부근

    成允文

    鍋島直茂

    왜군 격파

    1592.11.12.

    이원

    李聖任

    ?

    조선군 패전

    1592.11. ?.

    상주용화동

    鄭起龍

    ?

    왜군 격파

    1592.12. ?.

    중화

    林仲樑

    少西行長의 部將

    조선군 패전

    1592.12.10.

    길주쌍포

    鄭文孚

    加藤右馬允

    왜군 격파

    1592.12. 7.∼14.

    성주

    金沔

    ?

    왜군 격파

    1592.12월말경

    수원독산성

    權慄

    宇喜多家部長

    조선군 승리

    1592. ?. ?.

    함창

    鄭起龍

    ?

    왜군 격파

    1593. 1. 8.

    평양

    (李如松) 金命元

    少西行長

    평양 탈환

    1593. 1.19.

    길주성 남문외

    元忠恕

    加藤淸正의 부장

    왜군에게 피해를 줌.

    1593. 1.23.

    단천

    具滉

    加藤與左

    왜군 격파

    1593. 1.27.

    벽제관 부근

    (李如松)

    宇喜多秀家

    조명군 패전

    1593. 1.28.

    백탑교

    鄭文孚

    加藤右馬允

    왜군 격파

    1593. 1.30.

    죽산

    邊以中

    福島正則

    왜군에게 피해를 줌.

    1593. 2.12.

    행주

    權慄

    宇喜多秀家

    행주대첩

    1593. 2.30.

    상주

    黃進

    福島正則

    왜군 격파

    1593. 3.25.∼27.

    노원평 우관동

    李時彦

    宇喜多秀家 휘하군

    왜군 격파

    1593. 8. 6.

    경주

    (王必迪) 高彦伯

    加藤淸正 毛利吉成

    왜군 격파

    1593. 8.29.

    함안 웅천

    安民寧 宣居怡

    鍋島直茂

    왜군 격파

    1593.11. ?.

    진주 영선

    李$

    少西行長

    쌍방 피해

    1593.12. 2.

    안강

    高彦伯

    加藤淸正

    왜군 격파

    1594. 3. 4.

    당항포

    李舜臣

    脇坂安治

    왜군 격파

    1594. 9.29.

    장문포

    李舜臣

    福島正則

    왜군 격파

    1594.10. 1.

    영등포

    李舜臣

    島津義弘

    왜군 격파

    1594.10. 4.

    장문포

    李舜臣

    福島正則

    쌍방간에 전과 없음.

    1597. 7.15.

    칠천량

    元均

    島津忠豊

    조선군 패전

    1597. 8.15.∼16.

    고령

    鄭起龍

    小早川秀秋

    왜군 격파

    1597. 8.16.

    남원

    (楊元)

    宇喜多秀家

    남원 함락

    1597. 8.17.

    황석산성


    加藤淸正

    황석산성 함락

    1597. 9. 7.

    소사

    (解生)

    黑田長政 毛利秀元

    왜군 격파

    1597. 9.14.

    금구

    元愼

    宇喜多秀家

    왜군 격파

    1597. 9.16.

    명량

    李舜臣

    藤堂高虎

    왜선 30척 격파

    1597. 9.20.

    보은

    鄭起龍

    加藤淸正

    왜군 격파

    1593.12.18.

    광양

    李光岳

    少西行長

    왜군 격파

    1598. 1. ?.

    도산성

    (麻貴)

    加藤淸正

    마귀 패주

    1598. 4. 8.

    무주

    李光岳 (李寧)

    島津義弘

    왜군 격파

    난중의 사회상

    왜란 중에 조선 군민의 가장 큰 괴로움은 식량난이었다. 명나라 원군이 조선땅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식량난이나 군량미 부족 보다도 왜군과 맞서 싸울 전투 병력이 더 절실히 요망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원군이 들어온 뒤에는 훈련된 병력의 부족 보다도 군량미의 부족이 더 무겁고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명나라 군사가 내원할 때는 병력만을 보낸 것이 아니라 무기 등 군수 물자와 군량미도 함께 보내왔다. 그런데 군량미는 명군에 의해 그들의 진영까지 운반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만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명군의 급식을 위한 조선측의 군량미 조달은 적기에 공급되기가 어려웠다.

    군량미의 수송은 육로와 해로 두 길을 택하였다. 명군이 내원한 이래 1594년(선조 27) 8월 일단 본국으로 철수하기까지의 기간은 주로 육로로 수송하였다.

    이를 위해 싸움에 나갈 수 없는 사람이나 부녀자 및 각처의 의병이나 의승군을 동원하였다. 또 수복 지역의 소나 말은 물론, 왕의 호위병과 동궁의 행차를 따르는 군인 중 말을 소유한 자도 차출하여 군량미 운송에 나서게 하였다.

    해로는 정유재란으로 명군이 두번째 내원하면서부터 많이 이용하였다. 정부는 이를 위하여 각처에 산재한 선척을 징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궁가(宮家)나 내수사(內需司)의 배를 빙자하여 거절하는 예가 많아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민력이 다하여 전선을 만들 수 없는 형편에서 운량선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의주에 쌓아둔 명나라 군량미를 육로나 해로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많은 난관이 있었다. 운송 도중에 많은 양이 소모되었고, 인력이 부족하고 수송 수단도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명나라에서 보낸 양곡으로 명군을 급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족량을 국내에서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 정부는 국내 양곡을 조선 관군 보다는 명군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하였다. 그러나 국내 양곡을 조달하는 데는 애로가 컸으며, 민간인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군량을 충당할 수 있는 길은 전세와 곡물작미·노비신공작미·모속(募粟)·무속(貿粟)·둔전소출 등이었다. 이 중에서 정부의 필요 경비를 제한 나머지는 모두 군량으로 충당되었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전세는 경작할 종자가 없는데다가 전쟁으로 인구 감소에 따른 경지 면적의 감축으로 격감되었다. 납속 사목(納粟事目)에 의한 모곡(募穀)은 신분 상승의 길을 열어주기는 했으나 모속 관료의 비행으로 관(官)으로 납부되는 양은 많지 않았다.

    난중의 민중의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 인상살식(人相殺食 :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음)의 끔찍한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왜란 전에 170만 결이던 전국의 경지 면적이 54만 결로 감소된 것도 노동력의 감소에 큰 원인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 1594년 송유진(宋儒眞)의 난과 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가장 두드러진다.

    왜란 초기 산발적인 소요는 신분 해방을 위해 일어났다고는 해도 불만을 느껴온 지배층에 대한 우발적이며 비조직적인 행동이었다. 또 이러한 행위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왜적의 세력권 안에서 발생했고 직접 왕정의 전복을 겨냥한 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송유진·이몽학의 난은 규모나 조직 면에서 양상이 판이하였다. 주모자들은 정면으로 현 왕권을 타도하고 새 국가를 수립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또한 두 반란은 왜군이 화의를 조건으로 이미 남쪽으로 철수해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충청도 지역이 중심이었다.

    이런 점에서 임란 초기 감사나 수령들의 수탈이나 혹사에 불만을 품었던 민중이나, 왜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바라만 보다가 흩어지는 수신(帥臣)들을 증오한 농민들의 이반과는 성격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이들 두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사회에 던진 충격은 대단히 컸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지배층에게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가 군공이나 납속을 통하여 주어지기는 했으나 난국 타개가 목적이었으므로 그 문이 넓지는 않았다.

    임진란 초기에 의병 활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대부분 지배층이어서 그 밑의 의병들은 전공이 표면에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나마 의병이 해체되자 한가닥 신분 상승의 기회마저 끊어졌다.

    납속의 길도 쉽지는 않았다. 정부에서 발표한 납속 사목은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아사 상태에 처한 양민들로서는 납속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반란의 주도자가 의병 활동하던 사람이 아니면 납속의 임무를 띠고 활약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많은 시사를 준다고 하겠다.

    전쟁에는 많은 인명의 손실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는 전란을 통해 많은 것을 터득하고 배우게 된다.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란을 통하여 많은 것을 깨달은 피지배층의 가담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편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에 끌려들었다가 죽음을 당한 이산겸(李山謙)과 김덕령(金德齡)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당시 사회적인 추세로 보아 중앙 정부가 반적의 입을 빙자해서 고의적으로 만든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이산겸과 김덕령은 끝까지 의병 활동을 하여 중망이 높고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이들을 처형한 것은 그들이 의병 세력의 기반을 믿고 혹 동요되는 민심을 이용하여 반란이라도 획책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취해진 조처였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결과

    전후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일본 등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

    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전야(田野)가 황폐화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군공이나 납속으로 서얼허통(庶孽許通), 향리(鄕吏)의 동반직(東班職)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져갔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한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한편, 병제(兵制)의 재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 紀効新書≫를 얻어서 절강 무예(浙江武藝)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였다.

    1594년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삼수병(三手兵)을 두고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속오군(束伍軍)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여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서는 종래의 주무기인 궁시창검(弓矢槍劍)·총통(銃筒)·완구(碗口)·화전(火箭) 외에 난중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가 발명되었다. 또 항왜(降倭)로부터 조총 제조와 염초 자취술을 익혀 실전에 활용했으며, 불랑기(佛狼機)를 모조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난을 통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었고 자아 반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의 원군 파견으로 숭명 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또, 전란중에 명군에 의하여 관우(關羽)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난 뒤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關羽廟)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무리한 전쟁을 오래 끌었던 관계로 국민 생활이 피폐해졌고, 침략군 중에는 기아를 못이겨 조선에 투항한 자가 많았다. 또한 일본 국내의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도쿠가와(德川家康)가 국내 정복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또, 조선에서 많은 백성을 포로로 끌고가서 강제로 경작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기도 했다. 조선인 포로 가운데, 도공(陶工)들의 도자기 제조로 일본 도자기업에 큰 발전을 보았으며,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 이념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활자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고, 특히 ≪퇴계집≫ 등 중요한 전적(典籍)을 가져가서 일본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킨 탓에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의 여진인에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명청 교체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 아옹 힘들어 ㅠㅠ

2012.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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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祿]의 역(),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이라고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좌기관()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사항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 말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使)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한편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편당()정치, 기강의 해이, 전세제()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조정에서는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비()를 중지하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따라서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일본국왕사(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의 서사()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주교수() 조헌()은 만언소()를 올려 시폐()와 국방을 논하는 등 일본 정벌의 강경론을 주장하자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를 이유로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1590년 3월 황윤길()을 정사(使), 김성일()을 부사(使), 허성()을 종사관()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동인세력은 서인들이 전쟁을 빌미로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 제3차 일본 사신 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놀라 그 해 5월에 일본의 서계 내용과 함께 왜정()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晬) ·이광() ·윤선각() 등으로하여금 경상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신립() ·이일()에게는 변비()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더욱 성숙하여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西]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使) 정발()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使) 송상현() 이하 군민()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 ·도도 다카토라[] 등의 9,000여 수군()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는데 이 중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제1군은 중로()로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충주()-여주()-양근()-용진()나루-경성동로(), 제2군 좌로()는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조령-충주-죽산()-용인()-한강, 제3군 우로()는 김해()-성주()-무계()-지례()-등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使),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岉)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使), 김근(玏)을 좌도안집사(使)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과 변기()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使) 류성룡()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조령·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을 수성대장()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使)였던 김명원()을 도원수()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개성을 향하여 피란길에 올랐다. 서울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달아났다. 파천에 대한 민심이 거제지자 파천을 주동한 사람은 영의정 이산해로 내몰고, 류성룡은 파천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거짓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임해군()은 함경도로, 순화군()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였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두 왕자를 붙잡아 왜군에게 인도하였다.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이 달아나자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란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창덕궁 등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강원·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군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는 왜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대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출동하여, 옥포()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당항포()·한산도()·부산 등지에서 계속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진주성()싸움·행주산성()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임진왜란 해전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과 왜군의 전함 비교]
- 조선수군의 전함


판옥선

- 왜군의 전함


아타케부네


세키부네


고하야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조선군으로 인해,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부산진·동래의 수성전()과 김해성()의 저항, 경상우방어사(使) 조경()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의 추풍령전투, 밀양 작원()에서의 밀양부사 박진()의 선전, 유도대장() 이양원()의 해유령()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한편 혼란과 민심의 이산 속에서도 근왕()을 부르짖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김면(정인홍()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김천일(), 호서에서는 조헌()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거병하였다. 또한 조선 사대부들에게 천대만 받았던 승려들이 봉기하여 가세하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령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길주()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도 대소의 허다한 의병이 봉기했으며 휴정()·유정()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여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왜군의 군사행동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왕이 파천하는 도중 사신을 명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명에서는 조선 땅에서 왜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파병을 결정하여, 선봉장으로 낙상지()와 사대수() 등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송응창(이여송()이 4만 5000의 동정군()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치()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패퇴하자 고립되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을 치고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서울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임진강을 끼고 조선·명의 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일본측 고니시의 강화회담 제의로 이덕형()과 일본의 야나가와 초신[調]·겐소[]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어 강화는 교섭단계에 들어갔다. 그 즈음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퇴한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는데 김천일·황진(최경회() 등이 역전했으나 함락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싸움은 행주싸움에 못지않은 격전이었고 특히 제1차 진주성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에 든다. 조선측의 강화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회담은 진척되어 심유경()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우리측에서도 황진을 통신사로 보내게 되었다. 강화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명은 왜군의 재공격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주력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5년간 계속된 명·일간의 강화회의는 1596년 9월 일본 오사카성[] 회담에서 결렬되었다.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명에서는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을 허락한다는 봉공안()으로써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도요토미는 ① 명의 황녀로써 일본의 후비()로 삼게 할 것, ②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③ 감합인(:貿)을 복구할 것, ④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심유경은 이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을 보냈는데, 화의는 결렬되고 이듬해 왜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조선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경상도의 금오()·공산()·화왕산성()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를 경리, 마귀()를 제독()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
1596년 12월에 고니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군이 다대포()에 상륙하여 양산()을 함락하고 서생포(西)에 진을 쳤다. 정유재란 때의 왜군 총병력은 14만 1500으로, 수군도 강화되었다. 왜군은 임진년 당시와는 달리 경상·충청·전라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워,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순천()·김해()·창원() 방면에서, 가토는 밀양()·초계()·거창()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왜군은 황석산성()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에서 상주목사 정기룡()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 싸움에서도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해전에서는 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군의 본거지를 공격하지 않고 소극적이라는 죄명으로 하옥되고 원균()이 그 후임이 되었으나 7월의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의 수군이 전멸하였다. 이에 다시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병선으로 전선을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명량()대첩에서 적함 133척을 맞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고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였다.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이를 계기로 왜군은 총퇴각하였다. 왜군의 가토가 울산의 도산성()에서 퇴각하고 순천의 고니시도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자 왜의 수군 300여 척이 이를 후원하려 노량()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 진린()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최후의 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로써 전후 7년간에 걸쳤던 왜란은 조선·명·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위정자들의 급선무는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정치·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비변사()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시작되었다.

또한 난중에는 각종 무기가 제작되어 이장손()은 비격진천뢰()를, 변이중()은 화차()를 각기 발명하였고 왜의 조총과 명군이 사용한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도 모조하여 사용하였다. 전화로 인한 농촌의 황폐, 은결()의 증가, 국가질서의 문란 등으로 대동법()의 실시, 면세전() 확대의 방지, 균역법()의 시행, 기민()을 위한 환곡()·모곡()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한편 혼란한 사회와 민심의 흉흉함을 틈타 이몽학()의 난 등 사방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함께 시행된 속오군()제도, 공명첩()의 발행 등은 조선의 신분제도 붕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문화적 손실로는 왜병의 방화로 불국사·경복궁 등의 건물과 사고()에 보관 중이던 역대 왕조의 실록·서적 등이 소실되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였다. 한편 전쟁으로 인한 질병의 만연으로 질병퇴치를 위한 의학서인 《동의보감()》이 편찬되었고 사상적인 측면으로는 의병·승병을 통한 애국심의 발로와 자아반성과 함께 명의 내원()에 대한 사대사상이 고조되는 반면에 왜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사상이 더욱 강해졌다.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의 막부()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포로로 잡아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획기적으로 요업()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약탈하여 간 많은 서적은 성리학() 등 그들의 학문에 크게 기여하였다.

2012.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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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 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개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케이초(慶長)의 역(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했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문약(文弱)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러할 즈음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즉,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일본에는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때 도요토미(豊臣秀吉)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마도주(對馬島主) 소(宗義調)에게 명하여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修好)하도록 시켰다.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데에 있었다.

이에 대마도주는 가신(家臣)인 다치바나(橘康廣) 등의 일행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부산포(釜山浦)에 보내어 통호(通好)를 청하였다.

이 소식이 경상우수사의 치보(馳報)로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찬탈시역(簒奪弑逆)한 나라에서 보낸 사신을 받아들여 접대할 수 없으니 대의(大義)로써 타일러 돌려보내라.”는 뜻을 비치고, 2품 이상의 정신(廷臣)들에게 가부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정신들의 결론은 관례대로 접대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내키지 않았으나 정의(廷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치바나 일행이 서울에 올라와서 바친 수교문에 오만무례한 구절이 있자 보서(報書)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도 보류하고 있었다.

일본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조헌(趙憲)은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려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지 말 것을 극언하기도 하였다.

그대로 해를 넘긴 조정에서는 이듬해인 1588년 문무반 2품직과 육조의 참의 이상을 중추부(中樞府)에 모아놓고 가부를 재론하였다. 그 결과 “바닷길이 어두어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다치바나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와중에 소가 사망하고 양자 소(宗義智)가 그를 승계하여 새로 대마도주가 되었다. 그 역시 도요토미로부터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入朝)에 대한 독촉이 심해지자, 1589년 하카와시(博多市)의 세이주사(聖住寺) 주지인 겐소(玄蘇)와 가신 야나가와(柳川調信) 및 고니시(小西行長)의 사신인 시마이(島井宗室) 등과 일행이 되어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칭하고 다시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구례(舊例)에 따라 이조정랑 이덕형(李德馨)을 선위사로 삼아서 부산포에 보내어 접대하게 하였다. 소 등은 부산진 객관에 머무르면서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며 함께 일본으로 가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해서는 조선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통신사 파견 문제를 결정짓지 못한 채 소 일행은 일단 돌아갔다.

대마도로 돌아간 그들은 정사에 겐소, 부사에 소를 구성하여 다시 부산포에 왔다. 겐소를 정사로 삼은 것은 국왕사(國王使)로 위장하려는 것이었다.

이들을 다시 맞이한 조정에서는 이미 일본 사신으로부터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병화(兵禍)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았던 터라 통신사 파견의 여부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정신들의 찬반이 엇갈려 결정을 짓지 못하던 중, 왕의 전교(傳敎)에 따라 조선의 반민(叛民)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자들이 가끔 왜구(倭寇)의 앞잡이가 되어 변방을 소요시키니 그들을 잡아보내면 통신에 응하겠다는 것을 내세워 조선의 명분을 찾고 그들의 성의를 시험하고자 하였다.

이에 소는 선뜻 응하여, 야나가와를 자국으로 보내 사화동(沙火同) 등 10여 인을 잡아와서 조선의 처치에 맡긴다 하여 이들을 모두 베어 죽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통신사 파견을 결정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보빙(報聘)을 겸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그런데 곧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이에 집중되어 사행을 선정하지 못하다가 11월 중순이 넘어서야 통신사 일행을 선정하였다. 즉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으로 결정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0년 3월에 겐소 일행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대마도에서 한달간 머무르다가 7월 22일에 경도(京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도요토미가 동북 지방을 경략중이어서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에 가서야 접견하여 국서(國書)를 전하게 되었다.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려 하는데도 도요토미는 답서를 주지 않아 국서를 전한 지 4일 만에 경도를 떠나 계포구(堺浦口)에 와서 답서 오기를 기다리다가 보름 만에 받았다.

그런데 내용이 오만불손하여 김성일은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여러 곳의 문자를 고쳐서 가져오게 되었다. 일행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 3월이었으며, 이때 일본 사신 겐소·야나가와 등도 따라왔다.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지을 때는 그 가부를 가지고 논박을 벌였으며, 사행이 돌아온 뒤에는 그 보고 내용을 놓고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반하여,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 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黃進)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부사의 무망(誣罔)을 책했다고 한다.

이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 사이에는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맞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동서의 정쟁이 격화된지라 사실 여하를 묻지 않고 자당(自黨)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을 쫓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

또 선위사 오억령(吳億齡)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겐소 등에게 “일본은 다음해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 일본의 발병(發兵)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가 도리어 파직을 당하였다.

또 겐소 등이 그를 위문하는 황윤길과 김성일 등에게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入貢)을 거절한 것을 도요토미가 분개하여 동병(動兵)을 꾀하고 있으니,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하여 일본의 공로(貢路)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할 것”이라 했으나 이것도 거절하였다.

겐소 등이 답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소는 다시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청화통호(請和通好)하는 것이 좋다.”라고 거듭 변장(邊將)에게 말했으나, 10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자 그대로 돌아갔다.

그 뒤 왜관(倭館)에 머무르던 일본인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고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김수(金睟)를 경상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신립(申砬)을 경기·황해도에, 이일(李鎰)을 충청·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 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만이 전비(戰備)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을 정비하고,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전력하고 있었다.

전쟁의 발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나고야(名古屋)에서 제군(諸軍)을 지휘할 계획을 세웠으며, 대군을 9번대(番隊)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각 대를 지휘한 주장(主將)과 병력은 다음과 같다.

제1번대는 주장 고니시로 병력 1만 8700명이며, 제2번대는 주장 가토(加藤淸正)로 병력 2만 2800명, 제3번대는 주장 구로다(黑田長政)로 병력 1만 1000명, 제4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吉成)·시마즈(島津義弘)로 병력 1만 4000명, 제5번대는 주장 후쿠시마(福島正則)로 병력 2만 5000명, 제6번대는 주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로 병력 1만 5000명, 제7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元之)로 병력 3만명, 제8번대는 주장 우키다(宇喜多秀家)로 병력 1만명, 제9번대는 주장 하시바(羽柴秀勝)로 병력 1만 15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상의 병력 15만 8700명은 육군의 정규 병력이었다. 그밖에 구키(九鬼嘉隆)·도토(藤堂高虎) 등이 인솔한 수군(水軍) 9,000명이 승선하여 해전에 대비했고, 구니베(宮部長熙) 등이 이끄는 1만 2000명이 전쟁을 전후하여 바다를 건너 후방 경비에 임하였다.

이밖에도 하야가와(早川長政) 등이 부산에 침입하여 부대의 선척을 관리하는 등 정규 전투 부대 외에도 많은 병력이 출동하여, 전체 병력은 20여 만명이나 되었다.

일본이 침입할 당시에 총병력은 30여 만명으로서, 출정 병력을 제외한 군대는 나고야에 약 10만명을 머무르게 하고 3만명으로 경도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는 1592년 4월 14일에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일본군을 맞이한 부산진의 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적은 이어 동래부를 침공했고, 부사 송상현(宋象賢) 또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고니시의 부대는 그 뒤 거의 조선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중로(中路)를 택하여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순변사 이일이 거느린 조선의 관군을 파하고 조령으로 향하였다.

가토가 인솔한 제2번대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하여 제1번대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부산 상륙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 길로 경상 좌도를 택하여 장기·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을 거쳐 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빠져 중로군과 합하여 충주로 들어갔다.

같은날 구로다가 인솔한 제3번대는 동래에서 김해로 침입하여 경상 우도를 따라 올라와 성주의 무계(茂溪)에서 지례·김산(金山)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와 청주 방면으로 침입하였다.

모리·시마즈가 이끄는 제4번대는 김해에서 제3번대와 함께 창녕을 점령한 다음 성주·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다.

후쿠시마 등이 인솔한 제5번대는 제4번대의 뒤를 따라 부산에 상륙하여 북으로 침입하였고, 고바야가와 등이 이끄는 제6번대와 모리 등이 이끄는 제7번대는 후방을 지키며 북상하였다.

우키다의 제8번대는 5월초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서울을 향하여 급히 북상하였다. 그리고 제9번대는 4월 24일 이키도에 유진(留陣)하고 있으면서 침략을 대기하고 있었다.

적이 대거 침입했다는 변보(邊報)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난이 일어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으로부터 부산진성이 함락된 것 같다는 장계(狀啓)에 이어 그 장계 내용이 확실하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급히 대책을 논의한 끝에 임시변통으로 다음의 인물들을 선발하여 적의 북침에 대비하게 하였다.

즉,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충주 방면의 중로를,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하여 죽령·충주 방면의 좌로를,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청주·죽산 방면의 서로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또,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을 방수하게 했으며, 전 강계부사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하여 경주부윤에 임명하여 각자 관군을 뽑아서 임지로 떠나도록 하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백성들은 군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형편이라 인솔하여 전장으로 떠날 군사가 없었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장수가 군사 모이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이일은 명령을 받은 지 3일 만에 홀로 떠나야 했으며, 별장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뒤에 따라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한,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뒤를 이어 떠나게 하고,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로 삼아 제장을 검독(檢督)하게 하였다.

한편, 이일 등이 내려가기에 앞서 경상감사 김수는 왜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열읍(列邑)에 공문을 발하여 각자 소속 군사를 인솔하고 안전한 지역에 모여 주둔하게 하고 경장(京將)이 이르기를 대기하였다.

문경 이하의 수령들 또한 각기 소속 군사를 영솔하고 대구 천변에 나가 순변사를 기다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당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적세가 점차 가까워오자 군사들이 놀라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비도 많이 내려 우장이 젖은 데다가 군량 보급마저 끊기자 밤중에 모두 흩어져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되었다.

수령들은 할수없이 홀로 말을 달려 순변사가 있다는 문경으로 바삐 돌아갔으나 고을은 이미 텅 비어 사람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이에 창곡(倉穀)을 털어서 이끌고 온 잔여 군사를 먹이고 함창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澥)는 산속에 숨어버리고 판관 권길(權吉)만이 읍(邑)을 지키고 있었다.

중로의 방어 책임을 짊어지고 내려간 이일은 상주에 이르러 판관에게 군사가 없음을 꾸짖으며 참수하려 하자, 그가 용서를 빌며 자신이 나가 군병을 불러모으겠다고 자청하였다. 밤새 촌락을 탐색하여 수백명을 불러모았으나, 그들은 군사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상주에 하루를 머무르면서 창고를 열고 관곡을 내서 흩어진 백성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산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모여들어 수백명에 이르자 이일은 급히 대오를 편성하였다.

그는 상주에서 모은 사람과 서울에서 내려온 장사 중 800∼900명을 인솔하고 상주 북천변(北川邊)에서 습진(習陣)을 시키면서 산을 의지, 둔진하여 전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제1번대 고니시군의 갑작스런 급습으로 대패하자 관군은 전의를 잃었다. 이일은 단신으로 탈주하여 문경 땅에 이르러서야 상주에서의 패상(敗狀)을 치계(馳啓)하고 물러나서 조령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신립이 충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신립은 고니시의 부대가 26일에 조령을 넘어 다음날 충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도에서 모은 8,000여의 군사를 이끌고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일전을 각오하던 중이었다.

잠시 후 왜군이 단월역(丹月驛)을 따라 길을 나누어 공격해왔다. 한 부대는 산을 따라 동으로 침입해오고, 다른 부대는 강을 끼고 내려오면서 조총을 쏘아대니 형세가 풍우가 몰아치는 듯하였다.

총성이 진동하여 신립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말을 달려 두어 차례 적진에 돌진했으나 실패하고 전군이 함몰하자 달천강(達川江 : 속칭 달래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러나 이일만은 동쪽 계곡을 따라 탈주하는 데 성공하였다.

고니시의 군사는 가토의 군과 충주에서 잠시 합류했으나 다시 진로를 달리하였다. 고니시의 군은 경기도 여주로 나와 강을 건너 양근을 경유, 동로로 빠지고, 가토의 군은 죽산·용인으로 빠져 한강 남안에 이르렀다. 또한, 구로다·모리의 군은 25일에 성주에 이르렀으며, 지례·김산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으로 나가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기도를 빠져나와 서울로 향하였다.

일본군이 북상한다는 급보가 계속 전해왔으나 충주 패보를 접하기 이전까지는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중신들의 결의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선조의 피난을 주장하는 일부 조관들도 대의에 억눌려 강력한 주장을 표면화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4월 28일 선조는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源)이 각각 안주목사와 황해감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민심이 의지하고 따른다 하여, 이원익을 평안도의 도순찰사로 삼고, 최흥원을 황해도의 도순찰사로 임명하여 먼저 가서 백성들을 무유(撫諭)하도록 하였다.

선조가 이렇게 서행(西行)의 채비를 갖추자 대간(臺諫)·종실(宗室)들은 사직(社稷)을 버리지 말 것을 애원했고, 유생들 또한 소를 올려 반대했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또한 이 날 대신들은 국세가 날로 다급하니 저군(儲君)을 세워 인심을 계속(繫屬)하기를 청하였다. 선조도 이 청을 받아들여 둘째 아들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했고 백관들은 권정례(權停例)로써 진하(陳賀)하였다. 백관에 명하여 융복(戎服 : 전복)을 입도록 한 것도 이날이었다.

4월 29일 충주 패보가 전해지자, 선조의 서행에 대한 시비를 따질 겨를도 없이 그날 밤으로 이를 결정하였다. 대신들도 “사세(事勢)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평양으로 이어(移御)하시어 명나라의 원병을 청하여 회복을 도모하소서.”라고 아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령 권협(權悏) 등이 청대(請對)하여 도성을 끝까지 지킬 것을 주장하자 유성룡은 “협의 말은 진실로 충성이나, 다만 사세가 부득불 그렇지 못하다.” 하였다. 이어 왕자를 제도(諸道)에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불러모아 회복을 도모하게 하고 세자는 어가(御駕)를 따라갈 것을 청하니 왕도 그것에 응하였다.

이에 맏아들 임해군(臨海君)에게 명하여 함경도로 가게 했으며 김귀영(金貴榮)·윤탁연(尹卓然) 등을 따르게 하였다. 셋째 아들 순화군(順和君)을 강원도로 가게 하고 황정욱(黃廷彧)과 그의 아들 혁(赫)을 비롯, 이기(李墍)가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기는 강원도에 이르러 신병을 들어 따라가지 않았다. 순화군 또한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이 강원도에 들어오자 북으로 향하여 임해군과 동행했으며, 김귀영·황정욱에게 명하여 협동해서 호행하도록 하였다.

국왕 일행이 서행에 오르기에 앞서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하여 도성을 수비하게 하고,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수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병비가 허술하여 대적하기가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밤이 깊어 이일의 장계가 도착했는데 “왜적이 금명간에 반드시 도성에 다다를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장계가 들어오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 왕은 사관(祠官)에게 명하여 종사(宗社: 종묘와 사직)의 주판(主版)을 받들고 먼저 가게 하고 왕은 융복으로 고쳐 입고 말을 타고 나섰다.

세자 광해군이 왕의 뒤를 따랐고, 왕세자 신성군 후(信城君珝)와 정원군 부(定遠君琈)가 광해군의 뒤를 따라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을 나와 도성을 떠났다. 왕비는 교(轎)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을 나서자 시녀 수십명이 뒤를 따랐다.

그런데 달이 없는 데다가 비까지 내려 더욱 어두워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왕이 서울을 떠나자 노비들은 그의 문적(文籍 : 노비문서)을 맡고 있던 장례원과 형조를 불질렀다. 이때에 경복·창덕·창경의 세 궁궐도 모두 불타 없어졌다.

왕의 일행이 개성까지 도착하는데 3일이 걸렸는데, 출성(出城) 당시 100여 명이던 호종 인원이 그 사이에 상당히 줄어있었다. 그리하여 개성까지 따라온 인원만으로 관원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어 관직의 변동도 많았다.

적군이 서울에 당도한 것은 고니시의 군이 5월 2일, 가토의 군이 3일이었다. 이때 한강을 수비하던 김명원은 적이 쏜 탄환이 지휘본부 제천정(濟川亭 : 현 普光洞 소재)에 떨어지자 한강 수비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임진강으로 퇴각하였다. 따라서 유도대장 이양원도 도성 수비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개성에 머무르고 있던 선조 일행은 도성이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행재소를 다시 평양으로 옮겼다. 이어 김명원의 임진강 방어마저 실패하여 개성이 함락되고 적군이 계속 북침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평양 수비마저 포기하고 의주로 옮겼다.

5월 초에 왜군은 서울을 함락하여 본거로 하고 잠시 쉬었다가 전열을 정비하여 바로 북침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양주 해령(蟹嶺 : 속칭 게너미고개)에서 부원수 신각(申恪) 군의 기습을 받고 패했으나 북침을 중단할만한 큰 타격은 아니었다.

그 뒤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이 지휘하는 관군이 적의 침입을 저지하려 했으나 도리어 적의 전술에 말려들어 실패하였다.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하삼도(下三道)의 대군마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상 도중 용인·수원 사이에서 소수의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대패하자 관군에 대한 기대는 절망적이었다.

임진강을 건넌 적군은 3군으로 나누어 북상하였다. 고니시의 군은 평안도 방면으로 침입하여 6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본거로 삼았다.

함경도로 침입한 가토의 군은 함경도감사 유영립(柳永立)을 체포하고 병사 이혼(李渾)은 반민에게 피살되었다. 또한 함경도로 들어간 임해군과 순화군도 반민에 의해 포박되어 적진에 인도되는 등 도 전체가 적중에 들어갔다. 황해도로 들어간 구로다의 군은 해주를 본거로 삼고 대부분의 고을을 침범하여 분탕질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6월 이후, 8도 전역에서 의병(義兵)과 의승군(義僧軍)이 봉기하여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 트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월에 진주목사 김시민(金始敏)은 군관민과 합세하여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의병의 활동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한마디로 관군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토가 일본군에 의하여 짓밟히고 많은 생령(生靈)이 죄없이 쓰러져가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향리를 수호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의병은 신분적으로 보면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어, 의병 활동을 벌이는 기간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文班出身)이 압도적으로 많고 무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덕망이 있어 지방에서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적합지로는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그곳 지방민들이 잘 따를 수 있는 곳을 택하였다. 나아가 이를 확대하여 넓은 지역에 걸쳐서 의병을 불러 모았고, 자연히 활동 무대도 넓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의병의 바탕을 이룬 것은 민족적 저항 의식이며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의병장이었다. 또한 오랜 유학교육을 통하여 유교의 도덕적 교훈인 근왕정신(勤王精神)이 깊이 뿌리를 박은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보인다.

1593년 정월에 명나라의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26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수는 의병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임진년(1592년)에 비하여 많이 줄어든 숫자이다.

그것은 난이 일어난 다음해에 관군이 차차 회복되어 의병을 절제하고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어, 의병이 해체되거나 관군에 흡수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의병장으로는 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김천일(金千鎰)·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정문부(鄭文孚)·이정암(李廷馣)·우성전(禹性傳)·권응수(權應銖)·변사정(邊士貞)·양산숙(梁山璹)·최경회(崔慶會)·김덕령(金德齡)·유팽로(柳彭老)·유종개(柳宗介)·이대기(李大期)·제말(諸沫)·홍계남(洪季男)·손인갑(孫仁甲)·조종도(趙宗道)·곽준(郭)·정세아(鄭世雅)·이봉(李逢)·임계영(任啓英)·고종후(高從厚)·박춘무(朴春茂)·김해(金垓)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다시 벼슬에 들어간 사람도 있으나,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도 있었다.

의병장의 대표적인 활약상을 지역별로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곽재우는 현풍(玄風) 유생으로서 사재를 털어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통칭되었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과 싸워 의령·삼가·합천·창녕·영산 등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 우도가 그의 보호 밑에 있었다. 또한 전라도로 향하는 적을 정암진(鼎巖津 : 속칭 솥바위나루)에서 차단하여 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인홍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물리치고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함안 등지를 방어하였다. 김면은 조종도·곽준 등과 거창·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공격해오는 적의 선봉을 관군과 함께 지례에서 요격하여 격퇴시켰고, 무계에서도 승전하여 그 공으로 합천군수가 되었다.

경상좌도에서 기병(起兵)한 권응수는 정세아 등과 함께 휘하의 의병을 이끌고 영천을 탈환하였다. 또 학연·예천·문경 등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여 적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김해는 9월 예안에서 일어나 경상도 북부지방을 제압하는 등 적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하였다.

호남에서는 고경명과 김천일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먼저 고경명은 유팽로 등과 의병을 일으켜 담양에서 회맹(會盟)하고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각 도는 물론 제주도에까지 격문을 보내고 근왕병을 이끌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할 무렵에 적이 금산에 들어오자, 임진년 7월 9일 금산에 주둔한 적군과 정면대결하였다.

그러나 대패하여 아들 인후(因厚)와 유팽로·안영(安瑛)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 뒤 맏아들 종후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 해 12월에 의병을 일으켜 다음해 6월 2차 진주성싸움에 참가했다가 전사하였다.

김천일은 나주에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수백명을 이끌고 선조가 피난한 평안도로 향하다가 강화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적 점령하에 있는 도성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백성들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얻었으며, 한강변의 여러 적진지를 급습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충청도에서는 조헌이 10여명의 유생과 함께 공주와 청주 사이를 왕래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와 거의 같은 때에 옥천에서 봉기하였다. 이들 의병은 차령(車嶺)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이를 격퇴시켰다.

또 온양·정산·홍주·회덕 등 도내 여러 읍에서 의병 1,600명을 얻은 다음, 의승장 영규(靈圭)가 이끄는 의승군 500명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다시 금산에 주둔한 적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동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관군이 오지 않아 의병들 상당수가 흩어지고 칠백의사(七百義士)만이 남아 생사를 함께 할 것을 결심하였다.

의승장 영규도 조헌과 함께 진격하여 금산성에 육박하였다. 적군은 후속 부대가 없음을 알고 조헌이 채 진영을 정돈하기도 전에 전병력으로 공격해왔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끝내는 조헌 부자와 영규 그리고 의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조헌은 고경명에 이어 싸움에서 패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수차에 걸친 의병과의 싸움으로 적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함에 따라 호서·호남 지방은 온전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경기도에서는 홍계남과 우성전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홍계남은 아버지 언수(彦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서 양성·안성을 활동 무대로 용맹을 떨쳤다.

적정을 보아 동서로 달리며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군이 감히 이 지역에 접근하지 못했으며, 경기도에 인접한 충청도의 여러 읍도 안전할 수 있었다. 우성전은 강화·인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강화를 수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황해도에서는 전 이조참의 이정암이 의병을 일으켜 연안성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벌였다. 당시 황해도에는 구로다의 군이 열읍을 정벌하고 온갖 약탈을 자행했으며 반민들도 많았다. 그런데 오직 연안성만은 침해를 당하지 않고 있었다. 구로다는 이정암이 의병을 영솔하고 이 성을 지킨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침입해왔다.

성중에 있는 의병들은 성을 빠져나가 기회를 보아서 도모하자 했으나 이정암은 이를 듣지 않고 굳은 결의로써 수성을 결심하였다.

이에 1592년 8월 27일부터 9월 2일 아침에 이르기까지 4주야를 싸워 끝내 구로다의 5,000병력을 물리쳤다. 이로 인하여 연해 열읍도 회복되었고, 양호(兩湖)의 해상 교통도 강화도와 연안을 통하여 의주의 행재소까지 이를 수 있었다.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현직 관원으로서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같은해 9월에 경성을 수복하고 길주·쌍포 등에서도 가토의 군을 격파하고 함경도를 수복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가토가 북쪽 깊숙이 들어와 주둔할 수 없도록 수시로 위협을 가하였다.

의병 중에서도 의승군은 특수 집단으로 활약이 컸다. 묘향산(妙香山)의 노승 휴정(休靜: 西山大師)은 수천의 문도(門徒)로 승군을 일으키고 각 사찰에 격문을 보냈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영규 이외에도 호남의 처영(處英), 관동의 유정(惟政 : 松雲大師), 해서의 의엄(義嚴) 등 휴정의 문도들이 승군을 일으켜 호응하였다. 이밖에 전국 사찰에서 일어난 의승군의 수도 많았고 그들의 전과 또한 컸다.

수군의 활약

왜란 직전에 조선이 소유한 판옥선(板屋船 : 戰艦) 수는 모두 250여 척으로 추측된다. 이때 경상·전라 양도의 수군 진용은 경상좌수사에 박홍, 경상우수사에 원균(元均), 전라좌수사에 이순신, 전라우수사에 이억기(李億祺)였다.

그러나 난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또한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세가 불리하자 전선과 전구(戰具)를 모두 침몰시켜 수군도 흩어지고 단지 4척의 전선만이 남게 되었다. 이런 실정이라 조선의 수군은 전라좌·우수사 휘하의 수군과 전선이 주축이 되었고 그 지휘는 이순신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제1차 출동에는 원균도 가세했으나 이순신 단독에 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592년 5월 4일에서 8일에 걸쳐 벌어진 이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해전에서 적선 37척을 분파(焚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우리 피해는 경상 1명에 불과했을 뿐이다.

제2차 출동은 5월 29일에서 6월 10일에 있었다. 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 네차례의 해전에서 왜선 72척을 침몰시키고 적병 88명을 참획하였다. 이때도 아군의 피해는 전사 11명, 전상 26명으로 적에 비하여 경미하였다.

이 2차 출동에서는 도중에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도 가세하여 원균의 3척을 합하여 연합 함대의 규모는 51척이나 되었다. 특히 사천 해전부터 거북선[龜船]이 사용되어 그 효능이 증명되었고, 적 수군의 주력이 괴멸되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것은 그 뒤 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3차 출동은 제2차 출동 후 약 1개월이 지난 7월 6일부터 13일사이에 있었다. 6일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90여 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남해 노량(露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견내량(見乃梁)에 정박중인 일본의 대선단을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각종 총통(銃筒)을 쏘아 먼저 2, 3척을 부수니 적이 도망하려 하였다.

이 때 우리 함대가 일시에 달려들어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파괴하고 나포하는 등 대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을 지휘했던 와키사카는 쾌속선으로 겨우 탈주하고 적선 10여 척이 간신히 도망했을 뿐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이순신의 한산대첩(閑山大捷)이다.

이순신 함대는 이날 견내량에 임시로 정박하고 9일 다시 적선을 찾아 떠났다. 10일에서 다음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안골포(安骨浦)에 정박중인 적선을 포격과 엄습으로 모두 파괴하고 육지로 도망한 잔적을 소탕하였다.

그 뒤 12일에 한산도에 이르러 원균에게 한산도 해전에서 육상으로 도망친 적을 소탕하게 하고 13일 여수로 돌아왔다. 안골포 해전에서 대패한 적군은 구키가 지휘한 수군이었다.

이 3차 출동에서는 적선 약 100여 척을 격파 또는 나포하고 적 250급(級)을 참획하여 개전 이래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아군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한산도·안골포 해전으로 조선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적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할 수 있었다.

제4차 출동은 다음 8월 24일부터 9월 2일에 걸쳐서 있었다. 이순신의 연합 함대는 적선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향하여 절영도(絶影島 : 지금의 부산 영도)에 이르러 적선 수 척을 파괴하였다.

이어 이순신은 왜선 470여 척이 나란히 정박하고 있는 부산포 내항으로 거북선을 앞세우고 전함대를 돌진시켜 적선을 분파하였다. 그러나 적장은 군사를 하선시키고 육지에서 총포를 난사, 종일 교전한 끝에 적선 100여 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 함대는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하고 2일 여수로 돌아왔다. 그러나 본거지를 기습당한 적은 그 뒤 해전을 기피하고 육병(陸兵)으로 변화하는 이변을 가져왔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의 전사를 비롯, 6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와 같이 수군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의 지휘 능력의 탁월함과 밝은 전략 전술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 전선이 일본 전선에 비하여 견고하며 화력이 우세한 데 있었다.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은 의병의 활동과 함께 불리했던 전국(戰局)을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활력소가 되었다.

조ㆍ명군의 반격과 휴전 성립

앞서 선조는 피난 도중에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파병 여부의 의논이 분분했으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에 요양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은 5,000의 병사를 이끌고 고니시의 본거지인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들 원병은 명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군사는 아니고 국경 수비병이었다.

그들은 1592년 7월 15일 평양에 도착하여 풍우가 심한 밤을 이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우참장(右參將) 대조변(戴朝弁)과 유격(遊擊) 사유(史儒) 등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조승훈이 잔여병을 거두어 퇴각하니 1차 구원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고니시는 임진강에서 대진하고 있을 때와 대동강에 이르러 두 차례의 강화(講和)를 청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1차 명나라 군사의 내원(來援)을 계기로 명나라와의 강화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명나라도 조승훈의 군이 패하자 화의에 응할 기세를 보이던 중 석성의 건의로 심유경(沈惟敬)이 화의 교섭을 맡게 되었다.

심유경은 8월 29일 평양에 와서 고니시를 만나 쌍방의 강화 조건을 논의하여, 50일 이내로 본국에 돌아가 구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평양 이상은 침입하지 말 것과 조선군도 남쪽에 들어와 작전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심유경은 약속대로 11월 14일에 돌아와서 고니시를 만나고 임의로 화의를 성립시키려 하였다.

1차 원병에 실패한 명나라는 화전양론의 의논끝에 파병으로 기울어져, 간쑤성(甘肅省) 영하(寧下)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복귀한 이여송(李如松)을 다시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 삼아 2차 원병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 해 12월에 이여송은 4만 3000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부총병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 부총병 이여백(李如栢 : 이여송의 아우)을 중협대장(中協大將),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군의 제2차 원병이 압록강을 건너기에 앞서 조선에서는 임진년 10월 재정비된 관군과 휴정이 이끄는 의승군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11월에는 의승군 단독으로 평양성을 진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심유경이 화의차 적진에 있으니 그가 귀환하는 것을 기다려 관군과 합세하여 진병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으로 때를 잃고 말았다.

그 뒤 이여송의 원병이 압록강을 건너서 다음해인 1593년 1월에 평양 근방에 이르렀다. 이에 순변사 이일과 별장 김응서가 관군을 이끌고 합세했고, 휴정 휘하의 의승군 수 천여 명도 이에 합세하여 28일 평양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조명 연합군이 칠성(七星)·보통(普通)·함구(含毬)의 세 문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니 고니시 등은 감당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내성(內城)에 불을 지르고 그 길로 성을 빠져나와 대동강의 얼음을 밟고 패주하였다. 이때 휴정이 이끄는 의승군도 모란봉 격전에서 많은 적을 참획하여 평양 수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고니시는 주야로 속행하여 10일 배천에 당도하였다. 황해도 해주를 근거로 했던 구로다는 고니시를 먼저 후퇴하게 하고 자신도 군사를 거두어 개성으로 철수하였다.

좌의정 유성룡은 황해도방어사 이시언(李時彦)과 김경로(金敬老)를 시켜 관군을 이끌고 고니시군의 퇴로를 끊어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도 그 길로 바로 남진하여 개성에 육박해왔다. 그러자 여기를 지키고 있던 고바야가와는 함께 머무르던 구로다와 같이 서울로 퇴각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대결하지도 않고 계속 퇴각하자 이여송은 적을 경시하고 바로 그 뒤를 따라 서울로 향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일본 진영에서는 고바야가와 등으로 하여금 서울 북쪽 40리 지점인 벽제관(碧蹄館) 남쪽 여석령(礪石嶺 : 속칭 숫돌고개)에다 정예병을 매복하게 하고 명나라 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급습하였다.

이곳에서 대패한 이여송은 기세가 꺾여 더이상 진격을 못하고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조선측에서 재차 공격을 주장했으나 이여송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함경도에 있는 가토의 군이 양덕·맹산을 넘어 평양을 기습한다는 유언(流言)이 있자, 이여송은 부총병 왕필적(王必迪)을 개성에 머무르게 하고, 조선 제장(諸將)에게도 임진강 이북에 포진하도록 명한 다음 다시 평양으로 퇴진하였다.

한편, 함경도 방면에 침입한 가토는 명군의 내원으로 평양성이 수복되고 고니시 등이 서울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래서 퇴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하여 즉시 철군을 서둘러 서울로 퇴진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평양성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졌으나 여석령 전투(일명 벽제관싸움)에서 승리하여 회복세에 있었다. 이때 마침 전라감사 권율(權慄)이 명군과 함께 도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진하던 중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이르러 배수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2월 12일 도성에 머무르던 일본 대군이 일시에 공격을 해왔다.

권율과 의승장 처영 등은 휘하군을 지휘하여 격전 끝에 그들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지난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도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삼대첩(三大捷)의 하나이다.

그동안 명군은 다시 심유경을 서울의 일본 진영에 보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다. 일본군도 각지의 의병 봉기와 명군의 진주, 보급 곤란, 악역(惡疫)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따라 4월 18일 도성에서 철수하여 강원·충청도에 주둔한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켰다. 그리고 서생포(西生浦)에서 웅천(熊川)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의의 진행 도중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은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어 성안에 있던 수만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임진왜란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한편, 심유경이 일본군과 같이 도요토미의 본영에 들어간 뒤 2, 3년간 사신이 왕래했으나 화의는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하여 ①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② 감합인(勘合印 : 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③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④ 조선 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삼을 것을 요구했고, 붙들려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명나라의 허가를 얻었다. 이에 1596년 명나라의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金印)을 전하였다.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뒤 다시 조선 침입을 꾀하였다. 심유경은 본국에 돌아가 국가를 기만한 죄로 처단되고, 이로써 오랫동안 결말을 보지 못하던 화의마저 끝내 결렬되었다.

정유재란

1597년 화의 결렬로 일본의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렸다. 먼저 가토·고니시·소 등을 장수로 한 1만 4500명의 군사를 선봉으로 정월 15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가토는 울산·죽도의 구루(舊壘)를 수축하고 부산의 수병(戍兵)을 합하여 잠시 기장에 주둔했다가 이어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들어가 둔진하였다.

고니시는 앞서 지난해 말에 두모포(豆毛浦)로 상륙하여 2월에 부산의 원영(原營)을 수복하고 영주할 계획을 서둘렀다. 이때 조선에서는 한산도를 통제영(統制營)으로 삼아 남해안을 지켜오던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고, 그를 대신하여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의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었다.

3월 중순부터는 일본의 대군이 속속 바다를 건너왔다. 대부분 구로다·모리(毛利秀元)·시마즈·나베시마(鍋島直茂)·하시수가(蜂須賀家政)·우키다·고바야가와·아사노(淺野長慶) 등 임진왜란 당시에 침입해왔던 제장들로서 총병력 14만 1500명이었다.

이밖에 수군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도토·와키사카·가토(加藤嘉明) 등이 지휘하였다. 일본군은 먼저 동래·기장·울산 등 각지를 점거하고, 웅천·김해·진주·사천·곤양 등지를 왕래하였다.

명나라에서는 병부상서 형개(邢玠)를 총독, 첨지도어사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재차 원병을 보냈다.

명군은 압록강을 건너 양호는 평양에 머무르고, 마귀가 먼저 서울에 들어와 6월에 제장을 나누어 부총병 양원은 남원, 유격 모국기(茅國器)는 성주, 유격 진우충(陳愚衷)은 전주,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충주를 각각 기지로 삼게했다.

조선은 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이덕형·김수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두어 8도에 모병하였다. 또 명군의 계획에 따라 장관(將官)을 분파하여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 방어사 권응수를 경주에 주둔시켜 조령로(鳥嶺路)를 막고, 우병사 김응서는 의령에 주둔하게 하여 부산로(釜山路)를 막으며, 그밖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申浩), 남원부사 임현(任鉉) 등은 모두 양원을 따라 남원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 해 4월 일본 수군은 조선 근해로 들어왔다. 조선 수군이 이를 중도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제로 물러났고, 일본 수군은 겨우 부산으로 입항하였다.

그 뒤 통제사 원균은 미숙한 전술과 무지한 싸움으로 일본 수륙군의 전략에 말려 패사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등도 전사하니 이순신이 쌓아놓은 한산도의 수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거제 해전의 소식을 듣고, 울산 죽도성에서 부장(部將) 회의를 열어 육군은 호남·호서 지역을 석권할 것과 수군은 전라 해안을 침범할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7월 28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우키다를 대장으로 한 1대(隊) 5만 병력이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수륙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모리를 대장으로 한 1대 역시 5만의 군사로 초계·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하고, 그 일부는 모국기의 본거인 성주로 우회하여 역시 안의·전주 방면으로 향하였다.

당시 조명 연합군이 전력을 기울인 곳은 남원이었다. 남원으로 향한 일본군은 8월 14일부터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다. 격전 끝에 마침내 16일에 남원이 함락되어, 병사 이복남 등 많은 전사자를 내고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은 50기(騎)로서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그리고 2,000 병력으로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의 유격 진우충도 따라서 성을 버리고 패주하여 일본군은 전주를 무혈 점령하였다.

한편, 전주로 향하던 모리의 군은 8월 안음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던 안음현감 곽준(郭) 등의 치열한 반격을 받았다. 그러나 산성은 하루 만에 함락되고 모리 휘하의 가토군은 전주로 들어가 우키다 휘하의 고니시군과 합류하였다.

이에 서울에서는 도성민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조신 가운데는 왕의 피란을 주장하는 건의까지 나오게되었다. 그리하여 남쪽에서 퇴각한 명군이 한강에서 서울을 지켰으며, 경리 양호는 평양에서 급히 서울로 와서 일본군의 북침 저지를 지휘하게 되었다.

전주에서 합류한 일본군 가운데 모리·가토군은 전주·공주를 거쳐 전의·진천에 이르고, 다시 그 일부인 구로다군은 직산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양호는 부총병 해생(解生)·우백영(牛白英) 등을 남쪽으로 나가게 했는데, 마침 9월 5일 여명에 직산 북방 소사평(素沙坪)에서 구로다군과 충돌하여 크게 싸워 일본군의 북상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또 원균이 패사한 뒤 다시 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이 소사평의 대첩이 있은 지 10일이 지난 9월 16일 명량(鳴梁)에서 대첩을 하여 일본군의 서진(西進)도 봉쇄하였다.

진로를 봉쇄당한 일본군은 겨울이 닥쳐온다는 이유로 10월부터 남해안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수만의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00리에 성을 쌓고 나누어 주둔하였다.

울산에는 가토와 나베시마군이, 양산에는 우키다와 모리군이, 사천에는 시마즈군이, 남해에는 다치바나(立花宗茂) 등의 군이, 순천에는 고니시군이 각각 주둔하였다.

이 때 명군은 남원 함락 이후 적극 전세를 펴서 수륙 원병이 다수 내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 또한 지난해 명량대첩 이후 본영 우수영이 황폐하여 각지로 왕복하던 중 1598년 2월 고금도로 진을 옮겨 전투를 하면서, 장기 작전으로 병영을 세우고 난민을 이주시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수개월만에 민가가 수만 호에 이르게 되어 한산도 당시를 능가하였다.

이 해 7월 명나라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의 수군 5,000이 고금도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명군은 한때 그 위세를 믿고 방자하여 사단(事端)을 자주 일으켰다. 그러나 이순신이 강온으로 잘 대처하여 명군의 군기를 감독하는 권한을 얻고, 조명 수군의 총지휘권도 실질상으로 양보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 양호가 파직되고 그의 자리에 천진순무(天津巡撫) 만세덕(萬世德)이 임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명군은 일대공세를 취하기로 하고 4로(路)로 나누어 일제히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마귀는 2만 4000의 군사를 이끌고 동로(東路)를 따라 가토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평안·강원·경상좌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동일원(董一元)은 1만 3500의 군사로 중로(中路)를 따라 시마즈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경기·황해·경상우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유정(劉珽)은 1만 3600의 군사로 서로(西路)를 택하여 고니시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충청·전라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진린은 수군 1만 3300으로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해상을 담당하게 했으나 별다른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8월 18일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였다. 일본군은 상(喪)을 감추고 회군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철수를 시작하여 형세는 일변하였다.

명나라 제독 유정은 9월 중순 순천의 고니시군이 철수하여 귀환한다는 보고를 받고 9월 20일부터 육상에서 이를 공략하고, 이순신과 진린은 수상에서 봉쇄하여, 퇴로를 얻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일본군과 수일간 격전을 치루었다.

그러나 그 뒤 곤경에 처한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은 유정은 10월 16일에 군사를 철수시켜 최후의 기회인 수륙 협공 작전이 수포로 돌아갔다. 진린 또한 고니시에게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 주려했으나 이순신의 설복으로 뜻을 거두었다.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가 병선 500여 척을 거느리고 11월 18일 야조(夜潮)를 타고 남해 노량으로 습격해 왔다. 삼경(三更)에 이순신은 분향을 하며 하늘에 맹세하고, 명군과 함께 호응하여 사경(四更)에 노량에서 적의 선대를 맞아 적함대의 절반을 분파하였다.

적은 견디지 못하여 남해 관음포(觀音浦)로 빠졌으나, 퇴로가 막혀 다시 나오는 것을 이순신이 직접 적진에 뛰어들어 독전하였다. 이 와중에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고, 그의 유명을 받은 조카 완(莞)이 대신 지휘하여 적함 200여 척을 분파하고 무수한 적을 무찔렀다.

이에 시마즈 등은 50여 척을 건져 탈주했고 고니시는 격전중에 묘도(猫島)로 몰래 빠져나갔으며, 유정은 순천으로, 진린은 남해로 돌아갔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죽고 일본의 국내 사정이 불안하여 적군이 급히 철수하는 줄은 얼마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7년간에 걸친 조일전쟁은 끝났다. 이때 좌의정 이덕형과 황신(黃愼) 등은 소를 올려 명군과 함께 대마도를 칠 것을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99년에 명군도 철수하였다. 1월에 유정·진린·마귀·동일원 등이 진영을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오고, 4월에는 총독 형개가 이들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경리 만세덕, 도독동지(都督同知) 이승훈(李承勳), 산동안찰부사(山東按察副使) 두잠(杜潛) 등이 군사 2만 4000으로 서울에 잠시 주둔하다가 다음해 9월에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 7년 동안의 중요전투 상황을 보면 앞의 [표]와 같다.

[표] 임진왜란 중의 대소전투

연월일\구분

전 투 지

장 수

전 투 결 과

조선(명)
1592. 4.14.

부산

鄭撥

少西行長

부산 함락, 정발 전사

1592. 4.15.

동래

宋象賢

少西行長

동래 함락, 송상현 전사

1592. 4.18.∼19.

밀양

朴晉

少西行長

밀양성 함락

1592. 4.19.

김해

徐禮元

黑田長政

김해성 함락

1592. 4.21.

경주

朴毅長

加藤淸正

경주성 함락

1592. 4.24.

상주

李鎰

少西行長

이일 패주

1592. 4.26.

문경

申吉元

少西行長

신길원 패주

1592. 4.26.

탄금대

申砬

少西行長

신립 전사

1592. 4.23.∼28.

거창 신창 추풍령

趙儆

黑田長政

왜군 다수 사살

1592. 5. 2.

한강

金命元

加藤淸正

한강방어 실패

1592. 5. 7.

옥포

李舜臣

藤堂高虎

왜선 30척 격파

1592. 5. 7.

합포

李舜臣

脇坂安治

왜선 5척 격파 왜군 패주

1592. 5. 8.

적진포

李舜臣

脇坂安治

왜선 11척 격파

1592. 5.18.

양주

申恪

?

조선국 육전 첫승리

1592. 5.18.

임진강

金命元

加藤淸正

임진강방어 실패

1592. 5.22.

여강

元豪

毛利吉成

왜군 50명 사살

1592. 5.29.

사천

李舜臣

脇坂安治

왜선 12척 격파

1592. 6. 2.

당포

李舜臣

?

왜선 20척 격파

1592. 6. 5.

당항포

李舜臣

?

왜선 26척 격파

1592. 6. 5.

용인

李洸

脇坂安治

삼도의 근왕병이 패전

1592. 6. 5.

회양

金鍊光

毛利吉成

조선군 패전

1592. 6. 6.

무계

金沔

村上景親

왜군 다수 살상

1592. 6. 7.

율포

李舜臣

來島通久

왜선 1척 격파

1592. 6.12.

철령

李渾

毛利吉成

조선군 퇴각

1592. 6.15.

예천부근

禹伏龍

吉川廣家

왜군 격퇴

1592. 6.18.

평양

尹斗壽

少西行長

평양 함락

1592. 6.19.

금화

元豪

島津忠豊

원호 전사

1592. 6.25.

운암

梁大樸

?

왜군 격파

1592. 6월말경

마진

孫仁甲

毛利輝元

왜군격파, 손인갑 전사

1592. 7. 8.

웅치

李福男

小早川隆景部長

조선군 패전

1592. 7. 8.

이치

權慄

小早川隆景部長

왜군 격퇴

1592. 7. 8.

한산도

李舜臣

脇坂安治

왜선 73척 격파

1592. 7. 9.

금산

高敬命

小早川隆景部長

고경명 전사

1592. 7.10.

안골포

李舜臣

九鬼嘉隆

왜선 40척 격파

1592. 7. 1.일경

우척현

金沔

小早川隆景部長

왜군 격파

1592. 7.17.

평양

(祖承訓)

少西行長

조승훈 패주

1592. 7.18.

해정창

翰克誠

加藤淸正

조선군 패전

1592. 7.27.

영천

權應銖

福島正則

영천 수복

1592. 7월말경

의령

郭再祐

小早川隆景部長

정암진에서 왜군 격파

1592. 7월말경

현풍

郭再祐

羽柴秀勝휘하부대

왜군 격파

1592. 7월말경

영산

郭再祐

羽柴秀勝휘하부대

왜군 격파

1592. 7월말경

안성

洪季男

福島正則

왜군 격파

1592. 8. 1.

평양

金命元

少西行長

조선군 패전

1592. 8. 1.

청주

趙善 靈圭

蜂須賀家政의 일부병력

청주 수복

1592. 8. 2.

경주노곡

金虎

石田康勝의 部兵

왜군 격파

1592. 8. 3.

거창부근

金沔

小早川隆景의 部將

왜군 격추

1592. 8.18.

금산

趙憲 靈圭

小早川隆景部長

조헌 전사

1592. 8.20.

경주

朴晉

多川內記

조선군 패전

1592. 8.21.

성주

金沔

桂元綱

조선군 퇴각

1592. 8.22.

봉화

柳宗介

毛利吉成

조선군 패전

1592. 8.25.

영원산

金悌甲

毛利吉成

조선군 패전

1592. 8.28.∼9. 2.

연안성

李延

黑田長政

연안성 대첩

1592. 9. 1.

부산

李舜臣

?

왜병의 해상활동제지

1592. 9.11.

성주

金沔

桂元綱

왜군 격파

1592. 9.16.

경성

鄭文孚

加藤右馬允

왜군 격추

1592. 9.20.∼30.

인동부근

張士珍

禾下重賢

왜군 격퇴

1592. 9.27.

노현 창원

柳崇仁

木村重玆

조선군 패퇴

1592.10. 6.

진주

金時敏

加藤光泰

진주대첩

1592.10.18.

삭녕

沈岱

伊東祐兵

조선군 패전

1592.10.30.

길주 장평

鄭文孚

加藤右馬允

왜군 격파

1592.10. 9.∼11.10.

함흥 부근

成允文

鍋島直茂

왜군 격파

1592.11.12.

이원

李聖任

?

조선군 패전

1592.11. ?.

상주용화동

鄭起龍

?

왜군 격파

1592.12. ?.

중화

林仲樑

少西行長의 部將

조선군 패전

1592.12.10.

길주쌍포

鄭文孚

加藤右馬允

왜군 격파

1592.12. 7.∼14.

성주

金沔

?

왜군 격파

1592.12월말경

수원독산성

權慄

宇喜多家部長

조선군 승리

1592. ?. ?.

함창

鄭起龍

?

왜군 격파

1593. 1. 8.

평양

(李如松) 金命元

少西行長

평양 탈환

1593. 1.19.

길주성 남문외

元忠恕

加藤淸正의 부장

왜군에게 피해를 줌.

1593. 1.23.

단천

具滉

加藤與左

왜군 격파

1593. 1.27.

벽제관 부근

(李如松)

宇喜多秀家

조명군 패전

1593. 1.28.

백탑교

鄭文孚

加藤右馬允

왜군 격파

1593. 1.30.

죽산

邊以中

福島正則

왜군에게 피해를 줌.

1593. 2.12.

행주

權慄

宇喜多秀家

행주대첩

1593. 2.30.

상주

黃進

福島正則

왜군 격파

1593. 3.25.∼27.

노원평 우관동

李時彦

宇喜多秀家 휘하군

왜군 격파

1593. 8. 6.

경주

(王必迪) 高彦伯

加藤淸正 毛利吉成

왜군 격파

1593. 8.29.

함안 웅천

安民寧 宣居怡

鍋島直茂

왜군 격파

1593.11. ?.

진주 영선

李$

少西行長

쌍방 피해

1593.12. 2.

안강

高彦伯

加藤淸正

왜군 격파

1594. 3. 4.

당항포

李舜臣

脇坂安治

왜군 격파

1594. 9.29.

장문포

李舜臣

福島正則

왜군 격파

1594.10. 1.

영등포

李舜臣

島津義弘

왜군 격파

1594.10. 4.

장문포

李舜臣

福島正則

쌍방간에 전과 없음.

1597. 7.15.

칠천량

元均

島津忠豊

조선군 패전

1597. 8.15.∼16.

고령

鄭起龍

小早川秀秋

왜군 격파

1597. 8.16.

남원

(楊元)

宇喜多秀家

남원 함락

1597. 8.17.

황석산성


加藤淸正

황석산성 함락

1597. 9. 7.

소사

(解生)

黑田長政 毛利秀元

왜군 격파

1597. 9.14.

금구

元愼

宇喜多秀家

왜군 격파

1597. 9.16.

명량

李舜臣

藤堂高虎

왜선 30척 격파

1597. 9.20.

보은

鄭起龍

加藤淸正

왜군 격파

1593.12.18.

광양

李光岳

少西行長

왜군 격파

1598. 1. ?.

도산성

(麻貴)

加藤淸正

마귀 패주

1598. 4. 8.

무주

李光岳 (李寧)

島津義弘

왜군 격파

난중의 사회상

왜란 중에 조선 군민의 가장 큰 괴로움은 식량난이었다. 명나라 원군이 조선땅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식량난이나 군량미 부족 보다도 왜군과 맞서 싸울 전투 병력이 더 절실히 요망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원군이 들어온 뒤에는 훈련된 병력의 부족 보다도 군량미의 부족이 더 무겁고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명나라 군사가 내원할 때는 병력만을 보낸 것이 아니라 무기 등 군수 물자와 군량미도 함께 보내왔다. 그런데 군량미는 명군에 의해 그들의 진영까지 운반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만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명군의 급식을 위한 조선측의 군량미 조달은 적기에 공급되기가 어려웠다.

군량미의 수송은 육로와 해로 두 길을 택하였다. 명군이 내원한 이래 1594년(선조 27) 8월 일단 본국으로 철수하기까지의 기간은 주로 육로로 수송하였다.

이를 위해 싸움에 나갈 수 없는 사람이나 부녀자 및 각처의 의병이나 의승군을 동원하였다. 또 수복 지역의 소나 말은 물론, 왕의 호위병과 동궁의 행차를 따르는 군인 중 말을 소유한 자도 차출하여 군량미 운송에 나서게 하였다.

해로는 정유재란으로 명군이 두번째 내원하면서부터 많이 이용하였다. 정부는 이를 위하여 각처에 산재한 선척을 징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궁가(宮家)나 내수사(內需司)의 배를 빙자하여 거절하는 예가 많아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민력이 다하여 전선을 만들 수 없는 형편에서 운량선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의주에 쌓아둔 명나라 군량미를 육로나 해로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많은 난관이 있었다. 운송 도중에 많은 양이 소모되었고, 인력이 부족하고 수송 수단도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명나라에서 보낸 양곡으로 명군을 급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족량을 국내에서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 정부는 국내 양곡을 조선 관군 보다는 명군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하였다. 그러나 국내 양곡을 조달하는 데는 애로가 컸으며, 민간인의 희생이 수반되었다. 군량을 충당할 수 있는 길은 전세와 곡물작미·노비신공작미·모속(募粟)·무속(貿粟)·둔전소출 등이었다. 이 중에서 정부의 필요 경비를 제한 나머지는 모두 군량으로 충당되었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전세는 경작할 종자가 없는데다가 전쟁으로 인구 감소에 따른 경지 면적의 감축으로 격감되었다. 납속 사목(納粟事目)에 의한 모곡(募穀)은 신분 상승의 길을 열어주기는 했으나 모속 관료의 비행으로 관(官)으로 납부되는 양은 많지 않았다.

난중의 민중의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 인상살식(人相殺食 :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음)의 끔찍한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왜란 전에 170만 결이던 전국의 경지 면적이 54만 결로 감소된 것도 노동력의 감소에 큰 원인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 1594년 송유진(宋儒眞)의 난과 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가장 두드러진다.

왜란 초기 산발적인 소요는 신분 해방을 위해 일어났다고는 해도 불만을 느껴온 지배층에 대한 우발적이며 비조직적인 행동이었다. 또 이러한 행위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왜적의 세력권 안에서 발생했고 직접 왕정의 전복을 겨냥한 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송유진·이몽학의 난은 규모나 조직 면에서 양상이 판이하였다. 주모자들은 정면으로 현 왕권을 타도하고 새 국가를 수립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또한 두 반란은 왜군이 화의를 조건으로 이미 남쪽으로 철수해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충청도 지역이 중심이었다.

이런 점에서 임란 초기 감사나 수령들의 수탈이나 혹사에 불만을 품었던 민중이나, 왜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바라만 보다가 흩어지는 수신(帥臣)들을 증오한 농민들의 이반과는 성격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이들 두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사회에 던진 충격은 대단히 컸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지배층에게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가 군공이나 납속을 통하여 주어지기는 했으나 난국 타개가 목적이었으므로 그 문이 넓지는 않았다.

임진란 초기에 의병 활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대부분 지배층이어서 그 밑의 의병들은 전공이 표면에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나마 의병이 해체되자 한가닥 신분 상승의 기회마저 끊어졌다.

납속의 길도 쉽지는 않았다. 정부에서 발표한 납속 사목은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아사 상태에 처한 양민들로서는 납속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반란의 주도자가 의병 활동하던 사람이 아니면 납속의 임무를 띠고 활약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많은 시사를 준다고 하겠다.

전쟁에는 많은 인명의 손실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는 전란을 통해 많은 것을 터득하고 배우게 된다.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란을 통하여 많은 것을 깨달은 피지배층의 가담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편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에 끌려들었다가 죽음을 당한 이산겸(李山謙)과 김덕령(金德齡)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당시 사회적인 추세로 보아 중앙 정부가 반적의 입을 빙자해서 고의적으로 만든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이산겸과 김덕령은 끝까지 의병 활동을 하여 중망이 높고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이들을 처형한 것은 그들이 의병 세력의 기반을 믿고 혹 동요되는 민심을 이용하여 반란이라도 획책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취해진 조처였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결과

전후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일본 등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

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전야(田野)가 황폐화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군공이나 납속으로 서얼허통(庶孽許通), 향리(鄕吏)의 동반직(東班職)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져갔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한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한편, 병제(兵制)의 재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 紀効新書≫를 얻어서 절강 무예(浙江武藝)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였다.

1594년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삼수병(三手兵)을 두고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속오군(束伍軍)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여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서는 종래의 주무기인 궁시창검(弓矢槍劍)·총통(銃筒)·완구(碗口)·화전(火箭) 외에 난중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가 발명되었다. 또 항왜(降倭)로부터 조총 제조와 염초 자취술을 익혀 실전에 활용했으며, 불랑기(佛狼機)를 모조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난을 통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었고 자아 반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의 원군 파견으로 숭명 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또, 전란중에 명군에 의하여 관우(關羽)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난 뒤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關羽廟)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무리한 전쟁을 오래 끌었던 관계로 국민 생활이 피폐해졌고, 침략군 중에는 기아를 못이겨 조선에 투항한 자가 많았다. 또한 일본 국내의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도쿠가와(德川家康)가 국내 정복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또, 조선에서 많은 백성을 포로로 끌고가서 강제로 경작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기도 했다. 조선인 포로 가운데, 도공(陶工)들의 도자기 제조로 일본 도자기업에 큰 발전을 보았으며,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 이념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활자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고, 특히 ≪퇴계집≫ 등 중요한 전적(典籍)을 가져가서 일본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킨 탓에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의 여진인에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명청 교체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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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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