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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비정신의 미학 (9)] 절용·애민·청렴의 청백리 계서 성이성 

그의 암행어사 행적이 ‘춘향전’ 이몽룡의 모델이 됐다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효종이 사관을 국문하는 것은 언로 막는 것이라 직언, 강직함 높이 산 숙종은 그의 초당 찾아 묵었다는 전설도… 청렴함 인정받아 네 차례나 암행어사로 발탁돼 감찰 활동

▎경북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세워진 계서정. 계서 성이성의 13대 종손 성기호(75) 씨가 초당이 정자로 바뀐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 7월 진경준(49) 검사장이 현직 검사장급으로는 처음으로 구속됐다. 그는 앞서 3월 공직자 재산공개에서 156억원을 신고했다. 이 가운데 주식을 팔아 단번에 얻은 수익이 126억원이었다. 진 검사장은 공무원 중 재산 증가액 1위를 기록했다. 넥슨의 비상장주식을 2005년에 구입해 상장한 뒤인 2015년 팔아 얻은 수익이었다.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조사를 벌이고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진 검사장은 결국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사정기관 고위 공직자의 마비된 윤리의식을 보면서 국민은 엄청난 상실감을 느꼈다. 박근혜 정부 ‘도미노 부패’의 서막이었다.


이어 9월에는 공무원과 교원·언론인 등을 대상으로 부정청탁을 금지하는 이른바 ‘김영란법’이 시행됐다. 청렴이란 주제가 많은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유교가 통치 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 유교의 바탕은 선비정신이다. 물론 그 시대도 이른바 청백리(淸白吏)도 있고 탐관오리도 있었을 것이다. 청백리의 ‘청백’은 재물에 욕심이 없고 깨끗하고 곧다는 뜻이다. 조선의 청백리를 통해 국정 혼돈의 시대에 공직자의 자세를 다시 생각해본다.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란 관리가 있었다.

1651년 효종 2년. 성이성은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있었다. 임금 옆에서 바른말을 하는 역할이다. 효종 임금은 어느 날 사관(史官) 이명익이 경연(經筵: 임금이 신하들과 국정 등을 협의하는 자리)에서 나온 청나라 북벌과 관련된 일을 입 밖에 냈다 하여 그를 국문(鞠問: 임금이 직접 하는 신문)하겠다고 했다. 이에 성이성은 “그런 일로 사관을 국문까지 하는 것은 언로를 막는 것”이라고 간언한다. 그의 직언에 임금은 불같이 화를 냈다. 이조판서 정세규가 사태를 수습하려 애썼지만 임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성이성은 그 길로 관직을 물러난다. 그는 사간으로 있는 동안 직언으로 일관했다. 그 때문에 성이성은 식년문과(式年文科)에서 병과로 급제하고도 주위의 시기로 승진이 순조롭지 못했다.

직언 일삼다가 임금 노여움 사면서 낙향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있는 계서종택의 사랑채인 계서당. 본래는 초가였지만 아들이 처가 재산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성이성은 낙향했다. 그는 외가 맞은편에 띠집(초당)을 짓고 지낸다.

11월 3일 경북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계서초당(溪西草堂)’을 찾았다. 성이성이 당시 머물렀던 곳이다. 계서 선생의 13대 종손인 성기호(75) 씨가 길을 안내했다.

초당 앞으로 냇물이 흐르고 뒤는 야트막한 산이 휘감아 두른 곳이다. 번잡함을 싫어한 청백리의 고고한 기운이 느껴지는 지세다. 아쉽게도 지금은 초당 앞으로 영주-울진 간 36번 국도가 고가 형태로 뚫리면서 주변이 산만해졌다. 초당 앞에는 고목이 된 회화(槐花)나무가 앙상하게 서 있었다. 400년이나 제자리를 지켰을 나무다. 회화나무는 선비의 기개를 상징한다.

계서초당은 그 뒤 ‘계서정(溪西亭)’으로 이름이 바뀐다. 정조 시기다. 초당은 세월이 지나면서 비바람에 시달려 주춧돌과 섬돌이 기울고 넘어졌다. 후손은 그 터에 새로 집을 지었다. 그는 방 한 칸이던 초당에다 툇마루와 방 하나를 덧붙여 증축했다. 띠로 덮은 지붕은 오래 유지되도록 기와로 교체했다. 그는 기와를 올린 뒤 조상의 청빈 정신을 훼손한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후손은 병조판서 채제공을 찾아 그 뜻을 전하고 계서정의 내력을 담은 기문(記文)을 부탁한다. 지금 이곳의 현판은 ‘계서정’이다. ‘계서초당’이란 편액은 정자 안에 걸려 있다. 영주시는 지난해 4억원을 들여 계서정을 재단장했다. 낙향한 지 2년 뒤인 1653년 성이성은 창원부사로 다시 부름을 받는다.

계서초당에는 숙종 임금이 세자 시절 성품이 강직한 성이성을 그리워해 몰래 찾아와 하룻밤을 머물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초당 뒷산의 오솔길을 따라 임금님이 왔다고 해요. 지금도 뒷산을 왕산(王山)이라 부릅니다. 임금님은 이곳에서 하룻 밤을 묵었다 갔답니다. 그래서 계서정을 ‘어와정(御臥亭)’으로 부르기도 해요.” 종손 성씨는 집안에 대대로 전해온 계서정에 관한 일화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청백리 성이성의 이력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암행어사 직책이다. 그것도 4차례나 지냈다. 청렴하다는 평을 듣지 않고 발탁되기 어려운 자리일 것이다. 1637년 2월 관리들의 정사와 민원을 살피고 임금께 보고하는 경상도 진휼어사를 시작으로 그해 7월에는 호서 암행어사를 맡았다. 또 46세와 53세에 호남 암행어사를 두 차례 더 지냈다.

성이성의 호남 암행어사 시절 이야기는 그 유명한 <춘향전>의 바탕이 된다. 소설의 주인공 이몽룡이 실존인물 성이성을 모델로 했다는 건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설성경(72) 연세대 국문과 명예교수가 이 학설을 대표한다.

성이성이 남긴 <계서일고> 중 ‘호남암행록’에는 <춘향전>의 탄생을 암시하는 글이 등장한다. 두 번째 호남 암행어사를 맡았을 때다. 1647년 12월 초하루의 일기는 이렇다.

<춘향전>의 배경이 된 호남 암행어사 행적


▎계서정의 문을 열면 성이성이 낙향해 띠집을 지었던 시절의 ‘계서초당’이란 현판이 나온다.
“날이 밝아 길을 떠나니 10리 못 미치는 곳이 남원 땅이었다. (…) 부사 송흥주가 마중 나와 진사 조경남 댁에 자리를 마련했다. 조 진사는 내가 어릴 때 송림사에서 공부를 가르쳐주던 분이다. 기묘년 역시 암행으로 이곳을 지날 때 진사를 뵙고 광한루에서 같이 누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제 그는 운명하고 없다. (…) 오후에 광한루에 도착하니 늙은 기생 여진과 늙은 아전 강경남이 와서 절했다. 날이 저물어 기생 등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小童)·서리(書吏)와 함께 광한루 난간에 앉으니 (…) 소년시절 일을 생각하며 깊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설성경 교수는 “성이성의 기록은 그가 직접 옛 연인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앞뒤 정황으로 보아 틀림없이 연인을 그리워한 대목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소년시절 일’은 기생인 춘향과의 만남으로 추정한다. 성이성의 아버지 성안의(成安義, 1561∼1629)는 실제 5년 동안 남원부사를 지냈다. 성이성은 아버지를 따라 13세부터 18세까지 남원에 있었다. 그는 남원에 머무는 동안 기생을 사귀었고 수십 년이 흐른 뒤 암행어사가 돼 남원을 찾은 것이다. 성이성은 다시 옛 연인을 만나려 했지만 그 기생은 죽고 없었다는 게 설 교수의 주장이다.

<춘향전>의 클라이맥스는 ‘암행어사 출두’ 장면이다. 성이성의 4대손 성섭(成涉, 1718∼1788)은 <교와문고(橋窩文藁)>에서 자신의 고조 성이성이 남원 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두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 고조가 암행어사로 호남에 갔을 때 한 곳에 이르니 호남 12읍의 수령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한낮에 암행어사가 걸인 행색으로 음식을 청하니, 관리들이 말하기를 ‘객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 자리에 종일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라’ 했다. 곧 한 장의 종이를 청해 시를 써주었다.

‘樽中美酒千人血/ 盤上佳肴萬姓膏/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준중미주천인혈/ 반상가효만성고/ 촉루락시민루락/ 가성고처원성고: 동이의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상 위의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성 소리 높더라).’

여러 관리가 돌려가며 보고는 의아해 할 즈음 서리들이 암행어사를 외치며 달려들었다. 여러 관리는 일시에 흩어졌다. 당일 파출시킨 자가 여섯이나 됐다.”

사정기관 청백리의 엄정한 법 집행 모습이다. 1639년 성이성은 암행어사를 마친 뒤 합천현감이 된다. 외직의 기관장은 예나 지금이나 부패의 유혹이 많은 자리다. 그의 손자 사위 권두인은 성이성의 행장(行狀)에 당시를 이렇게 적었다.

“합천현감이 되어서는 청렴하게 스스로를 지키고 백성을 어린아이 보살피듯 했다. 녹봉을 털어 전임 현감이 축낸 수백석의 곡식을 채웠고 학교를 진흥시켰다. 당시의 감사(관찰사)와 병사(兵使, 병마절도사)가 위세를 떨치고 포악해 아랫사람들에게 무례했는데 공에게는 감동해 깎듯이 예우했다. 가끔씩 감영에 비축된 곡식을 꺼내 굶주린 백성에게 나눠 주니 백성들이 혜택을 보았다.”

청렴한 현감 한 사람이 자기 관할구역은 물론 관찰사의 마음을 움직여 여러 고을까지 굶주림에서 구한 것이다. 성이성은 외직으로 담양·창원·진주·강계 등 다섯 고을을 다스렸다. 진주목사로 있을 때도 두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성이성은 진주의 장례 풍속을 바꿔 놓았다. 그 고장 서민들은 사람이 죽으면 산기슭에 이엉으로 덮고 오래도록 매장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그는 상을 당한 이웃이나 친척이 힘을 모아 반드시 매장하도록 유도했다. 처지가 딱하면 관청에서 물자와 식량을 지원했다. 점차 매장이 자리 잡았다.

원칙 지키다 엉뚱하게 비방 들어도 개의치 않아


▎계서정 인근 왕산 자락에 들어선 성이성의 묘. 묘터는 청백리답게 앞자리가 좁고 봉분은 일반보다 조금 크며 문인석은 자그마하다.
암행어사가 진주에서 훈련 사열을 했을 때의 이야기도 남아 있다. 암행어사 민정중이 사열을 마친 뒤 향연을 베풀고 상벌을 줄 때다. 병사는 촉석루에서 크게 놀음놀이를 벌여 어사의 환심을 사려 했다. 성이성은 그걸 제지하고 막아버렸다. 이에 어사는 오히려 감복했다. 그는 조정에 들어가 보고했고 포상으로 표리(表裏, 옷감) 한 벌이 하사됐다. 진주성에는 지금도 성이성의 청덕비(淸德碑)가 남아 있다고 한다.

강계부사로 있던 어느 날은 아전이 “감영에서 비장(裨將)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고 보고했다. 성이성은 삼(蔘) 때문일 것으로 짐작했다. 공무라면 군사편으로 공문을 보낼 텐데 비장이 공문을 옷소매에 지니고 와서 수령에게 부탁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받지 않았다. 비장이 화를 내고 돌아가 감사에게 보고한다. 감사는 “그 사람이 그렇듯 엄정하니 비록 상사로도 어찌할 수 없구나”라며 감탄했다. 뒷날 한양에 올라가 “성모(成某) 같은 이는 지금 세상에 한 사람뿐”이라 칭찬했다. 그는 또 삼세(蔘稅)를 면제시켜 ‘관서활불(關西活佛)’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한다.

성이성은 벼슬에 있을 때는 절용(節用)·애민·청렴을 첫째로 삼아 한결같이 법을 지켰다. 그래서 누구도 감히 그에게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 못했다. 관청은 안과 밖을 엄격히 격리시켜 관속들도 술 한 잔, 국 한 그릇도 사사로이 쓰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간혹 엉뚱하게 비방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손님이 오면 아무리 낮고 미천한 사람이라도 한결같이 후하게 대접했다.

1695년(숙종 21) 성이성은 청백리로 녹선(錄選)됐다. 조정은 자손들에게 녹봉으로 쌀과 콩을 하사했다. 조선 500년 동안 청백리에 녹선된 수는 정확히 헤아릴 수 없다. 다만 명단이 기록돼 있는 <전고대방(典故大方)>에 217명, 경종·정조·순조대가 빠진 <청선고(淸選考)>에 186명이 실려 있다.

계서초당 답사에 앞서 기자는 이날 성이성이 나고 자란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계서당(溪西堂)에 미리 들러보았다. ‘계서종택’이라고도 한다. 봉화읍에서 내성천 상류를 따라 8㎞쯤 떨어져 있다. 안내판엔 아예 ‘춘향전 이몽룡 생가’라고 적혀 있다. 부친 성안의가 임진왜란을 피해 고향 창녕에 기거하던 부모를 이곳으로 이주시키면서 터를 잡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임을 직감케 한다. 솟을대문에 성이성이 암행어사 출두 때 적은 시가 걸려 있다. 계서당은 본래 50칸 규모였다고 한다.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이다. 마침 이날 서울 관광객 수십 명이 러브스토리의 고향을 찾았다.

청백리의 ‘화려한’ 생가가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종손 성씨가 설명했다. “본래는 허름하고 좁은 초가였답니다. 장남(성갑하)이 닭실마을 권씨 집안으로 장가를 들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사돈이 끼니를 굶는 집안 형편을 보고 ‘십리들’을 딸 앞으로 넘겼답니다. 권씨 집안에 관련 문서가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걸 밑천으로 후손들이 종택 건물을 하나씩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채와 사랑채의 건립 연도가 서로 다르다. 집안은 청백리 후손답게 살림살이가 편하게 여기저기 놓여 있다.

계서당 오른쪽에는 계서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4대 봉사를 넘어 대대로 제사를 모시는 이른바 불천위(不遷位)다. 임금이 내린 시호(諡號)를 물었더니 종손은 “없다”고 했다. 그는 “나라가 아닌 유림이 뜻을 모아 내린 불천위”라며 “그래서 더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계서의 5대 종손 성언극은 ‘전백당(傳白堂)’이라는 호를 쓰며 후손들에게 청백리의 정신을 전했다.

끼니 굶는 며느리 덕분에 청백리 집 초가 면해

방문한 날 종손 내외는 이틀 뒤 예정된 묘제(墓祭) 준비로 바빴다. 영주 이산면 계서정 뒤 왕산의 능선을 따라 10분쯤 내려가면 성이성의 묘가 나온다. 청백리의 묘는 보통보다 조금 큰 봉분에 문신석이 좌우에 하나씩 서 있고 오른쪽엔 비석이 있었다. 작은 소나무들이 묘를 감싼 조촐한 곳이다. 종손은 비석을 짚어가며 비문을 차례로 읽어 내렸다. 오위도총부 부총관 오광운이 지은 비문의 마지막은 이렇다.

“신하의 도리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임금을 섬김에 충직하고/ 백성에 임하여선 은혜롭고 벼슬살이에는 청백함이라/ 공에게 능한 것은 진실로 이 세 가지이고/ 능하지 못한 것은 명예와 지위를 얻음일세.”

묘터는 앞 자리가 좁고 가팔라 명당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성이성은 만년에 사는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살림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토지가 읍 가까이에 있자 친지들이 집터로 혹은 묘터로 달라고 하면 다 내주었다. 주식 특혜로 수백억원을 챙긴 진경준 검사장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권력과 부귀를 멀리 한 조선의 청백리는 자신이 누울 자리마저 여유 있게 남겨두지 않았던 것일까.

-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박스기사] <춘양전> 이몽룡과 암행어사 성이성 - 어사화 판에 적힌 “광한루에 퍼지는 꽃향기”


▎계서 성이성의 유물 ‘사선(얼굴 가리개)’(왼쪽). 성이성이 과거에 급제해 받은 어사화(위). 조선 인조가 성이성에게 준 담양부사 교지(敎旨). 요즘으로 치면 임명장에 해당한다.
성이성의 13대 종손 성기호(75) 씨는 2014년 집안에 내려온 유물 700여 점을 경북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당시 기탁한 유물은 성이성이 과거 급제 때 받은 어사화를 비롯해 호남에서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일기로 쓴 ‘암행록’, 관직 임명장인 교지 등이다. 눈길을 끈 것은 어사화를 보관하는 어사화 판이다. 어사화 판에는 일반적으로 적혀 있는 ‘문과 급제’ 등의 내용 대신 남원 광한루(廣寒樓)를 연상케 하는 ‘廣寒香萼(광한향악: 광한루에 퍼지는 꽃향기)’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다. 유물에서도 소설 <춘향전>이 떠오르는 이유다.

종손 성씨는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30년 전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종택에 내려온 유물을 보관하는 데 어려움을 하소연해왔다.

“어렸을 적만 해도 사랑방이나 사당에 고서가 수북했습니다. 선고(先考: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한번 집을 나가면 일주일에서 열흘 씩 집을 비웠어요. 그때는 막말로 문 열고 책을 들고 가면 그만일 정도였습니다.”

자신이 대구에 나가 있는 동안은 가까운 친척에게 관리를 맡겼는데 그때도 유물이 많이 분실됐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연구를 하겠다며 책을 빌려간 뒤 일부를 훼손하고 돌려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또 분실했던 ‘성학십도’는 흘러흘러 영주 선비촌에 있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가 남아 있는 유물을 기탁하기로 결심한 배경이다.

유물을 기탁받은 국학진흥원은 국문학자들이 주장해온 <춘향전> 속 이몽룡이 실존인물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종손 성씨는 “조상이 이몽룡이라는 말을 어렸을 적부터 들었다”며 “다만 사랑타령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뭣해 말을 아꼈다”고 했다.

성이성의 생가인 봉화군 계서당은 요즘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서울 롯데관광은 일주일에 3일씩 이곳을 방문한다.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향이라는 테마다. 관광객들은 종손에게 “그럼 성도령이지 왜 이도령이 됐느냐”고 자주 질문한다. 종손은 우문현답을 한다. “성(姓)도 없는 천기(賤妓)의 딸에게 성씨(成氏)를 붙인 것은 신분철폐 같은 혁신적인 사상을 담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봉화군은 송이축제 때 이몽룡 행사를 하고 있다. 성이성의 묘가 있는 영주시는 계서초당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을 조성 중이다. 또 전북 남원시는 광한루와 함께 1962년 ‘성옥녀지묘’란 지석(誌石)이 발견된 주천면 호경리에 춘향묘를 조성해 놓았다. 비석에는 ‘萬古烈女成春香之墓(만고열녀성춘향지묘)’라 쓰여 있다.

201612호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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