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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궁금해요! 이한열씨 말고는 죽은사람이 없나요?
비공개 조회수 13,778 작성일2007.06.09

안녕하세요 한 학생입니당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태클은 아니고

 

당시 민주항쟁에서 이한열씨, 박종철씨 말고는 돌아가신분이 없으신가요?

 

.... 물론 박종철씨 이한열씨의 값진 희생으로 이렇게 제가 마음껏 글쓸수 있다는걸 알아요

 

하지만 당시에 다른 희생은 없었나요?

 

만약 다른사람도 죽었다면 왜그렇게 이한열씨만 유명한가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봅니다. 검색해도 나오지도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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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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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돌아가신분를 두고 말하긴 좀그렇지만..

이한열씨 이전에도 최루탄으로 인한 크고작은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없이 많았을

것이나...

정작 최루탄 때문에 사망한 경우는 알려지기로는 최초였기에

그렇지 않나 싶고요.

또한 이로서 이 분의 죽음이 불시가 되어 당시 전국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연일 있었으며 이때문에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 대통령이

6.29 선언이란걸 한걸루 압니다..

이 6.29선언 때문에라도 인한열씨가 더욱 알려진게 아닌가 쉽네요..

 

기타 누구나 박종철씨 경우 고문으로 인하여 사망하였다는건 이한열

담으로 아시겠지만..

이외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당시 시대상황과 기타 등에 관련하여

억울하게 죽었으나 위 두분처럼알려지지 않는 분들도 게시는 걸로 압니다.

 

기억나는 한분이 있는데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여자분으로 압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요..

오늘 네이버 검색 2위까지 했던 최루탄을 피해 도망가던중 당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일명 백골단이란 경찰조직의 치밀한 작전속에 도주로가 차단되자 미처

빠져나기 못하고 도망가던 시위대와 시민들 틈에 넘어져 최루탄연기와 함께 넘어져

짓누르는 사람들로 인하여 질식한 여학생도 한명 있었던걸로 압니다..

 

당시엔 최루탄으로 인한 질사냐 사람들로 인한 압사냐를 두고 말이 많았으나

이후 병원에 안치중인 시신을 경찰이 강제로 강탈 강제 부검 후 경찰의 의도한바

압사로 겨론난 걸로 압니다..

 

ㅎㅎ당시 학생분들이나 시위에 관심이 많았던 분들 아님 모르는 사실한가지....

세상어디가도 보기 드믄 행위 시신강탈 대한慣?경찰의 시신강탈하기 작전....

아~~박종철씨가 맞는지 모르겠으나..

강제로 시신을 강탈하여 부검한걸루 압니다만....

박종철씨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리나라에선 시신강탈 사건은 두번

있었던 걸로 압니다..

것도 멀정한 병원 벽을 뚤고 영안실에 들어가 무지막지하게 최루탄을 터트리고

이런 경잘들의 만행을 알기에 시신을 보호하려 했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패고

잡아가고 했다던 시신도 강탈해가던 시절...

 

한분 더있군요...

90년대 당시의 정권의 행위를 비관하여 전남대에서 분신자살한 여학생도 있군요...

 

아쉬운건 당시 시대대적인 상황을 고력할때 같은 신념하에 죽고 죽었던 사람들

도 많을 것이나 알지 못하거나 잊혀졌다는것... 

 

 

 

2007.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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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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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섬광
고수
지구과학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이한열씨는 최루탄맞아숨졋습니다

또다른사람은 고문당하다죽엇습니다

2007.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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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9ica****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최루탄으로 사망한 최초가 이한열열사는 아닙니다.

김주열 열사입니다.

김주열사는 1943년 10월 7일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93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본명은 김영용이며, 1956년 옹정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금지중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키우며 학업에 정진하였습니다.1961년 김주열은 어머니의 권유로 마산상고에 진학하였는데, 그 해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대에 동참하였다가 실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달뒤인

4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 앞 2백미터 떨어진 바다의 수면 위로 괴이한 형상의 시체 1구가 떠올랐다. 교복 차림의 10대 소년(김주열)이 눈에 포탄같은 쇠붙이가 박힌 채 떠오른 것이었다. 김군의 눈에서 추출된 포탄은 직경 5㎝, 길이 20㎝에 탄피가 알루미늄으로 된 미제 고성능 최루탄으로, 꼬리 부분에 프로펠러가 달려 있었으며 건물 벽을 뚫고 들어가 폭발하는 대무장폭도용 최루탄이었습니다. 최루탄 겉면에는 "Don't use on the crowd" - 직접 군중을 향해서 쏘지 말라는 주의 표지까지 적혀 있는 특수 최루탄인데, 경찰은 비무장 군중에게 직접 발사했다. 이 최루탄은 당시 경비주임 박종표가 실탄 사격 틈틈이 발사한 최루탄 10여 발 가운데 하나였다. 박종표는 3·15 데모 진압 후 김주열의 시체를 발견하고 사람들의 눈에 띌 것을 두려워하여 경찰서장 지프차에 시체를 싣고 부두로 나가 돌을 매달아 바다에 집어던져 버렸습니다. 김주열의 시체는 27일 동안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다가 묶어둔 돌이 미끄러져 떨어져 나가면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그의 주검은 제2차 마산 봉기와 4·19를 불러일으킨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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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yoyo****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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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에 맞아서 돌아가셧기 때문입니다

2007.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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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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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dn****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이한열씨 말고도 있어요....

박종철이 경찰에게 고문당해서 죽었어요..

그 다음 시민들이 화가 나서

광화문 등 전투 경찰과 맞서고 데모를 펼치고 모두

운동권에 동요하게 되었어요......

2007.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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