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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영월엄씨는 양반?
sing**** 조회수 8,904 작성일2007.02.15

영월엄씨가 우리 어머니이신데요

옛날 조선이나 고려,발해같은 나라에서 양반이었나요?

무슨 인구 뭐라고 하고

몇명이 있는지 그런거 말고요

양반인지 아닌지좀 가르쳐 주세요

거슬러 올라간다면 과연 영월엄씨는 양반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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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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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엄씨는 양반입니다.

 

아래는 영월엄씨에 대한 설명입니다.

 

시조는 엄임의(嚴林義). 고려조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을 지냈고, 내성군(奈城君)에 봉해졌다.

 

‘이미보(己未譜)’ 씨족략사(氏族略史)편에 보면, 시조 엄임의(嚴林義)는 본래 중국 한(漢)나라 엄자릉(嚴子陵)의 후손으로 당(唐)의 현종(玄宗)이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여러 나라에 전파할 때 엄임의(嚴林義)를 정사(正使)로, 영월신씨(寧越辛氏)의 시조인 신시랑(辛侍郞)을 부사(副使)로 파견, 우리 나라에 왔다고 한다.

 

그때가 통일 신라시대이고 엄임의(嚴林義)는 그 뒤 영월(寧越)땅 부정(否亭)에 눌러 살게 됨으로써 영월엄씨(寧越嚴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엄임의(嚴林義)에게 세 아들이 있어 큰 아들 엄태인(嚴太仁)은 고려조에 검교 군기감윤(檢校 軍器監尹)을 지내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의 파조(派組)가 되었고, 둘째 아들 엄덕인(嚴德仁)은 복사공파(僕射公派)의 파조(派組), 세째 아들 엄처인(嚴處仁)은 문과에 올라 문과공파(文科公派)의 파조(派組)가 되어 세 갈래의 계통을 이루게 되었다.

 

<위선피화 오소감심(爲善被禍 吾所甘心)>. 좋은 일을 하고도 화를 당한다면 달게 받겠다는 절규에 찬 경귀가 바로 엄문(嚴門)의 가헌(家憲)이다.

어린 왕 단종(端宗)에 바친 충절로 보복의 칼날 앞에 서더라도 결코 두려워 않겠다던 엄가(嚴家)의 12세손 엄흥도(嚴興道)의 유훈(遺訓)이 그대로 문중의 정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강가에 버려진 단종(端宗)의 시신(屍身)은 까마귀 밥이 되도록 “누구든 손을 대면 3족(族)을 멸한다”는 어명이 내려져 있었다.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 그는 영월(寧越) 땅의 호장(戶長)<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이었다. 서릿발같은 엄명이 자신은 물론 일족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는 거적에 싸인 구왕(舊王)의 시신을 수습, 동을예산(冬乙旨山)(현재 端宗의 묘가 있는 莊陵)에 염장(殮葬)했다. 그리고 어린 핏줄 하나에 여생을 의지, 성을 갈고 영남(嶺南)지방 어디론가 훌훌 떠나버렸다.

현종(顯宗)에 이르러 단종(端宗)의 무덤이 봉릉(封陵)되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단종(端宗)의 주검을 수습했던 옛사람을 찾았으나 엄씨(嚴氏)들은 무슨 재난이 닥칠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가문의 족적을 적어돈 문적(門籍)까지 없애고 자꾸만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더구나 단종(端宗)묘에 선영이 있던 엄(嚴)씨들은 묘가 능으로 추봉(追封)되면서 사방 5리 안에 있는 개인묘를 모두 옮기라는 어명에 따라 선영까지 포기하는 운명을 맞았다. 이 난리로 인해, 오늘에 이르러서도 후손들은 10세조까지의 묘를 무두 실전(失傳)한 아픔을 겪게 되었다.

엄흥도(嚴興道)의 충절과 인륜의 도가 알려진 것은 영조(英祖)때이며, 순조(純祖)에 이르러서야 충의공(忠毅公)이란 호와 함께 사육신과 더불어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여조(麗朝)에서 수많은 명신현관(名臣顯官)을 배출한 엄(嚴)씨는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11세손인 유온(有溫)이 개국공신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도총제부동지총제(都總制府同知總制)를 지내는 등 대대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燕山君)에 이르러 엄씨가(嚴氏家)는 호된 시련을 겪는다.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 윤(尹)씨의 죽음이 유온(有溫)의 4대 손녀이자 성종(成宗)궁의 귀인(貴人)이었던 엄(嚴)씨 등을 비롯하여 윤필상(尹弼商) 등 12대신의 간계라는 임사홍(任士洪)의 모함으로 이들 대신들과 함께 엄(嚴)귀인의 아버지 사직공(司直公)과 오빠 회(誨)ㆍ계(誡) 등 3부자가 참살을 당한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은 역적으로 몰려 단죄를 받게 되는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다. 이로 인해 엄씨가(嚴氏家)는 한동안 빛을 잃는 듯하다. 중종(中宗)에 이르러 누명을 벗고 16세손 흔(昕) 이 대제학(大提學)으로 우뚝 솟아오르면서 선조들의 맥을 다시 이어 내려간다. - 선(善)으로 패(敗)한 일 보며 악(堊)으로 이긴 일 본가. 이두 즈음에 취사(取捨)아니 명백한가. 평생에 악(堊)한 일 아니하면 자연유성(自然有成)하리라 - 그의 시조 한 수가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후세에 전한다.

영조(英祖)때 서예가로 이름을 떨친 한명(漢明)과, 정조(正祖)때 서화가로 이름 높던 계응(啓膺)은 부자간. 특히 한명(漢明)은 초서와 예서에 뛰어나 한석봉(漢石峰)이후의 제일가는 명필로 고금의 서법(書法)을 집대성한 ‘집고첩(集古帖)’과 ‘만향제시초(晩香齊詩抄)’등의 저서를 남겼다.

엄(嚴)씨는 근세에 이르러 선지자의 집안으로 신문물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다.

이조말의 개화파 인물인 엄세영(嚴世永)은 국제 정세에 밝았던 초기 외교가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으로 일본을 다녀왔고 고종(高宗) 23년(1885) 영국(英國)군함이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했을 때는 일본 나가사까로 건너가 그곳에 머물고 있던 도웰 함대사령관과 담판을 하기도 했다.

엄(嚴)씨가 낳은 유일한 왕비인 고종비(高宗妃)(英親왕의 생모이자 李方子여사의 시어머니)는 우리나라 개화의 여명기에 양정(養正)ㆍ진명(進明)ㆍ숙명(淑明) 등을 설립, 오늘날 사학의 요람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현재도 엄규백(嚴圭白)씨가 양정(養正)고교장으로.,, 엄정섭(嚴貞燮)씨가 진명(進明)학원이사장으로 이를 지키고 있다.

한말(韓末) 엄(嚴)씨 가문은 맵고 곧은 가풍을 이어 숱한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안중근(安重根)의사와 함께 1908년 노영(露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모아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함북 경흥(咸北 慶興)의 일본 군경에 큰 피해를 입혔던 의병장 엄인섭(嚴仁燮)은 무력항쟁이 여의치 못하자 연해주(沿海州)에 정착, 농업에 종사하며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엄순봉(嚴舜奉)은 만주(滿洲)로 건너가 1933년 북만주 일대의 동지들과 함께 한족(韓族)총연합회를 편성, 청년부장에 취임했다. 만주(滿洲)일대 동포들을 상대로 항일투쟁의식고취, 군자금모집 등 활동을 벌이다가 일제(日帝)의 압박이 심해지자 백정기(白正基)의사 등 동지들과 함께 상해(上海)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상해(上海) 조선인(朝鮮人)거류민회를 조직, 일제(日帝)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이영로(李榮魯)를 추적 끝에 응징 살해하고 체포되 순국(殉國)한 열사(烈士).

엄정섭(嚴正燮)은 1916년 대구에서 박상종(朴尙鍾) 등 동지들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금, 항일 유격활동을 했는데 친일(親日)부호 장승원(張承遠)의 암살모의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이클 선수로, 일제하(日帝下) 우리 국민들에게 비행사 안창남(安昌男)과 함께 신문명의 총아였던 엄복동(嚴福童)도 근대 엄(嚴)씨 인물.

 

주요 세거지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영성읍(寧越邑) 하송리(下松里).

오대산(五臺山)에서 양갈래로 떨어진 물길이 동강(東江)ㆍ서강(西江)을 이루며 남으로 뻗다가 손을 맞잡고 남한강(南漢江)으로 흘러드는 지점에 영월 엄씨(寧越 嚴氏) 가족들이 옹기종기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산다. 마을 안쪽 달무리처럼 집들로 둘러싸인 중앙광장에 천골만장(千骨萬狀)의 노은행목(老銀杏木)이 수천 가지의 팔을 뻗쳐 하늘을 떠받들고 있다. 엄씨(嚴氏) 시조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바로 그곳이다.

역사의 명암 속을 드나들며 대대를 이어 가히 1천여년에 30세손.

한 마을에 25세손부터 30세손에 이르기까지 6대가 함께 산다.

“원래 이 마을의 이름은 杏亭이었지요. 始組公께서 이곳에 정착하신 후 손수 은행나무를 심고 마을 이름을 杏亭이라고 지어 불러오던 것을 일제 때 행정구역 정리 작업을 하면서 솔숲이 우거진 곳의 아랫 마을이라고 해서 하송리(下松里)라고 고쳤는데 지금은 솔숲이 없어졌어요.”

마을 촌장격인 엄병언(嚴秉彦)옹(73ㆍ25세손)의 설명이다.

그래서 이 은행나무는 엄(嚴)씨 가문의 상징이기도 하다.

수령 1천년에 높이 36미터, 둘레 18미터로 천연기념물 76호로 지정돼 있다.

또 이 은행나무는 엄(嚴)씨들 뿐만 아니라 영월(寧越)사람들 모두가 <신수(神樹)>라 부른다.

경술국치(庚戌國恥)였던 한일합방 때는 동편 큰 가지가 부러져 떨어졌고 해방 바로 전에는 동쪽 가지가, 그리고 6ㆍ25동란 때는 북쪽 가지가 부러져 나라가 튼 재앙을 맞을 때마다 스스로 가지를 부러뜨려 이를 알려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

또 엄씨가(嚴氏家) 자손 번성의 힘이 노거수(老巨樹)에 있는 듯 천년이 지난 지금도 고사한 가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밑둥치에서 새순이 끊임없이 돋아나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엄씨일가(嚴氏一家)는 바로 이 은행나무마을에서 40여 가구가 한 줄기를 이루어 살고 있다.

이 밖에도 영월(寧越) 군내에 사는 엄씨(嚴氏)일가는 읍내에 전체 5백여 가구에 달한다. 남면(南面)에 2백, 북면(北面)ㆍ주천면(酒泉面) 2백여 호 등 모두 1천여 호가 넘게 살아, 옆집 건너 한 집에 엄씨(嚴氏)문패가 걸린 셈. 뿐만 아니라 지방 유림(儒林)으로 매년 봄ㆍ가을 석존제(釋尊祭)에는 엄씨(嚴氏) 집안사람끼리 전교(典校자)리를 터물림하듯 이어가며 배정(配亭)한다.

그리고 선조들의 묘를 실전(失傳)한 후손들은 지난 65년 은행나무마을에서 북쪽으로 2km 남짓, 봉래산(蓬萊山) 줄기 동산(東山)에 시조의 제단을 봉축(奉築), 혼백을 모시고 매년 10월 1일 전국의 문중이 모여 제정(祭亭)을 받들며 장릉(莊陵)ㆍ창절사(彰節祠)ㆍ충의공(忠毅公)묘소ㆍ은행나무가 있는 마을을 두루 돌며 선조들의 얼을 되새긴다.

 

2007.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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