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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충북단양
chri**** 조회수 9,564 작성일2008.12.25

안녕하세염...

제가 충북 단양을 가려 합니다...

질문 들어가겠습니당..

1.초등학생들이가기조은 유적지

2.연개소문 촬영지

3.놀기조은곳

내공 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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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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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의 문화재 , 연개소문 촬영지 , 단양 8경을 올려드릴께요.

 

(문화재)

 

1.단양 신라적성비


종 목  국보  제198호 
지 정 일 1979.05.22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 
시 대 신라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2.단양 향산리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405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 471-1 
시 대 통일신라


단양읍에서 동쪽으로 16㎞ 떨어진 산골짜기의 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탑이다. 주변에 자기조각들과 기와가 널려 있어서 이 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고 있으나, 절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1935년경 탑 속의 사리를 도둑맞으면서 허물어졌던 탑을 마을 주민들이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형태이다. 기단은 여러 장의 길고 큰 돌로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쌓은 모습이며, 각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몸돌에도 모서리 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특히 1층 몸돌에만 문짝 모양의 조각이 있어 눈길을 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층마다 4단이고, 지붕돌 위에는 2단의 괴임돌을 두었다. 추녀 밑은 반듯하고, 지붕돌 윗면의 경사 역시 온화하여 네 귀퉁이의 선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머리장식받침)과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남아있다.

 

석탑의 형태가 우수하고 비례도 충실하며, 조각수법에서도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단정한 탑의 조형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3.온달산성


종 목  사적  제264호 
면 적 26,354㎡
지 정 일 1979.07.26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7 
시 대 신라


남한강이 보이는 성산의 정상부근을 돌로 둘러쌓은 산성이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 성산성이란 이름으로 있었던 기록이 있다.

 

벽의 안팎을 모두 비슷한 크기의 돌로 가지런히 쌓아 올린, 둘레 683m의 소규모 산성이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며, 우물터가 남아있고, 성벽 바깥부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배수구가 있다. 남서쪽 문터의 형식과 동문의 돌출부는 우리나라 고대 성곽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성의 북동쪽 남한강의 강변 절벽 아래에는 온달굴이라는 석회암 동굴이 있고, 성을 바라보는 북쪽 강 건너의 산에도 온달과 관계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아, 축성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4.단양적성


종 목  사적  제265호 
면 적 88,648㎡
지 정 일 1979.07.26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단양면 하방리 산3-1 
시 대 신라


단양 성재산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주위가 약 900m이나 대부분 붕괴되고, 북동쪽에는 안팎으로 겹쳐 쌓은 부분의 안쪽 성벽이 일부 남아있다.

 

성의 남서쪽, 남쪽, 동남쪽의 3곳에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성벽의 절단부가 있다. 북쪽은 남한강과 가파른 절벽의 자연적인 지리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다.

 

1978년 성내에서 적성비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관계 변동을 알 수 있다. 비석외에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도 있어 대략 고려 후기까지 오늘날의 단양지방을 다스리는 읍성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축성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있어, 신라의 성 쌓기 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5.단양 수양개 선사유적


종 목  사적  제398호 
면 적 110,842㎡
지 정 일 1997.10.10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182-1 
시 대 선사시대


단양 적성면 수양개에 있는 후기구석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에 걸친 유적이다. 남한강가 충적대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강을 끼고 있는 주위의 환경이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기에 적당한 곳으로, 발견된 석기들은 다양하고 당시 만들었던 기술도 특징을 보이고 있다.

 

특히 후기구석기시대에서 볼 수 있는 돌날몸돌과 자루를 끼울 수 있도록 슴베가 달린 찌르개는 중국 화북지방, 시베리아 남부지방, 일본 열도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에서 나온 석기들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연구자료가 된다.

 

구석기시대 유적 주변에서 초기철기시대 집터가 발견되었는데, 집터의 생김새가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어 중원지역 철기시대 생활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수양개 유적은 우리나라 선사문화와 동아시아 선사문화의 교류를 밝히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6.영천리 측백나무숲


종 목  천연기념물  제62호 
면 적 54,347㎡
지 정 일 1962.12.03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매포읍 영천리 산38 


측백나무는 중국 및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단양, 달성, 안동, 영양 등지에서 자라고 있다. 절벽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이루는 경우가 많으며, 주변환경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주택과 마을 주변에 많이 심고 있다.

 

영천리의 측백수림은 단양에서 제천에 이르는 국도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 100m 남짓한 석회암지대에 있다. 나무의 높이는 1∼2m정도로 띄엄띄엄 자라고 있으며, 주변에 뚜렷한 숲이 구성되어 있지 않아 겉에서 보면 측백나무만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갈기조팝나무 등 석회암지대에 주로 자라는 나무들도 발견되고 있다.

 

영천리의 측백수림은 측백나무가 석회암지대에 잘 자란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본이 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 몇 개 없는 측백나무 자생지가 단양, 달성, 안동, 영양 등의 먼거리에 작은 집단으로 자라고 있는 것은 식물군락학상 또는 집단유전학상 연구가치가 매우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7.소백산 주목군락


종 목  천연기념물  제244호 
면 적 329,310㎡
지 정 일 1973.06.20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 산59-1 


주목은 우리나라, 일본, 만주, 우수리, 소련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백산·태백산·오대산·설악산 등 높은 산악지대나 추운 지방에서 주로 자라며, 나무의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에 정원수로 많이 쓰인다.

 

소백산의 주목군락은 비로봉의 정상부 서쪽에 100여 그루의 오래된 주목이 모여 자라고 있으며, 줄기가 꼬이고 곁가지는 아래 위로 굴곡을 만들어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대부분 나무의 높이는 7m 정도이고, 둘레는 일정치 않으나 2m 정도에서 밑으로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다. 이는 강한 바람과 눈이 원인인 듯하다. 주변에는 벚나무, 개암나무, 신갈나무 등이 자라고 있으며, 능선 근처에는 우리나라 특산종인 모데미풀의 집단이 있다.

 

소백산의 주목군락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주목군락지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8.고수리 동굴


종 목  천연기념물  제256호 
면 적 60,199㎡
지 정 일 1976.09.01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단양읍 고수리 산4-2외 


단양 고수리 동굴은 남한강 상류 충주호반의 단양읍 금곡천 냇가에 있다. 총길이는 1,200m이나 현재 공개하여 관광코스로 이용하고 있는 구간은 600m 이며, 안쪽의 나머지 지역은 동굴 환경을 보존하기 위하여 출입통제 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동굴 내부에는 동굴의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사자바위를 비롯하여, 웅장한 폭포를 이루는 종유석, 선녀탕이라 불리는 물 웅덩이, 7m 길이의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석순과 종유석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 등이 많다. 그 밖에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다리, 굽어진 암석, 꽃모양을 하고 있는 암석, 동굴산호, 동굴진주 등 희귀한 암석들도 많다.

 

단양 고수리 동굴은 고생대의 석회암층에서 만들어진 석회동굴로서 그 학술적 가치가 크며 다양한 동굴 생성물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9.온달동굴


종 목  천연기념물  제261호 
면 적 349,485㎡
지 정 일 1979.06.18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2외 45필 


온달동굴은 옛날 온달 장군이 성을 쌓았다는 온달성의 밑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동굴의 총길이는 700m이며, 연한 회색의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굴의 입구가 남한강변에 있어, 강물 수위가 높아지면 동굴이 물에 잠겨 동굴에 사는 생물은 찾아볼 수 없다. 강물이 동굴 내부를 깍아내려 비교적 단조로운 형태이며 동굴 안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와 동굴의 물웅덩이에서 사는 생물의 다양한 생태를 볼 수 없다. 그러나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이 여기저기에 많이 있다.

 

온달 동굴은 지형경관이 아름답고, 지질학적 연구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0.노동동굴


종 목  천연기념물  제262호 
면 적 314,077㎡
지 정 일 1979.06.18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단양읍 노동리 산1외 23필 


노동동굴은 남한강 줄기가 충주호 북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노동천 부근에 있으며 동굴의 총길이는 약 800m이다. 동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굴 안은 경사가 급하다.

 

동굴 안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 등 동굴 생성물이 잘 발달되어 있다. 동굴 중간의 수직벽 밑에는 토기 파편이 흩어져 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1592) 당시 주민들이 이곳으로 피난했던 흔적이라고 한다.

 

노동동굴은 동굴 내에 갖가지 지형지물이 생겨 있고 종유폭포, 석주, 석순 등 2차 생성물이 잘 발달하여 지질학적 연구자료로서의 가치가 크고 동굴 경관이 아름다워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1.단양 조자형 가옥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45호 
면 적 1,236㎡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가곡면 덕천리 49 
시 대 조선시대


남한강 줄기를 끼고 깊은 산골에 자리하고 있는 19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행랑채가 튼 ㅁ자형으로 이루어진 민가형식의 집이다.

 

ㄱ자형의 안채는 19세기 중엽 정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우수한 건물이다. 대청 앞쪽으로 툇마루가 있고, 부엌과 안방 뒷쪽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평면은 중부 내륙지방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남쪽에 부엌 2칸과 뒤에 2칸의 안방이 있으며, 꺾어져서 2칸의 대청과 작은방이 배치되어 있다. 부엌 남쪽에는 아랫방이 붙어있는데 이것은 남도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작은방 앞에는 마루시설 없이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행랑채는 원래 一자형이었으나, 근래에 행랑방을 지어서 ㄱ자형 집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구성은 오른쪽부터 광·마구간·대문간·문간방이 있으며, 안으로 꺾어져서 2칸의 행랑방이 있다.

 

이곳은 대문간이 동북향이고 안채의 대청이 동남향을 하고 있어, 일반적인 살림집과는 다르게 행랑채 대문간이 돌아앉아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또한 가옥의 구성이 튼 ㅁ자형에서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안채를 ㄱ자형으로 구성한 집이 이 지역에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할 만 하다.
 


12.우화교 신사비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0호

지 정 일 1981.05.01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단양면 하방리 산1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영조 29년(1753) 단양군수였던 이기중이 단양천에 돌다리를 만든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다리는 ‘우화교’라 이름지었는데, 큰 홍수로 인해 파괴되고 현재는 이 비만 남아 있다. 비는 네모진 받침 위에 길쭉한 직사각형의 비몸을 세웠다. 비문에는 다리를 설치할 때 참여한 사람들과 목공, 토공, 석공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다리를 놓은 그 이듬해인 영조 30년(1754)에 이 비를 세웠다. 


13.영춘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6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리 461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정종 1년(1399)에 세워진 영춘향교는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졌다. 광해군 6년(1614)에 남천리로 옮겨 지었으나 불이나서 정조 15년(1791)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교직사 등이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고, 명륜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이다. 이곳의 건물 배치는 명륜당과 대성전이 위·아래로 배치되어 있는 다른 곳과는 달리 명륜당이 대성전의 오른쪽 앞에 위치한 특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 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낸다. 

 

14.단양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단양읍 상방리 137-1 
시 대 조선시대

태조 15년(1415)에 세운 단양향교는 명종(재위 1545∼1567) 초기 이황이 군수로 있을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영조(재위 1724∼1776) 때 두 차례 고쳤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동재 등과 부속건물이 있다.

 

내삼문을 경계로 앞쪽에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배움의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제사공간을 이루고 있어 향교의 일반적 배치인 전학후묘를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제사만 지낸다. 


15.구인사 금동 구층소탑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9호

지 정 일 2001.07.13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 금동으로 조성한 9층의 이 소탑은 목탑형식을 따른 희귀한 양식의 탑이다. 기단부는 결실되었고 1층부터 5층까지는 분리와 조립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6층부터 상륜부까지는 하나의 구조물로 형성되었다. 또한 각 층의 처마에는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잘 남아있다.

 

 

16.구인사 아미타회상탱화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0호

지 정 일 2001.07.13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시 대 조선시대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한 아미타불후불탱화로서 극락구품도를 묘사하였다. 화면 가운데 본존불인 아미타불을 크게 그리고 그 주위로 많은 권속들이 둘러 싸고 있다. 아미타불은 연꽃대좌에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 위로 올리고 왼손은 무릎위에 올려놓은 모습이다. 몸 주위로는 머리광배와 몸광배가 표현되었다. 본존의 양 무릎 아래쪽으로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과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세지보살이 그려져 있고, 본존의 양옆과 화면 위쪽에는 여러 보살과 승려, 팔부중의 모습이 있다. 화면의 네 귀퉁이에는 각기 지물을 들고 있는 사천왕상의 모습이 보이는데, 특히 사천왕의 장신구는 금박으로 장식하여 화려하다.

 

조선 정조 10년(1786)에 제작된 이 불화는 안정적인 구도와 주로 녹색과 붉은색을 사용한 아름다운 채색, 섬세한 선의 표현 등 미술사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7.죽령산신당


종 목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3호

면 적 900㎡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산49-9 
시 대 조선시대


산신당은 한국의 토속신인 산신 곧 산신령을 모시는 곳으로, 마을과 절을 수호하는 기능을 가진다.

 

용부원리 마을의 산 중턱에 자리한 이 산신당 내부에는 ‘죽령산신지위’라 적은 위패를 모셔두고 있다. 죽령산신을 모시는 곳으로, 마을에서는 죽령산신을 ‘다자구 할머니’라고 부르고 있어 이 건물 역시 ‘다자구할머니당’이라 칭하고 있다. 다자구할머니를 죽령산신으로 모시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이곳에는 산적들이 밤낮으로 나타나 백성을 괴롭혔는데, 산이 험준하여 관군도 산적을 토벌하기 힘들었다. 이 때 한 할머니가 나타나서 산적소굴에 들어가 ‘다자구야’하면 산적이 자고 있는 것이고, ‘덜자구야’하면 도둑이 안자고 있는 것으로 관군과 계획을 짰다. 두목의 생일날 밤 술에 취해 산적이 모두 잠들자 할머니가 ‘다자구야’라고 외쳐 이 소리를 들은 관군이 산적을 모두 소탕할 수 있었다. 나라에서는 이러한 할머니의 공적을 기리도록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고, 조선시대에는 죽령사라는 사당을 지어 관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으나, 현재는 제사 규모가 많이 축소되어 마을에서 매년 3월과 9월에 마을의 복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신당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1948년 3월 8일에 주민의 성금으로 새로 고쳐 만들어졌다. 제사의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지금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죽령산신당에 대한 믿음이 깊이 남아있다.

 

드라마 '연개소문' 촬영세트장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147번지 온달관광지 내  

 
* 주요내용

역사의 이면에 함몰되어있는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저력과 웅지를 가장 잘 대변했던 초강대국이었다. 광활한 대륙으로 영토를 넓혔던 광개토대왕, 수나라를 무너뜨린 을지문덕, 당태 종 이세민을 무릎꿇린 연개소문. 이들이 있었기에 고구려는 중국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한을 축소 통일한 이후 고구려의 영웅들에 관한 역사는 왜곡되고 폄하되어 사라졌다.

 

특히 연개소문은 중국이 쓴 역사에 의해 철저하게 부정적으로 그려졌으며 우리의 역사서도 그들의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수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작금의 현실을 더 심각하다.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역사기만 획책하여 고구려 역사 없애기에 급급하고 있다. 이 드라마는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그가 살았던 격동의 세월을 극화하여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묻혀있는 고구려의 역사를 되살리고자 한다. 아울러 민족의 혼과 정기를 일깨워 세계를 웅비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 규모 - 13,720㎡ (47개 건물)

 

이용가능시설
세트장
* 수·당황궁 및 정문 / 황궁 좌·우측지 누각 및 문과 회랑
* 이밀, 이연, 양현감, 홍불화등 주요인물의 저택 및 처소, 부속채
* 낙양성문 / 강도의 이궁과 정자, 연못 / 태자궁문 및 병풍비석
* 수·당거리 재현 (상점등)

입 장 료
온달관광지 (촬영장,산성,동굴,테마관광지 등 4곳 패키지)
성 인 - 개인(5,000원) 단체(4,000원)
학 생 - 개인(3,500원) 단체(2,500원)
어린이 - 개인(2,000원) 단체(1,500원)
※ 단체는 30명 이상

(단양팔경)


제1경  도담삼봉     

 
위 치  충북 단양군 단양읍 도담리 195 

 

남한강의 맑고 푸른물이 유유히 흐르는 강 한가운데 만수시 6m의 늠름한 장군봉(남편 봉)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교태를 머금은 첩봉(딸봉)과 오른쪽은 얌전하게 돌아 앉은 처봉(아들봉)등 세봉우리가 물 위에 솟아 있다. 이곳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자신 의 호를 삼봉이라 할 만큼 젊은 시절을 이곳에서 청유하였다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둔 남편을 미워하여 돌아 앉은 본처의 모 습을 하고 있는데 살펴볼수록 그 생김새와 이름이 잘 어울려 선조들의 지혜와 상상력 이 감탄스럽다.

 

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때 떠내려와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으며 그 이후 매년 단양에서는 정선군에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어린 소년 정도전이 "우리 가 삼봉을 떠내려 오라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어 아무 소용이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필요하면 도로 가져가라"고 한뒤부터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장군봉에는 '삼도정'이라는 육각정자가 있는데, 일찍이 퇴계 선생은 "산은 단풍잎 붉 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녘놀 드리웠네 별빛 달빛 아래 금빛파도 어울어지더라"는 주옥같은 시 한 수를 남겼다.

 

도담삼봉 주변에는 1998년 음악분수대가 설치되어, 도담삼봉과 석문을 찾는 관광객이 피로를 풀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고 특히 야간에 분수대에서 춤을 추는 듯한 물 줄기는 한층 더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제2경  석문     

 
위 치  충북 단양군 매포읍 하괴리 

 

석문은 도담삼봉 근처에 있으며, 도담삼봉에서 상류로 200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 강변으로 수십 척에 달하는 무지개 모양의 석주가 나타나는데 두개의 커다란 바위 기둥 을 또 하나의 바위가 가로질러 천연의 문을 이룬 기암가경이다.

 

석문 왼쪽에 석굴이 있고 석굴 안에는 신선이 갈았다는 옥답이 있다. 이 옥답의 전설은 옛날에 하늘 나라에서 물을 기르러 내려왔다가 비녀를 잃어버린 마고 할미가 비녀를 찾으려고 흙을 손으로 판것이 99마지기의 논이 되었으며 주변 경치가 하 늘나라 보다 더 좋아 이곳에서 평생을 농사지으며 살았는데 넓은 논은 선인들이 농사를 지었다 하여 「선인 옥답」이라 불렀다 한다.


제3경  구담봉


위 치  충북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14-2 (장회나루)


구담봉은 기암절벽의 암형이 거북을 닮았고 물속의 바위에 거북무늬가 있다 하여 구담이라 하며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선생이 지은 이름이다.

 

부근의 제비봉과 어우러진 수려한 경관은 충주호 수상관광 코스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경관으로 알려져 있으며,충주호 유람선 관광의 거점지역이기도 하다.


조선 인종 때 백의재상이라 불리던 이지번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푸른 소를 타고 강산을 청유하며 칡넝쿨을 구담의 양쪽 언덕에 매고 비학을 만들어 타고 왕래하니 사람들이 이를 보고 신선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4경  옥순봉


위 치  충북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


옥순봉은 원래 청풍에 속해 있었는데 조선 명종 때에 관기 두향이가 단양 군수로 부임하는 퇴계 이황 선생에게 옥순봉을 단양군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퇴계 이황 선생이 청풍부사에게 청을 하였으나 청풍부사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퇴계선생이 석벽에 '단구동문'이라는 글을 암각하여 이곳을 단양의 관문이며 군경계로 정했다고 한다. 뒤에 청풍부사가 남의 땅에 군계를 정한 자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옥순봉에 가보니 글씨가 힘차고 살아있어서 누구의 글씨냐고 묻자 퇴계의 글씨라고 하니 감탄하면서 옥순봉을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옥순봉은 소금강이라는 별칭을 가질 정도로 비경인바,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연산군 때 문신 김일손도 이곳을 탐승하면서 절경의 협곡을 극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주변에는 강선대와 이조대가 마주보고 있으며 특히 강선대는 높이 15m의 층대가 있고 대위에는 100여명이 앉아 놀수 있는데 호서읍지에 의하면 당시의 관기 두향이 풍기군수로 전임한 퇴계 이황을 그리면서 강선대 아래에 초막을 짓고 살다가 죽으면서 이곳에 묻어 달라 하여 장사하였는데, 그후 기녀들이 이곳에 오르면 반드시 제주 한 잔을 그의 무덤에 올렸다 하며, 충주댐 수몰로 이장하여 강선대 위 양지바른 산에 이장하여 매년 관기두향의 넋을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다.

 

제5경  사인암     

 
위 치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25 

 

사인암은 선암계곡의 상.중,하선암과 함께 단양군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단양팔경 중 하나 인 명승지로 단양 남쪽 남조천변의 푸르고 깊은 계류를 끼고 있는 높이 70m의 기암절벽이다.

 

사인암이란 이름은 고려말의 대학자 우탁(1263~1343년)이 사인(정4품 벼슬)이란 벼슬에 있을 때 휴양하던 곳이란 사연에 따라 조선 성종 때 단양 군수 임재광이 명명했다. 단양팔경을 방문하는 관광객 대부분은 도로 여건상 사인암을 가장 먼저 방문하는 경우가 많 다. 사인암 앞으로 흐르는 계곡을 운선구곡이라 하며 단양팔경 중에서도 제일 빼어난 경승지 로 손꼽는다.

 

암벽에 "탁루불군 확호불발 독립불구 돈세무민" 즉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유할 것이 아니며 확실하게 빼지 못한다. 혼자서도 두려운 것이 없으며, 세상에 은둔해도 근심함이 없다"라는 우탁 선생 친필 각자가 있고, 암상에는 노송까지 곁들여, 마치 해금강을 연상하게 한다.


제6경  하선암


위 치  충북 단양군 단성면 대잠리 295


삼선구곡을 이루는 심산유곡의 첫 경승지로 3층으로 된 흰바위는 넓이가 백여척이나 되어 마당을 이루고 그 위에 둥글고 커다란 바위가 덩그렇게 얹혀있는데, 그 형상이 미륵 같아 <불암>이라고도 불리운다. 그 바위는 조선 성종조 임재광 선생이 신선이 노닐던 바위라 하여 <선암>이라 명명하였는데 거울같이 맑은 명경지수가 주야장천 흐르고 있고 물속에 비친 바위가 마치 무지개 같이 영롱하여 <홍암>이라고도 한다.

 

봄철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가을에는 단풍이 어우러진 장관은 가히 별천지라 이를 만하다. 특히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제7경  중선암


위 치  충북 단양군 단성면 가산리 877


조선 효종조 문신인 곡운 김수증이 명명한 곳으로 삼선구곡의 중심지이다. 순백색의 바위가 층층대를 이루고 맑은 물이 그 위를 흐르고 있어 여름철의 가족 단위 휴양지로 적합하다.

 

암계류에서 쌍룡이 승천하였다 하여 <쌍룡폭>이라고도 칭하며 백색의 웅장한 2개의 바위는 각각 <옥염대>와 <명경대>라 불리어 온다. 옥염대 암벽에는 <사군강산 삼선수석>이라 대서특필한 각자가 있는데 이는 조선 숙종 43 년 관찰사 윤헌주가 특서한 것으로 사군이라는 것은 당시의 단양, 영춘, 제천, 청풍을 이른다.


제8경  상선암


위 치  충북 단양군 단성면 가산리 산 69-16


크고 널찍한 바위는 없으나, 작고 올말종망한 바위들이 서로 모여있는 모습은 소박하고 정겹다. 맑은 벽계수가 용출하여 반석 사이를 평평히 흐르다가 좁은 골에 이르러 폭포가 되어 구름다리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 소리는 우레 같고 튀는 물방울은 보는 이의 옷깃을 적신다.

 

조선 명종조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 수암 권상하가 명명하였으며, 그는 이곳에 소박한 초가정자를 짓고 "신선과 놀던 학은 간 곳이 없고 학같이 맑고 깨끗한 영혼이 와 닿는 그 런곳이 바로 상선암일세"라며 욕심없는 인생을 즐겼다 한다.

출처 : 문화재청,한국관광공사 및 단양군청

 

 

2008.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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