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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가담항설은?
비공개 조회수 254 작성일2018.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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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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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엔터테인먼트, 예술 분야 지식인 관상, 손금 1위, 꿈, 해몽 5위, 승합, 트럭 2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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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시 일본이 허황된 천황의 오판으로 독일과 손을 잡은 사건입니다.

2차대전말  일본은 세계최초로 원자폭탄의 맛을 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뜬소문의

피해자 였다고 보여 집니다.



세인트 로(Saint Lo)의 격침 이후 일본은 특공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독일 제3제국이 패망의 끝자락에서 ‘비밀병기’란 희망을 붙잡고 버텼던 것처럼, 일본은 ‘가미카제’를 부여잡고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려 했다.

불꽃처럼 타오른 희망이지만, 이 희망은 회광반조(回光返照)의 다름이었다.

가미카제는 100% 손실의 다른 말이었다. 작전에 투입된 기체와 전투기 파일럿은 100% 잃는다는 의미다. 필리핀의 함락으로 남방자원지대에서 자원을 수급할 수 없게 된 일본은 신조기 생산에 큰 타격을 입는다. 결국 작전에 소모된 기체를 보충할 수도 없게 된다.

더 큰 문제는 파일럿의 수급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제대로 된 파일럿을 하나 키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미 베테랑 파일럿의 태반은 그 동안의 전투로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 설상가상으로 100% 전사가 보장된 가미카제 공격으로 파일럿들은 남아나지 않았다.

일본은 부랴부랴 특공용 파일럿들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단기 속성으로 키워낸 신참 조종사들은 단순한 이착륙 훈련 중에도 판판이 죽어나갔다. 겨우겨우 기초비행 훈련을 마친 이들은 가미카제 특공을 위한 최소한의 ‘기술훈련’을 받았다.이들이 마스터해야 하는 최소한의 비행기술은 크게 두 가지 정도였는데,

첫째, 적의 레이더를 피하기 위한 초 저공 수면비행

둘째, 목표 발견 후 고도 3천 미터까지 급상승, 목표를 향해 45도 각도로 내리 꽂히는 기술 특공을 위한 기술만 가르쳤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교육을 받은 특공용 파일럿들이 제대로 활약을 했을까? 안타깝게도 그들은 애꿎은 자기 목숨만 버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당시 가미카제 특공을 위한 편대 편성은 특공기 3대에 호위기 2대로 구성됐는데, 호위기 파일럿들은 특공기들을 지켜주는 역할도 했지만, 더 중요한 건 이들을 미군 함대가 있는 곳으로 무사히 안내하는 것이었다. 급하게 양성된 특공 조종사들은 최소한의 항법 기술도 부족해서, 조금만 기상이 나쁘면 길을 잃고 헤맸고, 미군 전투기라도 나타나 호위기가 전투기동이나 회피기동을 하게 되면 호위기를 놓치기 일쑤였다. 특공기가 호위기를 놓치는 순간, 이들의 운명은 거의 다 정해졌는데, 제대로 방향을 찾지 못해 하늘에서 연료를 소모하다 바다에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미군 함대를 발견해도 문제였는데, 이들은 멀리서 함대가 보이면 덮어놓고 돌입했다. 함대에 돌입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가급적이면 자신의 목숨 값을 할 만한 항공모함이나 전함 같은 고가치 목표를 공격해야 하는데, 원거리에서 이들을 구별할 만한 능력이 없었던 이들은 아무 목표에나 덤벼들곤 했다. 결국 이들은 상륙용 주정에도 돌격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연출했다. 마지막 순간 자신의 목표물을 확인하고 방향을 틀려고 해도, 그럴만한 시간도, 그럴만한 비행능력도 없었기에 이들은 그렇게 산화해야 했다.




미국의 반응

최초의 공격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했지만, 이후 가미카제의 의도를 안 다음에는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그들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정신세계였다.

“조종사라는 고급인력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다니, 나였으면 그런 명령을 내린 놈을 그 자리에서 쏴 죽였을 것이다.

맥아더가 그의 자서전에서 말 한 내용이다. 이것이 상식적인 인간의 반응이다. 미군은 경악했고, 자신에게 향한 명백한 살의.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살의 앞에서 분노했다. 그렇게 감정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 이성적인 대처에 나선다.

1944년 말부터 항공모함 함재기의 비율이 조정됐는데, 기존에는 함재기 중에서 전투기의 비율이 40% 수준이었는데, 이때부터 70%로 대폭 늘어났다. 전투기가 늘어난 만큼 함대 방공능력은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미군은 가미카제로 추정되는 공격대가 발견되면 탑재한 항공기를 모두 발진시켜 총력저지에 나섰다. 이렇게 전투기의 방공망을 뚫고 함대에 접근한다 해도 기다리는 건 대공포의 벽이었다.

가미카제 공격의 진입 방법은 한정적이었고, 무거운 폭탄을 달았기에 그 기동성도 떨어졌다. 즉, 화망만 제대로 구성하면 격추하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여기에 미군들의 감정이 더해졌다. 자신들을 향한 명백한 살의 앞에 미군들은 분노를 넘어선 증오는 미군을 넘어서 미국 전체로 퍼져나갔고, 전쟁 근간에 깔려있던 인종차별적인 감정은 폭발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감정들은 미국이 별 고민 없이 원자폭탄을 사용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가미카제가 거둔 성과는 얼마나 될까? 자료마다 다 다르지만, 일본과 미국측 자료를 비교해 가장 근사치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호위항모 3척, 구축함 14척, 소해정 3척, 수송선 3척, 상륙정 14척, 화물선 9척, 탄약수송선 1척. 합계 47척이다(격침이 아닌 파손이나 중파 등등을 합치면, 연합국 전체 피해는 300~400척 정도로 집계된다).

그럼 그 동안 소모된 특공기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1944~1945년까지 총 3,800여기의 가미카제 특공기가 작전에 투입됐다.즉, 3,800대를 투입해 47척을 격침했다는 것이다.

이는 말도 안 되는 교환비다.

가미카제 특공기가 격침시킨 그나마 전략적인 목표물은 호위항모 3척이 다이다. 이것이 미 해군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당시 미 해군은 정규항모만 28척을 보유하고 있었고, 호위항모까지 합치면 100척을 훌쩍 넘어간다. 즉, 간에 기별도 안 가는 미미한 수준이란 소리다.

이를 위해 일본은 귀중한 인적자원인 조종사와 항공기 3,800여대를 쏟아 부었다. 이는 자포자기식의 자살행위의 다름이다.

종말의 시작

일본이 전쟁의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레이테만 해전? 마리아나 해전? 아니다. 많은 이들은 1944년 7월의 사이판 함락을 꼽는다.





당시 일본이 사이판 함락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후쿠도메 시게루(福留繁) 해군 중장의 발언을 보면 알 수 있다.“사이판을 잃었을 때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일본이 절대사수를 외쳤던 절대국방권이 뚫렸다. 이제 일본은 초장거리 폭격기인 B-29의 사정권 안에 들어가게 됐다.

일본 군부의 엘리트들 중 일부는 사이판 함락 이후 자신들의 운명을 예측했다. 이제 일본에게 희망은 없다. 후쿠도메 시게루의 말처럼 일본의 마지막 기회는 사라졌다. 만약 이때 일본이 정신을 차리고, 종전을 위한 협상이나 항복을 했다면 가미카제와 같은 ‘미친 짓’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은 결사항전을 말했고, 그에 걸맞는 ‘행동’들을 보여줬다. 가미카제는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이어진 제국주의 일본의 마지막 비명이었다. 그리고 그 비명은 인류사에 유래가 없는 절대적인 폭력. 원자폭탄으로 돌아오게 된다.

일본의 비명이 종말을 재촉했다.

2018.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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