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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원경

[ 元卿 ]

요약 고려 후기의 관인이다.
출생-사망 ? ~ 1302
국적 한국
활동분야 정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중찬(中贊) 원부(元傅)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원부가 원나라를 자주 왕래한 까닭에 그도 어릴 때부터 몽고어를 배워 능숙하였다.

1276년(충렬왕 2) 중랑장으로 재임 중 왕명을 받고 지방으로 가서 세력을 믿고 백성에게 행패를 부리는 응방(鷹坊)의 관원들을 규찰하고 돌아왔다. 1283년 응방도감이 설치되자 부사(副使)에 임명되었고, 1285년 낭장 최세연(崔世延)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매를 바치고 돌아왔는데, 이후로도 여러 번 매를 바치러 원나라에 파견되었다.

1289년에는 대장군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충렬왕이 원나라에 내조할 것을 청하였고, 이듬해에는 원나라에 가서 일본이 변경을 침범함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고 돌아왔다. 1292년 원나라의 요양로(遼陽路)에 가서 1259년(고종 46) 이후로 원나라에 잡혀간 사람과 물건을 조사하여 되찾아왔다. 1295년 좌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부밀직사사에 올랐으며, 1297년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원나라에 가서 공주의 죽음을 알리고 돌아왔다. 1299년 만호 인후(印侯)·김흔(金忻) 등과 함께 왕명도 없이 만호 한희유(韓希愈) 등을 체포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다.

그 뒤 사면되어 삼사사(三司使)·중경유수(中京留守)·과의군도지휘사(果毅軍都指揮使)·동지밀직사사·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원나라의 세조로부터 무략장군 정동행중서성도진무(武略將軍征東行中書省都鎭撫)에 임명되어 금부(金符)를 받았으며, 제국대장공주의 겁령구(怯怜口)로 고려에 와서 권세를 부리던 인후와 사돈을 맺고 많은 행패를 부렸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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