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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자전거의 역사 사진 좀 찾아 주세요 ㅠ
tl**** 조회수 8,998 작성일2003.11.22
1816
조셉 니스포르니에프스
프랑스
셀레리페르

1818
칼폰 드라이스
독일
드라이제 라우프마이네

1839
맥밀란
영국
리어드라이븐 바이시클

1873
로손
영국
세이프티바이시클
특징 : 안장이 낮음

1885
스탈레이
영국
로버 세이프티 바이시클
특징: 다이아몬드형 프레임

1886
던롭
영국
Pneumatic
Tire 공기타이어


위에 적어 놓은 것에 해당하는 사진을 찾아야 하는데

찾지를 못하겠어요 ㅠ

제발 찾아 주세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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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속자전거
태양신
IT/인터넷업 번역, 통역 64위, 영어작문, 자전거 77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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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레스포랜드에 나오는 자전거의 역사를 퍼왔습니다.

 

 

자전거의 역사

<!-- 안내부터 -->

■ 자전거의 역사는 정확한 사료나 고증할 만한 실물이 없어 그 원조가 정확하지는 않다. 자전거의 발명은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들이 서로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어떤 형태의 것을 최초의 자전거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다. 이륜차가 자력으로 달린 것을 자전거의 기원으로 본다면 자전거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1790년 프랑스의 콩트 드 시브락(Conte de Sivrac)이라고 알려져 있다.2개의 나무 바퀴를 이용해서 달릴 수 있는 이것은 바퀴전후로 배열하였던 점이 훌륭한 발상이었다. 이 때의 2륜차는 '빨리 달릴 수 있는 기계', 셀레리페르(Celerifere)로불리게  되었다.


1818년 독일의 칼 바론 폰 드라이스(Karl Baronvon Drais)가 발명한 자전거(드라이제, Draise)도 현재의 자전거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것의 최고 속도는 15km였다고 한다. 두 나무 바퀴 사이에 안장을 올려놓고 핸들도 패달도 없이 좌우발로 번갈아 땅을 차며 나아가는 이 주행기는 비탈길을 달려 나가는데 사용되었다.이어서 앞바퀴는 엄청나게 크고 뒷바퀴는 작은 [뼈흔들기] 라는 별명을 가진 벨토시페드 자전거가 등장했고, 1885년 상업적으로 최초의 성공을 거둔 안전자전거 로버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 자전거는 앞뒤 바퀴의 크기가 똑같았고 체인 구동식으로 당시 자전거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말과 달라 지치지도 않고 먹이도 필요하지 않은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자 자전거 애호가들은 자전거를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도로개선, 도로가 표시된 지도, 도로표지, 도로조건에 관한 보도와 호텔, 여관 목록 등을 요구하기도 했고, 법정으로부터 자전거도 마차 못지않게 대로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판결을 받아내 기도했다.

집안에 갇혀있던 여자들도 코르셋을 벋어던지고 짧은 스커트, 짧은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탔고, 이 블루머걸들은 의상변화 이상의 것을 요구, 여성의 투표권을 주장하기도 했다.그 후 자전거는 실용적이면서도 효과적인 교통 수단으로 인정되어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자전거에 이르게 되었다.이 시대에도 경제적인 면에서 탁월한 면을 발휘한 저전거의 위력이 에너지 절약시대의 절실함을 느끼는 요즘 자전거타기의 생활화가 필요한 시대이다

 

연대

발명자

나라

1790

콩트 드 시브락

프랑스

셀레리페르

1816

조셉 니스포르니에프스

프랑스

셀레리페르

1818

칼폰 드라이스

독일

드라이제 라우프마이네

1839

맥밀란

영국

리어드라이븐 바이시클

1861

피에르 ,에르네스트 미쇼

프랑스

벨로시페드

1869

앙드레 길메메이에

프랑스

1869

레이놀드

영국

페니파딩

앞바퀴 큼

1873

로손

영국

세이프티바이시클

안장이 낮음

1885

스탈레이

영국

로버 세이프티 바이시클

다이아몬드형 프레임

1886

던롭

영국

Pneumatic

Tire 공기타이어

 

■ MTB의 역사

MTB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 시작은 1970년대 초엽의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에 MTB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산 속의 FIRE ROAD라 불리던 황량하고 좁은 소방도로를 실용자전거를 개조하여 타고 내려오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너무나 거친 라이딩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그들의 자랑스런 자전거는 탈 때마다 수리와 개조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한 개조를 거듭하여 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자전거가 생겨났다. 이것이 후에 MTB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기 시작하게 되리라는 것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 젊은이들 가운데 후에 자신의 브랜드로 MTB를 온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될 게리 피셔와 톰 리치가 있었던 것이다.그 당시, 피셔가 만들었던 엣셀시오X를 개조한 자전거가 바로 오늘날의 MTB의 뿌리라 전해진다. 그리고 후에 마운틴바이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인 것도피셔였던 것이다.

 

77년에는 프레임 제작자였던 죠 블리즈가 최초의 본격적인 MTB(블리져)를 완성한다. 이 블리져가 오늘날 MTB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이렇게 탄생된 MTB는 FITNESS(건강관리 스포츠)의 붐을 타고 80년대에는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다.81년에는 SPECIALIZED가 MTB의 대량 생산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개시, 국내에서는 84년 삼천리자전거가 최초로 극대 타이어를 사용한 (크루저)라는 국산 MTB를 발표 한다. 그 후 MTB는 국내에서도 순조롭게 시장을 확대해 마침내 95년에는 MTB의 시장점유율이 자전거 전체시장의 50%를 상회하기에 이른다 .물론 MTB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피셔나 리치도 자신들의 이름을 딴 MTB를 발표하였으며 그들의 MTB는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동경의 존재가 되었다. 그 후 MTB는 해마다 발전을 거듭해왔으며 현재에도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된다.

 

여기에는 국내 MTB 생산업체인 삼천리자전거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매년 새로운 모델이 발표될 때마다 혁신적인 기능을 갖춘 자전거가 등장하는 것이다.자전거 프레임 소재의 발달을 보면 보편적인 일반스틸에서 고장력 합금강 (HI-TEN강)을 사용하여 프레임의 중량을 감소(약15%)함과 동시에 자전거 프레임 소재의 발달을 보면자전거 프레임 소재의 발달을 보면 보편적인 일반스틸에서 고장력 합금강(HI-TEN강)을 사용하여 프레임의 중량을 감소(약15%)함과 동시에 강한 강도를 갖추었고 소재의 발달로 크롬-몰리브덴강, 알루미늄 합금강, 티타늄강, C.F.R.P 등으로 점차 소재사용을 확산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는 MTB 차체의 발전과 더불어 그것을 즐기기 위한 소프트 부분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미국에서는 70년대 후반 이후 빈번하게 투어링 이벤트가 개최되고 있고 우리 나라에서도 90년대 초반부터 투어링이나 각종 대회가 열리게 되면서 단숨에 자연 속에서의 다이내믹한 라이딩에 매료된 많은 자전거 매니아들의 사랑을 받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자전거선수 엄복동

우리 나라에 자전거 경주가 처음 있었던 것은 1906년의 일이다. 자전거 경주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권원식과 일본인 요시카와(吉川)였다. 서울운동장 앞 훈련원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이 자전거 경주는 사람들에게 한낱 곡마단의 곡예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그 후에도 가끔 경주가 있었는데, 자전거를 탈 줄만 알면 출전 자격을 주었으니 그 경주야말로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그러다가 1913년 4월 용산 연병장에서 대규모의 자전거 경주대회가 개최되었다. 일본인 자전거 상인들과 친일계 상인들이 주최한 대회였지만, 많은 관중이 모였고 그 후로 자전거 경주가 볼 만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엄복동 선수는 1920년 '경성시민 운동대회' 자전거 경주에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의 자전거 선수는 거의가 자전거 점포 직원들이었다. 엄복동 선수도 평택 출신으로 평택-서울 간을 다니며 자전거 행상을 했던 것이다.

후일 '엄복동이냐, 조수만이냐' 하는 노래까지 유행하였는데, 이 조수만 선수는 이류 선수권에서 2등으로 입상한 사람이다. 당시에는 자전거 선수를 일류(一流), 이류(二流), 삼류(三流)로 구분하여 등급을 정하였다. 한편 조수만 선수는 청파동에서 자전거 점포를 운영하며, 후일 후배양성에 최선을 다했다. 어떤 대회에서는 일본인 심판들의 부당한 판정으로 큰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일본인 선수를 제치고 엄복동 선수가 독주하게 되자, 일본인 심판들은 엄복동 선수에게 우승을 주지 않기 위해 일몰(日沒)을 구실로 경주를 중단시켰던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엄복동 선수는 격분한 나머지 우승기를 꺾어 버렸다. 칼자루를 쥔 일본인들은 엄복동 선수에게 몰매까지 가하여 한때 관중의 항거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 때 최고의 우승자에게는 우승기와 양복, 금메달을 수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후 엄복동 선수는 '조일 일류 선수권 대회' '조선 일류 선두 책임 경주 대회' '일류 20바퀴 경주' 등에서 연승함으로써 그를 추종할 선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전거 경주를 통해 조선 남아가 일본인들을 압도한 쾌거였던 것이다.

엄복동은 자전거 선수로서 어린아이들도 잘 알고 있는 영웅적 존재였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지방대회가 성행하였고 엄복동 선수가 그 대회에 출전한다는 소문만 들어도 관중이 모여들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엄복동 선수의 인기는 그가 48세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즉 1932년 4월 20일에 열린 '전조선 남녀 자전거 대회'(서울 개최) 1만미터 경주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자, 당시 신문들은 '비장 엄복동 선수 노익장' 이라며 대서 특필하였던 것이다. 그 후 엄복동 선수 외에도 괄목한 만한 성적을 거둔 훌륭한 선수들이 많았다. 한편 해방이 된 1945년에 자전거 경기연맹이 부활 발족되었다. 대한 자전거 연맹은 1948년에 국제 자전거 경기연맹에 가입을 신청, 1949년에 정식으로 승인을 얻고 국제회원이 되었다. 그 후 국제대회에도 참가하게 되었는데, 1948년 8월 14일에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14회 세계올림픽대회' 에 사상 처음으로 자전거 선수를 파견했으며, 1982년 7월에 이탈리아에서 거행된 '세계 자전거 주니어 선수권 대회' 에서는 조건행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 나라의 자전거 경주는 해방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괘도에 서게 되었다. 자전거는 원래 경주보다는 일상 생활에 더 가깝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러서는 자전거의 생활화에 대한 인식이 더욱 높아져 가고 있다.

Saint Nicholas Jr.


200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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