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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자전거변천사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0,890 작성일2003.03.10
옛날부터 지금까지 자전거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려주세요.
어떤모양의 자전거가 있었고 어떻게 쓰였는지요.
자료가 많을수록 좋아요.
내공이 많이 없어서 많이는 못걸겠네요
그래도 정성껏 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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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의 역사는 정확한 사료나 고증할 만한 실물이 없어 그 원조가 정확하지는 않

다. 자전거의 발명은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들이 서로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어떤 형태의 것을 최초의 자전거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다. 이륜차

가 자력으로 달린 것을 자전거의 기원으로 본다면 자전거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1790

년 프랑스의 콩트 드 시브락(Conte de Sivrac)이라고 알려져 있다.2개의 나무 바퀴를

이용해서 달릴 수 있는 이것은 바퀴전후로 배열하였던 점이 훌륭한 발상이었다. 이 때

의 2륜차는 '빨리 달릴 수 있는 기계', 셀레리페르(Celerifere)로

불리게 되었다.1818년 독일의 칼 바론 폰 드라이스(Karl Baronvon Drais)가 발명한

자전거(드라이제, Draise)도 현재의 자전거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것의 최고 속도는

15km였다고 한다. 두 나무 바퀴 사이에 안장을 올려놓고 핸들도 패달도 없이 좌우발

로 번갈아 땅을 차며 나아가는 이 주행기는 비탈길을 달려 나가는데 사용되었다.이어

서 앞바퀴는 엄청나게 크고 뒷바퀴는 작은 [뼈흔들기] 라는 별명을 가진 벨토시페드

자전거가 등장했고, 1885년 상업적으로 최초의 성공을 거둔 안전자전거 로버가 나타나

기에 이르렀다.

이 자전거는 앞뒤 바퀴의 크기가 똑같았고 체인 구동식으로 당시 자전거 붐을 일으키

기도 했다.말과 달라 지치지도 않고 먹이도 필요하지 않은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

이 점차 늘어나자 자전거 애호가들은 자전거를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도로개선, 도로

가 표시된 지도, 도로표지, 도로조건에 관한 보도와 호텔, 여관 목록 등을 요구하기

도 했고, 법정으로부터 자전거도 마차 못지않게 대로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판결을

받아내 기도했다.

집안에 갇혀있던 여자들도 코르셋을 벋어던지고 짧은 스커트, 짧은 바지를 입고 자전

거를 탔고, 이 블루머걸들은 의상변화 이상의 것을 요구, 여성의 투표권을 주장하기

도 했다.그 후 자전거는 실용적이면서도 효과적인 교통 수단으로 인정되어 발전을 거

듭하여 오늘날의 자전거에 이르게 되었다.이 시대에도 경제적인 면에서 탁월한 면을

발휘한 저전거의 위력이 에너지 절약시대의 절실함을 느끼는 요즘 자전거타기의 생활

화가 필요한 시대이다

★자전거 발달 변천사★

1790
콩트 드 시브락
프랑스
셀레리페르


1816
조셉 니스포르니에프스
프랑스
셀레리페르


1818
칼폰 드라이스
독일
드라이제 라우프마이네


1839
맥밀란
영국
리어드라이븐 바이시클


1861
피에르 ,에르네스트 미쇼
프랑스
벨로시페드


1869
앙드레 길메메이에
프랑스



1869
레이놀드
영국
페니파딩
앞바퀴 큼

1873
로손
영국
세이프티바이시클
안장이 낮음

1885
스탈레이
영국
로버 세이프티 바이시클
다이아몬드형 프레임

1886
던롭
영국
Pneumatic
Tire 공기타이어



★ MTB의 역사 MTB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 시작은 1970년대 초엽의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에 MTB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산 속의 FIRE ROAD라 불리던 황량하고 좁은 소방도로를 실용자전거를 개조하여 타고 내려오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너무나 거친 라이딩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그들의 자랑스런 자전거는 탈 때마다 수리와 개조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한 개조를 거듭하여 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자전거가 생겨났다. 이것이 후에 MTB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기 시작하게 되리라는 것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 젊은이들 가운데 후에 자신의 브랜드로 MTB를 온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될 게리 피셔와 톰 리치가 있었던 것이다.그 당시, 피셔가 만들었던 엣셀시오X를 개조한 자전거가 바로 오늘날의 MTB의 뿌리라 전해진다. 그리고 후에 마운틴바이크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인 것도피셔였던 것이다.
77년에는 프레임 제작자였던 죠 블리즈가 최초의 본격적인 MTB(블리져)를 완성한다. 이 블리져가 오늘날 MTB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이렇게 탄생된 MTB는 FITNESS(건강관리 스포츠)의 붐을 타고 80년대에는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다.81년에는 SPECIALIZED가 MTB의 대량 생산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개시, 국내에서는 84년 삼천리자전거가 최초로 극대 타이어를 사용한 (크루저)라는 국산 MTB를 발표 한다. 그 후 MTB는 국내에서도 순조롭게 시장을 확대해 마침내 95년에는 MTB의 시장점유율이 자전거 전체시장의 50%를 상회하기에 이른다 .물론 MTB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피셔나 리치도 자신들의 이름을 딴 MTB를 발표하였으며 그들의 MTB는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동경의 존재가 되었다. 그 후 MTB는 해마다 발전을 거듭해왔으며 현재에도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된다.
여기에는 국내 MTB 생산업체인 삼천리자전거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매년 새로운 모델이 발표될 때마다 혁신적인 기능을 갖춘 자전거가 등장하는 것이다.자전거 프레임 소재의 발달을 보면 보편적인 일반스틸에서 고장력 합금강 (HI-TEN강)을 사용하여 프레임의 중량을 감소(약15%)함과 동시에 자전거 프레임 소재의 발달을 보면자전거 프레임 소재의 발달을 보면 보편적인 일반스틸에서 고장력 합금강(HI-TEN강)을 사용하여 프레임의 중량을 감소(약15%)함과 동시에 강한 강도를 갖추었고 소재의 발달로 크롬-몰리브덴강, 알루미늄 합금강, 티타늄강, C.F.R.P 등으로 점차 소재사용을 확산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는 MTB 차체의 발전과 더불어 그것을 즐기기 위한 소프트 부분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미국에서는 70년대 후반 이후 빈번하게 투어링 이벤트가 개최되고 있고 우리 나라에서도 90년대 초반부터 투어링이나 각종 대회가 열리게 되면서 단숨에 자연 속에서의 다이내믹한 라이딩에 매료된 많은 자전거 매니아들의 사랑을 받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자전거선수 엄복동
우리 나라에 자전거 경주가 처음 있었던 것은 1906년의 일이다. 자전거 경주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권원식과 일본인 요시카와(吉川)였다. 서울운동장 앞 훈련원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이 자전거 경주는 사람들에게 한낱 곡마단의 곡예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그 후에도 가끔 경주가 있었는데, 자전거를 탈 줄만 알면 출전 자격을 주었으니 그 경주야말로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그러다가 1913년 4월 용산 연병장에서 대규모의 자전거 경주대회가 개최되었다. 일본인 자전거 상인들과 친일계 상인들이 주최한 대회였지만, 많은 관중이 모였고 그 후로 자전거 경주가 볼 만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엄복동 선수는 1920년 '경성시민 운동대회' 자전거 경주에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의 자전거 선수는 거의가 자전거 점포 직원들이었다. 엄복동 선수도 평택 출신으로 평택-서울 간을 다니며 자전거 행상을 했던 것이다.
후일 '엄복동이냐, 조수만이냐' 하는 노래까지 유행하였는데, 이 조수만 선수는 이류 선수권에서 2등으로 입상한 사람이다. 당시에는 자전거 선수를 일류(一流), 이류(二流), 삼류(三流)로 구분하여 등급을 정하였다. 한편 조수만 선수는 청파동에서 자전거 점포를 운영하며, 후일 후배양성에 최선을 다했다. 어떤 대회에서는 일본인 심판들의 부당한 판정으로 큰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일본인 선수를 제치고 엄복동 선수가 독주하게 되자, 일본인 심판들은 엄복동 선수에게 우승을 주지 않기 위해 일몰(日沒)을 구실로 경주를 중단시켰던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엄복동 선수는 격분한 나머지 우승기를 꺾어 버렸다. 칼자루를 쥔 일본인들은 엄복동 선수에게 몰매까지 가하여 한때 관중의 항거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 때 최고의 우승자에게는 우승기와 양복, 금메달을 수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후 엄복동 선수는 '조일 일류 선수권 대회' '조선 일류 선두 책임 경주 대회' '일류 20바퀴 경주' 등에서 연승함으로써 그를 추종할 선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전거 경주를 통해 조선 남아가 일본인들을 압도한 쾌거였던 것이다.
엄복동은 자전거 선수로서 어린아이들도 잘 알고 있는 영웅적 존재였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지방대회가 성행하였고 엄복동 선수가 그 대회에 출전한다는 소문만 들어도 관중이 모여들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엄복동 선수의 인기는 그가 48세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즉 1932년 4월 20일에 열린 '전조선 남녀 자전거 대회'(서울 개최) 1만미터 경주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자, 당시 신문들은 '비장 엄복동 선수 노익장' 이라며 대서 특필하였던 것이다. 그 후 엄복동 선수 외에도 괄목한 만한 성적을 거둔 훌륭한 선수들이 많았다. 한편 해방이 된 1945년에 자전거 경기연맹이 부활 발족되었다. 대한 자전거 연맹은 1948년에 국제 자전거 경기연맹에 가입을 신청, 1949년에 정식으로 승인을 얻고 국제회원이 되었다. 그 후 국제대회에도 참가하게 되었는데, 1948년 8월 14일에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14회 세계올림픽대회' 에 사상 처음으로 자전거 선수를 파견했으며, 1982년 7월에 이탈리아에서 거행된 '세계 자전거 주니어 선수권 대회' 에서는 조건행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 나라의 자전거 경주는 해방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괘도에 서게 되었다. 자전거는 원래 경주보다는 일상 생활에 더 가깝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러서는 자전거의 생활화에 대한 인식이 더욱 높아져 가고 있다.

자료:삼천리자전거

2003.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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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자전거는 없었었숩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마차가 없어지구..

자전거가 들어섰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름...책이 있지만 찾지가 귀찮음 =_= 내공받기 다틀림)

옛날에 자전거에는

폐달이 없었대요

그래서

발로 끌면서[?]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폐달이 생기면서

요즘 자전거 처럼 변한거죠 -_-~!

누가 발명했는지는 모르지만 참 좋은분잊 (왠 헛소리..?)

2003.03.10.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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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의 역사


최초의 두발자전거는 1818년 4월 6일 '소에르브룅 남작'이 발명해 파리에서 선보인 '드레지엔'이다. 이는 나무로 만들었으며 탄 사람이 발로 땅을 밀어서 움직였다. 조잡하고 볼품은 없었지만 방향조절이 가능했던 이 자전거는 그럭저럭 작동되었다. 이어 1839년 스코틀랜드 덤프리스셔의 대장장이 맥밀런이 4년간의 실험을 통해 완성한 사람의 힘으로 추진되는 자전거가 등장
했다. 맥밀런은 1842년에 이 차로 역마차와 경주해서 이겼다.

작동원리면에서 현대의 자전거와 같은 편리한 자전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프랑스인인 P.미쇼와 아들 E.미쇼이다. 독일의 뮌헨 에서는 이미 이 자전거를 모방해 사용했는데 1862년 '벨로시페드'알려진 이 자전거가 142대나 만들어졌다.

1868년 5월 31일 최초의 공식적인 자전거 경주가 생클루 공원에서 열려 영국인 '무어'가 우승했으며 1869년 11월에 열린 최초의 도로경주에서도 우승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자전거는 기술과 구조에서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말과 달리 지치지도 않고 먹이도 필요하지 않은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자 자전거 애호가들은 자전거를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도로개선, 도로가 표시된 지도, 도로표지 등을 요구하게 되었고 법원으로부터 자전거도 마차 못지않게 대로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집안에 갇혀있던 여자들도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짧은 스커트, 짧은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탔고 이 여성들이 의상변화 이상의 것을 요구해 여성의 투표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자전거 붐을 사그러들었다가 제 2차 세계대전 중 휘발유 부족으로 잠시 인기를 되찾은 이래 올림픽 경기의 주요 종목으로 지위를 계속 확보하고 있다. 특히 자전거는 공해문제, 연료부족, 건강 등 에 관한 관심이 새로이 고조되면서 다시금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전거 역사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언제 처음 들어왔는 지는 확실치 않으나 1896년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 신축현장을 갈 때 처음으로 탔다는 설도 있고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들여왔다는 설이 있다. 우리나라 자전거사에서 가장 빛나는 이름은 엄복동 선수이다. 엄복동은 일제 시대에 일본인을 누르고 국내의 각종 경기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명성을 떨쳤다. 국내의 자전거 제조는 1950년까지는 부품 제작 과정에 머물러 있다가 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생산이 이뤄져 주요 생산국이 되었다.

(자료:삼천리자전거제공)

2003.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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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까지
MTB라고 하는 것이 생겨나기 전부터 자전거로 산이나 들을 달리던 사람들이 적지는 않았다.

MTB의 역사도 GARY FISHER 라는 사람이 그의동료들과 산에서 자전거를 즐기

던 중에 자신들에게 맞는 자전거를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초창기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실제로 여러 장소에서 FISHER와 그 동료

들보다도 먼저 MTB라는 것으로 즐겼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FISHER와 그

동료들의MTB에 대한 강한 열정 덕분에 MTB가 세계적으로 퍼진 것이 사실이다.

FISHER와 그 동료들의 자전거 클럽에 서는 FISHER가 판매 SCHWINN사의 엑셀

셔- X 라고 하는 FAT TIRE의 AMERICA 실용 자전거가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하드한 다운힐 라이딩에는 성능이 떨어지고 매 주행시에 수리가 필요했을 정도로 기능이 뒤떨어

졌다고 한다.그 후 74년 FISHER는 엑셀셔- X를 개조하였다. 높은 제동력을 발휘하는 드럼 브레이크,

그립, 삼 시프트 레바 등을 장비한 MTB의 뿌리라 할 수 있는것이 탄생된 것이다.

★1976~1978년
게리피셔가 만들어낸 엑셀셔 -X 개조 MTB는 동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으나 이것만으로만 만족하였

다면 MTB의 역사는 멈춰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라도 놀이의 세계는 진지하게 몰두하게 되는 주제이다.

피셔와 그의 동료들은 더욱 고성능의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자전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 근본부터 다시 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 그룹의 조 브리즈가 76년부터 설계를 시작하여 77년에 완성한 것이 오늘날 MTB의 원형이

된제 1호의 MTB [브리자]인 것이다. 이 [브리자]가 출현한 뒤, 많은 프레임 빌더가 아주 새로운 타입의

매력적인 자전거의 프레임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톰 리치도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또한 MTB의 역사를 말함에 있어 일본의 부품 메이커와의 관련도 빠뜨릴수는 없다. 피셔의 엑셀셔-X에 붙

어 있던 쉬프트 레바는 선투어의 비치 크루저용 이었으며 부품 제작의 제의가 들어 간것은 일본의 메이커

들이었다. MTB 이벤트도 동료들의 지방적인 투어링이나 레이스로부터 점차로 대규모의 이벤트까지 개최

되고 그 대표적이 것이 콜로라도주 크레스테도 뷰트부터 아스펜까지 3,900m표고의 고개를 넘는 [팔 파

스 투어]였다. 이투어는 현재도 1년에 1번씩 개최되고 있다.

★1979~1982년
그때까지 [바르나]나 [크랑카], [패트타이어]등으로 불리어진 MTB는 79년 이 되어 처음으로 피셔에 의

해 [마운틴 바이크]라 이름지어졌다. 1980년에 들어서는 세계 촤초의 MTB 미니코미지 [FAT TIRE FLYER]

가 창간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타이프에 손그림등으로 제작되어 카피해 박음쇠로 묶은 것에 불과하였지만 MTB의 즐거움

이 지면에 가득 흘러넘치는 내용이었다. 1981년 스페셜라이즈드로부터 MTB의 대량생산 자전거가 발매되

었다. 이 해의 바이크쇼에서는 피셔와 리치, 그리고 찰스케리가 함께한 회사 [더 마운틴 바이크스]가 생

겨났다. 그러나 이 회사는 곧 해체되어 구성원들은 각자의 길을 가는 운명에 처한다. 1982년에는 일본의

자전거 관련 메이커가 MTB를 의식해서 상품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해이다. 완성품으로 그 선두 주자였던

것은 림으로 유명한 신가공업 이었다. (MB-MF26DX). 또한 앞다투어, 시마노 라는 부품 메이커가 MTB전

용의 컴포넌트를 발매하기도 하였다.

 

★1983~1988년까지
1983년이 되어서는 일본 메이커의 대다수가 MTB를 판매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수출용으로서 생산하였으

나 자국내에서의 수요가 높아져 시장이 증가 하였던 것이다.

1984년은 일본에서 MTB의 소프트부분이 표면화된 해이다.

1985년 경부터 MTB계가 활발이 움직임을 보였고 다양한 메이커들이 등장하였다.

BMX나 일반자전거메이커를 비롯, 타 업계로부터 참여가 이루어져 매우 번성하였던 시기이다.

미국에서는 [마운틴 바이크]지가 창간되었다.

투어링을 중심으로 한 지면전개에서 인기를 얻어 후에 미국 최대의 자전거 잡지 [바이시클링]에 흡수되

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6년에는 획기적인 변속 시스템, 인덱스(뒤 기어가 한단 한단들어 가는, 현재로

서는 일반적 기능)가 시마노, 선투어에 의해 개발되어 거친 오프로드에서의 변속을 용이하게 하였다.

일부의 팬만을 위한 것이 아닌 누구든지 즐겁게 탈 수 있는 용도로 넓혀진 MTB는 이 해를 기점으로 판매

대수가 급격히 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마운틴 바이크 액션]지도 창간되었다. 1988년에 는 일반적인

매스컴들도 MTB를 다루기 시작하였으며, MT 이벤트에 미국의 프로 라이더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1989~현재까지
1989년은 2개의 MTB가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 하나는 클라인의 [아티튜드]. 앞 포크까지 알루미늄제 프레임을 사용해 총 중량에서 10Kg을 삭감하고

MTB경량화 전쟁의 불씨를 당겼다. 또 하나는 리치드 카닝감이 디자인한[에이리언]. 파문은 대단하였다.

이 때서부터 각목적에 부응하는 MTB의 세분화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 본 고장인 미국에서의

MTB는 더욱 성숙기에 접어들었는데 하드면에서는 더욱 기능적인 부품, 쾌적하고 안전한 웨어류가 모습을

나타내었다.이벤트는 세계각지에서 여러 레벨의 것들이 개최되었고 이는 욱 MTB의 세계를 넓히는데 활발

한 활약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의 MTB 발자취
국내에는 80년대 말경부터 마운틴 바이크라 불리는 것을 타는 이들이 생겨나 기시작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MTB확산의 붐은 역시 92년 협회의 창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해에는 협

회 대회와 멀리 제주도에서의 대회 등 전국적으로 동호인들이 모이는 기회가 자주 있었다. 초창기 MTB 동호인 들은 그때를 회상하며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동호인들의 전성 기 모습을 즐겁게 떠올린다.
장비면에서도 싸이클과 일반자전거를 취급하던 샵들이 점차로 MTB라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90년 초반부터 시장이 형성되어 갔다고 한다....
저는 이렇게 알고 이쓰는데
헥헥.. 쓰느라 죽는 줄 알았네..

200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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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브락이 발명한거임

200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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