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제천 및 단양 가볼만한 곳
vint**** 조회수 100,731 작성일2013.08.16
짐프에 왔는데요 ~단양이랑 제천에 가볼만한 곳 추천 해주세요~ 검색하니 다들 산만나와서;;;
그리고 제천 3G렌터카에서 렌트 하려고 하는데 여기 괜찮나요?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1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제천과 단양에서 가볼만한 곳으로 제천 10단양 8이 있습니다.

 

(제천에서 가볼만한 곳 - 제천 10)

 

제1 의림지

 

삼한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저수지로 본래 "임지"라 하였습니다.

고려 성종 11년(992)에 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제천을 '의원현' 또는 '의천'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제천의 옛 이름인 '의'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축조된 명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전에는 신라 진흥황 (540~575)때 악성 우륵이 용두산에 서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것이 이 못의 시초라고도 하며, 그 후 700년이 지나 현감 "박의림"이 4개 군민을 동원하여 연못 주의를 3층으로 석축을 해서 물이 새는 것을 막는 한편 배수구 밑바닥 수문은 수백관이 넘을 정도의 큰 돌을 네모로 다듬어 여러 층으로 쌓아 올려 수문기둥을 삼았고 돌바닥에는 " 박의림"현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합니다.

 

호반둘레 약 2km, 호수면 158,677m2, 저수량 6,611,891m3, 수심 8~13m의 대수원지로 몽리면적은 289.4정보이며, 보수 당시 수구를 옹기로 축조한 흔적이 발견되어 삼한시대 농업기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수리시설보다는 유원지로서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는데 승지로 호수 주변에 순조 7년(1807)에 새워진 '영호정'과 1948년에 건립된 '호루' 그리고 수백년을 자란 소나무와 수양버들, 30m의 자연폭포 등이 어우러져 풍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특히, 겨울철 및 해빙기에 잡히는 공어(빙어)는 담백한 맛의 회 어로 각광받고 있는 명물이며, 순채는 임금의 수라상에 올릴 만큼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분이며 가야금의 대가인 "우륵"선생이 노후에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가야금을 타던 바위 우륵대(일명 제비바위, 연암, 용바위)와 마시던 "우륵정"이 남아 있습니다.

 

제2 박달재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갈라놓은 험한 산을 박달재라 한다. 조선조 중엽 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 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 밤 삼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 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아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 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 새 가까워 졌고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게 되었다. 밤마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 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결국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보내고는 날마다 성황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자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제3 월악산
 
중봉 하봉 두 형제 거느린 영봉 ....

 

월악산은 네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송계 쪽에서 보면 영봉, 중봉, 하봉으로 이어지는 암봉의 행진이 장엄하다. 맨 오른쪽 영봉은 특히 백여 미터는 족히 될 법한 깎아지른 벼랑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중봉과 하봉, 두 형제를 아우른다. 특히 4월이면 한수면 민박마을에서 바라보는 영봉은 활짝 핀 벚꽃 가로수 위로 떠 있는 한 척의 거대한 범선으로 다가온다.

덕주골로 해서 덕주사와 마애불 거쳐 오른 능선 상에서 만나는 영봉은 또 다른 모습이다.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 봉우리는 사람들을 단번에 압도하는 힘을 뿜어낸다. 헬기장 지나서 능선 안부에 이를 때쯤이면 누구나 영봉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다. 하늘을 향해 끝없이 수직으로 솟은 듯 한 봉우리, 영봉을 제대로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수시로 쏟아지는 낙석은 가까이 갔던 이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니 그만큼 위협적인 봉우리도 드물다.

 

해질녘 신륵사 길을 벗어나 덕산 쪽에서 느긋하게 만나는 영봉은 전혀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거대한 바위기둥으로 오롯이 솟은 검은 실루엣. 혹자는 발기한 젖꼭지 같다고도 하지만 영봉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표현은 못된다. 그곳에서 영봉은 둥글둥글한 수십 개의 능선을 거느리고 마치 하늘을 향해 마련된 신성한 제단처럼 솟아 있기 때문이다.

보는 위치 따라 얼굴도 여럿 ....

월악교 지나 36번 국도로 가다보면 등나무 쉼터가 나온다. 여기서 보는 월악산은 이제 막 먼 바다를 향해 출항하려는 듯 한 거함의 선수(船首)와도 같다. 봄날 저녁 호수는 잔잔하고 수면부터 정직하게 솟아오른 산은 더더욱 높아 보인다. 백두대간 대미산에서부터 서쪽으로 달려온 큰 줄기가 마골 치에서 갈라져 북서쪽 만수 봉으로 그 도도한 정기를 이어갔으니 동달 천과 광천이 합류하여 빚어내는 둥우리막대머리 강가에서 월악은 정녕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그렇게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월악산이라 해도 최소한 제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가장 정다운 모습으로 다가오곤 한다. 청풍 지나 봉화재 넘을 무렵쯤이면 산 너울 위로 둥두렷이 솟은 자태가 바로 그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라 곰곰이 생각하니 김포나 일산, 효자리 쪽에서 보는 삼각산과도 흡사하다. 누워 있는 미인의 옆모습처럼 콧날 오뚝하게 솟은 영봉이며, 입술과 턱 선으로 선명한 중봉, 하봉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정다운 마음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정작 덕산이나 한수 땅에 들어서면 그러한 자취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다.

동서남북 기점 등산로 넷 ....

월악산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산행들머리가 있다. 동쪽으로는 덕산면 월악리 덕산매표소에서 신륵사 거쳐 오르는 길, 서쪽으로는 한수면 소재지 부근 동창교 탐방지원센터에서 오르는 길, 남쪽은 덕주골 덕주사와 마애불 거쳐 오르는 길이다. 이 세 곳은 산불예방 기간 중에도 개방되는 등산로다.

 

만수휴게소에서 만수 봉에 올랐다가 암릉을 거쳐 월악산 960봉까지 이어지는 길은 대단히 험하나 흡사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 같아서 등반의 묘미가 있다. 그러나 장장 7시간 이상 걸리는 힘든 코스라 로프 등 적절한 안전장비를 갖추고 암릉 등반 험자가 꼭 함께 가야 한다.

 

월악산 등산로 가운데 가장 쉬운 길은 동창교탐방지원센터에서 능선 안부까지(2시간 40분) 올랐다가 영봉에 오른 후 신륵사로 하산하는 코스다. 동창교∼신륵사 코스는 변화는 별로 없지만 계단이 대부분인데다 급사를 이룬 덕주사 쪽보다는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어서 좋다.

 

영봉 오르는 길은 백여 미터 이상 90도로 치솟은 암벽을 한 바퀴 돌아서 오르는 급사 계단의 연속이다. 영봉 일대의 암벽은 낙석이 잦은 편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안전을 위해 높은 철망을 튼튼하게 둘러놓았지만 암벽 아래를 지나는 길은 가급적 빨리 통과하는 게 좋다.

 

제4 청풍문화재단지, 호반

 

정부의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으로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1978년 6월부터 시작하여 1985년 10월준공되기까지 수몰지역내의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19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1만 6천평의 부지위에 원형대로 이전 복원하여 1985년 12월 23일 개장하였습니다.

청소년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지금은 8만 5천평의 규모로 확대 개발되어 우리시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 발돋음하고 있습니다. 보물 2점(한벽루, 석조여래입상), 지방유형문화재 9점(팔영루, 금남루, 금병헌,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4동), 지석묘, 문인석, 비석등 42점과 생활유물 2천여점이 보관되어 명실상부한 옛 남한강 상류의 화려했던 문화의 산실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 문화재는 직접 생활하거나 사용하던 것으로써 타 지역과 차별화되고 있으며 계속하여 놀거리, 볼거리, 먹거리장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청풍호반은 충주 다목적댐 건설로 생성된 호수로 뱃길 130리중 볼거리가 가장 많고 풍이 뛰어난 곳으로 내륙의 바다라고 합니다.
작은 민속촌 청풍문화재단지를 정점으로 해서 주위로 봉황이 호수위를 나르는 형상의 비봉산, 어머니 품속과 같이 편안하고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금수산을 뒷 배으로 한 청풍호반은 가히 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2000. 4. 15에 개장된 수분수(162m)에서 쏘아올리는 시원한 물줄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현재 1개타워에 3종의 시설을 설치하는 번지점프장(번지점프 50m, 자이언트스윙 36m, 번지라이트 36m)및 수상레져시설 등이 완공되면 주위의 국민연금청풍리조트 호텔및 E.S콘도미니엄의 종합휴양시설을 이용한 체류형 관광지로 각광받게 되어 그야말로 청풍호반은 보고, 즐기며, 체험하는 종합적인 국제적 관광명소로 급부상할 것입니다.
 
제5 금수산
 

퇴계 이황 선생이 지어준 '금수산'

 

금수산(錦繡山) 1,015.8m의 원래 이름은 백운산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단양 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 (1501∼1570)이 단풍 든 이 산의 모습을 보고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며 감탄, 산 이름을 금수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금수산 남쪽 마을 이름이 백운동인 것도 옛 산 이름의 흔적이다.

금수산은 북쪽으로는 제천시내까지, 남쪽으로는 단양군 적성면 말목산(720m)까지 뻗어 내린 제법 긴 산줄기의 주봉이다. 주능선 상에는 작성산(848m), 동산(896.2), 말목산 등 700∼800미터 높이의 산들이 여럿이고, 중간마다 서쪽으로 뻗은 지릉에도 중봉(885.6m), 신선봉(845.3m), 저승봉(596m), 망덕봉(926m) 등 크고 수려한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남쪽 어댕이골과 정남골이 만나는 계곡에는 금수산의 절 용담폭포와 선녀탕이 숨어 있다. 용담폭포와 선녀탕은 ‘옛날 주나라 왕이 세수를 하다가 대야에 비친 폭포를 보았다. 주왕은 신하들에게 동쪽으로 가서 이 폭포를 찾아오라 했는데 바로 그 폭포가 선녀탕과 용담폭포였다고 한다. 상탕, 중탕, 하탕으로 불리는 선녀탕에는 금수산을 지키는 청룡이 살았다. 주나라 신하가 금수산이 명산임을 알고 산꼭대기에 묘를 쓰자 청룡이 크게 노하여 바위를 박차고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제천시와 단양군의 계에 있는 금수산은 대부분 단양군 적성면 상리 상학마을을 들머리로 삼아 오른다. 그러나 이는 오직 교통의 편리함 때문이다. 정상까지 오르는 가장 짧은 등산로지만 단조로운 능선길이 전부다.

그러나 제천 수산면 상천리 백운동에서 오르는 금수산은 그 시작부터 예사로운 풍이 아니다. 청풍호반을 끼고 들어서는 상천리 백운동 마을은 봄철 산수유로 유명하다. 늙은 산수유 나무가 빼곡한 백운동 마을에서 올려다보는 금수산은 북쪽의 망덕봉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져 능선 끝 지점에 머리를 치켜 든 사자처럼 뾰족하게 치솟았다. 망덕봉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암릉 여기저기에는 푸른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단풍이 들면 그 이름처럼 과연 비단에 수놓은 듯한 치가 펼쳐진다. 또한, 적성면 상학마을로 오르는 길과 달리 산자락에 시원한 계곡과 폭포를 지니고 있어 여름철 산행지로도 제격이다.

 

제6 용하구곡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에서 신륵사 쪽으로는 월악산 정산을 오르는 길이 있고, 억수리 쪽으로는 두 갈래 골짜기로 갈라져서 용하수 골짜기와 수문동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데 곳곳마다 16km의 계곡에는 원시림과 천하의 절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용하구곡의 제1인 수문동 폭포의 장관부터 시작하여 병풍폭포, 수곡용담이 자연의 신비를 연출하고 8km물길의 비인 관폭대, 청벽대, 선미대, 수룡담, 활래담, 강서대 등과 신륵사 위편의 수렴선대가 비의 극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수문동폭포
높이 35m, 길이 100m 가량되는 폭포가 천연동굴 위로 쏟아져내리며, 겨울철에는 물이 얼어 얼음산을 이루고 있어 장관을 연출합니다.
수곡용담
물굽이가 마치 용이 꼬리를 튼 모양을 이루고 있고, 용이 솟았다하여 용초라고도 한다. 가물 때 개를 잡아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개의 생피를 바위에 바르면 비가 왔다고 합니다.
관폭대
충주관찰사로 있던 오도일이 암벽에 "관폭대"라 새겨놓았고, 주위에 큰바위가 있는데 치성을 올리던 아들 바위라 합니다.
청벽대
5개의 큰 암석이 층계를 이루고 맑은 물이 소를 이룬 절인데 구한말 당시 박의당 선생이 제자와 같이 글을 짓던곳입니다.
선미대
옛날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곳이며, 산이 깊어 주변 숲속에는 송이 버섯과 독사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수룡담
부녀자가 많이 찾아와 몸을 청결히 하던곳이며 이곳에서 산능선으로 약간 올라가면 부처바위가 있는데 산모가 치성을 드리면 득남을 하였다합니다.
활래담
시와 계가 되는 깊은산 계곡으로 산삼이 많아 예로부터 심마니의 왕래가 잦은 곳이며 원조라는 희귀조가 서식하였다합니다.
강서대
옛날 선비들이 글을 읽고 쓰던 유서 깊은곳입니다
수렴선대
신륵사에서 500m위 넓은 바위위로 흘러내리는 폭포로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제7 송계게곡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를 거쳐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까지 이어진 8㎞의 송계계곡은 수안보와 단양의 중간인 제천에 위치해 있으며 깊은 골짜기와 맑고 시원한 물, 월악산 등의 크고 작은 봉우리와 사찰, 절터 등 유물이 산재한 여름 피서지의 보고입니다. 송계계곡은 8개의 계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월악영봉
월악산의 최고봉(1094m)으로 기암괴석의 묘가 극치에 달했고 소박하면서도 장엄한 남성적이고 실로 걸작의 예술품이라 할 수 있으며, 영봉, 중봉, 하봉의 삼봉 거암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자연대
송계계곡 첫 입구에 소재 한 곳으로 맑은 계곡물과 넓은 암반, 깊은 소가 있어 어디에 못지 않은 승지 입니다.
월광폭포
30여m의 3단폭포, 자연휴식년제로 입산이 금지되어 있고 신라시대에 창건했다는 월광사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시 소멸되어 터만 남았고 이곳의 돌 거북과 비석은 복궁으로 옮겨서 보존되고 있습니다.
신라시대부터 월악신사를 설치하고 제천하던 곳입니다.
학소대
한쌍의 학이 월악산을 오가며 살았다는 곳으로 마애불로 오르는 산행길에 등산객이 쉬어가는 유일한 안식처 이기도 합니다.
망폭대
덕주산성 남문과 한쪽맥이 이어져 있는곳으로 기암줄바위와 고무서리계곡을 굽이도는 맑은물과 어울린 절벽입니다.
와룡대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며 수심 5m의 깊은 웅덩이 가까이에 사자빈신사지석탑이 소재하고 있습니다.
팔랑소
200여평의 화강암 반석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곳으로 옛날 하늘나라 공주가 하강하여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8 옥순봉

 

김홍도의 병진년화첩에 등장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옥순봉은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에 있다. 제천 108에 속하는 옥순봉은 지리적인 이유로 구담봉과 함께 단양 8에 속하기도 한다.

 

옥순봉은 조선 초 청풍군(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해 있었다. 단양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 선생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단양 태생의 기녀 두향이 아름다운 옥순봉의 절을 보고 단양군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청풍군수가 이를 허락지 않았다. 그러자 이황 선생이 단애를 이룬 석벽이 마치 대나무 순이 솟아 오른 것과 같다하여 옥순봉이라 이름 짓고, 석벽에 <단구동문>이라 새겨 단양의 관문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 문신 탁영 김일손은 <여지승람>에서, 청화자 이중환은 <산수록>에서 옥순봉의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또한 구한말 의병장 유인석과 함께 왜군 소탕에 앞장섰던 정운호는 당시 제천 8을 노래하며 이 곳 옥순봉을 제7으로 꼽았다.

 

단원 김홍도는 정조의 초상화를 잘 그린 공로로 충청도 연풍의 현감에 임명되었다. 이 때, 1796년 <옥순봉도>를 남겼다. 이 그림은 김홍도의 대표작인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중의 한 폭으로, 현재 보물 제7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처럼 옥순봉의 산세는 청풍호와 어우러져 뛰어난 관을 자랑한다. 해발 283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함마저 느낀다. 확 트인 정상부는 너른 안부와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어 쉬어가기 좋다. 또한 노송이 운치를 더해주니 그 옛날 선계가 부럽지 않을 곳이 바로 이 곳이라 하겠다. 산행과 더불어 유람선을 타고 옥순봉과 구담봉의 멋들어진 석벽을 조망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옥순봉은 높이가 낮은데다 등산로도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쉽게 오를 수 있으니 1시간 산행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구담봉을 연결해 산행할 우에는 약 4시간은 잡아야 한다. 구담봉으로 가려면 옥순봉 정상에서 되내려와 왼쪽으로 난 길로 가야 한다. 정상부까지는 깎아지른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옥순봉-구담봉 산행 중에는 식수를 구할 수 없으므로 산행 시작 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제9 탁사정

 

강원도 원주에서 제천을 들어오는 국도 5호선 변에 자리하고 있는 제천근교의 유일한 유원지이며 여름 피서철 많은 인파가 모이는 곳입니다.
 
조선 선조 19년(1568) 제주 수사로 있던 임응룡이 고향에 돌아올 때 해송 여덟 그루를 가져와 심고 이곳을 팔송이라 명명하였고, 그 뒤 정자를 짓고 팔송정이라 하였습니다.
 
허물어진 팔송정을 후손 윤근이 다시 세웠고 원규상이 탁사정이라 하였으며, 팔송은 모두 죽고 지금은 한 그루도 남아있지 않으나 1999년도 10월에 팔송마을 및 제방 둑에 20그루의 해송을 마을에서 심어 앞으로 해송을 구할 수 있습니다.
 
제천 9의 "탁사정"은 정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자 주위의 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한말 정운호(유인석 의병장과 함께 적의토벌 지휘에 맹활약)가 제천의 절 8곳을 노래한 곳 중 제8 "대암"이 이곳입니다.
 
제10 배론성지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교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성지로 1801년 신유박해때 많은 천주교인이 배론 산골로 숨어들어 살았는데 그들은 옹기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황사영이 당시의 박해상황과 천주교 신도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토굴 속에 숨어 집필한 지역이며 1855-1866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요셉신학교가 소재했던 지역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중의 한명인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분묘가 소재한 지역이다. 아울러 1866년 병인박해의 첫 순교자인 남종삼 묘소가 배론 성지와 인접한 학산 리에 있다.
근대에 이르러 1958년 원주교구에 속하여 원주교구장이 개발 착수하여 진입로를 비롯한 성지일원을 말끔히 정리하고 단장하였다.

* 배론 이란? - 배론 이란 지명은 골짜기가 배 밑 바닥 같다 고하여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排論)이라고도 합니다.
* 백서 - 가로 62cm, 세로 38cm되는 흰 명주 비단에 한줄에 110자씩 122행 13,384자로 작성되었으며 원본은 로마교황청 문서보관소에 보관중입니다.

 

(단양에서 가볼만한 곳 - 단양 8)

 

제1 도담삼봉

 

주 소 : 충북 단양단양읍 도담리 195번지

 

남한강의 맑고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한가운데 세개의 봉우리가 솟아있다. 가운데 봉우리는 늠름한 장군처럼 위엄 있는 자태를 하고 있는데 이를 남편봉이라 부르고 그보다 좀 작은 북쪽 봉우리는 처봉, 남쪽 봉우리는 첩봉이라 부른다. 이 삼봉 가운데 처봉은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둔 남편을 미워하여 돌아앉은 모습을 하고 있고 첩봉은 아기를 밴 모습으로 남편봉을 바라보고 있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 선생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할 만큼 젊은시절 이곳에서 청유하였다고 전해지는 도담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와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양에서는 정선군에 매년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어린 소년 정도전이「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한 뒤부터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장군봉에는「삼도정」이라는 육각정자가 있었다. 영조 42년(1766) 가을 조정세 단양군수가 이곳에 능영정을 창건했었는데 폐허되었고 1807년 김도성이 목조 사각정을 건립 보존해오다가 1972년 대홍수로 인하여 유실된 것을 1976년 10월 철근콘크리트 육각정을 신축하고 삼도정이라 명명하였다.

 

나룻배를 타고 이곳 삼도정에 올라 시 한 수를 읊으면 누구나 신선이 된듯 감흥에 젖는다. 치가 좋아 많은 선비들이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山明楓葉水明沙(산명풍엽수명사)

三島斜陽帶晩霞(삼도사양대만하)

爲泊仙橫翠壁(위박선사횡취벽)

待看星月湧金波(대간성월용금파)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신선의 뗏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

별빛 달빛아래 금빛파도 너울지더라

 

도담삼봉에는 1997년 11월부터 7억여원의 사업비를 들여 국내 최초로 노래방식 음악분수시설을 설치하여 1998년 5월 25일부터 본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음악분수는 최첨단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노래를 부르면 음정에 따라 36가지의 다양한 모양으로 분수를 분출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토록 시설되어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제2 석문

 

주 소 : 충북 단양군 매포읍 하괴리(도담삼봉)

 

도담삼봉 음악분수대에서 300m 정도 올라가면 전망대를 지나 수 십 척에 달하는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 나타나는데 신선들이 드나들고 천상의 선녀들이 하늘하늘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노래를 불렀음직하다. 석문 우측 아래에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굴속에 깔린 암석은 아흔 아홉 개의 논다랭이를 이루고 있다. 물이 담겨져 있어 농촌의 한적한 계곡의 논두렁을 연상케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마고할미가 하늘나라에서 물을 길러 내려왔다가 비녀를 잃어버려서 비녀를 찾으려고 흙을 손으로 판 것이 99마지기의 논이 되었는데 비녀를 찾지 못한 논다랭이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비녀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며 농사를 지었다. 그 논을 옥전(玉田)이라 한다. 술과 담배를 좋아하던 마고할미는 일생을 이곳에서 보내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서 바위 가 되었다. 지금도 긴 담뱃대를 물고 술병을 들고 있는 마고할미의 형상이 바위에 남아있다.>

 

석문에서 상류로 조금 더 올라가면 자라의 모습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듯한「자라바위」를 볼 수가 있으며 석문 부근의 절벽에는 측백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서 주변치를 사시사철 푸르게 해주고 있다.

 

제3 구담봉

 

주 소 : 충북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산 32번지 (장회나루)

 

구담봉은 깎아지른 듯한 장엄한 기암절벽 위의 바위가 흡사 거북을 닮아 구담봉이라 한다.

 

조선인종 때 이지번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푸른 소를 타고 강산을 청유하며 칡넝쿨을 구담의 양쪽 언덕에 매고 비학을 만들어 타고 왕래하니 사람들이 이를 보고 신선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비봉과 금수산, 멀리는 월악산이 감싸고 있어 충주호 수운관광의 최절지로 손꼽히고 있다.

 

제4 옥순봉

 

주 소 : 충북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장회나루)

 

희고 푸른 바위들이 대나무 순 모양으로 천여 척이나 힘차게 치솟아 절개 있는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봉우리를 옥순봉이라 한다. 여러 개 기이한 봉들은 조화의 묘를 다하였으며 산세의 기복과 굴곡이 자유분방하다.

 

옥순봉은 원래 청풍에 속해 있었는데 조선 명종 때에 관기 두향이가 단양 군수로 부임하는 퇴계 이황 선생에게 옥순봉을 단양군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퇴계 이황 선생이 청풍부사에게 청을 하였으나 청풍부사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퇴계선생이 석벽에 단구동문 이라는 글을 암각하여 이곳을 단양의 관문이며 군계로 정했다고 한다. 뒤에 청풍부사가 남의 땅에 군계를 정한 자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옥순봉에 가보니 글씨가 힘차고 살아있어서 누구의 글씨냐고 묻자 퇴계의 글씨라고 하니 감탄하면서 옥순봉을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옥순봉은 소금강이라는 별칭을 가질 정도로 비인바,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연산군 때 문신 김일손도 이곳을 탐승하면서 절의 협곡을 극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주변에는 강선대와 이조대가 마주보고 있으며 특히 강선대는 높이 15m의 층대가 있고 대위에는 100여명이 앉아 놀수 있는데 호서읍지에 의하면 당시의 관기 두향이 풍기군수로 전임한 퇴계 이황을 그리면서 강선대 아래에 초막을 짓고 살다가 죽으면서 이곳에 묻어 달라 하여 장사하였는데, 그후 기녀들이 이곳에 오르면 반드시 제주 한 잔을 그의 무덤에 올렸다 하며, 충주댐 수몰로 이장하여 강선대 위 양지바른 산에 이장하여 매년 관기두향의 넋을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다

 

제5 사인암

 

주 소 :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산27번지

 

대강면 사인암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맑은 운계천을 따라 명명된 운선구곡 중 제7곡에 해당되는 사인암은 우리고장 출신인 고려말 대학자 역동 우탁 선생이 사인 벼슬로 재직 할 당시 이곳에서 청유하였다하여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로 재임한 임재광 선생이 명명하였다.

 

수직으로 치솟은 석벽은 보는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절로 자아내고 있으며 조선시대 화원인 단원 김홍도를 비롯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남기거나 석벽에 각자 하기도 하였다.

 

제6 하선암

 

주 소 : 충북 단양군 단성면 대잠리

 

단성면 대잠리 575지방도 아래 위치한 하선암은 삼선구곡을 이루는 심산유곡의 첫 승지로 3층으로 된 흰 바위는 넓이가 백여척이나 되어 마당을 이루고 그 위에 둥글고 커다란 바위가 덩그렇게 얹혀 있어 가관인데 처음에는 부처바위로 불리다가 성종 때 군수 임재광이「선암」으로 고쳐불렀다. 후에 퇴계 이황선생이 하선암이라고 하였다.

 

거울같이 맑은 물이 주야장천 흐르고 있고 물속에 비친 바위가 마치 무지개 같이 영롱하여「홍암」이라고도 한다. 봄철에는 진달래와 철쭉, 여름에는 운무,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적설노송이 절을 이루어 조선시대의 많은 화원들이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제7 중선암

 

주 소 : 충북 단양군 단성면 가산리

 

조선 효종조의 문신인 곡운 김수증 선생이 명명한 곳으로 삼선구곡의 중심지이다.

 

흰색의 바위가 층층대를 이루어 맑은 계류와 더불어 여름철 유람과 휴양지로서 최적의 절을 이룬다. 골짜기로 흐르는 맑은 물속에서 쌍용이 승천하였다는「쌍룡폭포」가 있고 백색의 웅장한 2개의 바위가 있으니 하나는「옥염대」또 하나는「명대」라 부른다. 옥염대 암벽에는 사군강산 삼선수석이라 대서특필한 각자가 있으니 이는 조선 숙종 43년 충청도 관찰사 윤헌주 선생이 특서한 것으로 사군이란 당시의 단양, 영춘, 제천, 청풍을 일컫는다.

 

도락산의 흰 바위와 노송이 느릿느릿 내려 있고 화강암석의 빛과 맑은 하늘의 구름이 중선암 물에 비쳐있는 절에 반해 조선시대부터 수많은 명현 묵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아 현재까지 전해지는 바위에 각자된 이름만도 300명이넘는다.

 

8 상선암

 

주 소 : 충북 단양군 단성면 별천리

 

크고 널찍한 바위는 없으나 작고 올망졸망한 바위들이 서로 모여 있는 모습은 소박하고 정겨운 한국인의 이웃을 연상케 한다.

 

그 주위는 만장의 청단대석이 벽을 이루고 계수는 반석사이를 용출하여 평평히 흐르다가 좁은 골에 이르러서 폭포가 되니 그 음향은 우레와 같고 튀는 물방울은 좌우종횡하여 관광객의 옷깃을 적셔주니 그 즐거운 선은 형용하기 어렵다. 양안의 기암과 밤낮없이 흐르는 계류의 청음은 울창한 숲에서 사방 우짖는 새소리와 함께 현유선객들의 탐승의 흥취를 돋워주고 있다.

 

2013.08.16.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제천시청 및 단양군청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